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벌이의 지겨움 - 김훈 世設, 두 번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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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김훈의 글은 종이 위에 연필로 씌여진다. 김훈은 종이위에 연필로 써야만 한줄 한줄 온 몸으로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글쓰기를 강도 높은 육체 노동으로 비유하는데, 김훈의 문장을 보고 있으면 매초 매시 거대한 삶을 밀고 가는 순교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 순교자의 모습에서 보는 이를 초죽음으로 만드는 피로가 쏟아져 나온다. 김훈의 문장은 사람을 녹초로 만든다. 

이 글은 김훈이 자전거 여행을 하고 놀고 누군가의 글 위에 평을 하고 또 누군가와 인터뷰한 내용들이 담겨 있다. 모두 김훈의 에세이에서 익숙한 풍경들이다. 또 다른 산문집 '자전거 여행'과 '바다의 기별'을 짬뽕해 놓은 듯 하다. 삶의 스펙트럼이 그렇게 넓은 사람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이미 나와있는 에세이가 너무 많거나. 

김훈의 문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없다'이다. 그의 문장에는 '수 많은 역사가 담겨 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수 많은'이라는 단어로 일단락 짓기에 김훈의 문장은 너무나 '깊고 넓다'. 내가 어떻게 이 책을 말할 수 있을까? 굳이 말한다면 '말할 수 없다'이다. 나의 평은 이토록 초라하고 민망하다. 

 

 

<이미지출처: http://bonjo6z.egloos.com/5251946

 

훈의 문장에선 거친 마초의 냄새가 난다. 문장은 섬세하디 섬세한데 여성성은 느껴지지 않는다. 김훈의 얼굴은 사랑방에 눌러 앉아 온종일 침묵하는 가부장의 모습과 겹쳐진다. 그는 온 몸으로 밀고 나가며 문장을 쓴다라고 했는데, 내가 생각엔 밀고 나가는게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누르는 거다. 기계에 들어간 반죽 덩어리가 고운 면발이 되어 나오듯 그는 온 몸으로 눌러 문장을 낸다. 이렇게 나온 문장은 뜨거운 물에 빠져 한 동안 삶아지다 이내 시원한 물에 식혀져 차가운 놋쇠 그릇에 담겨 나온다. 김훈의 문장은 '깊고 넓으며' 또한 '차갑고 뜨겁다'. 

김훈의 문장엔 아스라히 사라져 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회한과 상념이 담겨 있다. 김훈은 여름 내내 시끄럽게 울어 대다 찬바람이 불자 울음을 멈춰 버린 벌레들의 시체를 찾아 숲으로 간다. 늦가을 기나긴 여행을 떠나는 철새의 주검을 찾아 들판으로 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끝끝내 벌레와 새의 시체를 찾을 수는 없다. 김훈의 문장은 '뜩'하고 나타났다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들의 과거를 더듬는다. 

그러던 김훈은, 어느날 강둑에 앉아 나비의 최후를 목격한다. 나비는 꽃 위에 앉아있다 바람에 씻겨 사라졌다. 벌레가 시체를 남기지 않는 이유는 바람 때문이었다. 벌레는 바람에 날려 무로 되돌아 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새는 어디에서 죽는가? 새들은 따뜻한 곳과 먹이를 찾아 바다 위를 나른다. 그러나 바다에는 오로지 바다 뿐이다. 바다는 잠시 쉬어갈 틈도 주지 않는다. 기진한 새는, 바다뿐이 없는 바다 위에 떨어져 시체가 된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면 새의 시체가 만든 최후의 물결마저 지워지고, 차가운 바다가 시체를 삼킨다. 

김훈의 문장엔 가 닿을 수 없는 곳에 대한 동경과 한계 지워진 땅에 대한 경탄이 담겨있다. 김훈은 자전거로 여행한다. 자전거는 바다를 건널 수 없다. 바다를 건널 수 없는 자전거는 바다 너머 저 곳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주저 앉는다. 그리고 주저 앉은 그 자리에서 소금이 듣는 염전을 바라보거나 만선에 흐트러진 밧줄을 본다. 만선과 염전의 수확은 풍요와 결실의 상징일진대, 김훈의 문장은 이 모든 것들을 쓸쓸히 만들어 버린다. 그것은 더 나아갈 수 없는 자전거의 비애와 더 나아가지 못하는 곳에서 피어나는 거룩한 생명의 신화가 짬뽕된 결과일 것이다.  

어느날 김훈은 자전거를 버리고 10일로 계획된 어선을 탔다. 가 닿을 수 없는 곳에 대한 최초의 여행. 하지만 흔들림에 익숙하지 못한 몸이 말을 듣질 않았다. 흐트러진 밧줄을 부여 잡고 그물을 끌어 당기려 했지만 선원들은 번거로운 그를 만류했다. 결국 흔들림에 이기지 못하고 김훈은 돌아오는 배로 갈아탔다. 10일로 계획된 어선에는 4일만 머물렀다. 

