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뭐라고 - 시크한 독거 작가의 일상 철학
사노 요코 지음, 이지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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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코의 요리는 풍성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쳤고 큼직큼직했다. 유유코의 요리를 보고 깨달았다. 세에는 대범한 요리와 좀스러운 요리가 있다는 사실을. - P18

유리공예가인 마리는 "인간은 생산적이어선 안 돼. 쓰레기나 만들 이니까"라고 말했다. 본인은 실로 아름다운 유리공예품을 만들면서도 이런 말을 한다. "난 불가연 쓰레기를 만들고 있는 거야." 자각 있는 예술가는 훌륭하다. - P42

어릴 때는 어째서 바나나 냄새가 천국의 향기라고 생각한걸까. 부모님은 바나나를 꼭 반쪽씩만 주셨다. 한 개를 다 먹으면 이질에 걸린다고 했다. 베이징의 바나나는 어디서 왔을까. 타이완에서 왔을까? 죽기 전에 어떻게든 한 개를 온전히 먹고 싶었다. 우리 집만 그런 줄 알았는데, 친구에게 물어보자 모두들 바나나를 반쪽씩만 먹었다고 한다. "이질 걸린대." 그 뒤로 바나나는 자꾸만 저렴해졌다. 값이 싸지니 아무도 이질 같은 말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얼마든지먹을 수 있게 되고 나서야 나는 바나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나나는 과일이라는 느낌이 없다. 감자 같다. 파근파근해서 목이 멘다. 그런데도 집에는 항상 바나나가 있다. - P86

사람에게는 저마다 식사의 미학이라는 게 있다. 좋아하는 음식을 먼저 먹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최후의 순간까지 남겨두었다가 한입에 쏙 넣고 음미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나는 한 치 앞은 암흑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지금 지진이라도 일어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되도록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아 하는 성질 급한 인간이다. 그러나 남동생은 훨씬 선량하게 이 세상을 믿었다. - P96

아침에 추워서 이불 속에 파묻혀 있으면, 일어나기 전부터 통통통통 무를 채 써는 소리가 부엌에서 울려 퍼졌다. 멸치 우리는 냄새도 훅훅 풍겨왔다. - P100

생활은 수수하고 시시한 일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런 자질구레한 일 없이 사람은 살아갈 수 없다. - P221

"몇 년이나 남았나요?"
"호스피스에 들어가면 2년 정도일까요"
"죽을 때까지 돈은 얼마나 드나요?"
"1천만 엔"
"알겠어요. 항암제는 주시지 말고요, 목숨을 늘리지도 말아주세요. 되도록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럭키, 나는 프리랜서라 연금이 없으니 아흔까지 살면 어쩌나 싶어 악착같이 저금을 했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근처 재규어 대리점에 가서, 매장에 있던 잉글리시 그린의 차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주세요." 나는 국수주의자라서 지금껏 오기로라도 절대 외제 차를 타지 않았다. 배달된 재규어에 올라탄 순간 ‘아, 나는 이런 남자를 평생 찾아다녔지만 이젠 늦었구나‘라고 느꼈다. 시트는 나를 안전히 지키겠노라 맹세하고 있다. 슬데없는 서비스는 하나도 없었고 마음으로부터 신뢰감이 저절로 우러났다. 마지막으로 타는 차가 재규어라니 나는 운이 좋다.

- P242

그러자 나를 시기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요코한텐 재규어가 안 어울려." 어째서냐. 내가 빈농의 자식이라 그런가. 억울하면 너도 사면 되잖아. 빨리 죽으면 살 수 있다고. 나는 일흔에 죽는게 꿈이었다. 신은 존재한다. 나는 틀림없이 착한 아이였던 것이다. - P242

