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받을 용기 (200만 부 기념 스페셜 에디션) -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 1
기시미 이치로 외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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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분리'

나는 나의 과제에 최선을 다하고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

몹시 중요한 말이다. 살다보면 저도 모르게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는 경우가 있다. 듣기 싫은 잔소리를 하는 상대를 불편하게 여기거나, 말을 듣지 않는 상대를 바꾸려는 행위도 그렇다.

술 먹고 늦게 들어오는 남편 이야기, 공부하지 않는 자녀의 이야기, 쉴새 없이 잔소리를 늘어 놓는 아내의 이야기 등 일상적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다양한 스트레스의 원인은 '관계'에서 비롯된다.

관계에서 자유롭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바로, '과제 분리'다. 나는 나의 과제에 최선을 다하고, 타인은 타인의 과제를 하도록 두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주의와 다르다. 그것은 존중하고 엮이지 않으며 서로 행복해지는 일이다.

보통의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외부적 원인'을 찾는다. 함께하는 주변인이 바뀌거나 상황이 조금 달라지거나와 같은 일 말이다. 이처럼 행복을 외부적인 원인으로 둘 경우 우리가 행복을 위해 취할 수 있는 자세는 굉장히 제한적이다. 상황을 바꾸어야만 겨우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우리에게 '외부'를 바꾼다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관점은 '주체성'을 잃어 버리기 쉽다.

'아이가 공부만 한다면 소원이 없겠다' 혹은 '남편이 술만 좀 줄이면 소원이 없겠다' 등, 우리는 불행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다. 여기서 우리가 주체성을 갖고 능동적인 대처를 할 수 있는 일은 외부에 간섭하는 일 밖에 없다. 관계에 더 얽히게 될 수록 우리는 원치 않은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상황이 바뀌지 않더라도 모두는 행복해 질 권리가 있다. 나의 행복이 중요한 만큼 상대의 행복도 중요하다. 나의 행복을 위해 외부에 간섭을 시작할 때, 상대와 대립이 생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상대에게 간섭하는 것은 상대의 행복을 저해하는 일이다. 고로 '나는 나, 너는 너'라는 스탠스를 취하는 것이야 말로 모두가 행복해지는 일이다. 이는 개인주의나 이기주의와는 확연하게 다르다.

프로이트는 '원인론'을 가지고 현재를 분석했다. 과거의 어떤 사건이 현재의 '자아'를 형성한다는 의미다. 이와 반대로 아들러는 '목적론'을 가졌다. 현재의 상태를 목적으로 두기 위해 '과거'를 이용한다는 의미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프로이트는 과거에 불행했던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는다고 여겼다. 이 트라우마는 현재까지 영향을 끼치며 지금의 '자아'의 상태를 결정한다. 고로 과거에 커다란 사건이 있는 사람은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불행한 삶을 이어나간다. 반면 '아들러'는 다르다. 아들러는 현재의 '불행'을 위해서 과거의 '기억'을 소환해 낸다고 여겼다. 과거의 기억이 원인이 되어 현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울과 불행에 대한 합리성을 과거에서 가지고 올 뿐이다. 즉 우울과 불행이 먼저고, 그것에 대한 합리성을 갖기 위해 과거의 기억을 가져 올 뿐이다.

이는 굉장히 명쾌하다. 프로이트는 '원인론', 아들러는 '목적론'이다. 이 완전히 다른 시각은 '주체성'을 다르게 한다. 프로이트의 '원인론'에서 '현재의 자아'가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드믈다. 과거의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아들러'의 목적록은 불행하기 위해 과거를 이용할 뿐이다. 즉, 자신이 행복하기로 마음을 먹으면 언제든 행복해 질 수 있으며 언제든 자신이 선택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행복에 대한 관점을 외부에 둘 것인지, 내부에 둘 것인지는 굉장한 차이가 있다. 아들러의 '목적론'으로 자아를 살펴보면 우리는 '행복'을 먼저 결정하고 다른 감정과 기억은 그것을 이용하는데 사용할 뿐이다. 즉, 우리는 어떤 일이 발생하여 화가나는 것이 아니라, 화가나기 때문에 그 이유가 필요할 뿐이다.

