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녀제도의 설치 과정

조선 건국 후 14년이 지난 태종 6년 (1406) 3월에 처음으로 의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날 제생원(濟生院, 조선시대에 약재를 실어 바치는 일을 받았던 관아)의 지사로 있던 허도는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부인이 병이 있는데 남자 의원에게 진맥하여 치료하게 하면 혹 부끄러움을 머금고 나와 그 병을 보여주길 좋아하지 않아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바라건대 창고나 궁사, 관아의 어린 여자아이 열 명을 골라 맥박과침, 뜸의 법을 가르쳐서 이들로 하여금 치료하게 하면 전하의 생명을 아끼는 덕에 보탬이 될 것입니다."
이는 어쩌면 국가 정책 면에서 여성을 남성과 격리하기 위해 내세운 변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논의를 통해 마침내 여성 직업인으로서 의녀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제까지 없었던 의녀 제도를 신설해 의녀 양성을시작한 것이다.
여성들은 1차적으로 여성에게 진료를 받게 되었다(물론 여의치 않은 경우에는 남자 의원에게 진찰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의녀는 여성을 진찰하고 치료하기 위해 의술을 배워 익혔고 그 후에는 필요한 의료기관에 파견되었다.  - P15

이후 태종 18년 (1418) 6월, 제생원에서 의녀 다섯 명으로는 부인병을 치료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다시 의녀를 뽑아줄 것을 요청했다.
의녀를 더 두었다. 제생원에서 올린 문서에 의하여 상기를 "의녀는 모두 일곱 명인데, 재주와 기예를 이룬 자는 다섯 명이므로 여러 곳에 나누어 보내면 매번 부족합니다. 바라건대, 각사의
여종의 딸 가운데 열세 살 이하인 자 열 명을 더 정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종 대에 의녀로 양성하기 위해 뽑은 열 명의 여자아이 중에서 의녀로 성장한 사람은 일곱 명이었다. 그중에서도 제대로 의녀 노릇을 할 수 있는자는 다섯 명뿐이었다. 의녀 자격을 얻기가 쉽지 않았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탈락자도 많이 생겨났다. 겨우 다섯 명만으로 여성의 질병을 진찰하고 치료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특수한 계층의 여성, 즉 궁궐 안의 여성만대상으로 한다 해도 손이 모자랐을 것이다. 태종은 다시 열세 살 이하의 여종 중에서 열 명의 의녀 후보생을 뽑도록 했다. 조기교육을 했다고 볼수 있지만 열세 살 이하라는 조건으로 보아 결혼하지 않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세종 대에 들면서 남녀유별은 더욱 심화되었다. 세종은 조선시대 최고의성군聖君으로 역대 가장 훌륭한 왕으로 받들어지고 있지만 여성에 대한 통제를 심화한 왕이기고 하다. - P16

