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의 흑역사 - 이토록 기묘하고 알수록 경이로운
마크 딩먼 지음, 이은정 옮김 / 부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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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프리카 베냉에서는 꽤 아주 특이한 '절도' 사건이 일어났다. 2001년, 서아프리카 베냉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절도는 사람들을 화가 나도록 했다. 얼마나 화가 났던지 사람들은 용의자에게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인 다음 그가 타죽는 것을 지켜보기까지 했다. 화가 난 군중들은 '이것'을 흠친 용의자 다섯 명을 죽이기도 했는데 이 살인 사건의 발단은 '절도' 였다. 군중들은 왜 그렇게 화가 났으며, 무엇을 훔쳤기에 그토록 분노 했을까.

베냉의 남자들은 인근 사람들에게 '자신의 그것'이 도난 당했다고 소리쳤다. 이 소시를 들은 주변 군중들은 도둑을 향해 달려 들었다. 그리고 집탄 폭행과 살인은 저질렀다. 그렇다. 그들이 도난 당한 것은 바로 '남성의 음경'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그것은 '집단 히스테리 혹은 '사회적 패닉'의 형태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자신의 음경이 점점 줄어들거나 완전히 사라졌다고 느꼈다. 실제로 '그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느끼게 되는 '뇌의 착각'은 집단적으로 강한 두려움과 사회적 혼란을 만들었다. 학자들은 이 현상을 근거없는 믿음과 사회, 경제적 불안정이 결합한 결과로 봤다. 실제로 뇌는 물리적 실체와 상관없이 무언가가 없다거나 사라진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신체편집분열증'이라 부른다. 좌측 편마지와 관련해 신체편집분열증을 앓는 환자들은 자신의 신체가 '소'의 것이라던지 다른 인격의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일들은 조금더 '실천적인 의지'로 바뀌는 경우가 있다. 바로 신체통합정체성장애(BIID)이다. 이 장애를 갖게되는 환자들은 자기 몸의 일부가 자기 것이 아니라는 금각과 함께 극심한 우울, 스트레스를 겪는다. 그리고 이 낯선 몸을 자신으로 부터 잘라내고 싶어하는 강한 의지를 갖는다. 어떤 누군가는 자신의 손을 '시어머니의 손'이라고 여겼고, 어떤 누군가는 자신의 어떤 손을 지하철에 두고 내렸다고 여겼다.

1970년대 존스홉킨스대학의 '정신호르몬 연구실'에서의 일이다. 어느날 이곳에서 일하는 이에게 한 통의 전화가 온다. 이 전화의 내용은 다소 충격적이다. 전화 상대는 자신의 왼쪽 다리를 잘라줄 외과 의사를 찾고 있었다. 그는 13살부터 자신의 다리를 잘라내고 싶어 했으며 그러한 의지는 집착을 넘어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다리를 잘라내고 싶어했언 이유는 성적인 이유였다. 그는 목발을 짚고 걸어가는 사람을 보면 성적 흥분을 했다. 또한 다리가 절된단 사람에 대한 환상과 동경을 했는데, 이후에는 자신의 다리를 잘라낼 의사를 찾아 다니곤 했다. 그러나 역시 당시에도 이는 '의료윤리적 문제'로 의사들에게 거절되는 일이었다. 결국 자신의 다리를 절단해 줄 의사를 찾지 못하자, 그는 결국 결심을 했다.