 

 

 

김훈의 아버지는 일제시대, 독립운동가 김구의 수발을 들었다고 한다. 해방 후에는 무협지를 써 밥을 벌었다. 하지만 밥을 벌었던 시간이 길지는 않았던 것 같다. 김훈은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가난했기 때문에 가난하게 사는 게 싫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젊었을 때의 가장 큰 고민이 '먹고사는 데 대한 공포'였다고도 했다. 일제 시대, 독립운동가 김구의 수발을 들었던 아버지의 아들, 가난한게 싫었던 그 아들은 소설가가 되었다. 

밥벌이는 지겨운 것인가? 김훈은 '노는게 신성하다'고 했다. 노동은 숭고하지만, 인간의 삶에있어 불가피하기 때문에 존속되는 것이다. 김훈은 오늘도 종이 위에 연필로 글을 쓴다. 악전고투, 한줄 한줄 온 몸으로 밀어낸 문장이 폭염 속, 한톨 한톨 돋아나는 소금처럼 쌓여 글이 된다.  

김훈은 이 글을 팔아 밥을 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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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의 과학 - 세종마케팅총서 1
파코 언더힐 지음, 신현승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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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의 과학이 제안하는 '고객을 사로잡는 9가지 성공 법칙'은 다음과 같다. 나는 여기에 나름대로의 사례와 논평을 추가한다. 

 

법칙1. 고객의 손을 자유롭게 하라  

당연한 말이겠지만, 손이 자유로울 수록 사람들은 더 많은 상품을 집어들 수 있다. 따라서 더 많은 매출을 올리고 싶은 모든 매장은 우선 고객의 손을 자유롭게 하는 방법부터 강구해야 한다.  

오늘날 이마트나 롯데마트 같은 대형 매장들은 입구에 락커룸을 설치함으로써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한다. 쇼핑 카트는 또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사실 카트의 위대한 점은 바로 거기에 아이들이 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아이들은 가방이나 목도리, 책이나 코트와는 달리 락커룸에 넣을 수 없다. 하지만 카트라면 얘기가 다르다. 아이가 카트에 앉아 있는 이상 어른들은 매장을 휘젓고 다니며 물건들을 쏟아 버리는 아이의 뒤를 쫓을 필요가 없다. 게다가 아이들은 자신이 짐짝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도 모른채 그 곳에 앉기를 좋아한다.  

카트와 락커룸은 현재로서도 제법 괜찮은 활약을 하고 있지만 앞으로 두 가지 점에 있어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 그것은 명품 가방과 애완견을 보관하는 일이다. 명품 가방을 락커룸에 보관하는 것은 너무 불안하다. 그렇다고 300만원짜리 명품백을 당근, 파, 마늘을 함께 넣었던 카트에 올려 놓으라고? 애완견은 어떨까? 모르긴 몰라도 명품 가방만큼 소중한게 애완견일 것이다. 

 

 

 

법칙2. 고객의 동선에도 법칙이 있다  

쇼핑의 과학은 극단적으로 말해 상점에 들른 인간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고객이 어디로 향할지 정확히 알고 있다면 당신의 장사는 이미 성공한 것과 다름없다. 그렇다면 고객은 어디로 향하는가? 오른쪽으로 움직인다!  

이 단순한 법칙은 지구상 대부분의 인간들이 오른손 잡이라는 단순한 사실과 관련이 있지만 지금껏 그 누구도 이 사실을 간단히 알아채지는 못했다. 이제 당신은 이 사실을 알게 됐으니 매장 입구 오른쪽에 '신사복 매장'을 설치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고객의 80%가 여성인 당신의 백화점에서 말이다.  

간단한 사실 하나 더! 사람은 앞으로 움직인다! 인류는 이집트 상형 문자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게걸음을 걷지 않는다. 인간의 눈은 앞을 지향하고 두 다리는 앞을 향해 나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 많은 상품들이 복도를 따라 옆으로 진열되어 있다! 상품들이 약간 비스듬히 그러니까 앞으로 걸어가는 고객들에게 적당히 노출 될 수 있을 만큼 기울어져 있다면 어떻게 될까? 줄지어 늘어선 상품들은 고객의 심장을 두방망이질하는 자극제가 될 것이다.  

 

법칙3. 광고의 생사는 1미터로 결정된다.  

한 마디로 매장 입구에 광고판을 설치하지 말라는 얘기다. 매장 입구는 고객들에게 그리 편안한 장소가 아니다. 그곳은 언제나 사람들로 붐빈다. 느긋하게 서서 광고판을 읽을 여유는 없다.  

