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한 비린내 - 해양생물학자가 우리 바다에서 길어 올린 풍미 가득한 인문학 성찬
황선도 지음 / 서해문집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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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물고기를 좋아했는데 이유는 알 수 없다. 그건 내 DNA에 각인된 거라 내 의지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오해는 말아야 하는게, 결코 비린내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세상에! 비린내를 좋아하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비린내가 아니라 물고기를 좋아한다. 보는 것도 좋아하고 잡는 것도 좋아하고 먹는 건 더 좋아한다. 찜, 탕, 구이 다 훌륭하지만 역시 최고는 날것이다. 물고기를 날것으로 먹지 않는다는 건 물고기를 먹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방법을 택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날것. 탱탱한 식감에 입안 가득 스며드는 촉촉한 기름의 감칠맛. 많은 사람들이 날것이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고 하는데 육고기가 부위별로 다양한 맛을 내듯 물고기들도 서로 다른 맛을 지녔다. 도미는 달고 농어는 원시적 생명력을 지녔고 광어는 기름지고 전어는 고소하며 우럭은 쫄깃하다. 날것이 싱겁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활어를 즐기기 때문이다. 활어는 고기의 맛이 우러나지 않기 때문에 맛이 싱겁고 주로 탱탱한 식감을 즐기기 위해 먹는다. 초장을 찍어먹는 게 이해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선어의(숙성육) 경우 고기가 가진 고유의 풍미가 잘 우러난다. 광어 양식 세계 1위인 대한민국에선 이제 싸구려 횟감으로 통하는 광어지만 이것도 잘 숙성시켜 먹으면 "이게 진짜 광어의 맛이구나!" 할 정도로 눈이 트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런 광어는 백김치에 싸먹어도 참 맛있다.


사실 바다에서 나는 건 당연하게도 물고기 뿐이 아니다. 각종 해조류, 멍게, 해삼, 개불, 소라, 고둥, 사람만큼이나 다양한 조개들. 아마 조개는 날것보다 구이가 맛있는 거의 유일한 바다 생물일 것이다. 석쇠에 올려 놓고 굽다보면 뚜껑이 열리며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조개들. 생각만해도 아찔하다. 멍게와 해삼 개불은 생긴게 끔찍해 안 먹는 사람들도 참 많은데 이 맛을 좋아하는 사람은 생선회보다 더 즐기는 경우도 많다. 개불은 신기할 정도로 단 맛이 나는데 잘못하면 비릴 수 있어 조심해야 한다. 멍게하면 씁쓸한 맛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데 사실 단맛이 강하고 향이 기가막힌 해산물이다. 해삼은 뭐, 그냥 맛있다. 식탁 위에 올라왔으면 이유를 막론하고 일단 씹어 삼켜야 한다.


이렇듯 나는 물에서 나는 모든 것을 좋아한다. 물과 물고기를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 것 같다. 회식에선 늘 육고기파와 싸움을 벌이지만 소수인탓에 억울한 패배를 씹어삼켜야 한다. 아무튼 물고기를 너무 좋아하는 탓에 평소에 잘 보지 않는 TV도 물고기가 나왔다 하면 무조건 본다. 각종 다큐에서 생생정보통, VJ특공대, 내고향6시, 남도지오그래피, 한국기행, 한국인의 밥상, 극한직업까지, 물고기를 다루는 순간 내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 물고기에 대한 책을 읽지 않을 이유가 어디있겠는가?