그는 스테인리스 쇳조각을 줏어다가 자신의 다리를 찔렀다. 이후 망치로 쇳조각을 내리쳐서 정강이뼈에 박아 놓았다. 정강이빼에 박힌 쇳조각을 다시 빼내자, 피부에서 뼈까지 이어지는 구멍이 생겨났는데, 그는 그 구멍 속에 얼굴 여드름에서 짜낸 고름, 콧물을 섞어 만든 오물을 채워 넣었다. 이후 그 오물들이 자신의 정강이뼈에 심각한 감염을 만들어주길 기다리다가 의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날 의사는 그의 다리를 성심히 치료했고 그는 두 발로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이처럼 비정상적인 일에 대한 집착과 착각은 대체로 '주술'이나 '종교' 등에서 다뤄진다. 그러나 현대 과학에서 이들이 모두 '뇌'가 벌이는 일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1972년생 에리카 라브리에는 미국의 양궁선수다. 그는 1999년 일본에서 처음 양궁을 시작했으며 뉴욕에서 열린 제42회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FITA팀 기록을 깼다. 또한 IFAA 실내 선수건 대회에 참여하여 2007년에도 금메달을 획득하고 독일 만하임에서 단일 라운드 세계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2004년 그는 한 상대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로 인해 그를 대표하는 수식어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바뀐다. 그가 사랑에 빠진 대상은 바로 '프랑스 파리의 마르스 광장에 서 있는 '에펠탑'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스치고 지나가는 감정이 아니였다. 그녀는 2007년에는 에펠탑과 결혼식을 했는데 그로 인해, 그녀의 이름은 현재 '에리카 라브리에'에서 '에리카 에펠'로 바뀌었다. 그는 무생물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조직인 OS 인터네셔널의 설립자로 활동하고 있다.

뇌는 그밖에 꽤 흥미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어떤 충격에 의해 누군가는 감정을 잃기도 하고, 누군가는 천재가 되기도 하며, 누군가는 성격이 바뀌기도 한다. 사람은 모두 같은 것을 보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어떤 이들에게는 아주 적은 프레임으로 움직이는 만화처럼 단절된 현상을 보는 이도 있고 어떤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손에 달린 손이 수박만큼 크게 보이는 경우도 있다. 이 모두 뇌와 연관된 일이다. 이런 현상은 흔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예없는 일도 아니다. 꽤 적지 않은 사례가 보고 되고 있으며 실제 보고되지 않은 사례를 합한다면 이는 어쩌면 흔한 일이거나 누구에게나 일생 중 겪어 볼 만 한 일이다. 명백하게 손에 붙어 있는 손가락을 보고도 손가락이 없다고 믿는 이들은 다른 인지나 지능에서 보통 범주의 사람들이다. 이들이 이런 착각을 하는 이유가 생물학적인 이유라면 나 혹은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들도 이런 착각을 하지 않으라는 법이 없다. 우리는 모두 같은 색을 보고 있는가. 우리는 모두 같은 모양을 보고 있으며, 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가. 알 수 없다. '뇌'를 연구하는 것은 어쩌면 '우주'을 연구하는 것 만큼이나 어렵고도 신비한 일이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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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신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4
김시습 지음, 이지하 옮김 / 민음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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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은 태어난지 여덟달 만에 글을 읽어 주변을 놀라게 했다. 이러한 신동을 보고 주변 어른들은 '논어'의 글을 따서 '시습'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이는 논어의 첫문장이며 그 의미는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논어를 읽지 않은 이들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문장이다. 이 문장을 따서 이름을 지었을 만큼 '시습'은 매우 천재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어린 총명함이 어찌나 특출나던지 세종대왕이 그를 불러 볼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살아 생전에 엄청난 벼슬을 하거나 대단한 치적을 남기진 않았다. 그의 나이 서른 넷 정도 됐을 때, 금오산 용장사에 들어 앉아 집필을 했는데 그때 지은 '소설'이 '금오신화'다. 금오산에서 집필한 단편 소설집으로 '신화'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그 '배경'이 '현실'을 다루고 있지 않아서다. 과연 천재의 글 답게 이 글은 무려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이다.

한때, '장르소설'이 폄하되는 시절이 있었다. 판타지, 과학공상, 무협, 추리소설 등의 장르소설은 순수문학에 비해 가볍게 쓰여지고 내용이 허무맹랑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보면 종교 혹은 이데올로기적인 목적으로 쓰여진 '성경, 쿠란, 마오쩌둥 어록'을 제외하고나면 해리포터 시리즈,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다빈치 코드, 어린왕자 할 것 없이 대부분 판타지 소설이 그 순위를 차지한다.

오죽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 '금오신화' 또한 판타지 소설이고,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 또한 판타지를 가미하고 있는가.

'금오신화'는 총 다섯 개의 단편 소설이 엮어진 글이다. 사실 더 많은 소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까지는 다섯 개의 소설만 전해지고 있다. 이 소설은 '명나라' 구우가 지은 '전등신화'를 흉내냈다.

