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 트랙 발란데르 시리즈
헨닝 망켈 지음, 김현우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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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장르 소설에 대한 편견이 가득한 내가 또 한 번 장르 소설을 들었다. 8페이지 남짓한 프롤로그를 다 읽었을 때 이 책을 끝까지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한 장르 소설과는 달랐다. 작가는 확실히 자신의 문장을 갖고 있었다. 읆조리듯 흐르는 나지막한 글들.


- <사이드 트랙>은 스웨덴 산이다. 강력 범죄가 발생하고 형사가 등장한다. 그런 탓에 노르딕 누아르라 불리지만 다 읽고나면 사회파 소설이라는 간판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 우리가 흔히 천국이라 생각하는 스웨덴에서 끔찍한 연쇄 살인이 벌어진다. 등장인물들 조차 여기는 "미국이 아니잖아요."라고 외칠 정도. 미국이 아닌 스웨덴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작가 헨닝 망켈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이 다루고 있는 90년대 중반의 스웨덴은 복지 국가의 명성이 서서히 꺽이고 있는 시점에 그 동안 잠잠했던 정신적 가난이 표면으로 부상하고 있는 사회였다. 작가는 천국의 베일을 들고 그 밑에 고인 썩은 물을 퍼 올린다.


- 스웨덴이 천국이라는 믿음은 스웨덴 사람보다도 다른 나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 더 깊이 새겨져 있는 것 같다. 살아보지도 않았으면서.


- 범죄 소설 치고는 꽤 지루한 편이다. 사건은 숨가쁘게 흐르는 것 같은데 요상하리 만치 긴장감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고보니 같은 나라에서 온 <렛 미 인>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뱀파이어가 나오고, 사람이 죽어가는데도 도통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복지 국가의 풍요를 누려온 탓에 생긴 특유의 나른함일까? 다행인 건 이 둘 모두 영화 <렛 미 인> 보다는 덜 지루하다는 것이다.


- 스웨덴 영화 얘기가 나왔으니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이 영화도 딱히 역동적이진 않지만 미스테리와 서스펜스가 절묘하게 섞여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을 형성한다. 얼음 같은 스릴러. 그야말로 메이드 인 스웨덴. 하지만 선택은 데이빗 핀처의 <밀레니엄>.


- 메이드 인 스웨덴이든 필름 바이 데이빗 핀처든 여자가 나오고 밧줄에 묶이고 감금 당하고 폭행 당하고 살해 당한다. <사이드 트랙>도 마찬가지다. 스웨덴의 정신적 가난이란 뒤틀린 성적 욕망을 말하는 걸까?


- 정신적 가난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것은 물질적 풍요가 낳은 부작용일까 아니면 충분히 지속되지 못한 풍요의 결핍 때문일까?


- 풍요 --> 지루함 --> 자극에 대한 욕 --> 어둠 속에서 벌어지는 성범죄


- 부의 불평등 --> 먹고 살기의 어려움 --> 범죄에 노출 --> 범죄 조직의 증가 --> 수요와 공급의 시너지 --> 악순환


- ???


- <사이드 트랙>은 발란데르 시리즈의 다섯 번 째 작품이다. 발란데르는 형사다. 소설의 주인공이다. 딱히 개성은 보이지 않는다.


- 영화로 만들었으면 더 재밌었을지 모르겠다. 분위기는 딱 데이빗 핀천데, 발란데르 역을 할 배우가 즉각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데이빗 핀처의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중 딸을 가진 남자를 본 적이 없다. 그들은 늘 고독과 외로움의 외투를 두르고 누런 등이 밝히는 잿빛 하늘 아래로 걸어나간다. 여자는 있지만 딸은 없다. 여자가 있는 남자와 딸이 있는 남자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 이 책을 읽어야 합니까?


- 나쁘지 않습니다.


- 이 책을 사야 합니까?


- 두 질문은 같은 것 같지만 완전히 다릅니다.


