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으로 읽는 괴도 뤼팽 추리 걸작선
모리스 르블랑 지음 / 해피북스(북키드)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8.7






 프랑스인들이 영국의 셜록 홈즈의 라이벌로 내세우는 캐릭터가 바로 괴도 뤼팽 - '루팡'은 전적으로 일본식 발음이다. lupin은 프랑스식으로 당연히 뤼팽으로 읽힌다. - 이다. 이것 때문에 100년 가까이 지나도 이 시리즈가 욕을 먹고 있는데... 이건 모리스 르블랑이 당대 최고의 탐정 캐릭터인 셜록 홈즈를 너무 의식해서 벌어진 해프닝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도 설마 이렇게 파장이 클 줄은 몰랐겠지. 하필 셜록 홈즈를 등장시켜서 이 시리즈가 이래저래 평가절하되고 있는 걸 보면 참 안타깝다. 자업자득이란 말로 가볍게 넘기기엔 말이지.

 어떻게 보면 비슷한 부분도 있지만 뤼팽은 여러모로 홈즈와는 정반대 유형의 - 일단 항상 어떤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것만 봐도 그렇다. - 캐릭터다. 우리나라에선 홍길동과 함께 의적의 대명사로 인식되는 뤼팽은 100년 전 캐릭터라기엔 지나치게 시대를 초월한 면면을 보여준다. 마술사, 생물 화학자, 그리고 유도의 고수에게 가르침을 받는 등 범죄자로서의 만반의 준비를 갖춘 뤼팽은 온갖 기상천외한 절도 행위로 대도시에 맞먹는 부를 축적한다. 변장의 달인이고 격투 실력도 수준급이며 철벽의 요새도 가볍게 뛰어넘어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고 심지어 옥중에서도 자기 뜻대로 일을 진행시키는 등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특히 뤼팽이란 캐릭터의 가장 재밌는 점은 사전에 자신이 물건을 훔칠 것을 물건의 주인에게 정중히 통보한다는 것이다. 정중함을 가장한 무례함이란 것만큼 재밌는 것도 없는데 이게 무려 100년 전의 유머라니 믿기지 않는다. 또 미술품에 관련해서 전문가적 식별을 지닌 그는 모조품이 아닌 진품을 - 물건을 훔치러 들어갔더니 전부 진품이 아니라서 편지를 놓고 간 게 백미. 진품이 없으니 그냥 가겠소. - 취하는 등 차원이 다른 범죄 행위를 선보이는데 이쯤 되면 신기하기 그지없다.

 그야말로 혁신적인 캐릭터성을 지닌 뤼팽은 사람마다, 나라마다 다른 취급을 받긴 한다. 나한테는 PS2 게임 <슬라이 쿠퍼> 때문에 더없이 친숙한데 그 게임에서의 슬라이가 보였던 것처럼 의적다운, 그러니까 범죄자임에도 불구하고 마냥 싫어할 수 없는 면모가 느껴져 나는 마냥 싫어할 수 없었다. 작품의 재미는 둘째 치고.


 캐릭터를 좋아하는 것에 비해 본편의 이야기는 그렇게 좋아하진 않는데 아무래도 통상적인 추리소설이 아닌 모험 소설에 속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뤼팽' 시리즈가 추리소설로 불리기엔 액션과 비밀 장치가 난무하고 공정한 추리가 힘들다는 점에서 당혹스러울 사람도 있을 것이다. 대신 범죄 소설 다운 활극이 있어 그 나름대로 즐길 수 있었다. 이 활극 부분이 내 개인적인 기대에 못 미치니 실망스럽긴 하지만 캐릭터가 워낙 마음에 들어 이래저래 넘어갈 수 있는, 나에게 있어 아주 희한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캐릭터다.

