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1 - 개정판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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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손에 안 잡힐만큼 몰입해서 본 책이 얼마만이던가...

몇 번을 서점에서 스쳤으나 선뜻 집지 못한 이유는 분량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일상이 바빠 더욱 그랬다. 몇 번을 스치며 드라마로 제작됐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중에 드라마로 봐야지'

정말이지 큰 일 날뻔했다.

이 소설을 근래 들어 가장 재밌게 읽은 책 중 하나다. 드라마는 보지 못했으나 완독후 드라마도 볼 예정이다.

얼마 전, '인플루엔셜 출판사'에서 '윌라 오디오북'을 통해 '파친코 오디오북'을 공개했다. 덕분에 분량에 부담이 있던 이들도 쉽게 '파친코'를 읽을 수 있게 됐다.

오늘 아침, '파친코 1권'을 드디어 읽었다. 종이책과 오디오북을 번갈아가며 읽었다. 오디오북은 역시나 성우들의 연기가 훌륭했다. 종이책으로 읽는 것 또한 매우 좋았다. 오죽하면 종이책과 오디오북을 병행하며 봤다. 아마 이 소설은 몇 번을 재독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배경은 일제강점기다. '재일교포'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라고 들었다. 다만 첫 배경은 '부산 영도'다. 부산 영도에서 시작한 소설은 한참이 지나도록 그 배경이 옮겨가지 못했다. 무언가 뜨뜻미지근하려나 싶은 소설은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반전으로 속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영화적'이라기 보다 '드라마적'이다. 무슨 말인고 하면, 끝날 즈음 다음 화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한다. 내용상 스포일러를 줄이기 위해 '도서의 내용'은 적지 않겠다. 다만 아름다운 그 시절 일상을 담은 소설이겠다하고 기대하고 읽다가 난데없는 속도감과 긴장감을 만난다. 한참을 몰입해서 소설을 읽다보면 다시 소설은 점차 속도감을 줄이고 일상을 만나게 한다. 긴장감을 살짝 줄이기 시작하면 다시금 속도를 높이고 긴장감을 조성한다.

이 짧은 소설에 이렇게 많은 배경과 반전, 인물을 모두 담았다는 것이 놀랍기까지하다. 도대체 한 권의 책이 맞나 싶을 정도다. 그렇다고 글이 표현이 부족하거나 서투르지도 않다.

걸어가며 오디오북으로 듣게 되면 괜스레 가던 길을 우회하여 한 바퀴 더 돌고 가게 된다. 책을 펼치면 끊어 읽은 부분에 대한 아쉬움으로 다시 한 챕터를 뒤로 가서 읽게 된다.

현재 1권까지만 읽었으나 1권이 끝나도록 왜 소설의 제목이 '파친코'인지, 알지 못하겠다. 책이 너무 술술 읽힌다. 사실 '왜 제목을 파친코라고 지었을까'하는 호기심도 이 소설을 읽게 하는 또다른 재미중 하나다.

이 소설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이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미국 국적의 '이민진 작가'의 글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10살이 되기도 전에 부모님을 따라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갔다는 '이민진 작가'의 배경을 보고 사실 갸우뚱 했던 것도 사실이다.

'한국'에 대한 정서, 심지어 '일제강점기'에 대한 정서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있어서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그 생각이 참 어리석었다고 느꼈다. 1968년생이면 소설의 배경을 전혀 겪지 않은 나이다. 그러나 작가는 독자를 그 배경에 완전히 함께 하도록 완전한 배경을 묘사해 낸다.

겪어보지 않고 어쩜 이렇게 섬세한 묘사를 해냈을지, 과연 그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며 등장인물들은 나이를 먹는다. 이들은 일상에서 역사의 배경에 하나 둘 놓여진다. 전혀 이질감 없이 일상으로 맞딱드리는 '역사'는 그저 '삶'과 '생존'에 지나가는 배경 중 하나다. '역사'를 배우고 공부하고, 읽으면서 그속에 있는 '일반인들의 삶'과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그들이 겪게 되는 현실적인 고민과 생각. 또한 이분법적으로 나눠지는 '이데올로기'와 '여러 정치적, 경제적' 상황들이 단순한 '정보'처럼 나눠 인식할 수 없다는 깨달음도 듣게 됐다.