이런 주체성의 원리는 '과제 분리'에서 더 명확해진다.

아무리 선인, 현자라고 하더라도 누군가에게는 분명히 미움을 받는다. 오죽하면 '붓다'나, '예수', '공자'와 같은 성인들도 어떤 누군가에게는 미움의 대상이 된다. 즉 누구에게도 미움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인류 역사 20만 년 중1000억 명의 사람이 이땅에 죽고 나면서 단 한명도 경험해 보지 못한 불가능한 일 중 하나다. 그것을 해내려고 하니 그것은 태양 불을 물로 끄는 것과 같은 도전이다. 그런 불가능한 꿈을 꾸니 현실에서는 좌절하고 과거에서 좌절한 현실의 이유를 가져 오는 것이다.

우리 또한 누군가를 미워할 때가 있다. 우리가 미움을 주는 대상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들이 미워할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를 미워하기로 정해두고, 그의 행동에서 원인을 찾는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그들을 좋아하기로 결정한다면 우리는 너무 쉽게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을 멈추게 된다.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미움 받을 가능성'이 있다. 조금더 명확하게 말해보자면 '받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받는다. 앞서 말한 많은 성인, 현자도 피해가지 못하는 것이 '미움'이다. 고로 일정한 확률로 우리는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며, 그들이 미워하는 행위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 것이 우리가 취할 행동이다.

그들이 나를 미워하는 것은 그들의 과제이고, 내가 거기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나의 과제이다. 서로가 서로의 과제에 최선을 다하다보면 어떠한 스트레스도 발생하지 않는다. 꾸준한 잔소리를 늘어 놓는이가 있다고 해보자. 모든 행동에 꼬투리를 잡고 지적한다고 해보자. 이런 잔소리는 분명 '스트레스'를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면 이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는 나를 미워할 권리가 있다. 나는 그의 말을 듣지 않을 권리가 있다.'

간단히 해서, 그가 하는 말에 간단한 대답을 하고, 자신은 그대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면 된다. 인간관계가 복잡하면 더 많은 스트레스에 노출된다.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10대와 20대 여성의 자살률이 크게 증가했다. 젊은 남성의 경우, '게임'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성취욕을 풀어가는 반면에 여성의 경우에는 SNS에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비교한다. 이 과정에서 젊은 여성의 행복도와 우울감이 크게 늘었다. 사람은 원래 살면서 '모르고 지나가던 것들'이 있다.

과거 초등학교 동창이 구매한 값비싼 자가용이라던지, 잠시 스치고 지난 인연의 성공담, 다른 학교로 전학 간 친구의 '성적' 또한 그렇다. 그러나 이처럼 잊혀져야 할 다양한 관계를 모두 끌어모아 SNS는 연결 시킨다.

'관계'는 열등감을 만들고 이러한 것은 '스트레스'의 원인이 된다. 다시 말하면 잊혀져야 할 것들은 잊혀져야 한다. 이민 간 초등학교 동창 친구의 점심식사 메뉴까지 확인할 수 있는 세상에서 우리의 행복감은 점차 '외부'로 던져진다. 과연 우리의 행복을 결정 짓는 것은 누구의 몫인가.

우리는 우리의 행복을 결정 지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프로이트'의 원인론보다는 아들러의 목적론에 굉장한 관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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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 - 자기 성찰의 고전 명역고전 시리즈
범립본 지음, 김원중 옮김 / 휴머니스트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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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은 '계선'을 시작로 한다.

날때부터 사람은 선한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교육을 통해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맹자의 '성선설'을 전제로 한다.

