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 피리 - 동화 속 범죄사건 추리 파일
찬호께이 지음, 문현선 옮김 / 검은숲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1



 <마술 피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니 사실상 유일하게 접해본 중화권 추리소설가 찬호께이의 이색 동화 추리소설집이다. 그간 내가 찬호께이의 작품을 홍콩이라는 독특한 배경 때문에 좋아하는 건가 하는 생각도 해봤는데, 이 책을 읽고 홍콩은 배경 혹은 작가의 출신지에 불과할 뿐, 내가 찬호께이의 신작이 나올 때마다 관심을 가는 이유는 이 작가의 추리소설가로서의 역량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임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동화의 비하인드를 추리소설다운 방식으로 풀어낸 발상의 전환도 재밌었고 역사적 고증을 위한 작가의 노력과 책임감도 생생히 느껴져 이래저래 풍성한 독서였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부러진 용골>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개인적으론 <마술 피리>가 짜임새나 세계관의 몰입도 등 훨씬 매력적인 작품이라 생각한다. 물론 이건 대놓고 마법을 다루는 설정을 싫어하는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된 발언이다.


 애석하게도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의 모티브가 되는 동화, 잭과 콩나무, 푸른 수염, 마술 피리 모두 내용이 가물가물해서 동화를 재해석한 찬호께이의 해석이 얼마나 절묘한지는 특별히 와 닿지 않았다. 하지만 애당초 잘 모르는 동화였기에 이번 기회에 제대로 알 수 있어서 그런대로 신선하게 읽혔던 것도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국 동화를 모티브로 했는가 여부보단 추리소설로써 만듦새가 탁월한가 여부가 더 중요하기에 동화는 결국 세계관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요소 정도로 이해하면 편하다. 그래도 굳이 주제의식을 끌어내본다면, 동화 속 세계에서도 첨예한 갈등과 대립, 속임수와 죽음이 난무하지만 그 혼란을 바로잡는 것은 바로 지혜와 이성적 사고가 이끄는 사필귀정의 전개일 터다.


 수록된 세 편의 소설 모두 모티브가 된 동화와는 판이하거나 혹은 정반대의 내용이지만 사필귀정을 추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귀족이자 법학 박사, 이야기 수집꾼이라는 주인공 일행이 모난 곳 없이 매력적인 인물들인데 심성이며 추리력까지 완벽하다 보니 자칫 이야기가 밋밋해질 법도 했으나 읽는 내내 속시원하고 뒷맛도 깔끔했다. 지나칠 정도로 개연성이 어긋나지 않는 이상 주인공이 맘껏 능력을 발휘해 사건을 해결하고 비극을 미연에 방지하는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그래서 동화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받는 건가?

 속편이 나와도 좋겠지만 나오지 않더라도 여한이 없을 만큼 각 수록작 모두 이야기를 적절히 끝맺은 것도 좋았다... 아, 마지막 수록작이자 표제작인 '하멜른의 마술 피리 아동 유괴사건'은 제외다. 그 작품은 분량도 분량이지만 마지막엔 사족이 너무 많았다. 작가가 집필에 애먹은 것도 알겠고 자료 조사를 열심히 한 것도 알겠는데 분량과 밀도를 앞에 두 작품과 비슷하게 맞췄다면 어땠을까 싶다. 뭐, 그래도 긴 만큼 주인공 호프만 박사의 참교육은 쾌감이 상당했다.


 홍콩을 배경으로 두지 않은 찬호께이의 작품도 좋군. 이 작가가 이 정도로 다채로운 작풍을 구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무서운 걸 넘어 경외심까지 드는 작가다. 다음에 어떤 작품이 출간될는지 모르지만 설령 소재가 그리 끌리지 않아도 작가 이름만 믿고 구입하고 읽게 될 듯하다. <염소가 웃는 순간> 빼고 다 좋았다. 내가 호러를 싫어해서 별로였던 걸 수도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산타 아줌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스기타 히로미 그림,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7.7


 크리스마스 때 생각이 나서 읽은 <산타 아줌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색 동화다. 산타클로스가 되겠다며 면접을 보게 된 제시카(여성)를 향한 각국 산타클로스들의 치열한 갑론을박이 주된 내용이라 아이보단 어른들이 읽으면 더 좋을 작품이다. 다만 결말까지 전개가 순조롭고 내용도 짧은 데다 뻔하다면 뻔하다고 할 수 있을 해피엔딩이기에 막상 어른들한테 다소 썰렁하게 읽힐 듯하다.

