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10분 계산력 : A2 - 유아 7세~초등 1학년 날마다 10분 계산력
애플비북스 편집부 지음 / 애플비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공부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한다고 하면 거들 뿐이다.

도와 달라하면 도와주지 않는다. 다시 읽어보라고 할 뿐이다.

잘 한다고 칭찬하지 않는다. 한다고 칭찬할 뿐이다.

맞으면 기뻐하지 않는다. 틀리면 '보석을 찾았다!'라고 말해준다.

아이가 문제집을 가져 오더니 옆에 앉는다. 바스락 바스락 거리더니, 문제를 푼다. 가만 지켜본다. 한 아이가 문제를 풀기 시작하니, 옆에 아이가 문제집을 가져온다. 그렇게 그닥 요청하지 않는 공부 시간이 시작됐다.

꽤 했던 것 같다. 안 하겠다고 하면 하지 말라고 한다. 하겠다고 하면 하라고 한다. 그 뿐이다. 다만 아빠가 있는 자리에 오고 싶어 할 때, 책이라도 가지고 오라고 한다. 한참을 문제를 풀던 아이가 '채점'을 해 달라고 한다.

다율이가 푼 문제를 채점하다가 틀린 문제를 발견한다. 가차없이 표시한다. 표정이 어떻게 바뀔지는 이미 알고 있다. 그래도 가차없이 표시한다.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하더니, 이내 울고 만다.

"근데 왜 우는거야?"

묻는다. 아이가 맞은 걸로 해달라고 떼를 쓴다.

"왜 틀렸는데, 맞은 걸로 해?"

그러자,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뚝하고 떨어진다.

"틀린 거는 보석을 찾은 건데, 왜 없애?"

아이에게 틀린 거는 보석이라고 말한다.

옆에 있는 아이는 100점이었다. 아이에게 말했다.

"어이그, 바보같이 하나도 안 틀렸네."

그러자 아이가 다시 묻는다.

"아빠. 안 틀리는게 좋은거야."

그러면 다시 말한다.

"안 틀린게 뭐가 좋아. 보석을 하나도 못 찾은 건데."

농담반 진담반 이렇게 말하자, 아이가 말한다.

"아빠, 이런 건 보석이 아니야."

그러더니 자기가 모아두던 보석함을 가져온다. 거기에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보석이 잔뜩 쌓여 있다.

"이런 게 보석이거든?"

가만히 지켜보더니 다시 묻는다.

"너 그걸로 아이스크림 바꿔 먹을 수 있어?"

"아니"

"그런데 틀린 문제 찾아내면 나중에 아이스크림으로 바꿔 먹을 수가 있어. 바보야."

아이가 '아 그렇구나' 한다.

그러다니 자기도 틀린 문제가 있다며 보여준다.

"아빠, 이거 틀린 거 사진 찍어주면 안돼?"

그러더니 틀린 문제를 인증으로 사진을 찍었다. 아이가 틀린 문제를 자랑스럽게 펴고 사진을 찍는다. 드디어 웃는다.

"보석은 잘 모아 두었다가, 다시 공부 해야돼. 그거 잊어먹거나 까먹으면 절대 안돼!"

그러자 아이가 말한다.

"어이그, 누가 보석을 잊어버리냐?"

그러더니 틀린 문제에 '브이 표시가 아니라 하트 표시를 해놓는다.

가만보면 학창시절이나, 성인이 된 후나 오답노트가 가장 중요하다. 무언가를 계속 진행하고 반복하다보면 자신이 계속 같은 부분에서 실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되고 지속되면 그것이 더이상, 실수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아이는 수학문제를 배웠지만 나는 인생을 느꼈다. 그렇다.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같은 실수를 하고 있다는 인지조차 하지 못한다. 그것을 잘 모으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만 해도 다음에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는데 말이다.

요즘은 그것을 '메타인지'라고 그럴싸하게 부르지만, 그냥 단순히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지겹게 들었던 말이다.

사람에게는 아는 영역이 있고 알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 또한 자신이 알고 있다고 아는 영역과 알지 못한다고 알고 있는 영역이 있다. 다만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것. 다시 더 깊게 들어가 보자면, 그자체를 모른다는 것 조차도 모른다는 것이다.

가만 보면, '일기'를 쓰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메타인지'를 향상시키는 꽤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살다보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잊고, 어떤 실수를 하고 있는지를 잊고, 어떤 성공을 하고 있는지를 잊는다.