산 지 일주일 만에 재규어는 너덜너덜해졌다. 나는 주차가 서투른데 우리 집 주차장은 좁기 때문이다. 너덜너덜해졌을 뿐만 아니라 까마귀가 보닛 위에 매일 똥을 쌌다. 내게는 지금 그 어떤 의무도 없다. 아들은 다 컸고 엄마도 2년 전에 죽었다.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죽지 못할 정도로 일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남은 날이 2년이라는 말을 듣자 십수 년 동안 나를 괴롭힌 우울증이 거의 사라졌다. 인간은 신기하다. 인생이 갑자기 알차게 변했다. 매일이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건 자유의 획득이나 다름없다. - P243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나 자신이 죽는 건 아무렇지도 ㅇ낳지만, 내가 좋아하는 가까운 친구는 절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죽음은 내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찾아올 때 의미를 가진다.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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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매일매일 - 빵과 책을 굽는 마음
백수린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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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은
커다란식빵 같아

누군가 조금씩 나를 떼어
흘리며 걸어가는 기분

그러다 덩어리째 버려져
딱딱하게 굳어가는 기분

- 안희연, <메이트> 부분,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 P1

소설이 삶을 닮은 것이라면, 한길로 꼿꼿이 가지 못하고 휘청휘청 비틀댄다 해도 뭐 어떤가. 내가 걷는 모든 걸음걸음이 결국엔 소설 쓰기의 일부가 될 텐데. 길 잃고 접어든 더러운 골목에서 맞닥뜨리는, 누군가가 허물처럼 벗어놓고 간 쓰레기들과 죽은 쥐마저도 내 빵에 필요한 이스트나 밀가루가 될 텐데. 그러므로 그림자처럼, 한낮의 시간에는 더욱 짙어지는 익숙한 열등감과 수치심이 찾아오면, 이제 나는 그것들을 양지바른 곳에 펼쳐놓고 마르길 기다리며 찬찬히 들여다본다. - P2

제가 보기에는 언어의 결여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경험입니다.
-파스칼 키냐르 - 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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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이여, 안녕 마카롱 에디션
진 리스 지음, 윤정길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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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적 막장. 우울증과 조현병의 경계를 넘나드는 의식의 흐름이 감수성 하나로 예술이 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겐 도덕도 없고 상식도 없고 염치도 없다. 자극적인 유튜브 컨텐츠나 될 법한 이야기를 보며 세대 초월 인생은 이렇게도 매울수 있구나 싶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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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이여, 안녕 마카롱 에디션
진 리스 지음, 윤정길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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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검은 집들이 마치 괴물처럼 나를 내려다보는 어두운 밤길을 걸어간다. 돈과 친구가 있을 때 집들은 층계와 정문을 가진 그냥 보통집이다. 현관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반겨주며 미소를 짓는 그런 정다운 집. 모든 것이 안정되고 뿌리를 든든히 내린 사람이라면, 집도 그걸 알아차린다. 집들은 겸손한 태도로 가만히 서 있는 듯하지만 친구 하나 없고 돈 한 푼도 없는 불쌍한 녀석이 들어오려 하면, 그동안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집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밟아 죽이기라도 할 듯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선다. 반기는 문도, 불 켜진 창문도 없이 그저 눈살을 찌푸리는 어둠만 존재할 뿐이다. 얼굴을 험악하게 찌푸리고 곁눈질하며, 빈정거리면서 놀려대는 집들. 하나가 시작하면 이집저집들이 돌아가며 놀려댄다. - P41

아무 일도 없었어. 내가 아마 참나무처럼 단단한 건강을 가졌나 봐. 그러나 눈물을 흘릴 때는 예외였지. 그땐 강하지 못했으니까. - P56

겉으로 보기에 너무도 단순하고 단조로워 보이는 내 인생도 들여다보면 복잡하게 얽혀 있. 즉 나를 좋아하는 카페와 나를 싫어하는 카페, 내게 친절한 길과 불친절한 길, 내가 행복할 수 있는 방과 그렇지 않은 방, 내 모습이 괜찮아 보이는 거울과 그렇지 않은 거울, 내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옷과 불행을 가져다주는 옷가지들로 복잡하게 얽힌 인생이 바로 내 인생이다. - P60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외향적 인간들이다. 뭘 좀 재미있는 게 없나 하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남을 간섭하는 이런 사람들이 조심해야 할 대상이다. - P64