<우리가 사랑한 비린내>를 보는 순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비린내를 사랑하는 건 아니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됐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수산 자원을 관리하는 공무원, 물고기 박사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물고기를 연구하고 보존, 재생, 육성하는 일을 해왔다. 그탓에 책은 우리가 알고 싶은 정보들 즉 어떤 물고기는 무슨 맛을 내고 언제나 제철이며 어떻게 먹어야 좋은가에 대한 내용보다는 물고기 놈들의 생태, 산란, 크기, 특징을 다루면서 자신이 경험한 업무들을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놓는다. 물고기들의 역사적 유례나 사람들이 잘못알고 있는 상식을 설명하는 경우도 있고. 뭐 그래서 딱 마음에 드는 책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물고기를 식재료가 아닌 자원으로 다루는 사람이니까 이런 접근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종류가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쉬운 대중서를 표방했는지 우리가 익히 아는 녀석들이 등장한다. 좀더 다양한 물고기, 다양한 조개, 다양한 바다 생물을 다뤄줬다면 더 좋을 뻔 했다. 크기나 산란, 생태에 대한 얘기도 몇몇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그닥 관심이 가지 않았다. 해양 생물 중에는 상황에 따라 암, 수를 자유로이 바꾸는 녀석들이 있다는 건 신기했지만.


인류는 아주 오랫동안 물에서 나는 놈들을 먹어왔다. 야생의 육고기 보다는 수렵과 채취가 용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고기를 먹는다는 건 사실 우리 DNA에 새겨진 태초의 흔적을 되짚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언제나 황홀하고, 흥분되고, 침이 고일정도로 행복한 맛의 경험을 동반한다. 나는 좋아하는 게 생기면 그것에 대해 제대로 알고싶은 욕구가 생기는데 물고기도 마찬가지.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속속들이 알고 싶은 마음, 아마 여러분도 이해하실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사랑한 비린내>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가벼운 입문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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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의 아리아
곽재식 지음 / 아작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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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약력을 읽어보자. 그는 KAIST에서 원자핵 및 양자 공학을 배웠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는 이론화학을 전공해 현직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럼에도 왕성한 필력으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색다른 소재를 다루는 인간미 있는 글을 써왔다. 이상은 알라딘에 소개된 작가의 약력이다.


학교와 직장에서 쌓은 전문지식이 방대한데다 머리도 좋아 소설까지 쓰는 사람들이 있다. 번뜩이는 소재를 찾아내고 그 위에 하나씩 하나씩 이야기를 쌓아 올린다. 튀어나온 부분은 깍아내고 토대에 논리의 땜질을 더해 기울어진 곳을 바로잡는다. 아마도 이들에게 소설 쓰기는 논문 쓰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책들을 읽다보면 세상과 인간을 너무 도식적으로 다룬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들에게 소설은 일종의 지적유희인 것이다. 인간 자체를 발가 벗기는, 세상을 꼭대기서부터 바닥까지 한 방에 꿰뚫어버리는, 뜨거운 뭔가가 부재한다는 말이다.


이제 <토끼의 아리아>에 대해 얘기해 보자. 눈치가 빠르지 않아도 대충 무슨 얘기가 나올지 알 것이다. 싸가지 없게 말하면 이 책은 세상을 겉핥고 있다. 인물이 너무 평면적이다. 인간의 모순적인, 다양한 속성이 공존하는 완전체가 아니라 작가의 의도에 따라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하는 기계 장치가 있을 뿐이다. 이마에 '악'이라고 쓰인 기계는 오로지 '악'만을 연기한다. 이마에 '선'이라고 쓰인 기계는 오로지 '선'만을 연기한다. 이 짜여진 극본에 생명을 불어 넣으려면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플롯, 참신한 소재 혹은 넋을 놓고 읽게 만드는 입담이 있어야 하는데, 무엇이 있는지는 여러분들이 직접 확인해 보기 바란다. 문장에도 딱히 신경을 쓰는 것 같지는 않다. 바쁜 연구 생활 틈틈이 취미 생활을 하는 것 같다. 솔직히 그렇게 지은 소설을 웹진에 발표하고, 출간까지 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고 존경 받아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작품의 질이 저절로 올라가는 건 아니다.