이상하게도 학창시절에 배운 배움의 노하우를 '배움'의 노하우로 그치고 '삶의 노하우'로 사용하지 못한다.

얼치기로 때려 맞춘 정답에 자만하고, 최선을 다한 오답에 좌절하며, 맞춰놓고 성장하지 못하고, 틀려 놓고 성장하지 못한다. 과연 성실하게 답을 적어놓고 그 정답과 오답을 진실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받아들인 정답에 수긍하고 오답에 안도감을 느끼며 다음 단계로 진화해 나가고 있는가.

돌이켜보면 삶이 덧셈, 뺄셈보다 지극히 어려울 것 없는 난이도 임에도 혼자서 정답없는 문제에 직면했다고 착각하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본 헌터 - 어느 인류학자의 한국전쟁 유골 추적기
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녀다. 여인의 머리 쪽에 꽂혀 있는 '은비녀'다. 한 여인과 땅 아래 오랫동안 묻혀 있던 은비녀다. 비녀가 볕을 본 것은 2018년 3월, 67년 만이다. 비녀는 한 다발의 머리카락과 함께 꺼내졌다. 길이는 111.7mm, 두께는 6.3mm다. 어떤 녀석은 88.6mm의 귀이개가 함께 있었다. 여인은 비녀로 쪽을 지고 귀이개도 함께 꽂았다. 귀이개는 왜 꽂았던 걸까. 여인에게는 아이가 있었다. 어떤 비녀는 옥비녀고, 어떤 비녀는 플라스틱 비녀이며, 어떤 비녀는 꽃무늬 비녀다. 여인들은 현대의 귀걸이처럼 취향에 맞는 비녀를 꽂고 거울을 들여다 보았을 것이다. 옥비녀는 갓 결혼한 처자의 것이다. 비녀가 없는 이도 있었을 것이다. 여인의 머리 쪽에 붙어 있어야 할 비녀가 이렇게 무더기로 발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1951년 1월 6일, 설화산 오후 다섯 시에는 온양, 배방, 신창에서 온 86명의 여인이 산을 향해 걸어 가고 있었다. 다수는 기혼이고 비녀를 꽂고 있었다. 여인의 쪽에 함께 꽂혀 있던 귀이개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여인들의 걸음에는 6~9세의 어린 아이도 60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들 옆에 총 든 장정 또한 함께 했다.

아이와 여인을 포함한 이백 여 명은 이곳에서 3246점의 뼈로 발굴되었다. 머리뼈, 치아, 등뼈, 손가락뼈, 발가락뼈, 허벅지 뼈.

아이들의 유해는 여인들과 함께 발굴됐다. 아이는 어미의 품에서 죽었을 것이다. 어떤 머리뼈에는 관자놀이에 나무가 꽂혀 있었다. 이렇게 죽임을 당한 여인들의 나이는 18세에서 24세가 가장 많았고 그뒤로 25세에서 29세가 많았다. 이들이 착용하던 반지나 비녀는 꽤 고급스러운 것들로 학살된 이들이 부유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미의 곁에서 함께 학살 당한 아이는 청동으로 만든 장난감, 종, 구슬 등이 있었다. 그들의 최종목적지는 설화산 구덩이었다. 구덩이에는 M1 소총과 카빈 소총의 탄두가 62개 나왔다. 탄피는 80개 가량 나왔다. 이들을 구덩이로 안내한 이들은 누구였으며, 어떤 이유로 그들은 구덩이에서 최후를 맞이 했을까.

이 지역 남자들은 온양 경찰서로 잡혀간 후 며칠간 구금됐다가 집으로 보내졋다. 이후 '속리산 구경'을 시켜줄 테니, 집으로 가서 먹을 것을 준비해오라는 요청이 있었다. 이렇게 여인들은 도시락을 싸고 은비녀를 꽂고 아이의 손을 잡고 설화산으로 갔다. 아이들은 속리산 구경을 갈 생각에 자신이 좋아하는 장난감 몇 점을 챙겨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설화산 수식 금광에 가로 3m, 세로 6.5m에 바닥부터 차곡차곡 다섯 층으로 나누어 마사토와 진흙, 돌, 지푸라기와 함께 포개졌다. 바닥과 4층에는 불에 그을린 뼈들도 나왔다. 이들이 구덩이에서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이유는 바로 1.4 후퇴다. 부역 혐의자의 가족이라는 혐의다. 시민을 버리고 도망 간 정부가 시민을 부역자로 처벌한 것이다. 쉽게 비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진짜 비극 앞에서 대체로 숙연해진다.

