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도살장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살아 있는 생명은 언제나 타인의 삶에 적대적이다. 몇 가지 예. 탁란으로 부화한 뻐꾸기가 둥지 밖으로 작은 새의 알을 필사적으로 밀어 내는 모습. 짐승의 세계에선 원래 그렇다고? 또 다른 짐승의 예. 중세 시대의 십자군 전쟁은 누구를 위한 싸움이었을까? 하나님과 알라는 같은 신임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민족에게 서로 다른 명령을 내렸다. 이걸로 수 백년 동안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창 끝에 피를 흘려야 했다. 승자가 얻은 것은 고작 이백년 남짓, 코딱지만한 예루살렘 땅을 차지한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전쟁은 비교적 이성적이었다. 그들의 신은 서로 달랐으니까. 아테네가 보기에 아폴론이 심히 역겹다면 부하들을 시켜 침을 뱉고자 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세상에 유일신, 이 정신분열증을 앓는 절대자가 나타나자 양상이 바뀌었다. 이제 전쟁은 형제들끼리 죽고 죽여야 하는 친족살해 현장이 되었다. 그들은 신이 누구를 더 사랑하는지 증명하고자 잔인하게 형제들을 살해했다. 시간이 지나자 형제라는 생각조차 사라져버렸다. 그들은 신의 이름으로 신을 죽였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죽이며 사악해지는 신. 이어지는 두 번의 세계 대전.

인간은 역사를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세계 대전은 한 번으로 끝났어야 했다. 실수가 두 번이면 더 이상 실수라고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전쟁은 필연인가? 되풀이되는 역사는 인간의 숙명? 참새가 대답한다.

짹짹?

빌리 필그림은 일리엄 검안 학교를 한 학기 마친 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몇 살이었는지는 모른다. 어렸다. 처음에는 전투병으로 배치됐다. 몸이 괴상했다. 길죽한데다 허약했다. 오르간을 켤 줄 알았다. 곧 군종병으로 보직이 변경됐다.

그러나 전쟁은 빌리 필그림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전선에서 낙오했고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작은 환풍창으로 빵과 물이 들어오고 똥싼 양동이가 나가는 화물 기차를 타고 드레스덴으로 이송됐다. 그 곳에서 비타민 시럽 공장 일을 하며 가끔 시럽을 훔쳐 먹었다.

시간은 어느 날 밤 그렇게 다가왔다. 아니,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은 곧 상영될 연극의 무대와 같다. 조명이 켜지고 등장인물이 들어서면 이야기는 정해진 끝을 향해 달려간다. 이야기가 끝나면 인간은 제발로 다음 무대를 향해 가고 그 곳에서 똑같은 연기가 되풀이 된다.

무대는 드레스덴의 지하, 식료품 저장 창고 였다. 공습 경보가 울리자 이 백명의 포로들이 땅 밑으로 숨어 들었다. 그 위로 수 십만개의 폭탄이 춤을 추며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고급 슈트를 차려 입고 커프스 단추를 맨 사교계의 점잖은 신사처럼 내려와 발정난 개새끼처럼 도시를 유린했다. 공습은 이틀 동안 계속 됐다.

드레스덴은 거대한 묘지로 변해버렸다. 화염 폭풍이 시체들을 화장했고 무너져내린 건물이 그대로 무덤이 됐다. 묘비는 없었다. 승자의 명예 속에는 패자들이 보여줬던 광기, 600만의 유대인을 저세상으로 보내버린 무의미한 악의가 그대로 담겨 있었지만 아주 오랫동안 그 사실을 숨겨왔다.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빌리는 검안사가 되었다. 검안 학교의 소유주 딸과 결혼을 했고 큰 돈을 벌었다. 딸과 아들을 낳았다. 딸의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트랄파마도어의 외계인들에게 납치 되었다. 빌리는 그곳에서 4차원적 시간관을 배워 돌아왔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여긴 어딥니까?" 빌리 필그림이 말했다.
"또 다른 호박 덩이에 갇혀 있는 거요. 필그림 선생. 우리는 지금 우리가 있어야 할 곳에 있소. 지구에서 500만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오. (중략)"

"어떻게, 어떻게 해서 내가 여기 온 겁니까?"  

"설명을 하자면 지구인이 하나 더 있어야 할 거요. 지구인들은 대단한 설명가들이니까. 이 사건이 왜 이렇게 구성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저 사건은 또 어떻게 실현되거나 회피될 수 있는지를 말해 주지. 나는 트랄파마도어 인이라 모든 시간을 당신네가 로키 산맥 전체를 한눈에 보듯이 봐요. 모든 시간은 모든 시간일 뿐이오. 그것은 변하지 않지. 그것은 경고나 설명의 대상이 아니오. 시간은 그저 존재할 뿐이니까. 각각의 순간을 떼어놓고 보면, 우리는 모두, 내 이미 말했듯이, 호박 속의 벌레가 되는 거요."

트랄파마도어인에 의하면 우주는 트랄파마도어인 조종사가 우주선의 시동을 거는 순간 연료가 폭발하여 완전히 박살난다. 미래를 알고 있다면 그것을 회피할 방법도 알고 있는 것 아니냐고 빌리는 묻자 트랄파마도어인이 대답한다.

"그는 이제까지 늘 버튼을 눌렀고 앞으로도 늘 그럴 거요. 우리는 늘 그에게 그렇게 하게 했고, 앞으로도 늘 그럴 거요. 그 순간은 그런 식으로 되도록 만들어져 있으니까."

그리하여 언젠가 우주선의 시동 구멍에 열쇠가 꽂히고 엔진이 으르렁 대는 순간 우주는 영원히 묵사발이 된다. 그렇게 가는 거지. 

 

 

 

제 5도살장은 쉽게 읽히지만 단지 읽는것 만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게 없는 난해한 책이다. 외계인과 우주선이 등장하지만 SF는 아니다. 그렇다고 그 흔한 전쟁 에세이도 아니다. 단순하고 순진하게, '이러이러한 일을 겪었어 전쟁은 나빠.' 하고 말하지 않는다. 소설은 과거, 현재, 미래, 드레스덴, 뉴욕, 트랄파마도어, 모든 시공간을 미친년 널 뛰듯 넘나들며 전쟁이 무엇인지 그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은유한다.

살아 돌아온 빌리 필그림이 정신분열증과 함께 철저한 허무와 무기력증을 앓아야 했던 이유는 그 어떤 인간의 선택과 행동도 전쟁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전쟁은 보통 사람들이 보통의 손과 보통의 얼굴을 하고 보통의 다른 사람을 죽이는 평범한 잔혹극이다. 그 안에는 선악도 시비도 없다. 사람들은 그저 해야만 하는 일을 했고,

그렇게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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