- 그래서 대답은?


- 노코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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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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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지인이 영화 <고백>을 보라고 했을 때 시큰둥하게 넘어갔다. 일본 배우 특유의 오버 액션이 싫었고, 수작이라 불리는 같은 감독의 연출작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이 너무 우울했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격려와 위로도 없이, 단 한 줌 남은 희망에까지 조롱을 날리는 악취미. 나는 그 비아냥이 끔찍이도 싫었다.


그리고 <고백>을 봤다. 생각을 고쳐 먹을 수 밖에.


영화를 보고 곧장 원작을 찾아 읽었다. 영화와 원작의 장단점은 너무 명확하다. 서로 보완 관계를 이룬다. <고백>을 읽으려는 사람들에겐 영화를 볼 것을, <고백>을 보려는 사람들에겐 책을 읽을 것을 추천한다. 시너지가 대단하다.


영화의 장점은 다소 지루한 장면들을 세련된 연출로 커버한다는 점이다. <고백>은 대사가 많다. 그 보다 더 많은 독백이 존재한다. 이걸 묵묵히 문장으로 읽어나가는 것과 연출이 가미된 장면으로 흘려보내는 것 사이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영화는 쉴 새 없이 흐르고,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영화는 확실히 원작을 능가한다.


디테일은 책의 힘이다. 영화는 카메라의 존재로 인해 특정 이야기나 감정에 주목을 요구할 수 있다. 영화는 지금 이 시점에 가장 중요한, 관객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을 렌즈 안에 콕콕 집어 담아낸다. 숟가락으로 떠서 입 안에 넣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선택은 반드시 배제를 낳게 된다. 무엇을 택할 것이냐는 질문은 곧 무엇을 배제할 것이냐는 질문과 같다. 그래서 소설은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섞인 총체적 정경을 제시하지만 영화는 의도된, 단 하나의 장면만을 보여준다.


감독 나카시마 테츠야가 원작을 디코드 해나가는 작업을 지켜보는 건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책은 성직자, 순교자, 자애자, 구도자, 신봉자, 전도자 총 6개의 장으로 이뤄져 있다. 각각을 하나의 단편으로 엮어도 될 만큼 완성도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점 때문에 흐름이 끊기는 감이 없지는 않다. 각 장이 품은 긴장의 강도가 서로 다르다는 점이 지루함을 낳기도 한다. 영화는 순교자, 자애자, 구도자, 신봉자를 하나로 묶고 앞 뒤로 성직자, 전도자를 배치했다. 앞 뒤의 순서는 원작과 같지만 중간은 서로 교차되며 엉켜 있다. 이 교차와 엉킴이 연출의 핵심이다. 탁월하다는 말 밖엔 할 말이 없다.


<고백>은 첫 장에서 사건의 결과와 경위가 모두 고백되어지기 때문에 이후의 이야기들이 하나 씩 퍼즐을 이뤄나가며 비밀을 찾아가는 미스테리 장르가 아니다. 이 책은 복수극이다. 살인을 저지르고 유유히 숲을 걷는 범죄자를 처단하기 위해 사냥꾼이 등장한다. 지금까지는 그저 멍청이인줄만 알았던 담임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종업식 날 살인자들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범인을 쫓는 사냥개를 푼다. 개는 맹렬히 달려 한 명의 목을 물어 뜯지만 다른 한 명에겐 도리어 무참히 살해되고 만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흘린 피가 살인자의 몸을 흠뻑 적신다. 해는 지고 숲은 어둠으로 가득하다. 갈 길은 아직 먼데, 피비린내를 잔뜩 풍기는 살인자는 과연 굶주린 괴물들을 피해 숲을 벗어날 수 있을까?


