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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들은 12세기 런던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뼈를 발굴해서 조사해 보고는 당시 사람들이 지금 우리 세대를 제외하고는 역사상 어떤 시기 못지않게 키가 크고 영양 상태가 좋았다는 것을 알아냈다. 여성의 경우에는 키가 더 큰 편에 속했다. 중세시대 가운데 그들은 3세기 동안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을 만들어 낸 사회에 살고 있었다. 북유럽의 채석장에서 고대 이집트가 피라미드를 건설하기 위해 사용했던 것보다 더 많은 석재를 생산해서 고딕풍 성당을 건설했다. 그 당시 북유럽에는 전쟁 때문에 기근과 빈곤이 있었지만, 평화 시에는 현재의 우리와는 다르게 빈곤이 거의 없었다. 



중세 봉건제 아래에서 영주의 크고 작은 통제는 받았지만, 수십만의 소작인들이 대부분 빚지지 않는 경제적 안정을 누렸으며 중세 농부들은 오늘날 우리보다 더 긴 휴가를 즐겼다. 경제학자들 계산에 의하면, 빅토리아 시대인 1495년 당시 공유지에서 일했던 평범한 농부 한 사람이 연간 15주 정도 일하면 1년 동안 생활하는 데 필요한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난 200년 동안 유례없는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중세시대의 소작농들보다도 더 죽어라고 일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가? 우리는 집 하나 사는 것도 매우 어렵게 되었으며, 부부가 1년 내내 일하지 않고는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조차 힘들고, 그것마저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중세 서유럽 경제가 오늘날의 21세기 경제보다도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비록 길드제도가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측면이 있었지만, 구성원들이 장인으로 훌륭하게 커나가는 데 직업 훈련과 지원을 아낌없이 제공했다. 또한 중세에는 가격을 합리적으로 매김으로써 자원을 보호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합리적인 가격 덕분에 무차별하게 물고기를 잡을 필요가 없어 강의 수질을 보호하고 어족량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교회가 이자를 부과시키는 것을 금지하였기에 대부금에 이자를 붙일 수 없었다. 때문에 귀족계급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빚이 없었다. 물론 그 대신 중세 봉건제 아래에서의 의무는 있었다. 



그 당시 고딕 성당을 건축하는 재원을 어떻게 마련했는지 의문이 남아 있었는데,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성당 건축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가혹하게 세금을 징수해서 사람들 삶을 힘들게 한 것이 아니라 가톨릭 교회가 12세기의 ‘블랙머니’라고 할 수 있는 자체 화폐를 발행하여 그 재원을 조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저가의 동전들은 몇 년마다 수수료를 붙여서 회수되고 재발행되면서 지역에서 소비를 늘리는 데 기여했다."









원래 경제학은 도덕 철학의 한 분야로 시작되었으며, 경제학이란 사람들을 빈곤에서 탈출하도록 도와주기 위한 학문이다(이것이 경제학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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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3-07-03 2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논란이 될 주장이네요. 개인적으로는, 저자들의 주장을 위해서 중세를 미화한 듯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23-07-03 20:13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ㅎㅎ
저도 중세 관련 책 조금 읽어봤는데요, 매우 신선한 주장인 거 같습니다.
하지만 천년 중세를 저자가 말한 12~14세기 정도에만 한정하면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그 시기 기후가 넘 좋아서 농사가 엄청 잘 된 시기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
 

미국 국립과학재단이 지난 20년간 수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3분의 2 이상은 DNA가 유전을 밝히는 열쇠임을 알지 못한다. 열에 아홉은 방사선과 그것이 인체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성인 다섯에 하나는 태양이 지구 주의를 돈다고 확신한다. 이런 응답들은 초• 중등학교의 공교육이 놀랄만큼 실패했음을 가리키고, 따라서 대중이 왜 진화론이나 기후변화에 대한 과학자의 경고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는지를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는 것, 혹은 DNA에 우리 개개인을 인간 종의 고유한 성원으로 만드는 생물학적 지시 사항이 들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꼭 지식인이 되어야 하거나 학사 학위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런 수준의 과학 문맹이 더없는 무지에 기초한 정치적 호소가 자라기에 비옥한 토양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지구온난화를 거짓말이라고 일축해버린 트럼프를 유권자들이 심판하지 않은 이유도 설명해준다. 전문가를 조롱할수록 트럼프는 지지자들의 사랑을 더 받을 뿐이었다. 2017년 8월 21일, 대통령으로서 일식을 관측할 때 트럼프는 눈 보호를 위해 NASA가 권장한 특수 안경을 착용해야 한다는 강권을 무시했다. 진짜 사나이는 태양으로부터 망막을 숨기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트럼프가 아무렇지도 않게 ‘책‘을 무시하는 것은 그런 문화를 반영한다. 현재 읽기와 쓰기에서 미국인의 모습을 가장 잘 묘사하는 표현은 문맹이 아니라 활자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2002년 국립예술기금이 발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2001년 미국 성인 가운데 소설이나 시집을 한 권이라도 읽은 이는 절반이 안 되었다. 탐정소설, 로맨스소설, 요한계시록에 기초한 ‘휴거‘ 소설도 포함해서 말이다. 논픽션을 한 권이라도 읽은 미국인은 57퍼센트뿐이었는데, DNA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가 많은 이유일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인이 점점 더 활자를 싫어하면서 독서의 즐거움뿐 아니라 비판적 사고도 위기에 처해 있다. 미국인이 40년 전에 비해 사색과 판단력이 부족해진 사회에 살고 있다.



