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혹은 그림자 - 호퍼의 그림에서 탄생한 빛과 어둠의 이야기
로런스 블록 외 지음, 로런스 블록 엮음,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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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호퍼를 알게 된 건 <밤의 파수꾼> 덕분이다. 책 표지에 그의 그림이 있었고, 그 속에 켄 브루언의 소설이 있었다. 그 둘이 내 평생의 동반자가 됐음은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때부터 느낀거지만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속엔 뭔가 이야기가 감춰져 있는 것 같았다. 작가 자신은 엄연히 형식(style)을 고민하는 스타일리스트로서 그런 말을 달가워하진 않았지만 작가가 어떻게 생각하든 관객의 심상을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니 그의 그림을 중심으로 이렇게 많은 작가들이 모여든 것 아니겠는가.


<빛 혹은 그림자>는 미국 범죄 스릴러의 거장 로런스 블록의 머리 속에서 처음으로 발아했다. 그 자신이 굉장한 호퍼의 팬이기도 했던 블록은 이 그림들을 자신의 동료들에게 보내 이야기를 하나씩 얻어올 궁리를 하게 된다. 그러니까 <빛 혹은 그림자>는 일종의 팬픽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 도발적 주문을 수용한 작가의 면면을 보면 팬픽이라는 말이 궁색해지는 건 사실이다. 이야기의 제왕 스티븐 킹에서 범죄 소설의 대가들, 그리고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조이스 캐롤 오츠까지. 골탕먹일 생각으로 날린 강서브에 그들은 날카로운 서브 리턴으로 응수한다. 그들이 날린 공은 유유히 코트 위를 날아 날카롭게 코너를 찌른다.


솔직히 모든 소설들이 다 재미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눈에 띄었던 몇몇 작가들의 작품은 기대를 충분히 만족시켰다. <밤을 새우는 사람들>의 마이클 코넬리, <11월 10일의 사건>의 제프리 디버, <음악의 방>의 스티븐 킹, <사건의 전말>의 리 차일드. 마이클 코넬리와 제프리 디버, 리 차일드는 설명이 불필요한 '범죄 카르텔의 수장'들이고 스티븐 킹은 인간 세계에 현현한 사탄의 아들이라 부를 정도로 공포에 관해선 일가견이 있는 남자다. 호퍼의 그림이 가진 기괴한 우울과 어둠을 이들보다 더 잘 표현해낼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물을 만난 고기처럼 그들의 이야기는 종이 위를 쏜살같이 헤엄쳐 나간다.


어깨에 힘을 쭉 빼고 써내려간 듯 경쾌한 단편들은 그들이 왜 대가인지를 증명하는 징표와도 같다. 아니 어쩌면 이 짧은 이야기들이야 말로 그들의 대표작보다 더 그들을 빛나게 해주는 핵심인지도 모른다. 특히 스티븐 킹의 <음악의 방>을 보면, 평소 그의 중장편에서 보이는 쓸데 없는 군더더기가 모조리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 언젠가 그의 글을 통해 나는 스티븐 킹이 단편 소설을 일종의 미숙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단편은 자신이 원하는 걸 모조리 쏟아 넣기엔 불완전한 형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애를 써 적어 넣은 소중한 것들이 사실은 다 불필요한 것들이 아니었을까? <음악의 방>을 읽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제프리 디버 또한 마찬가지였다. 덴젤 워싱턴이 주연한 <본 콜렉터>로 잘 알려진 유명한 불구 형사 링컨 라임 시리즈의 주인이 바로 제프리 디버다. 하지만 그의 장편들은 어딘가 유치한 구석들이 있는 게 사실이다. 현실감 없는 범인들, 예측 가능한 반전, 너무나 천재적이라 도저히 공감이 가지 않는 형사까지. 그런데 그의 이야기에서 링컨 라임을 지우고 나니 오히려 긴장감 넘치는 소품 하나가 탄생하지 않겠는가. 심지어 그의 작품들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리 차일드는 영화 <잭 리처>가 그의 커리어를 모조리 파괴할 정도로 엉망이라 그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선뜻 책을 들기 쉽지 않은 작가였다. 그러나 <사건의 전말>을 읽고 나니 잭 리처에게도 한번쯤 온정의 손길을 내밀어 줄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됐다. 머리 속에서 톰 크루즈를 지우고, 심호흡을 하고, 용기를 내 잭 리처를 펼쳐든다. 실패할 확률은 높아보이지만, 어쨌든 경험이란 그런 것이니까.