 전에 읽었을 땐 나름대로 신선한 작품이라 여겼다. 특히 작품의 원서가 발간된 2002이란 시기를 생각하면 약간 선구적인 측면도 있다고 느껴졌다. 여성은 어째서 산타클로스를 하면 안 되는가, 왜 백인의 고령 남성만이 산타클로스를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요새 굉장히 많이 나오는 종류의 질문이고 때문에 이젠 조금 식상한 정도라 이 작품이라고 특별히 신선하게 다가오진 않았다.


 허나 작중 일본 산타클로스가 여성이 산타클로스가 안 된다는 이유는 다시 읽어도 코웃음이 날 만큼 인상에 강하게 박혔다. 말인즉슨 산타클로스는 부성의 상징인데, 요즘 일본의 아버지들은 가정에서 돈을 벌어다주는 존재로 전락해버려 부성의 상징인 산타클로스마저 여성이 맡아버리면 얼마 남지 않은 부성의 권위는 고꾸라져버릴 것이다. 라는 게 작중 일본 산타클로스가 하는 주장의 골자였다.

 다른 건 차치하고 우선 산타클로스가 특별히 부성의 상징인지 돌이켜봤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냉정히 말하면 우리가 산타클로스를 좋아하는 이유가 선물을 주는 존재이기 때문이지 선물을 주는 할아버지여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 입장에서도 착하게 한 해를 보내면 보답으로 선물을 받는다는 그 이야기에 교훈이 있어서 자녀들한테 들려준 것이지 그 이야기에 성별이나 인종 등 외적인 요소를 일일이 재단해본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적어도 나는 없어서 상술한 일본 산타클로스의 주장은 기괴하게 들렸다. 그런데 실제로 저렇게 이 주장 저 주장 끌어모아 딴지를 걸 사람이 있을 것이라 기괴하면서도 현실적으로도 느껴졌다.


 아무튼 이 주장에 일부 산타클로스들은 동정하고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산타클로스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사랑하는 아들에게 잊지 못할 따뜻한 선물을 주고 싶은 제시카의 마음이 산타클로스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녀는 결국 최초의 여성 산타클로스가 된다. 자칫 잘못하면 서슬 퍼런 갈등의 장이 될 뻔했지만 분량의 문제인지 동화의 정체성을 중시한 탓인지 갈등은 싱겁게 해소된다. 이와 같은 결정에 분명 납득 못할 산타클로스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주인공은 목적을 달성했고 변화는 이뤄졌으니 잘 됐다고 할 수 있으려나? 약간 의문은 남지만 그래도 뒷맛은 깔끔했다.

 아기자기한 일러스트를 감상함과 더불어 뜻하지 않게 요즘(당시) 일본의 아버지들이 겪는 처량한 신세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던 독특한 작품이다. 크리스마스 특유의 따뜻함에 현실적인 색채를 더했으니 천편일률적인 크리스마스 이야기에 질린 사람들한테 잘 맞는 작품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희에게 내일은 없다
가키네 료스케 지음, 박재현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7.8


 이 소설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너희에게 내일은 없다. 적어도 이곳에선. 그러니 다른 곳에서 내일은 찾아보는 게 어떨까.

휴먼 리액트라는 그럴싸한 이름의 해고 전문 회사에서 실적이 우수한 무라카미가 각기 다른 회사의 사원 5명을 어떻게 사직을 권고하는지 다루는 연작소설집인데 이래저래 호불호가 갈릴 작품이었다. 오쿠다 히데오와 비슷한듯 다른 작가의 쿨하다 못해 냉소적이기까지 한 유머 감각이나 섹슈얼한 인물 설정도 호오가 갈릴 테지만 개인적으론 이야기의 전개 방식과 각 수록작의 마무리가 썩 와 닿지 않았던 게 마음에 걸렸다.