당신의 광고판을 입구에서 고작 1미터 떨어진 곳에 설치해 보라. 입구의 혼잡함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이제 여유를 찾고 매장을 둘러 보기 시작한다. 광고가 위치해야 하는 곳은 고객이 다른 것에도 충분히 주의를 기울일 수 있을 만큼 여유롭고 안락한 장소여야 한다.  

얼마전 버스에서 QR 코드 광고판을 본 적이 있다. 이 광고판은 무려 버스 뒷문에 위치해 있었다! 하차를 위해 줄지어 늘어서 있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스마트폰 App을 실행해 QR 코드를 찍는다고? 넌센스 오브 넌센스다. 

 

 

 

법칙4. 고객의 본성에 섣불리 도전하지 말라. 

본성이라는 무거운 단어로 독자를 위협하지만 사실은 별 내용 없다. 만약 창틀이나 장식용으로 설치한 화단에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 있다면 당신의 매장에 지금 당장 의자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고객이 편안히 쉴 수 있다면 쇼핑으로 지친 그들은 의자에 앉아 기운을 회복한 뒤 다시 맹렬한 쇼핑을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고객은 상품을 직접 만져보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완벽한 촉감의 극세사 이불을 파는 주제에 그것을 비닐로 꽁꽁 싸매고 있다면 결과는 둘 중 하나다. 상품이 팔리지 않거나, 고객들이 남몰래 비닐을 찢어 이불을 만져 보거나!  

 

법칙5. 남성은 마음 편한 쇼핑을 원한다.  

스탠포드 MBA 출신인 로이 레이몬드는 부인에게 속옷 선물을 해주고 싶었지만 막상 백화점 속옷 매장에는 부끄러워서 갈 수가 없었다. 이때 로이가 얻은 아이디어가 고급 속옷을 사러 갈땐 고객이 변태처럼 느끼면 안된다는 거였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실천하는 매장이 단 한 군데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1977년, 4만 달러의 은행 대출금과 함께 빅토리아 시크릿(Victoria's Secret)을 만들었다. 로이는 첫 해에만 50만 달러를 벌어들였고 5년 뒤인 1982년 The Limited에 회사를 매각했다. 매각 대금은 400만 달러였다.  

 

법칙6. 여성은 고급스런 쇼핑을 원한다. 

여성은 고급스런 쇼핑을 원한다. 지금 당장 명동 롯데 백화점에 들러 명품관을 찾아 보라. 정장을 입은 떡대 한명이 매장 입구에 서서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다. 매장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입구의 떡대에 의해 철저히 통제된다. 여성들은 자신이 선호하는 브랜드가 '아무때나' '아무나' 구경할 수 있는 브랜드가 아님을 학습한다. 기다림의 불편이 '특권'으로 대치된다. 

 

 

 

법칙7. 작은 것은 불편하고 큰 것은 아름답다.  

이는 점차 소비 세계의 주류로 떠오를 실버 세대를 위한 법칙이다. 이들의 쇼핑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게 뭘까? 우선 모든 활자의 크기가 너무 작다. 실버 세대들은 오메가-3와 두통약, 키토산 알약의 효능과 유효기간을 살펴보기 위해 200배줌 현미경을 들이 밀어야 한다. 옛날 우리 말에 노파심이란 말이 있듯이 실버 세대는 대체로 걱정이 많다. 그들이 만약 약병에 적힌 설명을 읽지 못한다면, 실버 세대들의 노파심은 결코 그 약을 구매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다. 

 

법칙8. 아이들의 쇼핑: 쇼핑은 상품과 노는 것이다. 

맞벌이가 주류가 됨에 따라 가족의 쇼핑 문화에도 변화가 생겼다. 예전에 엄마의 직업은 가정주부였다. 가정주부는 가족이 등교와 출근을 한 틈을 타 쇼핑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엄마나 아빠 모두 출근을 한다. 이에 쇼핑은 주말에 가족 모두가 떠나는 즐거운 산책이 되었다. 

아이들의 넘치는 호기심을 생각해 보자. 아이들은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만지려'한다. 그런데 세상에 아이들을 위한 콘푸로스트가 매대의 맨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다! 만약 콘푸로스트가 아이들의 손이 닿는 아래쪽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이는 곧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는 파란 상자를 들고 부모에게 달려가 조르기 시작할 것이다.  

요새 몇몇 대형 서점을 둘러 보면 어린이 도서 코너의 차별화된 디자인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그곳은 서점을 통틀어 유일하게 '코너 안에 의자'가 배치된 곳이다. 의자는 코너의 가장자리를 쭉 둘러싸 그 안 쪽은 광장을 형성한다. 광장의 바닥은 딱딱한 대리석이 아니라 말랑말랑한 고무다. 아이들은 이 곳에서 뛰거나 앉거나 눕는다. 부모들은 의자에 앉아 아이들을 감시할 수 있으며 아이를 무릎 위에 올려 놓고 책을 읽어 줄 수도 있다. 어린이 도서 코너는 거의 놀이방에 가깝다.  

