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뭐라고 - 시크한 독거 작가의 일상 철학
사노 요코 지음, 이지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유코의 요리는 풍성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쳤고 큼직큼직했다. 유유코의 요리를 보고 깨달았다. 세에는 대범한 요리와 좀스러운 요리가 있다는 사실을. - P18

유리공예가인 마리는 "인간은 생산적이어선 안 돼. 쓰레기나 만들 이니까"라고 말했다. 본인은 실로 아름다운 유리공예품을 만들면서도 이런 말을 한다. "난 불가연 쓰레기를 만들고 있는 거야." 자각 있는 예술가는 훌륭하다. - P42

어릴 때는 어째서 바나나 냄새가 천국의 향기라고 생각한걸까. 부모님은 바나나를 꼭 반쪽씩만 주셨다. 한 개를 다 먹으면 이질에 걸린다고 했다. 베이징의 바나나는 어디서 왔을까. 타이완에서 왔을까? 죽기 전에 어떻게든 한 개를 온전히 먹고 싶었다. 우리 집만 그런 줄 알았는데, 친구에게 물어보자 모두들 바나나를 반쪽씩만 먹었다고 한다. "이질 걸린대." 그 뒤로 바나나는 자꾸만 저렴해졌다. 값이 싸지니 아무도 이질 같은 말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얼마든지먹을 수 있게 되고 나서야 나는 바나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나나는 과일이라는 느낌이 없다. 감자 같다. 파근파근해서 목이 멘다. 그런데도 집에는 항상 바나나가 있다. - P86

사람에게는 저마다 식사의 미학이라는 게 있다. 좋아하는 음식을 먼저 먹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최후의 순간까지 남겨두었다가 한입에 쏙 넣고 음미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나는 한 치 앞은 암흑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지금 지진이라도 일어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되도록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아 하는 성질 급한 인간이다. 그러나 남동생은 훨씬 선량하게 이 세상을 믿었다. - P96

아침에 추워서 이불 속에 파묻혀 있으면, 일어나기 전부터 통통통통 무를 채 써는 소리가 부엌에서 울려 퍼졌다. 멸치 우리는 냄새도 훅훅 풍겨왔다. - P100

생활은 수수하고 시시한 일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런 자질구레한 일 없이 사람은 살아갈 수 없다. - P221

"몇 년이나 남았나요?"
"호스피스에 들어가면 2년 정도일까요"
"죽을 때까지 돈은 얼마나 드나요?"
"1천만 엔"
"알겠어요. 항암제는 주시지 말고요, 목숨을 늘리지도 말아주세요. 되도록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럭키, 나는 프리랜서라 연금이 없으니 아흔까지 살면 어쩌나 싶어 악착같이 저금을 했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근처 재규어 대리점에 가서, 매장에 있던 잉글리시 그린의 차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주세요." 나는 국수주의자라서 지금껏 오기로라도 절대 외제 차를 타지 않았다. 배달된 재규어에 올라탄 순간 ‘아, 나는 이런 남자를 평생 찾아다녔지만 이젠 늦었구나‘라고 느꼈다. 시트는 나를 안전히 지키겠노라 맹세하고 있다. 슬데없는 서비스는 하나도 없었고 마음으로부터 신뢰감이 저절로 우러났다. 마지막으로 타는 차가 재규어라니 나는 운이 좋다.

- P242

그러자 나를 시기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요코한텐 재규어가 안 어울려." 어째서냐. 내가 빈농의 자식이라 그런가. 억울하면 너도 사면 되잖아. 빨리 죽으면 살 수 있다고. 나는 일흔에 죽는게 꿈이었다. 신은 존재한다. 나는 틀림없이 착한 아이였던 것이다. - P242

산 지 일주일 만에 재규어는 너덜너덜해졌다. 나는 주차가 서투른데 우리 집 주차장은 좁기 때문이다. 너덜너덜해졌을 뿐만 아니라 까마귀가 보닛 위에 매일 똥을 쌌다. 내게는 지금 그 어떤 의무도 없다. 아들은 다 컸고 엄마도 2년 전에 죽었다.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죽지 못할 정도로 일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남은 날이 2년이라는 말을 듣자 십수 년 동안 나를 괴롭힌 우울증이 거의 사라졌다. 인간은 신기하다. 인생이 갑자기 알차게 변했다. 매일이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건 자유의 획득이나 다름없다. - P243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나 자신이 죽는 건 아무렇지도 ㅇ낳지만, 내가 좋아하는 가까운 친구는 절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죽음은 내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찾아올 때 의미를 가진다. - P24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