1998년 텍사스대학 연구 조사원들이 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공립학교 생물학 교사 넷 중 하나가 인간과 공룡이 동시대에 살았다고 믿었다. 이런 오인들을 통해 교사들의 종교적 믿음이 어떠한지를 확실히 알 수는 없을지라도 미국 교사들 상당수가 얼마나 형편없는 교육을 받았는지는 확인할 수 있다. 더 혼란스럽게도 미국인은 과학뿐 아니라 종교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도 그만큼 무지하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선진국 가운데 가장 종교적이라고 하는 국가의 성인 대다수가 4대 복음서를 대지 못하거나 창세기가 성경의 첫 번째 저작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들도 한때 ‘진화’라는 말을 금기시하고 교사가 공룡과 인간이 함께 땅 위를 돌아다녔다고 시사하는 수업을 들은 수백만의 아이들 중 하나였다면, 그들이 진화의 정의를 이해하리라고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인터넷에는 세계 각지의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을 연합시키는 명백한 잠재력이 있으며 그에 따라 소셜미디어와 결부된 문화적 편협성이 급격하게 늘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데 특히 늘였다. 문제는 ‘생각이 비슷한’이란 수식어에 있다. 자신과 견해가 같은 이들에게만 귀를 귀울이고 편견에 더 사로잡힌다면 사람들은 거의 무엇이든 믿게 될 것이다. 편협함과 반지성주의는 늘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지만 소셜미디어가 서로 멀리 떨어진 지역들을 연결해 즉석에서 편협한 커뮤이티를 만들어내는 역량은 새로운 것이다.

이념 혹은 문화에서 생각이 다른 상대에게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악마에게 뿔이 있다면 직접 만져봐야 알겠다는 그런 종류의 호기심은 모든 사회의 지적, 정치적 건강에 필수적이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지식인과 비지식인 모두가 똑같이, 좌파건 우파건, 자신의 주장에 공명하지 않는 목소리는 모조리 듣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외고집은 게으른 정신과 반지성주의 본질을 드러내는 징후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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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시민 자유는 우리 현대인이 생각하는 자유 개념과 거리가 아주 멀었다. 고대 자유는 곧 도시 통치에 어떤 역할을 맡는 것이었다. 고대 자유는 의회에 출석하고, 토론장에서 의견을 발표하고, 논쟁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 어느 한 쪽 편을 들면서 투표할 특권과 의무로 이뤄져 있었다. 아울러 행정관으로 봉사하거나 필요한 경우에 배심원으로 일할 가능성도 고대 자유에 속했다. 고대 자유는 정치 과정에 대한 무관심을 허용하지 않았다. 공적 일이 가장 중요했다."<개인의 탄생>



















토크빌은 자유를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자연적 자유(natural liberty), 다른 하나는 시민적 자유(civil liberty) 또는 공민적 자유다. 프랑스 대혁명에서 발생한 모순과 충돌이 대단히 컸던 탓에 프랑스인은 그들 구호(자유, 평등, 박애) 중 자유를 자연적 자유, 곧 구속받지 않고 자기 멋대로 하는 자유로 이해했다. 그들은 혁명 전 사회에서 수많은 불합리한 제한과 압박을 받았고, 혁명으로 이 제한과 압박을 깨부쉈으므로 그 결과 모두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토크빌은 미국이 자유로운 국가지만 미국인이 자기 국가에서 누리는 자유는 결코 자연적 자유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미국인의 자유는 처음부터 영국인에게서 쟁취한 것, 곧 시민적 자유, 공민적 자유라고 본 것이다. 미국 독립 혁명의 기원은 식민지 백성이 모국 영국 시민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겠다고 요구한 것이다. 그들은 임의로 조종당하거나 자기 재산을 침범당하지 않는 기본적 자유를 원했다. 이러한 자유는 시민적 자유이며, 특정한 권리 영역에서의 자유이지 프랑스인이 생각한 전면적이고 보편적이며 무한정의 자유가 아니다.