 이러한 뤼팽의 위치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변치 않을 듯하다. 추리소설, 특히 고전에 속할수록 주인공인 탐정은 정의의 편을 자처하기 마련이다. 때론 낯간지러울 정도인데 뤼팽은 그렇지 않다. 그는 정의나 악을 자처하지도 구분 짓지도 않는다. 비록 범죄자지만 부자의 물건만 훔치고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움직이다 실수도 범할 때도 있고 살인은 절대 피하고 - 이 부분이 배트맨에게 영향을 준 부분이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 낭만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걸 보면 정말 경탄스럽다. 어느 틀로도 구분 짓지 못할 이 자유분방함 때문에 도무지 미워하지 못하겠다. 이러니 계속 읽을 수밖에.



p.s '뤼팽' 시리즈는 성귀수 씨가 번역한 까치글방의 전집으로도 접하긴 했지만 저 '새희망'이라는 출판사에서 펴낸 이 책이야말로 '뤼팽' 시리즈의 시작에 걸맞는 편집을 거쳤다고 생각한다. 단편들의 구성이 원작과는 판이한데 감옥에 갇힌 뤼팽이 손 하나 까딱 않고 대저택의 물건을 훔치는 것에서 시작해 그의 어린 시절, 아직 무명이었던 시절, 어떻게 감옥에 갇혔고 셜록 홈즈와 엉키고 감옥에서 어떻게 탈출하는지. 역순으로 진행되는 통에 더욱 궁금증을 유발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원작도 갖추지 못한 구성미를 뽐내지 않았나 싶다. 다시 읽어도 재밌었다. 뤼팽의 다른 활극도 이 출판사에서 펴내지 않은 게 아쉬울 뿐이다.

나 자신조차도 내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거울을 보아도 내 자신을 알 수 없게 되었단 말이오.
무엇 때문에 같은 모습을 갖고 있어야 하냐구요? 왜 늘 같은 성격으로 살아가야 하느냐 이 말입니다. 내가 하는 행동만으로도 나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바로 이 사람이 아르센 뤼팽이다, 라고 아무도 단언할 수 없다는 건 참으로 즐거운 일입니다. 다만, 이런 놀라운 일은 아르센 뤼팽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사람들에게 인식되는 것이겠지요. - 219~22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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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구두 미스터리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정영목 옮김 / 검은숲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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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내가 너무를 기대를 한 것인지... 가급적이면 나도 책에 대해 이것저것 떠들고 싶긴 한데 이상하게도 이 작품을 읽고 나서도 큰 감흥이 일거나 하진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분량이 이렇게 길 필요가 있었는가 정도? 물론 그 특유의 추리 스타일 - 아리스가와 아리스와 노리즈키 린타로 등 일본의 신본격 추리소설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 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대단했다. 도저히 관심을 가질래야 가질 수 없는 사소한 구두에 초점을 둬서 추리의 실타래로 대치시키는 건 모든 추리소설가 지망생들의 귀감이 되고도 남는다.

 요즘 괜찮다가 다시 불거지고 있는 난독증 탓인지 - 나만 그런 건가, 문체가 은근히 눈에 잘 안 들어온다. - 몰라도 크게 눈길을 끄는 부분이 적긴 했다. 엘러리 퀸의 연역적 추리 작품들이 그렇듯 논리에 치중하다 보니 의외의 범인, 결말과는 거리가 있어 그런가 싶지만... 설명이 되지 않으리 만큼 감흥이 일지 않았다. 엘러리 퀸이 아닌 드루리 레인이 등장하는, <X의 비극>을 읽어야겠다. <Y의 비극>과 비슷하다면 그건 그래도 괜찮을 듯한데.

죽은 자의 구두를 기다리는 자는 맨발로 다니게 될 위험이 있다. - 17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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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다리 아저씨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 10
진 웹스터 지음, 김양미 옮김, 김지혁 그림 / 인디고(글담)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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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흔히 정체를 알 수 없는 후원자의 관용어 정도로 익숙한 키다리 아저씨는 본래 진 웹스터의 <키다리 아저씨>에서 따온 것이다. 고아인 주디가 정체불명의 후원자 존 스미스에게 문장력을 인정 받아 후원을 받으면서 대학 생활을 하게 되는 내용으로 서간형식하면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번역 작업을 거치느라 빛 바랜 감도 있겠지만 촉촉하기 이를 데 없을 정도로 밝게 써내려진 편지의 문체는 실로 사랑스러움 그 자체였다.

