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트 원티드 맨 판타스틱 픽션 골드 Gold 6
존 르 카레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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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에 태어난 존 르 카레는 올해로 87세다. 충분히 살아있을 만한 나이. 그런데 나는 왜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을까? 아마도 냉전의 종식이 문제였던 것 같다. 소련이 사라지고 동독이 무너지고 동유럽에 불어온 자유의 바람과 함께 스파이들은 모두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을 그렸던 존 르 카레도 함께.


그래서 <모스트 원티드 맨>을 영화로 봤을 때 나는 존 르 카레의 원작을 현대식으로 재구성한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2001년에 벌어진 9.11 테러 이후의 세계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냉전의 소멸과 함께 사라졌을 거라 생각했던 폭력과 전쟁은 21세기의 벽두부터 화려한 시작을 알렸다. 그와 함께 이 늙은 첩보 소설의 왕도 잠에서 깨어났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존 르 카레의 소설에서 줄거리가 차지하는 몫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었다. 경고하건대 이걸 영화로 먼저 본 사람이 있다면 절대 책을 읽지 말 것을 권고한다. 물론 모든 이야기들이 끝을 알고 있다고 해서 다 흥미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 떨어지는 종류가 있다. 이 책이 바로 그렇다. 존 르 카레의 첩보 소설은 007이나 본 시리즈처럼 쉴 새 없이 액션이 몰아치는 스펙터클이 아니다. 마치 방망이를 깍는 노인처럼 천천히 산더미 같은 서류를 뒤지고, 담담한 심문을 이어가고, 그렇게 거미줄에 거미줄을 엮어 마구잡이로 얽힌 실타래에 붙여 놓은 것 같은 이야기를 스르륵 풀어내는데서 나오는 쾌감과 전율이 매력인 것이다. 이 답답하고 느린 전개는 마지막 순간 엄청난 보상을 선물한다. 그런데 처음부터 상자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고 있다면 돼지같은 인내심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오히려 책을 두 번 세 번 읽는 건 재미의 반감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이 경우엔 처음에 느꼈던 감동과 전율이 오히려 갈고 닦여 더 빛나는 현상이 벌어진다. 같은 영화를 두 번 세 번 봤을 때도 마찬가지다.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를 나중에 보는 것도 괜찮다. 그러나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나중에 읽는 건, <모스트 원티드 맨>에 관한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싶다면 지금 당장 경고와는 반대로 이 작품을 접해보길 바란다.


언제나 그렇듯 존 르 카레의 스파이 세계는 비윤리적이고 참담하다. 스파이들이 갖춰야 할 최고의 덕목은 가장 신뢰받는 자를 포섭해 배신자로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이 목적을 위해 처음부터 가장된 신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 신뢰를 오랫동안 관리하고 육성해 나가는 과정은 최상급 소고기를 얻기 위해 애지중지 소를 키우는 사육을 연상케 한다. 과정이 얼마나 아름답건 그 끝은 언제나 피비린내 나는 도살장이다.


9.11 이후 독일의 함부르크는 새로운 첩보전의 무대로 떠오른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로 직진한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이 이방인에게 관대한 이 항구 도시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독일의 첩보부. 여기에 영국의 MI6, 미국의 CIA가 가담한다. 미-영 연합군은 조심성 넘치고 철저하고 옛 스파이의 정석을 토라처럼 숭앙하는 독일 첩보부와는 여러모로 대척점에 서 있다. 바흐만(독일)은 우아하고 마사(미국)는 천박하다. 바흐만은 잡은 물고기들을 살은 채로 운반하기 위해 어창에 상어를 풀어놓기를 원하고 마사는 자기 물고기를 잡아 먹는 상어의 씨를 모조리 말리려한다. 나는 이 책의 마지막 장면을 작가가 어떤 의도로 그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거기서 취하는 미국의 태도가 오히려 바흐만 보다 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 무지와 천박함, 복수심은 별수 없이 인간의 핵심이다. 미국의 행동은 근시안적이고 무지하며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초보적이지만 그것이 바로 그들의 인간성을 증명하는 것들이다. 철저히 계산된 작전, 계산된 음모가 첩보원의 미덕이 될 수는 있어도 인간성의 증거가 될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모스트 원티드 맨>이 암시하는 미국의 도덕적 타락에 의문을 제기한다. 미국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그들은 충동적이며 동시에 무분별하다. 인간이 되지 않길 원하는 건 오히려 철저한 독일인, 바흐만이다.


