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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 왜 독창성 있는 답을 원하는가 

 


단순히 지식을 묻는 문제가 아닌, 독창성에 점수를 주는 문제가 출제되는 것으

로 논술의 방향이 제시되자 많은 학생들이 어려워하고 있다. 대부분의 학부모들

이 논술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걱정부터 한다.


논술에서 왜 독창성 있는 답을 원하는가, 이것부터 알아야 논술고사에 잘 대처

하게 될 것 같다. 예전엔 정보가 많이 담겨 있는 글을 잘 쓴 것이라고 했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 정보는 얼마든지 컴퓨터로 얻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

보다는 남이 생각해보지 못한 것에 대해 깊이 있게 쓴 글이 더 가치가 있다.

어느 분야든 결국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는 사람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기 때

문이다.


‘흥부전’이라는 소설을 읽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놀부의 악덕을 비난했으나 누

군가가 처음으로 흥부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가난한 살림에 자식을 많이 낳았

다는 것은 미래에 대해 계획성이 없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생활을 해결하지 못해 형에게 도움을 청한 것도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 생

각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고 사고의 영역을 넓혀 주었다.


바로 이렇게 인간의 사고의 폭을 넓혀 주는 작업이 논술에서 필요한 것이다.

이런 사고력이 세계를 발전시키는 게 아니겠는가. 훌륭한 예술 또한 그 시대에

대한 ‘반항’을 담고 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남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나 글은 비예술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독창성이 있을 때 예술적이며

더 가치있는 것으로 인정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누구나

쓸 수 있는 논술답안은 유용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독창성 있게 잘 쓰려면 논

리와 설득력을 갖춰야 하며 그래서 독서와 사색이 중요한 건 말할 것도 없다. 한

권의 책을 읽고 나서 독자의 사고력이 확장되었다면 그 책은 좋은 책이다. 마찬

가지로 읽는 사람의 사고력을 높여 줄 수 있는 논술답안은 좋은 글이다.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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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4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일보에 이런 글도 실렸었군요.오늘 처음 보네요.ㅎㅎ

박덕춘 2009-04-09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블로거가 되신 것 추카드립니다. 늘 발전하시는 모습 기대하겠습니다. ..

페크pek0501 2009-04-10 12:39   좋아요 0 | URL
바쁘실 텐데, 들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끔 들러 주시고 다음부턴 방명록에 글을 남겨 주시면 감사...

백문숙 2009-04-10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짧은시간에 들어와 둘러보고 갑니다...
시간 여유 있을때 찬찬히 다 보렵니다...^^

페크pek0501 2009-04-10 12:41   좋아요 0 | URL
매우 오랜만... 반가워. 우리 동창들의 블로그가 따로 있으면 좋겠네. 누가 만들었으면 좋을지 생각해 보자.
 

<수필> 부메랑  


이십여 년이 흘렀건만 아직도 기억나는 사람이 있다. 대학시절, 미팅에서 만난 남자이다. 그는 얼굴에 뭔가 불만이 있어 보이는 의대생이었다. 인사를 나누고 나서 차를 마시며 얘기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그가 내 목을 바라보더니 뜬금없이 목걸이를 샀느냐며 사뭇 시비조로 물었다. 나는 학생 신분으로서는 좀 고급스러워 보이는 십팔금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사 주신 대학입학 선물이었다. 아버지께 선물로 받았다고 대답하자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학생이면 학생다워야지 왜 그런 사치품을 하고 다니냐고 힐난하듯 말했다.  


그의 말인즉, 그런 돈이 있으면 불우 이웃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고아원에서 간식도 없이 밥 세 끼를 단무지 조각으로 때우는 아이들을 한 번쯤 생각해 봤느냐고도 묻는다. 뒤이어 공부엔 관심이 없고 멋만 내는 여대생을 혐오한다는 둥, 내가 책을 읽지 않게 생겼다는 둥, 강의를 잘 빼먹을 것 같다는 둥 하면서 비위를 건드렸다. 나는 당혹감에 어쩔 줄 모르다가 고작, 내가 책을 얼마나 많이 읽는데요, 했다. 그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웃기만 할 뿐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당시 나는 작은 얼굴, 깡마른 체격에 까만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다녔다. 누가 보아도 겉멋만 부리는 여대생으로 보였을 게다. 그렇다 해도 함부로 내뱉는 그의 말이 몹시 불쾌하였다.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고 있는 가난한 학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할 때부터 나와 다른 부류라고 짐작은 했었다. 반면 나는 집안이 비교적 넉넉하였기에 가난을 거의 모르고 살았다. 처음엔 그를 건실한 청년으로 보았는데 곱지 않은 말투로 내 기분을 망쳐 놓는 그에게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가난하면 마음이 그렇게 삐딱해져요?"  


