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 취침의 기적 - 엄마와 아이의 습관을 바꾼 탁월한 선택
김연수 지음 / 끌리는책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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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전사를 전역하신 '아버지'는 만 스물이 됐을 때, 나에게 군입대를 권하셨다. 덕분에 자대에 배치된 이후에도 한동안 나이 많은 후임이 계속 들어오곤 했다. 그때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이 있다.

"뭣 모를 때, 후딱 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알고는 못하는 일들이 있단다. 꽤 혹독한 군생활을 했던 아버지의 진심어린 조언이었다. 가끔 그런 말이 떠오를 때가 있다. '

뭣 모를 때 후딱'

세상에는 엄청난 용기를 요하는 일들이 있다. 간혹 콘센트 구멍에 젓가락을 꽂는다던지, 뜨거운 냄비를 양손으로 덜썩 잡는 일도 그렇다. 그런 일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다만 세살 배기 아이들은 그런 일들을 너무 쉽게 해낸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용감해서가 아니다. 뭣모르기 때문이다. 가끔 '무지'가 많이 아는 것 보다 필요할 때가 있다. 사람의 '의지력'에는 '총량'이 있다. 인간은 '고민'하거나, '의지'를 내보이는 일에 '정신적 에너지'를 사용한다. 고로 '의지'와 '고민' 따위의 정신력은 '소모품'이다.

고등학교에 재학 할 때, '친구'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친구는 어머니께 자취방에 있는 TV를 치워 달라고 했다. 그때 '친구'의 어머니는 '네가 보지 않으면 되는 걸, 왜 치워야 하냐'고 말씀하셨다. 그날 저녁 '친구'는 신발장 서랍에 있던 장도리를 꺼내어 자취방 TV의 브라운관을 부숴 버렸다. 굳이 불필요한 유혹을 만들어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에 '의지력'을 시험할 필요가 없다. 그저 없거나 모른다면, 의지력은 다른 방향에 사용될 수 있다.

우리집 아이들 취침시각은 8시다. 그마저 늦다고 7시 30분에 자기를 종용한다. 아이에게 일찍 잠에 들기를 권하는 이유는 '기상시간' 때문이다. 조금씩 앞으로 당기던 기상시간은 이제 4시 50분으로 당겨졌다. 4시 50분이면 로봇청소기가 최대 출력으로 돌아간다. 침실 불은 가장 강한 빛으로 방을 밝힌다. 또한 집 전체 창문이 열려 강한 바람이 집안 전체를 감돌아 나간다. 그때, 거실 안락 의자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으면 아이는 어느덧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가지고 나와 무릎에 앉는다.

SBS에서 방송한 '공간의 힘'이라는 '다큐멘터리'에 굉장히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다. 일본 최고 명문대인 도쿄대생의 83%가 '거실공부'를 한다. 아이가 반드시 명문대를 졸업할 필요는 없지만 명문대생은 '학생의 본분'에 적합한 학창시절을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침실'은 잠을 자는 공간, '부엌'은 요리와 식사를 하는 공간, 거실은 말그대로 'Living Room'이다. 놀랍게도 동양에서도 거실은 한자로 살 거(居), 집 실(室)을 사용한다. 동서양 할 것 없이, 거실은 '주 거주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는 '많은 대화'가 이뤄진다. 다만 요즘 대한민국의 거실은 '방'에 가기 위해 '거쳐 가는 공간'으로만 사용된다. 거실에는 다양한 책들이 놓여 있다. 독서는 '호기심'으로 시작하여 '관심'으로 이어지고, '연결'로 넘어간다. 부모의 관심사나 자녀의 관심사가 한데 섞여 진열되어 있을 수 있다. '서재'를 보면 '그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다. 아이는 부모를 알 수 있고, 부모는 아이를 알 수 있다. 설거지하며 공부하는 아이와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공부하며 설거지하는 엄마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대부분의 '교육전문가'는 '독서'보다 '대화'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교육 전문가라면 그 무엇보다 '독서'가 우선이라고 말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아 아이는 이제 막 시간을 배우고 있다. 늦은 감이 있다. 여덟살이 아직 시계를 볼 줄 모른다고 하면 누군가 웃을지도 모른다. 한 번은 '시계읽기'와 '국어', '바슬즐'이라는 과목의 문제집을 선물 받은 적 있다. 절반 정도 풀어보다가 바로 쓰레기통에 집어 넣었다. 시계나 바슬즐은 생활에서 충분히 얻을 수 있다. 국어는 독서를 통해 대체 할 수 있다. '문제집'으로 아이의 학업을 평가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니, 아이는 새벽 4시 50분에 깨워도 '그런가 보다' 한다. 만약 이미 중학교를 다니고 있는 아이라면 4시 50분에 깨운다는 것 자체만으로 갈등이 생길 수 있다. 이미 '사회 통념'이라는 '시간'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고로 초등 저학년 때에만 가능한 일이 있다.

