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팥쥐전
조선희 지음, 아이완 그림 / 노블마인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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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제법 서늘하다. 
오츠이치처럼 극한의 공포를 던져주는 것도 아니면서 그림형제의 그림동화 원전처럼 끔찍함만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면서 서늘한 기운을 전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를 모티브로 했는데 기묘한 전래동화로 비틀어져 버렸다.  제 2회 한국판타지 문학상의 대상을 수상한 작가 조선희의 소설집의 첫 느낌은 그랬다. 이 소설이 도착하기 전까지 나는 참 많이 기다렸다. 기대했고 고대했다. 

모던 팥쥐전이라는 이름처럼 무언가 패러디가 있을 것 같았고, 모던 보이처럼 풍자적인 재미까지 더해져 있었으면 했다. 그런데 의외의 복병이 숨어 있었다. 익숙한 이야기들이 갑자기 낯설어지면서 새벽이 되어서야 책읽기를 끝내고 나니 옆에 있는 고양이마저 무서워지고 있었다. 

어디서 이런 무서움이 숨어 있었을까. 

[모던 팥쥐전]은 "팥쥐네 젓갈"집 딸인 박쥐는 부모의 재혼으로 얻은 언니 최서리에 비해 모든 면에서 부족하다. 성적, 성격, 외모까지 부족하지만 언니의 남자를 빼앗고 싶어진다. 급기야 국과 함께 죽음으로써 목적을 달성했다. 이에 서리는 친구 화니의 도움을 받아 한밤에 모종의 의식을 치르고 박쥐와 뒤바뀌어 버린다. 그리고 옛동화 콩쥐팥쥐의 원전이 살며시 끼여든다. 인육젓갈을 담았다는 콩쥐팥쥐전이.

[자개함]은 묘한 반전이 있는데, 죽은 친구에게서 온 편지를 어느날 받은 가경은 운의 편지대로 운의 집에서 자개함을 가지고 나온다. 이상한 일은 운의 어머니가 그 세월동안 늙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젠 자신보다 어려보이는 친구의 어머니. 그리고 만나게 된 친구 운으로부터 뜻밖의 고백을 듣게 되는데, 새 어머니인 운의 어머니가 이들을 밤새 쫓아오며 울부짖는다. 반전은 그녀가 아니라 운에게 있었다. 무서웠다가 슬퍼지는 이야기.

[시시]는 낡은 물건들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옛날에 공포 소설에 꼭 등장하던 단골 스토리가 누군가의 낡은 물건이 가져온 귀신이었는데, 시시에서는 우렁 각시로 표현되어 좀 덜 무서웠달까. 하지만 공포의 수위가 낮다고는 해도 일반 소설보다는 서늘한 감이 있는 단편이었다. 

[죽이거나 살리거나]는 고소함이 동반된 소설이었는데, 어느날 같은 아파트에서 죽은 아이의 할머니가 아이의 옷을 아내에게 맡기고 간다. 그 날 밤부터 경두에게 꼬마 귀신이 찾아오기 시작했는데 자꾸만 같이 가자고 조른다. 여자에게서 옷을 받게 되면 죽는다 라는 공식이 마치 일본의 공포소설 "링"처럼 좋은 소재로 보여 조금만 더 무섭게 각색되면 좋은 공포영화가 될 수 있을 것만 같기도 했다. 의심하던 아내가 죽고 그전부터 관심있게 보이던 젊은 조교와 재혼한 경두에게 어느날 후배 진권이 찾아오고 그를 통해 사전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진권 역시 죽은 사람임을 깨닫게 된 경두. 모든 것을 가진 상태에서 죽고 싶지 않아 몸무림 치는 인간의 추악한  모습을 보이면서 끝을 맺는다. 

그 외 2편의 단편이 더 실려 있다. 단편이지만 지루하지 않고 서늘하면서도 오싹해진다. 상상 이상의 상상과 반전이 함께 가미되어 예측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이야기가 탄생 되었다. 알고 있는 이야기가 비틀려지면 이처럼 더 무서워지는 법일까. 

전래동화 속 진실은 서늘하기만 했다. 잠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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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이세벽 지음 / 굿북(GoodBook)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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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에 관한 많은 책을 읽었지만 이처럼 전 생애를 다룬 소설은 처음 인 듯 하다. 성경조차도 끝까지 읽어본 적이 없는 내게 소설은 동화처럼 소복소복 쌓이는 눈처럼 포근하게 다가왔다. 

그는 세상 그 어떤 주인공보다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다간 인물이다. 

깨어나보니 유명해져 있더라...라는 표현은 하루 아침에 스타가 된 사람들이 스스로를 표현할 때 쓰는 말이었다. 그와 비슷하지만 슬프게도 딱 하룻밤 사이에 세상은 그에게서 등을 돌려 버렸다. 단 하룻밤 지났을 뿐인데, 찬양은 사라지고 잡혀가는 신세가 되었으며 후딱 해치워진 판결로 인해 사형을 언도 받았다. 