 

칙9. 쇼핑은 체험이다.  

쇼핑은 단순히 물건을 구매하는 행위가 아니다. 쇼핑은 보고 듣고 맛보고 만져보고 냄새맡는 오감의 체험이다. 이 때문에 저자는 온라인 쇼핑이 결코 오프라인 쇼핑을 대체할 수 없을 거라 말한다. 반박할 충분한 근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형 매장들의 엄청난 성공을 돌아봤을 때 - 그들은 시식 행사를 열고 화려한 광고판을 설치하며 과감히 포장을 뜯어 고객이 사용해 볼 수 있게 한다 -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말이다. 

현실 세계의 매장은 고객에게 접촉과 즉시 만족의 기회를 제공한다. 사람들은 해당 물건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어떤 맛을 내는지, 무슨 향이 나는지 직접 경험하며 오랜 기다림 없이 즉시 구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신이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바로 오감의 퍼포먼스다.  

 

                                                         <후카사와 나오토의 패키지 디자인>  

 

따지고 보면 쇼핑의 과학은 고객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행동 패턴을 파악해 그것을 충동구매와 연관시키려는 전략적 속임수를 뜻한다. 저자는 매출 증대의 핵심이 충동 구매에 있다고 믿는다. 샘숭전자의 갤럭시S를 1+1으로 파는 대국의 시민답다. 

쇼핑의 과학은 출간된지 벌써 10년이 지난(한국에서만), 초판 34쇄의 명작답게 오프라인 매장 운영 전략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만약 당신이 퇴직을 앞둔 회사원이라면, 그리고 장사라고는 털끝 만큼도 경험해 본 적이 없으나 막연히 치킨집을 해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당신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감동을 받은 건 쇼핑의 과학이 아니라 그 과학을 도출해 내는 과정 이었다. 2만 시간이 넘는 비디오를, 그것도 초고속으로(슬로우 모션으로 찍는다는 얘기) 촬영하여 고객의 행동과 매장을 꼼꼼히 기록하는 장인 정신. 아마도 인바이로셀(쇼핑의 과학을 연구하는 저자의 회사)에는 '내 생각에는 ~하니 ~할 것 같다'같이 무책임한 발언을 하는 사원은 없을 것 같다. 철저히 데이터에 의존하는 의사결정. 그리고 방대한 데이터를 해석하는 강박적 꼼꼼함. 

이 책에서 뭔가 배울게 있다면 그건 확실히 '쇼핑의 과학'은 아니다. 그 과학에 이르는 '길'. 오히려 이 부가 정보가 100배 더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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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돋을새김 푸른책장 시리즈 7
손무 지음, 유재주 옮김 / 돋을새김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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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에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 같은건 없다. 전투의 승패는 어쨌든 반반이다. 손무는 승패에 아주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는 승리의 조건을 끈질기게 찾아 모으고 패배 조건을 부지런히 몰아내 승패의 확률을 계산하는 세심한 투자자였다. 

백번 싸워 백번 이긴다는 말엔 어딘지 모르게 '이 한 판에 내 돈 전부와 내 왼 손모가지를 걸겠다'는 노름꾼의 피비린내가 난다. 손무는 그렇게 호기만 부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위태로움에 빠지지 않는다'고 했지 백번 싸워 백번 이길 수 있다고 한 적은 없다. 

知彼知己, 百戰不殆 (지피지기, 백전불태) 

또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손자병법의 핵심이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이라는 것이다. 손자는 이렇게 말했다.  

모름지기 용병법이란 적국을 온전히 취하는 것을 최상으로 하고 싸워서 취하는 것을 그 다음으로 한다.  

전쟁을 벌이는 일은 어쨌든 양쪽 모두에게 피곤한 일이다. 게다가 전쟁은 이 땅 위에 상처와 원망을 쌓아 놓는다. 그로인해 피폐해진 땅이라면 비록 승리해서 빼앗은들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손자의 부전승사상(不戰勝思想)이다.  

싸우지 않고 이기려면 역시 머리를 써야 한다. 이것이 바로 모공(謀攻)이다. 그리고 모공의 첫째 목표는 적국의 전쟁 의도를 분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국의 전쟁의도는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그건 바로 적이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면 된다. 그리고 그건 대개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조조는 대교와 소교를 차지하기 위해 오와 전쟁을 벌였고 부시는 석유를 차지하기 위해 이라크를 침공했다.  

