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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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이것이 첫 문장. 그러고 난 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설국에 대한 모든 감상은 이 두 문장에서 나온다. 책을 펼치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시마무라는 한량이다. 니가타현의 에치고, 유자와라 불리는 온천 마을에 들렀을 때 고마코를 만났다. 고마코는 게이샤. 처음 볼 때 부터 웬지 시마무라의 마음에 와 닿았다. 그건 고마코도 마찬가지.

하지만 알고 있겠지? 여행자와의 사랑이란 예정된 이별을 향해 빠르게 질주하는 기관차 같다는 것을. 요란하게 기적을 울리며 전속력으로 달려보지만 절벽 위의 철교는 언제나 중간에서 끊겨 있지. 남아 있는 것은 추락 뿐이야.

잔인한 건 이 사실을 남자는 알고 여자는 모른다는 것. 시마무라의 마음 속은 커다랗게 비어 있는 공동이라 고마코의 마음이 전해지지 않아. 고마코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순진한 대사를 내뱉는다.  

"내년에도 또 온다고 약속해 주세요."

시마무라는 일년 뒤 다시 이곳을 찾는다. 못됐다. 죽어가는 모닥불에 장작을 밀어 넣으며 오래가지 않을 희망의 불씨를 살려 놓는다. 그러나 그 불씨가 활활 타오를 때면 찬물을 끼얹고 도망가 버릴거잖아.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무책임한 남자. 그런데 그 허무가 그 고독이 고마코가 전해오는 애절한 사랑과 맞물려 너울너울 처마 위에 내려 앉는다. 하얗게 쏟아졌다 어느새 사라지고 마는 눈처럼.  


 

인간과 인간의 거리는 무한히 0으로 수렴하지만 결코 0은 될 수 없다. 죽도록 사랑한다고 난리쳐봐야 우린 결국 남이다. 남이란 무엇인가, 사르트르는 '지옥'이라고 했다.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아무도 모르게 숨겨진 우물이 있는데 뚜껑을 열고 그 안을 들여다 보면 인간의 고독이란 것이 얼마나 깊고 어두운지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어둠을 본 사람들은 다시는 인간을 사랑할 수 없다. 이들에게 타인은 지옥까지는 아닐지언정 대단히 무섭고 두려운 존재가 된다.  

"눈 내리는 계절을 재촉하는 화로에 기대어 있자니, 시마무라는 이번에 돌아가면 이제 결코 이 온천에 다시 올 수 없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중략)

또한 멀리서 들리는 솔바람 소리 저편에서는 작은 방울 소리가 아련히 울려퍼지고 있는 것 같았다. 시마무라는 쇠주전자에 귀를 가까이 대고 방울 소리를 들었다. 방울이 울려대는 언저리 저 멀리, 방울 소리만큼 종종걸음치며 다가오는 고마코의 자그마한 발을 시마무라는 언뜻 보았다. 시마무라는 깜짝 놀라, 마침내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마음 먹었다."  

 <출처: Flickr.com, pihe>

요코는 누구인가? 고마코의 병든 약혼자를 돌봐주는 새로운 정인(情人)이랄까? 복잡하다. 그런데 함박눈이 쌓인 마을, 눈옷을 입고 뛰어다니며 '고마코~ 고마코~' 맑은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는 요코의 마음엔 주름이 없다. 이 얼음같이 차가운 순수함이 기둥처럼 쌓인 눈을 딛고서 병든 남자를 안아 준다. 시릴 정도로 눈부신 천진함에 시마무라는 가슴을 찔린다. 공연히 요코의 안부를 묻고, 그녀의 얘기를 꺼내고, 매일 찾아오는 고마코에게, 미안함도 없이.

고마코는 또 다시 헛수고를 하는걸까?

순수함이란 무엇인가, 더하고 빼지 않는 것이다. 어떤 대가를 받을지 생각치 않고 오로지 마음의 소리만을 따라 온 몸을 내던지는 것이다. 그래서 순수에는 헛수고가 없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타인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대는 결코 헛수고를 하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잘난척하지 마라. 너도 결국엔 죽는다. 결국엔 죽는 인간의 삶은 그 자체가 거대한 헛수고다. 그 안에 순수하게 살았던 한 조각의 시간도 없다면 그거야 말로 슬퍼할 일이지.

그러니 고마코의 마음이 시마무라의 우물을 채우지 못하더라도 탓하지 마라. 강물이 힘차게 바다로 흐른다고,

나무라지 마라.   

 <출처: Flickr, Bahman Farzad>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일본 서정 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남녀의 사랑, 자연의 풍경이 하늘거리며 떨어져 내리는 눈처럼 황홀하게 다가왔다 그것을 손에 쥐는 순간 감쪽같이 녹아 없어져 버린다. 특기할만한 내러티브도 별다른 갈등도 없이 진행되는 이 소설이 책에서 손을 뗀 뒤에도 마음 속 깊이 뿌리를 내려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허무의 미학에 있을 것이다.

찰나의 순간에만 소유할 수 있는 아름다움. 없어져 버릴 것이기에 더 아쉬운 그 무엇. 이게 바로 설국의 향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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