 존 스미스라는 가명인 티가 팍팍 나는 이름 대신 임의로 키다리 아저씨라 부르며 시작되는 주디의 편지들은 서간형식 소설의 진수를 보여준다. 1인칭, 3인칭, 2인칭 소설과도 다른 매력을 엿볼 수 있다. 한 번 뱉으면 주워담을 수 없는 말처럼 편지도 한 번 보내면 회수할 수 없는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지금의 카카오톡처럼 바로 바로 전달되는 시스템과 달리 편지는 내용의 길이와 깊이, 이외에도 서두, 본론, 결말까지 아우르는 등 이야기를 만드는 센스와 문장력이 있어야 비로소 풍성해진다. 생각 이상으로 정성을 들여 써야 하는 만큼 감성도 느낄 수 있고 그래서 그런지 요즘 시대에 와서도 편지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내 인생에서 편지를 가장 많이 써본 때는 군대에 있을 때다. 자대 시절엔 전화가 있어 쓰진 않았지만 신교대에 있을 적엔 편지지만 붙들었던 기억이 난다.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 오직 편지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그때 쓴 편지와 받은 편지는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 그때 느꼈던 감성이 다시 피어올랐다. 또 어렸을 때 어린이판으로 한 번 읽어본 작품인데 그때는 보이지 않던 부분도 볼 수 있어서 반갑기도 했다.

 사람마다 평가가 갈리겠지만 나는 주디의 대학 생활이야말로 - 대학보다는 고등학교에 가까운 듯하지만 100년도 더 전 얘기니 그렇겠구나 싶었다. - 이상적인 학창 생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졸부라는 단어가 흔히 비아냥거릴 때 쓰는 말이듯 사람이 갑자기 부유해지면 전보다 거만해질 법도 한데 그런 기색 없이 키다리 아저씨와의 약속을 지키는 지키는 주디가 기특했다. 공부도 하고 친구도 사귀느라 바쁠 텐데 답장도 않는 후원자와의 약속을 지키는 모습이 어여뻤다. 반대로 생각하면 주디에게 키다리 아저씨에게 보내는 편지란 약속을 넘어서 자신의 속마음을 여과없이 드러낼 수 있는 창구이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일기의 역할도 담당하고 있는데 뭐가 됐든 간에 글을 쓰는 일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님을 생각하면 비록 소설이라 할지라도 대단한 일이다. 나도 키다리 아저씨처럼 주디의 편지를 받는 입장이었다면 정말 마음이 한없이 따뜻해지지 않았을까.


 100년도 더 옛날에 발표된 작품은 지금 읽어도 감탄스러운 이상적인 여성상도 보였다. 당시엔 여성에겐 투표권도 없던 만큼 아무래도 여성의 역할이 무척 한정적이었을 텐데 소설 내용만 보면 그런 기색을 찾기 힘들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쓴 것인지, 있는 집안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가 배경이니 그 특성이 십분 반영된 탓인지 모르겠지만 이 소설은 분명 시대를 관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신데렐라 구조이기도 하나 열심히 공부한 주디가 장학금을 받거나 후에 글을 통해 돈을 벌어 키다리 아저씨에게 돈을 갚으려는 모습, 자신과 같은 처지의 고아를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어 자기가 나온 존 그리어 고아원을 인수하겠다는 구체적이고 목적의식을 갖고 있는 점이 출간 당시에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러한 작품들 덕에 후대가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갔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겠다.

 한 여학생의 시시콜콜한 편지들로 치부될 수도 있으나 그 안에 담긴 감성, 사랑만큼이나 영롱하게 굴러간 주디의 성장이 그 무엇보다 주목이 됐다. 당돌하리만큼 거침없이 편지를 써내려간 것처럼 결혼 이후에도 잘 지내기를. 듣자하니 후속작이 있다는데 기회가 된다면 읽어보고 싶다. 주디가 결혼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아갈까 궁금하니 말이다.