본 글은 '협찬'에 의해 작성 됐으나 진심 가득!! 과연 정말 최고의 소설이다.

빨리 2권을 읽어야겠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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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족관
유래혁 지음 / 포스터샵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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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수족관'은 보육시설에서 자란 '류이치'가 불가사이한 한 소녀를 만나며 겪는 일을 그려낸다. 배경은 특이하게 '일본'이다. 소설 속 모든 등장인물, 배경이 모두 일본이다. 평소 '일본 문학'을 즐겨 보던 터라 이질감없이 다가왔다. 이국적인 이름과 배경, 간결한 문체는 실제 일본 작가의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다만 소설을 읽으며 몇 번이나 작가 소개를 살폈다. 작가는 한국인이다. 한국인이 맞는지, 어떤 이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쓴 글인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 '유래혁' 작가의 글이다. 이 소설은 도저히 빠르게 읽을 수 없었다. 좋은 의미에서 그렇다. 한 문장 한 문장이 감성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이 많다. 어떤 문장을 만나면 몇 번을 다시 읽고 곱씹었다. 사진을 찍어 두기도 했다. 이 소설이 작가의 첫 장편 소설이라는 점이 믿겨지지 않았다.

주인공 '류이치'는 열 일곱 고등학생이다. 그는 시설에서 생활했다. 카노코와 다이스케라는 친구와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남자 아이다. 특별할 소재 없이 시작한 소설은 주인공이 버스에서 '한 소녀'를 만나며 극적으로 내용 전환이 된다. 소녀는 난데없이 '너 시설에서 살지?'라는 질문을 던진다. 자신이 시설에서 지낸다는 걸, 너무 쉽게 알아챈 그녀를 '류이치'는 기억해 둔다.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여자 아이의 첫인상이다. 이 첫인상은 당황스럽게 시작했으나 더 당황스러운 무언가를 남겼다. 그의 지갑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뒤로 류이치는 '이름' 없는 그녀를 잊을 듯, 잊지 못했다. 오래 남은 첫인상의 당황스러움과 다르게 그녀는 빠르게 흔적을 지웠다. '이름' 없는 것에 대한 망각. 그것이 더 자연스럽고 빠르게 진행된다는 사실을 소설은 말한다.

이름 없는 것에 대한 망각.

'지나치는 인연'에 대한 기억을 가만히 곱씹어 본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맞다. 잘 모르지만 인류가 최초의 언어를 사용했을 때, 품사는 '명사'일 것이다. 본능적으로 우리는 대상에 이름을 붙인다. 이름 붙인 것은 사용하기 위해서고 기억은 그것을 유용하게 돕는다. 결국 이름 없는 것들에 대해 우리는 '기억'의 책임을 해방한다. 그러지 않은가. 만났던 누군가의 이름을 잊고난 뒤 성격, 추억, 목소리는 더 빠르게 잊혀진다.

몇 주 후에 잃어버린 지갑은 학교 사물함에 되돌아와 있었다. 자신의 지갑에는 '시간과 장소'를 적어놓은 글귀와 함께 말이다. 류이치는 이름 없는 그녀의 글씨를 막연히 믿는다. 장소로 이동했을 때, 그녀는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굉장히 신비한 아이였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이름 없음'에서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녀에게 '이름'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그녀는 누군가의 지갑을 훔쳤다. 그들의 기억과 이름을 훔쳤다. 그 도화지 같은 밑그림에 상상의 물감을 덧칠하길 좋아했다. 그녀가 하나 둘 모아둔 훔친 지갑은 한 가득이나 있었다. 그녀는 류이치에게 당췌 알 수 없는 말들을 한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류이치에게도 누군가의 이름 하나를 선물한다. 훔친 지갑 속의 누군가의 이름을 하나 둘 씩 나눠 가진 그들은 정말 그들이 된 것 처럼 흉내도 된다.

