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대로
켄 브루언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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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가 줄어드는 게 아까운 책이 있다. <런던 대로>는 우리 나라에 소개된 켄 브루언의 작품 두 개 중 하나다. <밤의 파수꾼>은 이미 세 번이나 읽었으니 이 책이 마지막이다. 마지막 잎새를 세는 심정으로, 한 자 한 자 마음을 졸이며 읽었다.


<런던 대로>는 헐리웃 고전 <선셋 대로>의 리메이크 소설이다. 영화를 소설로 옮겼다. 골조는 그대로 유지했지만 영화의 주인공 조 길리스(시나리오 작가)를 범죄자 미첼로 대치함으로써 켄 브루언 특유의 범죄 소설이 탄생했다.


원작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재치 있는 입담이 이 소설의 특징이다. 노숙자를 집단 폭행해 죽이고 그 범인을 찾아 무릎에 총알을 박아 넣는 등 끔찍한 중범죄가 커피를 마시듯 태언하게 벌어지지만 아이러니와 비아냥을 뒤섞어 놓은 유머가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지구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소설가들의 능력 중에 하나만 골라가질 수 있다면 주저 않고 이 능력을 갖고 싶다.


미첼은 이제 막 3년 복역을 마치고 복귀한 범죄자다. 폭력 전과였다. 나오자마자 친구와 함께 고리 대금업을 시작한다. 마음에 드는 일은 아니었지만 친구가 그 일로 차지한 고급 아파트와 옷들을 제공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동행한다. 그런데 복귀 환영 파티에서 만난 여기자 한 명이 그에게 새로운 직업을 하나 소개한다. 이모의 집에서 잡역부를 해달라는 것. 미첼은 흔쾌히 받아들이며 자신을 선택한 이유를 묻는다. 여기자가 말한다. 당신이 썩 잘생겼기 때문에. 퇴폐적인 에로티시즘에 범죄의 냄새가 섞여 들어온다.


여기자의 이모는 한때 잘 나갔던 연극 배우지만 지금은 퇴물이 된 노인이다. 그녀는 언젠가 연극계가 자신을 다시 불러줄 거라는 헛된 희망에 갇혀 산다. 엉터리 각본을 쓰고 자기만큼 늙은 대저택의 연습용 무대에 올라 대사를 읊는다. 이 그로테스크한 여자에게 미첼의 육체가 반응한다. 파멸의 시작.


저택엔 노망난 여배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이상한 존재가 같이 머문다. 이 집의 집사 조던이다. 여배우의 전 남편이자 그녀의 매니저. 온갖 잡다한 일을 도맡아 처리하며 매일 아침 그녀에게 배달할 팬레터까지 손수 작성한다. 매우 단련된 육체에 지적이기까지 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완벽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한다. 그는 ex wife와 평생을 함께 살며 그녀의 수발을 들고 그녀에게 섹스 파트너를 제공하는 일까지 묵묵히 해치운다.


그로테스크한 저택에서 벌이는 퇴폐적 에로티시즘의 묘사로 끝날 수도 있었을 소설을 검은 범죄의 웅덩이로 이끄는 건 범죄 조직의 두목 간트다. 간트는 미첼과 함께 고리 대금업을 하는 친구의 두목이었다. 미첼은 단박에 간트의 눈에 들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좋아한 건 대저택에 고이 모셔둔 롤스로이스 실버 고스트. 간트는 그 사실을 털어놓고 미첼은 장난감 가게에서 실버 고스트 모형을 산 뒤 예쁘게 포장하여 간트에게 보낸다. 전쟁의 시작 된다.


대저택에선 정체 불명의 집사 조던과 미첼이 한 팀을 이루고 다른 쪽에선 간트와 그가 동유럽에서 고용한 암살자가 한 편이 된다. 전쟁은 미첼의 친구가 대저택의 나무에 매달려 죽는 것으로 시작한다. 섹스대신 카시트를 축축히 적시는 핏물이 소설을 채워간다. 그 피가 다 마르기도 전에 다른 피가 흘러 나온다. 모든 범죄 소설에서 피가 멈추는 시점은 언제나 똑같다. 그것은 더 이상 흘릴 피가 없을 때이다.