인간을 도덕적, 윤리적 존재로 여기는 관점은 애초에 한참이나 빗나간 생각이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킨다. 위대한 인간이 윤리와 도덕을 통해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리라는 생각은 사자와 톰슨가젤이 위원회를 구성해 고기 대체제를 개발하겠다는 것만큼 터무니 없다. 미국은 우리를 향해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망할 거 같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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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22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런 병신같은 리뷰에 좋아요를 박는 병신들이 여덟명이나 되다니...

한깨짱 2021-03-02 13:36   좋아요 0 | URL
세상엔 놀라운 일들로 가득하지
 
정키 펭귄클래식 60
윌리엄 S. 버로스 지음, 조동섭 옮김, 올리버 해리스 서문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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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마약이 영감에 미치는 영향력을 생각해 본다. 좋은 밴드가 외국에서 많이 나오는 이유는 대마초나 코카인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열광하는 영화의 일부는 분명 약쟁이들에 의해 탄생할 것이다. 반면 술은? 헤밍웨이는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는 말을 한 뒤 알콜중독자가 되어 권총으로 자기 머리를 박살냈다. 커크 해밋은 한동안 술에 빠져 전세계적으로 무려 1억장이나 앨범을 팔아치운 전설의 밴드 메탈리카를 해체시킬뻔 했다. 나는 술이 영감의 원천이라고 말하는 시인을 가끔 본 적 있다. 그들이 마약을 했다면 아마 다른 말을 했을 것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술은 인간을 파괴하지만 마약은 아닐지도 모른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마약은 인간을 신의 영역에 데리고 갔다 지옥으로 추락시킨다. 입에 대는 순간부터 시종일관 지옥으로 잡아당기는 술과는 달리.


나는 마약 옹호자가 아니다. 단지 마약이든 술이든 그 끝은 동일한데도 약쟁이을 알콜중독자보다 밑에 두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약에 취한 사람은 침대에 축 늘어져 자기만의 환상에 빠져있지만 술에 취한 사람은 아내와 아이를 때린 뒤 집안을 엉망으로 망쳐 놓고 거리로 뛰쳐나가 행인들과 싸움을 벌인다. 약에 취해 범죄를 저지르면 중범죄에 중범죄를 가중한 것 같은 호들갑을 떨면서도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린 건 그 죄의 원인을 술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술은 누구나 하지만 마약은 그렇지 않은 게 이유일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이유.


한 가지 나은 점은 마약 중독자의 소설이 알콜중독자의 소설보다 더 주목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소설가에게 마약 중독 경력은 유용한 포트폴리오가 된다. 마약 때문에 불운한 인생을 살았다면 더 큰 관심을 받을 수 있다. 그가 소설을 써냈다는 건 어쨌든 이 모든 것들을 극복했다는 의미니까. 내용은 추잡할 수록 더 좋다. 성공한 사람에게 불운한 과거는 훌륭한 커리어가 된다.


<정키>. 이 소설은 아무 것도 읽을 게 없다. 윌리엄 버로스는 자신이 마약에 빠져 살던 시절의 이야기를 아주 세밀하게 이 소설에 묘사해 넣었다. 약쟁이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면 다른 취재는 필요 없다. 소설은 약을 밀매하고 경찰에 쫓기고 감옥에 가고 소매치기를 하는 밑바닥 이야기로 가득하다. 술의 문제는 술에 취해 범죄를 저지른다는 거지만 마약의 문제는 약에 취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른다는 점이다. 그는 늘 약에 취해 있다. 종류는 다양하다. 몰핀에서 코카인, 헤로인, 대마초에서 멕시코산 환각 선인장까지.


