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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싸움꾼은 찾기 힘들어
하 진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하진 이라는 생소한 작가의 책을 아무 고민 없이 집어든 이유는 역시 그 제목 때문이었다. <호랑이 싸움꾼은 찾기 힘들어>. 하진도 알고 있겠지. 좋은 책을 찾는 것도 어마어마하게 힘들다는 사실을.


1956년 중국 리아오닝에서 태어난 하진은 이십 대 후반까지 중국에서 살다가 영문학 박사과정을 밟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다. 논문도 끝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볼까 하는 찰나 "톈안먼 사태'가 발생하고 말지. 학생 한 명이 거대한 탱크 앞을 가로 막고 선 그 유명한 사진을 낳은 '천안문 사태'. 2,000명이 넘는 죽음에 분노한 하진은 미국에 남기로 결심한다.


그런 결정을 한 순간 평생을 이고 갈 작품의 주제가 결정된 걸지도 모른다. 이 책에 담긴 10편의 소설은 그야말로 속수무책, 비인간성과 비효율, 무지와 폭력 속에 빠져 허우적 대는 중국의 현대를 그린다. 쉽게 말해 공산주의의 최후를 그린다는 말이다.


당연히 중국은 하진을 싫어했고 미국은 좋아했다. 하진은 가장 적극적이고 가장 반중국적인 방식으로 미국 문학계에 스며들었다. 바로 영어로 소설을 쓴 것이다. 역시 목구멍이 포도청이야, 참으로 쩨쩨한 전략이로군 쌀과 반찬을 얻기 위해 모국어를 팔다니 하고 폄하할 수도 있겠지만 한 작가에게 있어 모국어를 포기한다는 것은 한 남자에게 자신의 남성을 잘라내는 것과 같은 강도의 결정이라는 사실을 알아두시길. 물론 미국 문학계에 편입할 방법으로 작품 활동을 영어로 하는 것 이상의 것이 없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90년대 이후로 중국과 미국이 세계 경제의 패권을 두고 옥신각신 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하진이 중국어로 작품을 썼다 하더라도 너무나 반중국적인 그 내용으로 인해 미국 사회의 관심을 끌 기회는 충분했을 것이다. 단순히 방편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를 선택한 건 일종의 미학적 결정이 아니었을까? 사실 하진의 문장은 <전미도서상>, <플레너리오코너상>, <펜/헤밍웨이상>, <펜/포크너상>, <푸시카트상>, <칸 문학상>, <타운젠트상>, <아시아아메리칸문학상> 등 굵직한 문학상을 휩쓸고, 두 차례에 걸쳐 <퓰리쳐상> 후보에 오른 작가의 것이라고 보기엔 거의 아무런 특색이 없다. 그의 문장은 매우 간략하고, 평범하고, 밋밋하다. 뉴스 보도도 이런 식으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엔 아주 고차원적인 전략이 있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모국어로 글을 쓴다는 건 수 많은 단어가 서로 종이 위를 차지 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는 말이다. 작가 입장에선 어느 것을 버리고 어느 것을 담아야 할지 혼란스럽다. 그래서 단어는 쓸데 없는 수식을 식객으로 들이고 문장은 그저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기 위해 느닷없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것은 너무 많이 알기에 저지를 수 있는 실수들이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는 이같은 실수를 생략하게 만들어준다. 남자가 죽었다. 이 말에서 가장 중요한 건 죽음이다. 이런 문장은 읽는 이를 거추장스러운 통관 없이 곧장 핵심으로 이끄는 위력을 발휘한다. 도정에 도정을 거듭한 쌀 한 톨이 최고의 사케로 변하듯 핵심을 향한 논스톱 질주가 우리를 묵직한 감정의 덩어리들과 충돌하게 만든다.