이 책은 철저한 복수극이다. 그 완벽함 때문에 오히려 구성이 흔들리는 감이 있지만 복수의 짜릿한 쾌감을 거부하고 싶지는 않다. 때로는 악인보다, 그 악인을 심판하려는 선인의 복수가 더 악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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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 전에, 더불어 사는 법을 가르쳐라
이기동 지음, 이원진 엮음 / 걷는나무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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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교육은 정말 어렵다. 인생에서 아이인 시절은 딱 한 번 밖에 없는데 커서의 모든 자질이 아이일 때 결정되기 때문이다. 유아기의 잘못된 교육은 100년을 지고 갈 낙인이 된다.


이렇게 중요한데도 유아 교육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특히 한국의 경우 교육은 곧 성적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 그 무지로 인한 폐해가 더더욱 심하다. 아이 교육 어떻게 시켜야 할까요? 라는 질문엔 한글은 몇 살, 영어는 몇 살, 수학은 어디에서, 라는 질문이 내포되어 있다.


왜곡된 교육관이 사회에 팽배한 경우 우리는 두 가지 해악을 덤으로 받게 된다.


첫째, 대안 찾기의 어려움이다. 일부 부모가 성적보다 인성을 중시하고 교과 과정보다 체험, 독서, 글짓기, 토론 등을 이용한 소양 교육을 실천한다 하더라도 시험 성적이 나오지 않아선 지속하기가 어렵다. 줄 세우기와 타이틀 만들기에 능한 사회는 필연적으로 소양을 알아보고 깊이를 탐지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그런 사회의 엘리트들은 아인슈타인 조차 수학 능력이 떨어지는 지진아로 구분할 것이다. 외눈박이 마을에선 두 눈을 뜬 자가 오히려 병신이니까.


둘째, 유전 현상이다. 전 세대 부모의 교육 방식은 다음 세대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이어진다. 어렸을 땐 분명 부모의 극성과 잔소리를 끔찍하게 여겼을 사람들이 커서는 자기 자식에게 똑같은 교육 방식을 강요한다는 것이 이 비극의 아이러니다. 주산을 강요당했던 아이가 신개념 수학 풀이법을 받고 빽빽이를 했던 아이가 뇌새김으로 강제될 뿐 그 본질은 변하지 않고 수 세대를 이어간다. 대안의 부재와 유전은 서로 시너지를 발휘하며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한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이런 문제들을 모르지 않다는 것이다. 다 아는 얘기. 뻔한 얘기. 그래서 참교육을 전하는 말들은 대체로 공허하게 들리기 마련이다. 좋은 말은 좋은 말일 뿐 현실에선 뿌리를 내리기 힘들다. 설령 참교육을 실천하리라 굳게 다짐한 경우라도 더 큰 문제가 남아있다. 자식 교육과 관련된 모든 일들은 자식의 자질보다는 부모의 자질에 달려 있다. 그러나 부모는 이미 잘못된 교육 환경의 피해자일 가능성이 크다. 다 자란 어른이 몸에 박힌 말과 행동, 태도, 사고 방식을 교정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예컨대 아이에게 책 읽는 습관을 가르친다고 해보자. 가장 좋은 방법은 스마트폰과 TV를 끄고 부모가 직접 책을 읽는 것이다. 아이보다는 부모의 인내심이 먼저 바닥나지 않을까?


교육에 관한 책이 호응을 얻기 위해선 선언보다는 구체적 행동지침이 많아야 한다. 더불어 사는 아이를 기르세요, 더불어 살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대신 부모의 어떤 말과 행동이 아이에게 함께 사는 삶의 중요성을 새길 수 있는지 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 담긴 지침들은, 결코 풍부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름 구색은 갖추고 있다. 보나마나 뻔한 얘기지, 라고 치부하기엔 새롭게 알게 되는 내용들이 종종 나온다. 이런 내용을 읽다보면 사소한 말 한마디, 나도 모르게 지은 무심한 표정 하나가 아이의 성격과 행동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그래서 아이를 기른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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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피델리티
닉 혼비 지음, 오득주 옮김 / 문학사상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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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실패가 많았지만 대신 금쪽 같은 작가 몇 명을 만났다. 사실 독서의 세계에선 단 한 번의 성공이 백 번의 실패를 만회할 수 있을 만큼 성공의 질과 파괴력이 높은 편이다. 이른바 인생의 작가를 만났을 때의 기분, 그들의 빽빽한 작품 리스트를 손에 들었을 때 전해지는 가벼운 떨림은 느껴본 사람만이 아는 환희일 것이다.