토크빌은 프랑스인이 이러한 공공 정신을 훈련받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공공 정신은 시민의 기본 조건이다. 미국은 시민이 국가를 이루지만 프랑스에는 시민이 없고 속민(subjects)만이 있을 뿐이다. 시민은 공공사무를 자신의 일로 여기지만 속민을 공공사무를 윗사람 일로, 자신을 관리하는 사람의 일로 생각한다. 이것은 간단하지만 중대한 차이다. 토크빌은 프랑스 독자들에게 미국의 민주주의를 설명하면서 자극적인 방식을 선택한다. “대혁명 이래로 프랑스인은 줄곧 시민을 소리 높여 외쳤다. 심지어 입으로는 모든 사람을 시민이라고 불렀다. 시민 말고는 다른 존재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러한 ‘온 거리를 가득 채운 시민’의 사회는 사실 말로만 시민이었을 뿐이다. 프랑스인은 그토록 시민을 떠들썩하게 외쳐 댔지만 모두 뼛속은 여전히 속민이었다. 진정한 시민이 될 수 없어서 시민을 입에 달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미국 정치의 근본이 고도의 독립성을 갖춘 타운 그리고 마찬가지로 고도의 독립성을 가진 주라고 해석합니다. 연방 대통령은 주지사에게 지시를 할 수 없다. 처음부터 타운의 행정은 시민이 선출한 공공사무위원이 책임지고 처리한다. 타운에는 심지어 대표도 없다. 모든 타운은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단위로서, 주에는 주 의회가 있어서 각 타운의 법률과 규범을 제정한다. 하지만 주의 법규 범위 밖에서는 타운이 직접 민주주의로 운영되는 타운 집회를 통해 자신의 처리 방법을 결정한다. 주는 여타 타운을 대표하고, 연방 내의 다른 각 주와 관련을 맺기도 하지만, 주 정부는 여전히 임의로 타운의 독립권을 간섭하거나 침범할 수 없다.



이것이 토크빌이 19세기에 본 미국의 상황이다. 그 이후로 미국 정치에는 여러 가지 변동이 생겼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 특히 구조에 깔린 설계의 정신은 줄곧 보존되었다. 미국 정치의 실체는 자립적인 단위로서의 수천 개, 수만 개의 타운이며 대부분의 권력은 이러한 위계로 배치되었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읽다> pp. 170-174.



















“자유가 전제되지 않으면 칸트의 도덕법칙은 의미를 상실한다. 자유롭지 않은 존재에게 도덕법칙을 명하는 것은 난센스다. 칸트는 “너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너는 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너는 자유롭다. 너는 도덕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해, 너는 도덕적 존재이기에 분명 자유로운 존재일 것이다. 자유로운 의지가 지향하는 궁극의 가치는 최고선이다. 그리고 자유의지가 최고선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두 조건은 바로 영혼불멸과 신인 것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며, 자신의 영혼이 불멸한다는 것 그리고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요청함으로써 최고선을 지향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실천이성의 요청’, 나아가 ‘실천이성의 우위’다.



홉스 철학의 의미도 절대왕정의 옹호라는 그 표면상의 주장이 아니라, 바로 철저한 ‘개인주의’, 합리적으로 계산해서 자신 이익(자유의지)을 추구하는 개인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점에 있다. 개인들이 계약을 통해 자신들 주권을 ‘양도’한다면, 거기에는 그 어떤 다른 이유도 없다. 오로지 그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리라는 철저한 계산의 결과일 뿐이다.