조선시대 여의는 남자 의원에 대비되는 여자 의원이 아니라 단순히 의녀를 지칭하는 또하나의 이름이었다.
허도는 지방 여성들을 위한 의녀를 양성해서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의 부녀자도 치료 혜택을 받게끔 하자고 건의하였다. 이에 세종은 충청도와 경상도, 전라도부터 시행하라고 하였다.
피교육자는 너무 어려도 안 되고 나이가 많아도 안 된다. 가장 적당한대상은 어린아이다. 지금도 일고여덟 살에 초등교육을 시작한다. 지금처럼 어린 여자아이 중에서 총명한 아이들을 가려 교육했다. 그러나 세종 5년1423 12월 4일, 허도는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계수관의 관비 중에서 열살 이상 열다섯 살 이하의 영리한 여자아이 두 명씩을 선택해 외방의 의녀로 키우자고 하였다. 나이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지방에서 서울로 차출되는 경우에는 조금 더 성숙한 아이들로 올려 보내게 하였다. 이들은 의녀교육을 받는 동안 객지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너무 어려도 곤란하였다.
이리하여 열 살을 전후한 여자아이들을 대상으로 의녀 교육이 시작되었다. 의녀 제도는 여성의 질병 치료의 편이성을 위해 시행되었지만 의녀가 여겅만 돌본 것은 아니었다. 의녀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돌보아야 했다. 의녀에게는 남녀유별의 내외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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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스페인을 비롯한 여러 유럽 나라에서 온 아르헨티나 주민들에게 그들의 새로운 역사와 지리를 각인시키려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앙정부는 이 나라의 얻은 것과 잃은 것 모두에 대한 ‘가짜뉴스‘를 퍼뜨리고 만족해했다. ‘잃은 것‘은 영국이1830년대부터 영구 지배하기 시작한 포클랜드 제도다. 1830년대이전에는 영국, 프랑스, 스페인,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그 섬들에 거주하고 있었다. 영국의 점령 후, 아르헨티나 학생들은 그 섬들이 자신들에게서 훔쳐 간‘ 국토라고 교육받아오고 있다. 포클랜드 제도를 두고 1982년에 영국-아르헨티나 사이에 벌어진 전쟁은 그런 교육적 도그마를 한결 강화했다. 보다 최근에는 어린 학생들에게 "여러분의 조국에는 남대서양의 많은 섬과 남극 일부도 포함됩니다"
고 가르치는 지경이다.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자기 나라의 경계를 배우면서 칠레나 우루과이 같은 나라 사이의 국경선을 아전인수식으로 숙지하도록 요구받는다. 모든 국민은 포클랜드 동쪽 섬과 서쪽 섬의 모양새를 알고 있어야 한다.
1994년 개정된 아르헨티나 헌법은 "아르헨티나는 불확정된 국경선을 가진 불완전한 국가"라는 점을 국민에게 다시금 상기시켰다. ‘잃어버린 영토‘의 수복은 그 국가적 사명을 완수하는 핵심이다. 이것이 또 다른 포클랜드 전쟁을 불가피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나라에 국경 관련한 교육 및 문화적 여한을 남기기는 한다. - P56

‘국토의 완성‘이라는 욕망

자국의 영토와 국경 분쟁을 매우 진지하게 대하는 나라는 아르헨티나뿐이 아니다. ‘국토의 완성‘이라는 욕망은 세계 곳곳에서 불거지고 있다. 때때로 그것은 과거의 향수에 젖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나 국민이 지금보다 큰 과거의 영토를 회상하며 ‘황금시대‘였다고 곱씹는 경우는 흔하다. 아르헨티나가 남대서양의 ‘잃어버린영토‘에 집착하는 한편, 다른 나라들은 대(大)라는 수식어를 쓰면서 영광스러웠던 제국의 과거를 되살리는 꿈을 꾼다.
예를 들어, 헝가리에 가보면 ‘대헝가리‘라는 표어를 (대 아르메니아‘만큼이나) 쉽게 볼 수 있다. 그 경계는 지금의 공식 헝가리 영토와 일치하지 않는다. 1920년, 트리아농 조약은 헝가리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분리해 냈다. 1920년 이후 헝가리의 국경은 다시 조정되어, 국토가 원래보다 3분의 1정도로 줄어들었다.
내륙 국가가 되었으며, 잃은 영토는 다른 나라들에 배분되었다. 수백만 명의 헝가리계 주민이 루마니아 같은 나라의 국민이 되어버렸다. 트리아농 조약의 100주년이 다 되어갈 무렵,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은 ‘잃어버린 영토‘와 ‘씻지 못한 국치‘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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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까지
‘우리의‘ 모든 흐름이 자유로운 세계화와 ‘우리‘ 지리적 경제권을 등장시켰다. 그 바람에 국가간 금융 거래가 놀랍도록 빠르게 이루어지고, 무역과 투자가 국경을 초월하여 이루어지며, 자본주의적 자유가 전 세계에 퍼지고 있다는 둥의 말이 많이 나왔다. 고전적 냉전 군사기술의 산물인 인터넷으로 인해 1990년대부터 실시간의 통신, 가상공간의 거래, 데이터 전송이 가능해졌다. 기존의 (모든 것을 선악의 대결로 치환해 버렸던) 이분법적 지정학은 묘비명으로전락하는 신세가 되었고 "민주적 규범과 진보적 가치로 하나 된 온라인 커뮤니티의 힘으로, 전 세계에서 권위주의 정부에 고삐가 채워질 것"이라는 기대가 팽배했다.
EU(유럽연합)는 새 회원국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북아메리카에서는 미국 정부가 멕시코, 캐나다와 NAFTA (북미자유무역협정)를 체결했다. 남아메리카에서는 1990년대 초부터 메르코수르(Mercosur, 남부공동시장)가 새로운 무역 블록이 되면서 이전의 권위주의 군부정권들이 이제는 더 국경지대의 땅과 자원을 갖고 서로 다투지 않고 공동의 경제 미래를 열어갈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소련 이후의 러시아에 대해서도 불안감과 긴장을 늦추지 않았던 유럽은 에스토니아나 폴란드 같은 나라들을 NATO(북대서양조약기구)회원국으로 받아들여 추가적인 안전 보장을 받도록 했다. 폴란드는1999년 NATO에 가입한 데 이어 2004년 EU에 가입했다. NATO의 1949년 조약 제5조는 어느 회원국에 대한 공격도 전체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 P11