소설은 가볍게 시작했다가 철학적 물음을 던지고, 설레임을 스쳤다가 우울하고 슬프게 끝난다. 여러 감정을 짧은 소설에서 만날 수 있다. 단순히 재미를 느끼는 것 뿐만 아니라 서정적인 문체와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수족관'이라는 이름 아래로 폴라로이드 필름 형태의 수채화가 표지에 붙어 있다. 책을 읽다가 덮을 때마다 유심히 그 수채화를 살피게 된다. 실제 필름 혹은 옆서인듯 수채화는 손으로 그 외각의 음각을 만질 수 있다. 소설의 감성과 너무나 잘 맞는 표지를 몇 번이나 손으로 더듬거리며 읽는다. 소설을 읽기 전에는 '밍밍한 맛'으로 느껴지던 디자인이 소설을 읽지, '포근'하게 느껴진다. 소설은 짧지만 분명 읽고 여러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모든 결말을 다 알고 난 뒤에 다시 읽을 소설의 재미도 분명하게 기대된다. 결국 이 소설은 두 번 읽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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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지우개 바우솔 작은 어린이 23
서석영 지음, 김소영 그림 / 바우솔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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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3장에는 '겨자씨'에 대한 기록이 있다. 예수가 천국을 빗대어 한 말이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발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 겨자씨는 처음에는 아주 작지만 나중에는 새들이 집을 짓고 쉴 수 있는 커다란 나무가 된다는 말이다. 그것을 굳이 '불교' 용어로 따지고 들면 '카르마'가 되려나...

비록 작은 '무엇'이지만 그것은 '시작'의 형태일 뿐이다. 그것이 심어진 뒤에 그것은 반드시 최초의 미약함을 가볍게 넘어서는 창대함이 될 수 있다. 걱정도 그렇다. 작은 씨앗처럼 심어질 때 그 미약함이 우습지만 점차 나를 집어 삼키는 우주가 된다.

아이에게 '걱정지우개'라는 소설을 읽어 주었다. 소설은 '걱정을 지우는 지우개'를 선물 받은 '소녀'에 대한 이야기다. 마법 같은 '아이템'으로 머릿속 걱정을 말끔하게 지워주면 너무 좋겠지만 역시 쉽지는 않다. 세상 걱정없는 사람 없다.

무려 6년이나 된 예능 중에 '거기가 어딘데'라는 예능이 있다. '지진희, 차태현, 조세호, 배정남'. 이 출연자들이 '오만 사막'을 횡단하는 내용이다. 개인적으로 이 예능을 몹시 좋아한다. 이 예능을 몇 번이나 돌려 봤는지 모른다. 특히 '오만'에 있는 '사막'을 횡단하는 편만 돌려 본다. 여섯 편으로 나눠진 이 예능만 보기 위해 한 OTT를 매월 결제하기도 한다. 이 예능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예능이 가진 균형 때문이다. 나의 기억을 한없이 돌이켜보면 어느새 무념무상의 상태로 걸어가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나의 옷은 찢어진 청바지에 땀냄새가 잔뜩 묻은 작업복일 때도 있었고 서류 가방을 한 손에 쥔 양복일 때도 있었다. 어떤 순간에는 머리만큼 무거운 군화발과 군복일 때도 있었다. 끝없이 걷던 그 추억이 떠올랐을 수도 있다.

스티브 잡스나 칸트, 아리스토텔레스, 찰스 다윈이나 빌게이츠, 아인슈타인은 모두 걷기를 좋아했다. 이들은 중요한 회의나 창의력이 필요한 순간에 걷기를 했다. 걷다보면 어느새 생각은 정리되고 '걷고 있다는 사실'만 남는 경지가 온다. 그 경지가 오면 비로소 내가 했던 '걱정'이라는 것도 게으른 몸이 만드는 '환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초등학교 1학년 추천도서다. 아이를 위한 '봉사'가 아니라, 나또한 깨닫는 바가 있다. 예수는 '겨자씨'를 보고 '천국'을 말했다. 원효대사는 해골물을 보고 '일체유심조'를 깨달았다. 그러나 어찌 겨자씨와 해골물이 예수와 원효대사를 가르쳐 깨우치게 했다고 할 수 있을까. 결국 깨닫는 것은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다. 이태백이 바라본 달과 닐 암스트롱이 바라본 달은 같은 달이 아니다. 그들은 분명 같은 달을 바라봤으나, 분명 다른 달을 바라보았다. 그 둘이 그것을 보고 얻은 '감상'은 '달'이 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달'에게서 얻은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누가, 어떻게 보느냐에 달렸다.

