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검은 집들이 마치 괴물처럼 나를 내려다보는 어두운 밤길을 걸어간다. 돈과 친구가 있을 때 집들은 층계와 정문을 가진 그냥 보통집이다. 현관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반겨주며 미소를 짓는 그런 정다운 집. 모든 것이 안정되고 뿌리를 든든히 내린 사람이라면, 집도 그걸 알아차린다. 집들은 겸손한 태도로 가만히 서 있는 듯하지만 친구 하나 없고 돈 한 푼도 없는 불쌍한 녀석이 들어오려 하면, 그동안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집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밟아 죽이기라도 할 듯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선다. 반기는 문도, 불 켜진 창문도 없이 그저 눈살을 찌푸리는 어둠만 존재할 뿐이다. 얼굴을 험악하게 찌푸리고 곁눈질하며, 빈정거리면서 놀려대는 집들. 하나가 시작하면 이집저집들이 돌아가며 놀려댄다. - P41
아무 일도 없었어. 내가 아마 참나무처럼 단단한 건강을 가졌나 봐. 그러나 눈물을 흘릴 때는 예외였지. 그땐 강하지 못했으니까. - P56
겉으로 보기에 너무도 단순하고 단조로워 보이는 내 인생도 들여다보면 복잡하게 얽혀 있. 즉 나를 좋아하는 카페와 나를 싫어하는 카페, 내게 친절한 길과 불친절한 길, 내가 행복할 수 있는 방과 그렇지 않은 방, 내 모습이 괜찮아 보이는 거울과 그렇지 않은 거울, 내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옷과 불행을 가져다주는 옷가지들로 복잡하게 얽힌 인생이 바로 내 인생이다. - P60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외향적 인간들이다. 뭘 좀 재미있는 게 없나 하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남을 간섭하는 이런 사람들이 조심해야 할 대상이다. - P64
나는요, 인생을 이렇게 봐요. 누가 내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느냐?‘고 물으면 내 대답은 ‘아니다.‘예요. 분명 나는 그렇게 대답했을 텐데, 단지 아무도 내게 그걸 묻지 않았지요. 내가 여기 있는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에요. 내 일생에서 발생한 대부분의 사건들은 내가 의도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나는 내 자신에게 항상 이렇게 말한답니다. ‘너는 네가 부탁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세상을 이렇게 만든 것은 네가 아니다. 네 지금의 모습도 네가 만들지 않았다. 그러니 네 자신을 괴롭히지 마라. 그러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너는 그럴 권리가 있잖느냐? 너는 세상을 이 꼴로 만든 죄 많은 자들 중 하나가 아니니까.‘ - P82
그녀가 우는 건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기 때문이었어요. 그녀의 흐느낌이 그걸 말해 주더군요. 제 추측이 틀림없어요. 마치 어떤 음악을 들으면 금방 무얼 느끼는 것과 같은 거지요. - P116
모든 여성들은 다 잔인한 눈빛을 가졌나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대부분의 인간이 잔인한 눈을 가졌지요. 자기도 모르는 무표정한 핏빛 잔인함. 나는 알지요. - P119
내 기분은 최상이다. 모든 것은 거칠 것 없고 부드러우며, 온화하게 움직인다. 에노와 나눈 사랑의 행위, 우리가 관람한 그림의 색채들, 황혼, 황혼이 질 때 나타나는 부드러운 북유럽의 색채들-분홍, 초록, 파랑 그리고 담자색. 바람은 신선하고 차며 수로에 켜논 불빛은 황금 애벌레 색이다. 바다갈매기가 물 위로 급강하한다. 기분은 최상이다. 모든 것이 온화하며 또한 울적하다. 마치 인생이 어떤 순간 그러하듯... - P139
자, 생각해 봐요. 인생을 야릇하게 만드는 건 이런 이상한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도, 사람들이 그 사건들을 겪어냈기 때문도 아니라니까요. 이런 괴상한 사건이 결국 잊혀진다는 사실이 인생을 요지경으로 만들지요. 우리가 생각하기에 천추와 같았던 어떤 시간이 결국 퇴색되고, 잊혀지며, 뇌리에서 사라진다는 것, 이것이 인생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거라니까요. 우리가 결국 잊게 되고 그러니까 매일이 새로운 날이 되겠죠. 그래서 누구에게나 희망이 있는 거예요. - P167
몸조심하세요. 힘들게 노력하면 당신 이름의 약자가 새겨진 모조 담뱃갑 정도는 갖게 될지 누가 알겠어요? - P182
그래, 난 강한 여자야. 나는 죽은 사람처럼 강하단다.
그렇게 강한 사람이 눈은 왜 감고 있지?
왜냐하면 죽은 자는 눈을 감고 있어야 하니까. -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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