결국 나는 그에게 이렇게 쏘아주고 헤어졌다. 서로 감정이 상했기에 다시 만날 약속 따위는 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편견을 가지게 된 것이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부유한 사람들 모두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는 듯한 그들의 구겨지고 그늘진 모습이 싫어졌다.  


철부지 여대생이었던 내가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하여 십 년쯤 되었을 무렵 'IMF'가 닥쳐 왔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우리의 가정 형편도 어려워져서 남편과 나는 한숨 짓는 일이 많아졌다. 게다가 남편이 실직까지 하게 되자 내 신경은 극도로 예민해졌다. 난생 처음 가난의 아픔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몇 년의 세월을 보내고 나서야 형편이 회복되었는데, 그 일로 어렵게 사는 이웃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이제 내 나이 마흔이 넘었다. 여전히 여유롭지 못한 나와 달리 주변에는 큰 평수의 아파트에서 사는 친구들이 하나 둘씩 늘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나는 친구들 모임에 갔다가 불쑥 이런 말을 하게 되었다.  


"난 골프 치는 사람들이 참 싫더라. 허영심 같아 한심해 보여."  


무심코 던진 말이었는데 마침 그 중에 골프를 시작했다는 친구가 이 말에 기분이 상했었는지 그 다음날 전화를 걸어 왔다. 내 말이 섭섭했다며 그 친구는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가난해지면 그렇게 마음까지 삐딱해지니? 어쩌면 말을 그렇게 해?"  


순간 멍하였다. 귀에 설지 않은 이 말, 이건 오래 전 내가 누군가에게 쏘아붙인 바로 그 말이 아닌가. 그 말이 부메랑이 되어 내 뒤통수를 치다니….  


던지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부메랑. 그것은 원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이 사냥하거나 전쟁할 때 사용하던 도구였다. 그들은 던진 자리로 거슬러 오리라는 것을 알고 부메랑을 사용했겠지만, 나는 돌아올 줄 몰랐던 말을 했던 것이다. 이십여 년 전의 내 말이 긴 세월을 지나 되돌아올 줄 어찌 알았겠는가. 하루아침에 내 자리가 뒤바뀐 것 같았다. 어느 새 나도 모르게 부자들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그들의 고급스런 취미 생활을 나는 그저 허영심으로만 몰아붙인 셈이다.    

 

빈자가 되어보고서야 나는 목걸이로 괜한 트집을 잡았던 그 남학생을 이해하게 되었다. 지금쯤 그 학생은 의사가 되어 있을 테지. 중년에 접어들었으니 생활의 여유도 찾고 휴일이면 골프를 칠 수도 있겠다. 이런 그에게 어느 날 내가 '골프를 칠 비용이면 고아원의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많이 사 줄 수 있을 텐데' 라고 말하면 그는 뭐라고 할까. 젊은 시절의 나처럼 이젠 그가 비아냥거릴 수도 있을 게다.  


사람들이 돈을 버는 것은 의식주를 위해서만이 아닌,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욕구에서일 것이다. 이 욕구는 삶의 활력소가 된다. 남보다 좋은 자동차를 타고 싶고 품위 있는 옷을 입으려는 마음, 그것이 금전에 대한 욕망을 더 강하게 해 주리라. 나 역시 앞으로 생활이 윤택해진다면 골프를 치지 않을 자신이 없다.  


이십여 년이란 긴 시간을 사이에 두고, 이십대였던 나와 사십대인 현재의 나는 정반대의 얼굴을 하고 있다. 삶은 또 어떤 부메랑을 숨겨 두고 있는 걸까.   