누군가는 낙엽을 보고도 눈물을 흘린다. 문자 하나, 그림 하나 없이도 사람을 울릴 수 있는 것들은 얼마든지 많다. 반대로 누군가는 문자 하나 그림 하나 없이도 사람을 웃길 수 있다. '아동용 도서'를 보고도 충분히 성인이 배울 수 있다.

부모는 간혹 '희생'이라는 말과 함께 연상된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못하다. '희생'이란 자신을 '없애'는 일이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을 없애고 채워주는 것이 아니다. 그저 함께 하는 것이다. 아이의 동화를 보며 독후감을 쓰기로 했다. 아이와 함께 읽고 나또한 느끼는 바가 충분히 있어야 한다. 결국 아이를 위해 시간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또한 나에게도 유익한 시간이어야 한다.

'걱정지우개'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자신의 사라진 걱정이 다시 생겨나지 않기 위해서는 걱정을 지우는 지우개를 반드시 누군가에게 선물해야 한다. 아이의 교육에 좋은 말은 틀림없이 어른에게도 좋다. 우리는 어린 시절 매우 좋은 교육을 받고 점차 잊고 살아간다. 고로 성인이 되며 더 많은 사람들이 동화를 읽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나의 걱정을 없애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다른 이의 걱정을 없애는 일.

그 이기적인 이타심이야말로 내가 그간 글을 통해 꾸준히 말했던 '이타심'의 본질이다. 소설은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 나의 걱정을 없애고 타인의 걱정을 없애주는 일. 그것은 나에게도 좋고 타인에게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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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독서의 힘 - 전략이 있는 부모를 위한 독서 인문학
심영면 지음 / 지학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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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은 눈과 귀로 들어와서 혀와 펜으로 나간다. 듣고 읽지 못하는데, 말하고 쓰는 능력이 생길 수 없다. 결국 많이 읽고 많이 들어야, 잘 말하고 잘 쓸 수 있다. 어떤 기능은 '인풋'이고 어떤 기능은 '아웃풋'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위치에 오를 수록 '인풋'기능만큼이나 '아웃풋' 기능이 필수적이다. 두 기능 모두 물론 중요한 기능이지만 어떤 이들은 '인풋' 기능에만 특화되고, 어떤 이들은 이 두 기능에 탁월하다. 이런 능력 차이는 분명 '역할'에도 차이를 만들어낸다. 고로 '사회'는 '아웃풋' 기능을 가진 자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부여한다.

다만 '듣기', '읽기', '쓰기', '말하기'이 모두 연결 된 것은 아니다. 이들은 상호 보완적인 위치에 있으나 명백히 다른 영역이다. 이것을 깨닫는데 10년 간의 해외 생활이 한 몫 했다. 유학 시절에 들었던 3.3.3 법칙이 있다. 3개월이면 듣기의 '감'이 생기고, 3년이면 대략 '말'을 할 수 있고, 30년이 돼야 '쓰기'의 감이 생긴다. 실제 그렇다. 아무리 많이 들어도 말이 트인지 않는 고민은 나를 괴롭게 했다. 물론 아무리 많이 읽어도 쓰기가 쉽지 않은 일도 마찬가지다. 그 많은 고민과 시행착오 끝에 알게 됐다. 말하기 위해서 많이 듣는 것은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많이 듣는 것은 '기본'이고 다시, 많이 써야 한다.

이것을 어린 아이에게 적용해도 비슷하다. 아이의 성장도 생후 3살, 만 3살, 만 서른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언어는 저절로 생성되는 것은 아니다. 즉 많이 들었다고 말을 잘하고 잘 읽고, 잘 말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보통의 부모는 시간이 지나며 점차 아이의 어휘력이 늘어남을 확인한다. 일상의 언어를 이해하고 간단한 소통에 문제가 없다고 여긴다. 단,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어느 순간부터 교육은 '듣기'보다는 '읽기'를 중요하게 여긴다. 결국 초등 고학년이 되면 아이는 소리로 듣는 학습에서 벗어나, 문자로 이해하는 학습으로 넘어간다. 실제로 고학년부터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지식'은 음성으로 전달하기 힘들어진다. 점차 다양해지고 방대해지는 정보 때문에 교육은 그것을 습득하기 위해 '문자'를 사용한다. 결국 '문자'를 읽는 능력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문자를 습득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이 있어야 할까. 문자를 많이 접해야 한다. 별 수 없다.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한국어를 잘하고,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영어를 잘하는 것처럼 결국 '노출'이 답이다. 고로 아이의 언어능력을 향상 시키기 위해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아이와 많은 대화를 할 것.