하지만 그가 결과적으로 구성해낸 국가 모습은 개인의 자유의지와 모순된 것이 아닐 수 없다. 일단 개개인의 권리의 ‘양도’를 통해 성립한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 모든 안전과 번영은 적으로 국가 몫이며, 개개인들에게 외적인 방식으로만 가능한 것이 된다. 개개인의 집합은 다중일 뿐이며, 국가라는 끈이 없다면 이 다중은 그저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구슬에 불과한 존재들이다. 여기에는 오직 국가가 외적으로 부여하는 정치만이 있을 뿐, 개개인들의 내적인 힘[자유의지]을 통해서 그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정치는 존재할 수 없다. 홉스의 세계에서는 국가와 다중이 있을 뿐, 개개인들이 서로간의 관계를 통해서 형성하는 ‘사회’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국가의 법과 시민사회 고유의 도덕, 관습, 문화 차원들 사이의 구분도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국가라는 주물과 그것이 형태를 찍어낼 때 사용되는 재료로서의 다중이라는 구도를 극복하고서 시민사회의 자율성, 시민사회라는 고유한 차원을 창조해낸 것이 근대적 정치의 가장 핵심적인 성취하는 점을 감안한다면, 홉스의 정치철학은 오히려 전근대적인, 아니 전근대보다 더 후퇴한 그 무엇이라고까지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그 이론적 구성 과정에서 전제되는 강렬한 개인주의와 그 구성 결과에서 나타나는 강렬한 반-개인주의가 드러내는 모순이야말로 홉스 정치철학의 핵심적인 한계라 할 수 있다.



로크에게 자연권의 기초는 사유재산이다. 로크는 자신이 확립한 경험적 주체 개념에 입각해 정치적 주체를 사유했다. 인식론적 맥락에서 주체적 경험은 곧 ‘인식’이다. 이에 비해 정치철학적 맥락에서 주체적 경험은 바로 ‘노동’이다. 인식의 주인공이 마음[자유의지]라면 노동의 주인공은 몸이다. 노동이란 한 주체가 자연을 가공해 변형하고, 그 변형을 통해 그 자신도 변형되는 과정이다. 이때 가공된 대상은 곧 노동주체의 ‘소유’가 되며(노동가치설), 그 소유를 통해서 주체는 그 자신의 고유한 것으로서 ‘property’를 가지게 된다. 노동은 이렇게 한 주체 고유의 ‘property’를 생성시키는데, 노동 이전에 한 개인이 천부인권으로서 소유하는 것은 생명과 자유이므로 결국 한 개인의 ‘property’는 그의 생명과 자유, 재산을 뜻한다.



다만 내전 시대를 살았던 홉스에게 생명이 가장 소중했다면, 명예혁명 시대를 살았던 로크에게는 재산이 가장 중요했다. 로크 사유에서는 사유재산을 가지고서 사회계약을 하는 것이지 사회계약을 통해서 사유재산이 분배되는 것이 아니다. 생명과 자유만이 아니라 사유재산 또한 자연권인 것이다. 스피노자에게서의 자연권은 한 주체의 ‘존재’ 즉 내적인 역량이지만, 로크에게서는 그의 ‘가진 것’ 즉 외적인 소유다. 이것은 형이상학자인 스피노자와 경험주의자인 로크 차이이기도 하다. 하지만 경험주의자인 로크가 당대 현실을 상세하게 관찰하기보다는 원시적인 상황을 상정해 논의를 전개한 것은 묘하게 느껴진다. <통치론>의 저자 로크는 자신이 <인간지성론>의 저자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다. 로크 정치철학의 이런 경향은 영국 중산층에게 유리했는데, 사유재산을 절대시하는 것은 곧 위로는 권력자들의 강제적 탈취를 부정하는 것이고 아래로는 하층민들의 무력 도발을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로크의 저작이 18세기 이래 본격화되는 ‘자유주의’ 철학의 성경이 된 것은 바로 사유재산에 대한 이런 절대 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철학사 3>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고 기회를 제한하는 어떤 구조도 없다. 모든 사람은 재산을 늘리고 쌓을 권리와 기회가 있다. 다시 말해 평등한 사회에서는 신분의 높고 낮음은 사라져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분 차이가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귀족이나 평민, 승려, 장인, 농부 등이 모두 같아진다. 그래서 사회 지위를 결정하는 기준이 재산이 많고 적음에 따르게 되는 경향을 피할 수 없다. 돈이 있으면 부러움을 받고 존경을 얻을 수 있는데, 이는 평등한 사회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불평등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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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와 로마 사회에서 시민들 모임에서 내려진 결정은 개인적 검토를 전혀 허용하지 않았다. 개인 권리라는 개념은 아직 없었다. 사회적으로 종속된 사람들은 어쨌든 완전히 이성적인 존재로 여겨지지 않았다. 고전적 공화주의 전통이 찬양하는 고대 시민 자유는 우리 현대인이 생각하는 자유 개념과 거리가 아주 멀었다. 고대 자유는 곧 도시 통치에 어떤 역할을 맡는 것이었다. 고대 자유는 의회에 출석하고, 토론장에서 의견을 발표하고, 논쟁에 대한 판을 내리고, 어느 한 쪽 편을 들면서 투표할 특권과 의무로 이뤄져 있었다. 아울러 행정관으로 봉사하거나 필요한 경우에 배심원으로 일할 가능성도 고대 자유에 속했다. 고대 자유는 정치 과정에 대한 무관심을 허용하지 않았다. 공적 일이 가장 중요했다."<개인의 탄생>


