내용을 더 얘기해 주고 싶어도 할 말이 없다. 무엇을 느꼈는가 물어도 침묵으로 대답할 밖에. 나는 주인공이 자기 팔에 주사기를 꽂을 때 마다 내 몸에도 그 날카로운 바늘이 꽂히는 착각에 빠져들곤 했다. 피부가 따끔했다. 그러나 그 따끔한 뒤에 환각은 찾아오지 않았다. 작가가 느꼈을 그 황홀한 환각의 세계말이다. 나는 그게 증오스러웠다. 나에겐 고통만이 있을 뿐 환희는 없었다.


윌리엄 버로스는 비트 제너레이션을 대표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 타이틀로 짭짤한 벌이를 했다. 비트 제너레이션에 속하는 작가들은 자기들만 통하는 은어를 사용하고 제임스 딘이나 말론 브란도 같은 반항적인 배우를 숭배했다. 그들은 이후 탄생할 히피 문화의 롤모델이었으며 사회에서 성공하려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그러나 이들은 바로 그런 태도로 인해 사회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사람들은 열심히 시스템에 저항하면 언젠가 그것을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순진한 생각이다. 시스템이 자신의 적들을 상대하는 방법은 섬뜩하다. 자기를 떠나 광야로 나간 이들에게 의미를 부여해(비트 제너레이션!) 또 하나의 시스템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세계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관대하고, 


당신이 아는 것보다 교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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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니어스 - 실리콘밸리 인재의 산실 ‘스탠퍼드 디스쿨’의 기상천외한 창의력 프로젝트
티나 실리그 지음, 김소희 옮김 / 리더스북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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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 인재의 산실 '스탠퍼드 디스쿨'의 기상천외한 창의력 프로젝트. 엥간히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런 요란한 수식이 붙을수록 내용이 빈약하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나는 이번에도 내 편견을 부술만한 책을 만나지 못했다.


총 11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가장 가치 있는 장을 고르라면 1장 리프레이밍, 2장 아이디어 자극, 3장 브레인스토밍, 6장 제약이다. 우선 리프레이밍부터 얘기해보자.


지난 10년간의 조직 생활 동안 나는 프레이밍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지 지켜봐왔다. 한국 기업은 특성상 대부분 상명하달식의 프로젝트가 진행된다. 소심하고 순종적이며 성실하기까지 한 대한민국의 회사원들은 지시 사항에 의문을 품기보다는 시키는대로 최선을 다해 일을한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사무실에는 '완벽한 똥'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람들로 가득찬다. 18세기 운송 회사의 직원들이었다면 더 빠른 말을 찾아오라는 사장님의 지시에 전세계의 온갖 말 농장을 조사했을 것이다. 포드가 자동차를 만들고 있는 마당에 말이다.


프레임은 정말로 정말로 무섭다. 컨퍼런스에 온 사람들에게 이름표를 다시 디자인하라고 하면 그들은 너무 작은 이름, 걸리적 거리는 목줄 등을 열거하며 단점이 보완된 이름표를 만들 것이다. 때때로 그런 결과물은 봐줄만할 때도 있다. 하지만 애초에 이름표가 왜 필요한 걸까? 창의력은 이런 본질적 의문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이름표를 '다시 디자인'하라는 프레임은 너무나도 강력해 사람들에게 이런 의문을 허락하지 않는다.


두번째는 아이디어 자극이다. 이런 책이 무용한 이유는 뻔한 얘기를 한다는 것인데 뻔한 얘기라도 구체적인 How to가 있으면 괜찮아질 수 있다. 하지만 책이 해주지 않기에 내가 해본다.


나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낼 때 아무 문장이나 하나 고른 뒤 주어와 동사를 무작위로 바꿔본다.


로켓이 하늘 위로 날아갔습니다. 이 문장을,

개복치가 하늘 위로 날아갔습니다.

로켓이 땅 속으로 기어들어갔습니다.