순도 높은 감정을 선사하기 위한 하진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작품 하나하나는 "적어도 스무 차례"에 걸친 교정을 통해 완성된다고 한다. 작가에게 있어 가장 괴로운 순간은 어렵게 끝낸 글을 다시 꺼내 고쳐 쓰는 일이다. 퇴고를 거듭하는 작가의 고통은 가히 시지프스의 형벌과 비견할 만하다. 그러니 하진의 평범한 문장은 미학적 선택과 치열한 노력으로 만들어진 의도된 산물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호랑이 사냥꾼은 찾기 힘들어>에는 10편의 소설이 있다. 인간의 허위와 허세, 자존심 때문에 벌어지는 촌극은 모파상의 단편을, 평범한 일상을 해학적으로 드러내는 점에선 안톤 체호프를 떠올리게 한다. 하진은 두 위대한 작가가 쌓아 올린 현대 단편 소설의 초석 위에 자신의 작품을 올린다. 그것은 아주 반가운 일이기도, 아주 슬픈 일이기도 하다. 나는 단편을 아주 사랑하는데, 그 단편은 이제 세계에서 밀려나 까마득히 먼 곳으로 날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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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BI 행동의 심리학 - 말보다 정직한 7가지 몸의 단서
조 내버로 & 마빈 칼린스 지음, 박정길 옮김 / 리더스북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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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마음을 읽고자 하는 바람은 인류의 오랜 숙원이었다. 우리는 프로이트가 알려 주기 전에도 이미 인간의 속마음과 겉마음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이걸 아는 사람이 협상을 지배하고 권력을 차지한다. 당신이 하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을 수 없다는 믿음. 그래서 기어이 그 속내를 펼쳐 보고 싶다는 욕망. 심리학에 대한 열망은 세상에 뿌려진 불신의 씨앗에서 싹을 틔운다.


<FBI 행동의 심리학>은 이 열망이 가장 치열하게 발휘되는 분야의 사례를 모아 놓은 책이다. 직업적 거짓말쟁이, 바로 범죄자들을 심문하는 일 말이다. 저자 조 내버로는 25년간 FBI 대적첩보 특별 수사관으로 활동, 고도로 훈련된 스파이들을 상대해 왔다. 거짓말을 할 땐 반드시 무의식적 행동 변화가 수반된다. 눈동자의 작은 흔들림,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 느닷없이 찾아오는 침묵. 숙련된 수사관은 현미경으로 세포를 훑듯 아무리 작은 행동의 변화라도 놓치지 않는다. 물론 승부가 항상 수사관의 승리로 끝나는 건 아니다. 왜? 적들도 내가 무엇을 아는지 알기 때문에. 바로 여기서부터 아주 치열한 심리전이 펼쳐진다. 무의식적 행동 변화를 충분히 인지하는 범죄자라면 진실을 얘기하면서 의식적으로 눈동자와 목소리를 떨리게 할 수도, 느닷 없이 침묵을 꺼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정보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조작된 건 그의 행동일까, 아니면 그의 말일까?


바로 여기에 대한 대답이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책이었다면 아주 많은 재미를 얻었을 것이다. 물론 14,000원 짜리 책 한권에 30년 경력의 수사관이 지닌 모든 경험과 노하우를 담을 수는 없다. 그런 걸 바라면 도둑놈이지. 그런데 초판 72쇄를 찍은 책 치고는 어이 없을 정도로 당연한 얘기가 많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인간 거짓말탐지기' 조 내버로가 밝히는 커뮤니케이션의 비밀!


첫째, 스트레스를 받거나 초조해지면 사람들은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무릎 위에 손바닥을 문지르는 경향이 있다. 와우! 정말 몰랐네.


둘째, 실눈을 뜨고 이마를 주름지게 하면서 얼굴을 찡그리는 것은 고통과 불편함의 표시다. 세상에 난 이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짓는 표정인 줄 알았는데.


셋째, 비웃음은 순간적으로 경멸 또는 경시를 나타낸다. 그것은 "나는 당신의 생각에 신경쓰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의미다. 하하하하!


최근에 취업이 어렵다고 하니 면접 시 하지 말아야 할 행동도 몇 가지 가르쳐 주겠다.


첫째, 의자에 앉아 엉덩이를 쭉 뺀 뒤 다리를 쩍 벌리고 늘어져 있지 마라. 면접관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 것이다.