* 2004년 하나은행이 공모, 제9회 하나여성 글마을잔치에서 특선으로 당선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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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내 마음의 풍경 

 
어느 전시회에서 밀레의 ‘첫 걸음마’라는 그림을 본 적이 있다. 어린아이가 첫걸음을 떼려는 순간을 그린 것이다. 엄마는 어린애를 바로 뒤에서 붙들고 있고, 맞은편에서는 아버지인 듯한 사람이 어린애를 향해 양팔을 벌리고 있다.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광경이나 나는 진한 감동을 느끼며 그 그림 앞에서 한동안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낮잠’이란 제목의 농민화도 좋았다. 부부가 일을 마치고 풀밭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듯한데, 남자의 어깨에 기대어 잠든 여인의 얼굴이 반쯤 보이는 것이 참으로 평화로워 보였다.

 

사람 사는 세상에도 그림 같은 광경이 많이 있다. 유년 시절에서부터 지금까지 보아 온 광경 중 지워지지 않는 것들을 모은다면 두꺼운 앨범 하나가 만들어질 것 같다. 그 추억의 앨범으로 지난 시절을 회상할 수 있다는 건 축복 같은 일이다.

 

아파트에 사는 나는 때때로 옛 친정의 마당을 그리워한다. 눈을 들면 하늘이 훤히 보이고 잠자리와 나비가 자유롭게 놀다 가는 뜰. 새들의 노랫소리가 아침을 열어주고 밤에는 달과 별이 친구가 되어 주는 곳.

 

어릴 적 소꿉장난을 하거나 줄넘기를 한 곳도 마당에서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가방을 마루에 던져 놓고 친구들을 불러다 놀곤 하였다. 그리 넓지는 않았으나 우리가 놀기엔 충분했다. 엄마가 부엌에서 간식거리를 만들면 풍겨 오는 음식 냄새를 맡으며 노는 게 즐거웠다. 찐 고구마나 감자, 옥수수 따위를 함께 놀던 아이들과 경쟁하듯 앞다투어 먹으면 참 맛있었다. 흥겨웠던 그 시절을 좋은 그림으로 기억한다.

 

내가 열세 살쯤에 넋을 잃고 바라본 풍경이 있다. 우리 집 근처의 허름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게 마치 훌륭한 예술작품처럼 보였다. 나는 이런 풍경을 보고 있으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담벼락에 있는 흠집과 낙서를 보면 정겨웠다. 그 지붕 아래 어디선가 아이를 부르는 어느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왠지 포근한 느낌마저 들었다.

 

어른이 되어서는 산책을 좋아하게 되었다. 집들을 끼고 도는 골목길은 나에게 좋은 산책로가 된다. 천천히 걸으면서 여러 가옥들을 만난다. 푸른 나무들이 햇볕을 받으며 하늘을 가득히 맞이하고 있는 집, 옷들이 빨랫줄에 평화롭게 널려 있는 집, 꽃밭의 꽃들이 고운 빛깔로 사람의 시선을 끄는 집, 앙증맞게 생긴 아이의 신발이 보이는 집 ···. 이것들은 마음의 사진이 되어 가슴에 새겨진다.

 

내가 여행을 갈 때 설렘을 느끼는 것도 멋진 경치에 대한 기대 때문일지 모른다. 빨간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나무는 늦가을의 운치를 느끼게 하고, 설경은 언제 보아도 설렌다. 산 그림자를 품은 호수는 명상적인 분위기로 나를 이끈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촌가나 먼지가 뽀얗게 이는 시골길이 눈에 띄면 마음의 고향을 보는 듯하다. 기적을 울리며 사라지는 기차의 마지막 모습은 나를 버리고 떠나는 연인처럼 어떤 아쉬움을 남겨 놓는다. 철새들의 행렬, 해질녘 바람 부는 숲, 어둠에 서서히 묻히어 가는 마을을 보면 나도 모르게 시선이 멈춘다.

 

그러나 이보다 더 내 마음을 끄는 것은 사랑과 사람이 함께하는 풍경이다. 사랑을 담은 얼굴이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 얼굴은 그 사람의 심경과 같아서, 온화한 표정을 짓는 이를 보면 어떤 인생을 사는지를 짐작하게 된다.