이 단편선에 가장 아쉬운 점이 있다면 켄 브루언이 빠졌다는 것이다. 이건 모두 그가 아일랜드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바보 같은 미국놈들. 진정한 대가 없이 마스터 피스를 만들려 하다니. 그 무모함에 박수를 보낸다. 이 책에 켄 브루언의 소설이 딱 1,000자만 들어가 있었어도 난 별 다섯개를 줬을 것이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골웨이의 뒷골목. 회색 구름 뒤에 가려 좀처럼 얼굴을 내밀지 못하는 빛. 그 그림자의 왕국이 너무나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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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범람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서혜영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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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범람>은 일본 미스테리의 지평이 얼마나 넓은지를 보여준다. 기괴, 환상, 공포 뿐만이 아니라 실생활 곳곳에 스며든 미스테리까지. 미스테리의 주인공이 평범한 백수에서 프리랜서 탐정까지 될 수 있는 나라. 이것이 바로 이웃 나라 일본의 미스테리다.


파리 남자가 가슴을 밀어 끈적 끈적 부풀어 오른 시체 위로 탐정을 쓰러뜨렸을 때,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대단한 야심도 없이 담담하게 써내려간 문장은 긴장감을 불러일으켜야한다는 사명감을 비웃듯 쿨하고 멋졌다. 쉽게 흥분하지 않는 작가는 언제나 믿을만하다. 과잉은 늘 모자람만 못한 법이니까.


나는 이런 류의 소설에 등장하는 괴상 망측한 트릭을 혐오해왔다. 범죄를 위한 루브 골드버그 기계. 사람들은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언제나 복잡한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안다. 좋은 해결책일수록 간결한 법이다. 범죄를 위해 온갖 요란한 트릭을 끼워맞춰 MBC의 <서프라이즈>보다 더 서프라이즈 같은 짓을 벌이면 민망하기만 하다. 이런걸 가지고 천재적이니, 대단한 반전이니 하는 평가가 사라져야 진짜 리얼한 추리, 미스테리 장르가 탄생할 것이다.


알라딘의 소설MD 최원호님은 <어두운 범람>을 '악에게 정서적으로 침범당할 여지가 없는 깔끔한 세계'라고 했는데 이보다 더 이 책을 잘 설명하는 말은 없는 것 같다. 대단한 악도, 대단한 탐정도, 대단한 사건도 없다. 책장을 연 순간 카드를 찍고 버스에 올라타 목적지에 내려 화창한 가을 낮의 거리를 걷듯 자연스럽게 결말에 도달할 것이다. 정황 묘사는 간결하고 악인의 동기와 심리를 깊숙히 파헤치지 않는다. 그러니 조커에 빠진 히스 레저가 될 위험은 전혀 없는 것이다.


물론 이를 피상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쉽게 말해 가볍달까? 매니아들은 이런건 미스테리가 아냐 진짜는 이 쪽이지, 하며 어둠의 오오라가 가득한 숨막히는 검정색 책장을 가리킬지도 모른다. 그들은 말한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시작했다고. 하지만 계속 읽어나가다보면 그런건 시시해져, 결국엔 이리로 올 수 밖에 없다니까. 뭐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몇 번 경험해본 나로서는 이것을 취향의 문제라고 정의할 수 밖에 없다. '본격' 미스테리 장르가 내려주는 어둠의 세례를 받기엔 내 마음이 아직도 순수한걸지도.


<어두운 범람>을 심야의 미스테리 단편 드라마로 만드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만큼 부담이 없는 이야기들이다. 노곤노곤 잠이 오는 몸을 소파에 눕히고 TV를 튼다. 지금은 금요일 밤. 이 기쁜 밤이 감은 눈 뒤로 사라지는 걸 막기 위해 나는 필사적으로 잠과 싸우고 있다. 그래서 튼 TV엔 따뜻한 미스테리 단편 드라마가 나온다. 프리랜서 탐정 시리즈다. 전에도 몇 번 본 적이 있다. 뭐였더라? 에피소드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지금 이걸 보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두어번 하품을 하는 사이에 이야기는 끝났고 잔잔한 엔딩 타이틀이 흘러나온다. 이번 한 주도 수고했어. 스스로를 위로하며 힘찬 다음주를 기약하려는데, 나는 이미 고요한 밤 공기를 덮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이렇게 평범한 이야기를 읽고 이처럼 꿈같은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는 건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