아무리 궁리해봐도 내가 가진걸로는 협상을 이끌어 낼 수 없을 땐 다른 방법으로 적국의 의도를 분쇄해야 한다. 여기서 필요한게 바로 이간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혼자는 외롭고 다수는 편안한 법이다. 적국과 관계를 맺고 있는 제 3국을 적국으로부터 단절시키면 적은 고립되어 약해진다. 고립되고 약해진 적은 결코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 공명이 천하의 평화를 위해 세 나라가 필요하다고 한 것도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에는 또한 '만전(萬全)'이 있다. 만전은 전쟁을 하기 전에 미리 모든 준비를 해둔다는 뜻이다. 평상시에 국경을 튼튼히 지키고 정기적으로 군사를 훈련시켜 그 기강을 바로잡는 다면 결코 적국의 표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전쟁은 군사력만의 문제가 아니라 또한 경제력의 싸움이기도 하다. 손자병법에는 십만의 군사를 하루 움직이는데 필요한 돈이 천금이라고 했다. 정치를 바로하여 백성이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고 거기서 거둬들인 세금으로 부숴진 성과 병장기를 보수하고 말과 군사를 먹일 식량을 쌓아 두면 비로소 만전의 태세가 갖춰지는 것이다. 따라서 만전이란 정치, 군사, 경제를 포괄한 광범위한 국가 전략을 말하는 것으로 손자는 이를 두고 '이기게 해놓고 싸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모공과 외교가 실패하고 만전의 위엄도 녹록치 않을 땐 전쟁을 벌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면 반드시 속전으로 끝내야 한다. 아무리 큰 나라라도 전쟁이 길어지면 국력이 쇠하는 법이다. 군사들은 지쳐 고향을 노래하고 무기는 시들어 땅에 끌리며 재정이 바닥나 백성의 생활이 궁핍해진다.  

그건 적국의 상황도 마찬가지라 행여 장기전 끝에 승리를 거뒀다 하더라도 그 이득은 결코 크지 않다. 무너진 성과 굶주린 백성과 헐벗은 땅을 차지하는게 그 무슨 이득이 있을 수 있겠는가? 뿐만아니라 상처 입은 맹수는 들판을 떠도는 개에게도 먹이를 뺏기는 법이다. 

부전승, 만전, 모공, 속전 이상 네 가지 사상이 손자병법이 말하는 전략의 요체다. 이를 아는 사람은 백번 싸워 결코 위태로움에 빠지지 않을 것이고 이를 모르는 사람은 영원을 전쟁의 진흙탕 속에서 보내야 할 것이다. 

 

 

사실 손자병법을 읽어 보면 당연하다 싶은 얘기만 잔뜩이라 심심할 정도다. 최근들어 손자의 사상이 기업의 경영 전략과 얽혀 들면서 이 책이 각광받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놀랍게도 손자의 병법은 대부분 모략이나 이간, 용간(첩자를 이용함)을 위주로 한다. 이를 기업의 경영 전략과 엮었으니 얼마나 치사하고 더러운 이야기만 가득했을까? 

사르트르가 말한대로 '타자가 지옥'이며 삶이란것이 결국 남과의 투쟁에서 살아남는 것이라면 손자는 인생의 최고 멘토고 그의 병법은 성서를 뛰어넘는 초성서다. 그러나 나는 손자가 전쟁광이 아니었음을 믿는다.  

손자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고 했다. 이 말에는 어딘지 모르게 꼭꼭 문을 닫아 걸고 수성(守城)하는, 그리하여 피 한방울 보지 않으려는 안전빵 샌님의 냄새가 난다. 손자는, 어지간히도 싸움을 싫어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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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 - 한줄기 희망의 빛으로 세상을 지어라
안도 다다오 지음, 이규원 옮김, 김광현 감수 / 안그라픽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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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에는 철학이 필요하다. 철학이 확고한 사람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며 아무리 힘든 일을 겪더라도 끝내 빛을 보고야 만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철학이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실존주의나 니체를 뜻하는건 아니라는 걸 알 것이다. 요즘 세상에서 철학이란, '누가 뭐라해도 자기 생각을 고집스럽게 추구해 나가는 것'이라고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안도 다다오가 소형 주택 '스미요시 나가야'로 건축계에 데뷔했을 때 안도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었다. 목조 건물이 줄지어 있는 빽빽한 골목, 그야말로 한 뼘이라고 표현할 만큼 조그만 땅에 안도는 차가운 콘크리트 입방체를 그대로 끼워 넣었다. 집 안은 더더욱 가관이었다. 그 좁은 건물의 3분의 1 정도를 할애해 중정을 만들어 놓았다. 이 중정은 지붕이 완전히 오픈된 곳으로 비가 오는 날이면 집주인은 서재에서 마루로 가는 동안 우산을 써야 했다. 그의 작품은 실용과 합리성을 추구하는 건축 본연의 의의를 떠나 파인 아트(Fine art)를 지향하는 듯 보였다.  