켄 브루언의 주인공들은 저학력에 알콜 중독자 혹은 범죄자지만 하나 같이 책을 끼고 산다. 그들은 범죄 소설에 푹 빠져 살다 어느 순간 그 소설과 크게 다를 거 없는 삶을 살아간다. 고독과 우울, 심각한 정신적 결함 그리고 독서의 결합.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소설 전체에 형언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번역된 대사가 너무 올드하고 짧은 문장이 독특한 리듬을 만들어내는 문체를 잘 살려내지 못한 번역이었음에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책이었다. 2017년에 작은 소망이 하나 있다면 이 작가의 책이 모두 한국에 소개되는 것이다. 흔한 말로, 인생 작가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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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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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피>가 나에게 준 것은 김언수였다. 책이 가져다준 재미보다 더 큰 선물은 김언수였다. 김언수는 앞으로도 계속 소설을 써낼 것이다. 그 말은 내 삶의 무료와 권태, 좋은 책을 고르는 피곤함이 다소 해소될 것임을 의미한다. 주저없이 고른 두 번째 소설, <설계자들>이다.


<뜨거운 피>에 비해 이야기의 밀도가 낮은 감은 있지만 책장을 넘기게 하는 힘만큼은 여전히 놀라울만큼 강렬하다. 암살자들의 이야기다. 거칠고 촌스럽게 치고받지 않는 그들은 서로 칼 한 자루를 손에 쥐고 반보 싸움을 한다. 정중동. 멈춰 있던 몸이 눈 깜짝할 새에 움직여 급소에 칼날을 꽂는다.


주인공 래생은 '도서관' 소속이다. 도서관은 지난 수 십년 간 대한민국의 권력들이 초법적 수단을 강구할 때 마다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해준 암살 단체다. 이 업계는 설계자와 암살자로 구성된다. 설계자는 기획하고 암살자는 실행 한다. 수녀원 쓰레기통에서 태어난 주인공 래생은 도서관에서 자라 암살자 교육을 받고 자연스레 암살자가 된다. 실력 좋고 얼굴도 잘생겼지만 그에겐 알맹이가 없다. 그저 계획에 따라 타겟의 목에 칼날을 꽂는 킬링 머신. 


도서관의 수장 너구리 영감이 래생을 선택한 이유는 그가 고아였기 때문일 것이다. 너구리 영감은 래생을 학교에도 보내지 않았다. 그가 원한건 도서관이라는 시스템을 이룰 부품이었기 때문이다. 가족, 친구, 사랑. 이런 것들은 인간의 존재를 충만하게 만들지만 부품으로선 불량 요소일 뿐이다. 살아갈 수록, 그나마 친구라고 부를 수 있었던 동료 암살자들이 죽어가는 것을 볼 때마다 래생의 숨에 짙은 허무의 냄새가 배어나온다. 래생은 생각한다. 그가 죽을 때 눈물을 흘려줄 사람은 누구인가. 래생 자신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암살을 반복하는가.


래생의 이름은 올 래(來)에 날 생(生)이다. 래생은 그 뜻을 이번 생은 글렀으니 다음 생에나 잘해 보라는 의미로 해석하지만 이름을 지어준 너구리 영감은 한번도 그 뜻을 말해주지 않는다. 래생의 해석은 일종의 자조로 보인다. 도서관의 부품일 뿐인 자기 삶에 대한 자조. 그걸 알면서도 자신을 이 세상과 연결해주는 유일한 끈인 도서관을 떠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비웃음. 하지만 자조란 확신 혹은 믿음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자조에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는 일말의 꿈틀거림이 존재한다.


이 희미한 저항은 암살 시스템 전체를 붕괴시키려는 한 여자 설계자를 만나면서 점점 커져간다. 처음에 래생은 여자의 계획이 무모하며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시스템의 맨 꼭대기에 그것을 통제하는 왕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그 왕을 죽이고 나면 전체가 무너질 거라 생각한다. 천만의 말씀. 그것은 시스템을 만든 것이 인간이라는 착각에서 비롯된 편견이다. 래생은 말한다. 인간이 시스템을 구성하는 게 아니다. 시스템이 적절한 인간을 골라 자신을 구성하는 것이다. 악당이 사라진 자리는 눈깜짝할 새에 다른 악당이 차지하고 만다.


그러나 여자는 래생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차근 차근 계획을 수행해 나간다. 그 단호한 의지 속에서 래생은 자신의 삶이 누군가에게 중요한 의미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올 래에 날 생. 이 이름은 과연 무슨 뜻일까? 그가 핵폭탄을 들고 시스템의 핵심으로 파고든 순간 이름은 완전히 새로운 풀이의 가능성을 지닌다. 올 래에 날 생. 미래를 낳는 자. 아마도 그의 이름은 이렇게 해석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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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9
케빈 패스모어 지음, 이지원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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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이란 책을 읽고 있으니 사람들이 물어온다. 파시즘이 뭐냐고. 나는 두 번 놀랐다. 사람들이 파시즘이 뭔지를 모른다는 것에. 내가 파시즘에 대해 정의를 내릴 수 없다는 것에. 당황한 나는 대답했다. "나쁜 정치를 파시즘이라고 합니다."