나는요, 인생을 이렇게 봐요. 누가 내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느냐?‘고 물으면 내 대답은 ‘아니다.‘예요. 분명 나는 그렇게 대답했을 텐데, 단지 아무도 내게 그걸 묻지 않았지요. 내가 여기 있는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에요. 내 일생에서 발생한 대부분의 사건들은 내가 의도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나는 내 자신에게 항상 이렇게 말한답니다. ‘너는 네가 부탁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세상을 이렇게 만든 것은 네가 아니다. 네 지금의 모습도 네가 만들지 않았다. 그러니 네 자신을 괴롭히지 마라. 그러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너는 그럴 권리가 있잖느냐? 너는 세상을 이 꼴로 만든 죄 많은 자들 중 하나가 아니니까.‘ - P82

그녀가 우는 건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기 때문이었어요. 그녀의 흐느낌이 그걸 말해 주더군요. 제 추측이 틀림없어요. 마치 어떤 음악을 들으면 금방 무얼 느끼는 것과 같은 거지요. - P116

모든 여성들은 다 잔인한 눈빛을 가졌나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대부분의 인간이 잔인한 눈을 가졌지요. 자기도 모르는 무표정한 핏빛 잔인함. 나는 알지요. - P119

내 기분은 최상이다. 모든 것은 거칠 것 없고 부드러우며, 온화하게 움직인다. 에노와 나눈 사랑의 행위, 우리가 관람한 그림의 색채들, 황혼, 황혼이 질 때 나타나는 부드러운 북유럽의 색채들-분홍, 초록, 파랑 그리고 담자색. 바람은 신선하고 차며 수로에 켜논 불빛은 황금 애벌레 색이다. 바다갈매기가 물 위로 급강하한다. 기분은 최상이다. 모든 것이 온화하며 또한 울적하다. 마치 인생이 어떤 순간 그러하듯... - P139

자, 생각해 봐요. 인생을 야릇하게 만드는 건 이런 이상한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도, 사람들이 그 사건들을 겪어냈기 때문도 아니라니까요. 이런 괴상한 사건이 결국 잊혀진다는 사실이 인생을 요지경으로 만들지요. 우리가 생각하기에 천추와 같았던 어떤 시간이 결국 퇴색되고, 잊혀지며, 뇌리에서 사라진다는 것, 이것이 인생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거라니까요. 우리가 결국 잊게 되고 그러니까 매일이 새로운 날이 되겠죠. 그래서 누구에게나 희망이 있는 거예요. - P167

몸조심하세요. 힘들게 노력하면 당신 이름의 약자가 새겨진 모조 담뱃갑 정도는 갖게 될지 누가 알겠어요? - P182

그래, 난 강한 여자야. 나는 죽은 사람처럼 강하단다.

그렇게 강한 사람이 눈은 왜 감고 있지?

왜냐하면 죽은 자는 눈을 감고 있어야 하니까. -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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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무라카미 하루키.가와카미 미에코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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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에 관한 건 대개 레이먼드 챈들러에게 배웠어요. 챈들러는 그야말로 비유의 천재니까요. 가끔 아니다 싶을 때도 있지만, 좋은 건 말도 안 되게 좋죠. 비유란 의미성을 부각하기 위한 낙차라는 거죠. 그러니까 그 낙차의 폭을 혼자 어느 정도 감각적으로 설정하고 나면, 여기에 이게 있으니 여기서부터 낙차를 역산하면 대략 이쯤이다 하는 걸 눈대중으로 알 수 있어요. 역산하는 게 요령입니다. 여기서 쿵하고 적절한 낙차를 두면 독자는 눈이 확 뜨이겠지, 하는 식으로요. 독자를 졸게 만들 수는 없잖아요. 슬슬 깨워야겠다 싶을 때 적장한 비유를 가져오는 거죠. 문장에는 그런 서프라이즈가 필요해요. - P1