첫번째 소설은 만복사저포기로 시작한다. 전라도 남원에 사는 '양갱'이라는 청년이 만복사라는 절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는데, 이들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이 여인은 왜구들의 침략 때 이미 죽은지 오래된 귀신이었다. 이 소설은 현실과 비현실을, 이승과 저승을, 생과 사를 오가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소설을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계유정난' 당시 왕위에 오른 '세조'를 지켜본 '김시습'의 일대기와 엮어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다만 작가의 의도가 어찌됐건 이는 독자의 몫이지 정답은 아니라고 본다.

마치 J.K.롤링의 해리포터에 '20세기 사회가 갖고 있던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비판과 문제의식 고치'라는 거창한 수식을 달아 굳이 읽고 싶지 않도록 만들 이유가 없듯이 말이다. 소설은 소설로써 그 흥미를 주고 독자 개인이 느끼는 다양한 감정을 자유롭게 열어두는 것이 중요하다.

'머글 태생 마법사'와 '순수 혈통'간의 차별이 현실 세계의 인종과 계급, 성차별에 대한 은유적인 비유'라고 굳이 '주석'을 달필요가 없는 것 처럼 말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금오신화'를 읽어도 그 안에서 독자는 충분히 다양한 사유거리를 느껴 볼 수 있다. 소설에는 현대의 뮤지컬처럼 주인공들이 '한시' 한 편을 서로 주고 받으며 읊는다. 이 과정에서 '성리학'의 '이치'와 더불어 다양한 배움을 얻을 수도 있다.

'이생규장전' 또한 비슷한 맥락이다. '이생'이라는 자가 '최랑'이라는 여인과 만나 사랑하는 내용이다. 이또한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사랑'과 '판타지'라는 현대에서도 흥행의 필수인 요소가 많아 흥미롭다. 다만 생각보다 쉽고 재밌는 이 '금오신화'를 실제 읽은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는 아마 그 '이름'과 '해석'이 주는 '장벽'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글'의 쓰임은 '읽힘'이고 그 쓰임 또한 '읽힘'이다. 읽히지 않는 글은 그 생명이 사라진다. 문학을 사랑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오랜 고전에 다양한 각주를 달지만, 이러한 각주가 점차 글을 접하는데 장벽의 역할을 하며 때로는 그 본질을 해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시대가 지나면 점차 사용하는 언어와 문화가 달라지면서 글에 이질감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고전을 쓴 사람이라고 각 잡고 어려운 철학을 담아내기 위해 애쓸 것이라는 생각은 자칫 부담감이 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었을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이 소설의 첫문장은 누가봐도 '판타지'다.

"어느 날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 어떤 해석이 들어갈 여지 없이, 다음 문장을 읽어보고 싶은 강렬한 문구다. 이 글을 읽으며 나는 '흥미'를 느꼈지, 카프카가 던진 '사유'와 시대에 던진 '파편화'를 떠올리지 않았다. 그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후기'를 읽으며 '이렇게 잃힐 수도 있겠군'하고 생각 했을 뿐이다. 소설은 가벼운 마음으로 읽고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을 자유롭게 향유하는 것이다. 공부하기 위해 꺼내든 학습지가 아니다.

김영하 작가는 작품이 독자들이 다양한 감정을 느끼도록 하는 일이지, 조각난 내용 속에서 답을 찾는 방식'으로 읽혀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렇다. 작가의 의도는 글이 읽히는 것이다. 감히 선택을 받아야 하는 '작가'가 오만하게 '선택'하는 '독자'를 가르치려 한다면 누가 그 글을 읽고 사용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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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無所有 - 법정 스님의 수필: 소유의 의미와 무소유에 대한 깨달음
법정 / 포레스트위즈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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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의 '무소유'에는 이런 말이 있다.

"아름다운 장미꽃에 하필 가시가 돋쳤을까 생각하면 속이 상한다. 하지만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가시에서 저토록 아름다운 장미꽃이 피어났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감사하고 싶어진다."