 

어느 날 동네에서 본 두 노인의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탄 할머니에게 과자를 조금씩 떼어 먹이며 웃음 띤 얼굴을 하고 있었다. 따뜻한 사랑이 느껴졌다. 서로를 바라보고 웃기도 하는 두 사람은 행복해 보였다. 어쩌면 할머니보다 할아버지가 더 행복한지 모른다. 사랑을 받는 이보다 주는 이에게서 더 흐뭇한 기쁨이 엿보였다. 행복이란 자신의 처지에 있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에 있음을 보여 주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목욕탕에서 노인의 등을 밀어주던 젊은 새댁, 리어카를 힘겹게 끄는 이를 위해 뒤에서 밀어주던 어떤 이, 병원에 진찰 받을 시어른을 모시고 온 며느리, 가족을 위해 푸짐하게 장을 봐 오는 주부. 이들의 모습도 모두 한 폭의 그림 같다.  

 

내가 아름다운 풍경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듯이, 이젠 남들이 간직하고 싶은 풍경을 만들고 싶다. 밀레의 작품같이 진한 감동을 주지는 못하더라도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아름답게 기억되는 그림을 만들고 싶다.

 

앞으로 나는 사는 날까지 몇 점의 그림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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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4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읽으니 새롭네요.ㅎㅎ
 




글짓기를 잘 하려면 우선 언어 습관을 올바르게 가져야 한다. 평상시 하는 말이 그대로   

글짓기에도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경우, 말 잘하는 아이가 글을 잘 쓴다. 또 글을 잘 쓰는 아이가 말도 잘한다.
 

말이나 글은 모두 똑같이 언어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을 유창하게 함으로써 언어 사용 두뇌를 발달시켜서 글을 잘 쓰게 할 수 있다. 


문맥이 맞지 않는 글을 자주 쓰는 아이를 잘 살펴보면 말도 서투르게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집에서 엄마가 자녀의 말 습관에 관심을 가지고 바르게 고쳐주는 게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아이가 “엄마, 나 감기여서 머리가 아파요”라고 말하면 엄마는 말의 잘못됨을 지적하고  

바르게 고쳐줘야 좋다.
 

‘나는 감기이다’라는 문장은 맞지 않는 말이다.
 

“엄마, 나 감기가 들어서 머리가 아파요”라고 고쳐준다면 이것이 글짓기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2) “오늘 열심히 땀을 흘리며 산에 올라갔어요”와 같은 말도 잘못된 것이다.
 

땀을 열심히 흘린 게 아니라 산에 열심히 올라간 것이니까 “오늘 땀을 흘리며 열심히 산에  

올라갔어요”라고 고쳐준다. 


3) “난 국어가 싫고 사회가 좋아요”라고 말한다면 이렇게 정확히 고쳐준다.
 

“난 국어과목이 싫고 사회과목이 좋아요”라고.
 

그냥 국어가 싫다고 하면 읽는 사람에 따라서 모국어가 싫다는 말로 들릴 수 있다. 


4) “난 수학에 자신이 있어서 어려운 수학문제가 없어요”와 같은 말은 비논리적인 말이다.
 

자신감이 있어서 수학문제가 쉬운 게 아니라 수학문제가 다 잘 풀리니까 그 과목에 대한  

자신감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이렇게 고쳐야 맞다.
 

“못 푸는 수학문제가 없으니 이 과목에 자신이 생겼어요”라고. 


중요한 것은 말 하나 하나를 신경써서 하는 아이라면 글을 쓸 때에도 꼼꼼히 따져 쓰므로  

글을 잘 쓰게 된다는 점이다.
 

말만 통하면 된다는 식으로 대충 말하는 아이는 글도 그렇게 대충 써서 좋지 않은 문장을  

쓰게 될 것이다. 


흔히 아이가 고학년이 되었을 때 학원에 보내서 글짓기를 배우게 하는 어머니들이 많다.
 

하지만 문장을 쓰는 방식이 자신의 성격과 같이 이미 형성되어 버려서 고치기 힘든 경우가  

생길 수 있다.
 

학원에 보내기보다 어릴 때부터 집에서 올바른 언어 습관을 갖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결국 말 잘하고 글 잘쓰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독서를 하는 게 아니겠는가. 


바르게 말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는 습관을 가진 아이라면 글짓기에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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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랑에 불륜은 없다 - 마광수 문화비평집
마광수 지음 / 에이원북스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모든 사랑에 불륜은 없다

마광수 지음 / 에이원북스


“고정관념의 사슬을 슬쩍 풀게 하는 기회를 제공”


나와 다른 생각의 글을 읽는다는 건 하나의 기쁨이다. 뻔한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충격적이어서 새롭고 새로워서 충격적인 저자의 글을 따라가노라면 어느새 낯선 여행지에 가 있는 느낌이다. 난 이 느낌이 좋았다.


