슈독 : 나이키 창업자 필 나이트 자서전
필 나이트 지음, 안세민 옮김 / 사회평론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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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기가 막힌 책이다. 휴가 땐 원래 철저히 무용한 시간을 보내는데 <슈독>을 집어 든 게 실수였다. 읽는 게 느려 한 시간에 30페이지가 고작이고 그쯤 되면 지쳐서 계속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 책은 손에서 내려놓기가 무섭게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강한 갈증을 불러일으켰다. 지치지도 않고 꼬박 읽기를 며칠, 540페이지의 책을 순식간에 정복해 버렸다.


<슈독>은 나이키의 창업자 필 나이트의 자서전이다. 은퇴를 하고 스탠퍼드 소설 창작 과정을 수료한 뒤 직접 쓴 책인데, 대단한 필력에 구성까지 완벽하다. 태어나서 처음 써 본 책이라면 필 나이트는 진정 천재임이 틀림없다. 어딘가 고스트 라이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는 나이키가 원래 블루리본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오니츠카 타이거' 신발을 수입해서 파는 구멍가게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 강렬한 혜성 로고가 있었던 게 아니다! 고작 남의 신발을 수입해 팔던 회사가 이제는 오니츠카 따위, 발 밑에 서지도 못할 회사로 만들어버린 동력이 어디서 나온 걸까? 여기까지만 들어도 그 과정이 궁금해진다.


두 번째로 나이키의 창업 연도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64년. 적어도 한 150년은 인류의 신발을 독점해온 것처럼 보이는 회사치곤 상당히 젊은 기업이다. 12년 뒤엔 애플이 창업하는데 IPO 시기는 두 회사가 거의 비슷했다. 신발 제조업이라고 하면 엄청난 구세대 산업처럼 보이지만 실리콘밸리의 디지털 혁명과 거의 나란히 달린 최첨단 산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장 충격적인 건 바로 이 이야기다. 나이키가 창업을 하던 당시 운동화는 말 그대로 운동할 때만 신던 신발이었다. 그리고 운동은 운동선수들 만의 일에 불과했다. 당시는 취미로 조깅을 한다는 말이 대단히 기괴하게 들리던 시대였다.


"그때는 운동장이 아닌 곳에서 5,000미터를 달리는 것은 미친 사람들이 미친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중략)

때로는 달리기 선수를 흉내내기 위해 운동장 밖에서 달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 운전자들은 속도를 줄이고 경적을 울리며, "말이나 타세요"라고 외치고는 맥주나 청량음료를 던지기도 했다. 실제로 존슨은 펩시콜라를 여러 번 뒤집어썼다고 했다."(p.113)


상상이 되는가? 일주일 동안 운동화를 신는 날과 그렇지 않은 날을 세어보자. 데님이나 면바지, 슬랙스 심지어 정장에까지 맞춰 신는 게 오늘날의 운동화다. 운동화는 현대의 라이프 스타일을 완성하는 핵심이 되었다.


아버지에게 빌린 50달러로 자기 집 지하실에서 사업을 시작했다는 말이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 과정의 고단함이 뻔하게 그려질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결론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 책은 신기할 정도의 몰입감을 제공한다. 바로 그 현장에서 같이 사업을 하고 있는 듯한 생생함이 느껴진다. 요즘따라 매너리즘에 지치고 좀처럼 뭘 봐도 가슴이 뛰지 않는 사람이라면 좋은 자극이 될 수 있다. 이제 막 팀을 운영하게 된 조직 관리자나 창업을 하려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저 재미있는 책 한 권을 읽고 싶은 사람에게 최고의 선택이 될 것이다.


*p.s - 슈독은 신발 매니아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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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의 쓸모 - 불확실한 미래에서 보통 사람들도 답을 얻는 방법 쓸모 시리즈 1
닉 폴슨.제임스 스콧 지음, 노태복 옮김 / 더퀘스트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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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수학의 쓸모>라는 제목을 다는 순간 독자의 95%를 잃었다. 막상 읽어보면 수학 얘기는 거의 없다.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문외한이라도 아무런 문제 없이 즐길 수 있다. 위치는 서점 수학/과학 코너의 매대인데, 선명한 표지 디자인에 눈길을 뺏기면서도 그놈의 '수학' 때문에 애써 외면해 오길 수차례, 마침내 큰 결단을 내고 말았다.