아는 지인은 초등하교 저학년 때부터 이미 다양한 학원과 과외를 받는다고 했다. 실제 지인의 아이는 꽤 똑똑했다. 그럼에도 아이에게 학원과 과외를 해주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하다. 학원을 다니는 순간, 아이의 손에는 '스마트폰'이 들려 있을 것이 분명하다. '하교'까지 스마트폰을 반납하는 학교를 마치면 아이들은 마음껏 스마트폰을 이용한다. 학원으로 가는 동안, 학원에서, 학원을 마치고 들어가는 짧지만 긴 짜투리 시간을 '스마트폰'으로 알차게 사용할 것이다. 그럴 것이면 차라리 그 세상을 모르는 편이 낫다. 또한 8시에 취침하고 나면 다른 아이들이 활동하는 시간에 잠에 들고 다시 아이들이 한참 자는 시간에 깨어난다. 개인적으로 동년배끼리 교류하며 배울 수 있는 것은 '학교'에서 충분하다고 본다. 학교 외에서 일어나는 '교류'는 대체로 '긍정적이지 못한 경우'가 훨씬 많다.

아이들은 '가정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가정에서 시간을 보내지 못하기 때문에, 최근들어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아이들이 대다수다. 과거 뉴스에서 '요즘 아이'에 관한 기사를 본 적 있다. 요즘 아이들이 '가정교육'에 관한 문제다. 물론 '소크라테스' 시대에도 어린 아이들을 보며 '요즘 사람들은...'이라는 기록이 있다고 하니, 어쩌면 내가 꼰대가 된 나이일지 모른다. 그러나 확실히 '요즘 시대'에 발빠르게 맞추지 않아도 되는 부분도 있다. 기본적인 예의와 규칙을 지키는 일, 자기 절제는 충분히 가정에서 배워야 한다.

물론 그러기 위해 부모인 나의 취침시간이 줄어든다. 그러나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아이에게 수백 만원의 옷을 입히고 과외를 붙이는 것 보다 부모가 몇 시간 잠을 줄이는 편이 훨씬 더 효율적인 투자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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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서
에르난 디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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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농장의 감자에 떨어진 빗방울도 한 때는 호랑이 방광에 들어 있었다."

'에르난 디아스'의 소설 '먼 곳에서'에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볼만한 가치 있는 글을 발견했다. 하나의 생명은 다른 모든 생명의 속성을 예측할 수 있다. 모든 것은 돌고 도는 순환계의 일부다.

수소 원자가 여럿의 모양으로 뭉쳐져 다양한 분자가 되는 과정에서 마지막 '철'의 형태로 폭발하면 그것은 우주 사방으로 퍼져나가 다른 무언가의 일부가 된다. 오늘 마신 물은 내일의 소변이 되고 그것은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되고, 다시 구름이 되어 누군가의 신체가 된다. 이렇게 돌고 도는 순환계에서 어떤 것은 '고정'되어 있고, '형태'를 짓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 강력한 '금강'과 같은 인식을 깨부수는 철학을 인도에서 '금강경'에 담았다. 이 고대 동양 철학을 닮은 '존재'에 대한 인식이 '에르난 디아스'의 소설에 한움큼 담겨 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을 하지 못하고 사는 유한한 인지력 탓에 우리는 어떤 것을 '낯설다'하고 표현하고, 어떤 것을 '익숙다'하고 표현하지만, 그것은 인식의 표면에 불과할 뿐 모든 것은 이미 그대로 '하나'로 존재한다.