모든 건 관점에서 시작한다. 타의에 의해 '무소유'하면 '가난'이 되지만 자의에 무소유하면 '해방'이 된다.

이런 관점의 차이는 '장미꽃에 돋은 가시'와 '가시에 핀 장미꽃'처럼 명확하게 다르다. 흔히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처럼 관점의 차이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 사람은 세계를 가만히 두고도 완전히 다른 세계를 창조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관점의 차이이며 이것을 갈고 닦는 것을 '수행'이라고 부른다.

누구나 관점을 가진다. '남산'을 두고 '남산'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남쪽'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북쪽'에 있기 때문이다. 대상을 두고 나의 관점으로 모든 것은 정의된다.

'소유'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단순히 아무것도 갖지 않음이 아니다. 설령 '무소유'를 말씀하신 '법정 스님'조차, 그의 '이름'을 소유했고 '무소유'에 대한 철학을 수요했다. 본디, '무소유'는 역설을 맞는다. 그러나 그가 말한 '무소유'는 단순히 '갖지 않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가 말한 '무소유'는 집착을 끊어낸다는 의미다.

무언가를 소유할 때, 우리는 대상에 '집착'을 갖는다. 그것이 본래 자신의 것이었다는 강한 집착은 단순히 '관념'일 뿐이다. 우주에서 '본래 나의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이 태어났으며 세상에 잠시 빌려 쓰다가 빈손으로 돌아간다. 본래 '내 것'이 없다는 없다는 인식은 '무소유 철학'의 근본이다. '내것'은 없다. 불교 철학에서 말하길 아상, 즉 '나' 또한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마당에 '나'의 '소유물'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철학으로의 불교는 과학적 인식이 근간이 되는 현대 사회에서도 꽤 중요한 이슈다. 특히 '양자역학'과 연결하여 '불교와 도교철학'은 자주 사용된다. 모든 것은 '관찰자'가 중요하며 관찰하는 자가 없을 때, 그것은 오롯이 확률로만 존재한다.

흥미로운 것은 '불교'과 '도교' 심지어 '기독교'마저 말하고자 하는 바가 같다는 것이다. 옛 성인들은 자신들의 찾아낸 본질을 아주 간단 명료하게 정리했다. 다만 그것을 전달하는 '학자'들은 그것에 '학문'과 '종교'의 이름을 빌어 분석하고 분류하고 정리했다. 그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용어'와 '언어'가 생겨났고 하나의 진리가 수백만 조각으로 쪼개어 단번에 인식하기에도 어렵게 변해졌다.

'도교'는 세상 만물의 근본 원리나 본질을 '도'라고 정의했다. 노자가 말했던 '도가도 비상도' 즉, '도'를 '도'라고 부르면, '도'는 더 이상 '도'가 아니다. 그것은 정의할 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다. 우리 언어가 가진 한계를 뛰어 넘는 하나의 덩어리를 뜻 한다. 이것은 섞이고 뭉치고, 분리되고 혼합된다. 아주 서서히 규칙적이면서 불규칙적이고 겉이면서 속이고, 안이면서 속이다. 하나의 촛불이 어두운 방을 밝힐 때, 그 빛과 어둠의 경계가 명확히 존재하지 않듯. 아주 작은 단위로 무수히 그라데이션되어 있다. 이것은 '도가'에서 말하는 '세상 만물'이다. '도'의 관점에서 '나' 또한 '도'의 일부다. 불교 철학에서는 그 반대이다. '우주만물'로 시작하여 '나'로 좁혀지는 것이 아니라 '나'로 확장하여 '우주만물'로 확장된다.