방구가 눈 위로 날아갔습니다.


일견 말이 안 되는 문장처럼 보이지만 이 과정에서 당신은 당신의 사고 틀이 얼마나 좁고 갑갑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런 연습은 차차 사물을 리디자인 하는 것으로 발전될 수 있다. 문 손잡이를 사람의 손 모양으로 바꿔본다거나 220v 콘센트에 돼지 얼굴을 그려 넣는 것처럼. 엉뚱하고 유치해 보이지만 이런 생각 연습은 잠자고 있던 우리의 뇌를 격렬하게 깨우는 효과가 있다.


셋째는 브레인스토밍이다. 회사 생활 10년 동안 이걸 잘하는 사람을 만나 본 건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브레인스토밍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심판한다는 것이다. 알콜중독자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들이 똑같이 알콜중독자가 되듯이 권위적인 관리자 밑에서 일을 해온 사람들은 어느덧 심판자의 역할을 몸에 익힌다. 누군가 아이디어를 말할 때 마다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되고 블라 블라 블라. 이 멍청이들아 이건 브레인스토밍이자나!!


아이디어는 언제나 양이 질을 담보한다. 좋은 아이디어를 뽑아내려면 우선 많은 아이디어를 내야 하는 것이다. 아이디어 회의를 할 기회가 있으면 사람들이 말을 할 때마다 '안 된다'고 해보자. 당신은 그 한 마디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보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자신의 아이디어가 타당한지 아닌지 마음 속으로 수백번 심판할 것이다. 그럴거면 차라리 각자의 자리에 앉아 아이디어를 생각해낸 뒤 메일로 공유하는 게 더 낫다.


브레인스토밍을 할 때는 모든 사람이 모든 의견에 대해 호응을 해야 한다. 사람들은 이런 공포를 갖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이 의견에 호응하는 걸 진심으로 생각하면 어떻게 하지? 나는 그저 브레인스토밍이어서 그랬던 것 뿐인데.' '나중에 자신의 아이디어가 선택되지 않았을 때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건 아닌가. 그렇게 호응을 해주더니 이 사람 완전 위선자 아냐!' 그래서 브레인스토밍을 시작하기 전에 그 방법을 명확히 고지해주는 게 좋다. 적정 인원은 4~5명. 둘은 절대 안 된다. 둘이서 하는 브레인스토밍은 어느덧 쓸데없는 고성과 논쟁으로 변질될 것이다. 적정 시간은 1시간이다.


나아가 나는 안티-브레인스토밍을 추천한다. 1시간 동안 모든 아이디어를 뽑아낸 뒤 가장 마음에 드는 몇 개를 투표로 골라(이 때 여러 조건으로 구분하여 다중 투표하는 것도 좋다. 당장 실행할 수 있는 일. 중장기 과제. 등등) 그 아이디어들이 왜 안 되는지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다. 브레인스토밍과 안티-브레인스토밍을 잘 이용하면 당신은 혁신적이면서도 실용적인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은 제약이다. 마감 시간이 최고의 각성제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사람들은 자유에 대해 지나친 망상을 갖고 있다. 무제한의 자원, 무제한의 시간, 무제한의 권한을 주면 엄청나게 훌륭한 서비스나 제품이 탄생할 거라 생각하는 것이다. 절대 그렇지 않다. 창의력은 오히려 큰 제약을 만났을 때 반짝 반짝 빛이난다. 얼마를 써도 좋으니 해외 여행을 하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개 뻔한 생각을 할 것이다. 최고급 요트. 별 7개 짜리 호텔의 스위트 룸.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 그러나 100만원으로 세계 여행을 하라고 하면? 사람들은 온갖 방법을 생각해 낼 것이다.