"성서가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은혜로운 약속은 ‘가난한 자들이 항상 너희와 함께할지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가 동정심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유용한 가축이나 마찬가지라는 소리잖아요? 제가 어엿한 숙녀였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예배가 끝나자마자 주교님께 달려가 제 생각을 말씀드렸을 거예요. - 46p




하지만 존 그리어 고아원에서는 상상력의 싹이 조금만 보여도 당장 짓밟아 버려요. 오로지 의무감만을 강요하지요. 전 아이들이 그런 단어의 뜻은 몰라도 된다고 생각해요. 의무감이란 불쾌하고 혐오스런 단어예요. 아이들은 무슨 일이든 스스로가 좋아서 해야 한다고요. - 146p




그 둘은 갓난쟁이 때부터 많은 걸 누리고 살아서 행복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요. 자신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세상이 빚지고 있다고 생각하죠. 어찌 됐든 세상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빚을 갚으려고 하는 것 같구요. 하지만 세상은 저한테는 빚진 게 아무것도 없고, 처음부터 그 사실을 분명히 밝혔죠. 전 외상으로 원하는 것을 빌릴 권리가 없어요. 언젠가는 세상이 제 요구를 거절할 날이 올 테니까요. - 213~21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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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마지막 잎새 - 내 인생을 위한 세계문학 006 내 인생을 위한 세계문학 6
오 헨리 지음, 이미정 옮김 / 심야책방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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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는 읽어봤지만 다른 작품은 읽어보질 못했다. 듣기로는 '미국의 모파상'이라고 불릴 정도라는데... 고전이고 자시고를 떠나 최고의 단편소설가 중 한 명으로 기억하는 모파상이 비교 대상으로 거론될 정도라니 사뭇 기대됐다. 또 일전에 감명 깊게 읽은 <3일간의 행복>에서도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자주 인용됐던 만큼 명성의 실체가 더욱 궁금해졌다.

 알다시피 나는 고전 문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누차 말했던 것 같지만 고전 문학하면 떠오르는 역사성과 시대적 배경이 거슬리기 때문이다. 간혹 이러한 요소에 의해 특정 부분에서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는 게 너무 귀찮은 것이다. 모든 고전 소설이 다 그렇진 않지만 대다수의 작품이 그런 경향이 있어 그렇게 찾아 읽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오 헨리의 단편들이 더욱 빛이 났다. 작품마다 기껏해야 20페이지 정도의 분량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안에 담긴 애수나 유머가 상당했다. 무려 100년도 더 된 작품들이라 문체가 예스럽긴 했지만 스토리 전개나 반전은 지금 살펴봐도 훌륭했다. 특히 몇몇 반전의 경우에는 예상 가능한 것도 있긴 했지만 이는 오히려 많은 후세의 작가들이 오 헨리에게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 외의 몇몇 반전은 여지없이 인상적이었는데 정말이지 소설의 끝맺음에 있어서 일가견이 있는 작가라며 감탄했다.

 감옥살이를 할 때부터 주목 받는 창작 생활을 했다는 작가답게 짧지만 임팩트 있는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오 헨리의 작품은 서민의 애환을 달랜다고 평가 받는데 그 '서민의 애환'이랄 것이 우리네 현실과도 딱히 차이가 없어 읽어나가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가난한 부부가 서로의 선물을 마련하는 이야기나 가난에 못 이겨 감옥에 들어가려고 발버둥치는 이야기 등 특별히 20세기 초 미국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라서 정말 즐기면서 읽었고 상술했던 작가의 끝맺음에서 또 감탄했다. 어떻게 오 헨리의 작품을 이제야 읽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앞으로 자주 찾아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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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단편소설 35 - 중고생이 꼭 읽어야 할
김동인 외 지음, 성낙수 엮음 / 리베르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6.0







 중고생이 꼭 읽어야 한다니... 적어도 10년은 늦게 읽은 것이구나. 책장 한 켠에 자리해 먼지만 쌓인 책들을 그만 방치하고 집어든 책이었는데 분량이 상당해서 깜짝 놀랐다.