차라리 하드 SF였으면 어땠을까. 내가 이 바닥을 잘 몰라 순진한 얘기를 하는 걸 수도 있다. SF도 대중화 되지 않은 나라에서 하드 SF라니. 책 뒤에는 작가가 각 소설을 쓰게 된 경위가 실려 있는데, 이를 보면 소설을 의뢰한 단체의 편집 의도에 맞춰 소설을 써준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 잡지는 이러이러한 독자들이 주로 찾아보니 이러이러한 소설을 써주세요. 대중적인 이야기를 위해 작가 본인의 욕망을 상당히 억제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작가에게 나의 평은 대단히 억울하게 들릴 것이다.


모든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 없으니 나 또한 결과만을 보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토끼의 아리아>는 솔직히 짜증이 날 정도였다. 주인공이 처한 불합리한 현실이 고스란히 전이되 책장을 모조리 찢어버리고 싶었다. 작가의 의도대로 된 건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작가는 체념한 듯 무기력해 보이지만 사실은 해탈의 경지에 이른 주인공의 초연함을 통해 분노 너머에서 기다리는 일말의 희망을 손에 쥐길 원했을 것이다. 대실패였다. 나는 화가 나 이야기를 고쳐 쓰고 싶었다. 모든 걸 잃었지만, 자신을 억압하는 권력자들에게 통쾌한 복수를 시전했고, 그렇게 쟁취한 힘과 경험을 토대로 바닥부터 새로운 삶을 쌓아 나간다. 내가 원한 건 이런 이야기였다. 작가는 그 희망을 이어가기 위해 이 소설의 주인공이 '맥주 탐정'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연작 소설을 썼고, 그 중 한 편이 이 책에 실리기도 했지만, 고작 한 편으로는 위로가 되지 못했다.


좋았던 소설은 <박승휴 망해라>였다. 내용이 아니라 제목이. 나도 언젠가는 이렇게 배짱 있는 제목을 내 소설에 붙이고 싶다. <조용하게 퇴장하기>는 소재가 아주 좋았다. 태양계 멸망까지 남은 시간 86년. 사람들은 서기 제도를 폐기하고 잔기(멸망까지 남은 시간을 이용하는 연도 표기 방식. 잔기 86년은 멸망까지 86년이 남았다는 뜻)를 사용하게 된 인류가 한 걸음 씩 다가오는 멸망을 기다리며 사는 내용이다. 문제는, 아주 좋은 소재를 너무 대충 써먹었다는 것이다.


최근들어 SF, 범죄 느와르 등 장르 소설에 지속적으로 도전 중이다. 사람들이 도전에 박수를 보내는 이유는 그게 대부분 실패로 끝나기 때문이다. 나는 이곳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에 앞서 실패를 경험한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이 실패를 토대로 더 나은 선택을 하기 바란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보석을 나에게 나눠주는 것도 잊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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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in 2017-09-26 17: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연한 기회에 들어와 리뷰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양력‘은 ‘약력‘이라 수정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한깨짱 2017-09-26 17:10   좋아요 0 | URL
헉... 감사합니다. 이런 실수를...

2017-10-06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깨짱 2017-10-08 10:13   좋아요 0 | URL
재미있게 읽고 계시다니 너무 감사합니다. 여기서 건방 떠는 거에 비하면 제 소설은 한참이나 수준이 낮은 저급한 것들이죠. 저급하기 싫은데, 그 방법을 알지 못해 몇 년 째 고생 중입니다.
 
넛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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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의 가장 완벽한 재구성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불길함이 엄습했다. 왜 하필 그렇게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작품을 선택한 걸까? 결코 쉽지 않을텐데, 잘해봐야 이런 저런 소리를 들을 게 뻔할텐데, 라는 마음에서 오는 불안이 아니라 그렇게 재미 없는 희곡으로 뭘 어쩌겠다는 거지? 라는 생각에서 였다.