<수학의 쓸모>는 AI가 도대체 뭔지 궁금한 사람들이 맨 처음 읽어볼 만한 입문 교양서다. AI가 확률을 기반으로 하기에 통계와 수학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진짜 쪼끔이다. 넷플릭스의 추천, 이상 거래 탐지 시스템, 자연어 처리, 자율 주행 등 사례를 중심으로, 특별한 전문 용어 없이 풀어내 이해하기도 쉽다. 기본적으로 글을 재미나게 잘 썼고 번역도 훌륭하다. 두꺼운 양장본 흉내를 내고 있지만 실상 내용은 350p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정신없이 빠져들어 순식간에 읽어치울 수 있다.


AI, AI 하도 떠들어대는 바람에 이런 책을 읽는 게 좀 촌스러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아예 멀리할 수도 없는 게 바로 이 AI다. 비단 관련 분야에 있지 않더라도 세상의 변화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도태되는 게 두렵기 때문이 아니라 예상치도 못했던 순간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우리의 인생을 폭파시키거나 하늘로 쏘아 올릴 위기와 기회를 포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이점을 한참 넘은 AI는 우리의 삶을 이차원으로 보낼 준비를 하고 있다. 마켓 컬리에 고당도 하우스 감귤 1.5kg을 주문하듯 보통 사람들도 AI를 활용해 혁신을 만드는 세계가 코 앞에 온 것이다. 아마 10년만 지나도 우리가 현재 최첨단이라 부르는 모든 것들이 고물상도 끌고 가지 않을 고대 유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모든 게 그렇게 쉬워진다면 굳이 뭔가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을까? 엘론 머스크는 뇌에 칩을 심어 기억을 디지털화하는 실험 중인데 성공만 한다면 배운 걸 잃어버릴 일도 없고 매트릭스처럼 헬리콥터 운전하는 법, 주짓수로 상대방 제압하기 등을 다운로드하면 그만 일 텐데 말이다. 하지만 뭔가를 잘하는 법을 아는 것과 실제로 잘하는 것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놓여 있다. 뿐만 아니라 모두가 양질의 결과물을 쉽게 낼 수 있는 세상이라면 결국 양질이라는 기준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변화할 텐데 그런 세상에선 도대체 무엇이 차이를 만들어내는지 고민해야 한다. 기계가 아무리 똑똑해져도 결국 똑똑한 사람은 여전히 필요할 것이다.


똑똑한 사람이란 뭘까? 뭔가를 잘 알거나, 시험 점수가 좋거나, 좋은 대학 또는 회사를 다니는 사람일까? 나는 '똑똑함'을 거듭된 실패를 통해 어떤 현상의 궁극 원리에 다가가는 '태도'라고 정의하고 싶다. 뭔가를 이해한다는 건 결국 원리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수많은 사고 실험과 직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얻어진다.


<수학의 쓸모>는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핵심 수학 개념과 거기서 파생된 기술들을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그런 기술을 탄생시킨 아이디어, 그리고 그걸 생각해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같이 풀어놓는다. 만들어질 당시엔 자신의 개념이 어떻게 현대를 창조할지 짐작조차 못했던 사람들. 그 생각의 과정을 쫓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나도 한번? 하는 용기와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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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크래프트 컨트리
맷 러프 지음, 소슬기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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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크래프트 컨트리>는 짐 크로 법이 남아있던 195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짐 크로 법은 1965년까지 시행됐던 미국의 주법으로 남부 지역의 모든 공공기관에서 인종 분리를 할 수 있게 해 준 법이었다. 1865년이 아니라 1965년이다. 미국은 이때 인간을 달에 보낸다는 상상을 넘어 그걸 현실화할 수 있는 자원과 지식을 가진 유일한 문명국이었다.


공포 소설을 좀 읽어본 사람이라면 H.P. 러브크래프트라는 작가를 들어봤을 것이다. 러브크래프트는 스티븐 킹을 비롯해 수많은 공포 소설 마니아를 신도로 거느린 그 바닥의 신이다. 미국 게임에서 흔히 등장하는 촉수 달린 마신의 배경 신화를(크툴루 신화) 창조한 것도 바로 이 사람이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해봤다면 느조스, 요그사론, 크툰, 이샤라즈라는 고대신을 잘 알 것이다. 이 신들이 바로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 신화를 배경으로 탄생했다.