사람은 평생에 걸쳐 옷을 입는다. 옷을 입지 않더라도 사람을 구성하는 성분에는 미생물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의 일부인 손톱과 머리카락은 죽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는 케라틴이라는 단백질로 만들어진 섬유질 구조물일 뿐이다. 즉 우리몸에 털과 각질을 포함해 다양한 구성 성분은 실제로 몸에 착용하는 '옷'만큼이나 '나'와 다른 무언가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다른 무언가'로 인식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식상 나를 확장하여 손톱과 발톱, 머리카락과 각질까지 자아로 인식한다. 또한 입고 있는 옷과 안경 때로는 어떤 악세서리까지 그것을 '자아'로 인식한다. 이렇게 나의 인식 범위를 넓히다다 보면, 나의 범위는 가족과 친구, 친지를 넘어 '상대', '국가', '인류'로 까지 확장된다. 이런 자아의 확장을 무한대로 확장하면 우리를 구성하는 '수소'와 '산소', '탄소'를 포함한 작은 원자 알갱이를 공유하는 세상 만물로 확장된다. 결국 '나'를 확장하면 그 끝에는 '우주'를 만난다. 이것은 금강경의 철학이다.

즉, 소유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다. 고로 자아를 확장하는 순간, 상대에게 가 있는 나의 소유물도 결국은 '나'의 확장일 뿐이며, 상대 또한 '나'일 뿐이다.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넘어간 것에 대해 '빼앗겼다'라는 인식을 하지 않듯. 무소유란 실제로 갖지 않는 것이 아닌 가짐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인식을 달리하는 일이다.

결국 무소유는 '사물'이 아니라 '사람'과 '상황', '감정'에서도 적용이 된다. 어떤 인연에 집착하지 않고, 어떤 상황도 머물러 있지 않으며, 어떤 감정에도 휩쓸리지 않는 것이 무소유의 핵심이다. 모든 것은 조금씩 섞여가며 바뀌고 섞이고 달라진다. 결국 감정, 사람, 상황 모든 것은 영원불멸할 것 같은 인식의 착각 속에 우리를 괴롭히지만 그런 것들은 한낱 바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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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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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한창 좋아하던 노래 중 'SG워너비'의 '한여름 날의 꿈'이라고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과는 '날'과 '밤'이라는 하나의 차이가 존재한다. 우연하게 이 노래를 접한 것은 이범수, 이선균 배우가 출연한 '뮤직비디오' 때문이었다. 이 뮤직비디오는 6.25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을 배경으로 한다. 한 때 가장 친했던 친구 둘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고 이때 벌어지는 다양한 감정이 '뮤직비디오'와 함께 '노래'로 재구성 되었다. 이 노래와 뮤직비디오는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쏙 빼다 닮았다. 비극과 희극이 섞여 있는 이 음악이 다루는 '사랑' 이야기는 어느 하나는 이루어지고 어느 하나는 이루어지지 못할 안타깝지만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 희곡의 제목은 왜 '한여름 밤의 꿈'일까.

어린 시절에 내가 가장 무서워 했던 꿈이 있다. 나는 형체없는 존재였는데 나의 아래로 절벽이 펼쳐져 있었다. 이 절벽은 가파르다 못해, 경사도가 수직에 가까웠는데, 이 수직의 절벽을 십 수마리의 악어가 엉금엉금 기어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같은 꿈을 꽤 여러 차례 꾸었다. 단 한번도 악어가 나에게 도달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꿈을 꾸고 난 뒤에 이마와 베개는 흠뻑 젖어 있었다. 가만 돌이켜 보면 꿈속에서 나는 팔도 다리도 없는 그저 관찰자에 불과했다. TV화면처럼 악어가 절벽을 기어 올라오는 그 장면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왜 나는 그 비현실적인 꿈에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는가.

아마 꿈이라는 것의 특성 때문에 그런듯하다. 꿈에서 느껴지는 '공포', '사랑' 따위의 감정은 그것이 비록 '비현실적'이고 '비논리적'이라 하더라도 '감정'만큼은 진실하다. 그 감정은 실제보다 더 실제같다. 현실에서 느껴지는 공포스러운 감정과 사랑하는 감정 그런 것들이 사실은 꿈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요정과 마법이 등장하고 때로는 신화속 인물들이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거기에 흠뻑 이입할 수 있는 이유는 '감정'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여름 밤의 꿈'은 무더운 여름날 생생하게 꾸웠던 나의 '악어 꿈'과 같이 '감정'에 깊게 몰입된 꿈의 이야기 일지 모른다.

우리 주변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감정. '사랑'이다. 셰익스피어는 '한여름 밤의 꿈'에서 사랑의 여러 모습을 보여준다.