둘째,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 깐 채 어깨를 귀쪽으로 올려 축 쳐진 자세를 하지 말라. 면접관에게 자신감이 없는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렇다. 우리의 일상 생활에선 굳이 행동 변화 같은 걸 유심히 관찰하지 않더라도 당신은 당신의 태도가 어떤 반응을 불러 일으킬지, 나와 대화하는 상대가 어떤 기분과 마음을 갖고 있는 지 충분히 알 수 있다. 감정이란 많은 경우 직관적으로 느껴지지 분석해서 알아내는 게 아니다. "저 사람이 나한테 화난 것 같아, 왜냐하면 허리에 손을 올린 채 턱을 쳐 들고 큰 소리로 얘기했기 때문이야" 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조 내버로를 최고의 수사관으로 만든 건 이런 행동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능력이 아니라 아주 작은 행동의 변화도 포착하는 뛰어난 관찰력과 그러한 반응을 유도하는 질문을 찾아내는 능력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까 당신이 정말 누군가의 진심을 알고 싶다면 이런 책을 읽고 연구하기 보다는 그냥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유심히 지켜보는 게 더 낫다. 뛰어난 관찰력이란 본디 애정을 갖고 오래 지켜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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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연습
조정래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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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호의 책을 읽는 건 쉽지 않다. 그것이 별 재미가 없을 때는 더더욱.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무려 1천 3백만 부가 팔린 소설이다. 한 번도 쓰기 어려운 대하 소설을 세 번이나 써낸 작가가 내놓은 200페이지 짜리 단편(조정래의 기준으로 단편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이 바로 <인간 연습>이다.


<인간 연습>의 가장 큰 특징은 고루함이다. 미전향 장기수들이 주인공이다 보니 어쩔 수 없다고 할 법도 하지만 똑같이 옛날 사람이 나오는 황석영의 작품을 읽을 땐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걸 기억하자. 시대를 탈주한 문장은 성의없이 쓴 문장과 마찬가지로 손발을 오그라들게 할 수 있다는 걸 배웠다.


행복의 조건은 사상이 아니라 인간이다. 그 어떤 위대한 사상이라도 인간성을 잃는 순간 사람을 불태우는 재앙이 된다. 이것이 <인간 연습>의 주제다. 그래서 미전향 장기수들이 등장한다. 끝까지 공산주의를 버리지 못해 몇 십 년을 감옥에 갇혀야만 했던 불행한 사람들. 이들만큼 작가의 주제를 잘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을 더 불행하게 만드는 건 바로 이 소설이다. 똑같은 모양의 블록 중에 원하는 색깔을 찾아 끼워 맞춘 듯한 피상적 인물들. 대가는 장난 삼아 블록 놀이를 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박동건과 윤혁이다. 두 사람은 모두 비전향 장기수였지만 박동건 쪽이 더 지독했다. 그 결과 박동건은 나라도, 가족도, 친척도 외면하는 외로운 죽음을 맞는다. 반면 윤혁은 변화된 세상에서 나름대로 살아야 할 이유를 모색하는 사람이었고 그 해답을 자신이 돌보는 고아 두 명과 보육원장 최선숙에게서 찾아낸다. 여기에 치열한 내면 갈등과 고뇌는 없다. 두 인물은 그저 작가의 손에 등 떠밀려 찍 소리도 못하고 정해진 길을 따라 가는 꼭두각시처럼 보인다. 인물은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 작가가 부여해준 성격에 따라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여 행동해야 한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어색했던 것 이리라. 자기 생각을 갖지 못한 인물들의 피상적 연기. 그건 마치 재연 배우들의 <서프라이즈>를 보는 것처럼 어색함을 선사한다.


그렇다면 각본은 어떨까? 박동건의 죽음을 앞당긴건 소련의 붕괴였다. '사상의 조국'이 맥 없이 무너지는 걸 보고 '헛 살았다'라는 공허함이 밀려 들어 살려는 의지가 완전히 박살난 것이다. 그런데 박동건이 꿈꿔왔던 건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아니었던가? 소련이 붕괴한 건 공산주의라는 이름을 걸고 독재를 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소련의 붕괴를 보고 박동건은 오히려 힘을 냈어야 한다. 소련의 붕괴가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만이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 디렉션을 거부할 수 없는 이 연약한 늙은이는 떨어지는 마지막 잎새와 함께 영원히 눈을 감는다.