'하늘'은 선한 자에게 복을 주고, 악한 자에게 '벌'을 준다. 아이에게 원문과 뜻을 읊어 주었다. 그 뒤로 아이의 행동이 조심스러워졌다. 강조하여 말한 것도 아닌데 아이는 '하늘'을 두려워했다. 그 '전지전능함'에 나약한 '인간'으로 발가벗겨진 느낌은 때로 불필요한 수치심을 만들기도 했다. 나또한 어린 시절에 '하늘'이 두려웠다. 숨을 곳 없이 살피며 상벌을 내리는 자에게 순종하려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터 시야가 좁아졌다. 제 아무리 밝은 빛이라 해도 접시 밑까지 밝힐 수는 없다. 모두를 밝혀도 빛들지 않는 곳이 있음을 알고 '계선'하지 못했다. 가지고 있는 '선'함은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언제든 잃어버릴 수 있기에 어떻게 그것을 이어 갈 수 있느냐를 연구해야 한다.

가만히 떠올려보면 어린시절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무도 없는 시골길에서 횡단보도가 없으면 수백 미터를 더 걸어 가고서 건너곤 했다. 사람들의 '의도'를 의심치 않고, 때로 나를 속이는 사람들을 끝까지 믿으며 되려 손해보는 것이 편한 사람이었다. 그때의 모습을 돌이켜 보건데, 나는 틀림없이 퇴화했다. '계선'하지 못했다. 하늘이 바라 볼 지언정, 눈이 없으면 슬금슬금 모르쇠하고 때로 누군가의 뒷담화 자리에 신나게 침을 튀기기도 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이립하고 불혹하며 지천명하고 이순한다는데, 되려 퇴보해가는 스스로를 보며 '성선설'이건, '성악설'이건 '교육'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교육은 암기하여 머리에 집어 넣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익히는 일이다. 학습에서 학은 하나, 습은 열이다. 한 번 배우는 것보다 열 번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머리로 집어넣고 행동으로 꺼내지 못한 '무지'가 스스로를 망치고 있었다.

한 번은 아이가 말했다. 빨간불에는 멈추고, 파란불에는 가는 거란다. 알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은 노란불이라고 했다. 아이는 말했다. '노란불'이란 '주의'하라는 의미란다. 어설프게 걸린 순간을 핑계 삼아, 가속페달을 밟던 오른발이 민망했다. 과연 나의 오른발은 '모르고 그랬는가' 분명한 건, 나이가 들면서 점차 '하면 안되는 것' 중 '해보니 별일 없더라'가 많아졌다.

커다란 범죄가 아니라면 잠깐 스스로를 속였다. 속이는 줄도, 속는 줄도 모르고 속였다. 학습은 그런 방향으로 진화했다. 해보니 생각보다 별일 없더라...

이런 학습이 하나 둘 쌓이자, 좋지 못한 '습'이 생겼다. 고쳐야 하는 '습관'이 쌓여도 머리로 알며 몸이 다르게 움직이는 '모순'이 생겼다. 몸과 마음의 차이는 미세하게 시작하여 광활하게 벌어졌다. 본디 그것이 하나처럼 붙어 있었다는 사실도 지각할 수 없었다.

'인지부조화'

나에게 찾아온 '인지부조화'는 결국 신나게 달리던 가속패달을 멈추게 했다. 다음 '나이'로 나아가는 방향에 '노란불'이 들어와 있었다. '주의'하라는 의미다. '주의는 무슨...', 가속 페달을 더 힘껏 밟으며 '마지막 기회'를 통과하고 있었다. 결국 몇 분의 시간을 아낀다는 핑계로 내가 하고 있던 건, 양심을 팔아 1분쯤 먼저 도착하여 허송세월을 보내는 일이었다.

삶이 시간으로 쌓여가는데, 도착 후 1분을 위해 진행하는 1분을 갔다 버렸다. 무게의 가치가 1g도 다르지 않지만 가치를 다르게 매기고 후의 1분을 위에 앞의 1분을 버렸다. 조삼모사 선택을 하느라, 내가 허비한 것은 '양심'이었다. 그것은 '악'이다.

