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셋 파크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몇년 전, 폴 오스터의 책만 몇만원어치를 사서 쌓아놓고 미친듯이 읽어제꼈던 후로 오랜만에 다시 접한 폴 오스터였다.

[달의 궁전] 을 시작으로 [폐허의 도시],[우연의 음악],[환상의 책],[뉴욕 삼부작] 과 [거대한 괴물]에 [어둠속의 남자] 까지 쉬지 않고 한번에 몰아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폴 오스터의 많은 작품들에서는 화자인 주인공이 마치 고행을 갈구하는 구도자처럼 스스로를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게 몰아부치는 상황들이 종종 등장한다. 


 '선셋파크' 역시 그와 같이 스스로가 일종의 '징역형' 이라고 명명한 떠돌이 생활을 하는 '마일스 헬러' 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결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크나큰 죄의식속에 빠져있는 마일스는, 어느날 갑자기 주변과 모든 연락을 끊고 잠적하게 된다. 무려 7년이라는 시간동안 가족들의 곁을 떠난 마일스. 마일스는 정들었던 고향과 가족, 좋아하던 대학생활과 전도 유망하던 미래 전체를 거부하며 7년동안 미국 여기저기를 떠돌이처럼 돌아다니다가 플로리다에서 '필라' 라는 고등학생 소녀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녀와 얽힌 어떤 사건으로 인해, 플로리다를 떠나야 할 상황이 벌어지게 되고, 그나마 오랜기간 쭉 연락을 해오던 고등학교 동창인 '빙 네이선'의 도움으로 고향 뉴욕으로 귀향하게 된다.

 뉴욕 변두리 '선셋파크' 라는 외진 동네에서도 아주 구석에 위치하고 있는 버려진 건물에 불법으로 무단점거하게 된 빙과 그의 친구들 - '엘런', '앨리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합류하게 되는 마일스. 어찌보면 '홈리스' 들이기도 한 20대 후반의 젊은이들이 각자의 사연과 절망과 희망을 안고 삶을 꾸려 나간다. 

 

 전체적인 이야기는 '마일스 헬러' 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엄청난 죄의식을 지니고 큰 상처를 입은 마일스. 그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어마어마한 죄의식은 2차 세계대전 당시의 귀환병이나 베트남 전쟁 당시의 파병 군인들과 다를 바 없다. 작품 안에서도 끊임없이 마일스가 겪은 일을 '전쟁' 과 비교하곤 한다. 과거의 죄의식에 묶여 하루하루 지옥같은 삶을 '연명' 해나가는 마일스. 마일스가 작품 초반 가지고 있던 직업인 "주택보존 서비스" 가 버려진 집들을 정리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작품 후반, 선셋 파크에서 시간떼우기로 주로 했던 일이 "공동묘지 배회하기" 와, 결국 마지막에는 빙의 직업이었던 "망가진(버려진) 물건들의 병원" 이라는 점도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마일스는 '버려진 것들' 즉 과거에 묶여있는 삶을 살고 있다. 과거에 겪었던 사건의 죄의식에 묶여 있기도 하고, 하는 일들과 갖는 직업들도 하나같이 '과거'이다. 스스로를 계속 과거의 기억에 가두면서 끊임없이 죄의식을 불러 일으키게 만든다.  

 

 이런 절망적인 상태에서 마일스는 '필라' 라는 희망을 만나게 된다.  아직 10대인 필라는 마일스로 하여금 '미래' 를 꿈꾸게 만든다. 앞으로 쌓아갈 수많은 지식들, 그리고 둘이서 키워나갈 커다란 사랑. 미래를 바라봄으로써 마일스는 비로소 죽음에서 벗어나 삶의 공간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마일스가 삶의 공간으로 들어오게 해주는 통로는 아이러니하게도 '불법 거주' 중인 선셋파크의 버려진 주택이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빙과 엘런, 앨리스와 함께 불법 거주하게 되는 마일스의 상황은 전 세계적인 불경기로 삶의 어려움을 겪고있는 젊은이들에게 하나의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는 이른바 '생협 - 생활협동조합' 을 떠오르게 한다. 사정과 나이가 비슷한 젊은이들이 서로 상호간에 생활을 보조해주는 일종의 공동체를 꾸리는 것이다. 버려진 건물을 불법점유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이 친구들은 서로에게 현실적인 도움을 주고받으며 힘겹지만 착실하게 하루하루를 꾸려내는 이른바 '생활 자체' 를 위한 일종의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된다. 

 이에 대비되는 세대가 바로 마일스의 부모인 '모리스'와 '메리-리' 일 것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어느정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고, 지금까지 누려온 것도, 이뤄낸 것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게 순탄하고 탄탄하지만은 않다. 사업체는 휘청거리고, 자식들은 통제할 수 없고, 부부관계마저 위태롭기도 하다.    

