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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비인격적인 것처럼 보인다. 종이 위에 씌어진 것이니, 누가 법을 특정 인물에 귀결시킬 수 있는가? 법은 외양상 중립성 띈 것처럼 보이기에, 정의롭지 못한 부분까지도 합법적인 것으로 만들어준다. 법의 조문은 살아 있는 인간의 통치보다 더 쉽게 신성화될 수 있다.
존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에는 땅을 빼앗긴 한 농부가 자기 집을 허무는 트랙터 운전수와 맞서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운전수에게 총을 겨누지만, 운전수가 자기는 오클라호마 시티의 은행가로부터 지시를 받은 것이며 또 그 은행가는 뉴욕에 있는 은행가로부터 지시를 받고 있다고 말하자 혼란에 빠진다. 농부는 외친다. ‘그럼 난 누구를 쏠 수 있다는 거야?’
가장 큰 부는 합법적으로 획득된다. 계약법과 재산법이 이를 지원하고, 우호적이 법정판사들이 이를 집행하며, 빈틈없는 기업변호사들의 손을 거쳐 고액의 보수를 받은 회계사들이 결산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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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발견된 작물재배와 정주커뮤니티의 유적은 대체로 1만 2,000년 전의 것이었는데,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국가의 유적은 기원전 3,300년 무렵의 것이다. 즉 작물재배가 시작되고 국가가 생길 때까지 8,000년 이상이나 걸렸다. 그것은 인류가 오래 정주를 했지만 본격적인 농경이나 목축으로 향하지 않고 수렵채집을 계속했다는 것, 그 때문에 국가를 형성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농경의 배신>를 쓴 제임스 스콧에 따르면 인류는 원래 정주하지 않았으며 정주하고 나서도 본격적인 농경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것은 중노동 때문만은 아니다. 다양한 역병과 기생충 등 많은 장애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실제 초기국가의 대부분은 역병이나 흑사병 같은 유행병에 의해 붕괴되었다. 또 정주를 해도 수렵채집을 계속한 것은 애당초 그것이 가능한 장소를 선택하여 정주했기 때문이다. 또 수렵채집을 하면 인구가 지나치게 증가하는 일이 없으며 트러블이 생겨도 바로 이동이 가능했기 때문이다."<힘과 교환식>
















"농경이 발달한 이유는 무엇일까? 1941년 ‘신석기 혁명’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고고학자 고든 차일드는 농경 발명이 최초 촌락을 탄생시켰고, 이 새로운 정주생활이 도기와 야금술 발명을 낳아 수천 년 만에 최초 문명이 싹텄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산뜻한 생각은 이제 뒤집어졌다. 



수렵-채집이 실은 상당히 효율적인 생활방식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농경이 발달한 이유는 보기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문제다. 현재의 수렵-채집 부족들에 관한 민족지학적 연구는 하루에 3~5시간만 ‘일’을 하면 가족들을 충분히 부양할 수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석기시대 농부들 유골은 수렵-채집으로 생활하던 조상들보다 더 심한 영양실조, 전염병, 치아 질환 흔적을 보여준다. 게다가 곡물에만 의존하여 사냥과 채집을 하던 때보다 식생활이 단조롭다. 인간이 처음 작물 사육에 성공한 뒤에도 농경은 오랫동안, 아마 1천년 이상 소수의 생활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농경이 발달한 이유는 무엇일까?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레 그루브에 따르면 약 2만 년 전에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다. 세계가 더워지기 시작했고, 인간은 구세계 끝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 알려진 세계가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된 것이다. 먹을 것은 여전히 풍부했지만, 기온이 상승하자 인간의 기생충들도 아프리카를 벗어나게 되었다. 예전에는 열대의 질병이었던 것이 온대 질병으로 바뀌었다. 그루브는 그 중에서 말라리아, 주혈흡충증, 십이지장충으로 인한 질병을 ‘공포의 삼위일체’라고 부른다. 계속해서 두 번째 중대한 사건도 일어났다. 사냥 때문에 거대동물군이 멸종해버린 것이다. 전부 포유류였으므로 남은 포유류는 대형이라고 해야 인간과 비슷한 크기에 불과했다. 갑자기(진화적 견지에서 일순간이다) 기생할 곳을 잃은 세균 포식자들은 인간에게로 몰려들었다.



바꿔 말해 2만 년 전 이후 어느 시점에 세계에는 보건 위기가 닥쳤다. 질병이 폭발적으로 증가해 인간 생존을 위협했다. 질병 공격을 받은 초기 인간은 늘 이동하는 생활양식, 자식을 3년마다 낳는 관습으로는 일정한 규모의 인구를 유지하기에 불충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인간은 자식을 더 자주 갖고, 인구를 늘리고, 멸종을 피하기 위해 정주생활로 전환한 것이다.