한 아무개는 사망자 명단에 포함되지 못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숙부, 숙모, 고모가 모두 몰살자 명단에 속해 있으나, 그는 명단에 속하지 못했다. 맹씨 가족이 잡단 처형되는 중에서도 그는 사망자 명단에 속하지 못했다. 73년 전, 그의 가족들과 함께 사망한 그는 누구인가.

1951년 1월 4일. 북한군이 서울을 재점령한 그날, 충남 아산군 배방면에는 그의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숙부, 숙모, 고모, 삼촌 등이 있었다. 이렇게 열한 명은 모산역 곡물 창고에 끌려간다. 창고 안에는 이미 200명의 사람이 있었다. 이들 또한 부역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개'는 왜 명단에 포함되지 못했을까. 아무개는 수정란 세포로 어머니의 자궁 내벽에 착상된지 36주가 지난 태아였다. 세상에 나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9개월 어느 날, 아무개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함께 생을 마감했다. 태어나기도 전에 국가에 버림을 받은 것이다.

아산군의 중심지인 온양읍을 비롯해 염치면, 탕정면 등에서는 치안대가 조직되어 부역자를 체포했다. 체된 이들은 임시구금시설에 감금되거나 그릇을 굽는 가마에 감금되고 유치장, 경찰서 뒷마당, 인금 양조장에 구금되었다. 이들은 구타와 전기고문이 동원된 조사를 받았다. 이렇게 조사를 마친 주민들은 1950년 10월 중순에 매일 40~50명 씩 트럭으로 옮겨져 배방면 남리 성재산으로 끌려갔다. 그들 또한 설화산 그들과 마찬가지로 최후를 맞이 한다.

이들이 속한 '아산'지역은 1.4후퇴 당시 재점령당하지도 않은 지역이다. 그러나 그들은 부역 혐의를 받고 집단 희생을 당한다. 이 과정에는 '유해진'이 있었다. 그는 온양 경찰서 신창지서 주임이었다. 당시 스물 다섯의 나이였다. 그는 1950년 10월 20일 오후 7시 경, 오목리에 거주하던 옥화를 비롯한 60명을 끌어내 오목리 앞산에서 총살했다. 이틀 뒤 오전 5시에는 시우와 그외 50명을 끌어내 염통산 방공호에서 총살 했으며 1951년 1월 15일에는 구금되어 있던 이중 중빈을 포함한 6명을 의용경찰로 근무하던 경찰관 오씨와 정씨를 시켜 총살 시켰다. 또한 창고 안에 있던 부역자와 그의 가족 30명을 여동산에 연행하고 소총으로 학살했다. 또한 이중 일부에게는 석방금 9만환, 10만환 등을 받고 석방했으며 12월에는 정부보유미 424가마를 불법 횡령하기도 했다.

그는 검찰 조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4후퇴 수복 후 신창에 돌아와보니 우익단체에서 부역자 800명을 감금하고 있었는데, 그 중 600명을 인수 받았을 뿐입니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가만히 보면 가해자도 피해자도 너무 어린 나이지 않은가, 생각한다.

지금이라면 아직 어린애 취급 받을 나이에 너무나 비극적인 일의 주역이 된다는 사실을 보면 너무 안타깝다.

2010년 부모보다 가난한 세대, '헬조선'이라는 말을 들을 때면, 과연 '헬'이라는 말이 100년 전이 아니라 현대에 사용하는 것이 맞을까 싶기도 하다.

고경태 작가의 '본 헌터'는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다가 묵직하게 내려 앉는 책이었다. 또한 다양한 사건의 중심 인물을 1인층으로 현대와 과거, 또한 발굴자의 과거로 시각이 변화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 들도록 한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이칼호에 비친 내 얼굴 끝나지 않은 한국인 이야기 3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산불이 나면 모든 동물은 산불을 피해 도망을 간다. 풍뎅이는 반면 산불 난 곳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알을 낳는다.