여기서 <햄릿>을 읽어본 사람 손? <맥베스>는? <리어왕>은? <오셀로>는? 솔직히 말해보자. 이 고전들이 정말 재미있었나? 근대 영어를 가장 아름답게 사용한 사람, 이야기의 원형, 갈등의 아버지, 고뇌의 창시자.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문명에 휘둘리지 말고 그냥 그의 작품을 읽어 보자. 나는 요즘 이야기들이 전부 셰익스피어의 아류이며 그저 그가 한때 했던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요즘 이야기들이 훨씬 재미있다. 그런 의미에서 <넛셸>을 <햄릿>의 완벽한 재해석이라 부르는 건 뭔가 억울한 면이 있다. 재해석이라 하면 오리지널리티가 부족해 보이지 않나. 아무리 잘해도 원작을 능가하지는 못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제 막 데뷔한 작가라면 셰익스피어와 비견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영광스러워하며 연신 고개를 숙일 수도 있지만 이언 매큐언쯤 되는 작가에게 이게 칭찬인지는 잘 모르겠다. 솔직히 <넛셸>은 <햄릿>보다 이천만 배 더 재미있다.


덴마크의 왕자 햄릿은 성인이 아니라 뱃속에서 시작한다. 그의 To be or not to be는 유령이 출물하는 음침한 성에서가 아니라 양수가 가득찬 따뜻한 세계, 엄마의 자궁에서 발화한다.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의 소멸을 걱정하게 된 아이. 이름도 없는 이 아이가 바로 햄릿의 환생이다.


뱃속에서 뭘 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이야기의 힘을 간과하는 것이다. 아이는 모든 걸 듣고 모든 걸 경험한다. 태교를 왜 하나? 아이는 엄마가 와인을 마실 때 자신도 얼큰하게 취해 더 달라고 탯줄을 당긴다. 아이를 위해서 그만 마셔야지? 젠장, 도대체 누구를 위한다는 거야? 자기만 기분 좋게 취해서 침대로 돌아가겠다는 엄마를 끈질기게 졸라댄다. 그러면 한 잔만 더 마셔볼까? 엄마가 먹는 건 아이도 먹는다. 엄마가 듣는 건 아이도 듣는다. 엄마가 감각하는 건 아이도 감각한다. 그래서 아이는 엄마가 자신의 작은 아버지와 아버지를 죽일 음모를 속삭이는 이야기를 엿듣는다. 아이는 작은 아버지의 성기가 밤새도록 뻔질나게 엄마의 자궁을 들락날락하며 자신의 정수리를 자극하는 걸 감각한다. 이 치명적 불륜과 음모를 아이는 어떻게서든 좌절시켜야 한다. 그런데 무슨 수로? 여전히 우유부단한 햄릿, 설령 결심을 한다 하더라도 칼 한자루 손에 쥘 수 없는 이 미물이 어떻게? 햄릿의 미간에 꽂힌 고민의 주름은 뱃속에서 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언 매큐언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어딘가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일 이년 전에 읽었던 소설 <이노샌트>의 작가였다. 그때는 그냥 뭐랄까, 사람들이 숭상해 마지 않는 사랑의 힘. 그런 걸 눈 깜짝 하지도 않고 박살내는 통념 도살자이자 지독한 회의주의자인 줄만 알았는데 <넛셸>을 읽고 나니 보통 작가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대단하다. 문장력, 구성, 위트, 유머. 내가 좋아할 만한 모든 걸 다 갖추고 있다.


어쩌면 <넛셸>은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를 일필휘지로 단숨에 써내려간 소설일 수도 있다. 대작가의 소설치고는 분량도 짧고 스케일도 작다. 이야기는 시종일관 무너져가는 700만 파운드 짜리 고택을 벗어나지 않는다. 고뇌의 지박령 햄릿처럼. 그런데도 소설은 지루함을 모른다. 아이가 보여주는 사유의 깊이는 공간의 제약을 초월한다. 엄마와 작은 아버지의 어리석은 음모는 인간의 욕망을 압축적으로 제시한다.


