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의 방정식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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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미야베 미유키다. 130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별 볼 일 없는 이야기를 알차게 눌러 담았다. 음, 이런 이야기를 써볼까? 하며 기지개를 한 번 켜고 쓱쓱 내려간 지 두 시간 만에 한 권이 뚝딱 나온 것 같은 기분이다. 대화가가 쓱쓱 그려낸 일러스트 같달까?


사실 이 책이 엄청난 미스테리를 다루는 건 아니다. 살인범이 나오지 않고 당연히 살인도 일어나지 않는다. 학교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그 흔한 이지메나 자살을 다루지도 않는다. <음의 방정식>은 미야베 미유키가 다시 한 번 그리는 '위증'에 대한 소설이다.


시작은 도쿄의 어느 사립 학교, 중학교 3학년 교실이다. 그들은 동일본 대지진 후 학교에서 중3을 대상으로 시작한 '피난소 생활 체험 캠프'에 참석 중이었다. 체험 내용은 단순하다. 대규모 자연 재해가 발생했을 때의 피난소를 가정해 교실에서 침낭을 깔고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다. 사건은 D반의 남학생 일곱 명이 모여 있는 3층 교실에 그 반의 담임인 히노 다케시가 들이 닥치며 시작된다.


히노 다케시는 다소 딱딱한 면은 있지만 자신이 지도하는 동아리를 전국 대회에 입상시키는 등 열정적인 교사로 알려져 있다.  거침없는 열정엔 언제나 반대 급부가 따르는 법이라 그것을 불쾌해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한편엔 그것을 상쇄하고 남을 만큼의 골수 지지자들이 존재한다. 이 히노 다케시가 소등 후 밤 열한 시 쯤 D반 남학생이 모여 있는 교실로 순찰을 왔다. 일곱 명 모두 아직 잠은 자지 않았고 각자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거나 음악을 듣거나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선생이 말했다.


어차피 이 시간에 잘리는 없을테니 과제를 하나 내겠다. 실제로 재해가 일어나면 피난소는 이렇게 태평하지 않아. 물자는 부족하고 시간이 갈수록 악화되지. 그러니까 이렇게 가정해보자. 너희는 완전히 고립됐고 보급은 끊어졌다. 구조는 언제 올지 몰라. 일곱명 모두가 살아남을 수는 없다. 최소한 한 명은 희생되어야 해. 자, 너희는 누구를 선택하겠나? 농담이 아니야. 진지하게 생각해 봐라. 살아남을 여섯과 죽어줄 한 명을 결정하는 거지. 제한 시간은 한 시간.


그러나 이 도전적 질문은 끝내 답을 듣지 못한 채 마무리 된다. 남학생 하나가 한 밤중에 교실을 뛰쳐나가 집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사정이 밝혀지자 학교 측이 새파랗게 질렸다. 히노 선생의 언동은 농담이라고 하기엔 도가 지나쳤고 진지한 의도였다면 더더욱 나빴다. 감수성이 풍부한 중3 아이들에게 누구를 죽이고 누구를 살릴 것인지 묻다니. 아이들은 과연 누구를 죽어 마땅한 아이로 지목했을까? 성적이 나쁜 아이? 뚱뚱한 아이? 아니면 평소에 따돌림을 당하던 아이? 교실을 뛰쳐나간 그 아이에겐 분명 한 밤의 토론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야기는 히노 다케시가 떠나고 난 뒤의 D반 교실을 조명할 수도 있었지만 작가는 그 끝을 쭉 잡아 당겨 새로운 지점에 이어 붙인다.


히노 다케시 선생이 남학생들이 밝힌 일련의 사태를 모조리 부인한 것이다.


이제 이야기는 양쪽의 주장에 코를 바싹 댄 채 위증의 냄새를 맡아 나간다. 누가 거짓말을 하는 걸까? 인기가 많지만 그만큼 적도 많은 히노 선생일까? 아니면 순진한 중학생들일까? 히노 선생은 그 일로 학교에서 쫓겨난다. 과연 중학생들이 완전한 거짓말을 공모하여 자신의 담임 선생을 궁지로 모는 게 가능한 일일까? 히노 다케시의 변호를 맡은 후지노가 말한다.