둘째, 아이에게 많은 책을 읽어 줄 것.

결국 이 둘이다. 아무리 고상한 언어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대체로 2000~3000단어의 어휘만을 사용한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민주주의'나 '관료제'에 대한 이야기를 할 일이 적고, '메소포타미아'나 '미토콘드리아'라는 말을 사용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학교에서 이런 어휘를 상용한 문자를 읽게 하고 그것을 확인한다.

결국 어휘력은 몹시 중요하다. 수업 일정에 맞춰 수업하는 '교사'나 집에서 일상 생활을 하는 '부모'에게 몇 번의 그 어휘를 접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아이가 그것의 이미를 인지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시공간의 제약을 벗어난 멈춰진 정보가 필요하다. 그것을 가장 저렴하고 쉽게 이용하는 방법은 '종이 문서'가 유일하다.

그것을 혼자서 읽고 이해하는 아이들은 단순 정보를 더 자주 접할 수 있게 된다. 자주 접하면 쉽게 익힐 수 있다.

아이의 지능 발달과 상관없이 아이의 학습능력은 고로 '습관'에서 비롯된다. '습관'은 굳게 마음 먹거나, 단순히 '의지력'으로 하루 아침에 얻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일상이 중첩된 결과물이다. 수 십 명의 아이를 관리하고 감독하는 '공교육'에서 모든 아이의 능력을 확인하고 교육 할 수는 없다. 결국 공교육은 '학습'보다는 '평가'하는데 집중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아이가 학교를 끝나고 어떤 생활 습관을 쌓고 있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인간은 처음부터 문자 보고 이해하도록 되어 있지 않다. 인간은 처음에는 '청각정보'를 가지고 정보를 받아드린다. 그러나 7~8살부터 그 정보를 습득하는 창구의 변화가 생긴다. 바로 '글자'이다. 점차 '글'을 통해 정보를 습득하는 능력이 올라가는데 소리로 정보를 받아 들이는 양과 문자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양이 정확하게 '크로스'되는 지점은 만 12살이다.

어느 순간 아이는 '영상'이나 '강의'가 아니면 정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지에 도달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 사회에 '사교육'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 아이들 대부분이 이 황금기를 놓쳐 주요 학습 나이로 접어 들었기 때문이다.

'학교 성적은 과연 중요한가. 우리는 그것 때문에 책을 읽는가.'

이 질문에 대답은 아니다. 한때, '부자가 되기 위해 책을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온라인에서 떠돌았다. '읽기'가 수단인 사람들에게 '읽기'를 '생활'과 '습관'이 되라고 할 수 있을까. 수단 즉, 도구는 단순히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될 뿐이다. 이는 육아와 비슷하다. 육아는 아이를 '고학력'으로 만드는 목적 혹은 수단이 아니다. 육아는 그저 아이와 살아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경험과 추억을 쌓고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이다. 고로 책은 '수단'이나 '목적'이 아니다. 그저 '기호'이고 '생활'이어야 한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갑자기 아이에게 뛰어난 성적을 기대하기에 대부분의 성인은 '도서'를 멀리한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성인의 절반 이상이 1년에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아이에게는 책을 들여다 보고, 문제집을 풀어 고득점을 받길 원한다. 이탈리아 신경심리학자 리촐라티 교수는 원숭이의 다양한 동작을 관찰하면서 '거울뉴런'을 발견했다. 원숭이가 다른 우너숭이의 행동을 보기만 해도 자신이 움직일 때와 마찬가지로 반응하는 뉴런이 있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아이의 뇌에 어떤 행동을 심어주고 있는가. 결국 아이가 어른의 거울이라는 말처럼, 아이의 습관과 성적, 가치관에 부모가 완전히 책임이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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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9
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송상기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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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하다. 이런 류를 '고딕 소설'이라고 한다는데, '고딕 소설'은 19세기에 영국에서 유행한 공포와 로맨스가 결합된 분위기의 소설이란다. 그러하다. 소설은 기묘했고 묘했다. 우리 영화 '장화홍련'에서 느꺼지는 적막하고 오묘한 분위기의 소설이다. 더군다나 반전까지 덧붙인다면 더욱 그렇다.