나는 이언 매큐언이 <넛셸>을 필두로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전부 다시 써줬으면 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더이상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트라우마에 갇혀 재미도 없고 읽히지도 않는 문장을 손에 들고 우는 일이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독서에 대해 착각하는 것 중 하나는 그걸 의무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다. 독서는 의무로 하는 게 아니라 재미로 하는 것이다. 그 어떤 훌륭한 사람이 죽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 할 1000권을 선정한다 하더라도 내 입맛에 맞지 않으면 퉤, 뱉어버리고 나한테 맞는 걸 찾아 떠나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독서는 남는 게 하나도 없는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간절히 바란다. 이언 매큐언이 고전을 모조리 박살내 <넛셸>과 같은 보석으로 다시 빚어내주기를. 그가 하지 않는다면 나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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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잭 매커보이 시리즈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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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이 책을 읽고 배운 점에 대해 얘기해 보겠다.


첫째, 역시 첫 문장이 좋아야 한다. 이는 비단 스릴러 장르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책을 손에 드는 독자들의 인내심은 결코 관대하지 않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첫 문장부터 쭉쭉 빨아들이지 않으면 독자는 스마트폰과 모바일 게임과 웹툰의 차지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첫 문장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나는 죽음 담당이다. 죽음이 내 생업의 기반이다(13p).


첫 문장이 이렇게 나와버리면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책에 서문을 달아준 이야기의 왕 스티븐 킹의 생각도 나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여러분도 "나는 죽음 담당"이라는 문장 너머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찾아가는 기쁨을 누리기 바란다(11p).


둘째, 명백한 사건이 등장해야 한다. 이야기는 언제나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사건은 당연하고 명백할 수록 더 큰 힘을 갖는다. 당연해 보이는 자살, 명백한 타살의 흔적,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정황들. 예컨대 피해자의 등 뒤를 뚫고 나온 총알이 발견됐다면 그건 틀림없이 타살이다. 이 명백한 사건을 풀어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 그것에 의문을 품는 캐릭터를 등장시키는 것. 둘, 그것을 철썩같이 믿고 범인을 추적하는 캐릭터를 등장시키는 것. 전자의 주인공들은 명백함을 지키려는 자들의 핍박을 받으며 방해와 때로는 협박을 당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진상을 숨기려는 거대한 힘의 존재 또는 음모를 느끼게 되고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아 급속도로 전개 된다. 이는 큰 스케일의 이야기를 다루는 형식으로 적합하며 주인공 또한 단순히 형사가 아닌 기자, 시민 단체 직원, 피해자의 가족 등 다양하게 구성이 가능하다. 반면 후자는 급작스러운 반전을 꾀하기에 아주 유리한 구조를 갖는다. 화자는 철저한 분석과 논리력을 발휘해 범인을 찾아 나간다. 독자는 화자의 논리가 탄탄하고 드러나는 정황 또한 그것을 뒷받침하므로 자연스럽게 화자의 믿음을 자신의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바로 장르 문학에 몰입하는 독자를 이해하는 핵심 요소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야기 사이사이에 충분한 복선을 끼워 넣는 것이다. 사건 현장에 처음 도착했을 때 맡은 독특한 체취는 전체 사건의 구성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아 보이지만 이것 하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모든 증거가 반대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은 중간 중간 등장했다 금새 잊혀지지만 결정적인 순간, 또는 우연한 계기를 맞아 폭발하듯 진실을 쏟아낸다.


