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Q정전
루쉰 지음, 전형준 옮김 / 창비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루쉰은 노벨상을 받은 사람치고는 꽤 재기 발랄한 면이 있다. 그의 작품에는 핍박 받는 인민과 핍박 받는 인민을 핍박하는 옆 집 인민이 등장하는데, 그 관계를 묘사하는데 있어 가끔 블랙 코미디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유머가 존재한다.

그의 대표작 아Q정전을 보자. 이 소설은 아Q의 내력을 장황하게 추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한 사람의 내력을 정리하여 '전(傳)'으로 써낸 다는 것은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거나 역사상 큰 족적을 남긴 인물에나 어울리는 일이다. 그런데 아Q가 누구인가? 거렁뱅이에 무뢰한이다. 루쉰은 거창한 형식 속에 비루한 소재를 채워 넣고 있다. 그리고 이 과잉된 서론이 독자들의 마음을 적당히 풀어지게 한다. 루쉰의 코미디가 서서히 시동을 거는 것이다.

코미디의 절정은 아Q가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이다. 아Q는 거듭된 패배의 경험을 통해 이른바 '정신적 승리법'을 터득한다. 그것은 패배가 명백한 상황에서도 본인만큼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본인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한 아Q는 영원히 승자다. 급기야 사형장으로 향하는 조리 돌림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최후를 짐작하지 못한다.

이런 얘기를 웃음기를 싹 거둔채 진지한 문장으로 풀어내는 것이 바로 블랙 코미디의 전형 아닐까? 좀 싸게 쳐줘 비아냥이나 조소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조소와 비아냥이 철저한 주제 의식 아래 치밀하게 전개 된다면 그건 하나의 문학 형식이 될 수도 있다. 노벨은 스타일이 없는 사람에겐 상을 주지 않는다. 
 

 

 

우의 치수(治水) 이야기를 담고 있는 '홍수를 다스리다'에서는 풍자와 조롱, 유머의 강도가 훨씬 높아 진다.

이 소설에는 두 부류의 정치인이 등장하는데, 첫째는 '우'로 대표되는 행동파고 둘째는 '조정의 관료', '재야의 학자'로 대표되는 관념파다. 루쉰의 풍자 대상은 당연 후자다.

사변과 논쟁에만 몰두할 뿐 현실을 타계할 대책이 없는 무의미한 학자들, 게으르고 부패해 탁상공론만을 일삼는 관료들은 새로운 치수법을 앞세워 천하를 주유하는 우를 당해내지 못한다. 실천과 진실의 정치가 보수와 반동을 타파하여 이 세상이 백성들의 손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루쉰의 바람이었다.  

'아Q정전', '홍수를 다스리다'가 잽으로 일관하다 스트레이트로 마무리하는 아웃복싱이라면 쿵이지, 고향, 술집에서 같은 소설은 묵직한 훅이 날아드는 인파이팅이다.

이 소설들은 결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글쎄 뭐라고 해야할까? 씻어도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흰 담벼락의 얼룩같이 언제까지고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잔잔한 떨림을 일으키는 감정의 앙금을 남긴다. 이를테면 20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어릴 적의 친구를 만났지만 그 친구의 타락을 목격해 버리고 마는 '고향'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희망은 본래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사실은,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는데,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자 길이 된 것이다.

옛 친구의 선한 정신을 마비시켜버린 현실의 괴로움과 절망. 삶 앞으로 불어오는 현실의 광풍에 마모되고 짓이겨져 우리는 그렇게 살아갔다. 20년이 지나가버리자 우리는 완전히 남남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자식들은, 그의 후배들은 어떤가? 그들에게도 여전히 삶은 어둡고 절망적인가? 그러나 루쉰은 어린 아이들의 정에서 하나의 희망을 본다. 

우리의 후배들은 아직 한 마음이다, 훙얼은 수이성을(작자와 작자 친구의 자식들) 그리워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희망한다. 그들은 더 이상 나처럼, 사람들끼리 격절되지 않기를...  

그러나 나는 또한, 그들이 한마음이 되려고 하다가 그 때문에 나처럼 괴롭고 떠도는 삶을 사는 것은 원하지 않고, 그들이 룬투처럼 괴롭고 마비된 삶을 사는 것도 원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처럼 괴롭고 방종한 삶을 사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땅히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아직 살아보지 못한 삶을.  

 

루쉰은 결코 문장 자체가 뛰어난 것은 아니다. 주제다. 좀 더 자세하게는 주제를 드러내는 태도다. 자신을 이롭게 하려는 자를 억압하고 자신을 억압하는 자를 숭배하는 마음. 이같은 하층민의 노예 근성과 그 끝을 알 수 없는 무지를 거칠지만 진솔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드러낸다.  

알고 있겠지만 루쉰은 옛날 사람이다. 1881년에 태어났다. 글의 끝 부분에 작가의 탄생 연대를 드러내는 이유는 아주 상투적인 결말을 내기 위해서다. 이런 결말은 작가와 작품이 현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수록 빈번히 출몰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내용은 대충 아래와 같다.

오래 세월이 지났음에도 루쉰의 소설이 현대적 의의를 갖는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우리가 배를 잡고 조소하는 120년 전의 암흑 세계에서 단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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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도란 2010-11-19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허스키님!^^ 아Q정전 정말 많이 읽히는 책이죠~
알찬 서재 잘 구경하고갑니다
저는 이음출판사에서 나왔어요~
저희가 이번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를 연일 차지하여 화제가 되고있는 도서
<모터사이클 필로소피> 한국판 출판 기념으로 서평단을 모집하고있거든요^^
책을 사랑하시는 허스키님께서 참여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 이렇게 덧글남기고가요
저희 블로그에 방문해주세요~! :)

한깨짱 2010-11-24 19:5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도란도란님 근데 책이 저랑은 약간 안 맞는 것 같아서 망설이게 되네요. 나중에 더 좋은 기회 있으면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