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이전 확장판 - 자산을 지키는 가장 완벽한 절세 비법
이장원.이성호.박재영 지음, 안수남 감수 / 체인지업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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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기를 겪으며 우리에게 익숙한 '아스트라제네카'라는 회사가 있다. 이 회사는 스웨덴 제약회사인 '아스트라AB'를 전신으로 갖는다. 이 회사의 창업주는 1984년 사망한다. 이때 그는 자녀들에게 회사 승계를 한다.

이 과정에서 당시 최고 세율인 70%의 상속세의 의무가 주어졌다. 상속세를 납부하기 위해 자녀들은 회사 주식을 매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소식이 주주들에게 전해지자 시장에서 투매가 일어났다. 주주들은 자신들의 주식을 조금이라도 고가에 팔기 위해 주식을 던지기 시작했다. 주식은 급락했고 보유 주식의 매각 대금으로 상속세를 납부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자 결국 승계를 포기한다.

이 과정에서 회사는 영국으로 넘어간다. 영국의 제네카는 회사를 인수하여 '아스트라제네카'라는 지금의 제약회사가 탄생했다. 스웨덴 입장에서 엄청난 자산이 해외로 유출된 셈이다.이 과정에서 스웨덴의 여러 기업들은 국가를 떠나기 시작했다. 2005년 스웨덴은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상속세를 폐지한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냐는 말이 있다. 세금 무서워 '사업' 못하겠느냐,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다만, 개인적으로 '세금'에 크게 데여 본 적 있던 터라 이 말에도 어느 정도 공감을 한다.

이런 이슈는 비단 해외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경우가 있다. 손톱깎이로 유명한 쓰리세븐의 경우도 비슷하다. 2008년 쓰리세븐 또한 150억원의 상속세를 납부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회사 지분의 전량을 매각했고 이후 적자 기업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한진 그룹의 유족 또한 2700억 원 규모의 상속세를 납부하기 위해 정석 기업 지분을 전량 매도했다. 넥슨의 고 김정주 회장의 유족들의 경우 상속재산 10조원 중 6조원을 상속세로 내야 했다. 이 과정에서 7조 7000억원을 정부에 물납한다. 이 과정에서 기획재정부는 넥슨 그룹의 지주 회사인 NXC의 2대 주주가 됐다.

수 천억 혹은 수 조원 단위의 대기업을 말할 것 만은 아니다. 기존에 '상속세'는 '부자세'라고 하여 돈 많은 이들이 납부하는 세금으로 여겨졌다. 우리의 특이한 인구구조 덕분에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와 더불어 이후 세대로의 '부의 이전'이 시작됐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커다란 돈의 파이가 '세대'를 건너 가길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우선 경제를 이끌던 과거 '대기업'들과 '상속인'들의 이슈가 뉴스를 떠들고 이후 다수의 국민에게도 이런 이슈가 서서히 일어나고 있다.

이제 상속세는 '일부'의 이슈가 아니다. 넘기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동시에 고민하는 꽤 해당되는 국민이 많은 이슈다. 1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상속세를 내는 지인과 친하게 지내라'라는 말이 있었다. 상속세가 부유한 일부의 세금이라는 인식이 강했다는 의미다. 다만 현재의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2020년 연간 사망자 수는 약 30만 5천명이다. 상속세 신고 인원 또한 3.7%에서 5.2%로 올랐다. 이 숫자는 증가율로 봤을 때 40%가 넘는 수치다. 2년만에 40%의 성장은 엄청나다.

대한민국의 상속세율은 대체로 '경제적, 사회적 배경'이 있다. '고도성장'과 '인구구조의 변화'와 엮어 볼 수 있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뤘다. 이런 경제 성장은 많은 부의 축적을 이루게 했다. 다만 성장의 과정에서 일부 계층이나 개인에게 부가 집중되는 양이 많았다. 상속세는 이런 부의 집중을 완화하는 역할을 했다. 불평등을 줄이고 세수를 확보하는 수단이었다. 이렇게 걷힌 세금은 사회 복지나 인프라 투자에 쓰여지고 공공 서비스에 재투자 됐다.