"자유, 즉 리베르타스(libertas)는 먼 고대에 생긴 낱말이며, 자유를 지키고 실현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정치철학을 처음 시도할 때부터 주요한 목표였다. 서구 정치 전통의 근간을 이루는 문헌들은 특히 폭정의 충동과 주장을 어떻게 제약하느냐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고, 폭정 유혹에서 벗어나는 핵심 방안으로 덕성 함양과 자치를 꼽았다. 특히 그리스인은 자치가 개인 차원에서부터 정치제 차원까지 이어진다고 생각했고, 어느 차원에서든 절제, 지혜, 중용, 정의 같은 덕목들이 서로를 지탱하고 증진할 경우에만 자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달리 말해 자치라는 덕목이 시민들 영혼을 다스릴 경우에만 도시 자치가 가능하고, 시민권 자체를 법과 관습을 통해 덕성을 몸에 익히는 일종의 지속적인 습관들이기로 이해하는 도시에서만 개인들 자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스 철학은 파이데이아(paideia), 즉 덕성 교육을 폭정을 미연에 방지하고 시민 자유를 보호하는 주된 방안으로 강조했다.



그렇지만 이제 자유라는 단어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해도 그 내용은 근본적으로 새롭게 인식되었다. 근대의 현저한 특징은 이 오래된 정치관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사회적, 정치적 합의는 효력도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자유주의 뿌리는 사회 병리의 원천 – 즉 분쟁 근원이자 개인 자유를 제한하는 장애물 -으로 치부되기에 이른 다양한 인간학적 가정과 사회 규범을 뒤집으려는 노력에 있었다. 자유주의 토대를 놓은 사상가들의 주요 목표는 국내 평화를 위해 비합리적이라고 결론 내린 종교와 사회 규범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안정과 번영을 증진하고 궁극적으로 개인 양심과 행동 자유를 증진할 것으로 그들은 내다보았다.”<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

















"그리스의 실천철학은 도덕이 아닌 윤리 형태를 띠었다. 도덕이 마땅히 따라야 할 초월적인 규준을 상정하는 사유라면, 윤리는 현실적인 인간들의 좋은 관계 맺음을 추구하는 사유다. 전자는 스토아철학, 기독교를 거쳐 칸트 등에 의해 대변되고, 후자는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스피노자 등에 의해 대변된다.



이렇듯 소크라테스 사유는 ‘좋음과 나쁨’을 사유하는 윤리학이지 ‘옳음과 그름’을 사유하는 도덕이 아니었다. 비록 아테네 사람들에게 이 두 가지가 그리 명확하게 구분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좁은 의미에서 옳음과 그름, 선과 악, 의무 같은 가치들은 기독교가 도입한 가치다. 소크라테스에게는 무엇인가가가 좋기 때문에 옳은 것이지 옳기 때문에 좋은 것은 아니다. 그리스인들에게 좋지만 그르다든가 나쁜지만 옳다는 개념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자기에게 지는 것, 쾌락의 유혹에 빠져 좋음과 나쁨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을 의지 문제보다는 무지의 문제로 본다. 나쁜 것을 올바로 인식하면서도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덕과 지혜를 일치시킨다. 덕=지혜가 소크라테스 윤리학의 근간을 형성한다고 할 수 있다. 모르기 때문에 나쁜 짓을 한다는 소크라테스 생각은 ‘의지박약’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알면서도 나쁜 짓을 하는 인간의 복잡한 심리를 너무 단순화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으나, 달리 보면 ‘안다’는 말에 일상적인 의미 이상의 의미를 넣어서 사용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볼 때 그런 인간은 ‘진정으로 아는’ 것이 아닐 터이니 말이다.“<세계철학사 1>

