이 시대 지성인이던 '이어령' 선생은 경쟁력과 생존력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경쟁력과 생존력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비슷하지 않다는 것이다. 힘의 논리로 봤을 때, 공룡이 사라진 자리에는 보다 더 강한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공룡이 사라진 자리 뒤에 더 작고 나약한 종들이 번식해 갔다. 남들보다 뛰어난 경쟁력이라는 것은 때로 생존력 앞에 무력할 뿐이다. 남들이 피해간 척박한 곳에 자리잡고 적응하는 생존력은 결국 경쟁자 또한 이기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싸우지 않고 이기는 종인 것이다. 어떤 경쟁자도 '환경' 앞에 무력하다. 노자의 도덕경에는 이와 같은 표현이 있다.

'누군가 너에게 해악을 끼치려거든 앙갚음하려 들지마라. 강가에 고요히 앉아 강물을 바라보아라. 그럼 머지 않아 그의 시체가 떠내려 올 것이다. 강한자가 살아 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고로 가장 강한 자는 경쟁 관계에서 우위에 서는 것이 아니다. 가장 강한 자는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다.

풍뎅이가 산불이 난 자리를 찾아가는 이유는 그곳이 안락하고 좋기 때문이 아니다. 그곳이 척박하기 때문이다. 경쟁자와는 상관없이 자기 자신과의 경쟁을 하는 것이다. 가장 척박한 환경에서 잘 적응하는 과정은 때로는 어떤 경쟁자와의 대립보다 위험하고 어려울 수 있지만 환경에 적응하고 나면 그 뒤에는 어떤 경쟁자도 상대할 수 없는 생존자가 된다. 날지 못하고 뒤뚱뒤뚱 걸어 다니는 새, 펭귄은 자신의 천적을 피해 스스로 영하 70도의 추위로 걸어 들어갔다.

모든 투쟁의 흔적은 상흔이 되어 자리에 남는다. 이 상흔은 치열한 환경과 다툼의 흔적이다. 이렇게 호랑이는 날카로운 송곳니와 발톱이라는 상흔을 남겼고 기린은 커다란 목을 남겼다. 자신을 위협하는 환경에 적응하고자 했던 수많은 세대의 상흔이다. 이렇게 우리 인간에게도 남은 '상흔'은 '지성'이다. 이런 '인류학적인 진화'의 흔적은 승리의 표식으로 여겨지지만 바뀐 환경에서 이겨내기 위해 가져야 했던 변화의 흔적이다. 진화론적으로 진화를 얻어내기 위해, 개체는 무엇을 희생해야 하는가. 그 희생은 영광만큼이나 처절하다. 환경에 적합한 하나가 후대에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서는, 하나의 돌연변이를 제외한 나머지 전체의 희생이 필요하다.

환경이 변한다. 개체가 변한다. 개체의 포식자가 변한다. 결국 환경에 더 적합한 것이 살아남을 뿐, 경쟁자와의 경쟁에서의 승리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진정한 승리는 아니다.

갑자기 기후가 더워지면 어떻게 될까. 갑자기 기후가 더워지면 기존의 식물들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물부족으로 인해 모두 도태된다. 이때 물 부족과 강한 햇빛 조건에 적합한 돌연변이 식물이 살아 남는다. 이 돌연변이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게 되는데, 이 돌연변이가 살아남게 된 이유는 바로 '커다란 키' 때문이다. 커다린 키는 수분 증발을 최소화하고 더 많은 햇볓을 포획한다. 또한 효율적인 광합성을 가능하게 한다. 높은 키는 바람에 의한 수분 증발을 줄이고 경쟁자와의 경쟁에서도 유리한 고지에 들어서게 된다. 반면 이 나무에 열리는 나뭇잎을 먹고 자라는 '기린'의 입장도 변화된다. 기존의 경쟁력은 더이상 경쟁력이 될 수 없다. 자신이 주로 먹던 식물들이 모두 말라 죽거나 높게 형성되자, 목이 긴 '돌연변이'를 제외한 나머지 식물들은 모두 도태되거나 굶어 죽는다. 이렇게 변화된 환경은 척박함에 익숙한 소수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고 결국 소수는 다수가 되어 대세가 된다. 그것이 기린이 목이 길어진 이유이며, 호랑이의 발톱이 날카로워진 이유이고, 인간의 지성이 뛰어나게 된 이유다. 결국 결핍에 대한 적응력과 환경 변화에 대한 적응력은 어떤 경쟁에서보다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 할 수 있게 한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경쟁자는 '주변'이 아니라, 환경과 자신일 뿐이다.