변명을하는 건 아니지만 파시즘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건 유용하지는 않다고 말하고 싶다. 예컨대 파시스트를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해보자. 그렇다면 박근혜 대통령도 파시스트인가? 박근혜 대통령은 무능력한데다 민주주의를 파괴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파시스트로 모는데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민주주의를 파괴했다는 말은 여러 정당이 서로 자신의 정의로움을 과장하고 상대편을 공격하기 위해 손쉽게 꺼내는 말이니 변별력이 떨어진다.


그럼 독재자를 파시스트라 불러야 할까? 사실 러시아의 독재자 푸틴이나 일당 독재의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현대판 파시스트에 가장 근접하긴 하다(공산주의자들이 파시스트와 벌였던 과거의 전쟁을 생각해보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히틀러처럼 노골적인 인종차별 정책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대놓고 파시즘을 지지하는 정당은 없다. 유태인 학살이나 독재를 공약으로 거는 정당도 없다. 오늘날 파시즘은 매우 다양한 형태로 변해왔으며 보수에, 극우에, 심지어 좌파 정당들에도 유산을 물려줬다. 이런 상황에서 유용한 것은 추상적 정의가 아니라 파시즘의 구체성을 추적해 나가는 것이다.


파시즘 특징은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극단적 민족주의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

독재

인종 차별(외국인, 이민자에 대한 혐오)

유일 정당

전체주의

반공

폭넓은 대중적 지지


이 중에 눈에 띄는 특징이 하나 있을 것이다. 바로 폭넓은 대중적 지지. 놀랍지 않은가? 이미 파시즘이란 말에서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뭔가 정의롭지는 않을 거라는 뉘앙스가 풍기는데도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니. 2016년 미대선 결과를 보면 이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는 히틀러의 환생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의 미치광이였다. 그러나 그는 당당히 대통령이 됐다. 누가 그를 뽑았을까? 트럼프는 엄청난 부자에 보수 정당의 대표였음에도 몰락한 산업지역, 이른바 러스티 벨트의 지지를 받았다. 완벽한 노동자의 적이 몰락한 노동자의 지지를 받은 것이다.


원인 중 하나로 탈산업화로 인한 남성 노동자의 실직율 증가를 꼽을 수 있다. 경제적 어려움이 문화적 박탈감으로, 과시적 소비 행태가 성적 매력으로 이어지는 오늘날의 사회 구조상 직장을 갖지 못한 남성의 소외감은 극대화 될 수 밖에 없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이민자들과(내 나라에와서 돈을 훔쳐가는) 전문직 여성에(여자 주제에 나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대한 혐오감을 갖게 된다. 이들의 분노에 부채질을 하는 건 정부의 안이한 태도다. 우리가 누구인가. 대미국의 전성기를 이끈 사람들이지만 이제는 직장도 없이 천덕꾸러기 취급이다. 이런 우리를 돌봐줘도 시원찮을 판에 사회적 약자 운운하며 이민자에, 미혼모에, 워킹맘, 동성애자 따위를 돌보려 하다니!


이들의 눈에 정부는 지독한 샤이 가이다. 외국인들의 범죄를 막는 방법이 뭘까? 그들을 모두 추방시키거나 죽이는 것이다. 고용율을 높이는 법은? 외국에 공장에 세운 기업들에 강도 높은 세무 조사를 실시하고 막대한 과징금을 부여하는 것이다. 인권이니 법이니 그런 건 다 지긋지긋하다. 나쁜 외국인, 나쁜 기업인 하나 때려잡는 데 뭐 그리 많은 절차가 필요한가?


이것이 비단 미국만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대단한 오산이다. 한국처럼 강인한 지도자에 대한 향수가 강한 나라에서는 이보다 더한 비극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이건 좌우의 문제가 아니다. 괴물은 좌우 어느 쪽에서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친일파를 모조리 찾아내 재산을 몰수하고 강제 부역을 시키겠다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아니, 현대사의 비극을 만들어낸 사람들, 전두환이나 김기춘을 반드시 응징하겠다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아마 그의 발언이 초법적이고 민족주의를 자극하며 반론을 전혀 용납치 않을 수록(전체주의) 우리의 마음은 더 깊숙이 빨려 들어갈 것이다.