한국의 인구 구조도 한몫했다. 한국은 초고속으로 고령화 사회로 나아간다. 인구는 감소하고 경제 성장은 둔화된다. 이에 따라 다양한 사회복지 비용이 필요하다. 노인복지, 건강 보험, 연금 등 다양한 사회복지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지출의 증가는 너무나 당연하다. 이러한 경제적 사회적 배경을 보자면 우리의 상속세율은 단순한 세수 확보 이상의 목적이 있다. 크게 보자면 부의 공정한 분배, 사회적 안정성 유지가 그 목적 중 하나다. 문제는 과거에는 일부에게 해당되던 이슈가 이제는 거의 전국민에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OECD 38개국 중 상속세가 없거나 폐지될 예정인 국가는 17개국이나 된다. 또한 대부분 상속세가 낮고 직계 상속에 대해서는 낮은 상속세를 부과한다. 우리의 조세수입 중 상속세와 증여세는 2.42%로 OECD 회원 국중 가장 높다. OECD 평균인 0.42%와 비교했을 때도 5.7배 이상이다. 다만 사회가 경쟁적인 분위기를 거쳐 오면서 이러한 본래 의도와 목적에 동의하는 이들이 얼마나 있는지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어쨌던 한 쪽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다른쪽 호주머니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치열한 사회를 살아온 세대들에게 어떤 식으로 공감 받을 수 있을지 고민 해야한다. 절세와 탈세는 얼핏 비슷해 보이는 말장난 처럼 보이지만 그 본질은 완전히 다르다. 절세는 법의 테두리에서 합법적으로 세금 부담을 최소화하는 현명한 방법이다. 여기에는 세금 공제, 세금 혜택을 활용한 꽤 현명한 방법이다. 이에 반해 탈세는 불법이다. 단순히 세금을 회피하는 행위이며 거짓 정보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속이는 기만행위다. 이 두가지는 세금을 많이 내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겠지만 불필요하게 세금을 많이 내는 것을 꼭 도덕과 연결시킬 수 많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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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셀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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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오셀로'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못 고치는 병이라면 슬퍼할 필요도 없다."

삶에 대한 능동성에 대한 울림을 준다. 모든 병에 슬퍼할 필요는 없다. 살다보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 어찌됐건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가 있다. 다시 어떤 경우에는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일도 있다. 우리가 슬퍼해야 하는 일은 스스로 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않는 일이지, 할 수 없는 일을 하지 못했을 때가 아니다. 모든 상황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은 슬퍼할 필요는 없다.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가 아니라,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가 중요하다.

같은 사건이라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 시선이 다르니 대응 방법도 다르다. 대응없이 주어진 상황에만 반응하는 것은 더 나쁜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보다 나쁘다. 결국 나쁨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일이다.

오셀로의 비극은 그가 능동적이지 못함에서 시작한다. 주체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언제나 휘둘린다. 자신의 주변 환경과 인물들에 쉽게 휘둘린다. 오셀로는 결국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데 실패한다. 누군가에 의해 쉽게 조종 당하며 사랑하는 이와 주변 인물을 잃어 버린다. 때로 우유부단함은 '악'보다 더 '악' 할 때가 있다.

만약 눈먼 황금이 탁자 위에 놓여 있다고 하자. 그것이 나의 것이 아님을 누구나 알고 있다. 누구도 황금의 출처를 모르고 누구도 자신의 행동을 규견하지 않을 때, 과연 대부분의 사람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극단적으로 황금으로 예를 들것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양심을 스스로 내려 놓는다. 비어 있는 밤거리 무단횡단을 하거나 가벼운 담배꽁초를 튕겨 버리고 때로는 혼잣말로 타인을 비방하기도 한다. 혼자라고 여겨질 때 대부분의 사람은 '선'과 '악' 중 더 쉽고 이득이 되는 편을 택한다.