9.11 의 유산은 계속해서 오늘날의 지정학에 대해 알려주고, 그것을 전 세계의 국경지대마다 울려 퍼지도록 한다. 미국 브라운 대학교에서 진행한 ‘전쟁비용‘ 프로젝트는 2001~2009년 동안 미국이 테러 전쟁에 들인 돈을 6조 4천억 달러로 추산했다. 또 아프가니스탄, 예멘, 이라크 같은 곳에서 이 전쟁으로 빚어진 폭력에 직접 사망란 사람이 80만 명을 넘는다고도 보았다. 여기에 2천만 명이 집을 잃고 난민이 되었다. 이런 나라들에서 정치•경제•사회적 진동은 계속되고 있다. 분쟁이 발생할 때마다, 파키스탄에서의 미군의 드론 공격이.큰 인명 손실과 분노를 불러올 때마다 국경은 침범된다. - P13

한편, 러시아 같은 나라들은 체첸, 크림, 조지아 일부를 각각 침공하고, 합병하고, 점령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했다. 대테러 전쟁의 와중에 많은 나라가 기회주의적으로 테러리즘과 제3자의 위협을 이용해먹었는데, 고질적인 자국의 지정학적 난제를 해결하고 어떻게든 군사전략적 우위를 점하려는 속내였다. 국경은 어디서는 터지고, 어디서는 꽁꽁 싸매졌다.
‘국경 개방‘은 안보 위협의 의미로 새로 인식되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민주화 압력에 직면했던 러시아와 중국은 미국과 다른 국경관을 갖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대규모 토착 무슬림 소수집단이 극단주의와 분리주의의 혐의를 뒤집어쓴 채 정부의 억제와 감시 아래 놓여야 했다. 1,100 만의 위구르인이 사는 중국 서북단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천연자원이 풍부할 뿐 아니라 중앙아시아 공화국들과 몽골 사이의 전략적 요지임은 그냥 흘려버릴 문제가 아니다. 중국은 자국의 틀을 깨는 어떤 시도도 단호히 막으려 했고, 위구르인은 그런 시도의 핵심 중 핵심이었다. 러시아 정부도 분리주의자들의 땅이라고 선포한 체첸 같은 곳에서 전쟁을 벌였다.
미국이 일으킨 대테러 전쟁은 이들 두 나라에도 세계적으로팽배한 테러리즘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해 자신들의 영토 보존을 ‘위협‘하는 소수민족과 분리주의자들을 억압할 수 있겠다는 힌트를 주었다. - P14