이 책과 비슷한 느낌의 책을 꼽자면 단연코 미야베 미유키의 단편선들이 떠오른다. <음의 방정식>이나 <맏물 이야기>. 두 책을 재미있게 읽은 사람이라면 <어두운 범람>을 놓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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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잡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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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연히 <빅 픽처>를 읽지 않았다. 뻔할테니까. 그런데 우연히 <더 잡>을 읽고 나니 뻔한 것들 중에서도 돋보이는 건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반전 스릴러라고 소개는 하지만 모든 사건과 행동에 딱 떨어지는 개연성이 있는 건 아니다. 반전 소설에선 이 개연성이 핵심이지만, 이 정도면 훌륭하다.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 그래서, 꽤 재밌다.


미국에서 출간되는 이런 장르 소설들을 읽다보면 어마어마한 클리셰들이 차곡차곡 포개져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인종과 문화 지리적 특성, 산업 등이 다양하다보니 그 배경과 인물을 적절히 변주하는 것으로도 클리셰들은 각인된 문화적 편견 속으로 은근슬쩍 스며든다. 미국은 저런가 보구나. 역시 미국이군! 헐리웃과 미국 출판계의 영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거대할 수 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 소설은 딱 헐리웃에서 관심을 가질만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사실 클리셰라는 건 독창적 작품을 생산해 내려는 모든 작가들에게 일반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지는 수식이 아니다. 대개 그것은 모욕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산업과, 고객의 입장은 좀 다르다. 산업은 생산과 유통에 불리한 마스터 피스 보다는 그럴듯한 웰메이드를 원하고 대중들도 여러번 눈여겨봐야 알아챌 수 있는 섬세한 디테일이 가득한 복잡한 제품보다는 바로 사서 바로 쓰고 바로 버리는 제품들을 원한다. 클리셰는 그들에게 '친숙한' 것이다.


어쩌면, 팔리는 작가의 조건은 이 클리셰들을 조합하고, 너무 노골적이진 않게, 얇은 벨벳 천을 덮어 놓은 듯 은밀하게 드러내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이런데 능숙해지면 1년에 400페이지가 넘는 장편 소설을 한 권씩 써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메인 작가는 트리트먼트만 쓰고 보조 작가들이 실제 문장을 적는, 집단 창작도 가능할 것 같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뼈에 새길만한 교훈을 배운 적이 몇 번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사기의 기술에 대한 깨달음이다. 사기는 어떤 새로운 인물이 나로 하여금 그를 믿게 만든 뒤 행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이미 믿는 사람이 나에게 행하는 범죄다. 범죄자들은 어떤 방법이 가장 효율적인지 영업 이익 200조의 초일류 기업보다 더 잘 알고 있다. 특히 범죄 대상을 선별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위기에 빠진 사람들은 눈 앞의 지푸라기도 황금 밧줄로 보이기 때문에 절박한 대상을 찾아낼 수록 사기의 성공 확률은 높다. 그러니 당신이 어떤 곤란에 처해있고 누군가 그 곤란을 해결할 좋은 기회를 제안해 왔다면 그게 사기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법은 아주 쉽다. 그 기회가 당신이 가진 것에 비해 훨씬 큰 보상을 제안하는가. 그렇다면 그건 100% 사기다. 별 볼일 없이 수년간 같은 회사에서 B, C, B를 오락가락하며 평범하게 일해온 사람에게 전에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협력사 사장이 유망한 스타트업의 팀장 자리를 제안한다면? 이 경우 많은 사람들은 드디어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나왔다며 주먹을 꼭 쥔 채 속으로 눈물을 흘린다. 고심은 하겠지만, 마음은 이미 기울어 있다. 하지만 냉정해지자. 당신은 그런 제안을 받을만큼 훌륭한 사람이 아니다.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 네드 앨런은 그런 기회를 받아들인다.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지만 거기서 빠져나오기까지는? 내가 제시한 예시와 달랐던 건 네드 앨런이 매우 유능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사기에 더 쉽게 빠져들게 만든다. 첫째는 그런 기회와 보상이 자신의 능력에 합당하다고 믿기 때문이고, 둘째는 자기가 그 일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은퇴한 은행장과 주식맨들이 대규모 금융 사기에 휘말렸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가? 사기는 논리적으로 완전무결하다. 사람은 모두 죽는다. 그는 사람이다. 고로 그는 죽는다. 의심할 여지 없는 이 삼단논법에는 사기가 가진 중요한 전략이 숨어 있다. 당연하게 내린 전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조건. 사기에 당하고 나서야 우리는 그가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처럼 판 자체를 뒤집는 기술이 바로 사기다.