순자가 '성악설'에 의해 사람에게 교육이 필요하다 주장도 일맥한다. 그렇다. 누구나 자신이 혼자이거나 자신에게 모든 걸 주체 할 수 있을 때, 거리낌없이 '악'을 선택할지 모른다.

여기서 딜레마가 생긴다. 과연 '악'을 행하도록 '유도'한 이가 나쁜가. 악을 행한 이들이 나쁜가. 이 딜레마에서 어느쪽을 선택하더라도 도덕적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간혹 '악'을 행한 이가 나쁘다면 '정치적 선동'에 의해 움직이는 대중은 무엇이 되는가. 만약 악을 행하도록 한 이가 나쁘다면 모든 범죄는 '수동적 행위'일 뿐이된다. 고로 이 딜레마에서 '오셀로'는 악을 행한자이다.

악을 행한 자거나 악을 행하도록 한자, 둘 다 나쁘다고 할 수도 있다. 혹은 이 둘 모두 유혹에 미약하여 '악'이 아닌 얼굴로 서로의 악행을 주고 받을 수 있다. 이런 무지는 과연 용서 받을 수 있는가.

오셀로는 꽤임에 빠져 사랑하는 자를 죽이고, 자신의 우유부단함으로 가장 신임하는 친구도 잃는다. 결국 그 무엇이 되더라도, 무능과 우유부단함은 때로 '악'만큼이나 악하게 만든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복음을 전도'하여 많은 이를 구하는 것이 '선'이라고 하던가. 이에 정반대라면 누군가를 '악' 자체 만큼이나 누군가를 '악'으로 이끄는 것마져 나쁜 것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현대에 와서 함정수사가 불법인 이유는 이런 비슷한 맥락에서 출발한다. 함정 수사를 통해 누군가에게 '범죄'를 유도하는 행위는 범죄를 저지를 의도가 없는 사람을 범죄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는 자발적 범죄가 아니며 인위적이고 만들어진 범죄로 '선'의 가면을 쓰고 '악'을 만들어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때로 살면서 다양한 유형의 사람을 만나곤 한다. 어떤 누군가는 괜히 '선한 일' 하나 없이도 '착하다'라는 평을 받고, 어떤 누군가는 '악한 일' 하나 없이다 '나쁘다'는 평을 받는다. 대체로 사람들은 고분고분하고 조용한 사람에게 '착하다'라는 평을 주고, 개인의 주체성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행위를 하는 사람에게는 '욕심'의 이름을 빌려 '나쁘다'라는 평을 준다. 이러한 평가는 대체로 '개인'을 기준으로 한다. 자신에게 함부로 할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로 사람을 평가하면서 자신이 말에 순응하는 쪽에 '착하다'라는 평을 붙인다.

극악무도한 범죄자의 옛지인의 평을 들어보면 대체로 '선하다', '착했다'라는 평이 다수를 이룬다. 그 이유는 실제 그 사람이 '선한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언제든 타인에 의해 조종 당할 수 있는 우유부단함을 가졌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다. 그렇게 실제 악을 저지르는 사람은 결국 누가 되는가. 타인에게 그저 순응하고 아무런 비판적 생각없이 누군가의 말을 믿는 사람의 최후는 결국 의도치 않은 '악'이 된다. 결국 '악'은 무엇인가.

악은 '선'을 포함하며, '선'의 얼굴로 저지르고, '선'으로 평가 받으며, 결국 다른 누군가도 '악'으로 끌어들이지 않는가.

고로 자신의 소신과 비판적 의식이 없는 '주체적이지 못한 태도'는 때로 악보다 심한 선, 즉 극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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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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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은 도둑질의 시작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분신'은 제목 자체가 '스포일러'이지만 몰입하는 순간, '제목'은 잊게 된다.

