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Q정전
루쉰 지음, 전형준 옮김 / 창비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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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은 노벨상을 받은 사람치고는 꽤 재기 발랄한 면이 있다. 그의 작품에는 핍박 받는 인민과 핍박 받는 인민을 핍박하는 옆 집 인민이 등장하는데, 그 관계를 묘사하는데 있어 가끔 블랙 코미디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유머가 존재한다.

그의 대표작 아Q정전을 보자. 이 소설은 아Q의 내력을 장황하게 추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한 사람의 내력을 정리하여 '전(傳)'으로 써낸 다는 것은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거나 역사상 큰 족적을 남긴 인물에나 어울리는 일이다. 그런데 아Q가 누구인가? 거렁뱅이에 무뢰한이다. 루쉰은 거창한 형식 속에 비루한 소재를 채워 넣고 있다. 그리고 이 과잉된 서론이 독자들의 마음을 적당히 풀어지게 한다. 루쉰의 코미디가 서서히 시동을 거는 것이다.

코미디의 절정은 아Q가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이다. 아Q는 거듭된 패배의 경험을 통해 이른바 '정신적 승리법'을 터득한다. 그것은 패배가 명백한 상황에서도 본인만큼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본인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한 아Q는 영원히 승자다. 급기야 사형장으로 향하는 조리 돌림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최후를 짐작하지 못한다.

이런 얘기를 웃음기를 싹 거둔채 진지한 문장으로 풀어내는 것이 바로 블랙 코미디의 전형 아닐까? 좀 싸게 쳐줘 비아냥이나 조소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조소와 비아냥이 철저한 주제 의식 아래 치밀하게 전개 된다면 그건 하나의 문학 형식이 될 수도 있다. 노벨은 스타일이 없는 사람에겐 상을 주지 않는다. 
 

 

 

우의 치수(治水) 이야기를 담고 있는 '홍수를 다스리다'에서는 풍자와 조롱, 유머의 강도가 훨씬 높아 진다.

이 소설에는 두 부류의 정치인이 등장하는데, 첫째는 '우'로 대표되는 행동파고 둘째는 '조정의 관료', '재야의 학자'로 대표되는 관념파다. 루쉰의 풍자 대상은 당연 후자다.

사변과 논쟁에만 몰두할 뿐 현실을 타계할 대책이 없는 무의미한 학자들, 게으르고 부패해 탁상공론만을 일삼는 관료들은 새로운 치수법을 앞세워 천하를 주유하는 우를 당해내지 못한다. 실천과 진실의 정치가 보수와 반동을 타파하여 이 세상이 백성들의 손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루쉰의 바람이었다.  

'아Q정전', '홍수를 다스리다'가 잽으로 일관하다 스트레이트로 마무리하는 아웃복싱이라면 쿵이지, 고향, 술집에서 같은 소설은 묵직한 훅이 날아드는 인파이팅이다.

이 소설들은 결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글쎄 뭐라고 해야할까? 씻어도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흰 담벼락의 얼룩같이 언제까지고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잔잔한 떨림을 일으키는 감정의 앙금을 남긴다. 이를테면 20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어릴 적의 친구를 만났지만 그 친구의 타락을 목격해 버리고 마는 '고향'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희망은 본래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사실은,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는데,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자 길이 된 것이다.

옛 친구의 선한 정신을 마비시켜버린 현실의 괴로움과 절망. 삶 앞으로 불어오는 현실의 광풍에 마모되고 짓이겨져 우리는 그렇게 살아갔다. 20년이 지나가버리자 우리는 완전히 남남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자식들은, 그의 후배들은 어떤가? 그들에게도 여전히 삶은 어둡고 절망적인가? 그러나 루쉰은 어린 아이들의 정에서 하나의 희망을 본다. 

우리의 후배들은 아직 한 마음이다, 훙얼은 수이성을(작자와 작자 친구의 자식들) 그리워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희망한다. 그들은 더 이상 나처럼, 사람들끼리 격절되지 않기를...  

그러나 나는 또한, 그들이 한마음이 되려고 하다가 그 때문에 나처럼 괴롭고 떠도는 삶을 사는 것은 원하지 않고, 그들이 룬투처럼 괴롭고 마비된 삶을 사는 것도 원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처럼 괴롭고 방종한 삶을 사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땅히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아직 살아보지 못한 삶을.  