뭔가를 요청 받을 때 가장 어려운 점은 '뭐가 되도 좋으니 마음대로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이렇게 지시하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마음대로 생각한 나의 결과물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때때로 나는 제약이야 말로 창의력의 본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받아들이는 사람도 지시하는 사람도 이 제약에 대해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예산도 못 쓰고 인력 추가도 안 된다면서 뭘 해오라는 거야? 예산과 인력을 두 배로 늘려 주면 더 확실한 해결책을 갖고 오겠지? 세상은 정말, 


기절할 정도로 많은 오해와 미신으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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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중력가속도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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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장르의 매력은 중력의 한계에 묶인 인간의 인식을 우주 밖으로 쏘아보내는 것이다. 우리의 상상력은 의외로, 어쩌면 당연하게도, 지구를 기준으로 형성된다. 판타지 세계의 용은 그 요란한 독특함에도 불구하고 뱀의 비늘과 눈, 악어의 이빨을 갖고 있다. 천사들은 모두 비둘기와 같은 날개를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SF 작가들은 모두 지구인들을 위해 소설을 쓰는 우주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술과 중력가속도>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나는 그 내용의 실마리 조차 잡지 못했다. 예술은 중력가속도와 어떤 관계가 있는걸까? 중력과 가장 먼 단어를 하나 고르라면 나는 아마 예술을 골랐을 것이다. 아무리 상상해봐도 그 둘의 접점은 보이지 않는다. 예술은 중력의 속박을 받지 않는 인간의 유일한 행위니까.


소설집의 제목이기도한 이 단편 소설은 화성에서 태어나 '현대 무용'을 전공했고 주거지가 폐쇄되는 바람에 지구로 이민을 올 수 밖에 없었던 은경씨에 대한 이야기다. 화성의 현대 무용이라니, 우리는 여기까지 듣고 나서도 여전히 텅빈 무대 위의 지루한 몸짓이나 온 몸에 페인트를 묻힌 나체의 퍼포머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나아가 보자. 그들이 무대를 박차고 뛰어 올라 허공 위로 솟아오르는 모습을 떠올려 보자. 중력이 몇 배나 낮은 그 곳에서, 오색빛 실크옷을 나풀거리며 천천히 강림하는 여신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예술은 우주의 시대에도 여전히 이해받지 못하는 영역으로 남아 있다. 지구의 예술가들은 인생의 대부분을 이 몰이해와 싸우느라 기진한다. 허름한 전시장을 섭외하고, 해설을 추가하고, 열심히 팜플렛을 돌린다. 하지만 은경씨가 처한 현실은 이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지구에선 아무도 은경씨의 무용을 볼 수 없다. 지구의 중력이 은경씨의 무용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은경씨가 처한 현실은 압도적으로 비참하다. 지구의 예술가들은 언젠가 자신도 고흐나 베토벤이 될 거라 꿈꾸며 하루를 희망으로 채울 수 있다. 그러나 수십억 년이 지나더라도, 지구가 자신의 중력을 낮춰 은경씨에게 공연의 기회를 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은경씨의 꿈은 지구의 예술가들이 평생을 바쳐 싸워 온 그 몰이해를, 단 한번만이라도 가져보는 것이다.


지구는 마침내 그녀에게 기회를 준다. 그녀는 몇몇 예술 협회의 도움으로 특별한 공연장을 섭외하는데 성공한다. 무대는 거대한 튜브처럼 생긴 비행기. 비행기는 관객들을 싣고 하늘 높이 올랐다가 무작정 땅으로 곤두박질 친다. 자유낙하. 비행기 안은 무중력 상태로 변하고, 드디어 은경씨의 예술이 빛을 발한다. 그러나 관객들 중 그 누구도 심지어 그녀와 결혼할 나조차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지는 못한다. 멀미로 토를 쏟아내느라 눈 조차 뜰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구인에게 은경씨의 무용은 구역질나는 예술이었다.