'선과 악'을 말할 때, 우리는 이분법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동양에서 '선'과 '악'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악(惡)은 으뜸 밑에 버금(亞)을 뜻한다. 우리 마음(心)에 있는 두 번째를 '악(惡)'이라 한다. '선'의 반대쪽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선' 뒷편에 서 있는 그것이 '악'이다. 다시 말해, 완전히 선의 반대쪽이 아니라 바로 그 다음을 말한다. 선(善)도 단순히 착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선(善)'은 양(羊)과 눈(目)으로 이뤄져 있다. '양'은 '개' 다음으로 인간에게 오래 길들여진 동물이다. 양은 아주 작은 식량만으로도 생존이 가능하고 사회적 동물이기에 대규모로 키우기도 유리하다. 이중 '양털'은 생존에 매우 필요했다. 양은 '의'가 되기도하고 '식'이 되기도 했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에 따르면 인간은 양을 기르며 순종하는 양만 남기고 모두 죽여 버렸다. 이런 과정에서 양은 꽤 순종적인 동물이 됐다. 게다가 '양'은 매우 시력이 나쁜 동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분별력이 없고 쉽게 따라다니며 복종한다. 이런 특성은 '신' 앞에 놓인 '인간'을 닮았다. '인간'의 보살핌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양'을 보며, '인간'은 '신' 앞에 놓인 '자신'을 바라봤다. 그런 의미에서 '양'은 신에게 제물로 종종 쓰이곤 했다. 우리가 말하는 '희생양(犧牲羊)'은 이렇게 신 앞에 제물로 받혀진 '양'을 말한다.

선, '따르는 것', 악 '그 다음의 생각'.

선과 악은 천사와 악마라는 고밀도의 인격의 집합이 아니다. 따르는가, 혹은 그 아래의 유혹에 흔들리는가. 그 작은 차이가 만들어낸 구분이다. 가만히 보면 나의 어린 시절은 꽤 따름의 방향에서 시작했다. 점차 몇 번의 옳지 못한 선택과 경험들은 굳이 '따르지 않아도 되는 기억'을 만들었고, 그것은 '선'의 '다음' 그것이 됐다.

'명심보감', 마음을 비추는 보배로운 거울.

거기를 들여다보니, 나의 온전한 민낯이 들여다보였다. 여하면 다음의 마음에게 쏠리고 마는 어리석음이 보였다. 나를 비추고 수신하여 '선'을 이어야겠다는 다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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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이전 확장판 - 자산을 지키는 가장 완벽한 절세 비법
이장원.이성호.박재영 지음, 안수남 감수 / 체인지업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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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기를 겪으며 우리에게 익숙한 '아스트라제네카'라는 회사가 있다. 이 회사는 스웨덴 제약회사인 '아스트라AB'를 전신으로 갖는다. 이 회사의 창업주는 1984년 사망한다. 이때 그는 자녀들에게 회사 승계를 한다.

이 과정에서 당시 최고 세율인 70%의 상속세의 의무가 주어졌다. 상속세를 납부하기 위해 자녀들은 회사 주식을 매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소식이 주주들에게 전해지자 시장에서 투매가 일어났다. 주주들은 자신들의 주식을 조금이라도 고가에 팔기 위해 주식을 던지기 시작했다. 주식은 급락했고 보유 주식의 매각 대금으로 상속세를 납부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자 결국 승계를 포기한다.

이 과정에서 회사는 영국으로 넘어간다. 영국의 제네카는 회사를 인수하여 '아스트라제네카'라는 지금의 제약회사가 탄생했다. 스웨덴 입장에서 엄청난 자산이 해외로 유출된 셈이다.이 과정에서 스웨덴의 여러 기업들은 국가를 떠나기 시작했다. 2005년 스웨덴은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상속세를 폐지한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냐는 말이 있다. 세금 무서워 '사업' 못하겠느냐,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다만, 개인적으로 '세금'에 크게 데여 본 적 있던 터라 이 말에도 어느 정도 공감을 한다.