  

  폴 오스터의 작품들은 읽고 나면 가슴 한켠이 묵직해지는 느낌이 든다. 읽기가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아, 그렇다고 문장이 난해하다거나 서사구조가 복잡한 건 절대 아니다. 폴 오스터의 문장은 매우 매끄럽다. 한편으로는 현학적이기도 하고 지나치게 유려한 면도 있지만, 그의 문장은 언제나 앞뒤가 딱딱 맞아 떨어지고, 이해하기 쉬운 표현들이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다. 엄청나게 잘 읽히는 문장이다. 서사구조 역시 마찬가지이다. 때로는 실험적인 시도를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들에는 주로 시간의 흐름 순이나 인물의 변화 순으로 읽기 쉬운 서사구조를 사용하고 있다. 한마디로, 그는 '기술' 로 독자들을 유혹하는 작가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주 애용하는 '열린결말' 역시 독자의 취향에 따라 상당히 호불호가 갈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굉장히 좋아한다.) 서두에 언급했듯, 스스로를 지나치게 몰아붙이는 주인공들 역시 마음이 불편하게 만드는 한 요인이기도 하고. 틀림없이, 그의 작품들은 펴들고 읽다보면 정신없이 빠져들어 순식간에 한 권을 덮게하는 엄청난 몰입감을 자랑한다. 하지만, 그렇게 다 읽고 책을 덮으면, 아득한 마음속 어딘가에 큼지막한 바위가 떡, 놓여지는 느낌이다. 그 바위에는 아마 '인생 별거 없어.' 라고 새겨져 있을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소설들이 그렇듯, 읽는 사람의 감정 상태에 따름일 것이다.

폴 오스터의 작품이 갖고있는 큰 장점들 중 하나는 등장인물들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선셋파크' 의 주인공 마일즈도 마찬가지이다. 조금만 덜 고집부려도 좋을텐데, 저런 극단적인 생각을 하지 않아도 좋을텐데, 답답하고 안타깝기 짝이 없지만, 그가 그런 행동을 하는 요인과 그런 생각을 갖게 된 상황들을 매우 세세하게 풀어내주는 작가의 따스한 시각이 충분히 느껴진다는 것이다. 

때문에, 책 속 인물들이 비록 지금은 매우 절망적이고, 하루하루 살아내기가 버겁지만, 그 안에 소소한 행복들이 있고, 즐거운 시간들이 있으며, 언듯언듯 내비쳐지는 행복과 희망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의 삶을 이루고 있는 시간들 중 대부분은 불행하다.

아니, 말을 바꿔야겠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대체로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불행에 관련된 통증, 고통, 괴로움, 슬픔, 미움, 증오, 외로움, 두려움 등의 감정들은 행복감을 주는 기쁨, 쾌락, 환희, 즐거움, 들뜸, 설렘, 애정, 부드러움 같은 감정들보다 훨씬 오랫동안 기억 속에 머물게 된다. 이상하게도, 그렇게 된다. 좋은 감정들은 쉽게 잊혀지지만 나쁜 감정들은 오래토록 잊혀지지 않는다. 글쎄, 어쩌면 그런 '나쁜 감정' 들이 '죽음' 과 더 연관이 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죽음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나쁜 감정을 주는 것들은 최대한 조심해야 할테니, 본능적으로 뇌가 나쁜 것들을 오래토록 기억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그렇게 나쁜 감정들이 더 오래 기억에 남기 때문에, 우리는 때로 삶의 대부분이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마일스는, 더더욱 그럴 수 밖에 없었을 터이고. 

 

어쩌면 마일스가 끊임없이 부모를 거부하는 것은 과거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방어기제가 아니었을까?

 

과거에 얽매여 살고 있으면서, 과거를 필사적으로 끊어내기를 갈구하는 욕망이 부모를 거부하는 현상으로 나타났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마일스의 부모는 미래를 향한 디딤돌 역할을 충분히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마일스는 결국 그 사실을 깨닫게 될까? 

책의 마지막 단락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을 듯 하다.