인류는 농사를 짓기 위해 정주한 것이 아니다. 그루브 이론에는 정주생활과 농경이 분리되어 있다. 수렵-채집 생활양식에서 촌락으로의 이행을 의미하는 정주생활은 이미 농경혁명이 시작되기 전에 생겨났다. 이것은 초기 인간과 그의 생각에 관한 우리 관점을 크게 변화시켰다.“<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생각의 역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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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피닷 2024-01-01 0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북다이제스터 2024-01-02 13:2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루피닷 님.^^
루피닷 님도 새해 더욱 건강하세요. ^^
 
오류의 인문학 - 실수투성이 인간에 대한 유쾌한 고찰
캐서린 슐츠 지음, 안은주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우리는 자신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는 정보에는 덜 노출된다. 우리는 이미 자신이 가진 견해를 고수하는 데 완전히 만족한다. 대부분 사람은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믿음에 대해 공부해 볼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전혀 다른 믿음 체계를 가진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별로 없다. 게다가 그런 사람과 시간을 보내더라도 서로 다른 견해에 대해 토론을 하는 일은 거의 없다. 날씨에 대해서는 얘기를 나누지만 기후 변화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최근의 여행은 얘기하지만 사회의 낙태 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런 행동이 우리의 잘못은 아니다. 그런 행동이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선호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예절 바른 행동으로 보기 때문이다. 에티켓 전문가는 ‘타인이 기분 좋아할 만한 일과 말만 하려고 노력하라’고 조언한다. pp. 182-183. - P182

1990년 아프가니스탄인 압둘 라만은 기독교로 개종했다. 국민 99퍼센트가 이슬람교도인 아프가니스탄에서 개종은 매우 드문 일이지만 하만은 아프간 난민들에게 의료용품을 원조하는 가톨릭 자선단체에서 일하다가 동료들의 종교를 믿게 된 것이다. 라만이 개종하면서 그의 삶은 모두 달라졌다. 그는 배신자라는 이유로 독실한 이슬람신자인 부인에게 이혼당했다. 두 딸에 대한 양육권 소송에서도 같은 이유로 패했다. 라만의 부모는 ‘우리 집안에서는 이슬람에서 다른 종료로 개종한 자식은 필요 없다’면서 그와 연을 끊었다.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가혹한 형벌이지만, 2006년 라만은 배교 혐의로 아프간 경찰에 체포당해 투옥되었다. 교리에 따라 검사는 사형을 구형했다. 검사는 ‘무슬림 사회에서 차단되어 사라져야 하며, 죽음을 당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프간 변호사협회 역시 그 견해를 지지하면서 그의 교수형을 촉구했다. 국제 사회가 강력하게 압력을 행사한 후에야 비로소 라만은 석방되었다. 법정 사형은 면했으나 법정 밖에서의 신변 위협으로 그는 이탈리아로 도망치듯 망명했다. 기독교로 개종해 가족에게서 쫓겨나고 사랑하는 이들과 격리된 채 이국에서 떠도는 운명에 처하게 된 이슬람 압둘 라만은 본질적으로 방랑 유대인이 된 셈이다.
이 사례는 한 사람의 불순분자가 공동체 전체의 일관성을 파괴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의심과 반대는 확산되어 공동체를 파괴할 수도 있는 전염병과도 같다. 따라서 많은 공동체가 반대론자를 치료하거나 격리하거나 추방하려는(극단적인 경우에는 제거하려는) 조치를 재빨리 취한다. 어떤 하나의 믿음에 대해 서열을 깨는 한 사람이 전체 공동체의 일관성을 위협한다고 본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더욱 심하게, 믿는 행위의 본질에 위협이 될 수 있다. 국경을 넘을 때(또는 가톨릭 신자인 국제 원조 요원을 만날 때) 믿음이 변할 수 있다면 진리란 단지 지역 관점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게 된다. 진리라는 개념의 요점은 보편성에 있으므로 믿음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은 곤란하다. 라만의 사형 언도를 지지했던 한 이슬람 언론가는 그 문제를 간단히 설명했다. ‘누군가가 한 순간에는 진리를 긍정하다가 그 다음 순간에는 그것을 거부하거나 부정한다면 진리의 전체 패러다임이 위험에 빠질 것입니다.’ p. 188-189. - P188