한편 윤혁은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를 놓은 손에 자본주의를 움켜쥐는 우를 범한다. 그는 자신이 출판한 책의 성공과 함께 두 고아를 데리고 최선숙의 보육원으로 들어간다. 이곳은 마치 유토피아적 소규모 공동체를 연상케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에 비춰볼 때 이는 언제 박살날지 모르는 위험한 공동체에 불과하다. 윤혁은 언제까지 두 고아를 보살필 수 있을까? 그저 재우고 입히고 가끔 삼겹살이나 짜장면을 먹이는 걸로 충분할까? 치솟는 사교육비는 어떻게 할 생각일까? 아이들이 대학을 갈 수는 있을까?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하면 취업도 안 될텐데, 설령 좋은 대학을 간다 한들 등록금은 또 어떻게 하지? 윤혁의 행복을 산산 조각 내기 위해 기다리는 건 이것 뿐만이 아니다. 최선숙은 언제까지 이 식객들을 말없이 보살펴 줄까? 운영비가 떨어져가는 상황에서도 최선숙은 윤혁과 두 고아를 처음과 똑같은 미소로 맞을 수 있을까? 잔인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모습을 하기란 공산주의가 인간의 모습을 하기 보다 수 백 배는 힘들다. 공산주의에게 인간의 얼굴을 하는 게 선택의 문제였다면 자본은 그 자체가 비인간적이라 아예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정래는 얼핏 해피엔딩으로 보이는 윤혁의 선택 속에 아주 잔인한 진실을 숨겨둔 것이리라. 윤혁은 결국 또 실패할 것이다. 인간은 그저 끊임없이 실패하고 그로인해 고통을 당할 뿐. 고통의 결실은 없다. 바로 그 고통이야 말로 우리 삶의 본질이다. 이게 아니라면 나에게 <인간 연습> 해피엔딩은 완전히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아무래도 대문호의 뜻을 온전히 펼치기에 200페이지는 너무나 짧았던 것 같다. 아무리 대작가라도, 주어진 원고지가 다 한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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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늑대 - 괴짜 철학자와 우아한 늑대의 11년 동거 일기
마크 롤랜즈 지음, 강수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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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늑대와 함께 문명 세계에서 살아가는 걸 상상하는 건 쉽지 않다. 알다시피 늑대는 야생의 존재다. 주변의 동물을 잡아 먹거나 지나가는 사람을 물어 죽일 수도 있다. 아니 심지어 자신을 키우는 주인마저도.


어릴 때 부터 큰 개와 친하게 지내왔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늑대를 키울 생각을 하다니, 그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당연한 말이지만 늑대는 개가 아니다. 웨일스어로 왕 이라는 뜻인 '브레닌'을 이름으로 얻은 이 늑대는 무게가 68kg에 키는 170cm가 넘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그저 큰 개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아마 그렇게 상상했다간 실제로 이 늑대를 만났을 때 두 발이 굳어 땅 위에 철썩 달라 붙을지도 모른다.


진화의 어느 순간 인간과 함께 살기로 결정한 개와는 달리 늑대는 야생에 남았다. 여기엔 단순히 거주지가 다르다는 것 이상의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지프 차의 짐칸에 개와 늑대를 놔두고 잠시 장을 보러 갔다고 하자. 물론 각각 다른 차에 말이다. 추가로 늑대와 개 모두 갇혀 있는 걸 잘 못한다고 가정하자. 개는 늑대만큼 큰 대형종으로. 이 경우 개는 갇혀 있는 것이 답답해 시트를 물어 뜯거나 바닥에 똥 오줌을 갈겨 불쾌함을 표출하는 게 전부일 것이다. 당신은 이 개가 차 시트와 천장을 갈기 갈기 찢어 놓고 접이식 의자를 완전히 박살낸 뒤 숨이 막히지 말라고 살짝 열어둔 창문을 내리고 탈출해 유유히 마트의 시식 코너를 활보할 거라는 상상을 하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늑대는 그렇게 한다.