‘모든 사랑에 불륜은 없다’, 이 제목부터 평범치 않다. 모든 사랑은 그저 사랑일 뿐, 거기에 불륜이란 말이 끼어들 수 없다는 것. 그러므로 모든 사랑은, 설사 기혼자의 외도라 할지라도 도덕적 잣대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결혼제도는 마땅히 없어져야만 할 악이다. 굳이 둘이 살려면 계약동거가 차라리 낫다. 그러나 프리섹스의 실천만이 인류를 권태와 가학의 질곡에서 구해줄 수 있다.<p22>


나는 결혼제도 자체를 혐오하지만, 결혼제도를 유지하면서 성적 쾌감을 권태감 없이 ‘불륜’을 통해 증진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스와핑 섹스도 썩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p35>


저자가 말한 핵심은 기혼자 남녀 모두 각자 연인을 두어도 무방하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 마음의 돌을 던질 독자가 많을 듯하다. 하지만 생각하기 나름일 것 같다. 나는 프리섹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첫째, 인간은 이성이 아닌, 감정대로 움직일 때가 많은 불완전한 존재이고, 결혼이란 제도는 불합리하며, 인생은 부조리하다. 그러니 이혼이나 불륜과 같은 문제가 생기는 건 당연하고, 인간의 어떠한 잘못도 무죄인지 모른다. 단 타인에게 큰 피해가 없는 한, 이란 단서가 붙어야 하겠지만.


둘째, 한 연구에 따르면, 결혼하는 순간을 사랑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로 가정한다면, 2년 후 그 사랑의 강도는 반으로 줄고, 그로부터 다시 2년이 지나면 남은 사랑의 열기는 또 반으로 줄어든다고 한다. 그래서 세계 공통으로 결혼 4년째가 가장 이혼율이 높다고 한다. 이 점을 생각할 때 한 사람과 평생을 살아야 하는 오늘날의 결혼제도는 다른 형태로 바꾸는 일에 대한 검토의 필요성이 충분히 있다.


셋째, 어떤 사물에 대한 평가는 그 시대에 따라 다르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겠다. 가령 일부다처제가 악덕이 아닌 시대가 우리에겐 분명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것을 좋게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미래엔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게 될지 알 수 없다. 프랑스의 미래학자 파비엔 구보디망에 의하면, 평균 수명이 120세가 되는 2070년에는 평범한 사람도 평생에 두세 번 이상 결혼하게 된다고 한다. 아마 그때의 결혼제도는 지금의 그것과 매우 달라서 평생 이혼하지 않고 한 명의 배우자와 사는 사람이 오히려 화제가 될 것 같다.


저자는 다른 저서 <이 시대는 개인주의자를 요구한다>에서 ‘사랑은 언제나 비밀스러운 것이고 개별적인 것이고 또한 동시에 본능적인 것이다. 어설픈 정신분석이론이나 사회학적 이론이 거기엔 통용되지 않는다.’라고 이미 쓴 바 있다. 사실, 자신의 인생은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 개인적인 성향의 연애생활에 누가 왈가왈부할 수 있겠는가. 그런 면에서 볼 때 ‘간통죄’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엔 긍정적인 아닌, 부정적인 시각으로 생각해 보았다. 기혼자가 프리섹스를 할 경우, 처음엔 강한 유혹에 끌려 불륜을 행하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언젠가는 후회와 자책으로 괴롭지 않을까, 자신에 대한 자긍심 없이도 인간은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런데 이것은 그런 연애가 비밀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데, 이 역시 우리의 생활에 익숙한 고정관념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어쩌면 그런 류의 고정관념을 깨기만 한다면 인간은 지금보다 더 많이 행복할 수 있을지 모른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사랑을 나누는 것이 왜 나쁜가, 서로에게 행복을 주는 행위가 왜 나쁜가,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시대가 온다면 불륜을 보는 시각도 달라질 듯싶다. 아니 ‘불륜’이란 말 자체가 사라질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 말해 주듯이.