위대한 개츠비는 기본적으로 1인칭 소설입니다. 챈들러의 작품도 1인칭 소설이고, 호밀밭의 파수꾼도 1인칭 소설. 저는 원래 1인칭 소설을 무척 좋아하는데, 그런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다들 어느 시점에서 1인칭을 버리죠. 챈들러는 예외지만, 그건 시리즈물이라 도중에 스타일을 바꿀 수 없으니까요. 작가가 점점 3인칭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는 건 이야기가 진화해서 복합화, 중층화하는 과정의 숙명과도 같습니다. - P2

(리얼리티가 없을까봐 정보를 확실하고 구체적으로 쓰는 등 신경을 쓰면) 이야기가 재미없어지죠. 리듬이 죽어버리니까요. 늘 하는 말이지만, 뛰어난 퍼커션 연주자는 가장 중요한 음을 치지 않아요.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 P3

나는 지상에 있는 자아에는 전혀 흥미가 없다. 이를테면 저는 사소설 작가들이 쓰는, 일상적인 자아의 갈등 같은 것은 별로 읽고 싶지 않아요. 자신의 그런 부분도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고요. 물론 저 역시 무슨 일이 있으면 화를 내거나, 의기소침해지거나, 불쾌함을 느끼거나, 고민하거나 하지만, 그것을 생각하는 일에는 흥미가 없습니다. - P4

장편은 아무래도 장기전이다보니 잘되는 날과 별로 수확이 없는 날의 반복인데, 그래도 길게 잡고 돌아보면 결국에는 확실히 와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요는 스스로를 믿는 일이죠. 소설을 쓴다기보다, 부엌에서 굴튀김을 하나하나 튀기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아요. - P5

데뷔 당시 문단에서 제일 싫었던 게 일종의 테마주의였어요. 이런 주제를 다뤘으니 이건 순문학이다, 깊이가 있다, 그런 말이 제일 싫었죠. 그래서 소재나 주제를 전부 걷어내고, 그럼에도 깊이 있고 무게 있는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 P6

작가가 되려면 자신이 이거다 하고 정한 대상과 전면적으로 관계를 맺는 일, 그 코미트먼트의 깊이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코미트먼트의 방향성이나 내용응 ㄴ사람마다 다르지만 적어도 깊이는 꼭 필요해요. 깊이가 없으면, 나아가 그 깊이를 끝까지 짊어질 담력이 없으면 아무데도 갈 수 없어요. 나머지는 운입니다. 전 아마도 운이 좋았던 거라 생각해요. - P7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면 아 이렇게 시작하는 문장을 써볼까, 하죠. 스푸트니크의 연인의 첫 문장도 그랬어요. 쓴 뒤에는 반년이든 일 년이든 묵혀두면서 가끔 꺼내서 고치고, 조금씩 갈고 닦아서, 그게 내 안에 제대로 남는지 아닌지 기다립니다. 찰흙 덩어리를 벽에 던져서 달라붙는지 떨어지는지 확인하듯이, 물론 깨끗이 떨어져서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경우도 있고요. - P8

장편소설은 하나의 테마로는 절대 쓰지 못해요. 몇 가지 테마가 복합적으로 얽혀야 비로소 만들어지죠. 길면 길수록 그 요소가 많아야 하고요. 저의 출발점에는 최소 세 가지가 있었고, 세 가지가 있으면 삼각측량처럼 이야기가 입체적으로 나아가요. 그런데 구성 요소가 한두 개 뿐이면 어디선가 반드시 두꺼운 벽에 부딪히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요. 그러니까 몇 가지 포인트가 자기 안에 뚜렷이 존재함을 확인하기 전에는 장편을 시작할 수 없어요. 바람직한 세가지를 모으는 데는 또 그만한 시간이 걸리고요. 작가는 일 년이든 이 년이든 참을성 있게 가만히 기다려야 하죠. 이것이 집필을 시작할 수 있는 뚜렷한 포인트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 일단 시작하면 하루에 열 장은 써야 합니다. 그러기를 일 년 쯤 줄기차게 계속해야 하고요. 중간에 망설여지거나 불확실한 부분이 있으면 도저히 나아갈 수 없어요. 그러니까 시작하기 전에 필요한 포인트가 내 안에 탄탄하게 설정됐음을 분명히 확인해야죠. - P9