이 소설을 읽는데 꼭 종교인일 필요는 없을 듯 하다. 한 사람의 생을 이해하는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종교의 유무를 떠나 읽을 수 있는 소설이며, 종교인의 입장에서 읽는다면 성경과 비교해 읽을 수 있는 좋은 읽을거리가 되어줄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던 그날 저녁 만찬. 그날이 클라이막스가 되어 결과를 알고 있는 우리를 몰고간다. 그날 만약 다 ㄴ한 사람이라도 그의 운명을 알고 있는 이가 있었다면 단 한사람이라도 그와 함께 슬픔을 나눌 이가 있었다면 위로가 되었을까. 아니 어떤 마음으로 알면서도 그 길을 택한 이를 바라볼 수 있었을까. 

정해진 운명을 미리 안다는 것은 이토록 잔인한 일이 되기도 한다. 따르던 제자들이 그를 모른다 말하고 존경의 눈길이 하루아침에 질탄의 눈길로 변해 있으며 인격됨이 한치도 안되는 작자들에게 조롱을 당해야 하는 그 하루는 얼마나 힘든 하루였을까.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탄생에서부터 부활까지 이어지는 이 이야기는 새롭고도 쉽게 읽힌다. 술술 읽어가면서 다 아는 이야기지만 그 속에 담긴 감동의 두께를 찾아낸다.

영원히 죽지 않는 이름으로 아직까지 남아 있지만 결국 그날 고통 속에서 한번의 생을 마감해야했던 젊은 목숨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 이 책 구석구석에 스며있고 작가가 인물에 대해 가진 애정 역시 담뿍 드러나 있다. 

소설은 역사서나 성경처럼 기술되지 않았다. 동일 사건들을 동화처럼 풀어놓았다. 그래서 읽는내내 가벼운 눈길로 읽어나갈 수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인생의 주인공이었던 한 사람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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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회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 수상작
박솔뫼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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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은 이상한 소설이었다. 제목부터가 그랬다. 
을이라니. 갑을 의 을인가? 뜬금없이 을이라니...

을은 등장인물의 이름이었다. 을. 
민주의 이야기로 시작되었으니 중심인물은 민주일 것이다. 하지만 민주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늘어놓지는 않는다. 민주의 시선으로 바라본 을과 을 때문에 만나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헷갈리지 말아야할 것은 민주는 남자고 을은 여자다. 

처음엔 반대로 생각했다가 중간에 이야기가 꼬여서 이상하게 읽혀지기도 했다. 성정체성의 혼란? 을 겪다가 다시 그들의 성을 바로 잡고 읽었더니 이해가 되기 시작했따. 제1회 자음과 모음 신인 문학상 수상작은 이토록 난해했다. 

그들에게 분명 과거가 있을텐데 그들은 과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들 같았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치유를 목적으로 한 소설과는 또 달랐다. 이들은 따뜻함을 전방에 깔고 있지 않으니까. 무중력 상태의 인간들처럼 그들은 행동에 그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감정상 고조를 겪지도 않는다. 낮설다.  누군가의 평처럼 쓸쓸하기도 했다. 책의 표지색처럼 회색빛이기도 했다.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갈등도 초래되지 않지만 소설은 꽤 많은 분량으로 쓰여지고 있었다. 일기식도 아니고 에세이식도 아닌 소설의 형식으로.

그것 또한 이상한 일이긴 했으나 작가의 문체이거니 하고 지나가 버렸다. 자음과 모음은 꽤 특이한 소설을 골랐다라는 느낌과 함께. 

여행중에 썼다고 작가가 밝힌 글. 그녀의 여행은 어떠했길래 특이한 소설이 탄생했을까. 소설보다는 배경이 되었을 그녀의 여행이 더 궁금해졌다. 

을은 이름이다. 여자의 이름이고 노을의 줄임말이다. 민주는 남자다. 학교의 틀에 얽매이지도 않았고 세상의 틀에 눈치본 적도 없이 스스로의 삶을 살고 있는...하지만 희망과 열정이 결여된 인간형. 그들을 둘러싼 세계엔 그들 같은 사람들이 자석처럼 가득 붙어서 또 하나의 세계를 이루었던 느낌이 가득한 채 소설은 끝을 맺는다. 