방문을 닫고 개와 함께 있어보라. 잠시 후 오줌이 마려워진 개는 나가기 위해 방문을 두어 번 긁은 뒤 당신을 쳐다볼 것이다. 개는 인간과 함께 살아가기로 결정한 이래 인간을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 활용하게끔 진화해 왔다. 문을 열수 없다고? 그럼 인간에게 도움을 구하면 된다. 하지만 늑대는 문을 여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한다. 야생에는 그들을 도울 인간이 없기 때문이다. 늑대의 추론 능력은 개보다 훨씬 뛰어나다. 늑대는 이 추론 능력을 활용해 문제의 해결책을 스스로 찾아낸다. 이것이 개와 늑대의 차이다. 그래서 늑대를 기른다는 말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행동하는 동물과 함께 산다는 의미다. 마치 결혼해서 두 사람이 함께 사는 것처럼 말이다.


야생의 존재를 마음대로 인간의 집에 들이는 게 늑대에겐 폭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본성을 억누르게끔 교육 받아온 늑대가 진정 행복할 수 있냐는 것이다. 브레닌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집을 나갈 수 있었다. 1미터의 돌담 따위는 한 번에 훌 쩍 뛰어 넘을 정도였으니까. 그럼에도 브레닌은 야생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 남자와 사는 게 행복했기 때문이다. 야생은 생각보다 혹독한 곳이다. 매번 먹이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를 벌이고 덫을 피하기 위해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고 사냥꾼의 총을 피해 달아나고, 심지어 무리의 알파 수컷 외에는 섹스도 금지된다. 브레닌은 저자와 함께 11년을 살았다. 혼자 있는 게 싫어 저자를 따라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저자의 직업은 교수다). 수업이 지루해질 때면 길게 울었고 배가 고프면 학생의 가방을 뒤져 도시락을 훔쳐 먹었다. 와중에 집을 뛰쳐나가 동네 암캐를 덮치기도 했다(암캐의 주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매끼 질 좋은 고기와 사료는 보너스였다. 아마 브레닌이 야생에서 태어났다면 이 모든 일들은 꿈에서 조차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전히 누군가는 이 모든 편의들이 진정 늑대를 위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늑대는 야생에서 사는 게 더 옳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이 말은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저마다 주어진 삶의 조건이 있고 그것을 절대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말로 들린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 반군에 의해 황폐화된 땅에서 태어나 동물의 썩은 시체를 주워 먹고 사는 아프리카의 아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아야 할까? 인간은 자신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조건을 찾아 끊임없이 환경을 바꾸는 동물이다. 그렇다면 늑대라고 이렇게 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당신은 늑대에게 선택의 자유가 없었다고 말할 것이다. 두 삶을 모두 경험한 뒤 어느 것이 더 낫고 못한지 판단할 기회가 없었다고 말이다. 아까 그 아프리카 아이를 태어나자 마자 입양했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은 아이가 7, 8살 때 쯤 됐을 때 다시 아프리카로 보내 그 생활을 경험하게 할 것인가? 스스로 어떤 삶이 더 나은지 판단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인간이 자기 삶에 늑대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순간 늑대도 자신의 삶에 인간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것이다. 11년에 걸친 두 종의 동거기를 읽다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늑대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는다. 이 늑대를 보고 있으면 이성이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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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한 십자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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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한 십자가>는 스쳐 지나가는 두 개의 살인을 통해 사형제도의 허점을 드러내는 장르 소설이다. 일본에서만 30만 부가 팔렸다고 하니 아무래도 장르에 대한 재미에 무거운 주제의식 까지 더해 그토록 많은 사랑을 받았나 보다. 사람들은 재미만 있어도 싫어하고 주제만 있는 건 더 싫어하니까. 440페이지에 걸쳐 사건의 진상을 드러내는 미스테리 소설이니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내용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겠다. 그러면 좀 다른 얘기를 해야 하는데, 이게 정말 고민이다. 아무래도 좋은 말이 나오긴 틀렸기 때문이다.