 

" 미래가 없을 때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는 것이 가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지금부터 어떤 것에도 희망을 갖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지금 여기 있지만 곧 사라지는 순간,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지금만을 위해 살자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P.328

 

그래, 어쩌면, 불안하기 짝이 없는 미래에 대한 헛된 희망을 꿈꾸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만을 위해 사는 것이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지옥같은 현실을 하루하루 버텨내는 마일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지옥같은 현실을 이겨내는 방법은,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거야. 너를 사랑하고 챙기는 빙과 너와 비슷한 처지에서 현실을 바득바득 살아내고 있는 비슷한 또래의 엘런과 앨리스. 그리고, 너를 지켜보는 아버지. 그들이 바로, 네가 현실을 버티게 해주는 기둥이 될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상은 책상이다
페터 빅셀 지음, 이용숙 옮김 / 예담 / 200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인터넷 팟캐스트 방송에서 우연히 듣고 흥미가 생겨서 구입했다. 판형도 작고, 페이지도 100페이지가 책 되지 않는 얇디 얇은 책이다. 가격도 6800원. 2001년 10월에 초판 1쇄가 발행되었고, 내가 산 책은 2012년 3월 초판 35쇄째이다. 척박한 우리나라의 출판환경에서 10년이 넘게 꾸준히 초판이 판매되는 책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첫 페이지를 넘겼다. 얇고, 작고, 싸지만 튼튼한 하드커버로 되어있다. (커버의 폰트를 비롯한 전체적인 디자인이 '어린이 명심보감' 느낌이라 조금 아쉬웠지만,) 

이 작고 단단한 책 안에는 총 7편의 작품들이 들어있다. '지구는 둥글다' 라는 작품부터 시작되는데, 일곱편의 이야기가 모두 구조도 비슷하고, 느낌도 비슷하다.


 먼저 [지구는 둥글다] 는 지구가 둥글다는 확신을 갖기 위해 무조건 앞으로 쭉 걸어갈 계획을 세운 노인의 이야기이다. 지구가 둥글다면, 앞으로 쭉 걸어가면 그자리로 돌아올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노인. 앞으로 걸어가려 하자 바로 집 앞에 다른 집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빙 돌아가다간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노인. 노인은 사다리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 집 뒤에는 숲도 있고, 산도 있고, 강도 있고, 호수도 있고, 바다도 있다. 노인은 자신의 계획을 실행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 첫 작품을 읽자마자, 난 이 작품집에 매료되었다.

7페이지에서 시작되어 21페이지에서 끝나는 15페이지도 되지 않는 짧은 작품. 안에는 삽화도 큼직하게 몇 점이나 들어있고, 폰트 크기도 크고 여백도 많다. 너무너무 짧은 이 작품을 읽으며, 탁상행정을 일삼는 무능력한 공무원들이나, 실컷 계획만 세워놓고 정작 하나도 행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이나, 지나치게 생각을 많이 해서 항상 부정적인 결론에 도달하고 마는 주변 사람들과 나 자신이 떠올랐다. 


 두번째 작품 [책상은 책상이다] 는, 무료한 일상에 지쳐 '달라져야 한다!' 고 생각하는 나이많은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하루하루 달라지기 위해 사물들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한다. 침대를 사진이라고 부르고, 책상을 양탄자라고 부르고, 의자를 시계라고 부르고, 양탄자는 옷장이라고 부르는 등, 근처의 사물들을 다 자기 맘대로 이름을 바꿔서 부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남자는 아침에 의자가 울리는 소리에 사진에서 일어나 양탄자 위에 올라서게 된다. 


"어째서 침대를 사진이라고 부르지 않느냔 말야."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 다음 웃음을 터뜨렸는데, 이웃들이 벽을 두드리며 '조용히 합시다' 하고 고함 지를 때까지 그는 웃고 또 웃었다.

"이제 달라질 거야."

그는 이렇게 외치면서 그는 이제부터 침대를 '사진' 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피곤하군, 사진 속으로 들어가야겠어."

p. 26~27


 이 작품 역시 손뼉을 탁 칠 수 밖에 없었다.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혀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없게 된 사람들이나, 압축어와 신조어로 자기들만의 언어를 만들어내는 신세대의 언어습관등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아예 그들의 단어를 공부해야 할 정도에 이르지 않았던가?? 사람을 앞에 두고도 스마트폰 안에 빠져들어 자기만의 세계에 쳐박히는 사람들의 모습도 함께 떠올랐다. 


이런 식으로 작품마다 독특한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웃기지 못하지만 착하고 순수한 광대 '콜롬빈' 이 등장하는 [아메리카는 없다] 라는 작품에서는 미소가 지어지게 하는 따뜻하지만, 엄청난 스케일의 음모론이 등장한다.


[발명가] 라는 작품에서는 오랫동안 연구실에 쳐박혀서 뭔가를 발명해낸 발명가가 등장한다. 그가 드디어 자신의 발명품을 가지고 세상에 나오는데, 그가 발명한 것들은 이미 다 발명되어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었다. 