신은 인간을 창조했다. 다만 인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불과 500만 년으로도 인간적 특징을 잃어 버리기 시작한다. 그 지리한 변화와 변화 과정에서 약간씩 사라지는 인간다움을 볼 때, 지금은 인류 역사상 가장 인간다운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며 미래 인간에 비해, 가장 인간답지 못한 인간이 사는 세상일지 모른다. 우리 인간도 45억 년만 뒤로 거슬러 올라가면 기껏해봐야 '먼지' 같은 분자였을 뿐, 그 어떤 인간도 존재한 적 없다. 고로 어떤 먼지 분자들이 어떻게 결합하였는지에 따라, '너'가 되고 '나'가 된다.

미국 서부 개척시대에 이민자들은 그렇게 '존재 아닌 존재'로 '존재'를 확인해가며 '존재'로 거듭난다. 하나씩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그들이 인식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창조해 나간다. 과연 그렇지 않은가. '미국'이라는 나라도 최초에는 '존재'하지 않던 '무존재'일 뿐이며 어찌 이방인과 원주민이 다를 수 있고 낯설음과 낯익음이 다를 수 있나.

기껏해봐야 30개도 되지 않는 문자 기호의 나열로 '햄릿'과 '해리포터'가 만들어지고 그 작은 숫자의 배열을 한줄 한줄 쌓는 것만으로 하나씩 사라진 시간과 세계가 창조된다.

'에르난 디아스'의 장편소설 '먼 곳에서'는 차근 차근 하나씩 쌓아가는 서사들로 황량한 서부개척시대의 미국을 묘사해 나간다. 그 시대와 공간을 한땀 한땀 정성스럽게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독자는 점차 그 공간과 시간을 함께 살아가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의 소설은 마치 존재를 만들어내는 무존재와 같다. 신체 없는 두뇌는 시간을 따라 하나씩 신경절을 만들어내고 다시 그것이 구조물을 짜게 한다. 두뇌에서 시작한 세포막은 신경절로, 다시 뼈로 이어진다. 척추는 두개골로 시작했고 척추라는 중심 기둥은 다시 부속물이 뻗어나와 팔과 다리를 만들어내고 손가락과 발가락을 뻗어 낸다. 그런 의미에서 '신체'란 '정신'이 만들어낸 구조물로, 생각과 의지가 실제 우리를 만들어낸다.

마치 어두캄캄한 지도를 하나씩 밝혀 나가는 듯한 방식으로 소설은 공간과 시간을 열어 젖힌다. '에르난 디아즈'의 소설 '먼 곳에서'는 이런 사유를 계속해서 확장시킨다. 주인공 '호칸'은 스웨덴에서 출발해 뉴욕으로 가는 과정에서 실수로 '캘리포니아'를 간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형을 찾아 미국 대륙을 횡단한다. 이때 만나게 되는 다양한 인물과 도전, 그것은 단순히 '서사'에 그치지 않는다. 여기서 만나는 다양한 '철학'은 소설을 꽤 깊이 있게 만든다. 이민자의 고립과 외로움, 생존에 대한 이야기, 자연과 인간의 관계, 존재와 무존재 등 그 시대와 지금 이 시대에도 동시에 관통하나는 본질적인 이야기를 하나씩 얻게 한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다. 실체와 정체성, 연결과 고립에 관한 사색으로 가득찬 여행이다. 그저 삶을 이어가기 위한 '생존'이 아니라, '자아'를 찾는 여정이다. 미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지, 그가 맞닥뜨리는 다양한 인물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는 어떻게 형성할 것인지 끊임없는 고민을 한다. 호칸의 철학적 고민과 사색은 곧 독자에게 이어져 같은 사색과 고민을 하도록 한다. 소설은 깊이 있는 서술과 서정적인 묘사을 한다. 단순히 과거를 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 인간의 존재에 대한 탐구를 하게 한다. 즉 '호칸'이라는 인물의 '과거'를 통해 우리는 '나'라는 인물의 '현재'와 '미래', '과거'를 모두 통찰 할 수 있는 교훈을 던진다.