'참사랑의 길은 결코 순탄치 않다' 또한 '사랑은 저급하고 천하며 볼품없는 것을 가치 있는 형체러 바꾸어 놓는다'

이 두 가지 메시지는 사실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사랑'은 모든 것에 해답처럼 보일 때가 있다.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어떤 철학을 막론하고, 어떤 음악과 시를 막론하고 역사는 '사랑'을 말한다.

다만 대부분의 고통 또한 '사랑'과 엮여 있다. 고백에 거절 당하거나, 연인들 사이에 오해나 갈등 또한 마찬가지다. 스치듯 지나가는 자에게 가질 수 없는 섭섭함이나 갈등, 오해, 증오는 때로 가장 가까운 사람과 일어나는 일이며 그 완성은 없고, 완성으로 가는 길은 아픔을 수반한다.

'한여름 밤의 꿈'은 고대 아테네의 신비한 숲에서 일어나는 네 명의 연인과 요정들의 이야기다. 글에는 '사랑의 묘약'이 등장한다. 단순히 눈가에 뿌리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변덕스럽게 바뀌어 버리는 사랑의 대상은 그 불확실성을 보여준다. 희곡은 사랑을 반대하는 아버지로 부터 시작한다. 또한 내가 사랑하는 이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를 사랑하는 이가 내가 사랑하는 이와 같이 않으며, 내가 사랑하는 이가 다른 이를 사랑하는 복잡한 형태의 실이 무성의하게 얽혀 있다. 다만 어떤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실타래가 완전히 정리될 때, 우리의 사랑이 '결실'을 맺지 않는가.

사랑의 경로에서 만나는 다양한 장애물과 극복해야할 시련들 이런 것들은 때로 '마법'이나 '신화' 같은 이야기로 각색되어 있어도 여전히 우리에게 공감을 준다. 희곡을 통해 보여지는 '사랑'은 사실 누구에게나 다른 형태로 존재하는 이야기다. 거기에는 '사랑의 묘약'이나 '요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만큼 비상식적이고 이해하기 힘든 '초능력적인 힘'이 있다. 때로 어떤 경우에는 그 여장 중에 만나는 오해와 혼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꼬꾸라지는 경우가 있다. 다만 어떤 사랑도 완성을 향해 나아갈 뿐 완성이란 없기에 우리는 목적지 없는 여정의 어느 부분에 잠시 쉬었다 가는 것일지 모른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더 깊이 있는 이해를 공부하고 사랑에서 겪는 실패와 실망으로 더 강인한 내면을 갖게 한다. 또 다른 사랑에 대처 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기도 한다.

배우고 성장하고 변화하고.

때로는 어떤 사랑에는 '실패'라는 이름이 붙기도 하지만 그것은 멀리 봤을 때, 실패가 아닌 완성의 조각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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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8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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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에 '스티킹 포인트'라고 있다. 웨이트 운동에서 임계점을 넘어서면서 더이상 들어올릴 수 없는 지점이 있는데 이 지점이 '스티킹 포인트'다. 트레이너들은 이 포인트부터 '성장'이라고 여긴다.

실제 무하마드 알리에게 한 기자가 몇 개의 팔굽혀펴기를 하는지 물었을 때, 그가 답했다.

"처음부터 갯수를 세지는 않습니다. 고통이 느껴지면 그때부터 숫자를 셉니다."

모든 걸 소진 한 후의 투쟁이 진짜 투쟁이다.

노인과 바다는 벌써 여러차례 읽은 책이다. 단순히 줄거리를 묻는다면 노인이 물고기 잡는 소설이다. 그 짧은 한 줄의 줄거리가 어떻게 이 소설을 '고전'의 반열에 올려 놓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이 책이 바라보는 시기와 시선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읽히기 때문이다.

노인과 바다는 줄거리를 알고 있더라도 언제나 흥미롭게 읽힌다. 청새치를 잡아 올리는 노인의 분투가 여지 없이 드러난다. 대상과 자신의 투쟁에서 이기고 지는 과정이 여과없이 드러난다. 무언가를 투쟁할 때, 겉으로 보기에 밋밋해 보이는 결과물이라도 거기에는 수많은 생각이 담겨져 있다. 좌절하다가 다시 시작하고, 포기했다가 재도전한다. 현상은 모든 걸 결과로 말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과정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노인이기에 쉽지 않겠지."

