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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이외 다른 분야라면 시대나 문화에 따라 서로 다른 ‘진리’가 있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과학은 회의주의(상대주의)를 거부합니다. 과학은 객관적입니다. 엄밀한 탐구 방법과 증거에 기초합니다. 과학자들은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해 검증합니다. 같은 결과가 반복해서 나오고 방법상 어떤 오류도 없다면 가설은 이론으로 살아남습니다. 이 규칙은 엄격히 적용됩니다. 따라서 과학에서 진리를 찾는 데는 특별한 변명거리가 필요치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어떤 진리를 말하는 것일까요? 같은 진리일지라도 시대마다 서로 달라 보였습니다. 과학사를 살펴보면 결국 잘못되었다고 판정되는 이론들이 널려 있습니다. 평평한 지구나, 천동설, 에테르, 우주상수 같은 오류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과학은 이런 오류를 인식하고 수정하면서 나아가지만, 시간이 지난 뒤 수정된 이론조차 오류로 판명되곤 합니다. 이처럼 과거에 완전무결해 보이던 과학 이론도 결국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기에 오늘날 이론들 역시 언젠가는 오류임이 밝혀질 수도 있습니다.



물리화학자 마이클 폴라니(1891~1976)는 과학이 계속 수정 가능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안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새로운 관찰과 실험이 과학의 발견 과정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대개 과대평가되어 있다.” 과학을 발전시키는 것은 새로운 사실이라기보다는 알려진 사실에 대한 새로운 해석 내지는 알려진 사실을 의미 있게 설명해주는 새로운 체계의 발견입니다. 이런 발전은 “종종 게슈탈트적 성격을 갖는 것이어서 전에는 아무 의미가 없던 무언가가 갑자기 ‘눈에 확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과학에 적용되는 이러한 관점은 정치나 경제, 법, 종교, 교육 같은 모든 분야에 적용됩니다. 삶의 어떤 측면이든 한 세대 진리가 다음 세대에 이르면 오류로 밝혀지는 일이 워낙 많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개인 삶에도 적용됩니다. 우리는 모두 나이가 들면서 자신 신념 중 일부를 버립니다. 우리는 이론을 세웠다가 어느 순간 그것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확신할 수 없는 감각이나 제한된 지적인 능력, 들쑥날쑥한 기억력, 복잡한 주변 환경 때문에 우리는 지속적으로 잘못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사실 과학이란 사물의 본질을 발견하려는 시도가 아닙니다. 현상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발견하려는 노력입니다. 곧 과학의 목표는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 사이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실재는 그 관계뿐이다”라고 수학자 푸앙카레(1854~1912)는 말했습니다. 과학에서 제기되는 질문은 ‘왜’가 아니라 ‘어떻게’입니다. 우리는 열과 빛, 전기 그 자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관찰과 인식된 범위 안에서 발생하는 조건과 법칙을 알 따름입니다. 예컨대 우리는 전자가 질량과 전하가 있는 실체라고 생각하지만, 전자는 전자장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일 뿐입니다. 전자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전자장 일부분에 해당하는 형상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전자의 물리적 속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과학자는 전자 같은 외부 대상을 연구하지만, 그들이 다루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닙니다. 과학자는 전자의 속성 같은 순전히 인위적인 수학 법칙만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사실 과학에서 말하는 자연 법칙이란 자연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자연을 이해는 과정에서 만들어 낸 ‘모델’ 같은 것이라고 이해하는 게 더 타당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매일 매순간 접하는 에너지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에너지가 정말로 무엇인지 오늘날에도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에너지는 우리가 관찰하는 외부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가 관찰한 것에 질서를 부여할 때 사용하는 하나의 개념일 수도 있습니다. 
















유전자 역시 구체적인 실체라기보다 상당히 추상적인 개념이며, 인간이 만들어낸 ‘모델’에 가깝습니다. 생명체 정보를 암호화한 디지털 코드, 즉 DNA 염기 서열 형태로 압축하여 세대에서 세대로 전달한다는 생각은 하나의 모델일 뿐입니다. 모델과 사실은 일치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인류가 구상한 가장 멋진 ‘이야기’ 중 하나일 뿐입니다. 물질의 참된 본질은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갈릴레이는 “낙하하는 물체에 가속도가 생기는 이유를 찾는 일이 연구에 필수가 아니다”라고 밝혔습니다. 과학 탐구는 궁극적 원인을 찾는 형이상학과 분리되어야 하며, 물리적 원인을 찾는 일은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과학자 임무는 원인을 캐는 게 아니라 현상을 수량화하는 것입니다. 뉴턴에게도 근본 원인을 설명하는 대신 수학을 강조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의 천체 역학에서 중요한 물리 개념은 중력인데, 중력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빈 공간에서 수백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두 물체가 서로 끌어당긴다는 설명은 신뢰할 수 없어 보였습니다. 중력의 물리적 실체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뉴턴에게 중력은 인력(引力)인 반면, 아인슈타인에게 중력은 공간의 휘어짐입니다).