엄마를 닮지 않은 딸의 이야기는 꽤 평범한 가정을 보여준다. 어째서 제목이 '분신'인가,는 몇 장을 더 넘기면 대략 알게 된다.

임야비 작가의 '악의 유전성'의 일부가 떠오르기도 한다. '과학'과 '윤리'의 경계선에 대한 고민을 해 볼 수 있다.

생명공학과 의학에 대해 살펴보면, 꽤 철학적인 질문을 맞이한다. '테세우스의 배' 역설이다. 테세우스의 배의 역설은 이렇다.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후 아테네에 귀환한다. 아테네 사람들은 그가 타고 왔던 배를 보존하기로 한다. 판자가 썪으면 판자를 바꾸고 어떤 부품을 새 부품으로 교체하며 이 배를 보존한다. 이렇게 부품 하나 하나를 교체하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테세우스'가 타고 왔던 그 모체는 완전히 사라지고 '테세우스의 배'라는 이름만 변하지 않고 남게 된다.

그렇다면 그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는가. 만약 테세우스의 배가 더이상 '테세우스의 배'가 아니라면, 언제부터 테세우스의 배가 아니게 되는가. 그 명확하지 않은 경계선을 우리는 구분할 수 있는가.

'불경'의 '금강경'에 따르면 모든 것은 고여 있지 않고 흐르고 순환한다. 우리를 구성하는 원자 또한 한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고 그 형태를 바꾼다. 우리는 호흡하고 배설하고 취식한다. 그 과정에서 어떤 원자는 우리를 구성하다가 밖으로 나가고, 어떤 원자는 다른 것을 구성하다가 우리의 몸으로 들어온다.

자, 어느 순간부터 '나'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 원자를 교환하는 방식은 잠시도 게으르지 않고 꾸준하다. 어떤 세포는 사라지고 어떤 세포는 생겨나며, 어떤 세포는 산화되고 어떤 세포는 환원된다. 이 과정에서 '나'는 꾸준히 교체되는데, 과연 어느 순간부터가 '나'라고 규정할 수 있고, 어느 순간부터가 '나'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

만약 '나'라고 하는 것이 '테세우스의 배'와 마찬가지로 '이름'만 유효하다면 어떤 교체도 허용할 수 있다면 '나'는 결국 '이름'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히가시노 게이고'의 분신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복제된 인간'은 과연 '나'인가.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으면 결국 '나'라고 할 수 있는가. 이 철학적인 질문에 '일란성 쌍둥이'를 키우고 있는 '아빠'로써 사색해보면 이렇다.

일란성 쌍둥이는 한 개의 수정란이 분할되어 형성된다. 쉽게 말해, 인위적으로 똑같은 유전 복제품을 만드는 것과 같이 '일란성 쌍둥이'의 유전 정보는 거의 똑같다. 일란성 쌍둥이는 태어날 때, 유전정보가 거의 동일하다. 초기에 일란성 쌍둥이의 DNA는 100%일치한다. 다만 각각 다른 환경적 요인과 개인적 경험을 겪게 되며 작은 유전 변화가 일어난다.

다시 말해서, '유전 복제'를 통해 '클론'을 만들어 낸다고 하더라도 그 복제품은 결코 '나'가 될 수 없다. 쌍둥이를 키워보면 알 수 있다. 아이가 같은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다고는 하지만 그 성향은 완전히 다르며,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비슷해 보이는 외형도 부모의 입장에서는 확연하게 다른 외형이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두 아이를 동일시 하고 있지 않고 그들 스스로도 상대를 '자신'이라고 인지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시간을 거꾸로 거슬로 올라 갔을 때, 그들이 결국 하나의 세포에서 분할된 두 개의 객체라 할지라도 이 둘을 하나로 볼 수는 없다. 다만 소설에서 '극적인 재미'를 주기 위해 '너는 복제품이야'라는 플롯이 만들어졌다.