최동훈 감독의 <범죄의 재구성>의 마지막 장면에는 이런 얘기가 나온다. 사기란 테이블에 앉은 사람을 설득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 사람을 테이블에 앉히기까지의 과정이라고. 테이블에 앉는 순간 이미 게임 끝이다. 당신이 무능하든 유능하든, 사기는 모든 인간을 포용할 수 있는 완벽한 플랫폼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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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선택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박진세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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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에드 맥베인의 <사기꾼>을 읽으려다 배송이 늦는다는 말을 듣고 이 책 <살인자의 선택>으로 바꿨다. 둘 모두 87분서 시리즈 중 하나로 가공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형사들의 이야기다.


에드 맥베인은 애초에 이 시리즈를 '집합적 영웅'이 등장하는 작품으로 구상했다고 한다. 요즘에야 한번쯤은 들어본 얘기일테지만 그 당시에는 신선하고 독창적인 구성이었다고 한다. 좀 더 자세히 말해주면, 87분서 시리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시리즈 내내 고정된 배역을 맡는 게 아니다. 한 작품에서 주도적 수사를 맡았던 형사는 다음 작품에선 또 다른 인물에게 주역을 넘겨 주고 한 발 물러선다. 그렇게 돌아가며 모든 등장 인물들이 저마다 자신의 매력과 능력을 뽐내는 시리즈. 지금 들어도 그렇게 진부한 설정은 아닌 것 같다. 물론 그의 의도대로 됐더라면.


이 책을 읽자마자 나는 책을 선택하는 중요한 기준 하나를 깨우쳤다. 쓰여진지 오래된 범죄 소설은 읽지 말라는 것. 시대가 너무 동떨어지면 등장인물들의 수사 방법에 한숨이 나오기 시작한다. 스마트폰도 이메일로 인터넷도 없는 시대의 범죄 수사. 심문이나 추리 방법에라도 집중해야하는데 안타깝게도 이 책은 그런 재미를 선사하지도 않는다. 굉장히 하드보일드한(건조한), TV 시리즈를(그냥 흘러가는) 보는 것 같다.


사건은 어느새 스르륵 해결돼 있고 그 와중에 우리의 형사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의심이 든다. 범인을 찾는 과정은 너무나 간단하다. 259페이지. 출근 기차 안에서 가벼운 페이퍼백으로 읽을 법한 소설. 이런걸 보면 미국의 출판업은 타겟 유저의 설정에서부터 그들이 책을 읽는 환경까지 세심히 고려하는 것 같다. 분량은 적어야 해요. 한 시간 반, 길어도 두 시간이면 완독할 수 있게. 머리를 싸매고 플롯을 이해하는 게 아닙니다. 읽다가 깜빡 졸아도 연결에 문제가 없어야 합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쯤엔 이미 페이지는 바닥이 나 있고 기차에서 내리는 순간 신문 가판대에서 이 책의 또 다른 시리즈가 독자를 기다리고 있어야 합니다. 아시겠어요?


외국 소설을 읽다보면 편집자와 작가 사이에 벌어지는 날카로운 신경전들을 목격하게 되는데, 진짜로 어마어마한가 보다. <살인자의 선택>에는 이와 관련하여 에드 맥베인이 남긴 인상적인 저자의 말이 있다. 물론 상당부분 농담이 섞여 있겠지만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몇 페이지를 알뜰히 활용해 "부패하고 열의 없으며 탐욕스러운 담당 편집자들"에 대해 얘기해준다. 앞서 말했다 시피 이 시리즈엔 정해진 주인공이 없었다. 그러나 편집자들은 에드를 "지하 감방으로 데리고 가 쇠고랑을 채운 다음 공중에 매달아 썩은 물과 구더기가 들끓는 빵만 먹였고" 그는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들이 원하는대로 스티브 카렐라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만들었고 그는 우주 대스타가 됐다. 덤으로 그의 아내까지.


그 작품의 성공으로 한껏 고무된 작가는 편집자들의 부름을 받아 출판사를 찾는다. 이제는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에드는 생각한다. 지금까지 그들의 콧대를 충분히 세워줬으니까. 이쯤되면 계약의 충실한 이행자로서 작가의 권리를 더 보장받아야 마땅한 일 아니겠는가. 그러나 사무실에서 그가 들은 얘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말했다.