의지가 강한 리더와 공통된 목적이 있다면 어른들이 기겁할 만한 일도 거뜬히 해치우는 게 그 또래 아이들이에요. 중학교 3학년이라고 절대 만만하게 봐선 안돼요(p. 31).


책장을 덮은 뒤 한 걸음 떨어져 생각해 보면 뭐 별 일도 아닌 얘기를 진지하게 잘도 써놨네 라는 생각이 들지만 막상 읽는 동안에는 이런 점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사건의 진상을 듣고 싶은 마음에 온전히 책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도대체 얼마나 글을 써야 이 정도 경지에 오르는 걸까? 역시 미야베 미유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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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카트 멘쉬크 그림 / 문학사상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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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나'는 평범한 주부다. 꽤 잘나가는 치과 의사 남편과 예쁜 아들이 있다. 아침에 둘을 보내고 나면 폐차 직전의 오래된 차를 끌고 나가 쇼핑을 하기도, 수영을 하기도 한다. 삶은 평화롭다 못해 단조롭다. 그런데 어느날 그 평화와 단조로움 속에서 뭔가가 아지랑이처럼 피어 오르는 걸 발견한다.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안과 공포를 자아내는 성가신 움직임. 그 움직임을 자각한 순간 문득 한 의문이 찾아든다. 나는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고 있었던 걸까? 내가 삶을 이끌어 나가는 게 아니라 어쩐지 삶에 내가 끼워 맞춰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커지는 불안과 공포. 그렇게 불면의 밤이 시작된다.


'나'는 십칠일 째 잠에 들지 못한다. 불면이라고는 하지만 고통스러운 건 아니었다.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고 더 생산적이 된 것이다. 일상에 묻혀 새카맣게 썩어가던 자아를 마주한 이후 그녀의 마음 속엔 두 번 다시 감지 않을 어떤 눈이 번뜩 떠졌다. 쉴새 없이 정신으로 쏟아지는 자각의 향연. 이제 나는 평화롭기만 한줄 알았던 일상에 숨은 오물들을 발견해 나간다. 이런 상황을 알지도 못한 채 남편은 고요히 잠들어 있다. 성실과 선함이 가면을 벗고 무심함을 드러낸다. 일어나 아들의 방에 들어간다. 사랑하는 내 아이에게서 미지의 불쾌함이 뿜어져 나온다. '나'는 가만히 서서 그 불쾌함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본다. 그것은 남편과 아이를 이어주는 저주 받은 피의 흔적이다. 아들과 남편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서로 닮아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정녕 내가 사랑하고 지켜온 것들인가. 나는 이제 무엇과 함께,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나는 결코 잠에 들 수 없다. 잠들지 못하는 게 아니라.


하루키가 이 소설을 쓴 건 1989년 봄의 일이었다. 당시 그는 <노르웨이의 숲>과 <댄스 댄스 댄스>라는 두 편의 장편 소설이 유례없이 큰 성공을 거둬 전업 작가로 뛰어든 상태였다. 하루 종일 위스키 바를 운영한 뒤 밤늦게 부엌에 앉아 소설을 쓰던 때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 은행 잔고엔 터질듯이 많은 0이 새겨져 있다. 세상은 하루키 신드롬에 빠져 있다.


그러나 이 지나칠 정도로 많은 부와 영광이 작가로서의 하루키가 가져왔던 타이트한 긴장을 느슨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취미로 소설을 쓰던 시절과는 다르게 이래저래 신경 쓸 일이 많아졌다. 커지는 인기와 더불어 쓴소리도 늘어난다. 저주에 가까운 평을 듣다보면 아무리 신경 쓰지 않으려해도 뒷골이 땡기고 심장이 두근거린다. 똑같은 저주를 퍼붓지 않고는 온 몸이 찢어져 죽어버릴 것만 같다. 시간이 흘러 분노와 흥분은 가라앉지만 마음 속엔 지워지지 않는 찌꺼기가 남게 된다. 이상한 회의와 불안도 찾아온다. 내 성공은 과연 나에게 합당한 것인가. 작가로서의 미래, 개인으로서의 내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계속 소설을 쓸 수 있을까? 세상은 변함없이 똑같이 서 있는데 어쩐지 나만이 전혀 다른 세상에 내쳐져 홀로 걷는 것 같다. 