국경 문제의 네 가지 추진력

지난 15년 동안 국경은 더 주목받게 되었고, 그것은 군사주의, 테러, 기후변화, 이민 그리고 가장 최근의 팬데믹 등에 따른 것이었다. 이런 국경 문제는 네 가지 추진력에 따라 움직인다. 제한하기(constriction), 확장하기(expansion), 따돌리기 (deflection), 내쫓기 (expul-sion)이다. 전 세계의 정부들도 적대적 환경을 적극적으로 구축하고있어서 이민자나 난민에게 더 까다로워지고 있다. 이유는 셀 수 없이 많다.
첫 번째는 제한하기. 외부자에 대한 적대감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요즘 그것이 특별한 까닭은 국내 기관, 공무원, 민간인이 한 팀이 되어 이 국경 문제에 전에 없던 방식으로 작용하고있기 때문이다. 인종과 주택 관련 차별은 이미 만연해 있다. 영국에서 택지 소유자는 셋집을 찾는 ‘불법 이민자‘를 내무부에 신고하지않으면 무거운 벌금을 물 수 있다. 대학의 입학사정관은 임용되기 전에 자신의 시민권 여부를 증명해야 한다. - P16

 인도의 모디 정부는 개정된 시민법과 시민등록법을 통해 토착 주민 및 비힌두계 시민에게 ‘국경전쟁‘을 벌인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주민의 토지를 빼앗고, 그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며, 그들의 가진 것을 짜내는 일이 시민법 개악으로 자행되고 있으며, 이 모두가 ‘조국 인도‘를 지킨다는 이름으로이뤄진다.
제한하기는 법률-행정 체제에 그리고 일상생활에 적대적 환경을 구축한다는 뜻이다. 언제나 취업 비자와 그에 따르는 증빙 서류를 제대로 갖추고 있어야 하는 사람들의 부담을 크게 늘린다는뜻이다. 나이러 유발 데이비스(Nira Yuval Davis) 같은 사회학자들은이런 ‘내재화된 국경‘에 대한 선구적 연구로 그런 일과 행동이 최근 급속히 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식의 국경 만들기는 아웃소싱되기도 한다. 그래서 동료 시민들이 서로를 손가락질하며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그들의 비자에 문제가 있다고 고발하도록 만든다. 예술가, 소설가, 언론인, 영화제작자, 전직 국경수비대원, 이민자, 사회운동가들은 이렇게 적대적 환경에 내몰린 일상의 국경을 글과 다큐 영상으로 생생하게 전한다. 한편 특권층에게국경이란 그들의 삶에서 대체로 눈에 띄지 않으며, 단지 팬데믹, 사회혼란, 전쟁 등의 긴급 상황에만 겨우 인식될 뿐이다.
- P17

두번째는 확장하기..... EU에서 ‘경계지역‘은 자체적으로 1단계에서 3단계까지 구분해 놓은 EU 확장 개념의 한 단위다. 3단계가 경계지역으로, EU의국경들 그리고 그 국경의 25킬로미터 안쪽 지역에 국민의 절반이 사는 지역을 말한다. 이런 시스템은 언뜻 비정치적으로 보이는데,
EU가 스스로 ‘우호적 국가들의 국경 없는 블록‘으로 선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들은 국경에 관한 생각이 이와 다르다. 미국-멕시코,
인도-파키스탄,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경계지대는 ‘국경 이야기‘
를 찾는 리포터들과 예술가들에게 늘 풍부한 ‘꺼리‘를 제공한다. 크게 보아, 이쪽에 관심이 한껏 높아진 까닭은 그런 국경이 몰려드는 이민 희망자들을 막고 있기 때문이거나, 지정학적 긴장이 생생히 드러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이민자를 환영하고, 일부에서는 이민자를 환영한다. - P18