과학은 근본 원리를 이야기하지 않을 뿐 아니라, 수학으로 서술하는데도 한계가 있습니다. 뉴턴 역학에서 행성 궤도 같은 이체(二體)문제는 멋지게 서술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삼체(三體)문제에서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립니다.*** 궤도를 도는 물체의 운동은 물리법칙으로 완전히 결정되지만, 우리는 결코 초기 조건을 충분히 알 수 없기에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긴 시간에서는 초기의 위치와 운동이 조금만 달라져도 현재의 태양계에서는 엄청난 차이를 만듭니다. 수학자들은 삼체문제를 풀려고 수백 년 몸부림쳤고, 일부 진전이 있긴 했지만 완전히 푸는 데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베이컨이 지적했듯 자연의 정교함은 인간의 꾀를 훨씬 넘어섭니다.



사람들은 날씨 같은 거대한 복잡계는 예측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중력으로 상호 작용하는 삼체처럼 단순한 복잡계도 마찬가지로 예측을 못 한다는 점입니다. 결정론과 예측 가능성을 순진하게 믿었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우주와 지구 영역을 떠나 생명과 인간 영역으로 넘어오면 우연은 더 만연하고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경제와 사회, 세포 행동에서부터 면역계와 유전자, 뇌, 의식 작용에 이르기까지 우리 시대 가장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데 다소 진전을 이루겠지만, 큰 진전은 매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과학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자연의 법칙’이란 개념은 16~17세기 사이에 처음 나타났습니다. 그 이전에는 이런 개념이 거의 없었습니다. 16세기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만들어지고 여기에 ‘입법자로서의 신’이라는 기독교적인 생각이 접목되면서, ‘자연의 사물에까지 법을 만들어 부여하는 신’이라는 개념이 받아들여졌습니다. 데카르트가 자연의 법칙이란 개념을 처음 사용한 과학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신이 우주를 만들 때 법칙을 부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떻게 우주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자연법칙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감각과 이성 모두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라는 생물이 대체 어떻게, 왜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우주의 보편법칙을 이해하고 발견할 수 있을까요? ‘우주의 보편법칙을 이해하는 인간’이라는 관념은 우연히 진화한 인간 존재에게 너무나 많은 능력을 부여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우주에 대해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인간에게 우주가 이해된다는 사실”이라고 말했습니다. 

















우주 역사 138억 년을 1년으로 보면, 1월 1일 0시에 빅뱅이 일어나 우주가 탄생했습니다. 지구는 9월에야 생겼습니다. 지구에 생명체가 생긴 때는 9월 25일쯤입니다.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21시 45분에야 인류는 두 발로 걷기 시작했고 23시 59분 59초경에 갈릴레이가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처음 올려다보았습니다. 근대 과학의 역사는 우주 달력에서 단 1초입니다. 뉴턴 시대에도 그랬던 것처럼, 어느 시대 과학자든 자기 시대 과학을 최첨단이라고 여기면서 완성 직전 단계에 와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간의 감각 기관 중 우리 눈만 보더라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눈은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눈이 아니라 뇌를 통해 사물을 봅니다. 우리 눈에 들어오는 시각 정보는 초당 11메가바이트에 달하지만, 우리가 정말 뇌로 ‘보는’ 것은 고작 초당 60비트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직 소수 정보만이 뇌로 이동합니다. 뇌는 정신이 쏟는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매우 빠른 속도로 나머지를 추측합니다. 우리는 망막으로 본 불완전한 대상을 상상으로 메워 생생한 대상으로 바꿔줍니다. 



시각이란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망막과 상상이 함께 만듭니다. 그러한 과정을 우리는 의식하지 못합니다. 우리 뇌가 끊임없이 이미지를 산출하여 머릿속에서 세상을 만든다는 측면에서 우리가 깨어있더라도 뇌는 항상 꿈을 꾸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 뇌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습니다. 우리 뇌는 현실을 잘못 해석할 가능성이 항상 존재합니다. 

















실재를 알기 위해서는 뇌 안에 이미 세계를 바라보는 기존 지식과 경험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눈을 통해 뇌에 들어온 신호는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합니다. 뇌는 무질서한 신호를 분류하고 재배열하고, 때론 무시하고 의미를 부여합니다. 실재는 뇌가 만들어 냅니다. 우리 두뇌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패턴에 맞도록 우리가 지각한 내용을 자동으로 끼워 맞춥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1889~1951)의 말을 인용하면, “당신은 보고자 하는 것만 보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세계를 그려냅니다. 우리 바깥에 독립된 외부 세계가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모든 것은 우리 마음의 반영이고, 우리가 만들어냅니다. 물리학자 스티브 호킹(1942~2018)은 “과학이란 제한된 일부 모형에 불과하며, 그 모형과 우리가 실제 얻은 관측결과를 관계 짓는 규칙의 집합일 뿐이다. 과학 이론은 우리 마음속에만 있을 뿐, 그 이외 어떠한 실재(그것이 무엇을 뜻하든 간에)도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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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클 폴라니가 보기에 이는 기독교의 산물입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에 개별적인 진리를 넘어서는 ‘초월적 진리’가 있다는 전통 내지는 이념을 심어주었습니다. ‘저 바깥에’ 존재하는 진리가 발견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폴라니는 과학의 전통 내지 객관적, 초월적 진리에 대한 추구의 기저에는 기독교 이념이 깔려 있다고 보았습니다.