 

루쉰은 결코 문장 자체가 뛰어난 것은 아니다. 주제다. 좀 더 자세하게는 주제를 드러내는 태도다. 자신을 이롭게 하려는 자를 억압하고 자신을 억압하는 자를 숭배하는 마음. 이같은 하층민의 노예 근성과 그 끝을 알 수 없는 무지를 거칠지만 진솔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드러낸다.  

알고 있겠지만 루쉰은 옛날 사람이다. 1881년에 태어났다. 글의 끝 부분에 작가의 탄생 연대를 드러내는 이유는 아주 상투적인 결말을 내기 위해서다. 이런 결말은 작가와 작품이 현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수록 빈번히 출몰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내용은 대충 아래와 같다.

오래 세월이 지났음에도 루쉰의 소설이 현대적 의의를 갖는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우리가 배를 잡고 조소하는 120년 전의 암흑 세계에서 단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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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도란 2010-11-19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허스키님!^^ 아Q정전 정말 많이 읽히는 책이죠~
알찬 서재 잘 구경하고갑니다
저는 이음출판사에서 나왔어요~
저희가 이번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를 연일 차지하여 화제가 되고있는 도서
<모터사이클 필로소피> 한국판 출판 기념으로 서평단을 모집하고있거든요^^
책을 사랑하시는 허스키님께서 참여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 이렇게 덧글남기고가요
저희 블로그에 방문해주세요~! :)

한깨짱 2010-11-24 19:5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도란도란님 근데 책이 저랑은 약간 안 맞는 것 같아서 망설이게 되네요. 나중에 더 좋은 기회 있으면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69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
무라카미 류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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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해 동안 100여편의 글을 쓰면서, 상당부분 책에 대한 얘기를 해왔고, 몇몇 책에 대해선 과도한 찬양을 일삼기도 했지만, 적어도 이 책을 찬양하는데 있어선 일말의 망설임이나 의심의 눈초리를 남겨 두고 싶지 않다.

무라카미 류의 Sixty Nine이다.

벌써 세 번째 이 책을 읽는다. 무라카미 류의 Sixty Nine은 인간의 심리를 파헤치는데 있어선 러시아의 도박광 도스토옙스키의 귀싸대기를 올려 붙이고, 삶의 희비극을 묘사하고 조소하는데 있어선 안톤 체홉의 뒤통수를 후려갈길 정도지만, 무엇보다 평등과 자유를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우스 풍의 서사시로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 문학과 사상 그리고 전 인류의 해방과 평화에 절대적으로 기여하고 있는 보기 드문 수작이다 라고 하는 건 거짓말이고, 뭐 그냥 철 없는 고교생들의 떠들썩한 난동기 쯤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겐은 17세이며 동시에 동정인 고교생이다. 17세에 동시에 동정이라는 사실은 그 삶에 무수히 많은 고뇌와 레퍼토리가 함축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평범한 많은 고교생들이 더 나중을 위해, 그러니까 결혼 적령기에 이르러 '불특정 다수의 암컷들'을 차지 하기 위한 고급 라이센스를 획득하는 고문 과정을 학교에서 보내고 있다면 겐은 좀 더 분명하게 현실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천사 마츠이 카즈코의 눈에 띄기 위해 종업식날 바리케이트 봉쇄 작전을 펼치는가 하면 페스티발때 공연할 둘 만의 연극 극본에 키스씬을 적어 넣기도 한다. 겐에게 욕망은 현실이고 현실은 즐겨야 하는 것, 그것 말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아다마는 17세이며 동시에 동정인 고교생이다. 그의 삶은 동정과 17세의 고교생이 이뤄내는 복잡 다단한 화학 작용의 피해를 전혀 받지 않았다. 그는 의학부를 지망하는 초우량 모범생이었다. 재수없게 겐과 한 반이 되었다. 어느날 겐이 아다마를 꼬셔 동물원으로 놀러간 날 그에게 랭보의 시를 보여준 것이 화근이었다. 시는 고교생의 마음에 풍랑을 일으켰다.