그러나 러브크래프트는 심각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 다음은 그가 쓴 <깜둥이의 창조에 관하여>라는 글이다.


먼 옛날, 신들이 지구를 창조할 적에

제우스처럼 아름다운 형상으로 처음 인간을 빚었다.

그다음에는 역할이 덜 중요한 짐승을 만들었는데,

인간과 너무 동떨어져 있었다.

그 틈을 메꾸고, 인간과 나머지 피조물을 연결하고자,

올림포스 거주자들은 기발한 계획을 구상했다.

인간에 준하는 형상으로 짐승을 빚어

그 안을 악덕으로 채우고는 깜둥이라 칭했다.


<러브크래프트 컨트리>는 러브크래프트가 쓴 소설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수많은 신도 중 하나가 써낸 오마주인가?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을 늘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형태로 읽고 싶었던 내게 이 소설은 괜찮은 선택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책장을 연 순간 러브크래프트 월드를 넘어선 뭔가가 이 소설에 담겨 있음을 알게 된다. 고대 주술, 비밀스러운 종교, 마법, 저주 기타 등등. 작가는 러브크래프트스러운 오컬트를 켜켜이 쌓은 생크림 위에 검은 딸기 하나를 올려놓는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흑인이다.


그러니까 <러브크래프트 컨트리>는 가장 러브크래프트스러운 이야기를 가장 러브크래프트답지 않게 그리는 신비한 소설이다. 짐 크로 법이 흉흉한 눈을 빛내며 살아있던 시대에 검은 피부의 주인공이 나타나 고대 주술에 통달한 백인 갑부를 물리치는 이야기라니. 사상 최악의 인종차별자 소설가에게 내리는 복수로 이보다 더 우아한 걸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러브크래프트 컨트리>는 한국전 참전 용사 애티커스와 그들의 가족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연작 소설이다. 애티커스는 고대 새벽 수도회라는 비밀 종교의 수장이 부리던 한 흑인 노예의 자손인데, 짐작했겠지만 그 뿌리가 백인 주인에게 닿아 있다. 고대 주술을 완성시키기 위해 수장의 혈통이 필요했던 백인이 애티커스에게 마수를 뻗침으로 이 가족의 험난한 모험이 시작된다.


마법과 주술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근원과 원리 등을 상세하게 기술하는 소설은 아니다. 소재는 딱 분위기를 만들어낼 만큼만 적당히 사용된다. 이런 쪽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환상이 현실의 경계를 침범하는 걸 견딜 수 없는 사람이라면 강도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이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것이다.


주 경계를 넘어 여행하는 건 차치하고 자기가 사는 지역을 벗어나는 것조차 쉽지 않던 시절에 펼쳐지는 흑인의 모험담은 신비주의와 어울려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실제적 비현실과 가공의 비현실이 나무뿌리처럼 얽혀있는 세계. <러브크래프트 컨트리>는 까다롭지 않고, 훈계하지 않으면서도 밝혀야 할 문제를 드러내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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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빈곤 - 개정판
헨리 죠지 지음, 김윤상 옮김 / 비봉출판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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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조지가 <진보와 빈곤>을 쓸 당시의 세상은 부의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였다. 제임스 와트와 토마스 에디슨. 증기 또는 전기와 결합한 기계의 도입은 노동의 효율성을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사람들의 마음이 웅장 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태풍 같은 생산력 앞에 빈곤은 곧 꺼져버릴 등불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기대가 한낱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체험하고 있다. AI를 필두로 생산성의 한계가 사실상 사라질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에도 오히려 빈곤은 더 심해졌기 때문이다.


<진보와 빈곤>의 탁월한 점은 낮은 임금에 대한 문제를 자본과 노동의 대결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임금이 "자본이 아니라 노동의 직접 생산물에서 나온다"(p.169)고 말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사장님의 지갑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면 우리의 월급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우리가 한 달 동안 열심히 일해 삽 한 자루를 만들었다고 하자. 그리고 사장님이 당신에게 오천 원의 임금을 지급했다. 이때 사장님은 우리의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로 돈을 준 것인가? 아니다. 우리가 만든 삽 한 자루를 오천 원에 사간 것이다!