** 양성자나 전자가 전하를 띠었다고 말할 때 중성자에 없는 에너지가 가득 차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전하의 정의는 전하를 띤 입자가 다른 입자를 밀어내거나 끌어당길 때 전하를 띠었다고 간주됩니다. 어느 물리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하라는 것은 일종의 태도와 같다.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누구는 카리스마가 있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 삼체문제의 공간 상태는 18차원입니다. 우선 한 물체의 운동을 나타내려면, 6 가지 정보가 필요합니다. 3차원 공간이기에 위치를 나타내는 좌표 3개와 각 좌표의 속도를 나타내는 수 3개가 필요합니다. 전체 물체가 세 개이니, 이들 상태를 모두 나타내려면 6 X 3 = 18차원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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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심리학의 핵심은 우리 자아가 서로 충돌하는 부분들로 분열되어 있다는 점이 입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 몸에 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은 특정 임무를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으면서도 종종 서로 다른 목적을 추구하는 위원 여러 명으로 구성된 위원회와 비슷합니다. 마음의 분할은 프로이트 심리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 마음은 서로 상충하는 목적을 갖고 작동하는 모듈의 결합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119 긴급구조대원이 들려준 기이한 사례가 이런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다리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을 구조하는 어느 대원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놀라운 일은 사람들이 차를 다리 한쪽에 세워두고, 차 문을 잠근 뒤 다리에서 뛰어내린다는 점입니다. 마치 다시 돌아올 것처럼 말이죠.”



다시 돌아올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차 문을 잠글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서로 다른 목적을 갖고 작동하는 모듈의 결합체라, 항상 차 문을 잠그라고 말하는 마음은 다른 마음에 영향받지 않습니다. 마음은 제각기 독자적인 여러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현대 정신과학에서 이해가 안 되는 문제는 정신이 여러 부분으로 이루어졌다는 성질이 입증되었다는 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마음의 본질이 입증되었음에도 어찌 된 일인지 다들 우리가 한결같이 일관된 사람이라고 믿는다는 점입니다. 혹은 일관된 사람이어야 한다고 남을 강요한다는 점입니다. 일관되지 않은 남은 믿을 수 없고 나도 남이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길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일관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이율배반적인 존재입니다. 뉴스를 보면서, 주택 공급이 안정화 되어 전반적으로 주택 가격이 낮아지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하다가도 내 집값이 떨어지는 건 참지 못합니다. 나이는 천천히 먹어야 하지만, 주말은 빨리 와야 합니다. 사람은 일관되지 않은 다중인격체입니다. 

 















또한, 프로이트의 양심 이론은 우리가 태어날 때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 프로이트 역시 인간이 본래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생각을 거부합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 마음은 ‘원초아(이드)-자아(에고)-초자아(슈퍼에고)'로 구성됩니다. 초자아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결정합니다. 원초아가 인간 육체와 관련된 본능이라면, 초자아는 사회에서 배우는 규범이 내재된 상징입니다. 



프로이트는 초자아에서 생긴 두려움이 죄책감을 만들어낸다고 보았습니다. 초자아는 기본적으로 자아에 대한 검열자나 재판관 역할을 합니다. 비록 양심의 명령이나 도덕적인 자유의지인 듯 보이지만, 결국 사회에서 형성된 초자아가 검열하는 과정입니다. 자아에게 초자아란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훈육 등으로 생긴 사회의 질서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를 테면 우리나라 중학교 3학년 도덕 교과서에서 파업에 대한 논의는 이런 훈육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교과서는 ‘자신 권익을 지키기 위해 파업한다’는 입장과 ‘시민에게 불편을 주면서 파업하는 것은 나쁜 일’이라는 입장을 먼저 대립시킵니다. 그 다음, 이 두 입장을 절충하여 “자신 권익을 향상시키기 위해 시민생활에 불편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마지막 수단으로 파업하는 행위는 나쁘지 않다”는 원칙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이는 파업하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모든 파업은 직간접적으로 시민생활에 불편을 끼칩니다. 그리고 파업 효력은 바로 그런 불편에서 나옵니다. 아무리 격렬하게, 아무리 오랫동안 파업을 해도 시민생활에 아무런 불편도 끼치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가 파업하는 노동자 호소에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모든 파업이 시민생활에 불편을 끼침에도 성숙한 시민사회가 이를 용인하는 까닭은 우리 모두가 언제라도 마지막 수단으로 파업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훈육된 초자아의 영향에 따라, 우리는 같은 노동자로서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응원하기보다 내일 아침 출근길의 불편함부터 떠올리게 됩니다.
