 

 

 

사람들은 스미요시 나가야를 '건축가의 이기심에서 나온 집'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안도는 이 집이야말로 '주거란 무엇인가'에 대한 사상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 한 건축이며 결코 예술 작품처럼 내키는대로 지은 집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가 스미요시 나가야를 통해 내놓은 해답은 '자연의 일부로 존재하는 생활이야말로 주거의 본질'이라는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보자면 그 넓지도 않은 집에서 3분의 1을 차지하는 중정은 얼마나 낭비적인 공간인가. 하지만 나는 어릴 적 살던 집을 떠올리면서 이 중정이라는 자연적 공백이야말로 좁은 집안에 무한한 소우주를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었다. 동시에 중정으로 들어오는 자연의 그 냉혹함까지 받아들이고 일상생활의 멋으로 알고 살아갈 수 있는 강인함이 인간에게는 존재한다.' p88 

안도 다다오는 자신이 기성 세대의 관습과 사상에 맹렬히 저항하며 살아가듯 자신이 지은 집에 살아갈 사람들 또한 거기서 오는 불편을 감수하고 완강하게 살아낼 각오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설계를 맡기러 온 고객에게 이런 말을 하면 대체로 절반 정도는 기가 죽어 발길을 돌린다고 한다. 안도는 미친 건축가였다.  

똑똑한 사람들은 열심히 공부해 좋은 직장에 들어가 승진을 하고 바보들은 직장을 나와 일가(一家)를 이룬다. 하지만 미친놈들은 맨손으로 일어나 세상을 재패한다. 안도는 일반적인 관점에선 미친 건축가였지만 그 사상과 철학 만큼은 단단한 바위 같았다. 안도의 콘크리트 입방체들은 처음엔 극소수의 건축주들에게만 수용되었지만 그 어떤 건축과도 구분되는 확실한 존재감 탓에 도시는 곧 안도의 건축물을 하나의 풍경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안도 다다오의 '저항과 도전'이 비로소 도시의 삶 속에 단단히 뿌리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왜 노출 콘크리트 인가  

'저항과 도전'이 안도의 정신이라면 '노출 콘크리트'는 그 정신의 표현이었다. 사실 건축 소재에 있어 콘크리트만큼 따분한 소재는 없다. 한국의 주거문화를 완전히 망쳐놨다고 비판되는 집들이 바로 콘크리트 덩어리로 빚어낸 아파트라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사람들은 콘크리트가 뿜어내는 삭막한 풍경에 질식한다. 그래서 그 위를 유리로 덮거나 페인트로 칠하거나 각종 장식으로 치장한다.  

그런데 '노출 콘크리트'란 그 치장이 완전히 배제된 상태, 그러니까 거푸집을 만들어 콘크리트를 붓고 그것이 굳자마자 떼어낸 순수한 콘크리트 덩어리다. 안도 다다오는 그 적나라한 속살을 그대로 건축에 활용한다. 심지어 내부 인테리어까지 철저히 배제된 채로 말이다.  

 

다양한 건축 소재가 일반화된 요즘에도 안도가 '콘크리트'만을 고집하는 이유는, 그것이 '창조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도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안도에 따르면 노출 콘크리트는 '벽 안팎을 단번에 마감할 수 있기 때문에 제한된 예산과 대지에서 최대한 커다란 공간을 확보하고 싶다는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 저렴한 해결책'이다. 여기에는 건축물이란 건축가의 자의식을 표현하는 예술작품이 아니라 엄연히 '사람이 살아갈 건물' 이라는 안도의 자각이 반영되어 있다.  

  

도시에 도전하는 건축  

주택 스미요시 나가야로 도시에 강렬한 방점을 찍어 넣은 안도 다다오는 이어지는 상업 건축을 필두로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안도 같이 자의식이 강한 건축가가 상업 건축을 선택했다는 건 사실 굉장한 아이러니였다.  

당시 건축계에는 '상업에 아부하는 시설은 공공성이 없는 이른바 하등한 것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고, 실제로 디자인도 겉만 장식하는 진부한 것뿐' 이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상업 건축은 진정한 건축가로 불리길 원하는 사람들에겐 철저히 무시당하던 존재였다. 그러나 이 같은 업계의 편견은 기어이 안도의 반골 기질을 자극해 버리고 말았다. 안도는 상가가 즐비해 있는 상점가로 나가 또 한번의 반란을 꿈꿨다.  

한국만 그런줄 알겠지만 일본도 한 때는 산업화의 물결에 휩쓸려 옛 것을 모조리 파괴하고 그 위에 허세를 세우는 것이 근대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바로 이러한 시대에 안도는 당시로선 그 개념조차 생소한 '풍경 보존'이라는 의식에 입각해 최초의 상업 건축 '로즈 가든'을 짓기 시작한다.  

로즈 가든'은 고베의 오래된 주택가, 기타노마치에 위치한 건물이었다. 그곳은 메이지시대부터 외국인 밀집 지역으로 이용되면서 보통의 일본과는 다른 이국적 풍광을 유지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곳도 마구잡이식 개발의 화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조만간 낙후된 시설에 대한 불만과 건축주의 상업적 목적이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와 수 십년의 역사를 흔적조차 없애 버릴 것이 분명했다. 안도는 자신의 건축이 그 파괴의 일익을 담당해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과감히 노출 콘크리트를 배제하고 벽돌로 로즈가든을 짓기 시작했다.  