미국 의학협회에 따르면, 미국에서 매년 환자 69만 명이 의료 과실로 희생되며, 그들 중 4만 4천 명이 사망한다. 의료 과실은 미국에서 여덟 번째 사망 원인으로 유방암이나 에이즈, 오토바이 사고보다 그 순위가 높다. 미국 항공업계가 의료 과실과 동일한 사망자 수를 내려면 항공권이 매진된 747기가 사흘에 한 번 꼴로 추락해서 탑승객 전원이 사망해야 한다. p. 368. - P368

우리가 진정한 자아를 소유했다는 생각은 굉장히 중요한 심리적 목적에 기여한다. 우리에게 본질적이고 불변하는 정체성이 있다면 우리가 가진 믿음, 우리가 하는 선택, 우리가 될 사람 중 어느 것도 우연히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 삶의 모든 궤적은 필연적인 것이 되고, 우리의 진정한 자아가 결국은 드러날 것이라는 확신에 따라 움직여지는 것이 된다.
이 논리에 따르면 우리는 오류를 범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우리의 거짓 자아는 미리 운명지어져 있으며, 겉으로 보기에 오류처럼 보이는 것도 엄격히 말하면 더 큰 진리에 복무하기 위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신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종교적 주장, 즉 삶의 시행착오나 오점으로 보이는 것조차도 신의 더 큰 계획의 일부라는 주장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렇듯 진정한 자아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이야기들은 목적론이다. 우리는 결국 운명이 미리 정해 놓은 바로 그 자리에 도착하게 되어 있다. 여기에 본질론적 자아론의 매력인 동시에 약점이 있다. 우리의 인생은 결정론적이며 그 자체의 지적, 감정적, 영혼적 강점 때문에 선택했다고 생각했던 어제의 신념은 단지 미리 결정된 미래의 자아를 위해 우리를 유인한 함정에 불과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때 과거가 그 자체로 가지고 있었을 의미와 가치는 손쉽게 지워져 버린다.
더 큰 문제는, 진정한 자아라는 개념이 우리가 절대로 어떤 중요한 대변동도 경험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큰 변화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마침내 진정한 자신, 늘 그러했던 자신의 본모습을 발견한 후에는, 우리에게 더 이상의 변신은 불가능하다. 자아가 계속 변한다면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고, 계속 새로운 누군가가 되고 있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각자에게 고정된 본질이 있다면 우리는 그 본질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과거에 그 본질적 자아로부터 벗어났던 것은 단지 설명할 수 없는 한 번의 의도일 뿐이며 배신이나 죄로 규정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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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상 체계는 다소간 그것이 발생한 문명과 그 창시자의 인격, 이전 사상 체계에 의존하면서, 당대와 그 이후 시대의 이념과 제도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다.
하나의 철학이 그 창시자의 인격과 기질을 반영하고 그것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은, 지극히 극단적인 주지주의자들 말고는 다들 인정하는 바이다. "기질은 모든 철학 활동에서 작용하는 하나의 요소다"라는 기질주의적 입론은 윌리엄 제임스의 <실용주의> 첫 강연에서 설득력 있게 옹호된다. 제임스는 이렇게 말한다. "철학사는 상당히 인간적 기질들이 충돌한 역사다." 제임스 견해에 따라 철학적 기질의 구체적인 차이는, 합리론자 곧, ‘마음 약한 사람들’과 경험론자 곧, ‘의지 강한 사람들’ 사이에 있는 대립이다.
‘마음 약한 사람들’은 대체로 합리론적, 주지주의적, 관념론적, 낙관론적, 종교적, 자유의지 옹호적, 일원론적, 독단론적이다. ‘의지 강한 사람들’은 경험론적, 감각론적, 유물론적, 비관론적, 비종교적, 다원론적, 회의론적이다.
마음 약한 합리론자들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성 토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헤겔이 있다. 의지 강한 사람들은 데모크리토스, 홉스, 베이컨, 흄 등이 있다. 하지만 철학사의 가장 중요한 인물들 가운데 스피노자와 로크, 버클리 같은 사람들은 마음 약한 사람들과 의지 강한 사람들의 자질을 동시에 갖고 있음으로 이 구분의 양편에 다리를 걸친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주의주의적이고 종교적인 점에서는 마음 약한 사람으로서, 유물론적이고 운명론적인 점에서는 의지 강한 사람으로 특징을 갖는다. 버클리는 관념론적이고 종교적이고 자유의지 신봉적인 점에서 마음 약한 사람의 도식을 따르지만, 경험론자라는 점에서는 의지 강한 사람의 특징을 갖는다. 두 기질 유형의 대립은 시대마다 당대의 철학적 분위기를 형성해 왔다. p. 25.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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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촉, 오 삼국시대 이후 화폐 부족 때문에 불경기가 심각해지자 화폐는 점점 더 사장되고 그 결과 불경기가 더욱 가속화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그래서 포백이나 곡물이 화폐를 대체하는 역할을 하고, 사회는 일변하여 자연경제로 되돌아가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것은 한편으로 보면 기교를 부리지 않는 자연의 섭리, 하늘의 구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농업의 중요성이 재인식되고 농업이나 양잠을 위해 지력(地力)의 개발이 요구되어 널리 개간이 행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p. 216. - P216