"스웨덴 농장의 감자에 떨어진 빗방울도 한 때는 호랑이 방광에 들어 있었다."

동양의 금강경처럼 그것이 그것이라는 강력한 인식을 깨어 버릴 수 있도록, '그것'은 곧 '나'이며, '나'는 곧 '우리'이며, '우리'는 곳 '우주 전체' 임을 알 수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존재와 무존재 중 '무존재'로 규정할 수 있는 '생각' '혹은' '파장 덩어리' 이겠지만, 이또한 어떤 형태로 변형하여 이곳으로 이식된 '전체'의 일부이다. 이것은 다시 '나'가 되고, 다시 '나'를 빠져나와, '누군가'가 될 지 모른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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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신데렐라는 시계를 못 본대 - 개정판 초등 1.2학년 수학동화 시리즈 1
고자현 지음, 김명곤 그림, 한지연 수학놀이 / 뭉치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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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항상 '사람'일 수 없다. 아이는 책을 보며 물었다.

"아빠 우리가 '강아지'야?"

무슨 말인고 하니, 동화책의 화자는 '강아지 1인칭 시점'이다. 그렇다고 일러주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이것이 독서가 주는 묘한 매력이다. '개'의 시점으로 여행을 하다니...

함께 읽기의 '매력'이기도 했다. 아이는 '우리가 강아지야?'라고 말했다. 그렇다. 우리는 마치 강아지의 '영혼' 속으로 함께 들어가 상황을 함께 관찰하는 관찰자가 됐다. 같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자아'를 공동형성하는 길이지 않은가.

E.H 에릭슨은 '자아'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과거와 현재의 자아연속성은 타인과 구별되며 언제나 과거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 미래의 자신이 이어진다."

이를 '자아동일성'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태어남의 순간부터 단 한 번도 '타인'을 경험할 수 없다. 그러나 '타인'은 경험할 수 없던 '물리적 한계'는 인류 탄생 20만 년 간 지속됐다. 20만년 간 모든 인류는 글을 읽지 못했다. 고로 타인의 생각은 '말'을 통해서만 인지했다. 고로 한계는 명확했다.

항상 대면해야 했다. 시공간을 공유해야 했다. 공상과 같은 상상은 머릿속에서 스치고 지나가는 일이며 입밖으로 내뱉을 때 정신이상이라 할 수 있지 않나. 다른 누군가의 '독백'과 '상상'을 훔쳐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2000년 후 글과 종이가 체계를 갖추고 우리는 '상상'을 저장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이 얼마나 놀라운 발견인가. '상상'을 저장하고 꺼내어 다른 사피엔스에게 이식했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보면 '유대 문화'와 분리 할 수 없다. 동방의 작은 종교가 '로마'라는 거대 제국을 만났다. 제국의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전세계 역사는 판을 새로이 짰다.

유대민족은 아주 독실한 민족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뿌리를 '글'로 기록했다. 그드리 믿는 신앙도 글로 기록했다. 불특정 다수를 하나의 매개로 묶는 가장 중요한 단위는 '혈연'이다. 우리도 '단군 할아버지'로 민족을 묶지 않던가. 성경 구약을 보면 누구의 아들이 누구를 낳고, 그가 또 누구를 낳는다는 지리한 족보가 이어진다. 이는 혈연으로 이어진 민족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결국 혈연으로 이어진 민족은 '가족 단위'에서 확장된 '자아'의 확장이다. '상상의 매개'는 다수를 연결한다. 유대민족들은 그 공동체를 연결하기 위해 '성경'을 익혔다. 그들의 신앙은 얼마나 독실하냐면 매일 세 번의 '성경 읽기'를 한다. 이들은 '토라(모세오경), 시편, 탈무드 등의 글을 꾸준히 읽힘으로써 자신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연결했다.