한국인의 경우, 여러 민족 중 가장 눈이 작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부가 밝고 맑은 편에 속한다. 코는 짧고 얼굴은 둥글다. 당연히 한국인의 외형을 일반화 할 수 없으나 대체로 이런 특성이 많다. 이런 외형적 특성은 바이칼 호 주변의 찬바람과 같은 혹독한 환경을 견디면서 생겼다. 춥고 바람이 많이 부는 지역에서 생활하는 민족은 대체로 낮은 온도와 강한 바람에 대응하기 위한 신체적 특성을 발달시킨다. 눈이 작고 피부는 희고 얼굴은 동그랗다. 코는 코는 짭다. 시베리아에 서식하는 동물들 역시 두꺼운 체지방층과 짧고 넓은 몸통, 작은 눈을 가진다. 결국 하루와 한 달, 일 년이라는 차이는 어쩌면 무시해도 좋을 만큼의 작은 변화를 가져 올 수 있으나, 그것이 지속적이고 꾸준하며 반복적으로 환경에 노출된다면 그것은 장기적이 관점에서 꽤 가시적인 변화를 이끌어낸다.

환경은 공간 뿐만 아니라 시간도 포함한다. 실제 과거와 현대의 한반도인의 외형은 달라졌다. 대표적인 변화는 평균 신장의 증가다. 20세기 중반 이후에 한국의 빠른 경제 발전은 식생활을 크게 개선했다. 이 결과 성장기 아동과 청소년의 신장은 과거에 비해 크게 달라졌다. 미적 기준 자체도 바뀌었다. 과거 미인 기준은 아담한 '입'과 '둥근 얼굴', '수수한 눈'이었다. 현대의 미는 그와는 정반대다. 두툼한 입술, 날카로운 턱선, 진한 눈꺼풀이 현대의 미의 기준이다. 이는 미디어의 발달로 미의 기준이 글로벌화 됐기 때문이다. 또한 성형 수술과 화장품 증가, 시술 등 다양한 기술적 요인도 한몫 했다. 현대에서 '외형'은 또다른 의미에 '경쟁력'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외모'만 가지고도 '큰돈'과 '영향력'을 갖는다. 불과 얼마 전인 과거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사회적 변화는 사람들이 외모를 경쟁력 중 하나로 여기게 했다. 이런 관심은 실제 사회적 현상이기도 하다. 이 사회적 현상은 흔히 '외모지상주의'라고 한다. 서양보다는 동양이, 동양 중에서도 '한국'이 유독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그 이유로 '관계를 중요시 하는 문화'에서 비롯된다. 통상적으로 쌀을 최초로 재배한 지역은 중국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후난성 옥천암 동굴에서 9000년 전 볍씨가 출토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한반도에서 발견된 소로리 볍씨는 약 1만 3천년에서 1만 5천년 전 것으로 밝혀져 중국 후난성에서 발견된 볍씨보다 2000년에서 4000년이나 앞서다. 이는 한반도의 쌀농사 문화가 얼마나 오랜 기간 지속 됐는지를 말해준다.

쌀농사는 관개사업을 비롯해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는 공사를 필수적으로 필요로 한다. 이 과정에서는 '수직상하적' 관계를 중요시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형성을 몹씨 중요하게 여긴다. 쉽게 말해, 우리는 호칭에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 단번에 확인할 수 있도록 한다. 누구의 형제인지, 성별은 무엇인지, 나이는 누가 많고 누가 적은지, 이 모든 것을 한번에 확인할 수 있는 호칭을 따로 부른다. 그리고 그에 맞는 '술어'와 '명사'를 선택하여 '압존법' 등을 활용하여 관계 형성을 더 단단하고 견고하게 만든다.