셋째, 실체가 아닌 속성을 묘사해야 한다. 예컨대 피해자의 시신이 심각히 훼손됐으며 일부는 사라졌다고 가정해보자. 피해자들은 모두 건장한 남자다. 범인에 대한 프로파일링 결과는 이렇다. 육체적으로 매우 건장하며 냉정하고 대담한 사람. 일정한 직업이 없으며 고정 수입이나 연금으로 생활. 해부학적 지식은 전혀 없음. 외로운 사람이며 괴짜일 것. 온 몸에 문신을 새긴 사이코패스 부랑자, 어느 갱단의 행동대장, 한때 사법부의 고위직에 있었으나 불미스런 사건으로 옷을 벗고 고향에 내려와 은거중인 거구의 판사. 어마어마하게 많은 인물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건 어떨까? 새끼를 가진 늑대, 먹이를 찾아나선 곰, 굶주린 악어. 과연 이 셋이 저 조건에 완전히 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여기에 아까 언급한 독특한 체취를 결합하면 범인은 힘센 남자가 아니라 사나운 대형견을 기르는 맹인 여자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작가는 충분히 많은 정황과 속성을 제공해 독자의 머리 속에 특정상을 제공해야 한다. 이 상이 단단하고 견고할 수록 반전의 충격은 더 커진다.


넷째, 절정에 다다르면 답을 제시해야 한다. 마침내 나는 모든 진실을 깨달았다. 나는 서장이 왜 결정적인 순간에 잘못된 지휘를 내려 범인을 놓쳤는지 이해한다. 나는 이제 왜 범인이 언제나 경찰보다 한 발 앞서 행동할 수 있었는지 알게 됐다. 범인은 서장 자신이었다. 나는 이제 총을 꺼내들고 서장의 집으로 쳐들어간다. 하지만 세 번째에서 배웠던 것을 기억하자. 내부 정보를 속속들이 알고 있으며 수사에 혼선을 가져올 수 있는게 오직 서장 뿐일까? 아니 그건 당신의 파트너도 마찬가지다.


다섯째, 연쇄살인은 단지 사건과, 공간과, 수법이 연속적인 것임을 기억하라. 일주일 간격으로 서울 시내에 같은 방식으로 토막난 시신이 발견됐다면 우리의 뇌는 자연스럽게 한 명의 범인을 떠올린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우연의 일치, 또는 한 명의 살인자와 추종자에 의한 모방 범죄일 수도 있다.


마이클 코넬리의 <시인>은 이 모든 것을 교묘히 섞어 진짜 스릴러를 만들어낸다. 이 책은 무려 660p가 넘는 어마어마한 두께를 자랑하지만 지겨운 부분은 하나도 없다. 게다가 이 책은 시인 삼부작의 첫 번째에 작품에 불과하다. 같은 두께의 책이 적어도 2권은 존재한다.


플롯이 치밀하다. 구성이 탄탄하다 라는 수식을 붙이려면 이 정도는 되야 하는게 아닌가 싶다. 문장 또한 우아함과 냉담함이 자유자재로 드나들며 멋진 앙상블을 보여준다. 마이클 코넬리의 <시인>. 정말 많이 배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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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곡예사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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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나는 폴 오스터를 끔찍이도 싫어한다. <환상의 책> 이후로 다시는 읽지 않기로 결심할 정도니까.


이 책을 만난 건 찌는 듯이 타오르는 어느 여름날이었다. 내가 일하는 곳은 출판사들을 한데 때려 놓고 '출판도시'라는 이름을 붙인 곳인데 서울보다는 개성이 더 가까운 곳으로, 아마도 그래서인지 근처 롯데 아울렛에 단체 쇼핑을 하러 오는 중국인 관광객들 말고는 흔히 사람이라 부르는 동물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출판인이라 부르는 '비인'이 득실득실하다.