[기억력이 좋은 남자] 는 제목처럼 엄청나게 기억력이 좋은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기차역에 거의 살듯이 하면서 모든 배차시간과 역들을 기억하는 남자는, 하지만 사람들이 왜 기차를 타서 그곳으로 가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요도크 아저씨의 안부 인사] 는 '요도크' 라는 가상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셨던 할아버지에 대한 회상이다. 아주 따뜻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작품이다. 나이먹음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아무것도 더 알고 싶지 않았던 남자]  역시 제목처럼 더 이상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은 남자의 이야기이다. 남자는 오늘의 날씨도 알고싶지 않고, 시간도 알고싶지 않았고, 아무것도 알고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윽고 자신이 뭘 알고싶지 않은건지 알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품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작품은 마치 종교적인 선문답과 같은 내용이었다.


"코뿔소는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언제나 신이 나서 앞으로 달려나가지만, 우리 안을 두어 바퀴 돌고 나서는 방금 떠오른 생각을 잊어버리고 다시 오래오래 한 자리에 서 있는 것이었다. 한 시간도 좋고 두 시간도 좋았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이 떠오르면 다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나 너무 일찍 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사실 코뿔소에게는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p.94

ㅋㅋㅋㅋ 이 문장을 읽고는 너무 웃겼지만, 한편으로 참 공감도 되서 무릎을 치기도 했다. 

사람은 때론 지나치게 생각이 많다. 달리기 시작하면 다 까먹을텐데.  


모든 작품들에 기발한 상상력과 평범하고 따뜻한 일화들이 들어있지만, 그 깊이는 상당하다.

다 좋았지만, 특히 마지막 작품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우리는 얼핏, 참 쓸모 없는 것 같은 일들을 아주아주 많이많이 한다. 쓸모없는 생각도 아주아주 많이 한다.  아주 단적으로, 예술. 이 얼마나 쓸모 없는 짓인가? 예술이 밥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병을 치료해주는 것도 아니잖은가? 오히려 굶어죽기 딱 좋은게 예술을 업으로 삼는 일 아니던가. 


인간과 동물의 가장 큰 차이가 바로 그것 아닐까?

생존에 전혀 관계가 없는. 정말 쓸모없는 짓을 아주아주아주아주 많이 한다는 것.

우리의 삶이란 그런 쓸모없는 것들이 모여서 이뤄지게 된다. 엄청나고 거창한 것이 떡 하니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작고 가볍고 하찮고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쓸모없는 것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쌓여 삶을 빚어낸다. 

그리고 그 쓸모 없는 것들이, 우리의 삶을 조금은 더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아, 이런. 내 감상의 마무리도 너무 '어린이 명심보감' 스럽구나.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알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알려고 했던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예전과 다름없이 자기 삶을 꾸려갔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는 중국어를 할 수 있다는 것뿐이다."

p.9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낸시는 아버지가 수십 년 전 초연한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좌우명처럼 여겼던 말을 기억하고 울기 시작했다.

"현실을 다시 만들수는 없어요." 낸시는 아버지에게 그 말을 돌려주었다.

"그냥 오는대로 받아들이세요.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이세요."

p. 13



황폐한 공동묘지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총188페이지. 

200페이지도 안되는 짧은 책장 안에 한 사람의 평생의 이야기가 압축되어 들어있다.

첫 몇 페이지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무덤에 묻히는 순간을 묘사하는데 할애된다.

몇몇 회사 동료와 절친한 친형 가족. 첫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얻은 두 아들과, 두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얻은 딸, 그리고 세번째 부인도 자리하고 있다. 감정이라곤 거의 실리지 않은 듯한 절제되고 담담하며 간결한 문장들을 통해 마치 실제 장례에 참석하고 있는 느낌을 강렬하게 받을 수 있다. 엄청난 현장감. 참석자들의 의례가 끝나고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던 시절의 이야기로 되돌아간다. 


간결하고 절제된 문장은 현대 미국문학의 대표적인 특징들 중 하나이다. 특히 필립 로스는 그런 현대 미국문학의 거장 중에서도 손꼽히는 거장이다. 그의 문장들을 처음 접했을 때, 계곡만큼 주름이 깊이 패이고, 열과 빛으로 백내장이 심하며, 자기 나이만큼 오래된 흉터와 새로 생긴 화상들로 온몸이 덮인 단단한 체구의 대장장이가 끊임없이 쇠를 두드리는 장면이 떠올랐다. 

'정련'.

그의 문장은 그런 뛰어난 장인의 섬세하고도 억센 손길이 느껴졌다. 