"스티브 카렐라는 당신의 영웅이 될 수 없어요."

"뭐요?" 에드가 말했다.

"당신의. 영웅이. 될. 수. 없다고요."

"이유가 뭡니까?"

"어쨌든 안 돼요."

에드는 가늘게 눈을 뜬 채 알을 밴 살모사보다도 교활한 편집자들의 입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를 영웅으로 만들라고 한 건 바로 당신들..."

"우리가 잘못 생각했어요."

"좋습니다. 그럼 이전 방식으로 돌아갑시다. 기억하시죠? 모두가 영웅이 되는..."

"우리는 단 한명의 영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스티브 카렐라를 주인공으로 만든 것 아닙니까?"

"그는 매력적인 인물이 아니에요."

"뭐라고요?"

"매력적이지 않다고요. 그는 유부남이니까요."

"오!"


그리하여 에드는 편집자들의 요구대로 "확실한 미혼에 여자들을 홀릴만큼 잘 생긴 영웅을 창조" 해내기로 마음을 먹는다. 하지만 그는 이 치욕적 결정에 소소한 반항을 감행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직접 책을 읽어 확인하시길.


이 시리즈가 애초에 작가의 의도대로 기획됐다면 더 재미있었을까? 만약에 대한 질문은 늘 허무한 대답을 들려줄 뿐이다. 어떻게 기획됐다한들 사실 한국의 독자들이 딱히 매력을 느끼진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장기로 보이는 대사의 리듬감과 유머가 번역본에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나의 판단은 냉혹할 수 밖에 없다. <살인자의 선택>은 책 자체의 내용보다는 '저자의 말'이 더 재미있는 독특한 책이다. <사기꾼>에게 한번 더 기회를 줄 생각인데, 기회가 늘 성공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는 걸,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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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이시카와 야스히로 지음, 홍상현 옮김 / 나름북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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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웬 마르크스냐, 고 생각할지 모른다. 이미 패배한 사상을 알아서 뭐하게? 소련은 해체됐고, 중국은 배신했고, 북한은 망해가는 중인데. 마르크스? 공산주의? 당신 빨갱입니까?


공산주의라고 하면 대한민국 사람들은 으레 북조선 민주주의 인공화국을 떠올리기 때문에 그것이 진짜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은 '도대체 너는 누구 편이냐?' 고 묻는 저급한 폭력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 이런 폭력을 간신히 피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무지라는 더 큰 산을 앞에 두고 한숨을 쉬어야 한다. 내가 대학 시절 겪었던 얘기를 하나 해주겠다.


나는 영화를 공부했다. 친구들과 함께 영화 수업을 들었는데 영화 수업이란 대개 워크숍 형태로 진행되기 때문에 다양한 토론이 오간다. 특히 시나리오를 발표하는 날은 굉장히 치열하다. 갑론을박, 이야기의 당위성을 방어하기 위해 매서운 말들이 쏟아진다. 어느 날 친한 놈 하나가 시나리오를 발표했다. 내용인즉, 공산주의자 히틀러가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는(그의 죽음에 대해선 음모론이 많다) 주인공이 히틀러와 닮은 한 남자를 납치, 감금해 살해한다는 내용이다. 이 세상에 공산주의가 퍼지는 걸 막기 위해. 한 마디로, 자유를 위해!


이 얘기를 듣고 그 어떤 이질감도 느끼지 못한 사람은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를 잘 듣기 바란다. 나는 친구가 시나리오 낭독을 끝낸 순간 일반적인 대한민국 사람들의 머리 속에 '공산주의=북한=독재=전쟁=학살=나쁜 놈' 이라는 강력한 도식이 형성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전쟁을 일으키거나 민간인 또는 정적을 학살하고 독재를 하면 '공산주의자'인 것이다. 아직도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겠는가? 히틀러는 나치였다. 극우주의자란 말이다. 공산주의는 극좌, 즉 히틀러 집권 시절 그와 가장 치열하게 싸운 적이었다!!