이런 이슈는 비단 해외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경우가 있다. 손톱깎이로 유명한 쓰리세븐의 경우도 비슷하다. 2008년 쓰리세븐 또한 150억원의 상속세를 납부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회사 지분의 전량을 매각했고 이후 적자 기업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한진 그룹의 유족 또한 2700억 원 규모의 상속세를 납부하기 위해 정석 기업 지분을 전량 매도했다. 넥슨의 고 김정주 회장의 유족들의 경우 상속재산 10조원 중 6조원을 상속세로 내야 했다. 이 과정에서 7조 7000억원을 정부에 물납한다. 이 과정에서 기획재정부는 넥슨 그룹의 지주 회사인 NXC의 2대 주주가 됐다.

수 천억 혹은 수 조원 단위의 대기업을 말할 것 만은 아니다. 기존에 '상속세'는 '부자세'라고 하여 돈 많은 이들이 납부하는 세금으로 여겨졌다. 우리의 특이한 인구구조 덕분에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와 더불어 이후 세대로의 '부의 이전'이 시작됐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커다란 돈의 파이가 '세대'를 건너 가길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우선 경제를 이끌던 과거 '대기업'들과 '상속인'들의 이슈가 뉴스를 떠들고 이후 다수의 국민에게도 이런 이슈가 서서히 일어나고 있다.

이제 상속세는 '일부'의 이슈가 아니다. 넘기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동시에 고민하는 꽤 해당되는 국민이 많은 이슈다. 1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상속세를 내는 지인과 친하게 지내라'라는 말이 있었다. 상속세가 부유한 일부의 세금이라는 인식이 강했다는 의미다. 다만 현재의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2020년 연간 사망자 수는 약 30만 5천명이다. 상속세 신고 인원 또한 3.7%에서 5.2%로 올랐다. 이 숫자는 증가율로 봤을 때 40%가 넘는 수치다. 2년만에 40%의 성장은 엄청나다.

대한민국의 상속세율은 대체로 '경제적, 사회적 배경'이 있다. '고도성장'과 '인구구조의 변화'와 엮어 볼 수 있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뤘다. 이런 경제 성장은 많은 부의 축적을 이루게 했다. 다만 성장의 과정에서 일부 계층이나 개인에게 부가 집중되는 양이 많았다. 상속세는 이런 부의 집중을 완화하는 역할을 했다. 불평등을 줄이고 세수를 확보하는 수단이었다. 이렇게 걷힌 세금은 사회 복지나 인프라 투자에 쓰여지고 공공 서비스에 재투자 됐다.

한국의 인구 구조도 한몫했다. 한국은 초고속으로 고령화 사회로 나아간다. 인구는 감소하고 경제 성장은 둔화된다. 이에 따라 다양한 사회복지 비용이 필요하다. 노인복지, 건강 보험, 연금 등 다양한 사회복지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지출의 증가는 너무나 당연하다. 이러한 경제적 사회적 배경을 보자면 우리의 상속세율은 단순한 세수 확보 이상의 목적이 있다. 크게 보자면 부의 공정한 분배, 사회적 안정성 유지가 그 목적 중 하나다. 문제는 과거에는 일부에게 해당되던 이슈가 이제는 거의 전국민에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OECD 38개국 중 상속세가 없거나 폐지될 예정인 국가는 17개국이나 된다. 또한 대부분 상속세가 낮고 직계 상속에 대해서는 낮은 상속세를 부과한다. 우리의 조세수입 중 상속세와 증여세는 2.42%로 OECD 회원 국중 가장 높다. OECD 평균인 0.42%와 비교했을 때도 5.7배 이상이다. 다만 사회가 경쟁적인 분위기를 거쳐 오면서 이러한 본래 의도와 목적에 동의하는 이들이 얼마나 있는지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어쨌던 한 쪽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다른쪽 호주머니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치열한 사회를 살아온 세대들에게 어떤 식으로 공감 받을 수 있을지 고민 해야한다. 절세와 탈세는 얼핏 비슷해 보이는 말장난 처럼 보이지만 그 본질은 완전히 다르다. 절세는 법의 테두리에서 합법적으로 세금 부담을 최소화하는 현명한 방법이다. 여기에는 세금 공제, 세금 혜택을 활용한 꽤 현명한 방법이다. 이에 반해 탈세는 불법이다. 단순히 세금을 회피하는 행위이며 거짓 정보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속이는 기만행위다. 이 두가지는 세금을 많이 내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겠지만 불필요하게 세금을 많이 내는 것을 꼭 도덕과 연결시킬 수 많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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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셀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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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오셀로'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못 고치는 병이라면 슬퍼할 필요도 없다."