뒤 늦게 알아버린 또 다른 나. 나의 모습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낯설고 거친 에너지. 지난날의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거부해버리고 마는 난폭한 페이소스. 결혼 할 남자와 혼수 문제로 헤어졌다 속수무책 혼자가 되버린 45살의 노처녀 보다 무서운 것이 바로 뒤늦은 사춘기다. 아다마에게 사춘기가 찾아 왔다.
 

 

 

종업식 바리케이트 봉쇄 작전을 통해 겐은 사세보 지역 대학의 스카우트 제의와 8만엔의 현금, 진정한 참회와 눈물이 어린 학교 선생들의 사과, 그리고 좌파 학생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천사 마츠이 카즈코의 마음과, 나아가 몸을 차지할 수 있었다 라고 하는 건 거짓말이고 아다마와 함께 118일간의 정학을 맞아야 했다.

그러나 정학은 겐에게 휴식과 자유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피해를 보는 건 언제나 진지하고 성실한 인간들이다. 아다마는 정당한 정치적 의사를 표현한 자신에게 내려진 폭압적이고 부당한 처사에 분노했다. 매일 매일 먼 길을 찾아온 선생에게 대들며 난폭한 말을 쏟아 냈다.
언제나 침착했고 무엇보다 부드러웠던 아다마는 어디로 가버린거니.

어머니는 아다마를 혼란에 빠뜨린 친구 겐을 찾아와 눈물을 흘려 보지만, 어머니, 아들은 알지 않아도 될걸 알아 버렸어요. 이제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답니다. 

 

 

 

두 사람에겐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Morning Election Festival! 아침에 서는 축제!
언제나 말만 앞서는 겐에겐 행동파 아다마가 있었다. 공연장을 섭외하고 대학에 다니는 형에게 부탁해 티켓을 인쇄하고 공고, 상고, 여고, 여상에 티켓을 판매했다. 겐은 준와의 여신 나가야마 미에에게 속이 비치는 네글리제를 입혀 오프닝 무대에 올려 보냈다. 나가야마 미에가 *사토 에이사쿠와 린든 존슨, 도쿄 대학의 정문이 그려진 나무 판자를 도끼로 찍어 버렸다. 축제는 대성공 이었다.


축제의 여운이 겨울 바람과 함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곳으로 불어갈 쯔음 겐과 마츠이 카즈코는 바다로 여행을 떠났다. 덜컹 거리는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갔다. 허름한 극장에서 온 가족을 처참히 살해한 뒤 전기 의자에서 최후를 맞는 어떤 남자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그린 영화 '냉혈'을 봤다. 두 시간 반 동안의 고문을 마치고 두 사람은 바닷가로 나갔다. 마츠이 카즈코가 샌드위치와 후라이드 치킨이 담긴 도시락을 열었다. 겨울 바다의 세찬 바람 앞에서 때때로 불어오는 모래 먼지를 손으로 가리며 두 사람은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마츠이 카즈코는 상냥하고, 예쁘고, 머리 좋고, 사랑받으며 자란 사람이다. <냉혈>에서 묘사된 세계가 평화로운 생활과 무척 가까운 곳에 잠복해 있다고 해도, 또 그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해도, 역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 천사가 한 말, "난 브라이언 존스의 챔발로 소리 같은 느낌으로 살아가고 싶어"라는 것이다.

샌드위치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채, 우리는 겨울 바다를 뒤로했다.

키스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하여 1969년은 지나갔다.


1969년의 17세 고교생 무라카미 류는 지금은 소설가가 되었다. 데뷔작이 히트를 치고 방송에도 자주 나갔다. 고급 호텔에 묵으며 다음 스케쥴을 확인했다.

준와의 여신 나가야마 미에는 미용사가 되었다. 아다마, 겐과 함께 삼총사였던 이와세는 이케부쿠로의 캬바레에서 음유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종업식 바리케이드 봉쇄 작전이 결행됐을 때 겐의 멱살을 잡으며 학교를 위해 울었던 학생 회장은 대학 진학 후 적군파에 가담하여 싱가폴에서 검거 되었다.

의대생 남자 친구가 생겨 일방적인 이별을 선고했던 마츠이 카즈코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브라이언 존스의 챔발로 소리 같은 느낌으로 살아갈 것이다.

아다마는, 의사가 되지는 못했다.
 

*당시 일본과 미국의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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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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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에 대해 말할 능력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줄거리 정도는 가능할 지도.