소설의 화자는 주인공을 '너'라고 부른다. 마치 '독자'에게 이야기 하듯 담담한 목소리로 '너'의 이야기를 읊은다. 화자는 젊은 역사학자 필레페 몬테로를 '너'라고 칭한다. 필레페는 구인광고를 보고 '콘수엘로' 부인의 글을 정리하기로 한다. 콘수엘로는 그가 집에 머물면서 작업을 하길 바라고 결국 필레페는 그렇게 하기로 한다. 집안은 신비롭고 음산한 분위기로 가득차 있으며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둠으로 가득차 있다. 이 어둠에서 '필레페'는 초록색 눈의 아름다운 소녀를 본다. '아우라'다. 아우라는 콘수엘로의 조카다. 그 젊음이 매혹적이다.

마른 양파 껍질같은 피부를 가진 노파, '콘수엘로'와 너무나 대조적인 '아우라'는 완전히 극적으로 대조적이다. 이런 대조 속에서 주인공 '필레페'는 '노파'에 대한 혐오와 '아우라'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교차하며 느낀다. 음산한 분위기의 이 고딕 미스터리 소설은 매우 짧지만 강렬하다.

소설가 '카를로스 푸엔테스'는 독특하게도 이 소설에서 2인칭 서술 방식을 사용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건데, 이런 서술방식의 소설은 처음 읽어 본 듯 하다. 이 기법은 독자인 내가 소설의 신비로운 경험을 직접하도록 한다. 이야기 속 행동과 결정의 주체가 마치 자신이 된 것 같은 착각 속에서 그 몰입도가 월등하게 높아졌다. 전지적 시점으로 쓰인 다른 소설처럼 독자가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능동적 참여를 하는 참여자로 만들어 낸다. 다시 생각해보니,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 듯 하다.

이 소설은 현실과 환상, 꿈과 실제가 모호한 경계로 이어져 있다. 그 묘한 분위기 속에서 '필레페'는 아우라와 그녀의 이모인 '콘수엘로' 사이에 벌어지는 신비한 사건에 휘날린다. 콘수엘로 남편의 기록을 정리하는 단순한 서사로 시작되지만 초자연적 사건, 아우라와의 관계, 심오하고 어두운 사건들과 비밀이 짧은 순간에 동시적으로 일어나며 다양한 내면적 갈등이 일어난다. 소설을 다 읽고도 남은 여운을 잊지 못해 꽤 한 동안 그 이야기를 곱씹게 된다.

이 소설은 '젊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작가 '카를로스 푸엔테스'는 종종 젊은 캐릭터를 통해 시대의 변화와 정체성에 대한 고뇌를 그리는 작가다. 대체로 개인과 사회 간의 갈등을 주제로 하는데, 이 소설인 '아우라'에서도 콘수엘로 부인의 남편 글을 정리한다. 이 글은 '회고록'으로 꽤 역사적인 사건을 개인이 관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글이 쓰여지던 1960년대는 '카를로스 푸엔테스'가 있던 '멕시코'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큰 사회적 혹은 문화적인 변화를 겪던 시기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푸엔테스는 이런 '젊은이'들의 '변화'와 '혁신'에 대한 이미지를 종종 작품에서 사용했다.

사실 '멕시코 문학'은 처음 읽었다. 소설의 군데군데 묻어 있는 '멕시코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있고 신기하다. 라틴 아메리카하면 우리가 배우는 주된 역사와 꽤 떨어진 곳이 아닌가. 카를로스 푸엔테스로 하여금 만난 첫 멕시코 문학에 대한 꽤 깊은 인상을 받았다. 소설이 짧아 쉽게 시작했으나 여운이 길어 짧은 소설을 읽었다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 '민음사'에서 출판한 '세계문학전집'이라는 '세트'가 없었더라면 과연 나는 이 책을 읽어 볼 수나 있었을까. 반전이 있는 소설이라 줄거리를 모두 기록 할 수는 없다. 몇 번을 다시 읽어도 될 명작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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