다음으로는 ‘따돌리기‘가 있다. 이는 이민자들이 농업, 요양산업, 식품업 등 수많은 분야에서 그림자 역할을 수행하는 것과 같은 이슈를 피하기 위해 국경을 이용하는 행태를 말한다. 정치적 좌파는 국경과 관련된 도덕적 문제를 비난하는 한편, 정치적 우파는 다른 곳에서 들어오려는 사람들을 통제하는 데 국경이 필수라고 본다. 양쪽 다 국경과 통제 체제의 법적·도덕적 ·경제적 문제를 따진다. 미국을 비롯한 구미의 많은 나라에서 이민 노동자는 사회 각 분야의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이들 나라에서 이민자가 피난처를 찾기 훨씬 어렵게 만드는 여러 조치가 실행되고 있는 가운데, 일부 정치지도자들은 이민자, 피난민, 난민을 굳이 엄격히 구분지으려 하지 않는다."
트럼프 행정부는 중앙아메리카 난민이 난민 인정을 받기 전까지 때로는 몇 달씩이나 멕시코에 남아 있도록 강제했다. 과테말라같은 다른 나라들은 ‘안전한 제3국‘을 선언하는데, 이민자가 그 나라로 들어가서 피난처를 찾을 수 있다는 뜻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과테말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와 새 이민 협정을 맺었는데(온두라스, 엘살바도르는 1969년의 ‘축구 전쟁‘에서 볼 수 있듯 국경분쟁과 이민자 문제로 서로 으르렁대기로 유명한데), 그들 나라에 미국이 무역 압력을 가하지 않는다는 대가에 따른 것이었다. 멕시코 역시 북쪽으로 가려는 사람들을 더 잘 차단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 - P20

마지막으로는 ‘내쫓기‘가 있다. 최근 여러 나라의 지도자들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토를 지키고, 내국인과 외국인을 감시하며,
국경지대에 배치 인력을 늘리는 조치를 해왔다. 이런 ‘국경‘을 둘러싼 연극에는 이뿐만 아니라, 실제로 전쟁 충동이 치밀 만큼의 직접적 · 노골적인 적대적 태도는 취하지 않으면서도 국내외에 자국 정부는 강경하고 의지가 뚜렷한 듯 보이게 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민자들이 원주민들을 압도한 나머지 ‘언제나와 같은 일상‘이 깨질지 모른다고 이른바 ‘대체 불안‘을 자극하는 것도 그런 전법의 하나다. 전염력이 매우 높은 겨울철 독감, 또는 더 고약한 코로나19 전염병처럼, (자유민주주의 정부, 권위주의 정부) 세계 각국의 정부들도 국경을 둘러싼 열병을 이용해먹고 있다. - P21

접근이 어려운 오지라고 해서 국경 분쟁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다수 대중의 눈에서 멀어진다고 분쟁의 대상에서도 벗어나는 것은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 나라의 변방은 말썽이 일어나기 쉽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인구도 얼마 안 되는 혹한의 고산지대는 군사적 대치가 종종 일어나는 곳이다. 양쪽 모두 수천의 병사를 그 땅에 주둔시키고 있으며, 그들은 열악한 환경 때문에 건강이 나빠진다. - P27

일반적인 국경은 사람들을 일정 구역에 머물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럽에서와 그 너머 지역들에서의 국경 경험은 매우 다양하다. 베스트팔렌 조약(1648)은 흔히 국민국가 수립의 초석을 놓았다고들 한다. 이로써 일정한 국경을 경계로 하는 영토를 통치하는 공인된 체제가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그 조약은 국경, 국가 주권, 국가 목표를 수립하는 길을 열었다. 그것은 30년 전쟁의 산물이었으며, 일부 정치체들에게 평화와 자기 방위, 독립과 영토를 보장해 주었다. 스위스는 오스트리아로부터,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으며 스웨덴 같은 다른 나라들은 영토를 확장했다. - P28