내가 그 얘기를 해주자 친구는 전혀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히틀러처럼 나쁜 놈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면 도대체 누가 공산주의자란 말인가? 녀석의 멍청한 표정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교수님이 그 점을 정확히 지적해줬음에도 녀석은 수업 내내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노려봤다. 물론 그 놈은 2차 시나리오 발표 때 내용을 대폭 수정하긴 했다. 녀석은 히틀러가 공산주의자라는 내용을 완전히 삭제했다. 대신 유대인 학살을 이렇게 정의했다. 유대 자본이 세상을 지배하는 걸 막기 위한 과감한 혁명. 자본주의=돈=유대인=물신숭배=사치=향락=IMF=나쁜 것 이라는 도식이 히틀러를 자본으로부터 이 세계를 구원하려 한 순교자로 만든 것이다. 나는 학기 내내 그 놈의 무지를 모욕하고 영화 내용의 오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 놈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놈은 온갖 모욕을 참아내며 끝끝내 영화를 완성한다. 영화는 그 해 중앙대학교 영화제에서 금상을 수상, 100만원의 상금을 받는다. 무지의 심연은 이토록 깊고, 또 어둡다.


하나의 사상이 세상을 통째로 바꿔버렸다. 관념(생각)의 힘은 이토록 놀랍다. 그런데 그 사상의 주인공이 관념보다 실재를 중시했던 유물론자 마르크스라는 사실은 우리를 놀랍게 한다. 어쩌면 마르크스의 사상은 그 본질에서부터 오해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유물론자'의 '관념'이 세상을 혁명한다. 그 사상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을 거쳐 교조주의적 정치 강령으로 변했고 정적을 제거하는 명분과 독재의 구실이 되었다. 마르크스는 일부 자본가들이 독점하는 생산 수단을 국유화해 자본이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을 막고, 그 생산의 결과물을 모두가 골고루 나눠 가진 뒤, 짧아진 노동 시간으로 생긴 여가를 자기계발과 취미에 투자하는 창발적 사회를 만들길 원했다. 그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였던 것이다.


그나마 공산주의라는 말이 살아있을 땐 그걸 호환마마 보듯 하더니 막상 자본주의가 세상을 지배하고 나자 사람들은 다시 마르크스를 찾기 시작했다. 아마 한국인의 99%는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가 크게 잘못됐으며 뭔가 대단한 변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이 세계가 곧 자멸할 것이라 말할 것이다. 끊임없이 오른쪽으로 질주하는 자본에 고삐를 달아 왼쪽으로 끌고올 힘이 필요한 시대. 우리는 우리 스스로 쓰레기통에 버렸던 마르크스를 다시 찾는 중이다.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은 자본론, 공산주의는 커녕 마르크스라는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가벼운 책이다. 물론 인용문의 번역이 별로라는 점, 또 마르크스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너무 너무 싱거울 수 있다는 건 아쉬운 점이다. 제목 그대로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에 충실한 책. 그러나 책의 두께와 디자인에 대해선 두 엄지를 백번을 치켜세워도 모자랄 정도로 훌륭하다. 이 책은 들고만 있어도 행복해지는 디자인을 갖고 있다.


사상과 철학을 골치아파 하는 사람이라도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크게 잘못됐다는 건 쉽게 인지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삶을 산건 우리가 처음이 아니었다. 100년 전, 자본주의가 처음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그 시점에 우리와 똑같은 고민을 하고 똑같은 고통, 아니 어떤 면에선 훨씬 큰 고통을 받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행동을 했을까? 그들의 노력이 실패했기 때문에 우리가 여전히 힘든 삶을 사는 거 아니냐, 는 회의주의에 빠질 필요는 없다. 그들의 삶을 조금만 지켜봐도 역사가 진보한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멈추지 말아야 한다. 현실 세계 곳곳에서 우리는 최저 임금 인상에 실패하고, 고용 안정화에 실패하고, 대량 해고를 막지 못하는 듯 보이지만 이는 우리를 포기하게 만들려는 저 높은 곳의 계략일 뿐이다.


모든 저항은 '앎'에서 시작한다. 뭔가가 잘못됐다는 건 느끼지만 그걸 어떻게 바꿔야 할지 모른다면 그 잘못이 생산되는 구조를 면밀히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 철학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을 바꾸고 싶지만 그 방법을 몰라 발만 동동 구르는 사람이라면 이 책으로 시작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깨달음은 호기심으로, 호기심은 더 많은 깨달음으로, 더 많은 깨달음은 더더더더더더 많은 호기심으로 이어져 결국 우리를 거리로 나가게 만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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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yo 2017-12-24 0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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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깨짱 2017-12-24 10:26   좋아요 0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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