오늘날 파시스트들은 모두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겠다고 공언한다. 그중에 누가 파시스트고 누가 아니냐를 가리는 건 매우 어렵고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나에겐 한가지 기준이 있다. 나는 모든 걸 한방에, 단숨에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 혹은 그런 기대를 받는 사람을 파시스트로 규정한다. 멕시코 이민자들이 문제라고? 그럼 내가 장벽을 세워줄게. 부패한 정치가 문제야? 모조리 없애줄게. 제가 칼춤 한 번 제대로 춰보겠습니다!


진정한 민주 사회에서는 한 사람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게 불가능하다. 그게 가능했다면 역설적으로 우리가 박근혜를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것도 불가능 할 것이다. 강력한 지도자 한 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폭력적 독재 국가에서 살게 될 것이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대한민국 같은 나라 말이다.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뒤 세상에서 나치즘과 파시즘은 멸종할 거라 예상됐다. 놀랍게도 그 둘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권력을 잡고자 하는 일부가 그것을 악용하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파시즘이 대중의 본질적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파시스트를 원한다. 그저 그들이 내 친구이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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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의 야간열차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8
다와다 요코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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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의 야간열차>는 매우 특이한 소설이다. 여지껏 한번도 읽어본 적 없는 종류의 책이다. 모든 소설은 삼인칭 혹은 일인칭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야간 열차 안에서 주인공은 바로 우리가 된다. 이 소설은 이인칭, 즉 당신을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날 오후부터 밤까지 당신은 함부르크 역 근처에 있는 작은 홀에서 춤을 추었다(p.9).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 남의 사생활을(소설을 읽는다는 건 기본적으로 관음증을 전제한다) 훔쳐보려던 당신은 느닷없이 함부르크의 댄스홀로 소환당한다. 관객이 아닌 행위 주체로서 이 여행에 참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여행을 한다는 것, 즉 누추한 일상을 벗어던지고 마음에 낀 생활의 때를 벗기고자 하는 그 당연한 판타지를 충족시키지 않는다. 야간 열차는 도처에 숨어 있는 암초를 만나 깨지고 뒤틀리고 멈춰 선다. 여행을 지배하는 건 설렘이 아니라 낯설음이다. 낯설음은 자극과 흥분 말고 불안과 걱정을 낳는다. 덜커덩 거리는 열차의 소음과 진동이 심장을 자극한다. 불안은 더 증폭된다.


야간 열차에서의 여행은 우리가 꿈꾸는 그런 판타지가 아니다. 여행은 인생에 대한 일종의 메타포처럼 느껴진다. 깨지고 뒤틀리고 좌절하는 우리의 인생. 지름길을 찾아 고군분투하지만 결국엔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마는. 이 지점에서 나는 우리가 인생에 대해 갖고 있는 고정 관념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깨닫는다. 예컨대,


삶에 목적이 있다는 게 가당한 얘기일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질문이 얼마나 황당한지를 알 수 있다. 나는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해서 혹은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다. 존재는 그처럼 가볍지 않다. 존재가 있고 목적이 있는 거지 목적에 따라 존재가 생기는 게 아니다. 그래서 깨지고 뒤틀리고 멈춰서는 이 여행을 실패한 여행, 혹은 망가진 여행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관점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계획이 엉성하거나 바보같거나 멍청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목적지라는 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생 여행자로 살아간다. 여행은 목적지로 다시 달려가기 전에 잠시 휴식을 취하는 막간의 행위가 아니다. 인생이 곧 여행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모든 실패, 모든 좌절, 모든 성공, 모든 웃음, 모든 슬픔, 모든 눈물, 모든 환희는 그 자체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정해진 목표를 기준으로 달성 완료, 미완료로 구분될 수 없다. 모든 사건은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이다.


그래서 열차의 지연, 잘못된 기차에 타는 것, 짐을 잃어버리는 것 등등은 인생이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는다. 파리행 열차가 파업으로 브뤼셀 역까지 밖에 가지 않았다면 우리의 삶은 미완료 된 게 아니다. 브뤼셀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것이다.