아직 2016년이 끝나진 않았지만 앞으로 읽을 책들이 뻔한 관계로 올해의 작가들을 결산해 보면, <카인>의 조제 사라마구, <밤의 파수꾼>의 켄 브루언, <사피엔스>의 유발 하라리, 그리고 바로 이 책 <하이 피델리티>의 닉 혼비가 있다.


내 평생 가장 기억에 남는 다섯 번의 이별을 연대순으로 꼽아보라면 다음과 같다.


1) 앨리슨 애시워스

2) 페니 하드윅

3) 재키 앨런

4) 찰리 니콜슨

5) 세라 켄드루


모두 내게 정말로 상처를 준 여자들이다. 로라, 거기 네 이름 보여? 넌 10위 안에 어찌 들 수 있을지 모르지만 5위 안에는 절대 못 낄걸. 5위까지는 내게 굴욕감과 비통함을 안겨준 사람들에게만 할애되거든. 너는 그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말하고 보니 의도했던 것보다 더 잔인하게 들리는군. 사실 상대방에게 비참함을 안겨주기엔 우리 둘 다 너무 나이 들었지.(p.9)


나는 이 첫 페이지를 읽는 순간 이 책을 사야한다는 강력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물론 이 문장들이 이른바 '문학'에는 어울리지 않는 가볍고 저질스런 것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주인공 롭은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는 30대 중반의 음악광으로 세상의 모든 평범함을 응축해 단단히 채워 넣은 듯한 인간이다. 평범함. 말 그대로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가치 중립적 단어처럼 보이지만 현대인의 마음 속에 뿌리 내린 방황의 씨앗은 모두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생각해 보라. 평범 이상인 사람은 그렇게 쭉 달려 만인이 바라마지 않는 목표를 쟁취하면 된다. 또 평범 이하인 사람은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를 듣는 순간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달려 창조적 파괴와 혁신을 일으키는, 그래서 세상 자체를 완전히 뒤집어 버릴 수도 있는 잠재력을 발휘하면 된다. 그런데 평범한 사람은? 쉽게 말해 이도 저도 아닌 사람. 어느 방향으로 뛴다 해도 아무런 메리트를 갖지 못하는 사람. 방황은 못하거나 잘해서가 아니라, 못하지도 잘 하지도 않기 때문에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평범한은 당신이 스스로 채워 넣은 구속복일지도 모른다. 나에겐 아무런 특별함도 없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겐 단 한 번이라도 마음 속 끝까지 내려가 자신의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냐고 묻고 싶다. 뚜껑을 열고 캄캄한 우물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밧줄을 타고 내려가 졸졸졸 뿜어져 나오는, 그 차고 반짝이는 물 한 모금을 마셔본 적 있냐고 말이다. 위로가 아니라, 인간은 모두 저마다 반짝 반짝 빛나는 재능을 갖고 있다. 때로 그 재능은 어둠에 쌓여, 때로는 넓디 너른 갯벌에 파묻혀 보이지 않을 뿐이다.


<하이 피델리티>는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는 중년의 찌질함과 우울함을 그리고 있지만 닉 혼비의 위트 넘치는 문장으로 엮여 시종일관 유쾌함을 잃지 않는 책이다. 기가 막힌 반전이나 눈에 띄는 사건은 없다. 그저 소소한 해프닝, 농담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사소한 사건이 이어진다. 추운 겨울날 담요를 뒤집어 쓰고 소파에 누워 영국 영화(장르는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온 몸이 나른하고 졸음도 오지만 마음은 따뜻하고 촉촉해지는, 그런 기분 말이다.