인류세는 국가 간 그리고 지역사회 간 분쟁을 심화시킬 공산이 크다. 그 여파로 하천, 삼각주, 늪, 산, 호수,
삼림, 섬, 해안, 평야 등이 쟁탈의 대상이 될 것이다. 배타적 주권이라는 신화와 고정된 국경이라는 신화는 위험하다. 우리는 국경에대해 전혀 다른 견해를 도입해야 한다. 국경이란 살아 있는 것이며,
자연의 변화가 가져오는 복잡한 현실에 열려 있어야 한다. 그리고기후변화와 국제갈등이 깊어지는 지역에서 일어나게 될 사람들의집단 이주도 수용하는 것이어야 한다. - P36

장래의 분쟁이 무엇에 근거하고 있을지를 이해하고 싶다면,
세 가지 유형의 국경분쟁을 모두 이해해야 한다. 물리적 분쟁, 비정통적 분쟁, 새로운 분쟁을 그러나 먼저, 우리는 어째서 이 국경이라는 것이 그토록 뻔질나게 논쟁거리가 되고, 행동, 논란, 수익을창출하게 되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 P38

2019년 3월에 나온 보고서에서, 경영분석 그룹인 프로스트앤설리번(Frost and Sullivan)은 국경 안보 관련 시장이 2025년에 1,680억 달러 규모까지 성장할 것으로 보았다. 새로운 투자는 실시간 데이터 분석에 집중될 것이며, 국경 안보 기구는 이로써 사람과 물자의 비정규적인 움직임을 포착하고 예방하는 역량을 키울 것이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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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합리성은 1579년 유유 사건의 재조사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유연을 살해한 사법장치는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보다는 유연을 대신할 새로운 악인을 찾아내어 사건을 덮고자 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제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자백을 확보해 그를 법적으로 완벽한 악인으로 공표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사법장치는 살인을 하고도 천연덕스러운 살인자처럼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백씨가 끝까지 조사를 받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뜻밖의일이다. ‘나의 아우를 죽였다‘(<유연전>)는 유유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 유연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백씨라는 생각은 사건 당시에도일정하게 공유된 견해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백씨는 결코 추궁을받지 않았고 그녀와 채용규의 공모관계도 밝혀지지 않았다. 백씨와 함께 춘수를 제대로 조사했더라면, 그의 아들 채경백을 조사했더라면,
춘수와 채용규를 잡아 넘기겠다고 유연의 아내 이씨에게 접근했던 영수와 김헌을 조사했더라면, 사건의 실체에 보다 가깝게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사법장치는 그 조사를 회피하였다.
왜 조사를 회피했을까? 백씨에 대한 조사는 백씨와 채응규의 성관계는 물론 결국은 유유가 갖고 있었던 성적 문제를 드러낼 것이었다.
사족이 아니라면 남성이면서도 여성인 경우, 괴물로 치부하면 간단하였다. 하지만 사족남성이라면, 그것도 한 집안의 적통을 이을 적장자가 성관계 자체가 불가능한 ‘제3의 성‘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 P243

 예컨대 동성애자는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노출되는 경우가 증가하는 것일뿐이듯, 유유와 같은 경우는 당시 적지 않았을 것이다. ‘제3의 성‘을갖는 사족남성의 존재 같은 난감한 문제는 은폐되어야만 마땅하였다.
1579년 백씨를 비롯한 사건 관계자들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사건을 덮어버린 것은 그 내부에 성적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유연전>은 유연의 억울함을 밝힌다는 목적으로 지어진 것이다. 곧그것은 일차적으로 유연의 아내 이씨와 이원익을 비롯한 당시 사족들의 여론을 반영한 것일 터이다. 또한 이 작품은 비합리성과 남형으로 점철된 사법장치에 대해 반성의 기회를 갖자는 의도를 표방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서술은 이제의 ‘악인화‘를 향해 치달았다. 이제를 악인화하는 과정에서 백씨가 적장자권을 놓지 않기 위해 채용규과 공모해 사기극을 벌이고 유연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사실을 은폐했다. 나아가 사족남성이 갖는 성적 문제가 야기할 일체의 문제도 아울러 덮었던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유연전>은 유교적 가부장제와 사족사회의 모순을 근저에서 은폐하는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1564년(명종 19)과 1579년(선조 12) 사이에 조정에는 권력의 교체가있었다. 과거 네 차례의 사화로 진출과 패퇴를 반복하던 사람이 정치권력을 온전히 장악하게 되었던 것이다. 퇴계와 남명, 율곡이 있었다.
그들은 도덕정치를 표방했고 주자학 텍스트를 철저히 읽으면서 도덕적 인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했다. - P244