저자는 문학을 ‘금지된 것’에 대한 끝없는 도전이라고 보는데, 나 역시 문학이 그 영역에 머무를 때 강한 생명력이 있다고 본다. 결국 문학은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아야 행복할까 하는 문제 제기이며, 바람직한 세상 만들기가 궁극적 목적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연히 옳다고 생각하는 기존의 성문화를 진지하게 검토함으로써 ‘금지된 것’에 닿으려는 노력은 성과를 떠나서 그 자체로 의미가 있으리라. 현실적으로 외도하는 남편들이 많은 것은 한 사람의 배우자와 평생을 사는 게 본능적으로 불가능함을 말해 준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에, 보다 자유로운 성문화의 추구는 어쩌면 필연적이다.


그러므로 나는 저자의, 파격적이고 때로는 비상식적인 생각들을 무조건 틀렸다고 보는 시각이 아닌, 유연한 사고를 하는 시각으로 보고 싶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한데 너무 시대를 앞서서 보고 있군, 하는 정도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하지만 현재로선, 미래에 자유로운 성문화가 생길 것이라고 인정한다고 해도 ‘부부 각자가 서로에게 새 연인이 생겼음을 축하해 주는 모습’을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건 아주 불가능해 보인다. 그저 저자가 이런 문제를 우리에게 하나의 논란거리로 제공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작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우리는 인식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 새로운 생각을 흡수해야 한다. 되도록 나와 많이 다를수록 그 새로움은 더 가치가 있을 것이다. 만약 그 새로운 생각에 동의할 수 없어 비판의식을 가지고 보게 된다면 그것 자체로도 유익하다. 이런 점에서 저자의 독특한 세계관을 만날 수 있는 이 책은 소중하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약점일 수 있는 것에 대해 말하련다. 오래 전에 쓴 글들이 눈에 띄는데, 심지어 1987년에 쓴 글도 들어 있다. 처음엔 이런 점에 실망했는데, 곧 생각을 수정하게 되었다. 오래된 글이라고 해도 현재에도 그 내용이 유용하다면 발표할 수 있다는 것과, 또 오래된 글이라고 해서 그 가치가 떨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오래된 글이어서 더 가치를 두는 게 문학의 고전이라는 것을 생각해 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오래된 글에도 몇 년도에 썼는지를 정직하게 밝혀 둔 점에 좋은 점수까지 주게 되었다.


이 책은 읽을 만한, 꽤 괜찮은 책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로 하여금 고정관념의 사슬을 슬쩍 풀게 하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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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선민 2009-06-04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선민이 입니다.
역시!!! 선생님이시네요.♡ 좋은글이 많은 것 같아요.
앞으로도 좋은글 자주 써주세요~!많이, 많이 들릴게요.
댓글...달아주시는 쎈쑤~♥선생님께는 충분히 있을 것이라고 믿겠습니다.
가르쳐 주셔서 감사하구요 사랑합니다.

페크pek0501 2009-06-05 14:24   좋아요 0 | URL
오, 선민이가 드디어 들어왔군. 찾느라 수고많았어. 어떻게 하면 수업을 재밌게 진행할까 생각하곤 하는데, 우리 학생들이 오히려 재밌게 수업에 임해 주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글쓰기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우리 학생들이 알았으면 해. 그럼 다음 수업시간에 보자, 반가웠어.
 
광고 속의 성차별
박은하 지음 / 소통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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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속의 성차별

박은하 지음 / 소통


“남자가 차도 쪽으로 걸어야지. 사랑하는 여잘 지켜주잖아, 라고 말하는 것도 성차별?”


광고는 오늘날 대중의 행동과 유행의 문화를 만들기도 할 만큼 그 영향력이 크다. 여러 광고 중에서도 특히 텔레비전 광고는 매일 접하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우리 가까이에 있다. 우리가 텔레비전 광고를 별 생각 없이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정신세계는 분명, 광고의 어떤 면을 닮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광고를 만드는 사람이나 광고를 보는 사람이나 모두 올바른 광고 문화를 창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제목에 끌려 구입한 책인데, 사고 보니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부분적으로 고쳐서 낸 책이었다. 한 마디로 이 책은 남녀평등을 지향하는 책이다. 텔레비전 광고를 1980년대, 1990년대, 2006년 등 세 시기로 나누어 성차이어와 성차별어를 각각 찾아 구분하였고, 그것들에 대한 설문지를 만들어 수용자들의 인식 정도를 파악하였다. 수용자들이 얼마나 성차이어와 성차별어를 인식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중학생과 고등학생, 성인 등 총 240명에게 설문지를 주고 질문에 응답하도록 하여 그 결과를 분석하였다.