현대 자유주의의 공공철학에 내포된 원천은 바로 좋음(the good)보다 옳음(the right)을 우선시하는 자유주의다. 즉 자유주의 정치 이론의 중심은 서로 다른 시민이 좋은 삶을 규정하는 도덕적 관점이나 종교적 관점에 대해 정부가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발상이다. 삶을 살아가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기에 정부는 좋은 삶의 특정한 형태를 법률로 단정해선 안 된다. 그 대신 정부는 각 개인을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로서 존중하고 각자의 가치관과 목적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의 틀을 제공해야 한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특정한 목적보다 공정한 정차를 중요하게 여기기에 이것이 일러주는 공적 삶을 ‘절차적 공화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관용을 강조하고 개인 권리를 존중하는 사상적 전통, 즉 존 로크와 임마뉴엘 칸트에서부터 존 스튜어트 밀과 존 롤스에 이르는 사상적 전통을 뜻한다. 우리가 하는 토론이나 논쟁 대부분은 이 범위 안에서 이뤄진다. 하지만 이런 자유주의를 고취한 자발주의적 자유관은 해방의 전망, 즉 권력이 집중된 조건에서도 실현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주체성의 약속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P. 265.



1940년대 초부터 대법원은 오늘날 익숙하게 보이는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정부가 개인 권리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보호하고 또 좋은 삶을 규정하는 문제에서 중립을 지키도록 강제하는 역할이었다. 1947년에 처음으로 대법원은 정부가 종교에 대해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 뒤로 수십 년 동안 대법원은 자발주의적 자유관에 기대서 이 중립성을 정당화했다. 판결문에서 “존중할 가치가 있는 종교적 믿음은 신자들이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선택의 결과물이다”라고 밝혔다. 같은 기간에 법원은 자치보다 지기표현이 더 중요하다는 인식 아래에서 언론의 자유로 보호받을 수 있는 영역을 넓혔다. 예컨대 “자기표현의 선택권이 보호를 정당하게 만들어주는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그리고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일련의 판결에서 대법원은 자율성과 선택의 자유라는 근거를 내세워 정부가 피임과 낙태 문제와 관련된 도덕적 사항을 법률로 규정하려는 시도를 차단하며 사생활 권리를 강력하게 보호했다.



좋음보다 옮음을 우선시하는 자유주의 버전은 헌법 영역에 국한되지 않았다. 뉴딜 시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면적으로 부상한 복지국가라는 개념을 정당화하는 데서도 자유주의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언뜻 봐서는 자유주의가 어떻게 그런 역할 할 수 있었을지 분명하지 않다. 복지국가의 시장경제 개입은 중립성을 지키려는 시도와 상반되는 듯 보일 수 있다. 게다가 모든 시민에게 특정 재화를 공적으로 제공한다는 것은 상호 의무와 공유된 시민의식이라는 강력한 윤리, 즉 고도로 발달한 연대감과 공동 목적을 전제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pp. 267-268.



루스벨트 관점에서 복지국가 관념을 정당화하는 것은 강력한 공동체적 의무감아 아니라 “가난한 사람은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다”라는 발상이었다. 즉 개개인이 자기 목적을 스스로 선택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으려면 반드시 물질적 전제조건들이 필요하다는 인식이었다. P. 270. 존슨은 1964년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직을 수락하면서 경제적 안정이야말로 개인의 자유를 위한 젠제조건이라는 루스벨트 주장을 되풀이 하면서 “굶주린 사람, 일자리가 없는 사람, 자식을 학교에 보내지 못하는 사람, 결핍에 굴복당한 사람, 이런 사람들은 온전하게 자유롭지 못하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개인이 자기 목적을 스스로 선택하고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서 자유주의적 개혁 사업을 옹호했다. pp. 273-274.



자유주의 버전은 1970년대에 온전한 철학적 진술을 확보했다. 특히 존 롤스의 <정의론>이 가장 대표적이다. 롤스는 20세기 대부분 기간에 영미 철학을 지배했던 공리주의적 가정들에 대해 반대하면서 특정한 개인적 권리는 워낙 중요해 사회 구성원 일반을 대상으로 하는 복지나 다수의 의지보다 우선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정의에 따라 확보된 권리는 정치적 흥정이나 사회적 이익이라는 계산에 의해 좌우될 수 없다”라고 했다.



롤스의 정의로운 사회는 바람직한 덕목을 함양하려고 노력하거나 시민에게 특정 목적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바라봤다. 정의로운 사회는 오히려 상반되는 여러 가지 목적 사이에서 중립적 권리 체계를 제공하며 사람들은 그 체계 안에서 타인의 유사한 자유와 충돌하지 않는 한 얼마든지 자신이 가진 견해를 추구할 수 있다고 바라본 것이다. 이것은 좋음보다 옳음을 우선시하는 주장이자, 절차적 공화주의의 자유주의를 규정하는 주장이다.