세상에 종말이 왔다. 나무와 들이 불타고 강과 바다가 썩었다. 온 땅과 온 건물과 온 사람의 위로 회색의 재가 켜켜히 쌓여 있다. 태양은 눈이 멀었다. 건물은 구조를 잃었고 남아있는 목재는 장작으로 타올라 잿빛 하늘 속으로 사라졌다. 사라진 불길은 어두컴컴한 하늘에 한 줄기의 빛도 보태지 못했다.  

대낮에 하얀 입김이 서렸다. 추위로 몸을 떨었다. 차가운 대기 위로 얼음같은 눈과 비가 내렸다. 인간이 인간을 먹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다. 

 

 

 

잿빛 세계의 음침한 얼굴이 매일 매일 살아남은 아버지와 아들의 얼굴을 마주하며 죽음으로 유혹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걸었다.  

권총에 두 발의 총알이 있었는데 한 발이 약탈자의 두개골 속으로 파고 들었다. 맹렬한 회전을 멈추고 총알이 영원한 안식을 얻었을 때 약탈자의 머리통이 폭파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그 대가로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잃었고, 잃었으면 좋았을 생명을 되찾아 왔다.

식량과 생존 용품은 죽지 않을 만큼만, 죽기 직전에만 아주 조금씩 발견되었다. 그것을 행운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전의 세상에선 그럴 수 있겠지. 그러나 새시대는 구시대의 가치를 모조리 전복시켰다. 아버지와 아들은 이미 죽어버린 시체들을 부러워 했다. 새시대에서 행운이란 거대한 낫을 들고 부유하는 사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바닷가에 도착하면 상황이 나아질지 몰라, 두 사람은 계속 걸었다. 그러나 살아간다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가 살아남았다는 것으로 이 세상에 어떤 의미를 더할 수 있을까? 이 세상에 신은 존재하는 걸까? 죽음이라는 나무에 살아남은 사람들의 꽃이 만개하는 날, 신은 영원히 침묵할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약탈자에게 발각되어 사지가, 몸의 일부가 식량으로 사용되는 것일까? 마침내 희망을 잃고 자살을 감행하는 미래일까? 그들은 죽음을 피해 맹렬히 도망치는 순간에도 마음 한 구석에서 죽음에 대한 갈망이 타오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살면서 가장 큰 용기를 내본 적이 언제였냐고 묻는 말에 아버지가 답한다.

"오늘 아침에 눈을 뜨는 일이었어."

마침내 두 사람은 바닷가에 도착한다. 쓰러져 있는 유조선과 범선을 발견했다. 먹을 것과 담요를 많이 구했다. 한 눈을 판 새에 도둑이 식량과 담요가 든 카트를 훔쳐갔고 두 사람은 추격을 통해 도둑을 잡았다. 도둑의 옷을 모조리 벗겨 복수했다. 마지막 남은 선이 악에 잡아 먹혔다.

잿빛 오후의 머리 위로 어둑 어둑한 땅거미가 내리자 아들과 아버지는 도둑의 신발과 옷을 길 위에 개켜놓고 소리 질러 도둑을 불렀다. 이 곳에 당신의 신발과 옷을 남겨 두었다고. 어딘가에서 노리고 있을 약탈자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노출시키는 위험을 무릎 쓴채 두 사람은 바다 너머 다른 세상에까지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외쳤다.

아들이 심한 열병에서 회복된지 몇일 후 아버지는 아들에게 살아 남을 자격과 의무가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날 남자가 죽었다. 남자는 죽음에 패배했고 고통에 승리했다.  

 

 

 

홀로 남은 아이는 권총을 말아쥐고 구불구불한 해안길을 따라 남은 길을 걸어갔다. 한참을 걸어가다 아버지가 죽어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낯선 남자를 만났다. 산탄총을 거꾸로 메고 손으로 화약을 재워 넣은 탄알이 무수히 꽂혀 있는 탄띠를 맨 남자였다. 얼굴에는 큰 상처가 있었다. 온 몸에서 많은 전투의 흔적이 보였다. 소년은 남자에게 권총을 겨눴다. 그러나 남자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살아 남은 '선한 사람' 이었다.