 오히려 해고 전문 회사에서 일하는 무라카미의 직업 윤리나 사명감, 말로만 다른 직장에서 희망을 찾아보라 말하는 것이 아닌 그 나름대로 후속 조치에 신경을 쓰고 상대방에게 다가가는 점 등은 매우 호감이었다. 사원을 무턱대고 해고하는 건 노동법 위반이니 권고 사직이라는 손이 많이 가는 답답한 방식을 취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말을 돌려서 하는 일본 특유의 문화가 시작은 상대방을 위한 배려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 작품을 통해 새삼 느꼈다. 권고 사직 대상자라고 해서 다 같은 사원이 아니라 저마다의 딱한 사정이나 억울하기 이를 데 없는 이야기가 있으므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작품의 취지 역시 참 좋았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최근에 겪었기에 이러한 작품의 취지가 더욱 따사롭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 작품이 따뜻하게 귀를 기울이는 역할 그 이상의 일을, 가령 뾰족하게 대안을 제시했다거나 사회 비판적 목적을 잘 수행한 작품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세 번째 수록작 '옛 친구'를 제외하면 각 수록작이 별다른 반전 없이 흐지부지된 채 넘어가는 경우도 태반이었고 감동적인 연출도 그 순간에만 감동적이었고 위로를 받았지 정작 완독하고 일주일 가까이 지난 지금은 딱히 떠오르는 구절이 없는 걸 보면 냉정한 말이겠으나 감정에 호소한 감이 적잖은 작품이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갔으면 신파라고 까여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었다.


 작가의 대표작 <와일드 소울>도 감정에 호소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작품이긴 했으나 통쾌함으로 점철된 반면 <너희에게 내일은 없다>은 그야말로 허무함으로 다 읽고 나면 씁쓸함이 배가된다.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이 현실에 발을 붙이고서 우리도 겪음직한 이야길 풀어낸 것인지도 모르지만, 주인공의 연애사에 치중한 에너지에서 3~40%를 권고 사직 대상자의 이야기에 쏟았더라면 작품이 지금보다 덜 허무했으리라 생각한다.

 저자 가키네 료스케는 국내에 세 작품밖에 소개되지 않았고 10년 사이에 소개된 작품은 한 권도 없다. 최근 작가가 나오키상을 받았다는데 그 작품이 우리나라에 소개되면서 작가의 다른 작품도 연달아 소개되길 바란다. 비록 <너희에게 내일은 없다>는 아쉬운 점이 많았지만, 난 아직도 <와일드 소울>이 준 통쾌함을 잊지 못하기에 신작이 출간된다면 크게 고민 않고 구입해 읽을 생각이다. 나오키상을 받은 작품이 시대극이라서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지만 그래도 읽어보고 싶다. 출간되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망의 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1



 '가가 형사' 시리즈는 <기도의 막이 내릴 때>로 완결이 난 걸로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다시 가가가 등장하는 작품이 출간됐다. 일본에서 출간 당시 독자들은 마쓰미야가 주인공인 외전으로 여겼다지만 이후에 가가가 주인공인 후속작이 출간한 것으로 봐선 이 시리즈는 바야흐로 2기에 접어든 모양이다. 이 시리즈의 작품인 <붉은 손가락>으로 추리소설에 입문한, 아니 독서에 입문한 사람으로서 반갑기 그지없는 소식이긴 하지만 가슴 속에 불길한 생각도 스쳤다. 박수 칠 때 떠나보내지 못해서 괜히 부관참시가 되는 꼴은 아닌지...

 이 작품을 읽으니 다행히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전작에서 도입부가 복잡해 진입하기 힘들었던 것과 달리 이야기 자체는 단순하게 시작되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사건을 파면 팔수록 이면에 쉬이 짐작하기 힘든 비밀이 있었고 그 비밀의 핵심이 되는 소재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기가 녹아든 것도 반가운 부분이었다. 작가의 전공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과학 기술과 한계, 그리고 맹점을 다룸에 있어서 히가시노 게이고만큼 믿음이 가는 작가도 드물다. 과거엔 그런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했는데 요즘 작품에서도 녹슬지 않았구나 싶어 내심 안도했다.