이 작품은 그런 섬세하고 간결한 문장들로 이루어진 한 남자의 태어남과 죽음에 관한 서사시이다. 잘 나가는 광고 일러스트레이터로 풍족한 경제생활을 영위했고, 세번의 결혼을 했다. 수많은 수술을 거쳐 고비를 벗어났지만, 결국 마지막 고비는 넘어가지 못했다.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을 하나로 수렴하는 그 곳. '살아있다'는 단어가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그것.  이 세상에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카운트 다운의 종착역. 그저, 오는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살아있음의 증명과도 같은. 

'메멘토 모리'.



참 희안하게도 나에게도 2012년의 시작은 '죽음' 이었다.

아니, '나에게' 라기보다, '나의 부모님께' ...라고, 정정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2011년 12월 말에 외할아버지, 나의 어머니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그리고 8월에는 아버지께서 수십년간 이어오신 고교 동창모임-이제는 구성원을 한손으로도 다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추려지고 추려진- 의 절친한 친구분이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얼마 전, 아버지와 달리 학창시절부터 꾸준하게 이어온 절친은 딱 한 분 밖에 안 계셨던 우리 어머니는 바로 그 딱 한 분 밖에 안 남은 절친을 위암으로 잃으셨다.  

그런 와중에 만난 이 책은 거대한 위로이자, 또렷한 확인이기도 했다.


'누구도 예외는 없다. 너도 마찬가지다. '

나도 마찬가지다.



이 책의 초반 몇페이지는 주인공의 장례식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 부분을 몇번이고 몇번이고 되풀이해서 읽었다. 주인공의 지인들이 보내는 송사. 누군가에게는 추억속에서 간신히 끄집어 내야 할 존재이지만 - 아버지였고, 남편이었고, 어린 동생이었던 그에게 바치는 송사들. 원망을 담은, 추억을 담은, 사랑을 담은, 아쉬움을 담은, 슬픔을 담은 그들의 말들은 역설적이게도, 편안하게 다가왔다. 오히려 후반부 - 주인공이 치열한 젊음을 소비하고 상처 투성이의 노년을 보내는 장면이 끔찍하리만치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각종 병으로 인한 고통과, 끔찍한 외로움 속에서, 과거를 추억하고, 그 안에서 회한만 쌓아가다 쓸쓸히 죽음을 기다릴, 그 순간이 두려웠다.  



"그이는 살고 싶어했지만, 누가 무슨 일을 해도 그이를 더 살아 있게 할 수는 없었어요.

노년은 전투에요. 이런 게 아니라도, 또다른 걸로 말이에요. 가차 없는 전투죠.

하필이면 가장 약하고, 예전처럼 투지를 불태우는 게 가장 어려울 때 말이에요,"

p. 149



문득, 죽고싶다는 마음이 밀려들었다.

치열한 버둥거림을 그만두고 일찌감치 관 안에 눕고, 새까만 무無의 세상속에 들어가고 싶었다.뭔가로 환생시키거나, 어디 천국이든 지옥이든 그런데로 보낸다면 신의 모가지를 붙들고 '무無'!!!! 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로. 

결국 이 치열한 삶의 종착역은 흙이다. 지금 내가 하는 이 모든 일들은 흙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들이다.

내 모든 환희와, 내 모든 고통과, 내 모든 슬픔과, 내 모든 좌절은 결국 모두 무無를 향해 달음박치는 기차 의 탑승객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죽어버리기엔 남아있는 사람들이 눈에 밟힌다.

그렇게 삶으로 눈을 돌리면, 다시끔 욕망들이 꿈틀꿈틀 일어난다.

욕망을 연료 삼아, 삶이라는 불을 계속 피워낸다.

비록, 종착역이 무無. 무덤역이라고 할지라도.

달리는 것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면 된다. 

종착역으로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달리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삶은 그러하다.

죽기뒤해 사는 것이 아니다.

살기위해 사는 것이다. 





"힘차게 쿵쿵거리며 밀려들어오는 어두운 바다와 별이 가득한 하늘 때문에 피비는 환희에 젖었지만 그는 겁을 먹었다.

수많은 별은 그가 죽을 운명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

그 때는 그런 것들이 한번도 조종(弔鐘)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

오랜만에 비로소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하게 내 인생의 주인이 되었다는 느낌이 드는 이 순간에 왜 내가 내 삶을 불신해야 할까?

차분하게, 똑바로 생각해보면 앞으로 훨씬 더 견실한 삶이 남아있는 것 같은데, 

왜 내가 소멸의 가장자리에 있다는 상상을 할까?

 p. 37



"종말과의 무시무시한 만남?

나는 이제 겨우 서른넷인데!

망각을 걱정하는 일은 일흔다섯에 가서 하면 돼!

그는 그렇게 혼잣말을 했다.