스타트업에 투자되는 막대한 자본은 언뜻 이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초기 기업이라고 해서 생산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아직 상품화되지 못한 소스코드, 건조 중인 배, 자라고 있는 수박 기타 등등. 월급은 완성품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변화량의 구매 대금으로 볼 수 있다. 이제 막 꾸려진 회사, 말 그대로 직원과 아이디어밖에 없는 회사라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투입되는 엔젤 머니는 이 팀과 아이디어를 구매한 대가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 이제 돈을 가진 사장님이 하해와 같은 아량을 가져 실패할지도 모를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는 게(선금 지급)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사장님은 우리의 '직접 생산물'을 싼 값에 가져가려는 유혹을 버리기가 힘들다. 이는 단순히 사장님이 탐욕을 부려서가 아니다. 사장님의 주장은 매입과 매출의 차이를 정교하게 계산한 값에 근거한다. <진보와 빈곤>은 바로 이 순간 우리가 진짜 눈여겨봐야 할 공동의 적이 누구인지를 가리킨다.


"생산력의 향상에도 불구하고 임금이 최저액에 머무는 이유는, 생산력 향상과 더불어 지대가 더 큰 비율로 상승함으로써 임금이 낮게 유지되기 때문이다."(p.291)


문제는 땅이다.


"토지를 공동소유로 해야 한다."(p.335)


토지 재산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누가 나서서 그 땅을 개발하겠는가? 하지만 이는 토지와 토지를 이용해 만들어낸 생산물을 구분하지 않는 관습이 초래한 착각에 불과하다. 쉽게 말해 땅은 모두가 갖되 그 위에 지어진 건물은 개인이 가지라는 말이다. 건물주는 멋진 빌딩을 지어 월세를 받고 정부에 토지 사용의 대가를 지불한다. 헨리 조지는 토지에 대한 막대한 조세 수입으로 정부가 다른 직간접세를 폐지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건 우리의 소득이 더더욱 늘어난다는 말이고, 늘어난 소득이 소비로 이어져 경제는 뜨겁게 타오를 것이다.


물론 여러 반박과 이견이 있을 것이다. 공시지가를 올리는 것만으로 정권이 바뀔 수도 있는 '민주 사회'의 특성에 비추어 볼 때 지난 수백 년간 이어져온 기득권의 소유권을 단박에 무효화한다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싶다. 토지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룬 나라들도 대부분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넘어가는 대혁명이나 주권 독립 같은 천지개벽을 틈타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설령 토지 공유화에 성공하더라도 그 토지를 관리할 행정력이 충분한가도 의문이다. 건물주가 실제로 얼마의 월세 수입을 올리는지, 그들이 세입자들과 이면 계약을 하는 건 아닌지, 정말로 객관적인 토지 가치의 평가가 가능은 한 건지 기타 등등. 저자는 다른 직간접세를 제거하고 오로지 이 분야에만 행정력을 집중하면 가능한 일이라고 말하지만 대한민국처럼 조그만 땅에서조차 꾼들이 저지르는 부동산 투기를 근절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이를 AI가 해결할 수 있을까? 제발 그렇게 되기를)


하지만 토지 재산권에 근거가 없다는 주장만큼은 크게 공감이 된다. 지구는 우리의 것이다. 그 누구도 자연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는 없다. 이는 윤리적일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지금 대한민국에 땅을 가진 사람들은 과연 누구에게 그 권리를 이양받은 걸까? 조선으로부터 국토를 물려받는 대한민국인가? 그렇다면 조선은 누구에게 땅을 이어받았는가? 태조는 공양왕(고려의 마지막 왕)과 양도 계약을 맺고 한반도를 차지한 것인가? 태조가 고려의 땅을 무력으로 빼앗아 조선을 세웠다면 지금 우리가 무력으로 다른 사람의 토지를 빼앗을 때 그 권리를 인정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어디 있는가? 끝까지 따지고 들면 우리는 명백한 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땅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는 것이다.