남자는 소년의 아버지가 죽었는지, 담요와 다른 물건들은 어디있는지 물어보았다. 소년은 아버지를 그대로 놔둬선 안된다고 주장했고 남자는 담요를 덮어 두겠다고 약속했다. 다시 길을 나서는데, 소년이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보고 와도 되는지 물었다. 남자는 그러라고 했다. 소년이 다가갔을 때 아버지는 담요에 곱게 쌓여 있었다. 남자가 약속을 지켰던 것이다.

소년은 아버지의 주검 옆에서 길게 울었다.  

 

 

 

남자를 따라간 곳엔 어린 아이들이 있었다. 개도 한 마리 있었다. 무리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자가 소년을 꼭 안아 주었다. 새시대의 냉기 속을 헤맨 이후로 처음 맞는 따뜻함 이었다. 이 가족이 침략자들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 당했는지, 결국에는 먹을 것이 떨어져 비참하게 굶어 죽었는지, 아니면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개와 나아가 사람을 잡아 먹는 괴물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뒤의 이야기는 이 소설엔 나와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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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도살장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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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생명은 언제나 타인의 삶에 적대적이다. 몇 가지 예. 탁란으로 부화한 뻐꾸기가 둥지 밖으로 작은 새의 알을 필사적으로 밀어 내는 모습. 짐승의 세계에선 원래 그렇다고? 또 다른 짐승의 예. 중세 시대의 십자군 전쟁은 누구를 위한 싸움이었을까? 하나님과 알라는 같은 신임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민족에게 서로 다른 명령을 내렸다. 이걸로 수 백년 동안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창 끝에 피를 흘려야 했다. 승자가 얻은 것은 고작 이백년 남짓, 코딱지만한 예루살렘 땅을 차지한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전쟁은 비교적 이성적이었다. 그들의 신은 서로 달랐으니까. 아테네가 보기에 아폴론이 심히 역겹다면 부하들을 시켜 침을 뱉고자 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세상에 유일신, 이 정신분열증을 앓는 절대자가 나타나자 양상이 바뀌었다. 이제 전쟁은 형제들끼리 죽고 죽여야 하는 친족살해 현장이 되었다. 그들은 신이 누구를 더 사랑하는지 증명하고자 잔인하게 형제들을 살해했다. 시간이 지나자 형제라는 생각조차 사라져버렸다. 그들은 신의 이름으로 신을 죽였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죽이며 사악해지는 신. 이어지는 두 번의 세계 대전.

인간은 역사를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세계 대전은 한 번으로 끝났어야 했다. 실수가 두 번이면 더 이상 실수라고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전쟁은 필연인가? 되풀이되는 역사는 인간의 숙명? 참새가 대답한다.

짹짹?

빌리 필그림은 일리엄 검안 학교를 한 학기 마친 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몇 살이었는지는 모른다. 어렸다. 처음에는 전투병으로 배치됐다. 몸이 괴상했다. 길죽한데다 허약했다. 오르간을 켤 줄 알았다. 곧 군종병으로 보직이 변경됐다.

그러나 전쟁은 빌리 필그림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전선에서 낙오했고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작은 환풍창으로 빵과 물이 들어오고 똥싼 양동이가 나가는 화물 기차를 타고 드레스덴으로 이송됐다. 그 곳에서 비타민 시럽 공장 일을 하며 가끔 시럽을 훔쳐 먹었다.

시간은 어느 날 밤 그렇게 다가왔다. 아니,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은 곧 상영될 연극의 무대와 같다. 조명이 켜지고 등장인물이 들어서면 이야기는 정해진 끝을 향해 달려간다. 이야기가 끝나면 인간은 제발로 다음 무대를 향해 가고 그 곳에서 똑같은 연기가 되풀이 된다.

무대는 드레스덴의 지하, 식료품 저장 창고 였다. 공습 경보가 울리자 이 백명의 포로들이 땅 밑으로 숨어 들었다. 그 위로 수 십만개의 폭탄이 춤을 추며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고급 슈트를 차려 입고 커프스 단추를 맨 사교계의 점잖은 신사처럼 내려와 발정난 개새끼처럼 도시를 유린했다. 공습은 이틀 동안 계속 됐다.