이 책을 소장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음악에 있다. 레코드 가게 챔피언십 바이닐의 주인장 롭. 음악광 답게 그는 모든 상황과 사건을 음악에 빗대어 얘기하는데, 70~80년대를 주름 잡은 팝, 락, 디스코, 레게 음악의 선율이 문장 위로 날아다니는 게 보일 정도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느새 그 노래를 모아 플레이 리스트를 만드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니까 <하이 피델리티>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좋은 소설을, 소설 좋아하는 사람에겐 좋은 음악을 덤으로 쥐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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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미래는 있는가 - 잃어버린 희망을 찾아가는 인문학 여정
로제 폴 드루아.모니크 아틀랑 지음, 김세은 옮김 / 미래의창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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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즘 같은 세상에 희망을 얘기하는 건 대체로 비웃음을 살만한 행동일 것이다. 정치는 부패의 끝에 서 있고 빈부 격차는 인류 역사를 통째로 틀어 박어도 메꿀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벌어진 지 오래다. 세상은 결국 바뀐다, 역사는 끝내 진보한다는 말도 캄캄한 미래 앞에선 무기력한 메아리로 돌아올 뿐이다. 


희망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당장의 고통을 잊게해 주는 아편에 불과할까? 근거 없는 미래가 전하는 달콤한 속삼임. 맞을 수록 효과는 떨어지고, 약에서 깨면 여전히 그대로인 현실로 인해 절망은 두 배로 늘어나는 중독의 묘약말이다.


어쩌면 희망의 위기는 그것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걸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희망찬 미래를 얘기하는 사람은 많아도 '희망 그 자체'에 대해 말하는 이는 없었던 것 같다. 이러한 현상이 희망에 대한 오해를 가중시켰다. 오늘날 희망의 위기는 진짜 희망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가짜 희망이 차지한데서 온 걸지도 모른다.


<희망에 미래는 있는가>는 바로 이 의문에서 시작한다. 저자는 우리에게 희망을 역사적, 철학적 관점에서 다시 돌아볼 것을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희망이 위기에 처한 진짜 원인을 찾아낼 것이며 그 원인을 제거할 해결책 또한 발견할 것이다. 우선 희망이 처음으로 탄생한 고대로 날아가보자.


우리는 흔히 희망이 없는 곳을 지옥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천국이야말로 희망이 없는 유일한 곳이다. 천국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지복의 성소기 때문이다. 인간 세상에 처음으로 희망이 등장한 것도 판도라가 상자를 열어 온갖 악들을 해방시킨 뒤였다. 이 신화는 절망에 빠진 인간을 위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완벽했던 세상이 악으로 오염됨으로써 그 전 까지는 전혀 필요 없었던 희망이 이제는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됐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대에 희망은 애증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쓴 독약을 마시고 난 뒤에 내려지는 약에 불과했고 고대인들은 늘 완벽했던 태초의 세상을 그리워했다. 아담이 에덴을 떠올리듯, 프로메테우스가 올림푸스를 그리워하는 것과 같이, 그들에게 천국은 과거에 있었다.


중세에 이르러 희망은 기독교라는 질병에 의해 현실 세계에서 멸종된다. 기독교인들이 가진 유일한 희망은 죽은 뒤에 천국에 가는 것이었다. 현실의 고통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니 그저 믿으라, 그리하면 영생을 얻으리라.