이렇게 관계를 세분화하고 그 위치를 명확하게 하는 언어는 기껏해봐야, 중국어와 한국어에 정도에서만 확인이 가능하다. 쉽게말해 고모, 이모, 숙모는 일본어에서 'おば'로 통칭한다. 또한 영어에서는 'aunt', 프랑스 말에서는 'tante'로 사용한다. 남자 형제와 여자 형제일 때도 손윗사람이 누구인지에 따라, 여동생, 남동생, 오빠, 언니, 누나, 형 등으로 구별된다. 이처럼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는 다른 이들보다 '체면'이나 '외모'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다. 우리가 지금의 우리가 된 이유는 아주 치열한 생존 매커니즘의 결과물이다. 이런 변화는 지금 이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 우리는 단기적으로 '경쟁자'를 이기기 위해, 발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환경에 적합 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독려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면 때로는 척박한 환경이 더 생존성을 키우는 강인한 '어머니'가 되는 경우가 있다. 고로 나의 생명력을 길러주는 것은 포근한 보금자리가 아니라 척박한 환경이다. 만약 내가 서 있는 환경이 척박하다면 그것이 나의 생명력을 길러주는 감사한 환경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거기에 적응을 할 수 있다면 말이다. 고로 생존은 '환경'의 탓이 아니라, 내 적응력의 탓일 수도 있다. 경쟁자에게 친 덫에 자신이 빠지지는 말자. 변화된 환경은 어쩌면 내 천적과 경쟁자를 모두 없애주는 최고의 환경일 수도 있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몽어스 크루원의 일기 1 - 첫 번째 우주 비행 어몽어스 크루원의 일기 1
마크 파워스 지음, 한성희 옮김 / 서울문화사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침 5시 50분이 되면 로봇청소기가 돌아간다. 모터 출력은 최대치다. 큰 소리가 난다. 청소기가 돌아가면 자고 있던 아이들이 깬다. 6시가 되면 아이들은 '오늘의 학습'을 가지고 온다.

한동안, 아이들은 오늘의 학습을 한다. 대략 30분 정도가 걸린다. 아이들이 눈을 뜨자마자, 학습을 하는 이유는 학습이 끝나지 않으면 학교가 끝난 뒤에 놀지 못하고 학습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학습이 끝나면 '그림일기'를 쓰거나 동화책을 읽는다. 나 또한 옆에서 책을 읽는다. 아이에게 너무 가혹한 스케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과정에서 소리를 치거나 강제로 시키지 않는다. 아이에게 선택권을 준다.

"하는게 좋지 않나.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않아도 돼. 잘 생각해보고 결정해."

그러면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곰곰히 생각하다가 하겠다고 한다.

아침부터 시끌시끌하다. 고로 책을 읽어도 머릿속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냥 가볍게 읽고 넘긴다. 그렇게 아침 '할일'하는 타임과 독서하는 시간을 가진다.

일곱 시 반이면 아침 식사를 한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아이들은 자기 전에 식탁 위에 알림장을 꺼내 둔다. '아빠가 확인해야 하는 서류'다. 서명할 것은 서명한다. 그날 학교에서 있을 스케줄이나 일정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한다. 나중에 준비해야 할 것은 따로 빼놓는다.

식사를 마치면 아이들은 세수와 양치질을 한다. 또한 미리 꺼내 놓은 옷으로 갈아 입는다. 옷을 갈아 입으면 알림장은 가방에 집어 넣는다. 가방에 집어 넣을 때 가방 정리도 한다. 친구들과 같이 만들었던 색종이, 장난감, 쓰레기 등을 정리한다.

옷을 갈아입을 때까지 안락의자에 앉는다. 책을 읽는다. 아이가 지나가며 말을 건낸다. 가벼운 대화다.

학교 준비는 철저하게 본인이 하도록 한다. 옷 입고 가방 준비도 모두 스스로 하게 한다. 규칙이 있다. 모든 해야 할 일이 완벽하게 끝나면, 그에 맞는 '완벽한 자유시간'을 준다.

아침에 해야 할 일은 이렇다.

일기쓰기, 독서, 오늘의 학습.

다시 말하지만 강제적으로 시키지 않는다. 권유하고 선택하게 한다. 그 과정에 유도는 존재한다. 그리고 했는지만 확인만 한다. 결과에는 간섭하지 않는다. 숙제를 다하면 놀이터에서 놀아도 좋고, 바닷가에서 모래를 실컷 만져도 좋다. 옷이 더러워지거나 손과 발이 더러워지는 것은 괜찮다. 어차피 집으로 돌아가면 샤워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다 끝나면 만들기나 소꿉놀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어디서 보건데, 아침에 쓴 일기와 저녁에 쓴 일기는 완전히 그 성격이 다르다고 한다. 아침에 쓴 일기는 이성적이고, 밤에 쓴 일기는 감성적이다. 대체로 밤에 일기를 쓰는 것을 사람들은 선호하지만 밤에 일기를 쓰다보면 너무 감성적으로 하루를 판단한다. 친구랑 싸웠거나 속상한 이야기를 잔뜩 적어 놓는다. 다만 아침에 글을 쓰면 차갑게 감성이 내려 앉아, 그날의 계획이나 목표를 쓰게 된단다. 숙제나 해야 할일은 '저녁'이 아니라 '아침'에 하는 편이 좋다. 모든 에너지를 쏟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냥 쉬는 것'이 최고다. 거기에 앉아서 해야 할 일이 남았다는 부담이 있다면 반드시 거부감으로 돌아온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장 먼저 일과를 묻는다. 아이들이 주절 거린다. 친구 이야기와 선생님 이야기를 한다. 가만히 듣고 있는다. 또한 아이가 배웠다고 하는 어떤 주제에 대해 자꾸 딴지를 건다.