"노인이지만 대단하다."

결과를 두고 단순히 평가 내리기에 그 과정에는 실패와 성공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노인과 바다'는 엄청나게 많은 '대화'가 들어 있다. 다만 아니러니 하게도 이 소설에 등장 인물은 다섯이 채 되지 않는다. 거기에 소설의 99%는 노인이 망망대해 바다에서 겪는 일이기 때문에 노인이 대화할 상대는 전무하다. 초기에 노인과 함께 대화하는 '소년'을 제외하고 '노인'의 대화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럼 나머지 대화는 어디서 이루어지는 걸까. 그 모든 대화는 청새치, 상어, 바다 등이다. 다시말해 이 소설은 '노인의 독백'으로 이뤄져 있다.

헤밍웨이가 주인공을 '노인'으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때 대단했던 청년은 이제 노인이 되어 가까스로 투쟁할 수 있는 나이가 됐다. 언젠가 젊은 시절에도 그의 특기는 인내였다. 하루를 꼬박하고 한참이 흘러도 끝나지 않는 팔씨름에서 기어코 이겨내던 그 것은 '힘'이 아니라 '인내'의 산물이다. 노인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심지어 모든 것을 소진한 후에도 결코 그것을 놓아주지 않는다. 그것을 행하는 와중에는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고민도 하지 않는다. 아니, 다시 말하자면 그것을 이내 뒤집으며 번복한다. 이 과정이 '투쟁'이다. 그깟 청새치나 상어가 아니라 노인이 투쟁을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내가 이 소설을 다시 읽은 이유는 내 안의 목소리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다.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를 괴롭히는 수많은 생각이 따라온다. 나의 삶의 모토인 '주체성', '긍정' 또한 이런 생각에게 한없이 나약하고 초라할 뿐이다. 내 머릿속을 괴롭히는 그런 부정적인 것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너는 할 수 없을 거야"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나의 모토가 '긍정'이지만 그런 생각은 나의 의지를 넘어서 '자동'으로 생성된다. 결국 나는 부정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다시 고개를 흔든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나저나 지금 해야 할 일부터 처리하고 생각하자.'

배보다 큰 물고기를 어떻게 배에 실을지 노인은 고민하지 않는다. 상어가 물어 뜯는 와중에 그 투쟁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지 그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고민을 하고, 생각도 하지만, 이내 그것을 세차게 흔들며 자신을 다잡는다.

다 소진한 무기들, 식사와 물. 그런 것들이 하나씩 소진되더라도 노인은 그저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모든걸 소진 한 후의 투쟁. 그때부터가 진짜 싸움이다. 동기부여와 에너지가 충만하고 왜 해야 하는지도 명확하고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과 환경도 완벽할 때, 그때의 도전은 진짜가 아니다. 그런 것들이 모두 소진되고 스스로의 의심이 스스로를 갉아 먹고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정신을 차리다가를 반복하는 그런 나약해진 그 지점.

자신의 약점이 여실하게 자신에게 보여질 때, 그때부터 진짜 싸움이 시작된다. 노인과 바다는 단순히 물고기를 낚는 노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데 우리가 우리에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알려준다.

이 소설은 사실, 몇 번의 소설을 읽었으나, 가끔 구독하여 영상으로 뜨고 있는 유튜버 '만만송' 님의 추천을 보고 재독했다. 누군가가 '추천'하는 책을 볼 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저 사람은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었을까.'

그러고 나면 역시 책은 다른 의미로 읽혀진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두 번째에는 느껴지지 않던 것들이 느껴진다. 헤밍웨이는 이 소설이 너무 다양한 각도로 해석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저 노인이고 그저 소년이고 그저 낚시하는 이야기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독자는 거기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찾아낸다. 생각해보면 지는 낙엽을 보고 청춘이나 쓸쓸함을 떠올리는 것은 '낙엽'이 그 의미를 숨겨 두고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낙엽'을 보고 그런 마음을 찾아내서 그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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