옳음이 좋음보다 우선한다는 주장과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 바로 자발주의적 자유관이다. 롤스가 설명했듯이 사람들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이며 저마다 자기 목적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으므로 목적 중립적 권리 체계가 필요하다. 정부가 시민의 바람직한 덕목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시민의 도덕적 성격을 형성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특정한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가치관과 목적을 선택하는 개인 능력을 존중하지 않는 의미다. 자발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언론의 자유나 종교의 자유와 같은 권리를 보장하는 이유는 각 권리가 보호하는 활동이 특별히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 신념과 견해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부가 제각기 다른 목적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의 밑바탕에 해방적 전망을 전제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 대해 롤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도덕적 인간은 자기가 선택한 목적을 가진 주체이며, 또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자유롭고 평등한 이성적 존재로서의 자기 본성을 드러낼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자기 의지대로 조직할 수 있는 조건을 근본적으로 선호한다.” 옮음이 좋음보다 우선하듯이 자아는 자의 목적보다 우선한다. “기본적으로 우리 본성을 드러내는 것은 우리가 가진 목표가 아니라” 우리가 자기 목표에서 이끌어낼 수 있다면 존중하겠다고 동의할 수 있는 권리다. “자아는 자아가 확인하는 목적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무리 지배적인 목적이라고 하더라도 여러 가능성 가운데서 선택된 것일 뿐이다.” pp. 276-278.



한편 공화주의 이론은 자유가 시민의 자치(self-governing) 참여 여부에 달려 있다는 발상을 중심에 두고 있다. 즉 공동선(common good)에 대해 동료 시민과 함께 깊이 생각하고 또 정치 공동체 운명을 만들어나가는 데 힘을 보탠다는 뜻이다. 어떤 개인이 공동선을 깊이 생각할 수 있으려면 자기 목적을 선택하고 다른 사람 권리를 존중하는 데 필요한 능력보다 더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공적인 일에 대한 지식, 공동체 소속감, 전체를 생각하는 관심, 위태로운 운명의 공동체에 대한 도덕적 유대감 등이다. 따라서 어떤 시민이 자치에 참여하려면 특정한 인격적 특성이나 시민적 소양(시민적 덕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말은 공화주의 정치가 시민들이 옹호하는 가치관과 목적에 대해 중립적일 수 없다는 뜻이다. 공화주의적 자유관은 자유주의적 자유관과 달리 자치에 필요한 소양과 덕목을 시민에게 적극적으로 심어주는 형성적 정치를 요구한다. pp. 29-31. 자유에는 자치가 필요하고 거꾸로 자치는 시민적 덕목에 의존한다는 발상이 공화주의 이론의 핵심이었다. p. 41.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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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는 영국식 의회민주주의를 최선의 사회 체제라고 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선거란 시민의 권리인 동시에 약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국인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커다란 착각이다. 그들은 의회 의원을 선거할 동안에만 자유로울 뿐이다. 의원들이 선출되는 즉시 시민들은 곧바로 노예가 되어버린다.’<누구나 한번쯤 철학을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에 관해서 어려운 질문을 던져보라고 요구한다. 그는 선거가 결국 가장 뛰어난 인물을 뽑는 것이 목적이기에 귀족정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만약 민주주의의 진짜 의미를 다수가 통치하는 제도라고 간주한다면, 미국식 체제는 오늘날 일부 정치학자가 판단하듯 과두정에 가깝다.”<처음 읽는 정치철학사>

















“사람들은 의회가 국민 의지를 실행하는 '공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사정은 그렇지 않다. 헤겔 지적처럼 의회는 관료들 판단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마치 사람들 자신이 결정한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장이다. 즉 의회민주주의는 실질적으로 관료 내지 그와 유사한자들이 입안한 것을 국민이 스스로 결정한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정교한 절차다.“<세계사의 구조>

















위브는 대중의 참정권은 시민이 “개인의 자유의지를 토대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권력을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듦으로써 자발주의적 자아상을 강화했다고 설명한다. “보통선거권과 다수결이라는 규칙은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개인이 국가를 형성한다는 이미지를 사람들 상상력 속에 불어넣었다.” 그 결과 다른 한편으로는 한층 더 심각하고 복잡한 현실이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게 숨어버렸다. 결국 ‘자유로운 인간’이 자기가 살아갈 정치 형태를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 투표장에 가는 장엄한 모습’은 그저 환상에 불과했다. 전통적 공동체의 장악력을 해체한 바로 그 기술 및 산업의 세력들이 개인 선택이나 동의 행위 범위를 넘어 사람들 삶을 지배하는 권력 구조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P. 152.