특이하다. 소설을 읽고 나서 느낀 단 한 줄의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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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비소리 - 조선의 거상 신화 김만덕
이성길 지음 / 순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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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도]를 읽으면서도 생각했다. 경주 최씨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를 보면서도 생각했다. 
장사는 사람을 이문으로 남겨야 한다는 사실을.
하지만 과연 실천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모두 제 목구멍에 풀칠하기 어려운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바 없다. 그 살림살이의 규모만 달라졌을뿐. 우리는 여전히 돈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누구나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기에 그들의 이야기는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닐까. 기녀라고 해서 황진이처럼 최고의 예인이어야만 유명세를 타는 것일까. 적장이라도 안고 강으로 투신해야만 역사에 이름이 남겨질까. 아니다. 가진 것을 다 내어놓고도 행복했다던 한 여인의 이야기도 감동이다. 그녀 김만덕이다. 

드라마를 보고 있진 않지만 김만덕이라는 인물은 다큐를 통해서도 몇몇 책 속에서도 이름을 들어본 바 있었던 여인이었다. 어떤 여인이길래 이토록 여인에 대해 야박한 역사를 가진 조선에서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인지 궁금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럴만한 주인공이었다. 고아가 되어 관기가 되어 살았지만 끝끝내 거상의 꿈을 이루어내고 장사를 하면서도 상도를 지킬 줄 알았으며 끝내는 가진 것을 다 환원함으로써 자신의 원칙을 지켜내었다는 점만으로도 세계사 어디에서도 유래가 없을 여인이었다. 

원해서 가는 길은 아니었다. 
그러나 살다 보면 원하는 곳에 가기 위해 뒤로 잠시 물러서거나 먼 길을 돌아서 가야할 때도 있는 법이다.

라는 점을 만덕은 알고 살았다. 또한

세상의 모든 일은 사람이 중심이 되어 펼쳐진다 

는 사실도 알고 있는 현명한 여인이었다. 게다가단 한번뿐인 삶을 미련하게 허비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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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의 머리일까?
차무진 지음 / 끌레마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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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앞에 두고 있다.

한 여름의 무더위와 맞먹을 만큼의 더위 앞에서 소름이 돋는다.

지금 정수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한 줄기 땀은 무더운 것이 아니라 식은땀이다.

더위로 한껏 열려있던 모공들이 조개 입다물듯 서둘러 닫히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하나의 작품이 이토록 충격적일수가 있을까.

 

[김유신의 머리일까?]는 출판되는 날부터 기다려왔던 작품이었다.

 

<삼국유사>에 예고된 살인, 천년동안 잠들어 있던 전설.

 

에 혹하지 않았는데도 이 작품은 자석이 다른 극을 끌어당기듯 독자들을 당기고 있었다. 68년 이병도 박사가 <조선일보>에 기재했던 김유신 묘 진위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는 소설은 이미 그 모티브를 뛰어넘고 있었다.

 

첫문장부터 사로잡아라. 라고 작법서에 흔하게들 표현하지만 사실 첫문장부터 독자를 사로잡는 글을 만나기란 가뭄에 단비같다. 하지만 소설은 첫 인물부터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67세의 김교수는 무당이다. 미국 유학파인 동시에 화령대 민속박물관 관장이면서 40대같은 탱탱한 피부에 여전히 여성호르몬이 강렬히 분출되는 이상한 여인이다. 게다가 그녀는 타인의 운명을 미리 아는 능력을 가졌고 때때로 빙의 되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발굴 중 학생들 앞에서 이상한 몸짓을 행하고 있었다. 충격적이었다.

 

소설의 묘사대로 상상하면서 과연 영화화 된다면 이 강한 역할을 누가 맡을 수 있을 것인지 가늠해 보았다.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다. 영화계의 명배우들 중 그 누구도 이런 강렬한 퍼포먼스를 행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소설은 김교수를 떠나, 이어진다.

 

머리만 달랑 나타난 미라. 완벽히 비누화 되어 썩지 않았지만 몸체는 어디에도 없다. 거기에 음산한 집안인 유곡채 김씨일가. 자신을 죽여가며 그림을 그리는 이상한 화가 장남이 살고 있는 곳이며 그들과 사돈을 맺으려는 봉우당 둘째 딸의 목잘린채 발견된 사체. 사건은 현대적인 것과 과거 역사적인 것이 묘하게 교차되면서 함께 의문점을 두게 만든다. 어느쪽도 흥미롭지 않을 수 없도록 균형있게 짜맞춘 작가의 플롯 감이 감각적이다.

 

그 어느 페이지에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마치 끝나지 않을 귀신의 집 속에서 홀로 튀어나오는 귀신들과 사투를 벌이는 밤 같은 느낌이 끝나지 않는다. 소설을 읽는 내내 그랬다. 이제껏 이런 류의 소설은 일본작가들이 빛을 발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그들의 타이틀을 우리가 가져와야 할 때가 아닐까 싶어졌다.

 

작가의 작품을 읽고 다른 작품을 읽기가 두려워졌다. 지나치게 심심해 보일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당분간 이보다 재미난 작품은 읽기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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