출판인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완고한 턱을 가진 종과 찌푸린 이마를 가진 종. 그들은 둘 혹은 셋씩 짝지어 돌아다니는데 넷이나 다섯 혹은 여섯이 뭉쳐 시끌벅적하게 다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들은 늘 조곤조곤 조용히 말하며 서로를 향해 동의의 고갯짓을 끄덕이지만 이는 상대방의 말을 존중해야한다는 교양인의 미덕을 실천하는 것일 뿐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시작되는 진정한 수긍은 아니다. 그래서 처음 겪는 사람들은 그들이 우리의 말에 동의를 해준다고 믿을 수도 있다. 그러나 출판인들을 상대할 땐 어금니 뒤로 숨겨 물은 완고한 자의식과 십수년을 혼자 일하며 갈고 닦은 단단한 편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사실 그들은 다른 출판인 혹은 작가를 만나는 것보다 책 더미가 지저분하게 쌓인 책상에 파고 들어가 좋아하는 펜 하나를 손에 들고 구겨진 원고를 읽는 걸 더 선호한다. 이때만큼은 그들도 숨기는 것이 없다. 그들은 마치 절대로 보여줘선 안되는 고급 보석인양 마음 속 깊이 넣고 꽁꽁 가둬 놨던 자의식과 편견, 직업적 긍지를 원고 위에 풀어 놓고는 문장을 유린하고 난도질하며 웃음짓는 음흉한 악어같다. 물론 받아온 원고가 너무 구릴 땐 예민한 코끼리가 되어 사무실을 전부 뒤집어 엎을만한 신경질을 부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 때도 교양인의 미덕을 지키느라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고 단지 그렇게 할 것 같은 분위기만 잔뜩 풍겨 주변 사람을 초조하게 만든다. 이렇듯 그들은 자기 주변의 비인보다는 흰 종이 위에 늘어선 글자를 더 좋아하는 동물이다. 그리고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다.


다시 찌는 듯한 어느 여름날로 돌아가자. 나는 사람이 싫어 혼자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는 바로 옆의 도서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습기를 머금은 오래된 종이 냄새가 코를 찌른다. 나는 이 황홀한 냄새의 유혹을 따라 열린책들의 책들이 쌓인 서가로 이동한다. 익숙한 전집들. 그 수 많은 책들 중에서도 나는 단박에 미스터 버티고(이 책의 원제), 폴 오스터의 <공중 곡예사>를 낚아 올린다. 이것이 바로 폴 오스터가 끊임없이 자신의 작품에 우겨 넣는 그 우연의 미학일까? 말했지만 나는 폴 오스터라면 질겁을 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빵 굽는 타자기>였다면 이해가 간다. 유독 그 책 만큼은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중 곡예사>를 <빵 굽는 타자기>로 오해하기 위해선 몇몇 인지 장애와 심각한 심리불안이 필요하다. 그 날 나는 찌는 듯한 더위에 짜증이 좀 나 있긴 했지만 사물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미스터 버티고를 들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바로 그 책을 사버렸다.


이 책은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폴 오스터와의 책과는 완전히 다른 소설이다. 이야기 속에 촘촘히 새겨 넣은 난해한 상징과 사건은 없다. <공중 곡예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이야기의 실타래다. 불우했던 한 남자의 흥망성쇠과 슬픔과 기쁨을 넘나들며 소용돌이 친다. 줄거리를 말해주는 건 의미가 없다. 그저 딱 한 마디만 하면, 새옹지마. <빵 굽는 타자기>가 폴 오스터 자신의 인생을 고백한 수필이었다면 <공중 곡예사>는 이를 소설화 한 것 같은 작품이다. 여기엔 수 많은 우여곡절을 겪는 청년 시절, 성공이라 믿었지만 그 뒤에 칼날처럼 도사리던 반복된 몰락의 기록이 있다.


인생의 부침을 여러번 겪다보면 인생을 꿰뚫는 진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건, 원하는 것을 얻으면 얻는대로, 얻지 못하면 얻지 못하는대로 여전히 인생이 계속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중요한 건 일희일비하지 않는 태도다. 새 말을 얻었을 때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 말이 떠나갔을 때도 슬퍼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무미건조한 삶을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이러쿵 저러쿵 논쟁을 벌여봐야 당신은 동의하지 않을 테니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이 논쟁을 끝내겠다. 해보면 안다. 진짜로.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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