이후 은경씨는 나와 결혼을 하고 행복한 신혼 생활을 이어간다. 그녀는 늘 밟고 아름답게 살아간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자살을 선택한 이유를 어렴풋이 추측할 수 밖에 없다. 그녀의 죽음은 마침내 꿈을 이룬 자의 허심탄회한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가까스로 얻은 기회가 결국 몰이해로 귀결된 것에 대한 슬픔이었을까? 나는 아무래도 후자에 무게를 두고 싶다. 우주에는 아주 작은 크기에 어마어마한 질량을 가진 중성자 별이라는 게 존재하는데, 그 크기가 점점 작아져 특정 수준에 이르는 순간 붕괴해 블랙홀이 된다고 한다. 은경씨의 고독은 행복한 웃음과 결혼 생활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였지만 그 질량은 여전했을 것이다. 행복이 커갈수록 고독의 크기는 작아지고, 작아진 크기만큼 밀도가 높아진다. 그리고 마침내, 삶이 붕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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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사회과학 - 사회과학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재구성한 5월 광주의 삶과 진실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6
최정운 지음 / 오월의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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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 그러니까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는 일이 대한민국에선 얼마나 힘들게 쟁취한 권리인지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나는 그 일이 1980년 5월에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1980년 5월 18일 광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이 날을 기점으로 중대한 변화를 겪게 된다.


아프리카의 어떤 나라에서 시민들의 선거를 막기 위해 오른 손목을 강제로 자른다는 뉴스를 보고 나면 사람들은 후진국의 야만성 운운하며 호들갑을 떨 것이다. 하지만 1980년 5월 광주에서 군인이 지나가는 임산부의 배를 대검으로 갈라 죽였다는 얘기를 들으면 어떻게 반응할까? 1980년은 그리 오래된 과거가 아니다. 당시 그 지옥을 살아서 이겨낸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 남아 그 지옥을 만들어낸 악마들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 지구 역사상 가장 끔찍하고 야만적인 일은 내전이나 인종갈등으로 고통 받는 먼나라가 아니라 경제 대국이자 어엿한 민주주의 공화국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5.18의 원인을 한 마디로 규정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시작은 언제나 그렇듯 대학생들이었다. 그들은 1972년 10월 유신 헌법에 의해 종신 직권 체제를 구축한 박정희와 오랜 싸움을 해왔던 터였다. 그런데 1979년 10월 26일 이 독재자가 중정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지고 이틈을 타 전두환의 신군부가 12.12 군사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움켜쥔다. 드디어 대한민국에 봄이 오리라 기대했던 사람들은 새롭게 등장한 악마에게 맞서기 위해 다시 한 번 전열을 가다듬어야 했고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명령은 드디어 전면전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그 핵심에 광주가 있었다.


광주에 파견된 공수부대는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이유 없이 구타하고 연행해 인간 이하의 고문을 자행했다. 이는 시위대에게만 행해진 폭력이 아니었다. 그들은 시내를 돌며 젊은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이는 부마 사태의 성공적 진압 이후 공수부대가 자신감을 갖게 된 전략이었다. 무고한 시민들에게 까지 무차별 폭력을 가해 일반 시민들의 시위 가담을 막는 것.


"공수부대의 데모 진압은 이를테면 '전시적 폭력'이었다. 붙잡힌 사람은 사정없이 폭력을 가하여 그 광경을 보는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다시는 데모는커녕 얼씬대지도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공수부대의 폭력은 당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중략) 


죽거나 살거나가 문제가 아니라 처참하고 눈 뜨고 볼 수 없게 패고 찌르고 자르는 등 엽기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 진압의 기본 원칙이었고, 이를 위해 이미 4월에 특수 진압봉을 주문했으며 처음부터 대검을 사용했다.(중략)


이러한 폭력은 시위 진압이라 할 수 없으며 통상적 폭력도 아니었다. 이는 시각적 언어였고 명쾌한 뜻을 전하고 있었다. (중략) 또한 중요한 점은 이들의 폭력, 특히 전설처럼 남아 있는 엽기적 행위는 결코 인간의 공격적 본능이나 분노의 표현이나 환각제의 효과가 아니라 고도로 훈련되고 오랜 연습을 통해 익힌 전문 기술이며 주로 월남전에서 갈고닦은 것이었다." (90~91p)


신군부는 오랫동안 휴가 및 외출, 외박을 금지하거나 밥을 굶기거나 야간 훈련을 지속함으로써 시위대에 대한 공수부대의 적개심을 의도적으로 키워왔다. 광주 진압의 훈련명이 '화려한 외출'이었다는 사실은 이 폭력이 철저히 기획된 것이며 불만에 가득 찬 군인들에게 제공되는 '축제' 였음을 증언한다. 광주 시민은 이 끔찍한 살육제의 희생양이 되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다. 특히 노인, 아이, 여자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시민들을 심한 분노와 공포 그리고 그걸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자괴감 속으로 몰아 넣었다.