드레스덴은 거대한 묘지로 변해버렸다. 화염 폭풍이 시체들을 화장했고 무너져내린 건물이 그대로 무덤이 됐다. 묘비는 없었다. 승자의 명예 속에는 패자들이 보여줬던 광기, 600만의 유대인을 저세상으로 보내버린 무의미한 악의가 그대로 담겨 있었지만 아주 오랫동안 그 사실을 숨겨왔다.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빌리는 검안사가 되었다. 검안 학교의 소유주 딸과 결혼을 했고 큰 돈을 벌었다. 딸과 아들을 낳았다. 딸의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트랄파마도어의 외계인들에게 납치 되었다. 빌리는 그곳에서 4차원적 시간관을 배워 돌아왔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여긴 어딥니까?" 빌리 필그림이 말했다.
"또 다른 호박 덩이에 갇혀 있는 거요. 필그림 선생. 우리는 지금 우리가 있어야 할 곳에 있소. 지구에서 500만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오. (중략)"

"어떻게, 어떻게 해서 내가 여기 온 겁니까?"  

"설명을 하자면 지구인이 하나 더 있어야 할 거요. 지구인들은 대단한 설명가들이니까. 이 사건이 왜 이렇게 구성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저 사건은 또 어떻게 실현되거나 회피될 수 있는지를 말해 주지. 나는 트랄파마도어 인이라 모든 시간을 당신네가 로키 산맥 전체를 한눈에 보듯이 봐요. 모든 시간은 모든 시간일 뿐이오. 그것은 변하지 않지. 그것은 경고나 설명의 대상이 아니오. 시간은 그저 존재할 뿐이니까. 각각의 순간을 떼어놓고 보면, 우리는 모두, 내 이미 말했듯이, 호박 속의 벌레가 되는 거요."

트랄파마도어인에 의하면 우주는 트랄파마도어인 조종사가 우주선의 시동을 거는 순간 연료가 폭발하여 완전히 박살난다. 미래를 알고 있다면 그것을 회피할 방법도 알고 있는 것 아니냐고 빌리는 묻자 트랄파마도어인이 대답한다.

"그는 이제까지 늘 버튼을 눌렀고 앞으로도 늘 그럴 거요. 우리는 늘 그에게 그렇게 하게 했고, 앞으로도 늘 그럴 거요. 그 순간은 그런 식으로 되도록 만들어져 있으니까."

그리하여 언젠가 우주선의 시동 구멍에 열쇠가 꽂히고 엔진이 으르렁 대는 순간 우주는 영원히 묵사발이 된다. 그렇게 가는 거지. 

 

 

 

제 5도살장은 쉽게 읽히지만 단지 읽는것 만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게 없는 난해한 책이다. 외계인과 우주선이 등장하지만 SF는 아니다. 그렇다고 그 흔한 전쟁 에세이도 아니다. 단순하고 순진하게, '이러이러한 일을 겪었어 전쟁은 나빠.' 하고 말하지 않는다. 소설은 과거, 현재, 미래, 드레스덴, 뉴욕, 트랄파마도어, 모든 시공간을 미친년 널 뛰듯 넘나들며 전쟁이 무엇인지 그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은유한다.

살아 돌아온 빌리 필그림이 정신분열증과 함께 철저한 허무와 무기력증을 앓아야 했던 이유는 그 어떤 인간의 선택과 행동도 전쟁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전쟁은 보통 사람들이 보통의 손과 보통의 얼굴을 하고 보통의 다른 사람을 죽이는 평범한 잔혹극이다. 그 안에는 선악도 시비도 없다. 사람들은 그저 해야만 하는 일을 했고,

그렇게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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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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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이것이 첫 문장. 그러고 난 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설국에 대한 모든 감상은 이 두 문장에서 나온다. 책을 펼치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시마무라는 한량이다. 니가타현의 에치고, 유자와라 불리는 온천 마을에 들렀을 때 고마코를 만났다. 고마코는 게이샤. 처음 볼 때 부터 웬지 시마무라의 마음에 와 닿았다. 그건 고마코도 마찬가지.

하지만 알고 있겠지? 여행자와의 사랑이란 예정된 이별을 향해 빠르게 질주하는 기관차 같다는 것을. 요란하게 기적을 울리며 전속력으로 달려보지만 절벽 위의 철교는 언제나 중간에서 끊겨 있지. 남아 있는 것은 추락 뿐이야.

