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받을 용기 (200만 부 기념 스페셜 에디션) -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 1
기시미 이치로 외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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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분리'

나는 나의 과제에 최선을 다하고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

몹시 중요한 말이다. 살다보면 저도 모르게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는 경우가 있다. 듣기 싫은 잔소리를 하는 상대를 불편하게 여기거나, 말을 듣지 않는 상대를 바꾸려는 행위도 그렇다.

술 먹고 늦게 들어오는 남편 이야기, 공부하지 않는 자녀의 이야기, 쉴새 없이 잔소리를 늘어 놓는 아내의 이야기 등 일상적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다양한 스트레스의 원인은 '관계'에서 비롯된다.

관계에서 자유롭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바로, '과제 분리'다. 나는 나의 과제에 최선을 다하고, 타인은 타인의 과제를 하도록 두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주의와 다르다. 그것은 존중하고 엮이지 않으며 서로 행복해지는 일이다.

보통의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외부적 원인'을 찾는다. 함께하는 주변인이 바뀌거나 상황이 조금 달라지거나와 같은 일 말이다. 이처럼 행복을 외부적인 원인으로 둘 경우 우리가 행복을 위해 취할 수 있는 자세는 굉장히 제한적이다. 상황을 바꾸어야만 겨우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우리에게 '외부'를 바꾼다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관점은 '주체성'을 잃어 버리기 쉽다.

'아이가 공부만 한다면 소원이 없겠다' 혹은 '남편이 술만 좀 줄이면 소원이 없겠다' 등, 우리는 불행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다. 여기서 우리가 주체성을 갖고 능동적인 대처를 할 수 있는 일은 외부에 간섭하는 일 밖에 없다. 관계에 더 얽히게 될 수록 우리는 원치 않은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상황이 바뀌지 않더라도 모두는 행복해 질 권리가 있다. 나의 행복이 중요한 만큼 상대의 행복도 중요하다. 나의 행복을 위해 외부에 간섭을 시작할 때, 상대와 대립이 생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상대에게 간섭하는 것은 상대의 행복을 저해하는 일이다. 고로 '나는 나, 너는 너'라는 스탠스를 취하는 것이야 말로 모두가 행복해지는 일이다. 이는 개인주의나 이기주의와는 확연하게 다르다.

프로이트는 '원인론'을 가지고 현재를 분석했다. 과거의 어떤 사건이 현재의 '자아'를 형성한다는 의미다. 이와 반대로 아들러는 '목적론'을 가졌다. 현재의 상태를 목적으로 두기 위해 '과거'를 이용한다는 의미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프로이트는 과거에 불행했던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는다고 여겼다. 이 트라우마는 현재까지 영향을 끼치며 지금의 '자아'의 상태를 결정한다. 고로 과거에 커다란 사건이 있는 사람은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불행한 삶을 이어나간다. 반면 '아들러'는 다르다. 아들러는 현재의 '불행'을 위해서 과거의 '기억'을 소환해 낸다고 여겼다. 과거의 기억이 원인이 되어 현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울과 불행에 대한 합리성을 과거에서 가지고 올 뿐이다. 즉 우울과 불행이 먼저고, 그것에 대한 합리성을 갖기 위해 과거의 기억을 가져 올 뿐이다.

이는 굉장히 명쾌하다. 프로이트는 '원인론', 아들러는 '목적론'이다. 이 완전히 다른 시각은 '주체성'을 다르게 한다. 프로이트의 '원인론'에서 '현재의 자아'가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드믈다. 과거의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아들러'의 목적록은 불행하기 위해 과거를 이용할 뿐이다. 즉, 자신이 행복하기로 마음을 먹으면 언제든 행복해 질 수 있으며 언제든 자신이 선택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행복에 대한 관점을 외부에 둘 것인지, 내부에 둘 것인지는 굉장한 차이가 있다. 아들러의 '목적론'으로 자아를 살펴보면 우리는 '행복'을 먼저 결정하고 다른 감정과 기억은 그것을 이용하는데 사용할 뿐이다. 즉, 우리는 어떤 일이 발생하여 화가나는 것이 아니라, 화가나기 때문에 그 이유가 필요할 뿐이다.

이런 주체성의 원리는 '과제 분리'에서 더 명확해진다.

아무리 선인, 현자라고 하더라도 누군가에게는 분명히 미움을 받는다. 오죽하면 '붓다'나, '예수', '공자'와 같은 성인들도 어떤 누군가에게는 미움의 대상이 된다. 즉 누구에게도 미움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인류 역사 20만 년 중1000억 명의 사람이 이땅에 죽고 나면서 단 한명도 경험해 보지 못한 불가능한 일 중 하나다. 그것을 해내려고 하니 그것은 태양 불을 물로 끄는 것과 같은 도전이다. 그런 불가능한 꿈을 꾸니 현실에서는 좌절하고 과거에서 좌절한 현실의 이유를 가져 오는 것이다.

우리 또한 누군가를 미워할 때가 있다. 우리가 미움을 주는 대상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들이 미워할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를 미워하기로 정해두고, 그의 행동에서 원인을 찾는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그들을 좋아하기로 결정한다면 우리는 너무 쉽게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을 멈추게 된다.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미움 받을 가능성'이 있다. 조금더 명확하게 말해보자면 '받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받는다. 앞서 말한 많은 성인, 현자도 피해가지 못하는 것이 '미움'이다. 고로 일정한 확률로 우리는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며, 그들이 미워하는 행위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 것이 우리가 취할 행동이다.

그들이 나를 미워하는 것은 그들의 과제이고, 내가 거기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나의 과제이다. 서로가 서로의 과제에 최선을 다하다보면 어떠한 스트레스도 발생하지 않는다. 꾸준한 잔소리를 늘어 놓는이가 있다고 해보자. 모든 행동에 꼬투리를 잡고 지적한다고 해보자. 이런 잔소리는 분명 '스트레스'를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면 이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는 나를 미워할 권리가 있다. 나는 그의 말을 듣지 않을 권리가 있다.'

간단히 해서, 그가 하는 말에 간단한 대답을 하고, 자신은 그대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면 된다. 인간관계가 복잡하면 더 많은 스트레스에 노출된다.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10대와 20대 여성의 자살률이 크게 증가했다. 젊은 남성의 경우, '게임'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성취욕을 풀어가는 반면에 여성의 경우에는 SNS에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비교한다. 이 과정에서 젊은 여성의 행복도와 우울감이 크게 늘었다. 사람은 원래 살면서 '모르고 지나가던 것들'이 있다.

과거 초등학교 동창이 구매한 값비싼 자가용이라던지, 잠시 스치고 지난 인연의 성공담, 다른 학교로 전학 간 친구의 '성적' 또한 그렇다. 그러나 이처럼 잊혀져야 할 다양한 관계를 모두 끌어모아 SNS는 연결 시킨다.

'관계'는 열등감을 만들고 이러한 것은 '스트레스'의 원인이 된다. 다시 말하면 잊혀져야 할 것들은 잊혀져야 한다. 이민 간 초등학교 동창 친구의 점심식사 메뉴까지 확인할 수 있는 세상에서 우리의 행복감은 점차 '외부'로 던져진다. 과연 우리의 행복을 결정 짓는 것은 누구의 몫인가.

우리는 우리의 행복을 결정 지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프로이트'의 원인론보다는 아들러의 목적론에 굉장한 관심이 필요하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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