삶에 대한 능동성에 대한 울림을 준다. 모든 병에 슬퍼할 필요는 없다. 살다보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 어찌됐건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가 있다. 다시 어떤 경우에는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일도 있다. 우리가 슬퍼해야 하는 일은 스스로 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않는 일이지, 할 수 없는 일을 하지 못했을 때가 아니다. 모든 상황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은 슬퍼할 필요는 없다.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가 아니라,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가 중요하다.

같은 사건이라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 시선이 다르니 대응 방법도 다르다. 대응없이 주어진 상황에만 반응하는 것은 더 나쁜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보다 나쁘다. 결국 나쁨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일이다.

오셀로의 비극은 그가 능동적이지 못함에서 시작한다. 주체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언제나 휘둘린다. 자신의 주변 환경과 인물들에 쉽게 휘둘린다. 오셀로는 결국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데 실패한다. 누군가에 의해 쉽게 조종 당하며 사랑하는 이와 주변 인물을 잃어 버린다. 때로 우유부단함은 '악'보다 더 '악' 할 때가 있다.

만약 눈먼 황금이 탁자 위에 놓여 있다고 하자. 그것이 나의 것이 아님을 누구나 알고 있다. 누구도 황금의 출처를 모르고 누구도 자신의 행동을 규견하지 않을 때, 과연 대부분의 사람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극단적으로 황금으로 예를 들것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양심을 스스로 내려 놓는다. 비어 있는 밤거리 무단횡단을 하거나 가벼운 담배꽁초를 튕겨 버리고 때로는 혼잣말로 타인을 비방하기도 한다. 혼자라고 여겨질 때 대부분의 사람은 '선'과 '악' 중 더 쉽고 이득이 되는 편을 택한다.

순자가 '성악설'에 의해 사람에게 교육이 필요하다 주장도 일맥한다. 그렇다. 누구나 자신이 혼자이거나 자신에게 모든 걸 주체 할 수 있을 때, 거리낌없이 '악'을 선택할지 모른다.

여기서 딜레마가 생긴다. 과연 '악'을 행하도록 '유도'한 이가 나쁜가. 악을 행한 이들이 나쁜가. 이 딜레마에서 어느쪽을 선택하더라도 도덕적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간혹 '악'을 행한 이가 나쁘다면 '정치적 선동'에 의해 움직이는 대중은 무엇이 되는가. 만약 악을 행하도록 한 이가 나쁘다면 모든 범죄는 '수동적 행위'일 뿐이된다. 고로 이 딜레마에서 '오셀로'는 악을 행한자이다.

악을 행한 자거나 악을 행하도록 한자, 둘 다 나쁘다고 할 수도 있다. 혹은 이 둘 모두 유혹에 미약하여 '악'이 아닌 얼굴로 서로의 악행을 주고 받을 수 있다. 이런 무지는 과연 용서 받을 수 있는가.