 교과서에서 한 번쯤 읽었던 작품이나 듣기만 하고 읽어보지 못했던 작품들을 읽을 수 있었는데 언급하는 게 귀찮을 정도로 익히 알려진 작품들이라 낯익으면서도 또 낯설었다. 사실, 교과서에 실려있어서 수업 시간에 공부한 작품들이 대다수였는데 내가 그 작품들에 대한 일종의 반감 같은 게 있어서 그닥 즐겁게 읽진 못했다. 설령 정규 교육을 이미 다 수학한 지금일지라도 거부감이 들긴 매한가지였던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저 '중고생이 꼭 읽어야 할' 이란 수식어는 인정할 수 없다. '한국 근대사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읽으면 도움이 될' 이라고 고쳐 쓴다면 또 모를까.

 나는 두 가지 편견을 갖고 있는데, 하나는 고전은 반드시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과 또 하나는 교과서 수록 작품은 무미건조하다는 것이다. 미리 언급했듯 나는 이걸 편견이라 했지만 마냥 틀린 편견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고전 문학은 시대가 흘러도 읽힐 수 있는 시대 초월적이고도 보편적인 주제의식이나 혹은 역사적인 가치를 가진 문학이라 생각한다. 그런 고전 문학은 권장되어야 마땅하지만 필수가 되어선 안 된다. 당장 우리들의 얘기를 담아낸 현대 문학이 있잖은가. 비록 현대 문학이 고전 문학에 비해 작품성이 검증되지 않았고 고전 문학 특유의 역사성과 가치도 떨어지지만 그렇다곤 해도 고전보다 게을리 읽어선 안 된다. 기왕 읽는다면 현대 8, 고전 2의 비율이 적당하지 않을까. 고전 문학이 은근히 명성에 비해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한 까다로운 작품이 많은 것을 고려하면 필수란 수식어가 함부로 붙여져선 안 될 것 같다.


 또 나는 수학이나 영어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나라 국어 교육의 접근법도 참 많이 글러먹었다고 생각한다. 국어와 문학을 공부한다, 한마디로 정답을 찾아내야 하는 그 인식이야말로 문학을 죽이는 첫 번째 요인이라 믿어의심치 않는다. 읽고난 뒤에 자연스레 배움을 얻게 되는 문학, 이 경우가 바람직하지 작품의 주제의식이니 당시의 사회상을 파악하는 것에 주력을 다하는 - 사실 요즘 국어 수업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르지만 나 공부할 적엔 그랬다. - 주입식 작품 감상은 독서를 멀리하게 되는 지름길이나 다름없다.

 그런 맥락에서 봤을 때 국어 교과서의 작품들은 무미건조하지 않은가 싶다. 물론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와 검증된 작품성, 문학사적 가치 등 여러 기준에서 교육을 위해 엄선된 작품이란 것을 부정할 수 없지만 문제는 그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교과서란 어쩜 이렇게 재미 없는 작품만 골라 수록했는지 늘 불만스러울 따름이었다. 사람마다 취향이 달라 평가가 다 다르겠지만 내가 봤을 땐 이것저것 재며 엄숙히 골라낸 작품들이다 보니 너무 딱딱하고 신선하지 못한 작품들이었던 것이다. 독서가 완전히 취미로 정착된 다음 찾아 읽어본 책들의 경우엔 교과서 문학엔 없던 다양함과 신선함이 있어 괜시리 배신감을 느꼈을 정도였다.


 여기 작품들은 크게 언급해야할 만큼 가치를 못 느꼈고 대신 이렇게 여러 편 읽다 보니 새삼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그 지난했던 국어 수업을 용케 버텼구나 싶어 기분이 얼떨떨했다. 오랜만에 읽는 작품도 있어 살짝 반가운 마음도 없지 않아 들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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