잔인한 건 이 사실을 남자는 알고 여자는 모른다는 것. 시마무라의 마음 속은 커다랗게 비어 있는 공동이라 고마코의 마음이 전해지지 않아. 고마코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순진한 대사를 내뱉는다.  

"내년에도 또 온다고 약속해 주세요."

시마무라는 일년 뒤 다시 이곳을 찾는다. 못됐다. 죽어가는 모닥불에 장작을 밀어 넣으며 오래가지 않을 희망의 불씨를 살려 놓는다. 그러나 그 불씨가 활활 타오를 때면 찬물을 끼얹고 도망가 버릴거잖아.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무책임한 남자. 그런데 그 허무가 그 고독이 고마코가 전해오는 애절한 사랑과 맞물려 너울너울 처마 위에 내려 앉는다. 하얗게 쏟아졌다 어느새 사라지고 마는 눈처럼.  


 

인간과 인간의 거리는 무한히 0으로 수렴하지만 결코 0은 될 수 없다. 죽도록 사랑한다고 난리쳐봐야 우린 결국 남이다. 남이란 무엇인가, 사르트르는 '지옥'이라고 했다.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아무도 모르게 숨겨진 우물이 있는데 뚜껑을 열고 그 안을 들여다 보면 인간의 고독이란 것이 얼마나 깊고 어두운지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어둠을 본 사람들은 다시는 인간을 사랑할 수 없다. 이들에게 타인은 지옥까지는 아닐지언정 대단히 무섭고 두려운 존재가 된다.  

"눈 내리는 계절을 재촉하는 화로에 기대어 있자니, 시마무라는 이번에 돌아가면 이제 결코 이 온천에 다시 올 수 없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중략)

또한 멀리서 들리는 솔바람 소리 저편에서는 작은 방울 소리가 아련히 울려퍼지고 있는 것 같았다. 시마무라는 쇠주전자에 귀를 가까이 대고 방울 소리를 들었다. 방울이 울려대는 언저리 저 멀리, 방울 소리만큼 종종걸음치며 다가오는 고마코의 자그마한 발을 시마무라는 언뜻 보았다. 시마무라는 깜짝 놀라, 마침내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마음 먹었다."  

 <출처: Flickr.com, pihe>

요코는 누구인가? 고마코의 병든 약혼자를 돌봐주는 새로운 정인(情人)이랄까? 복잡하다. 그런데 함박눈이 쌓인 마을, 눈옷을 입고 뛰어다니며 '고마코~ 고마코~' 맑은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는 요코의 마음엔 주름이 없다. 이 얼음같이 차가운 순수함이 기둥처럼 쌓인 눈을 딛고서 병든 남자를 안아 준다. 시릴 정도로 눈부신 천진함에 시마무라는 가슴을 찔린다. 공연히 요코의 안부를 묻고, 그녀의 얘기를 꺼내고, 매일 찾아오는 고마코에게, 미안함도 없이.

고마코는 또 다시 헛수고를 하는걸까?

순수함이란 무엇인가, 더하고 빼지 않는 것이다. 어떤 대가를 받을지 생각치 않고 오로지 마음의 소리만을 따라 온 몸을 내던지는 것이다. 그래서 순수에는 헛수고가 없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타인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대는 결코 헛수고를 하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잘난척하지 마라. 너도 결국엔 죽는다. 결국엔 죽는 인간의 삶은 그 자체가 거대한 헛수고다. 그 안에 순수하게 살았던 한 조각의 시간도 없다면 그거야 말로 슬퍼할 일이지.

그러니 고마코의 마음이 시마무라의 우물을 채우지 못하더라도 탓하지 마라. 강물이 힘차게 바다로 흐른다고,

나무라지 마라.   

 <출처: Flickr, Bahman Farzad>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일본 서정 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남녀의 사랑, 자연의 풍경이 하늘거리며 떨어져 내리는 눈처럼 황홀하게 다가왔다 그것을 손에 쥐는 순간 감쪽같이 녹아 없어져 버린다. 특기할만한 내러티브도 별다른 갈등도 없이 진행되는 이 소설이 책에서 손을 뗀 뒤에도 마음 속 깊이 뿌리를 내려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허무의 미학에 있을 것이다.

찰나의 순간에만 소유할 수 있는 아름다움. 없어져 버릴 것이기에 더 아쉬운 그 무엇. 이게 바로 설국의 향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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