오셀로는 꽤임에 빠져 사랑하는 자를 죽이고, 자신의 우유부단함으로 가장 신임하는 친구도 잃는다. 결국 그 무엇이 되더라도, 무능과 우유부단함은 때로 '악'만큼이나 악하게 만든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복음을 전도'하여 많은 이를 구하는 것이 '선'이라고 하던가. 이에 정반대라면 누군가를 '악' 자체 만큼이나 누군가를 '악'으로 이끄는 것마져 나쁜 것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현대에 와서 함정수사가 불법인 이유는 이런 비슷한 맥락에서 출발한다. 함정 수사를 통해 누군가에게 '범죄'를 유도하는 행위는 범죄를 저지를 의도가 없는 사람을 범죄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는 자발적 범죄가 아니며 인위적이고 만들어진 범죄로 '선'의 가면을 쓰고 '악'을 만들어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때로 살면서 다양한 유형의 사람을 만나곤 한다. 어떤 누군가는 괜히 '선한 일' 하나 없이도 '착하다'라는 평을 받고, 어떤 누군가는 '악한 일' 하나 없이다 '나쁘다'는 평을 받는다. 대체로 사람들은 고분고분하고 조용한 사람에게 '착하다'라는 평을 주고, 개인의 주체성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행위를 하는 사람에게는 '욕심'의 이름을 빌려 '나쁘다'라는 평을 준다. 이러한 평가는 대체로 '개인'을 기준으로 한다. 자신에게 함부로 할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로 사람을 평가하면서 자신이 말에 순응하는 쪽에 '착하다'라는 평을 붙인다.

극악무도한 범죄자의 옛지인의 평을 들어보면 대체로 '선하다', '착했다'라는 평이 다수를 이룬다. 그 이유는 실제 그 사람이 '선한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언제든 타인에 의해 조종 당할 수 있는 우유부단함을 가졌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다. 그렇게 실제 악을 저지르는 사람은 결국 누가 되는가. 타인에게 그저 순응하고 아무런 비판적 생각없이 누군가의 말을 믿는 사람의 최후는 결국 의도치 않은 '악'이 된다. 결국 '악'은 무엇인가.

악은 '선'을 포함하며, '선'의 얼굴로 저지르고, '선'으로 평가 받으며, 결국 다른 누군가도 '악'으로 끌어들이지 않는가.

고로 자신의 소신과 비판적 의식이 없는 '주체적이지 못한 태도'는 때로 악보다 심한 선, 즉 극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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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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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은 도둑질의 시작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분신'은 제목 자체가 '스포일러'이지만 몰입하는 순간, '제목'은 잊게 된다.

엄마를 닮지 않은 딸의 이야기는 꽤 평범한 가정을 보여준다. 어째서 제목이 '분신'인가,는 몇 장을 더 넘기면 대략 알게 된다.

임야비 작가의 '악의 유전성'의 일부가 떠오르기도 한다. '과학'과 '윤리'의 경계선에 대한 고민을 해 볼 수 있다.

생명공학과 의학에 대해 살펴보면, 꽤 철학적인 질문을 맞이한다. '테세우스의 배' 역설이다. 테세우스의 배의 역설은 이렇다.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후 아테네에 귀환한다. 아테네 사람들은 그가 타고 왔던 배를 보존하기로 한다. 판자가 썪으면 판자를 바꾸고 어떤 부품을 새 부품으로 교체하며 이 배를 보존한다. 이렇게 부품 하나 하나를 교체하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테세우스'가 타고 왔던 그 모체는 완전히 사라지고 '테세우스의 배'라는 이름만 변하지 않고 남게 된다.

그렇다면 그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는가. 만약 테세우스의 배가 더이상 '테세우스의 배'가 아니라면, 언제부터 테세우스의 배가 아니게 되는가. 그 명확하지 않은 경계선을 우리는 구분할 수 있는가.