프로이트 주장에 따르면, 주체 내면에서 도덕적 의지나 양심의 가책이 생기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주체의 자유의지라고 볼 만한 증거가 없습니다. 도덕적 의지나 양심의 가책은 초자아 기능에 불과하며, 초자아란 시대 요구에 따라 자신 마음에 형성된 ‘흔적’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내 마음에 생생하게 울려 퍼지는 양심의 소리란 단지 시대유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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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상인 집단은 사회에 새로운 자본주의 시각을 어떻게든 확산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상인 친화적인 경제체제를 구축하려면 빈곤한 노동자나 소작농 등 당시 적대적인 사람들이 상인 집단의 사고방식을 따르도록 변화시켜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상인 집단은 적대적인 사람들을 강하게 대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가난한 자들을 강제로 일하도록 해야 하며, 대부분 사회복지는 그들 게으름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으므로 철폐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점차 자본가는 자신 스스로에게 적용한 근면이나 성실의 규율을 ‘게으른’ 노동자들에게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자본가 미덕은 ‘비생산적이고 게을러터진’ 노동자를 가차 없이 대할 수 있는 권리나 의무로 자연스럽게 전이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가치관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자본가가 노동에서 ‘의미’를 찾아 낸 것은 노동자에게 노동을 강제하고 노동자의 계급투쟁을 막고자 함이었습니다. 
















노동자는 점차 길들여졌습니다. 심지어 일자리를 잃게 되면 괴로움까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일자리를 잃는 일은 단지 수입원이 사라진 일에 그치지 않습니다. 실업은 사회적인 죽음이 되었습니다. 일터에서 함께 했던 동료들과 더 이상 교제하지 못하고, 동시에 오랜 기간 일터에서 누렸던 역할과 지위를 상실합니다. 소위 ‘퇴직의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노동자는 몇 년간 우리 속에 갇혀 있다가 도망쳤으나 갑자기 많아진 자유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서 우리 주위를 빙빙 돌며 우리 속 ‘지옥’을 그리워하는 가축 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일은 절대 고통스럽지 않으며, 노동자는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베버의 ‘소명의식’에서 시작해 지금의 ‘인간중심 경영’ 이론이나 ‘소비주의’에 이르기까지 노동을 강제하기 위한 더 세련된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회사는 노동자가 행복한 ‘한 가족’으로 느끼도록 ‘인간중심 경영’ 운동을 전개합니다. 회사는 ‘한 가족’이라는 생각에 따라 우리는 직장에서 상당 수 친구를 사귄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 일상은 직장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사람들은 하루 대화 3분의 2 이상을 직장에서 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많은 사람이 직장에서 동료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어느 연구 결과를 보면, 노동자들에게 제일 친한 친구 10명 이름을 적어보라고 요청할 경우 동료 직원 이름을 단 한 명이라도 적은 사람은 절반 이하로 나타났습니다. 평균적으로 이웃 주민이 동료보다 명단에 더 많이 오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중요한 일이 닥치면 누구와 상의하느냐는 질문에 동료를 단 한 명이라도 적은 사람은 절반 이하였습니다. 동료와 친밀한 유대를 맺고 있는 사람은 아주 소수에 불과합니다.



많은 기업이 직원들 자율성이나 완화된 위계질서, 업적과 성취에 따른 보수 체계를 선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성과를 거두어야 월급이 오르고 고용 안정도 보장된다는 현실은, 단순한 암시일지라도, 동료 사이의 치열한 경쟁을 유발합니다. 생계를 놓고 동료와 은밀히 경쟁할 때 친밀함이 형성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회사는 노동자의 여가시간까지 빼앗아가며 저녁 회식이나 맥주 파티, 체육대회, 산악회, 친목행사 같은 여러 명목으로 노동자 불만이나 소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일의 의미를 만들어내야 할 임무를 부여받은 경영진은 노동자가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일에 몰입(engagement)하도록 새로운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심지어 노동자가 스스로 회사나 직장 상사처럼 힘 있고 부유한 존재로 여기도록 동료애나 가족 같은 회사, 이윤 나누기(profit sharing), 애사심, 주인의식(ownership)과 같은 ‘인간중심 경영’으로 노동자를 속이고 있습니다. 















‘인간중심 경영’은 심리학자 엘튼 메이오(1880~1949)가 노동자 임금 인상을 억제하고 노동조합 결성을 막고자 기업가 록펠러(1839~1937)에게 제안해서 만든 연구입니다. 록펠러 재단은 메이오 연구에 돈이 얼마가 들더라도 대환영이었습니다. 그들이 메이오 심리학 연구를 후원한 이유는 노동자에게 돈을 덜 주면서도 그들이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메이오 이론은 노동자가 실제 착취당하지만 대우를 잘 받은 듯 믿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메이오는 노동자가 관리자 조작에 쉽게 흔들리는 단순한 감정 덩어리라고 가정했습니다.


 

인간중심 경영을 계기로 종업원에게 보내는 따뜻한 미소가 급여 인상보다 훨씬 더 돈이 남는 장사라는 교훈을 전 세계 경영진이 즉시 깨달았습니다. 인간중심 경영은 노동자에게 좋은 듯 들리지만, 아름다운 말로 실질적인 노사 협상을 대신합니다. 

