의사들은 환자에게 약을 주며 말한다. '식후 30분에 드세요'. 그러나 실제로 약효와 '식사'는 큰 연결성이 없다. 대체로 약은 그 약효가 4시간을 지속한다. 결국 하루에 3번, 12시간 약효를 지속 시키기 위해 의사들은 '4시간 간격으로 3회'라는 말대신 '식후 30분'이라는 주문을 한다. 이는 '유대인'을 '책의 민족'으로 기르는 문화를 닮았다. 이들은 하루를 몇 번으로 나누고 그 기준은 대체로 식사 시간과 태양의 위치였다. 그들에게 '시간'은 그런 의미다. 태양의 위치에 따라 일출, 정오, 일몰이라는 세 단계로 기도를 하고, 책을 읽었다. 그 시간은 역시 '식사 시간'이다. 하루에 3번 식사 시간이 30분씩이라고 하더라도 1년이면 547시간이다. 10년이면 5,475시간이다. 열 살인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책을 읽는다면 아이는 성경을 5,475시간이나 읽는다. 대한민국 성인의 평균 연간독서 시간이 20시간이다. 고로 대한민국 성인은 10년간 고작해봐야 200시간의 책을 읽는다. 유대인의 5000시간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다. 결국은 습관과 루틴이 중요하다. 이미 습이 된 행동에 동작에 연결하는 것은 왜 중요한가.

이렇게 10년간 5000시간의 성경을 읽어온 청소년은 성인이 되면, 습관을 그대로 두고 '컨텐츠'를 바꾼다. 즉, 얼마나 많은 시간을 독서에 할애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문해력은 고로 경쟁력이 됐다. 독서가 주는 힘은 그렇다. 지속적인 독서습관을 가진 이들은 문화적으로, 습관적으로 거의 알아차릴 수 없는 차이를 가지고 있다. 나의 경쟁 상대가 그 짧은 아침, 점심, 저녁 시간 30분의 짧은 순간에 엄청난 경쟁력을 쌓고 있다고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을까. 마치 세계대전에 방관하던 미국이 본격적으로 '모든 산업'을 군수 산업으로 전환하면서 승리를 겪었던 바와 같다. 모든 준비는 소리없이 진행된다. 결국 프로세스는 그대로 두고 컨텐츠만 빠르게 전환하면서 원하는 바를 얻어 갈 수 있다. 아이에게 '쉿! 신데렐라는 시계를 못본대'라는 책을 읽어줬다. 요즘 아이에게 읽어주는 책이 많아지면서 모든 아동 도서를 리뷰할 수 없다. 다만 이 책은 '하율'이가 '너무 재밌어서 또 보고 싶다'고 했던 책이다.

아침 다섯시 기상, 두 시간 동안 아빠와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눈 프로세스는 10대가 되면 그 자리에 다른 컨텐츠를 두고 제 역할을 할 것이다. 20대에는 다시 컨텐츠를 바꾸어 제 역할을 할 것이고, 30대에도 그럴 것이다. 결국 '독서습관'은 프로세스를 짜는 일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프로세스는 언제나 옳은 길을 인도하진 않는다. 성적이건, 취업이건, 돈이건 어떤 것이 될지 모르지만 모든 면에서 '독서'가 답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부자가 되거라' 혹은 '공부를 잘하거라'보다 '책을 읽어라'라는 주문이 더 중요한 이유는 그럴 때가 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원하는 바가 생길 때, '프로세스'는 컨텐츠 전환에 모든 에너지를 쏟게 한다. 명마를 갖고 있다고 매순간 달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명마는 아주 중요한 순간에 빠르게 달려 나가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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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9
제임스 M. 케인 지음, 이만식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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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시작했으나 그 느낌은 확실히 아니다. 한 편의 잘 짜여진 '느와르' 영화를 본 느낌이다. 도입과 동시에 소설은 갑자기 속도를 높인다. 호흡은 줄 곧 이어진다. 급작스러운 불륜, 사랑, 살인 등 극적인 재미가 이어진다. 앉은 자리에서 완독하지 않을 수 없다.

왜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렸을까. 소설이 끝날 때까지 그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소설의 '원어 제목'을 찾아봤다.

'The postman always rings twice'

Postman에는 이중적 의미가 있다. 하나는 '우편배달부'이고 다른 하나는 농구 경기에서 내부 공격을 주도하는 선수를 지칭하기도 한다. 작가가 의도한 바인지 알 수는 없다.