<진보와 빈곤>은 내용이 어려운 데다 번역도 친절한 편이 아니고 무려 570페이지에 달하는 책이라 쉽게 펼치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 주장이 세상 어떤 사상가와도 결을 달리한다는 점에서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다. 헨리 조지는 19세기 사람이지만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삶이 그때와 별반 다를 거 없다는 거, 아니 오히려 더 악화됐다는 건 우리의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이 같은 주장은 동일 국가 내에선 별문제 없이 받아들일 수 있더라도 국가 대 국가의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좀 더 깊이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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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3-07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지의 공유개념은 오래된 개념인데 이렇게 보니 또 새롭네요. 실현여부는 의문이 많이 들지만.... 하지만 실현과 상관없이 이런 생각을 점점 퍼뜨러가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깨짱 2021-03-09 13:48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모든 혁명은 생각에서 출발하는 것이니까요. 맘 먹고 하면 또 못할 것도 없는 일입니다. 모두가 한 마음만 먹는다면요.
 
야간 경비원의 일기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0
정지돈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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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돈의 소설들은 좀 긴 잡담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문득문득 위트와 유머가 번뜩이고, 어려운 내용은 하나도 없다. 특기할만한 서사가 없기에 소개하기도 좀 애매한데,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야간 경비원들이 몇 명 등장하고 그중 하나가 쓰는 일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사람들은 서사가 파괴된 실험적 소설을 읽고 나면 대개 아래와 같은 반응을 보인다.


1. 이게 소설이야?

2. 내가 모르는 뭔가가 숨겨져 있는 게 분명해

3. 음... 그렇군


1에 속하는 사람들은 다시 두 부류로 나뉜다.


1.1 책을 거의 읽지 않는 사람

1.2 정말 대단히, 순수하게, 진심으로 스트레이트한 성격을 가진 사람


이들은 블랙 유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풍자나 해학, 한두 번 꼬인 시니컬한 표현에 뚱한 표정을 짓는다. 쉽게 말해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고 우리 세계는 대부분 이런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오늘도 정상 궤도를 질주한다. 스트레이트 하게, 나는 이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산다.


2에 속하는 사람들은 책 읽기에 열심히고 거기서부터 뭔가를 배우려는 사람들이다. 활자가 인쇄된 종이 무더기에 무의식적으로 권위를 부여하며 마음이 무언가에 대한 열정과 사랑으로 늘 뜨겁게 달아오른다. 그냥 먹고 끝내면 될 일인 평양냉면을 그 유래부터 진지하게 설명하거나 <테넷> 같은 영화에서 우리가 몰랐던 소름 돋는 복선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끈덕지게 늘어놓는 사람들이다. 음모론에 쉽게 빠지거나 간혹 앤디 워홀 같은 사람을 예술가로 만드는 실수를 저지르긴 하지만 대체로 마음이 순수하고 착한 사람들이다. 이들을 친근하게 '오덕'이라 부르기도 한다.


3에 속하는 사람들은 권위와 정돈된 이론에 태생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이다. 세상에 대해선 시니컬한 태도를 보이지만 그래도 사고는 꽤 열려있는 편이다. 이들에게 설명을 요구하면 '음... 뭐 그냥 그런 거지' 라거나 '네가 본 대로 이해하면 돼' 같은 하나마나한 대답을 한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다시 아래와 같이 분류할 수 있다.


3.1 설명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게 진정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사람

3.2 자기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


나는 한때 2에 속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내게 문학을 이해하는 능력이 전무하다는 것을 깨닫고 더 이상의 해석을 포기한 채 그냥 3-2처럼 살기로 했다. '살기로 했다'라고 말하면 마치 내가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무능력에 의한 것이니 그냥 3-2가 '되었다'라고 말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도 당신이 기대하며 찾았을 '정지돈 <야간 경비원의 일기> 해석' 같은 건 단 한 줄도 쓰지 못한 채 쓸데없는 얘기만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것이 문학적으로 어떤 실험을 하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정지돈의 소설들이 꽤 재밌다. 고르라면 장편보다는 단편인데, 처음 읽은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워낙에 재밌게 읽은 탓도 있고 잡담과 농담은 늘 길이와 재미가 반비례한다는 지론을 갖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지론은 개인적 취향이 반영된 것이긴 하지만 상당한 경험의 축적으로 귀납된 판단이라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한다.


자, 요약하면 2나 3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면 <야간 경비원의 일기>에서 무리 없이 재미를 느낄 것이다. 본인이 1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것도 경험이지, 도전! 하는 괜한 의욕은 접고 쿨하게 건너뛰기를 추천한다. 세상엔 읽어야 할 게 차고도 넘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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