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셀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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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오셀로'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못 고치는 병이라면 슬퍼할 필요도 없다."

삶에 대한 능동성에 대한 울림을 준다. 모든 병에 슬퍼할 필요는 없다. 살다보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 어찌됐건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가 있다. 다시 어떤 경우에는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일도 있다. 우리가 슬퍼해야 하는 일은 스스로 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않는 일이지, 할 수 없는 일을 하지 못했을 때가 아니다. 모든 상황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은 슬퍼할 필요는 없다.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가 아니라,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가 중요하다.

같은 사건이라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 시선이 다르니 대응 방법도 다르다. 대응없이 주어진 상황에만 반응하는 것은 더 나쁜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보다 나쁘다. 결국 나쁨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일이다.

오셀로의 비극은 그가 능동적이지 못함에서 시작한다. 주체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언제나 휘둘린다. 자신의 주변 환경과 인물들에 쉽게 휘둘린다. 오셀로는 결국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데 실패한다. 누군가에 의해 쉽게 조종 당하며 사랑하는 이와 주변 인물을 잃어 버린다. 때로 우유부단함은 '악'보다 더 '악' 할 때가 있다.

만약 눈먼 황금이 탁자 위에 놓여 있다고 하자. 그것이 나의 것이 아님을 누구나 알고 있다. 누구도 황금의 출처를 모르고 누구도 자신의 행동을 규견하지 않을 때, 과연 대부분의 사람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극단적으로 황금으로 예를 들것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양심을 스스로 내려 놓는다. 비어 있는 밤거리 무단횡단을 하거나 가벼운 담배꽁초를 튕겨 버리고 때로는 혼잣말로 타인을 비방하기도 한다. 혼자라고 여겨질 때 대부분의 사람은 '선'과 '악' 중 더 쉽고 이득이 되는 편을 택한다.

순자가 '성악설'에 의해 사람에게 교육이 필요하다 주장도 일맥한다. 그렇다. 누구나 자신이 혼자이거나 자신에게 모든 걸 주체 할 수 있을 때, 거리낌없이 '악'을 선택할지 모른다.

여기서 딜레마가 생긴다. 과연 '악'을 행하도록 '유도'한 이가 나쁜가. 악을 행한 이들이 나쁜가. 이 딜레마에서 어느쪽을 선택하더라도 도덕적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간혹 '악'을 행한 이가 나쁘다면 '정치적 선동'에 의해 움직이는 대중은 무엇이 되는가. 만약 악을 행하도록 한 이가 나쁘다면 모든 범죄는 '수동적 행위'일 뿐이된다. 고로 이 딜레마에서 '오셀로'는 악을 행한자이다.

악을 행한 자거나 악을 행하도록 한자, 둘 다 나쁘다고 할 수도 있다. 혹은 이 둘 모두 유혹에 미약하여 '악'이 아닌 얼굴로 서로의 악행을 주고 받을 수 있다. 이런 무지는 과연 용서 받을 수 있는가.

오셀로는 꽤임에 빠져 사랑하는 자를 죽이고, 자신의 우유부단함으로 가장 신임하는 친구도 잃는다. 결국 그 무엇이 되더라도, 무능과 우유부단함은 때로 '악'만큼이나 악하게 만든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복음을 전도'하여 많은 이를 구하는 것이 '선'이라고 하던가. 이에 정반대라면 누군가를 '악' 자체 만큼이나 누군가를 '악'으로 이끄는 것마져 나쁜 것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현대에 와서 함정수사가 불법인 이유는 이런 비슷한 맥락에서 출발한다. 함정 수사를 통해 누군가에게 '범죄'를 유도하는 행위는 범죄를 저지를 의도가 없는 사람을 범죄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는 자발적 범죄가 아니며 인위적이고 만들어진 범죄로 '선'의 가면을 쓰고 '악'을 만들어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때로 살면서 다양한 유형의 사람을 만나곤 한다. 어떤 누군가는 괜히 '선한 일' 하나 없이도 '착하다'라는 평을 받고, 어떤 누군가는 '악한 일' 하나 없이다 '나쁘다'는 평을 받는다. 대체로 사람들은 고분고분하고 조용한 사람에게 '착하다'라는 평을 주고, 개인의 주체성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행위를 하는 사람에게는 '욕심'의 이름을 빌려 '나쁘다'라는 평을 준다. 이러한 평가는 대체로 '개인'을 기준으로 한다. 자신에게 함부로 할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로 사람을 평가하면서 자신이 말에 순응하는 쪽에 '착하다'라는 평을 붙인다.

극악무도한 범죄자의 옛지인의 평을 들어보면 대체로 '선하다', '착했다'라는 평이 다수를 이룬다. 그 이유는 실제 그 사람이 '선한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언제든 타인에 의해 조종 당할 수 있는 우유부단함을 가졌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다. 그렇게 실제 악을 저지르는 사람은 결국 누가 되는가. 타인에게 그저 순응하고 아무런 비판적 생각없이 누군가의 말을 믿는 사람의 최후는 결국 의도치 않은 '악'이 된다. 결국 '악'은 무엇인가.

악은 '선'을 포함하며, '선'의 얼굴로 저지르고, '선'으로 평가 받으며, 결국 다른 누군가도 '악'으로 끌어들이지 않는가.

고로 자신의 소신과 비판적 의식이 없는 '주체적이지 못한 태도'는 때로 악보다 심한 선, 즉 극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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