머나먼 미래에는 궁극적인 파국 때문에 괴로워할 시간이 남아돌거야!"

 p. 39




"그는 쓰러지는 것과는 거리가 먼, 불길한 운명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느낌으로, 

다시 충만해지기를 갈망하며 밑으로 내려갔지만, 결국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심장마비. 

그는 이제 없었다. 

있음에서 풀려나,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처음부터 두려워하던 바로 그대로."

p. 18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변신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재황 옮김, 루이스 스카파티 그림 / 문학동네 / 200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수년만에 다시 읽게 된 카프카의 대표작인 작품 [변신].

내용은 아주아주 간단하다. 어느날 아침, 눈을 떠보니 벌레가 되있는 평범한 남자의 이야기. 


고교 시절이었나... 처음 읽었을때의 감상이 떠올랐다. 초반 3페이지 정도만에 책을 덮고 싶을 정도로 짜증이 왈칵 치밀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그 때 즈음 주말의 명화를 통해 감상했던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영화 [플라이]가 겹쳤던 기억도 생생하다. 마치 카프카의 [변신] 에서 모티프를 얻은 듯, 영화는 끔찍할 정도로 생생하게 벌레로 변해가는 한 인간의 모습을 절묘하게 표현했었다. 특히, 이 책에도 등장하는 점액질을 묻히며 벽과 천장을 기어다니는 모습이 너무나 완벽하게 그려져 있었기에 나에게 [카프카] 는 [데이빗 크로넨버그], 그리고 [변신] 은 영화 [플라이] 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수년이 지난 지금 난, 다른 것이 보였다. 

여전히, 이 작품이 왜 그렇게 읽기에 짜증이 날 정도였냐면, '불편함' 과 '아픔' 에 대한 묘사들이 너무너무나 리얼해서였다. 그레고리라는 한 사람의 몸이 정말로 벌레가 된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는데, 그것은 제 몸을 마음대로 가눌 수 없는 '불편함' 과 시시때때로 닥쳐오는 극심한 '통증'들에 대한 세밀한 묘사 때문이었다. 그저 벌레가 되어서, 다리가 여러개 생기고, 몸이 딱딱해지고 - 그런 변화들이 '고통' 을 수반한다. 


"몸을 오른쪽으로 돌리려고 아무리 애를 써보아도 그는 번번이 등을 대고 누운 자세로 되돌아와 흔들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옆구리에서  이때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가볍고 둔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하자"

p.8 


"몸을 일으켜세우려면 팔과 손이 있어야 하는데, 이제 그런 것  대신 가는 다리들만 수없이 많이 있었다.

그 다리들은 끊임없이 제각각 움직였고 그의 뜻대로 통제할 수가 없었다.

다리 하나를 구부려보려고 애쓰면 오히려 그 다리가 먼저 쭉 펴지는 식이었다."

p. 16


"곧 화끈거리는 통증이 느껴졌고, 그 통증은 변해버린 자신의 몸에서 가장 예민한 부분이 지금으로선 하반신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p. 17


초반 몇페이지에 걸쳐 그레고리의 몸이 단순히 벌레의 모습으로 변한 것 뿐 아니라,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않을' 뿐 아니라 여기저기가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통증' 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디테일하게 설명해준다. 초반 뿐 아니라, 사실, 이야기의 대부분이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고' , '엄청나게 아프다' 는 것에 대한 묘사로 채워져 있다. 

이 작품이 묘하게 '사람이 벌레가 된다' 는 판타지적인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리얼하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바로 이 지점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아프고 고통스러운 감정들 - 편의상, '마이너한 감정'이라고 하자.- 을 훨씬 강렬하게 받아들인다. 카프카의 '변신' 은 바로 그 마이너한 감정들을 너무나 절묘하게 잡아내어 정확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문장들은 모두 낚시바늘이 되어 내 마음 속 깊숙히 묻어둔 마이너한 감정들을 '상상력' 을 통해 줄줄이 꿰어 수면 위로 올라오게 만들었다.


어제까지도 멀쩡했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몸도 마음대로 못 가누고, 온몸 여기저기에서 통증들이 비명을 질러내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설정에서 '장 도미니크 보비'의 [잠수복과 나비] 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불의의 사고로 '로크드 인 신드롬' 이라는 의학적 상태에 빠져들게 된 장 도. 정신상태와 육체상태가 너무나 멀쩡한데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병실 창문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에 팔이 타는 듯이 따가워도, 그 고통을 그냥 그대로 느끼고 있을 따름이다. 누군가 알아채고 커튼을 쳐주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상황. 장 도는 잠수복에 갇혀 깊은 물속에 가라앉아 있다. 엄청난 절망과 공포로 인한 고통 속에서. 