‘성차이어는 남성과 여성이 다르듯 성에 따른 언어 사용이 다를 수 있다는 맥락에서 그 존재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차별어는 성차이어와 달리 일상에서 별다른 의식 없이 언어를 사용하다가 누군가를 차별하거나 누군가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는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p235>’고 저자는 말한다.


여 : 윤선생은 자기 힘으로 할 수 있게 해 주니까. 영어가 습관이 되더라고요.<윤선생영어교실 광고, 2006>


위의 밑줄 친 말처럼 여자의 말인지 남자의 말인지 알 수 있는 것이 성차이어다.


이와 다르게 성차별어란 한 성의 어떤 행위들을 다른 성의 같은 행위들과 관련하여 특징짓고 제한하기 위해 사용되는 언어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여 : 애들 건 엄마가 직접 골라줘야 안심이잖아요.<음료 카프리썬 광고, 2006>


위와 같이 일과 관련하여 성 역할을 차별적으로 묘사한 경우, 성차별어가 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선 성차별어의 분석 기준을 다음과 같이 제시해 놓았다.

1) 일과 관련하여 성 역할을 차별적으로 묘사하기

2) 여성의 외모를 강조하고 성적 대상으로 묘사하기

3) 남녀의 행동이나 성품을 차별적으로 묘사하기

4) 여성을 비하하여 부정적으로 묘사하기


우리는 성차별어를 얼마나 판가름할 수 있을까. 예를 들면 ‘동네 슈퍼 박 사장님, 편의점 김 양아!’라는 광고 사례를 보고 성차별이라고 떠올릴 수 있을까. 우선 여기서 남자에겐 ‘사장님’이라고 하고 여자에겐 ‘양’자를 붙여 남녀의 신분 차이를 드러낸 점에서 이것은 명백한 성차별어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박 사장님’이란 호칭에서 우린 왜 박 사장이 당연히 남자라고 생각했을까 하는 점이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있는 정보가 없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바로 ‘남자를 부를 때는 공적인 호칭을 잘 사용하나 여자를 부를 때는 이름이나 사회적인 신분을 나타내는 직위로 호칭하지 않는 경향<p205>’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다. 또 ‘사람(남자, 여자)을 나타낼 때 주로 남자를 대표로 해서 표현<p221>’되기 때문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여자가 하는 일에 대해선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남자가 차도 쪽으로 걸어야지. 사랑하는 여잘 지켜주잖아.” 라고 남자가 여자에게 말한다면 성차별일까? 여기서 여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안전하게 하기 위해 인도 쪽으로 걷게 하고 남자인 자신이 차도 쪽으로 걷는 것, 그 자체는 부정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 그런데 여자를 보호해야 할 약한 대상으로 생각하고 그런다면 문제가 된다. 여성을 남성보다 약한 존재로 규정함으로써 남성이 보호자의 위치에 놓이게 되는데, 이는 곧 남성이 여성보다 우위에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차별이 되는 것. 자신이 누구보다 우위에 있는 존재로 여기게 된다면 그 인간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평등관계가 아닌 상하관계가 될 터, 이것은 가부장제와 다를 바가 없다.


여기서 나온 결과를 보면, 우리가 예상할 수 있듯이 성차별어에 대한 인식은 남성들보다 여성들이 높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남성들의 성차별 인식 부족으로 인해 그 피해자는 여성일 수밖에 없음을 말해 준다.


여자가 살림만 잘 하면 됐지.

너는 여자인데 제사에는 뭐 하러 끼냐?

여자가 뭐 하러 (밤늦게) 싸돌아 다니냐?


이런 말들을 하는 남성들로 인해 여성들이 마음의 상처를 받는 일은 앞으로 없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성차별이 없는 사회, 즉 남녀평등이 실현되는 사회가 되면 남자에게 불이익이 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남자들을 위해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남녀평등은 여자만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남자도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 그러므로 여성 해방이 아닌, 양성 모두의 해방이라는 것. 한 가지의 예를 들면, 한 가정의 경제상태의 모든 책임을 남성에게만 부담하게 하는 세상이 아닌, 남성과 여성이 함께 공평하게 책임을 지는 세상이 된다면 남성들의 무거운 어깨가 지금보다 가벼워지지 않겠는가. 또 하나, 여성이 불평 없이 행복해야 그 옆에 있는 남성도 행복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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