유전자 복제에 대한 윤리적인 문제가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다양한 토론이 있어야겠지만 유전복제는 결코 '나'가 될 수 없다. 쌍둥이 어느 하나가 '모체'고 어느 하나가 '복제품'이 되지 않는 것처럼 유전 정보가 같은 여러 인간은 결코 동일인이 아니다. 같은 부품을 사용했다고 해서 모든 스마트폰이 모체와 복제품으로 나눠지지 않는 것처럼 그렇다. 고로 '복제품'은 스스로 특별히 '모체'에 대한 '열등의식'을 가질 필요도 없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분신'은 꽤 많은 생각할꺼리를 독자에게 던저준다. 끊임없이 복제되는 복제품들과 '모체'에 대한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과연 수 십년 전 모체로부터 복제된다면 과연 나의 어머니는 '모체'가 되는가, 혹은 '모체'의 어머니가 되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출산을 했던 '대리모'가 되는가. 키워준 양육모가 되는가. 이런 여러가지 윤리적인 문제는 '과학과 의학의 발전' 만큼이나 중요하다.

소설에는 꽤 인상적인 문구가 하나 나온다.

"거짓말은 도둑질의 시작이다."

모든 문제는 사소한 문제로 시작하지만 그 결과는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진화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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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거인 (15만 부 기념 스페셜 에디션)
프랑수아 플라스 글 그림, 윤정임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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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읽는 것 자체만으로 '경험'보다 더 나은 경험을 만든다. 이 책이 그 책이다.

어휘가 만든 착시 때문에 우리는 종종 '직접경험'이 '간접경험'보다 우위에 있다고 착각한다. 그렇지 않다. 달을 바라 볼 때, 저마다 다른 생각을 갖는다. 누군가는 '달 탐사'를 떠올리고, 누군가는 '서정시'을 떠올린다. 누군가는 '설화'를 떠올릴지 모른다. 육안으로 달을 직접 봤다고 달에 대해 알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의미다. 우리가 '달'에 직접 가본다 한들. 간접 경험은 때로 직접 경험이 대체 할 수 없는 무언가를 준다.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스쳐 지나간 것을 볼 수 있다.

'책'에 갇혀 여행 한 번 해보지 못한 사람이 때로는 여행을 많이 한 이들보다 더 많은 인사이트를 얻는 이유다. 단순히 직접 경험을 쌓았다고 모두 내적 자산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맹인이 읽는 '점자책'이 더 '달'을 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고로 어떤 경우에는 '작가'보다 더 많은 것을 '독자'가 얻을 수 있으며, 실제 기행한 이들보다 기행문을 읽은 이들이 더 많은 것을 얻기도 한다.

최근 읽었던 '먼곳에서'라는 소설에 이어, '마지막 거인'도 그런 류에 속한다. 직접 경험을 상회하는 간접 경험을 얻을 수 있는 책.

단순히 물리적 공간에 대한 여정이 아니라, 시간을 뛰어 넘고 현실을 뛰어 넘는 서사가 있다. 그런 경우는 틀림없이 '여행'이 주지 못하는 다양한 인사이트를 준다.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책을 읽는다. 아이와 함께 양질의 간접 경험을 쌓는다. 같은 생각을 쌓고 같은 것을 본다. 현실에 존재하는 것만 볼 수 있는 이들보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도 볼 수 있는 힘을 얻는다. 2만원도 하지 않는 가치로 이처럼 세 가족이 짧고 간편한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꽤 의미있는 활동이다.

마치 같은 여행지를 다닌 것처럼 같은 추억을 공유한다. 그 여행지는 현실 공간이나 시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굳이 모든 사고를 '현실'에 두는 이들과 강력하게 다른 차이를 갖는다.