견고했던 중세를 무너뜨리기 시작한 건 기술의 힘이었다. 측량과 항해 기술의 발달은 신대륙을 발견했고 대포의 힘이 성벽을 날려버렸다. 상업의 발달과 자본주의의 등장은 신분 사회에 균열을 일으켰다. 중세인들은 내일이 오늘, 심지어 어제와 똑같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급변하는 세상은 오늘의 오후가 오늘의 오전과도 다를 수 있음을 알려줬다. 이제 미래는 얼마든지 개척가능한 미지의 대상이었고 그 불확실성으로 인해 사람들은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희망은 현대에 이르러 대규모 인종 학살, 전쟁, 인권 유린, 빈부 격차의 다른 모습이었음이 드러난다. 기술의 발달은 중세를 무너뜨렸던 바로 그 힘으로 현대를 무너뜨렸다. 희망은 자신의 행동이 다가올 결과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에서 양분을 얻지만, 폭주하는 변화로 인해 세상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모든 사람을 잘 살게 만들기 위한 자본주의가 빈부 격차를 낳았고 광산을 뚫던 화약의 불꽃이 전쟁의 포화로 옮겨 붙었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선언은 일부 인종이 인간이 아님을 증명하는 데 이용됐다. 


이처럼 현대는 원인과 결과를 짝맞출 수 없는 세상, 모든 의도가 예기치 않은 결과로 빨려 들어가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희망은 살아 남을 수 없다. 남아 있다면 오로지 막연한 기대와 일확천금에 대한 욕망 뿐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압도적 무기력 속에서 좀비가 되버린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일말의 타개도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겨내야 할까? 여기 두 가지 입장이 있다.


첫째, 희망을 완전히 버리는 것이다. 희망을 버린다는 건 생각보다 나쁜 일이 아니다. 희망을 버렸다는 건 희망이 원하는 현실로 귀결되지 않았을 때 따르는 실망과 분노도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란 마음을 완전한 공(空)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고 그 안에는 나를 흔드는 바람도, 바람에 흔들릴 나무도 없기에 우리는 그야말로 고요한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이 말을 패배자의 자기 위안으로 치부하려는 사람은 Carpe Diem이나 Seize the day 라는 말을 떠올려 보기 바란다. 부질 없는 미래를 희망하기 보단 오직 현실을 즐기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 이 격언들이 과연 어디에서 비롯됐을지 생각해 보자.


둘째,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희망은 인간의 삶과 분리될 수 없다. 둘러보라. 요즘 같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시험 합격이나 연봉 인상 등 개개인의 소망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사라지지 않는 거라면, 시시한 개인적 희망 따위 잠시 비워두고 그 빈자리에 대신 공동체의 소망을 담아 미래를 향해 던지는 건 어떨까? 우리 모두의 염원을 담은 희망은 미래에 굳건히 자리를 잡은 뒤 절망에 빠진 현실을 끌어 당길 것이다. 미래가 끌고 현재가 미는 것. 그렇게하면 현실은 미래로 나아가 마침내 그곳에 있던 희망을 현실로 바꿔놓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자조한다. 변화를 막는 권력의 힘은 결코 시들지 않는 불멸의 세계수가 되어 우리의 삶을 옥죄고 있다. 그러나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은 사람이라면, 그 행위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정말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왜 그 귀하디 귀한 자식을 낳아 이 지옥같은 세상에 바치는가? 인간의 삶은 유한하기에 개인의 관점에선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류라는 종의 관점에서 다시  역사를 바라 보자. 세상은 정말로 바뀌지 않는가?


나에게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결단코 첫 번째라고 대답하겠지만 무엇이 옳으냐고 묻는다면 결코 대답할 수 없다. <희망에 미래는 있는가>는 우리에게 두 번째 삶의 방식을 권고하지만 무엇을 선택할지는 오직 당신의 몫이다. '나의 삶'이냐 '우리의 삶'이냐, 우리는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선택이 어려운 사람이라면 더 많이 선택한 쪽이 어디인지가 도움이 될 수 있다. 그걸 알고 싶으면 TV를 켜라. 그리고는 광화문을 가득 채운 촛불의 파도를 보라. 첫 번째 삶을 선택한 나는, 그들을 위해 고개를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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