경쟁에 치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적으로 힘든 노동자는 불안과 고독, 소외 같은 감정을 느낍니다. 소외된 노동자는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해야 했기 때문에 했어'라고 말합니다. '바로 내가 원해서 그것을 했어'라는 말이 중요한 데, 그렇게 하지 말하지 않는 사람에겐 복종만이 남습니다. 그래서 기업에서는 실제로 관리직 숫자가 점차 증가하고 있습니다. 노동자가 자신 삶 모든 것을 바쳐 자발적으로 제대로 일하지 않으니 위협하거나 혼내줄 관리자가 더 많이 필요한 것입니다. 



노동자는 시키는 대로 하다 보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자신에게 무슨 능력이 있는지 아예 잊고 살게 됩니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노동자에게 자본주의는 계속 일하도록 동기 부여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건 바로 ‘소비주의’입니다. 소비주의란 소득과 지출이 더 늘수록 우리가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고용주는 노동자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자네가 일하기 싫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 하지만 자네가 노동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면 월급으로 받은 돈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네. 집에 가면 자네가 주문한 싸구려 소비재가 잔뜩 뒹굴고 있을 거야. 자네가 그렇게 갈망했던 행복은 그것으로 얻게 될 거야. 직장에서 일하면서 느낀 비참한 시간을 소비재가 전부 보상해줄 걸세.’ 노동자는 기계화된 노동 과정과 소외된 현실의 삶을 감당하기 위해 소비를 통해 잠시 현실에서 벗어납니다. 

















소비주의는 더 많고 더 비싼 상품을 사면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환상을 낳습니다. 심지어 싸구려일지라도 더 많은 상품을 소비하면 ‘소확행’이라는 소소한 행복으로 노동의 고통을 잊게 된다고 우리는 믿게 되었습니다. 소비는 현실 고통을 한순간 잊게 만들고, 현실로부터 도피하게 만드는 마취제이자 아편 역할을 합니다.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1931~1989)는 소비하는 삶을 '코미디'라고 불렀습니다. 나날의 단조로움을 피하려는 소비,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소비, 문제를 잊기 위한 소비는 결국 우리 삶을 코미디로 만들어 버립니다. 
















소비주의의 본질은 현실 문제를 능동적으로 사유하고 비판적으로 반성하도록 하는 게 아니라, 현실 고통을 한순간 잊게 만들고, 체념하게 만드는 고통의 완화제일 따름입니다. 소비주의는 현실의 모순을 심리적 차원으로 환원시켜, 어떻게든 자본주의 본질만 건드리지 않으면서 뭔가를 해소해보라는 놀라운 전략입니다. 결국 기존 지배 체제와 질서에 순응하게 되고 이를 확고부동한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소비주의가 고통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유와 실천을 제약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노동자는 많은 상품을 소비하지만, 여전히 불행과 불안을 느낍니다. 그러면 노동자는 자신 소득이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결론짓곤 합니다. 불행의 근본 원인을 이렇게 잘못 판단하면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이 필요하다는 감정에 점점 괴롭게 됩니다. 현재도 열심히 일하지만 장차 더 열심히 일해 더 빨리 승진하고 돈도 더 많이 벌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물질적인 것을 손에 넣으면 일시적으로 만족할 수 있지만 그 감정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점점 커지는 소비 규모 때문에 일과 소비의 악순환만 반복됩니다. 행복을 향한 ‘손쉬운 방법’으로 소비를 선택하게 되면 빚 때문에 망하거나 최대 수입만 는 고갈된 영혼만이 남습니다. 
















자본의 술책은 임금노동자를 빚 속에 빠뜨려 빚이 청산되지 않도록 하면서 빚의 상환에 전념하도록 만드는 데 있습니다. 임금노동자의 빚은 과거 노예제도와 유사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노예처럼 살아가는 사람 대부분은 어떤 식으로든 빚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진 게 없기에 빚에 의존해 살게 되는데, 과거 노예주나 식민지 지배자들이 그랬듯이 현대사회의 지배계층도 부채를 통해 임금노동자를 통제하려듭니다. 현대인도 융자나 주택대출 같은 부채를 갚아야하기에 부채가 없을 때보다 더 고분고분하고, 더 많은 일을 해야 하고, 더 기진맥진한 삶을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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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는 『국부론』(1776)에서 부자가 소비하면 필연적으로 부자로부터 가난한 자에게 부(富)가 낙수처럼 흐른다고 봤고, 이를 통해 고용이 창출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스미스는 상업 사회가 경제적으로 불평등해 질 수 있음을 인정했고, 불평등이 점차 심해질 수도 있다고 봤습니다. 그럼에도 상업 사회가 더 많은 부를 창출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의 ‘게으르고 사치스런 생활’을 지탱하기 위해 임금노동자로 종사해야 하겠지만, 기초적인 조건만 누릴 수 있던 ‘발가벗은 야만인들’ 상태보다는 부유해진다는 논지를 폈습니다. 
