하루키는 <잠>을 썼을 때의 일을 똑똑히 기억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소설을 쓰지 못했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도무지 소설을 쓸 마음이 나지 않았다." 작가로서, 개인으로서 힘든 일이 연달아 일어났고 큰 성공을 거뒀음에도 마음이 딱딱하게 얼어붙어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잠>의 '나'가 불면의 밤을 보내듯 하루키도 침묵의 날을 보낸다. 소설을 쓰지 못하는 소설가.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낸 하루키는 어느 따뜻한 봄날, 창 밖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마치 토해내듯,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잠>에는 그러한 작가의 심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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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 트랙 발란데르 시리즈
헨닝 망켈 지음, 김현우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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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장르 소설에 대한 편견이 가득한 내가 또 한 번 장르 소설을 들었다. 8페이지 남짓한 프롤로그를 다 읽었을 때 이 책을 끝까지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한 장르 소설과는 달랐다. 작가는 확실히 자신의 문장을 갖고 있었다. 읆조리듯 흐르는 나지막한 글들.


- <사이드 트랙>은 스웨덴 산이다. 강력 범죄가 발생하고 형사가 등장한다. 그런 탓에 노르딕 누아르라 불리지만 다 읽고나면 사회파 소설이라는 간판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 우리가 흔히 천국이라 생각하는 스웨덴에서 끔찍한 연쇄 살인이 벌어진다. 등장인물들 조차 여기는 "미국이 아니잖아요."라고 외칠 정도. 미국이 아닌 스웨덴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작가 헨닝 망켈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이 다루고 있는 90년대 중반의 스웨덴은 복지 국가의 명성이 서서히 꺽이고 있는 시점에 그 동안 잠잠했던 정신적 가난이 표면으로 부상하고 있는 사회였다. 작가는 천국의 베일을 들고 그 밑에 고인 썩은 물을 퍼 올린다.


- 스웨덴이 천국이라는 믿음은 스웨덴 사람보다도 다른 나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 더 깊이 새겨져 있는 것 같다. 살아보지도 않았으면서.


- 범죄 소설 치고는 꽤 지루한 편이다. 사건은 숨가쁘게 흐르는 것 같은데 요상하리 만치 긴장감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고보니 같은 나라에서 온 <렛 미 인>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뱀파이어가 나오고, 사람이 죽어가는데도 도통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복지 국가의 풍요를 누려온 탓에 생긴 특유의 나른함일까? 다행인 건 이 둘 모두 영화 <렛 미 인> 보다는 덜 지루하다는 것이다.


- 스웨덴 영화 얘기가 나왔으니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이 영화도 딱히 역동적이진 않지만 미스테리와 서스펜스가 절묘하게 섞여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을 형성한다. 얼음 같은 스릴러. 그야말로 메이드 인 스웨덴. 하지만 선택은 데이빗 핀처의 <밀레니엄>.


- 메이드 인 스웨덴이든 필름 바이 데이빗 핀처든 여자가 나오고 밧줄에 묶이고 감금 당하고 폭행 당하고 살해 당한다. <사이드 트랙>도 마찬가지다. 스웨덴의 정신적 가난이란 뒤틀린 성적 욕망을 말하는 걸까?


- 정신적 가난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것은 물질적 풍요가 낳은 부작용일까 아니면 충분히 지속되지 못한 풍요의 결핍 때문일까?


- 풍요 --> 지루함 --> 자극에 대한 욕 --> 어둠 속에서 벌어지는 성범죄


- 부의 불평등 --> 먹고 살기의 어려움 --> 범죄에 노출 --> 범죄 조직의 증가 --> 수요와 공급의 시너지 --> 악순환


- ???


- <사이드 트랙>은 발란데르 시리즈의 다섯 번 째 작품이다. 발란데르는 형사다. 소설의 주인공이다. 딱히 개성은 보이지 않는다.