 

 

 

상업 건축을 한 마디로 요약하라면 '효율'이다. 임대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이라면 짜투리 땅이라도 어떻게서든 활용해 내는 것이 건축주의 바람이고 건축가의 의무다. 현대 건축은 이같은 공간의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높이 높이 솟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발달로 인해 현대 건축은 엄청난 높이를 쌓아 올리고 유지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콘크리트를 배제하고 벽돌을 선택했다는 점, 그리고 건물의 높이를 주변의 건물들과 조화롭게 유지한다는 건 가히 혁명적인 생각이었다. 뿐만 아니라 내부 구조는 스미요시 나가야와 같은 중앙 광장이 설치되 굉장한 공간 낭비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넌센스들이 건물의 특수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유일한 존재로 만들어 거리에 우뚝 서게 만든다.  

안도의 작업은 고베의 오래된 주택가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뒤이어 맡은 8건의 추가 건축은 로즈 가든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옛것의 소중함을 심어줬음을 암시한다. 안도의 고집스런 건축이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을 변화시킨 것이다. 

   

안도라는 이름의 건축가  

오래전부터 건축은 예술에 속하는 장르였다. 한국에서야 건축학도하면 그저 공대생을 떠올리지만 외국의 경우 건축학과는 대부분 미대나 독립된 단과 대학으로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에서 건축이 예술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 건축=아파트라는 도식이 확고하게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아파트 공사현장에선 예술의 향기 보다 열악한 근무 환경과 노가다가의 냄새가 짙게 배어난다.  

건축은 공간을 사유하고 그 안에서 삶을 빚어내는 미의식의 발현이다. 확고한 철학 없이 건축을 한다면 공간은 필연적으로 흉물스런 아파트의 향연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건축가 안도 다다오는 근성이다. 속도와 생산성이 몰고 오는 거대한 쓰나미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안도는 자신의 건축을 했다. 자신의 철학을 산다는 건 괴롭지만 걸어온 길 위에 길이길이 남을 족적을 새기는 일이기도 하다. 바다 위의 절벽은 거센 파도를 맞으면서도 수 천년을 버틴다. 안도의 건축도 그렇게 영원히 서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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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이운경 옮김 / 한문화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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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은 인류에게 있어 매우 의미있는 해였다. 노스트라 다무스는 이 해에 지구가 종말할 거라고 예언했었다. 유럽에는 새 시대의 통합을 상징하는 유로화가 도입됐다. 터키에선 7.8의 강진이 일어나 3만여명이 매몰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2년 5개월 만에 탈옥수 신창원이 검거되었다. 

1999년은 새 천년에 대한 기대와 지구 종말이라는 막연한 불안감이 뒤섞여 전반적으로 달뜬 한해를 보내고 있었다. 사회가 불안해 질 수록 사람들은 더 강한 자극을 원한다고 했던가? 60년 전 TV의 도전을 물리치기 위해 거대한 스크린을 스펙타클로 이식한  헐리웃은 이 때야 말로 자신이 가장 큰 활약을 펼칠 때라는걸 깨달았다. 그리하여 헐리웃의 3대 제작자 조엘 실버는 아직은 형제였던 두 감독을 고용해 빨간약과 파란약을 만들어 낸다.  

1999년은 영화 매트릭스(Matrix, 1999)가 개봉한 해이다.   

 

1980년대에 빨간 휴지를 줄까 파란 휴지를 줄까하는 화장실 괴담이 그랬듯 1999년에는 빨간약이냐 파란약이냐라는 선택의 문제가 온 문화계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매트릭스는 비단 영화계만의 이슈가 아니었다. 매트릭스가 보여준 세계는 새롭고 막강한 기술 위에 세워진 가상 실재였다. 사람들은 360도로 회전하는 카메라(Bullet time)와 초고속으로 촬영된 건물 폭파씬에 이를 악물었다. 기술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세계를 만들어냈다.  

매트릭스 이후의 미디어들은 더이상 이전처럼 살아갈 수 없었다. 광고와 드라마는 더 정교하고 현란하게 세계를 창조해야 했다. 신문과 뉴스는 모피어스가 밝혀낸 진실보다 더 쇼킹한 사건을 보도해야 했다. 이 세계 자체가 우리 모두를 기만하고 있다는 사실을 능가하는 내러티브를 찾기 위해 모든 미디어가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매트릭스의 영향력은 빛줄기 하나 범접할 수 없는 어둡고 침침한 골방 속, 시큰한 홀애비 냄새를 풍기며 잠들어 있던 철학을 깨우기에 이르렀다. 철학자들은 저급한 대중영화가 엄청난 신화, 종교, 철학적 상징들을 담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모든 논쟁이 그렇듯 그들의 의견도 두 가지로 나뉘었는데, 어떤 이들은 매트릭스가 가진 철학적 메시지는 단순한 장식일 뿐이며 이 영화를 '철학'이라는 완결된 체계로 포섭하기엔 어설프기 짝이 없다고 비난했다. 또 어떤 이들은 매트릭스가 대중문화 역사상 가장 세련되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철학을 표현했다고 말했다.  