지금과 같이 SNS가 발달된 시대에는 모든 정보를 쉽고 가볍고 빠르다. 다만 과거는 그렇지 않다. 과거 우편을 보내는 일은 가벼운 일이 아니다. 진중한 '글'을 써야하고 그것을 보내는 '시간'과 '정성', '비용'을 들여야 한다. 고로 배달부가 찾아 온다는 것은 '묵직한 이야기'가 찾아 올 가능성이 높다. 우편배달부는 '사망통지, 전쟁, 결혼' 등 굵직한 사건을 전달하는 인물이다. 이들이 벨을 두 번이나 울리는 이유는 그 정보의 다급함 때문이다. 사안에 따라 전달자는 소식 전달을 급박히 전달한다. 어떤 소식이기에 그들은 그토록 수신자를 독촉하는가. 그 정보가 '결혼'이기보다 '사망'일 때, 그렇지 않은가.

운은 영어로 'Fortune'이다. 이 단어의 어근은 Fort이다. Fort는 '힘(Force)'와 어원을 공유한다. 즉, 운이란 '거부할 수 없는 힘'을 의미한다. 운명은 수신자에게 일방적으로 수신을 '독촉'한다. 운명이 건내주는 수신은 거부할 수 없다. 그것을 받기까지 운이라는 포스트맨은 벨을 다급하게 누르며 그것을 투척하고 사라진다.

다르게 볼 수도 있다. 배달부는 항상 벨을 두 번 누른다. 즉 우편을 받은 쪽은 상대에게 다시 '답'을 한다. 배달부는 결국 물음을 전달하고 답을 가져온다. 이를 굳이 따지자면 '인과응보', '카르마'로 볼 수 있다. 우리말로 뿌린대로 거둔다. 전달된 원인은 반드시 어떤 방식으로든 결과를 가져온다. 소설은 사건 없이 잔잔하던 일상에 한 기폭제를 시작으로 사건을 전개한다. 그 사건은 다른 사건을 불러온다. 그렇게 불러온 사건이 또다른 사건을 불러오며 이야기는 점차 확대된다.

모든 것이 그렇지 않은가. 사실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면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다만 도미노의 첫 번째 블록처럼, 하나의 블록을 넘어 뜨리면 연쇄적으로 다른 사건의 문이 열린다. '카르마는 돌아온다.' 누군가를 향했던 날선 위협이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다.

다른 해석으로 해 볼 수도 있다. '포스트맨'은 보통 농구 경기에서 '득점'을 시도하는 '선수'를 지칭한다. 일반적으로 팀내에 가장 키가 큰 선수가 맞으며 수비와 공격 중 '리바운드' 혹은 '몸싸움' 등을 한다. '리바운드'는 던진 공이 골대를 맞고 튕겨 나올 때, 그것을 다시 잡는 행위다. 즉, 농구에서 포스트맨은 한 번의 결정적인 득점을 위해 튕겨져 나온 공을 다시 잡는다. 그리고는 다시 던진다. 농구 골대의 링(Ring)이 울리면 골(목표)을 향한 시도인 셈이다. 이들은 튕겨 나온 공을 다시 던지며 '링'을 울린다. 그들은 항상 최소 두 번의 '링'을 울린다.

제목이 어떤 의미를 갖던 상관없이 소설은 다양한 생각할꺼리를 던져 준다. 소설의 본질은 '메시지'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재미다. 이런 이유에서 이 소설은 잘 쓰여졌다. 고전이라는 묵직함이 때론 진입장벽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빠르게 읽히는 추리소설에 익숙한 사람들도 아마 재밌게 읽을 수 있을 듯 하다. 고전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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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2 - 개정판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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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2, 드디어 완독이다. 2권은 거의 '오디오북'으로 들었다. 도무지 종이책을 펼 물리적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간만에 '집안 대청소'를 했다. 간단한 정리로 시작했으나, '윌라 오디오북'으로 이야기를 들으면서 점점 없던 시간을 만들어 낸 탓이다. 개인적으로 종이책으로 이 소설을 접한 이들도 꼭! '윌라 오디오북'으로 소설을 접해 보길 권장한다.

오디오북에서는 상황에 따라, 배경음악이 흘러 나오는데, 이 음악이 어찌나 절묘한지 마지막 소설의 끝 배경음악이 잔잔히 귓속에 흘러 들어갔다.