[변신] 을 처음 읽었을 때 [플라이] 가 연상되었다면, 이번에는 [잠수복과 나비] 가 연상된다. 

그레고르와 장 도는 너무나 많이 닮아있다. 다른 점이라면, 그레고르는 완벽히 창조된 가상의 인물이고, 장 도는 실제로 그 일을 겪은 진짜 사람이라는 것일터다. 하지만, 카프카의 [변신] 과 장 도의 수기인 [잠수복과 나비] 는 크게 다르지 않다. 


어느날 갑자기 벌레가 되어버리는 것과, 어느날 갑자기 반신불수가 되는 것과, 어느날 갑자기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 것과, 어느날 갑자기 절친의 부음 소식을 듣는 것과, 어느날 갑자기 전재산을 날리는 것은 토씨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우리 인생속에서 '큰일났다!' 할때의 '큰일' 이란 대부분 예고 없이 찾아온다.  '큰일났다!' 라는 생각조차 할 틈이 없을 정도로 그 큰일에 휘말려 들기도 한다. 그 안에서 우리는 팔다리를 마음대로 놀릴 수 없을 것이다. 아니, '팔 다리가 있어봤자 무에 쓸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일터다. 

굳이 그런 사건과 사고를 예로 들지 않아도, 우리는 누구나 그레고르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

팔 다리가 마음대로 안 움직여지고, 한번 움직일 때 마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게 되는 상황 말이다.


'노화.'

이다.

이 세상 어떤 사람이든 어느날 갑자기 침대에서 몸을 한번에 일으킬 수 없는 순간이 온다. 간신히 다리를 움직여 바닥을 디뎌도 몸을 세울 수 없는 순간이 온다. (안타깝게도 난 노화도 되지 않은 주제에 벌써 그런 일을 겪긴 했지만. ;;;)


그레고르는 그런 상황속에서도 가족의 생계를 걱정한다. 회사에서 해고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늙으신 부모님과 어린 여동생을 걱정한다. 그 대목에서는 우리 부모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퇴행성 관절염이 시작된 무릎을 치료 받고, 어깨를 치료받고, 허리를 치료받으면서도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일터로 나간다. 통증에 익숙해지고, 노안이 시작되어 희미해지는 눈을 돋보기로 적응시키고, 순간순간 뻐근해지는 근육들을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풀면서, 좁은 운전석에, 기계 앞에, 사무실 안에, 책상 속에 육체를 구겨넣는 우리 부모님들.

그리고 당연히 그 모습들은 나의 미래. 우리의 미래이다. 


늙음.

그레고르의 가족들이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를 대하는 모습에서 '덜 늙은' 사람들이 늙은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았다.

자식들이 늙은 부모님들을 대하는 모습도 보였다. 특히 가장 마지막 단락. 거기에서는 더더욱 강렬하게 보였다.


십여년전 [변신] 에서는 끔찍함과 상상력이 보였다면, 

32살의 [변신] 에서는 통증과 노화가 보였다. 

우리는 누구나, 그레고르와 같은 경험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 머지 않은 미래에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래그타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5
E. L. 닥터로 지음, 최용준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00년대 초반. 비교적 상류층 가정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잘나가는 사업체를 운영하는 아버지와 아름다운 어머니, 외삼촌과 이야기의 화자인 아들로 이루어진 백인가정. 이야기의 줄기들은 바로 이 가정을 중심으로 뻗어나간다. 당대 최고의 퍼포먼스 아티스트이자 마술사였던 후디니가 우연히 이 가정을 방문하게 된다. 그리고 외삼촌이 사랑했던 여인 에벌린 네즈빗, 에벌린 네즈빗을 사랑했던 스탠퍼드 화이트와 그를 총으로 쏘아 죽인 에벌린 네즈빗의 남편 해리 K 소. 그리고 에벌린 네즈빗이 만나게 되는 차별받는 이민자 가족인 타테와 그의 어리고 예쁜 딸. 그리고 타테가 에벌린을 이끈 모임에서 만나게 되는 무정부주의 운동가 옘마 골드만. 그리고 옘마 골드만과 만나게 되는 외삼촌. 소년의 어머니가 우연히 구해낸 산채로 땅속에 묻혀있던 유색인 갓난아기와 그 아이의 엄마였던 세라. 그리고 세라를 사랑했던 남자이자 산채로 땅속에 묻혀 죽을 뻔 했던 갈색피부 아이의 아빠인 품위있던 니그로 피아니스트 콜하우스 워커 주니어. 콜하우스 워커 주니어가 타고 다니던 포드 자동차의 주인인 헨리 포드와 그와 함께 하고싶었던 미국 금융업계의 지배자 피어폰트 모건. 