'불경'의 '금강경'에 따르면 모든 것은 고여 있지 않고 흐르고 순환한다. 우리를 구성하는 원자 또한 한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고 그 형태를 바꾼다. 우리는 호흡하고 배설하고 취식한다. 그 과정에서 어떤 원자는 우리를 구성하다가 밖으로 나가고, 어떤 원자는 다른 것을 구성하다가 우리의 몸으로 들어온다.

자, 어느 순간부터 '나'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 원자를 교환하는 방식은 잠시도 게으르지 않고 꾸준하다. 어떤 세포는 사라지고 어떤 세포는 생겨나며, 어떤 세포는 산화되고 어떤 세포는 환원된다. 이 과정에서 '나'는 꾸준히 교체되는데, 과연 어느 순간부터가 '나'라고 규정할 수 있고, 어느 순간부터가 '나'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

만약 '나'라고 하는 것이 '테세우스의 배'와 마찬가지로 '이름'만 유효하다면 어떤 교체도 허용할 수 있다면 '나'는 결국 '이름'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히가시노 게이고'의 분신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복제된 인간'은 과연 '나'인가.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으면 결국 '나'라고 할 수 있는가. 이 철학적인 질문에 '일란성 쌍둥이'를 키우고 있는 '아빠'로써 사색해보면 이렇다.

일란성 쌍둥이는 한 개의 수정란이 분할되어 형성된다. 쉽게 말해, 인위적으로 똑같은 유전 복제품을 만드는 것과 같이 '일란성 쌍둥이'의 유전 정보는 거의 똑같다. 일란성 쌍둥이는 태어날 때, 유전정보가 거의 동일하다. 초기에 일란성 쌍둥이의 DNA는 100%일치한다. 다만 각각 다른 환경적 요인과 개인적 경험을 겪게 되며 작은 유전 변화가 일어난다.

다시 말해서, '유전 복제'를 통해 '클론'을 만들어 낸다고 하더라도 그 복제품은 결코 '나'가 될 수 없다. 쌍둥이를 키워보면 알 수 있다. 아이가 같은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다고는 하지만 그 성향은 완전히 다르며,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비슷해 보이는 외형도 부모의 입장에서는 확연하게 다른 외형이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두 아이를 동일시 하고 있지 않고 그들 스스로도 상대를 '자신'이라고 인지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시간을 거꾸로 거슬로 올라 갔을 때, 그들이 결국 하나의 세포에서 분할된 두 개의 객체라 할지라도 이 둘을 하나로 볼 수는 없다. 다만 소설에서 '극적인 재미'를 주기 위해 '너는 복제품이야'라는 플롯이 만들어졌다.

유전자 복제에 대한 윤리적인 문제가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다양한 토론이 있어야겠지만 유전복제는 결코 '나'가 될 수 없다. 쌍둥이 어느 하나가 '모체'고 어느 하나가 '복제품'이 되지 않는 것처럼 유전 정보가 같은 여러 인간은 결코 동일인이 아니다. 같은 부품을 사용했다고 해서 모든 스마트폰이 모체와 복제품으로 나눠지지 않는 것처럼 그렇다. 고로 '복제품'은 스스로 특별히 '모체'에 대한 '열등의식'을 가질 필요도 없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분신'은 꽤 많은 생각할꺼리를 독자에게 던저준다. 끊임없이 복제되는 복제품들과 '모체'에 대한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과연 수 십년 전 모체로부터 복제된다면 과연 나의 어머니는 '모체'가 되는가, 혹은 '모체'의 어머니가 되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출산을 했던 '대리모'가 되는가. 키워준 양육모가 되는가. 이런 여러가지 윤리적인 문제는 '과학과 의학의 발전' 만큼이나 중요하다.

소설에는 꽤 인상적인 문구가 하나 나온다.

"거짓말은 도둑질의 시작이다."

모든 문제는 사소한 문제로 시작하지만 그 결과는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진화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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