전세계 수백만 독자의 지지를 받는 작가와 작품을 너 따위가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게 말이 되냐 고 물으면, 솔직히 좀 송구스러운 기분이다. KPOP 스타의 박진영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이 작가와 작품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겐 모욕이 될 수 있고, 상처가 될 수 있고, 혐오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히가시노 게이고는... 잘 모르겠다. 이 책이 두 번째인지 세 번째인지 모르겠지만 둘이든 셋이든 다 별로였다. 딱히 평을 하기도 애매할 만큼 별로였다. 사실 최악이었다.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동명의 소설가가 쓴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말이다. 책날개의 작가 소개를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온다. "데뷔 후 50여 편이 넘는 작품을 써냈음에도 불구하고 늘 새로운 소재, 치밀한 구성과 날카로운 문장으로 매 작품마다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국내에 출간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은 전부 번역에 문제가 있는 것이리라. 대단한 다작 작가인데다 나오는 것마다 인기를 얻으니 늘 새로운 소재를 꺼내 보인다는 건 사실인지도 모른다. 내가 그 50편 전체를 읽은 건 아니니까 그에 대한 판단을 보류한다. 그런데 치밀한 구성과 날카로운 문장이라고 한다면 정말 똥그랗게 눈을 뜨고 쳐다보고 싶다. <공허한 십자가>는 억지와 인위의 덫을 보란 듯이 펼쳐 놓고 독자가 걸려들길 바라는 함정 소설이다. 아마 예민한 짐승이라면 어설프게 가린 쇠 냄새에 질려 거들 떠 보지도 않으리라. 소설에 인위적 구성이 아닌 게 어딨는가? 고 묻는다면 인위적 구성 조차 인위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게 바로 좋은 소설의 조건이 아니냐고 되묻고 싶다. 이 책을 읽다보면 어디선가 스스스스하는 소리가 들린다. 대단하게 부풀려진 미스테리는 440페이지에 걸쳐 서서히 바람이 빠지다 종국에 이르러 피식 하는 방구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완전히 쪼그라들고 만다. 이게 정말 치밀한 구성이라면, 내가 한글 공부를 다시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러나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건 날카로운 문장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책 날개를 쓴 사람이 착각한 것 같다. 다른 건 몰라도 문장만큼은 정말 최악이다. 어설픈 대사는 말할 것도 없고 인상 깊은 문장은 책 전체를 통틀어 하나에서 두 개 도 찾기 힘든 수준이다. 날카로운 문장이란 말을 밋밋한 문체, 짧은 문장, 별 생각 없이 쓴 문장 과 같은 의미로 쓴 거라면 동의한다. 또 이런 조악함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 자체가 문장의 디테일에 힘을 쓰기 보다는 이야기에 집중하는 타입이기 때문이다. 이런 건 스타일 혹은 전략이라고 볼 수도 있다. 오히려 화려한 문체가 이야기의 흐름에 방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문장을 가져야만 좋은 소설이냐 하는 건 각자가 판단할 문제다. 그러나 날카로운 문장이 아닌데도 날카롭다고 소개하는 건 문제가 있다.


솔직히 이런 독설을 쏟아내는 것도 쉽지 않다. 누가 내 글을 이런 식으로 평한다면 나도 아마 살인 충동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나는 모르겠다. 회사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이 어마어마하게 많아 작정을 하고 완독하기로 마음 먹었지만 <공허한 십자가>를 읽고 나니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는다. 지루함의 늪과 조악한 문장의 정글을 지나 마침내 발견한 보물 상자에서 고양이도 끌고 들어가지 않을 만큼 어이 없는 잡동사니를 얻는다면 도대체 왜 책을 읽어야 하지? 그러기엔 내 시간이 너무 아깝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정말 혹시 모르니 그의 책 중 가장 인기가 많고 평가가 좋은 책 한 두 권은 더 읽어 보겠다. 이 위험한 모험을 떠나는 나에게, 부디 이야기의 신의 축복이 내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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