2차대전 이후 일본도 그랬는데, 많은 독일인들은 전쟁이 끝난 뒤 자신들 피해자 입장에 놓으려고 했어요. 우리도 히틀러에게 속았고, 마음의 그림자를 빼앗겼고, 그 탓에 혹독하게 고생했다는 막연한 피해자 의식만 남죠. 일본에서도 그와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일본인은 전쟁의 피해자라는 의식이 강해서 자신들이 가해자라는 인식은 자꾸 뒷전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세부적인 사실이 이렇다저렇다 하는 문제로 도피하죠. 그런 것도 ‘나쁜 이야기‘가 낳은 일종의 뭐랄까, 휴요증이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결국 자신들도 속은 거라는 말로 이야기가 끝나버리는 면이 있죠. 천황도 나쁘지 않다, 국민도 나쁘지 않다, 나쁜 건 군부다, 하는 식으로, 그게 집합적 무의식의 무서운 면입니다. - P10

무엇보다 중요한 게 말투, 소설로 말하면 문체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신뢰감과 친밀감을 낳는 건 말투예요. 말투나 문체에 흡인력이 없으면 이야기가 성립하지 않죠. 물론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전에 말투에 매력이 없으면 사람들은 귀기울여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보이스, 스타일, 말투를 매우 중요시하죠. 제 소슬은 너무 쉽게 읽힌다는 말을 곧잘 듣는데, 당연합니다. 그게 저의 스타일이니까. - P11

좋은 일은 이해하거나 설명하는 데 시간이 걸리거니와 귀찮고 따분한 경우가 많아요. 반면 ‘나쁜 이야기‘는 대체로 단순하고 인간 심리의 표층에 직접적으로 호소하죠. 논리가 생략되었으니 이야기가 쉽게 받아들여져요. 거친 말을 쓴 헤이트스피치가 논리적이고 훌륭한 연설보다 귀에 잘 들어오는 법이고. - P12

마감 같은 건 신경쓰지 않고 마음껏 시간을 들일 수 있는 환경부터 갖추어야 해요. 좀전에 말했듯이, 집필에 시간을 들이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집필 전에 시간을 가지는 것도 똑같이 중요합니다. 제 경우는 번역 일을 하거나 가끔 에세이를 쓰면서 일 년이나 이 년쯤 느긋하게 기다려요. 그러면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제목과 그 밖의 몇 가지 포인트가 떠오르죠. 그리고 어느 날, 됐다, 지금이야. 지금부터 쓰기 시작해야 해. 싶은 스타팅 포인트가 찾아옵니다. 그때부터 천천히 쓰기 시작해여.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는 자 어서 가세요, 하고 누가 떠밀어도 갈 수가 없어요. 아무리 훌륭한 서퍼도 좋은 파도가 오지 않으면 탈 수 없어요. 바로 지금이다, 라는 적절한 포인트를 잡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죠. - P13

제가 그리고 싶은 주인공은 기본적으로는 보통 사람입니다. 보통의 생활감각을 가진 사람. 하지만 여러 면에서 아직 자유로운 처지인 사람. 누구든 일정 나이 이상이 되면 여러 현실적인 문제가 따라붙죠. 그래도 삼십대 중반이면 아직 인생의 중간 지대에 머물고 있어요. 아마도 제게는 이야기의 물길 안내인 같은 사람이 주인공으로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가 오십대, 육십대라면 인생의 굴레 같은 게 딸려오니까 아무래도 움직임이 둔해지죠. 더는 젊지 않지만 아직 중년의 영역에 들어서지도 않았고, 어느 정도 자아가 형성되어 있지만 완전히 굳지 않았고, 확신도 약해요. 어디로 나아갈지도 자유. 그렇게 ‘어디로도 기울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를 저는 소설적으로 필요로 하는 거겠죠. - P14