그렇지만 물질적인 부를 추구하는 행복은 절대적인 빈곤보다 더 민감한 상대적인 빈곤 문제를 일으킵니다. ‘오늘날 가장 궁핍한 사람조차 수백 년 전 왕보다 더 잘 사는 데, 몇몇 사람이 그렇게 엄청 잘 사는 게 뭐가 그리 대수로운 일이야?’라고 생각한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절대적인 빈곤보다 상대적일 때 더 큰 빈곤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윌 듀런트는 “가난은 부(富)에 의해 만들어지며, 부가 눈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까지 우리는 가난이 가난인 줄 모른다”라고 지적합니다. 

 















행복은 절대적인 수준이 아니라 ‘주변 사람과 비교할 때 내 삶의 질이 어떠한가?’라는 비교로 크게 좌우됩니다. 계층 간 소득 격차가 큰 나라일수록 자살률이 높습니다. 소득 불평등이 심한 지역에서 강도와 절도 사건이 빈번합니다. 절대적인 빈곤 수준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난하지만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보다 전체적으로 형편이 낫지만 특정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보다 못 사는 공동체에서 더 많은 범죄가 일어납니다. 잘 살아야 한다는 가치가 공유되어 있지만, 반면에 잘 살 수 있는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논어』에서도 절대적 빈곤보다 상대적인 빈곤을 더 염려했습니다. 정치하는 데 있어서 “백성이 부족한 것을 걱정하지 말고 백성이 불평등한 것을 걱정하라. 백성이 가난한 것을 걱정하지 말고 안정되지 못한 것을 걱정하라. 대개 분배가 균등하면 가난한 백성이 없고 서로 사이가 좋으며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안정되면 나라가 기울어지지 않을 것이다”[不患寡而患不均 不患貧而患不安 盖均無貧和無寡 安無傾]라고 강조했습니다.



과거에 평범한 사람은 부자가 어떻게 사는지 잘 알 수 없었습니다. 물론 전에도 돈도 있었고 부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자는 흔치 않았고 돈을 감추고 살았으며 자신 권력을 과시하고 싶을 때나 간혹 부를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이제 부는 향락과 개인적인 만족이라는 형태로 공공연하게 표출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의 환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감추던 향락을 이제부터는 돈으로 살 수 있고 드러내놓고 즐길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누구든 부자가 어떻게 사는지 쉽고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은 부자가 호화롭게 사는 삶을 비정상적일 정도로 크게 보도합니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에서 부자들의 집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부자들의 라이프스타일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자 ‘소셜 미디어로 생긴 불만’이라는 증상이 생겼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평생 절대 소유할 수 없는 모든 것을 괴로울 정도로 자세히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셜 미디어든 다른 형태의 대중적 노출이든, ‘소셜 미디어로 생긴 불만’은 보통 사람이 소유한 것을 하찮게 보이도록 합니다. 비록 우리가 객관적인 기준에서 삶을 넉넉하게 누리고 있고, 인류 역사 전체로 놓고 볼 때도 극히 잘 사는 사람일지라도 그렇습니다.

 















사회운동가 홍세화(1947~ )는 “성공한 자의 거머쥔 부를 동경하는 것은 ‘90퍼센트 사람들’이 덥석 문 당근”일 뿐이라고 지적하며, “그 가능성은 로또복권 당첨 확률에 불과하지만, 모두 성공 예감으로 뜀박질하도록 내몰아 기대하는 미래상으로만 자신을 일치시키고 오늘의 자신을 배반하도록 한다”라고 꼬집습니다. 또한 그는 그 이면을 깨달아야 한다고 덧붙입니다. “내 생각은 내가 주체적으로 형성한 게 아니라, 지배계급이 나에게 갖도록 요구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간파해야 한다.” 

 















어떤 시대나 지배계급의 사상이 사회를 지배합니다. 사회의 물질적인 힘을 지배하는 계급이 동시에 사회의 정신적인 힘까지 지배합니다. 지배계급은 자신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자신 이익을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꼭 필요한 것처럼 관념적으로 표현합니다. 이러한 ‘지배 사상’은 지배계급이 자신 이익을 모든 사회 구성원의 이익이라고 강제할수록 더욱 보편적이고 영원한 진리인 것처럼 표현됩니다. 귀족이 지배하던 시대는 명예나 충성 같은 개념이 지배했고,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우리 시대는 자유나 관용, 부 같은 개념이 지배합니다. 
















행복의 결정 요인은 상대적입니다. 사람들은 자신 행복을 판단할 때, 자신 실제 상황을 과거 혹은 현재의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행복이 상대적이라면 국가가 객관적으로 경제를 개선하고 부양책을 마련한다고 해서 반드시 국민이 행복해진다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 무슨 일이든 쉽게 적응하며, 행복은 객관적으로 충족되지 않기에 국가의 경제 정책이 국민 행복 증대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의 행복은 객관적 조건보다 우리 자신의 기대에 더 크게 좌우된다. 여건이 극도로 좋아진 후에도 불만족스러운 상태가 된다." 예를 들면, "보편적 기본소득을 도입해도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인간의 기본적 필요’가 무엇이든지간에, 일단 한 번 누구에게나 그것을 무료로 제공하면 사람들은 이를 당연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보편적 기본소득 덕분에 빈곤층이 지금보다 훨씬 나은 의료 서비스와 교육을 누린다 하더라도, 그들은 전 지구에 불평등이 만연한 것에 극도로 분노할 수 있다." 