 아무튼, <붉은 손가락>에 처음 등장했던 마쓰미야는 이 작품에선 제법 베테랑 형사다운 면모를 보인다. 그가 첫 등장한 작품에서 가가에게 조언을 받던 모습이 떠올라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후반부에 들어서 마쓰미야는 비밀을 밝히는 형사의 직업윤리가 시험당하기도 하는데 이때의 심리 묘사가 제법 울리는 바가 컸다. 비록 마쓰미야의 과거사는 필요 이상으로 복잡하고 작가가 굳이 공들여 묘사하는 의도도 뻔해서 약간은 몰입도를 저해하는 감이 적잖긴 했다. 하지만 어쨌든 그 과거사로 인해서 마쓰미야가 진정성 있고 현실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많은 부분에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결말부에 아주 신파적으로 연출될 법한 장면에서도 뜻밖에 뜨뜻미지근한 반응이 특히 한몫했다.

 마쓰미야처럼 사람은 복잡다단한 감정의 굴레 안에 놓인 존재이기에 타인을 대하는 일은 늘 간단하지 않은 것 같다. 설령 가족이더라도 말이다. 가족도 결국 타인이니까. 하지만 타인과 가족에 차이가 있다면 타인은 피하면 그만이지만 가족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이겠다. 타인인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마음을 터놓는 것이 바로 가족이라는 이름의 타인이 아닐까. 가족과의 적당한 거리감,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감이란 어느 정도인지 작품을 읽으면서 생각해볼 수 있어 좋았다.


 개인적으로 범인의 동기가 뜬금없고 범인의 과거사도 조금 더 분량을 할애해서 그려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 때문에 여운이 반감됐다. 그걸 제외한다면 반전이나 등장인물들이 갖는 딜레마 등 <붉은 손가락> 이후로 이어져 온 시리즈의 인간미 짙은 작풍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아마 이 작품도 드라마나 영화로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그 작품도 제법 기대된다. 기대해봐도 되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DP 개의 날 4 - 완결
김보통 지음 / 씨네21북스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0


 개인적으로 드라마보다 원작 만화가 훨씬 좋았다. 드라마가 이야길 더 풍성하고 극적으로 풀어내려다 보니 다소 신파적이고 오글거리는 지점, 구교환이 연기한 한호열 상병 캐릭터가 완전히 판타지 그 자체였던 점 등 탐탁잖았던 부분이 있었던 반면 원작은 기승전결이 완벽했다. 단점이 있다면 너무 우울하단 점이겠지... 하지만 의외의 방식으로 결말이 나서 그만큼 여운도 상당했다.

 군대에 대한 비판과 통찰이 탁월하단 측면에서 <민간인 통제구역>과 더불어 정점을 이루는 작품이다. 두 작품 다 스릴러라 장르적 쾌감이나 완성도도 상당하고 결말이 씁쓸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많지만 차이가 있다면 아무래도 <D.P.> 특유의 신선하고 아이러니한 전개를 꼽을 수 있겠다. 이 작품은 탈영병을 체포하는 D.P.의 시점에서 전개되는데 주인공 일행의 보직 특성상 군대 밖이 주무대이지만 탈영병들의 사연과 현재 처지를 쫓아가기에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군대 안의 부조리함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안에선 당연하게만 보였던 철칙은 사회의 통념에 비춰보면 똥군기를 넘어 입에 담을 수 없는 심각한 범죄 행위일 뿐이었고 탈영병들에게 있어 탈영은 불가피하고 절박한 저항이었음을 이 작품은 수시로 주지시킨다. 물론 다양한 탈영병이 등장하는 작품이기에 정말 시답잖고 쓰레기 같은 이유로 탈영한 놈들도(;;) 나오지만 작품의 초점은 역시 기구한 사연의 탈영병들에 맞춰져 있다. 


 찰나긴 하나 나도 이등병 때 굉장히 안 좋은 생각을 했던 터라 작중 탈영병들의 처지에 적잖이 공감했다. 주인공의 방백에서 나온 '그가 탈영을 결심하게 된 상황이, 사건이 나에게는 찾아오지 않았을 뿐'이란 구절이 특히 그랬다. 흔히 탈영병을 두고 군대에 적응 못한 패배자라 일축하는 사람들은 스스로가 군생활을 버텨냈다는 자부심이 지나치다 못해 일그러진 방향으로 부풀게 된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자기 땐 더 심했는데 요즘 것들은 하여간 빠져서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본인이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 객관적으로 인지하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서비스업에 종사하다 보니 설령 내가 완벽하게 일을 해도 상대가 완벽하지 않기에 사람을 대하는 일은 재앙에 가깝다는 느낌을 매일 받곤 한다. 군대는 특히 사람을 상대하는 능력이 극단적으로 시험 당하는 곳인데 비극이 발생한 부대의 사례들을 놓고 보면 피해자가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툴러서, 이른바 군대 생활에 영 적성이 안 맞는 경우도 많지만 반대로 가해자가 관용이 부족해서, 이 역시 마찬가지로 사람을 대하는 기술이 모자라서 빚어진 비극도 상당하다. 건방지고 개념 없고 어리바리한 후임들이나 그런 후임을 폭력과 부조리를 통해서만 소통하려 드는, 소통이라고도 할 수 없는 행위를 저지르는 선임들 모두 전역하고 시간이 지난 내 입장에서 볼 때 그저 미숙한 아이들에 불과하다.