"아빠!, 줄을 설 때, 팔을 벌려야 돼."

아이가 이렇게 말하면 꼭 딴지를 건다.

"왜? 팔을 왜 벌려야 하는데?"

"선생님이 이렇게 하는 거래."

"왜? 선생님이 왜 그렇게 해야 하는 거래?"

"그건 모르지"

"모르는데 왜 해? 다율이는 몰라도 그냥 하는 사람이었어? 선생님한데 왜 해야 하는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

"아, 맞다. 내일 물어 볼려고 했는데, 깜빡했어. 내일 물어볼꺼야."

그러면 아이가 다음날 선생님께 물어 본다. 행위에는 '본질'과 '목적'을 확인하는 것이 반드시 중요하다. 왜 그것을 해야하는지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질문에는 어떤 교육 철학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냥 일종에 대화 습관 같은 거다. 또한 반응이 재밌기도 해서다. 가끔은 괜히 반대가 될만한 답을 내놓는다.

"아빠, 발표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알아?"

"발표할 때는 친구랑 딴짓하면서 발표하는 거 아냐?"

그러면 아이는 아니라고 정색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건데?"

그러면 아이가 줄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한다.

교육학에서 가장 효율적인 학습법이 '교육'이라고 한단다. 다시 말해서 어디서 듣거나 보는 것보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교육법이란다. 고로 일부러 틀린 대답을 말하고 왜 그런지 설명을 듣는다.

여기에는 교육철학이 있느냐, 그렇지 않다. 그냥 그렇게 말하는 것이 재밌고 그 반응을 보려고 하는 일일 뿐이다.

아이가 집으로 돌아오면 외투를 걸어 놓고, 책가방에서 알림장을 꺼내 놓는다. 책가방은 현관 문 앞 신발장에 나란히 정리한다. 모든 해야 할 일을 다하면 선택권을 준다.

"밖에서 놀거야? 씻고 쉴꺼야?"

아이가 대답하는 대로 한다. 아이가 샤워를 한다. 깨끗하게 씻고 나오면 머리를 말려준다. 그 전까지 책을 보고 있는다. 아이가 깨끗이 씻고 나오면 다음날 학교 갈 때 입을 옷을 꺼내 놓는다. 그 쯤되면 3시다. 3시에는 청소기가 돌아간다. 청소기가 돌아가면 바닥에 있는 물건을 빨리 치워야 한다. 그럼 자연스럽게 아이들은 집안일을 시작한다. 옷을 세탁기에 넣고 정리를 한다. 이렇게 정리가 모두 끝나면 그때부터는 자유시간이다.

일을 하러 나갈 때가 되면 아이는 무한대의 놀이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물론 아침에 모든 것이 끝났을 때다. 모든지 다 해도 좋다.

단, 결코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은 할 수 없다. 일단 중요한 것은 우리집에 전자기기 충전선은 모두 '세탁실'에 있다. 세탁실의 깊은 곳에 C타입 충전선과 라이트닝 충전선, 스마트워치, 스마트폰 충전기가 있다. 고로 집 전체에 전자기기가 없다. TV는 당연히 없다.

아이들이 잠에 들 때는 책을 읽어준다. 또래 책을 읽어주는 일이 힘들 때는 오디오북을 틀어준다. 아이가 잠에 든다. 그러면 몰래 일어나 그때서야 스마트 기기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한다.

몇 일 전에 하율이가 서점에서 '어몽어스'를 사야 한다고 했다. 어찌나 절실하게 찾던지 점원 언니에게 어몽어스를 한참 설명했다. 언니가 묻기에, 어몽어스는 워낙 많아서 어떤 걸 찾는지 자세히 알아야 한다고 했다. 어찌됐건 본인이 생각하는 책을 하나 사고 왔다. 몇 일 간 그 책을 읽지 않았는데, 지난 주에는 그 책을 읽어달라고 가져왔다.