왜 독자가 따라와주는지 아세요? 제가 소설을 쓰고 독자가 읽어주는 관계가 현재 신용거래로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사십 년 가까이 소설을 써오면서, 독자가 절대 손해 보게 하진 않았으니까요. - P15

점술가를 예로 들면, 그 사람들이 원래부터 어떤 특별한 능력을 지닌 건 아마 사실일 겁니다. 그래도 직업으로 삼는다면, 누가 상담하러 와서 답을 해줘야 할 때 메시지가 전혀 내려오지 않으면 장사가 안 되겠죠. 문제는 여기서 자발성이 사라지는 경우가 있다는 겁니다. 매번 적절하게 벼락이 떨어져주는 게 아니니까. 그래서 작은 속임수 같은 걸 쓰는 사이 나름의 영업 테크닉이 생겨요. 그래도 소설가는 마감만 없으면 자발적으로, 하고 싶은 대로 소설을 쓰고 말할 수 있어요. 벼락맞기를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늘 하는 말이 작가는 자발적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젊을 때는 마감이 닥쳐오는데 머릿속은 텅 비고 아이디어 하나 없이 막막한 상황에서도 책상 앞에 앉아 막무가내로 쓰다보면 무언가 찾아오곤 해요. 찌릿찌릿하면서. 그렇게 어찌어찌 넘어갈 수 있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마감이 코앞에 닥쳐왔는데 아무것도 찾아오지 않는 날이 오죠. 벼락이 저절로 떨어져주지 않아요. 그래도 마감이 있으니 - P16

어떻게든 이야기를 쥐어짜내 써버립니다. 이건 대단히 위험하고 불성실한 일이고, 계속 그러다가 망해가는 작가를 적잖이 봐왔어요. 다들 젊을 때야 소설 따위 마감이 닥쳐서 쓰면 된다고 말하죠. 그런데 어떤 시점부터 그게 잘 안됩니다. 물론 벼락 맞는 빈도가 낮아도 다른 능력으로 보완할 수 있고 그 방법도 여러가지겠지만, 그런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소설 쓰기는 불가능할테죠. 아무리 좋은 문장을 쓰더라도 소설은 쓰지 못해요. 설령 쓴다 해도 읽어줄 사람이 없고요. 이것도 늘 하는 말인데, 머리가 너무 좋은 사람은 소설을 쓸 수 없어요. 그런 소설은 구조가 빤히 들여다보일 때가 많아요. 읽어도 솔직히 재미있지 않고, 이성이 우세하니 일방통행의 진술이 되어버리죠. 평론가야 칭찬하지만 독자가 생기지 않아요. 물론 너무 바보여도 쓸 수 없고. - P17

장편소설은 최종적으로는 긍정적인 것을 남겨야 한다고 그때 생각했어요. 설령 비극적 엔딩일지라도 다음 단계로 탄탄하게 연결되어야 합니다. 장편소설을 쓰는 일은 물론이거니와 읽는 일도 엄청난 작업이잖아요. 그 엄청난 작업을 해낸 사람을 위한 일종의 보상이라고 할까, 그런 것이 아무래도 필요합니다. 꼭 해피엔드여야 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래도 역시, 사람들이 이 세계에서 계속 살아가리라는 일종의 신뢰감 같은 것이 독자의 마음속에 생겨납니다. 살아남는 것 혹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 그건 이야기의 아주 중요한 요소죠. 적어도 어느 정도 길이가 있는 픽션에는. - P18

한 사람이 인생에서 정말 진심으로 신뢰할 수 있는, 혹은 감명받을 수 있는 소설은 몇 편 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은 그걸 몇 번이고 읽음 찬찬히 곱씹죠. 소설을 쓰는 사람이건 쓰지 않는 사람이건, 자신에게 정말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소설은 평생 대여섯 권 정도 만나지 않을까요. 많아야 열 권 남짓일까. 그리고 결국 그 몇 안 되는 책이 우리정신의 대들보가 되어줍니다. 소설가의 경우는 그 스트럭처를 몇 번이고 반복하고, 바꿔 말하고 풀어 말하면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소설에 편입해갑니다. - P19