행복이라는 "목표를 진정으로 달성하려면 보편 기본소득은 다른 의미 있는 일과 더불어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일 이후(이외) 만족스런 삶을 사는 방법, 심지어 가난하고 직업이 없더라도 삶의 만족도를 높일 방법을 먼저 찾아야 한다. 보편 기본소득과 더불어 강력한 공동체와 의미 있는 삶의 추구를 결합해야 한다.“ 
















유발 하라리가 언급한 “심지어 가난하고 직업이 없더라도 강력한 공동체 덕분에 삶의 만족도”가 커진 사회가 요즘 일본이 아닌가 싶습니다. 현재 일본 젊은 층 대다수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취직률은 저조하고, 저임금에 시달리고, 워킹푸어로 일하고, 현대판 홈리스라고 볼 수 있는 피시방에서 난민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 젊은이들은 삶이 만족스럽다고 느끼는 경향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일본 20대 젊은 층이 느끼는 생활 만족도와 행복지수는 78.3퍼센트까지 상승했습니다. 일본 중학생과 고등학생 95퍼센트가 자신은 행복하다고 답했습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꽤 높은 행복지수입니다. 반면 우리나라 청소년 사망 원인 1위는 자살입니다. 절반 이상이 가끔 자살 충동을 느끼고, 3분의 1은 간헐적으로나마 우울증을 경험합니다. 서울에서만 매년 학생 1만 6,000명이 학교를 떠나고, 전국적으로 거리를 배회하는 청소년이 적게는 17만 명, 많게는 36만 명이나 된다는 조사가 있습니다.
















1980년 절정기를 맞았던 일본의 ‘입시 전쟁’이 상징하듯 ‘좋은 학교, 좋은 회사, 좋은 인생’이라는 중산층 꿈으로 일본 전체가 압도되던 시기는 지났습니다. 1990년대 이후 중산층 꿈이 무너짐과 동시에 기업의 정식 구성원이 되지 못한 젊은이가 증가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 젊은 층의 삶에 대한 만족도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요즘 일본 젊은이는 예전만큼 자동차를 구입하지 않습니다. 술도 많이 안 마십니다. 해외여행도 그리 안 즐깁니다. 유학생 수도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선거 때 투표하러 가는 젊은이 수도 현저히 줄고 있습니다. 사회 부조리를 바로잡으려는 대규모 시위가 빈번히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대신 태어난 지역에 애착을 느끼는 젊은이가 증가하고, 대도시권으로 이동하는 인구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2011)의 저자 후루이치 노리토시(1985~ )는 그 원인을 이렇게 진단합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리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행복하다고 느낀다. 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될 때, 지금 행복하다.” 만화 <피너츠>의 ‘철학하는’ 강아지 스누피 역시 이와 유사한 명언을 남겼습니다. “내 인생엔 목표도, 방향도, 의미도 없어. 그런데도 난 행복해. 왜 그런지 알 수가 없네. 내가 뭘 잘하고 있는 거지?” 

 















사람들은 흔히 목적이 없으면 인생은 무의미하다고 간주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 행복하지 않은 것은 혹시 아닐까요? 정치철학자 존 그레이(1948~ )는 “현재보다 미래 목적이 왜 더 중요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합니다. 미래는 어쩌면 현재보다 추구할 가치가 적을 수도 있습니다. “좋은 삶이란 자연스러운 삶을 능숙하게 살아내는 것이다. 좋은 삶은 특정한 목적을 가지지 않으며, 의지와 관련 없고,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것도 아니다. 목적이 없으면 무의미하다고 간주되는 시대에 목적없이 즐기며 사는 사람이 호모 루덴스(즐기는 인간)다. 좋은 삶이란 환경에 따라 사는 삶이다. 좋은 삶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삶을 의미하거나, 상식에 반드시 부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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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는 영국식 의회민주주의를 최선의 사회 체제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선거란 시민의 권리인 동시에 약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영국인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커다란 착각이다. 그들은 의회 의원을 뽑는 동안에만 자유로울 뿐이다. 의원들이 선출되는 즉시 시민들은 곧바로 노예가 되어버린다.” 
