모르긴 몰라도 아도르노의 '문화 산업론' 이후에 철학이 이토록 대중 문화에 관심을 가져 본 적은 없었을 것이다. 아도르노는 재즈가 클래식을 대체하고 영화가 연극을 밀어내는 상황을 개탄하며 '문화 산업론'을 설파했다. 그러나 TV와 인터넷이 도래하자, 위태위태하던 철학은 그대로 절벽에서 떨어져 영원히 자취를 감춰 버렸다.   

 

매트릭스를 본 사람들이라면 이 영화가 기독교의 예수 재림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네오(Neo)라는 이름은 '다음', '새로운' 같은 의미가 있지만 영어 철자를 재배치하면 '하나(One)' 즉 절대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영화는 1999년 부활절 주간에 개봉했다. 

그런가 하면 오라클의 집에서 만난 차기 네오의 후보중 한명이 손을 대지도 않고 숟가락을 구부리며 키아누 리브스에게 전한 말은 불교의 근본사상을 표현한다.   

"숟가락은 없어요. 구부러지는 것은 숟가락이 아니라 오직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기계와 인간의 관계를 규명하는 방법도 가지각색이다. 기계를 인간에 대한 착취자로 설정하면 기계와 인간의 대립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대결이 되며 이는 매트릭스가 위대한 맑시즘의 체제 안에서 읽힐 수 있음을 암시한다. 반면 기계 또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감정을 느끼고 거기에 반응하며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관점에선 과연 인간이 기계를 지배하는 것과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것 사이에 어떠한 도덕적 차이도 있을 수 없다는 도발적인 결론을 낳기도 한다.  

한편 '매트릭스'는 - 영화 제목으로서가 아니라 영화 안에 존재하는 가상 실재를 뜻함 - 오랜 시간 철학을 괴롭혀왔던, 인식론에 대한 논쟁을 부활시킨다. 이 세계의 근본은 과연 물질인가 아니면 관념인가? 우리는 실재를 통해 세계를 인지하는 것인가 아니면 인지한다는 생각이 실재를 만들어 내는 것인가?  

이 논쟁은 17세기의 위대한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한 이후로 가열찬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나 자신을 의심할 수는 없으므로 물질이 실재한다'고 결론내렸지만 그 실재가 결국 뇌로 전해지는 전기 신호의 해석에 불과하다면 이 세계에 과연 '실재'를 증명할 방법이 있는걸까? 

 

 

 

매트릭스는 철학으로 말해질 수 있는 거의 모든 세계를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트릭스에는 기독교가 있고 마르크스가 있고 인식론이 있으며 색즉시공과 인생무상과,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있다. 그리하여 슬라보예 지젝을 포함해 무려 17명의 교수들이 이 신화적 잡탕을 해체하기 위해 책을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는 비록 제목에서는 촌스런 냄새가 풀풀 풍길지언정 그 해체 과정은 마치 *포정이 각을 뜨듯 철저하고 부드럽다.  

평소 철학에 관심을 갖고 있었거나 철학을 읽어 보고 싶었던 사람이라면 이 책은 다소 터프하지만 훌륭한 선생님이 될 수 있다. 내용 자체가 아주 쉽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훌륭한 번역과 더불어 교수님들의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은 이 책을 사야만 하는 절대 이유이다. 하지만 슬라보예 지젝이라는 이름에 혹한 사람이라면 잠시 서점에 들러 내용을 확인해 보기 바란다. 평소 그의 철학에 익숙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무려 40페이지에 이르는 그의 글이 생소하고 어려울 수도 있으니 말이다.  

'영화' 매트릭스에 뒤통수를 얻어 맞은 사람들도 이 책의 훌륭한 독자가 될 수 있다. 알쏭달쏭 미묘했던 상징들이 스크린 보다 훨씬 고루한 종이 위에서 오히려 생생히 살아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신비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단, 이 책은 매트릭스 1편 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걸 알아 두시라. 1편에 비해 리로디드와 레볼루션이 할 얘기가 더 적은게 사실이니까. 

 

 

 

*춘추전국시대 양나라 문혜군을 위해 소를 잡았다는 전설의 백정. 손을 놀리고, 어깨로 받치며, 발로 밟고, 무릎을 굽히며 소에게 칼질을 하는 모습이 '도(道)'를 거스르는 일 없이 부드러워 문혜군이 '양생의 도'를 깨달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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