저자 다와다 요코는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데 있어서 천재적인 것 같다. <용의자의 야간열차>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에피소드가 열세 개나 묶여 있다. 흥미진진한 여행기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 대단한 미스테리나 스릴러를 암시하는 듯한 제목도 터무니 없는 기대였다는 게 금방 드러나지만, 소설은 마치 정해진 곳 없이 부유하는 유령 열차를 탄 것처럼 흡입력 있는 현장감을 전달한다. 내가 왜 이렇게 지루한 얘기를 읽고 있을까? 생각하는 순간 당신은 어느새 야간 열차의 침실칸에 누워 소설이 뿜어대는 불안과 신비를 온 몸으로 체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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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피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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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었다. 압도적 이야기가 600페이지에 걸쳐 휘달린다. 양복이 아닌 츄리닝을 입은 지리멸렬한 건달들의 이야기다. 산뜻한 두뇌 싸움이나 깔끔한 결투는 없다. 그저 회칼을 들고 우르르 달려가 적의 배를 가르고 다시 우르르 몰려온 적에 의해 내 배가 갈린다. 운이 없으면 외딴 섬의 양식장에 끌려가 사료 분쇄기에 온 몸이 빨려들어간다. <뜨거운 피>다.


희수는 구암의 이인자다. 동네의 상징인 만리장의 지배인이다. 그곳의 주인은 일제 시대 때부터 구암을 다져온 집안의 3대, 손영감이다. 희수는 손영감 밑에서 온갖 궂은 일을 하며 수십년을 보냈다. 그러나 손에 쥔 것은 지독한 담배 냄새가 밴 만리장의 특실 뿐이다.


손영감은 빠꼼이에 쫄보라 남들처럼 무기나 술을 밀매하지 않는다. 그는 중국산 고추가루나 참기름을 밀수해 국산과 섞어 판다. 구암에서 건달은 삽을 들고 고추가루를 섞는다. 매캐한 가루가 끓어오르는 땀에 들러 붙어 찌릿 찌릿 온 몸을 쑤신다. 희수는 가죽 채 그 짜증을 벗어 던지고 싶다.


그러나 희수는 손영감을 떠나지 못한다. 궁시렁 궁시렁 말 끝마다 토를 달고 불평을 하고 쾅 문을 닫고 나가긴 하지만 그렇게 나가 영영 떠나는 법은 없다. 본래 분노와 불평은 관계의 끝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 끝은 언제나 침묵이다. 희수는 다시 돌아오고 돌아오고 돌아오길 반복한다. 아니 애초에 떠난 적이 없는 걸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애증의 관계다. 자식이 없는 손영감과 아버지가 없는 희수는 유사 부자 관계를 형성한다.


이 유사 부자 관계에 균열을 내는 것은 진짜 핏줄의 존재다. 도다리. 도다리는 손영감의 조카다. 도다리는 계집질과 술 쳐먹기 똥폼재기를 제외하면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이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쓰레기에게 손영감의 모든 것이 돌아갈 것이다. 희수는 이전에 만리장의 지배인을 했던 양동이 독립할 때 손영감에게 무엇을 받았는지 안다. 희수도 결국 남이다. 핥고 뛰고 난리를 쳐봐야 귀여운 개새끼일 뿐이다. 개새끼가 아무리 귀여워도 주인집 상 위에 올라 그 집 아들과 함께 밥을 먹을 수는 없는 일이다. 개새끼는 결국 늙고 병들어 내쫓길 것이다. 뼈다귀 하나 챙기지 못한 채, 그야말로 개털이 되는 것이다.


이런 희수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말이 있다.


영감님에 대한 의리? 동생들에 대한 걱정? 사람들이 너에 대해서 하는 평판? 좆까지 마라. 인간이라는 게 그렇게 훌륭하지 않다. 별로 훌륭하지 않은 게 훌륭하게 살려니까 인생이 이리 고달픈 거다. (중략) 니는 똥폼도 잡고 손에 떡도 쥐고 싶은 모양인데 세상에 그런 일은 없다. (중략) 세상은 멋있는 놈이 이기는 게 아니고 씨발놈이 이기는 거다(305p).


희수는 씨발놈이 되기 싫고 두 손 가득 떡도 쥐고 싶다. 그러나 아무리 골몰해 봐도 그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생각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희수의 갈등 사이로 거대한 음모가 비집고 들어온다. 음모는 희수의 갈등에 풀무질을 하고 뜨겁게 데운 뒤 죽어라 내리친다. 그 망치질에 희수는 소중한 모든 것을 잃고 자신의 목숨마저 뺏길 뻔 한다.


이제 살아남은 희수의 선택은 무엇이 될 것인가? 죽느냐 사느냐는 사실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다. 살아서 씨발놈이 되느냐, 사랑하는 모든 것과 함께 죽을 것이냐, 사실은 이게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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