선거는 민주주의에 대한 보장책으로서 너무 과대평가되어 있습니다. 사회운동가 엠마 골드만(1869~1940)은 여성들에게 여성참정권 운동에 대해 연설하면서, 여성이 선거에 참여하는 일에 반대하지는 않겠지만 과도한 기대는 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보통선거권이란 현대의 미신입니다. 여성이 투표권을 가지면 지금까지 남성들이 실패해 온 일들을 여성들이 이뤄낼 거라는 황당한 생각에 맹목적으로 동조할 수는 없습니다. 남성들의 정치사가 증명해 주는 바에 따르면, 지금까지 성취는 정치활동을 통해 이룩된 적은 결코 한 번도 없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그들이 성취한 모든 권리는 지속적인 투쟁, 자기주장을 위한 중단 없는 투쟁을 통해 얻어진 것이지, 참정권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선거 결과는 다수의 의견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의견’이란 무엇일까요? 유권자가 정보를 충분히 얻거나 비판적으로 성찰하거나 서로 토론할 기회도 없이 그냥 투표하는 일은 단순히 ‘견해’일 뿐입니다. 그러한 견해는 유권자가 특정 시점에 일시적으로 내리는 판단일 뿐, 사정이 달라지면 또 다른 의견이 생길 수 있습니다. 선거 과정은 거의 최면술과 같아서 선거 전략으로 인해 투표자의 사고력은 둔화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투표한 후보자가 선출된 경우에도 나중 그 인물의 행위를 보고 실망하는 사람을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보았습니다.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1883~1950)는 정치가들의 영향력 때문에 유권자가 독립된 정치 의지를 가질 수 없음을 발견했습니다. “정치 과정을 분석하여 우리가 알게 된 결과는 유권자가 진정한 자기 의지가 아니라 ’가공된 의지’(manufactured will)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개인이 정치가들 제안에 영향받지 않은 나름대로의 자기 의지가 있다고 가정하지 말아야 한다. 정치에서 대중이 무엇인가를 선호하는 일은 정치가들이 우리가 그 무엇인가를 선호하도록 만든 행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로버트 위브(1930~2000)는 대중의 참정권은 시민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토대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권력을 쥐고 있는 듯 보이게 만들었다고 설명합니다. “보통 선거권과 다수결이라는 규칙은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개인이 국가를 형성한다는 이미지를 사람들 상상력 속에 불어넣었다.” 결국 ‘자유로운 인간이 자기가 살아갈 정치 형태를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 투표장에 가는 장엄한 모습’은 그저 환상에 불과합니다. 
















민주주의 선거에서 이용되는 ‘다수결’ 원칙은 간단하고 깔끔하고 공정한 기법으로 느껴지지만, 단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결정할 때만 최선의 기법입니다. 선택지가 둘을 넘어서면, 다수결 선호에 모순이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케네스 애로(1921~2017)는 민주주의가 전제로 하는 다수결 원리가 합리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해냈습니다. 개인 다수 선호도가 사회 전체 선호도로 이행될 수 없습니다. 이를 ‘애로의 불가능성 정리’라고 합니다.
















유권자 3분의 1은 A > B > C 순으로 후보를 선호하고, 다른 3분의 1은 B > C > A 순으로 선호하고, 나머지 3분의 1은 C > A > B 순으로 선호한다고 가정해 보죠. 그런데 전체로 보면 A는 B를 이기고, B는 C를 이기고, C는 A를 이긴다는 이상한 예상 결과가 나옵니다. 그것도 모두 3분의 2의 확률로 동일합니다. 그래서 유권자 모두 자신이 선호한 후보자가 당선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합니다. 하지만 유권자 3분의 2가 원치 않는 후보자가 당선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 선거의 역설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더라도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36.64%), 김영삼(28.03%), 김대중(27.04%) 세 후보 중 유권자 60퍼센트가 원치 않는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투표를 두 단계로 나누어 진행하더라도 여전히 모순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A보다 B 선호도가 높고, B보다 C 선호도가 높다면, A보다 C 선호도가 높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입니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이보다 더 복잡할 수 있다. B가 빠진 두 번째 투표 상황에서 A와 C만 투표할 경우 C보다 A 선호도가 더 높게 나올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신중하게 처신하지 않으면 모든 유권자가 C가 낫다고 생각하는데도 A를 뽑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선호도가 가장 낮은 A는 B나 C 결정에 무관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A는 상대적 순위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권자가 모든 후보자를 놓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순위를 매기도록 한 뒤 각 후보자가 얻은 순위를 합산해서 가장 높은 지지율을 얻는 후보자를 선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방식도 다른 종류의 결함이 있습니다. 아주 소수 투표자가 아주 조금만 생각을 바꾸어, 어떤 후보자를 딱 한 단계만 높이거나 낮추어도 결과가 완전히 뒤집힐 수 있습니다. 1등에 근접했던 후보자가 별안간 꼴등으로 떨어지거나 그 반대 상황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사실 결함이 없는 투표제는 불가능합니다. 사회가 다수결 투표라는 민주적인 방법에 따라 바람직한 결정을 내린다고 논리적으로 주장할 수 없습니다. 사실상 모든 투표제는 전략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바로 무관해 보이는 대안에 영향을 미쳐 전략적으로 선거 결과를 조작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선택은 ‘무관한’ 대안이 새로 추가될 경우 바뀔 수도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정치인들 모두 이 모순을 알고 이용한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문제는 대다수 유권자가 다수결 투표가 진정 공정하다고 믿고 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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