1980년대 중반 이후로 미국에서 상원의원이나 하원의원이 되는 데 들어가는 실질적인 비용은 두 배 넘게 늘어났다. 당 지도부는 초선에 성공한 의원들에게 하루 중 서너 시간은 선거구 유권자를 만나 투표를 독려하거나 소위원회나 창문회에 참석해 의원으로서의 활동을 하되 나머지 다섯 시간은 모금 행사에 참석하거나 정치 후원금을 낼 사람에게 전화해 자금을 긁어모으라고 조언한다. 대통령 선거운동에도 막대한 자금이 흘러든다. 2010년에 선거 후원금 상한제를 폐지한 미국 대법원 결정이 크게 작용한 결과다. 2012년에 연방 차원에서 이뤄졌던 모든 선거에 사용된 돈의 40퍼센트 이상을 최상위층 부자가 지불했다. 여기서 최상위층은 상위 1퍼센트나 0.1퍼센트가 아니라 0.01퍼센트를 말한다. 미국에서는 대통령 후보 경선(예비선거) 과정이 길기에 선거 초기 자금이 특히 중요하다. 2016년 대통령 선거운동이 공식적으로 시작될 때 공화당과 민주당의 대선 후보들에게 기부된 돈의 거의 절반이 불과 158개의 부유한 가문에서 낸 돈이었다. 대부분 금융과 에너지 부문에서 재산을 모은 가문들이었다. pp. 366-367.



대의정치가 과두정치에 사로잡힌 것이 부패의 증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바람에 정부가 공공선에서 멀어지고 또 시민들로서는 자신들이 통치를 받는 방식에 대해 의미 있는 발언을 할 기회를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일반적 대중과 부유층이 정부에게 바라는 것이 확연이 다르다. 예를 들어 미국인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87퍼센트는 ‘공립학교를 정말 좋게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것’에 정부 예산이 지출되길 바라지만, 백만장자 가운데 35퍼센트만이 여기에 동의한다. 전체 국민의 3분의 2가 ‘모든 사람이 일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정부가 노력해야 한다’라고 생각하지만, 백만장자들은 다섯 명 중 한 명만 그렇게 생각한다. 대중은 대기업 규제가 강화되길 바라지만 부자는 그렇지 않다. pp. 367-368.



대중과 부자 의견이 갈릴 때는 부자 의견이 채택된다. 정치학자 벤저민 페이지와 마틴 길렌스는 이익집단, 부유한 미국인, 일반 시민 중에서 미국의 공공정책에 실제로 영향을 미치는 집단을 측정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두 사람은 1981년부터 2002년까지 기간에 일자리와 임금, 교육, 건강보험, 시민권, 경제 규제, 문화 관련 쟁점, 외교 정책 등의 분야에서 제안된 약 2,000개의 정책 변화를 분석해 세 집단 중 어떤 집단이 최종 결과에 영향을 미쳤는지 살폈다. 그들은 “일반 시민은 연방정부 정책에 거의 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라는 불안한 결론을 얻었다. 조사 결과 일반 시민 중 3분의 1정도만 자기 뜻을 관철했다. 하지만 이조차도 그들의 견해가 이익단체나 부자 견해와 일치할 때에만 가능했다. 더 나은 학교 환경, 최저임금 인상, 기후변화에 대한 조치 등에서 압도적 다수 시민이 정책 변화를 선호하든 소수 시민만이 정책 변화를 선호하든 간에 정책 변화에 사실상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다시 말해 일반 시민은 정책 수립 과정에서 의미 있는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그들 목소리는 부유하고 조직적인 이익집단, 특히 기업의 목소리에 묻혀 아예 들리지 않는다.



이 연구를 통해 미국인 대부분이 느끼는 사실, 즉 자기 목소리는 중요하지 않으며 일반 시민은 자기가 통치되는 방식에 대해 의미 있는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깊어진 개인의 자치 권한 박탈 현상이야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의 핵심이다. 이것은 수십 년 동안 금융 주도의 세계화가 낳은 소득과 부의 엄청난 불평등이 시민의식 차원에서 초래한 부정적인 결과들 가운데 하나다. pp. 368-369.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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