'선자'와 '한수'의 이야기로 소설은 시작한다. 가벼운 '로맨스 소설'을 연상케 했다. '재일동포'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라는 소개는 이미 잊었다. 과연 이 둘의 '사랑'이 과연 어떻게 전개가 될까. 소설은 그 전개가 무척이나 빠르지만 읽는 동안 그 속도감을 느낄 수 없었다. 이는 '지루함'과 다르다. 미묘한 변화를 모두 느낄 수 있다는 의미다. 이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마치 진짜 인생을 닮았다. 소설을 보고 삶을 돌이켜 보게 된다. 삶은 이상과 다르다. 나에게 꽤 이상적인 현실이 다가왔을 때, 그것이 제 몫이 아닌 줄 알면서 덥썩 물어 곤경에 처하는 것이 꼭 삶을 닮았다.

갑작스러운 반전은 예고 없이 왔다. 모든 문제에 정답이 존재할 거라는 '착각'으로 괴로워하던 '어린 시절, 나'가 그대로 떠올랐다. 살면서 때로 '정답 없는 문제'를 만날 수도 있다. 가만 보면 그 문제는 '정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정답'이 아닐 뿐이었다. 피하지 못할 상황이 다가와도 어쨌건 시계 바늘은 움직이고 이렇게 살아있고 상황은 어느덧 꽤 과거가 되곤 한다.

'인생지사 새옹지마'를 떠올리게 한다. '분'에 넘치는 행운에는 꼭, '분'에 걸맞는 이유가 있다. 과한 고통 뒤에는 꼭 그만한 행복도 있다. 사람 사는 것이 다 비슷하다. '파친코'는 재일동포를 빌어 삶을 말한다. 소설은 한 사람의 이야기에서 다른 한 사람으로 자연스럽게 서사를 옮긴다. 다시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이야기를 넘긴다. 그 과정이 얼마나 매끄럽던지 세대가 바뀌어가며 '주연'이 점차 '조연'이 되어 간다. 풋내기 십대 소녀가 점차 '할미'가 될 때까지 이야기는 너무 자연스럽다.

'윌라 오디오북'은 각각 주인공의 나이마다 다른 목소리를 사용하며 더 생동감을 준다. 이 소설이 현실적인 이유는 어렵게 형성해 온 '캐릭터'들을 간결하고 허무하게 망가트린다. 주인공이라면 반드시 '해피앤딩'으로 끝나야 하는 여타 문학에 비해 꽤 현실적이다. 잘 이어가던 중 갑작스러운 이유로 모든 걸 내버리거나, 감정을 이입하던 주체가 갑자기 허무하게 생을 마감해 버린다.

개인적으로 '해피엔딩'의 영화나 소설을 그닥 좋아하진 않는다. 후반부 결말로 다가 갈수록 모든 갈등이 말끔이 해결된다. 차라리 화성에 감자를 심고 생존해 내는 내용이 훨씬 더 현실성 있어 보인다. 모든 갈등이 말끔히 해결되는 결말은 중반부 부터 호기심을 극도로 낮춘다. 어차피 모두 해결 될텐데 뭐...

어차피 '비현실'을 본질로 두고 있는 '소설'에서 '현실성'을 찾는 것이 '얼토당토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극의 몰입을 무너뜨리는 비현실은 '소설'에서 주의해야 할 부분이다. 현실에 기반을 둔 이 소설에 몰입되는 이유다.

근 10년 간 해외에서 '이방인'으로 생활했었다. 일하던 '가게'에서 '절도범'을 잡더라도 여차하면 '추방'을 각오할 정도의 위험을 가져야 하는 불안한 거주는 경험해 본 적 없는 불안감이었다. 혹여나 비자가 연장되지 않을까, 고용주에게 맡겨지는 '파리 목숨' 같은 삶도 그렇다. 모국어가 아닌 방식으로 '사업'과 '생활'을 하며 느끼는 고독함. 자칫 '현지인'을 일등시민처럼 생각하는 말 못할 열등감도 스스로를 작아지게 만들었다.

생각할꺼리가 풍부한 이 소설은 분명 손에 꼽는 소설 중 하나가 될 것 같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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