그러나 광주 시민의 격렬한 투쟁을 공수부대에 대한 복수심의 발로로 이해해선 안 된다. 시민들은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아주기 위해 일어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 투쟁했다. 시간이 흐를 수록 민주화, 전두환 타도와 같은 정치 구호가 등장하긴 했으나 이는 시위 과정에서 이 모든 사태를 초래한 원흉이 누구인지 학습하고 알아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 구호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실제로 저자는 시위대의 대다수가 전두환이 누구인지도 몰랐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5월 18일 광주 시민들을 움직인건 인간이고 싶은 열망, 즉 시대적, 이념적 가치를 초월한 기본권에 대한 사수 의지였다.


기본권에 대한 파괴는 80만 광주 시민을 하나로 뭉치게 했다. 그들은 역사상 유례 없는 절대공동체를 형성한다. 이 공동체 안에서 개인은 사라졌고 개인이 사라지고 나니 개인이 품을 수 밖에 없는 자기애와 이기심도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하나였으나 혼자가 아니었고 그것을 자각하는 순간 죽음 조차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되어 버렸다.


<오월의 사회과학>은 이 절대공동체가 어떤 과정으로 형성됐고 또 어떤 계기로 해체되었는지를 차분히 분석함으로써 이 책이 왜 '그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월의 '사회과학'인지를 증명한다. 일목요연한 사건 개요, 르포, 이야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이 책이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다. 5.18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이 끔찍한 권력의 폭력을 끝까지 파헤치기 위해, 공수부대의 잔학성을 구체적으로 증언하는 다른 책을 먼저 읽어 적의를 불태우는 것도 좋을 것이다.


5.18같은 어마어마한 사건이 이토록 조용히 묻혀온 데는 권력자들의 억압과 은폐, 호남에 대한 타지역 사람들의 편견에 기인한 바가 클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5.18에 대한 분노를 호남 사람들의 지긋지긋한 피해 의식의 발로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혹은 그런 얘기는 운동권이나 사상적으로 불순한 사람들의 주장으로 여기기도 한다. 이는 대한민국의 권력이 우리에게 짜놓은 프레임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그것을 유지하는 전략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를 말해준다. 광주 시민들은 5.18에 대해 말할 수도 없고 말하지 않을 수도 없다. 피해자들이 내는 목소리는 언제나 피해에 의해 편향된 것이라는 오해를 견뎌내야 한다. 그래서 광주하고는 아무런 관련도 연고도 없는 사람이 쓴 <오월의 사회과학>은 우리를 기쁘게 하면서 동시에 슬프게 만든다. 나는 사건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 그래서 목숨을 온전히 부지한 삼자만이 역사를 객관적으로 기술할 권리를 갖는다는 사실이 몸서리치게 무섭다.


1980년 5월 광주에 내려진 '신화적' 폭력은 이제 거의 잊혀질 위기에 처해 있다. 어느날 전두환이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를 그저 박정희의 뒤를 이은 또 한 명의 군부 독재자라고 기억할지 모른다. 대한민국의 근대사는 이렇듯 '단기 기억 상실증'으로 고통 받고 있다. 악마는 단지 이름을 바꿨을 뿐이지만 국민은 그 새로운 지도자가 이번엔 정말 '신한국'을 만들어 줄 거라 희망한다. 지구인을 애완 동물로 키우는 외계인이 있다면, 아마 우리를 금붕어라고 부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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