읽었다. '어몽어스', 어린이가 읽는 책인데, 이렇게 재밌단 말이야.

어휘가 조금 쉽고 내용이 단순해서 그렇지. 내가 재밌다고 생각하는 구성이 어린이 책에서도 그대로 있었다. 아이에게 읽어주면서 극중 주인공인 '빨강'과 '파랑' 누가 범인일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개인적으로 아이보다 내가 더 재밌게 읽었다. 1권에서 내용이 정리가 됐는데, 2권도 있다고 한다. 2권에 내용도 너무 궁금한데, 아직 하율이가 2권을 사고 싶다고 하진 않는다. 나중에 서점에 가면 하율이에게 2권을 읽어 볼 생각이 있는지 묻고, 사서 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렉카 김재희 케이스릴러
김달리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천하대세 분구필합 합구필분(天下大勢, 分久必合, 合久必分)

무릇 천하대세는 합쳐지면 반드시 흩어지고, 흩어지면 반드시 다시 합쳐진다. 이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의 도입부다. 영원한 것은 없다. 천하대세 또한 마찬가지다. 기존 질서가 영원히 지속되는 일은 없다. 기존 질서가 '통합'이라도 언젠가는 '분열'이 되고, 기존 질서가 '분열'이라도 언젠가는 '통합'이 된다.

'21세기'는 '파편화'의 시대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인류의 역사는 '분열'과 '통합'을 반복했다. 시기에 따라 '분열'되고 합쳐진다. 어떤 시기에는 '채집'과 '수렵'이 옳다가, 어떤 시기에는 '농사'가 옳다. 어떤 시기에는 '농경민'이 세계를 제패하다가, 어떤 시기에는 '유목민'이 세계를 제패한다. 한 동안은 '대륙세력'이 세상을 지배하다가 갑자기 '해양세력'이 세상을 지배한다. 이런 반복은 꾸준히 있어왔다.

봉건국가인 '네덜란드'가 중앙집권 국가인 '영국'에 세계의 패권을 넘겨준 사건은 시대가 바뀌면서다.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거나,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일들은 반복되며 증명한다. 한때는 '통합'이 세계적 추세였다. '세계화'라는 말은 보편적 가치였다. 모든 세계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질서에 반하는 경우, 시대착오라고 여겼다.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파편화'가 대세다. 세계 뿐만 아니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돈과 권력, 정보는 중앙에서 개인으로 넘어간다. 실체가 어떠하든 '탈중앙화'를 외치는 비트코인이 1억을 넘는 시대이며, 공중파 방송국이 '인플루언서'에게 정보 제공자로의 역할을 넘기는 시대이다. 알고리즘은 점차 '개인 맞춤 정보'를 제공한다. 좌는 좌끼리, 우는 우끼리, 여성은 여성끼리, 남성은 남성끼리, 청년은 청년,노년은 노년, 소년은 소년. 각자 자신들의 세상에 묶여 파편화 된다. 고로 세대 갈등과 남녀 갈등, 인종 갈등, 국가 간의 갈등, 저출산, 고립, 양극화는 그런 의미에서 필연적이며 세계적인 추세다.

이런 파편화 된 세계에서 이슈에 대해 빠르게 정리하여 영상을 만드는 인플루언서들이 있다. '사이버 렉카'다. 사이버 렉카는 매스컴에서 '나쁜 쪽'으로 비춰진다. 개인적으로 꼭 나쁘다고 보지는 않는다. 개인의 시대에서 필연적인 과정이며, 누군가는 개인 인플루언서의 음악을 듣고, 누군가는 개인 인플루언서의 '글'을 읽고, 누군가는 개인 인플루언서의 예능을 본다. 권력이 중앙 집권되어 있던 시기에서 점차 파편적으로 나눠지는 그 과도기적 시점에서 그에 따른 부작용과 정화작용은 피할 수 없는 절차다.

모든 것에 양과 음이 있듯, 당연히 이들에게도 좋은 면이 있다. 사이버 렉카가 비난을 받는 이유는 조회수를 이유로 자극적인 컨텐츠를 제작하거나, 때로는 팩트 확인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잊혀질 뻔 한 이슈를 공론화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물론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짜집기 편집하여 송출하다보니 내용 상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모든 과도기에는 이러한 문제가 항상 나오며 그 문제는 때로는 기존 질서와 부딪치며 큰 소음을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미 시대가 달라지는 일을 과거도 돌릴 수는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