'거인'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다. 동서양 할 것 없이 '거인'은 '설화'에 항상 있어왔다. '다름'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피부색이 검은 이를 최초로 만나거나, 피부색이 하얀 이를 최초로 만난다면 분명한 호기심이 생긴다. 호기심은 '모를 때' 발생한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을 때는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다. 마찬가지다. '모른다'는 호기심을 만들지만 '두려움'를 만든다. 이 두 오묘한 감정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설레임'과 같은 감정을 만든다. 그렇게 상상력은 만들어진다.

아치볼드 레오폴드 루스모어는 굉장한 물건을 만난다. 바로 '이'다. '이'라는 것은 '치아'다. 누군가의 어금니다. 그 어금니가 '거인'의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루스모어'는 거인족의 나라를 찾아 나선다.

'여행' 혹은 '탐험'은 '모름'으로 떠나는 여정이다. '모름'은 '설레임'을 만든다. 책과 함께 여정을 하는 독자는 역시 서서히 '서사'를 열어 젖히는 과정에 서 있다. '화자'가 직접 격는 '경험'과 같은 '간접 경험'을 쌓는다.

서적을 통해 '간접경험'이 쌓인다. 험난한 모험은 '역사책'에서 보던 '광경'을 눈 앞에 만들어 낸다. 우리의 뇌가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지 못하고 '부정'과 '긍정'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것을 읽어 낸 순간 그것은 거짓없이 진실한 나의 경험이 된다. 아름답고 설레이는 이 이야기는 한껏 속도를 높이며 달려가다가 절정을 만난다. 새롭게 받아 들여지는 경험이 익숙한 경험과 결합된다. 어디에서 듣기에 우리는 '낯선 경험'을 싫어한다. 가장 낯선 광경에 처 했을 때, 우리의 뇌가 필사의 노력으로 가장 비슷한 기억을 끄집어 온다. 그것을 '데자뷰'라 부른다. 우리의 뇌는 새로운 정보를 '기존 정보'와 결합하는 방식으로 융합과 인식을 한다.

새로운 정보는 기존 정보와 결합된다. 이기적이고 잔인한 인간을 간접정보로 마주하면서 피하지 못할 기존 정보가 끄집어진다. 존재하지 않는 시간과 공간의 자극은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의 기억을 불러 들인다. 우리는 과연 모두가 당당하고 무고한가. 그런 질문이 문뜩 떠오른다.

"침묵을 지킬 수는 없니?"

소통과 이해, 그리고 문화간의 갈등에 대한 한마디 물음. 여기서 침묵은 오해와 불신을 의미한다. 침묵을 깨는 것은 때로 존재하지 않아도 될 것을 존재하게 한다. 탐험가와 거인들 사이에 긴장된 상호작용을 깨버린 무언가. 우리는 '의사소통'이라는 중요한 '키워드'를 멋대로 남발하지만 진짜 의사소통은 상대를 설득시키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 서로를 이해하려 할 때 종종 겪는 어려움은 이처럼 '침묵'으로 상징된다. 상대의 이야기 하나를 듣고 나의 이야기를 하나 넘긴다. 이 의사소통의 본질은 무엇인가. 나의 것을 넘기기 위해, 남의 이야기를 겨우 참아 듣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소통이 아니다. 거기에는 '승리'와 '설득'이라는 목적이 있지, '이해'가 들어있지 않다. 새로운 이방자이자 탐험가의 여행 일지는 그들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한다. 그들과 교류하고 삶과 문화를 이해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이 직면한 위기와 멸종의 위협을 목격한다. 단순한 탐험과 모험의 설레임이 아니라 문명과 그 이면의 문제들, 그리고 다른 존재들과의 공존에 대한 깊은 물음을 제기한다. 인간과 자연과의 조화, 소통과 다름의 인식이라는 심오한 성찰을 담은 이 소설. 이런 다양한 감정은 꽤 값비싼 여행과 직접 경험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봄날, 여덜 살 아이와 거실 안락 의자에 앉아, 다양한 물음과 대답을 해 보았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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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이라는 말에 예민한 당신에게
조정훈 지음 / 모모북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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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나사(NASA)를 방문했다. 케네디는 NASA의 시설을 둘러보며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했다. 그때 청소부 한 명이 바닥을 쓸고 있었다. 대통령은 그에게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그는 대답했다.