 물론 위의 내 생각은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고 많은 사례에 들어맞지 않는다. 당장 이 작품에 나오는 가해자들만 해도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범죄자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다만, 어차피 다들 하는 수 없이 군대에 징집된 마당에 조금은 마찰을 줄이고 배려하면 편하지 않은가? 그 와중에 자신들이 더 꿀을 빨아야겠고, 혹은 자신들이 그간 당한 걸 보상받고 싶단 이유만으로 선임 병사와 간부들이 후임에게 자행하는 짓거리를 보노라면 안타깝고 한심한 걸 넘어 그저 미숙한 인간들의 이기적인 단면을 봤다는 실로 차가운 감상만이 남을 지경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내린 결론, 군대 안에서의 문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영원히 반복되리란 참담한 결론을 부정하긴커녕 나도 모르게 고갤 끄덕이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D.P.>가 무의미하고 공허한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탈영병을 쫓기에 보다 관찰자적인 입장에서 군대의 문제적 단면을 날카롭게 들여다볼 수 있었고 이 작품을 접한 독자들이 자신의 깨달음을 부대에 조금씩이라도 반영하는 일이 분명 있을 것이다. 물론 수십년 동안 이어진 군대의 부조리와 인간의 이기심이 이룬 환장의 콜라보를 단시간에 변화시킨다는 건 정말 허무맹랑한 욕심에 불과하다. 게다가 다들 몰라서 바뀌지 못하는 게 아니라 싫어서 바꾸지 않는 것에 가까우니 상황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을 만큼 비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래도 어쨌든 개미 눈썹만큼의 변화라도 변화는 변화다. 조금 이기적으로 말해본다면 결국 이런 작품들로 인해 내 아는 동생들이 최대한 덜 고통 받고 군생활을 이겨낸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마음 같아선 모든 동생들이 군대에서 몸과 마음이 다치지 않길 바라지만 지금의 나로선 진심으로 그런 날이 오리라고 빈말로도 말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내일의 군대는 오늘보다 더욱 따사로운 곳이 되길 바란다. 그게 내가 현실적으로 바랄 수 있는 소망일 듯하다. 

사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군대라는 곳 자체가 평범한 젊은이들이 가는 곳이니까. 평범한 젊은이가 어쩌다 탈영을 했을 뿐이다.
내가 특별히 선해서 탈영병을 쫓는 것이 아닌 것처럼 탈영병도 특별히 악해서 탈영을 한 것은 아니다.
그가 탈영을 결심하게 된 그 상황이, 사건이 나에게는 찾아오지 않았을 뿐이다. - 1권 63~64p

물론 탈영병은 돌아가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도망치며 살겠다 각오를 했을 수도 있다.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했을 수도, 도망쳐 도착한 곳에서 더 나은 삶을 찾았을 수도 있다. 군대라는 곳, 군인이라는 신분은 도망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을 뿐, 이미 오래 전부터 도망을 꿈꿔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도망친 곳에서 불합리한 현실은 계속될 수 있으며, 도망자라는 처지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경에 처해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어쩌면,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도피가 끝나기를. 아니, 차라리 누군가 끝내주기를. 그래서라도 이 길고 버거운 피로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 - 3권 154~156p

왜 그는 먼 곳으로 떠나지 못했던 것일까.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다. 그래서 더 비참한 기분이 드는 것일지도.
탈영보다 더 큰 결단이 필요한 것일까. 가족에게서 벗어난다는 건. - 3권 180~181p

사병을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싶지가 않은 거지. 한 번 사람이라고 인정해버리면 존나게 골치 아파지거든. - 4권 194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