- 영화로 만들었으면 더 재밌었을지 모르겠다. 분위기는 딱 데이빗 핀천데, 발란데르 역을 할 배우가 즉각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데이빗 핀처의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중 딸을 가진 남자를 본 적이 없다. 그들은 늘 고독과 외로움의 외투를 두르고 누런 등이 밝히는 잿빛 하늘 아래로 걸어나간다. 여자는 있지만 딸은 없다. 여자가 있는 남자와 딸이 있는 남자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 이 책을 읽어야 합니까?


- 나쁘지 않습니다.


- 이 책을 사야 합니까?


- 두 질문은 같은 것 같지만 완전히 다릅니다.


- 그래서 대답은?


- 노코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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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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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지인이 영화 <고백>을 보라고 했을 때 시큰둥하게 넘어갔다. 일본 배우 특유의 오버 액션이 싫었고, 수작이라 불리는 같은 감독의 연출작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이 너무 우울했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격려와 위로도 없이, 단 한 줌 남은 희망에까지 조롱을 날리는 악취미. 나는 그 비아냥이 끔찍이도 싫었다.


그리고 <고백>을 봤다. 생각을 고쳐 먹을 수 밖에.


영화를 보고 곧장 원작을 찾아 읽었다. 영화와 원작의 장단점은 너무 명확하다. 서로 보완 관계를 이룬다. <고백>을 읽으려는 사람들에겐 영화를 볼 것을, <고백>을 보려는 사람들에겐 책을 읽을 것을 추천한다. 시너지가 대단하다.


영화의 장점은 다소 지루한 장면들을 세련된 연출로 커버한다는 점이다. <고백>은 대사가 많다. 그 보다 더 많은 독백이 존재한다. 이걸 묵묵히 문장으로 읽어나가는 것과 연출이 가미된 장면으로 흘려보내는 것 사이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영화는 쉴 새 없이 흐르고,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영화는 확실히 원작을 능가한다.


디테일은 책의 힘이다. 영화는 카메라의 존재로 인해 특정 이야기나 감정에 주목을 요구할 수 있다. 영화는 지금 이 시점에 가장 중요한, 관객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을 렌즈 안에 콕콕 집어 담아낸다. 숟가락으로 떠서 입 안에 넣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선택은 반드시 배제를 낳게 된다. 무엇을 택할 것이냐는 질문은 곧 무엇을 배제할 것이냐는 질문과 같다. 그래서 소설은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섞인 총체적 정경을 제시하지만 영화는 의도된, 단 하나의 장면만을 보여준다.


감독 나카시마 테츠야가 원작을 디코드 해나가는 작업을 지켜보는 건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책은 성직자, 순교자, 자애자, 구도자, 신봉자, 전도자 총 6개의 장으로 이뤄져 있다. 각각을 하나의 단편으로 엮어도 될 만큼 완성도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점 때문에 흐름이 끊기는 감이 없지는 않다. 각 장이 품은 긴장의 강도가 서로 다르다는 점이 지루함을 낳기도 한다. 영화는 순교자, 자애자, 구도자, 신봉자를 하나로 묶고 앞 뒤로 성직자, 전도자를 배치했다. 앞 뒤의 순서는 원작과 같지만 중간은 서로 교차되며 엉켜 있다. 이 교차와 엉킴이 연출의 핵심이다. 탁월하다는 말 밖엔 할 말이 없다.


<고백>은 첫 장에서 사건의 결과와 경위가 모두 고백되어지기 때문에 이후의 이야기들이 하나 씩 퍼즐을 이뤄나가며 비밀을 찾아가는 미스테리 장르가 아니다. 이 책은 복수극이다. 살인을 저지르고 유유히 숲을 걷는 범죄자를 처단하기 위해 사냥꾼이 등장한다. 지금까지는 그저 멍청이인줄만 알았던 담임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종업식 날 살인자들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범인을 쫓는 사냥개를 푼다. 개는 맹렬히 달려 한 명의 목을 물어 뜯지만 다른 한 명에겐 도리어 무참히 살해되고 만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흘린 피가 살인자의 몸을 흠뻑 적신다. 해는 지고 숲은 어둠으로 가득하다. 갈 길은 아직 먼데, 피비린내를 잔뜩 풍기는 살인자는 과연 굶주린 괴물들을 피해 숲을 벗어날 수 있을까?