"저는 사람을 달에 보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전체'에서 보잘 것 없어도 본질적으로 거시적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는 중이다. 혹은 그렇게 믿어야 한다. 거창하게 미국 이야기를 꺼낼 것도 없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다. 시작하는 이들에게 부분은 너무 작은 티끌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닥을 다지는 중요한 일이며 그것을 뿌리에 두고 열매가 맺는다.

화성이나 달에 사람을 보낸다는 계획도 최초에는 종이와 연필로 시작했다. 시작을 보고 전체를 판단 할 수 없다. 전체를 보면 무게에 짓이겨 하는 일이 초라해 보일지 모른다. 다만 거시적으로 살펴보면 우리는 거대한 탑 아래 가장 단단한 기둥을 짓고 있는 일일 수 있다.

도전하는 것들은 꼭 인류를 대표할 필요가 없다. 단순히 학교 수행평가 일수도 있고 깨지 못한 온라인 게임의 퀘스트일 수도 있다. 어떤 종류의 것이던 목표를 설정하고 수행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인사이트를 얻는다.

그것이 꼭 바라는 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

그것이 꼭 성공에 이르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꼭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곳에서 나오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간과하고 때로 그 과정에서 포기를 선언한다. 사람의 인생은 시작점과 끝점을 찍고 그 점을 잇는 '직선'을 직선으로 긋는 '평면도형'과 다르다. 인생에는 '끝' 점이 없듯, '시작점'도 분명하지 않을 수 있고 그것이 직선이 아니라 곡선일 수도 있다. 내가 그리고 있는 도형이 사실은 '도형'이 아닐 수도 있고, 그것이 때로는 나에게만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사람에게는 각자 자신만의 의미있는 삶이 있다. 법정스님은 '무소유'를 사색하셨고, 워렌버핏은 투자수익률을 바라본다. 이태백은 달을 노래했고 닐 암스트롱은 달을 탐험했다. 각자가 매기는 인생의 가치에 따라, 모든 것에 가치는 정해진다. 요즘과 같이 획일화 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시기에는 승자와 패자가 명확하게 나눠진다. 그러나 모차르트와 아인슈타인 중 누가 승자이며 누가 패자일까. 기준을 '음악'에 두느냐, '물리학'에 두느냐에 따라 둘 중 하나는 명확한 패자고 둘 중 하나는 명확한 승자다. 삶은 그렇게 정의되는 것은 아니다. 비교 대상은 언제나 유동적이다. 각자 사람마다 달라지는 이런 기준은 같은 사람의 다른 시기에도 물론 적용된다. 10대의 나와 20대의 나, 30대의 나가 모두 같은 목표를 갖고 있을 수는 없다. 언젠가는 당장 내일 닥치는 기말고사 성적이 최고 걱정이었다가, 어느 순간에는 외모나 돈, 아이의 성적이 그 대상으로 바뀌곤 한다. 모든 것이 정해지는 바가 없이 언제나 움직이는 커다란 유체 덩어리다.

'무언가 시작'이라는 것은 그것이 '요리'건, '운동'이건 같은 정도의 두려움이 생긴다. 처음 김치를 입에 넣는 아이의 두려움과 처음 달에 사람을 보내는 두려움은 어저면 같은 크기 일 지 모른다. 우리가 공감해야 하는 것은 어떤 것에 도달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감정과 생각 했느냐다. '컨텐츠'와 별개로 새롭게 도전하는 모든 것들을 극복하는 사람에 대한 경외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 수필은 조정훈 작가 님이 일상동안 가졌던 처음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내용을 담고 있다. 목표는 다르고 때로는 그 크기와 종류는 다를 수 있지만 처음하는 것들에 대한 감정은 누구나 비슷할 것이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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