표면적으로 매끈한 시대였다. 하지만 그 매끈한 시대의 이면에는 온갖 인간들의 온갖 욕망이 들끓고 있었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존재로서의 괴로움으로 집을 떠난 자, 적장자에게서 후손을 보지 못해 절망하는 자, 사기극으로 신분상승을 이루려는 자, 성불구의 남편을 대신할 가짜 남편을 만드는 자, 형수의 무고로 목숨을 잃은 자들이 있었다. 이것이 16세기 후반 ‘매끈한 조선사회의 구체적 삶의 모습이었다. -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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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응규는 민간을 찾아다니면서 굿과 연희를 해주고, 아울러 전복 따위로 재물을 편취하는자가 틀림없다. 한마디로 영락없는 무당이다.
채용규와 같은 인간은 당시 사회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채응규가 살던 조선 전기에는 무당(때로는 승려)이 점복이나 여타 술수로 민중을 속이고 재물을 편취했던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이해를 돕기위해 유사한 사례 몇몇을 검토해보자. 가장 손쉬운 방법은 무당이 자신을 신적 존재라고 말하고 대중을 현혹하여 재물을 편취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1382년 고성의 백성 이금과 사노 무적은 미륵불로 자칭하여 백성들에게 재물을 편취했고, 합주의 어떤 사노 역시 검대장군이라 자칭하다가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자신에게 귀신이 내렸다고 하는 것도 흔한 수법이었는데, 그중에는 중국 황제의 신이 내렸다면서그 신의 능력으로 인간의 운명과 화복을 맞히거나 말할 수 있다고 하는 자도 있었다."
이런 것들은 예외 없이 어설픈 사기극이었으나 민중은 그것을 믿었다. 예컨대 과거 참형을 당한 장수와 재상의 이름을 종이에 써서 그것을 나무 장대에 매달고 ‘두박신‘이라 일컫자, 동네마다 그것을 그대로 따라 하기 시작했고, 그것에 놀란 백성들이 다투어 종이와 포를 내어 제사를 지낸 사건도 있었다." 거울을 달아놓고 그 안에 신이 있다면서 사람을 속이는 자들도 있었다. 당연히 국가는 무당과승려가 주동이 된 사기성이 짙은 종교행사를 금지하려 하였다.
- P48

무속은 민중에게 하나의 세계관이자 가치관이었다. 그것을 제거한다는 것은, 다른 세계관과 가치관으로의 교체를 의미하였다. 하지만 사족체제 모두가 교체를 적극 수행한 것은 아니었다. 사족사회 내에서는 유교(성리학)가 불교와 무속을 대체해 나갔지만, 민중과 여성은여전히 무속과 불교에 머무르고 있었다. 아니, 여전히 무속을 신봉하는 남성-사족도 남아 있었다.
《실록> 등의 광범위한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듯 무풍은 사라지지 않았고 민중과 여성은 물론 때로는 사족-남성들까지 재산을 헌납하는 등 샤머니즘에 깊이 빠져 있었다." 조선 정부는 무당과 사- 굿을 억제하는 정책을 강하게 추진했지만, 그것의 완전한 제거는 불가능하였다. 위에서 인용한 자료는 1431년(세종 13)의 것인데, 40년뒤인 1471년(성종 2) 대사헌 한치형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면서 무풍의 성행을 비판했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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