이 책은 철저한 복수극이다. 그 완벽함 때문에 오히려 구성이 흔들리는 감이 있지만 복수의 짜릿한 쾌감을 거부하고 싶지는 않다. 때로는 악인보다, 그 악인을 심판하려는 선인의 복수가 더 악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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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 전에, 더불어 사는 법을 가르쳐라
이기동 지음, 이원진 엮음 / 걷는나무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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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교육은 정말 어렵다. 인생에서 아이인 시절은 딱 한 번 밖에 없는데 커서의 모든 자질이 아이일 때 결정되기 때문이다. 유아기의 잘못된 교육은 100년을 지고 갈 낙인이 된다.


이렇게 중요한데도 유아 교육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특히 한국의 경우 교육은 곧 성적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 그 무지로 인한 폐해가 더더욱 심하다. 아이 교육 어떻게 시켜야 할까요? 라는 질문엔 한글은 몇 살, 영어는 몇 살, 수학은 어디에서, 라는 질문이 내포되어 있다.


왜곡된 교육관이 사회에 팽배한 경우 우리는 두 가지 해악을 덤으로 받게 된다.


첫째, 대안 찾기의 어려움이다. 일부 부모가 성적보다 인성을 중시하고 교과 과정보다 체험, 독서, 글짓기, 토론 등을 이용한 소양 교육을 실천한다 하더라도 시험 성적이 나오지 않아선 지속하기가 어렵다. 줄 세우기와 타이틀 만들기에 능한 사회는 필연적으로 소양을 알아보고 깊이를 탐지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그런 사회의 엘리트들은 아인슈타인 조차 수학 능력이 떨어지는 지진아로 구분할 것이다. 외눈박이 마을에선 두 눈을 뜬 자가 오히려 병신이니까.


둘째, 유전 현상이다. 전 세대 부모의 교육 방식은 다음 세대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이어진다. 어렸을 땐 분명 부모의 극성과 잔소리를 끔찍하게 여겼을 사람들이 커서는 자기 자식에게 똑같은 교육 방식을 강요한다는 것이 이 비극의 아이러니다. 주산을 강요당했던 아이가 신개념 수학 풀이법을 받고 빽빽이를 했던 아이가 뇌새김으로 강제될 뿐 그 본질은 변하지 않고 수 세대를 이어간다. 대안의 부재와 유전은 서로 시너지를 발휘하며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한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이런 문제들을 모르지 않다는 것이다. 다 아는 얘기. 뻔한 얘기. 그래서 참교육을 전하는 말들은 대체로 공허하게 들리기 마련이다. 좋은 말은 좋은 말일 뿐 현실에선 뿌리를 내리기 힘들다. 설령 참교육을 실천하리라 굳게 다짐한 경우라도 더 큰 문제가 남아있다. 자식 교육과 관련된 모든 일들은 자식의 자질보다는 부모의 자질에 달려 있다. 그러나 부모는 이미 잘못된 교육 환경의 피해자일 가능성이 크다. 다 자란 어른이 몸에 박힌 말과 행동, 태도, 사고 방식을 교정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예컨대 아이에게 책 읽는 습관을 가르친다고 해보자. 가장 좋은 방법은 스마트폰과 TV를 끄고 부모가 직접 책을 읽는 것이다. 아이보다는 부모의 인내심이 먼저 바닥나지 않을까?


교육에 관한 책이 호응을 얻기 위해선 선언보다는 구체적 행동지침이 많아야 한다. 더불어 사는 아이를 기르세요, 더불어 살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대신 부모의 어떤 말과 행동이 아이에게 함께 사는 삶의 중요성을 새길 수 있는지 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 담긴 지침들은, 결코 풍부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름 구색은 갖추고 있다. 보나마나 뻔한 얘기지, 라고 치부하기엔 새롭게 알게 되는 내용들이 종종 나온다. 이런 내용을 읽다보면 사소한 말 한마디, 나도 모르게 지은 무심한 표정 하나가 아이의 성격과 행동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그래서 아이를 기른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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