보르헤스가 어느날 시를 써서 친구에게 읽어줬더니 자네 오 년 전도 완전히 똑같은 시를 썼어, 라는 지적을 받습니다. 보르헤스는 전에 그런 시를 썼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거죠. 이에 보르헤스는 말합니다. 시인이 쓰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평생 대여섯 가지밖에 없어. 우린 그걸 다른 형태로 반복할 뿐이지. 듣고 보면 정말 그렇다 싶어요. 결국 우리는 대여섯가지 패턴을 죽을 때까지 반복하는 것뿐일지도 모른다고. 다만 몇 년 단위로 반복하는 사이 형태나 질은 점점 변해가죠. 넓이와 깊이도 달라지고요. - P20

문장을 어떻게 쓰는가 하는 규범은 제 생각에 기본적으로 두 가지뿐이에요. 하나는 고리키의 ‘밑바닥에서‘에서 거지와 순례자의 대화. "내 말 듣고 있는거야?"하고 한 사람이 말하니까, 다른 사람이 "나 귀머거리 아니야"라고 답해요. 지금은 거지니 귀머거리니 하는 차별용어를 쓰면 안되지만 그 시절에는 아니었어요. 전 이 책을 학창시절에 읽었는데 보통 같으면 "내 말 듣고 있는거야?""듣고 있어"로 끝날 대화죠. 그런데 그러면 드라마가 안 되는 겁니다. "귀머거리 아니야"라고 대답하니까 주고받는 말 속에 역동감이 생겨요. 단순하지만 아주 중요한 기본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못하는 작가가 세상에는 많거든요. 저는 항상 그 사실을 의식합니다. - P21

또 하나는 비요. 챈들러가 쓴 비유 중에 "내가 잠 못 이루는 밤은 뚱뚱한 우편배달부만큼 드물다"라는 게 있어요. 예전에도 몇 번 예로 든 문장인데, 만약 "내가 잠 못 이루는 밤은 드물다"라고만 하면 독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죠. 예사롭게 휙 읽고 지나갑니다. 그런데 "내가 잠 못 이루는 밤은 뚱뚱한 우편배달부만큼 드물다"하면 "호오!" 싶잖아요. 그러고 보니 뚱뚱한 우편배달부는 본 적 없는데, 하고. 그게 살아 있는 문장입니다. 이렇게 반응이 생겨나고 움직임이 생겨나죠. 귀머거리 아니야, 와 뚱뚱한 우편배달부, 이 두가지가 제 글쓰기 요령입니다. 그 요령만 알면 제법 좋은 문장을 쓸 수 있을 거에요. - P22

말의 울림은 중요합니다. 구체적이고 피지컬한 울림. 설령 소리내지 않고 눈으로만 보더라도 울림이 있어야 해요. 작가는 눈으로 울림을 들어야 합니다. 글을 쓰고, 다시 읽어보고, 소리내는 대신 눈으로 울림을 느낀다. 이게 굉장히 중요해요. 저는 항상 음악에서 글쓰는 법을 배운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다. 눈으로 보고 울림을 느끼고 그 울림이 더 아름답게 울리게끔 바로잡아가는 작업을 중요시해요. 마침표, 쉼표도 리듬이잖아요. 그런 게 무척 중요해요. - P23

스트럭처는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거의 의식하지 않아요. 그럴 필요도 없이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자기 안에 이미 갖춰져 있어야 하니까요.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고유의 골격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죠. 그 형태가 어디서 생겨나느냐 하면, 주로 지금껏 자신이 읽어온 소설,그리고 써온 소설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이미 자기안에 자명하게 존재하는 것이징. 그러니까 새삼 생각할 일이 없어요. 대신 문체를 생각해야죠. 그리고 문체가 이끌어내는 이야기를. - P24

장편소설은 "좋아 해보는거야!"가 아니라 "뭐 한 번 해볼까"에 깝게, 가벼운 기분으로 시험 삼아 써보면서 시작해요. 그러면 이야기가 자연히 뻗어나가고, 이윽고 본격적으로 소설 깊숙이 들어가게 되죠.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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