 수많은 인물들이 소년의 가족들 주변에서 점멸하고, 소년은 담담하게 인물들의 뒤를 좇는다. 얼핏, 소설이 아니라 르포같은 느낌이지만, 분명한 소설이다. 그것도 완벽한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의. 하지만, 시간과 장소의 흐름의 기준점을 이 '소년' 으로 잡음으로서 마치 소년의 입을 통해 나오는 것 처럼 느껴진다. 대단히 독특한 경험이었다. 소년의 아버지와 어머니, 외삼촌은 먼저 후디니라는 인물과 만나면서 심경에 작은 파문을 경험한다. 후디니는 미국사회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한두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탈출묘기의 명수. 미국은 물론 유럽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마술사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피어리와 함께 북극 탐험에 동행한다. 피어리 역시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북극점을 정복한 미국의 위대한 탐험가이다. 에벌린 네즈빗은 '빨강머리 앤'의 실존모델로 유명한 당대 최고의 슈퍼모델, 핀 업 걸이었다. 그녀는 강렬한 매력은 당시 브로드 웨이 무대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켜 무대의 구성과 연출을 뒤바꿀 정도였다고 한다. 옘마 골드만은  알렉산더 버크만과 함께 당대의 노동운동을 이끈 무정부주의 운동가였으며, 콜하우스 워커 주니어는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은 흑인 테러리스트였다. 이렇게 당시 미국 사회의 전반에서 큰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 한 작은 가정에 일으킨 변화를 살피는 일이 상당히 흥미롭다. 

 

 뿐만 아니라 당시 미국 사회에 나뉘어있던 계층, 앵글로 색슨 계열의 백인 가정과 유럽의 이민자, 노예에서 벗어난 흑인들, 최 상류층 은행가와 사업가, 인기 절정의 여배우와 공연가등 각계 각층의 인물들의 삶이 단편적이지만 명확하게 그리고, 빠르게 정리되어 지나간다. 현대 미국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금융과 기업,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 산업 등 문화의 시초를 잠깐씩이나마 맛볼 수 있다. 중간 중간, 미국 대륙을 횡단하는 거대한 철로와 필라델피아의 대규모 공업단지도 구경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마치 기차를 타고 지나가는 풍경을 구경하는 듯한 느낌이다. 허나, 차창을 통해 지나가는 문장의 풍경들은 그저 피상적인 '스크린' 이 아니다. 창 밖으로 거대한 역사가 도도하게 흘러간다. 미국 현대소설의 특징이랄 수 있는 부사나 형용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간결한 문장은 빠르고 군더더기 없는 이야기의 흐름과 어우러져 상당한 시너지를 발휘한다. 적당한 호흡으로 인물들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분절되며 시종일관 지루할 새 없이 이야기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산발적으로 흩어져있던 인물들의 점은 이야기의 중반에 등장하는 콜하우스 워커 주니어와 함께 하나의 선으로 모아진다. 역자 후기에도 등장하지만, 짧고 간결하고 빠르다고 깊이가 없고 함의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의 문장과 문장들이 모인 문단들, 심지어 문단 사이의 여백에까지도 작가의 함의가 깊이 배여있다. 당연히 그 함의를 찾아내는 것은 독자들의 몫일터다. 까메오처럼 등장하는 미국의 정치가들과 1달러지폐에 그려있는(각종 음모론의 소재가 되는) 피라미드와 눈 심볼의 기원으로 추측되는 사건, 미국 노동조합의 탄생과 여성인권운동과 아나키즘의 접목,  제1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위 계승자 프란츠 대공의 암살까지, 가볍게 넘길 문장들이 단 한 줄도 없다. '천천히 읽으라' 는 역자의 말과, 역시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맨 앞장의 인용 문구 "이 곡은 빨리 치지 말게. 래그 타임은 절대 빨리 치면 안 돼..." 라는 스콧 조플린의 문구까지, 충분히 이해된다. 

 

 문학은 독자들에게 해답을 주지 않는다.

작가는 사람들을 선도하거나 꿈과 희망을 주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건 정치가들의 몫이다. 소설가는 단지 현실을 그려낼 뿐이다. 어떤 독자들은 그 현실을 보고 해답을 찾거나, 꿈이나 희망을 얻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당연히 독자 개인의 몫이다. 당연히 작가에게는 독자를 감동시킬 의무도 없고, 깨달음을 줄 의무도 없다. 위로를 받건, 절망을 하건, 모두 독자의 몫이다. 

 이 책을 읽고 당신은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평생에 한번쯤은 일독을 해 볼 만한 작품임은 확실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