보통 서양 중세에 관해서는 이른바 민족 대이동을 중세의 개막으로 삼는데, 그것은 로마제국 말기에 라인강, 다뉴브강에 연한 장성선(長城線)을 넘어 내지로 이주한 게르만 민족이 군벌로서 발전해 내지를 교란시켰을 때, 또다시 새로운 게르만 민족의 이동이 일어나 라인강의 수비를 넘어 내지로 들어가 도처에 독립 왕국을 건설한 것이었다. 중국에서도 완전히 이와 유사한 현상이 일어났던 것이다.
후한은 건국 초기부터 북방 민족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광무제가 군웅을 평정할 즈음에 오환족의 기마병, 이른바 돌기의 무력에 크게 의지했다. 천하 통일 후 한의 국력이 강성해지는 시기에 흉노의 남선우가 북선우와 싸워 이기지 못하고 한에 들어와 살기를 요청하므로, 광무제는 그 8부의 부락을 산서성 북부의 병주 땅에 거주하게 했다. 그들은 한의 군헌과는 별개의 계통을 이루어 선우 아래에 통솔되며 한의 감독을 받고 있었는데 전쟁 때마다 징집되어 군역에 종사했다.
후한 말 동탁이 대군을 일으켜 입경할 때 그 부하에 서방과 북방의 이민족이 많았다. 이어서 원소가 지금의 하북성 기주 땅에 웅거했을 때도 그 근린의 이민족을 자신의 군에 편입시켰다. 조조는 동탁의 군을 인계받은 여포를 죽이고 원소를 격파해 기주를 평정했으므로 그때마다 적군을 수용, 개편한 결과 그의 군 안에는 자연히 이민족 출신의 전사가 많았다. 그 군대가 병호(兵戶)라고 불리며 보통 농민 이하의 반 노예적 대우를 받게 된 데는 이러한 점에도 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조조가 원소의 조카 고간을 토벌해 병주를 평정했을 때 남성우의 흉노 부락도 역시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아직 충분히 중국화되어 있지 않은 용맹한 흉노족에 대해 조조는 분할통치의 술책을 썼다. 그는 흉노 무리를 5부로 나누고 각각의 부락에 부수(部帥)를 두어 지배하게 하고, 그 위에 흉노의 중랑장이란 관리를 파견해 감독했다. 바꿔 말하면 위는 이민족 출신자를 군대에 많이 수용해 사역시키고 그 군대의 힘으로 이민족을 통치했던 것이다. p. 224. - P224

전기의 당나라는 북주로부터 시작해 수가 이어받은 무천진 군벌 정권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수도, 당도 한인 출신이라고 일컫지만 실은 그 전의 북주 우문씨와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이민족 기질을 농후하게 받은 이른바 한(漢)과 호(胡)의 혼합 혈통이었으며, 혹은 이민족 그 자체는 아니었는지 의심하는 말조차 있다.
예컨대 수 양제가 부친의 첩과 사통하고, 당 고종이 부친의 첩인 무씨를 황후로 세운 따위 일은 이를 순수한 중국적 입장에서 보면 완전히 사람 눈을 경악케 하는 불륜 행위인데, 북방 유목 민족 간에서는 극히 보통으로 행해지는 습속에 지나지 않는다. p. 263. - P263

송나라 시대가 되면 상업이 활발해짐에 따라 지금(地金) 화폐 외에 유가증권이 화폐의 용도를 갖게 되었다. 처음 사천성 지방에서 부호들이 사적으로 교자(交子)라는 현금보관증을 발행해 그것을 가진 자에게는 누구를 불문하고 초면에 지불에 응했다. 최초에는 맡긴 금액만큼의 교자밖에 발행하지 못했으므로 교자는 세인들에게 절대적 신뢰를 받고 지폐처럼 민간에 유통되었다.
이에 자신을 얻은 교자포(交子舖)는 한도 이상의 교자를 발행해 세간에 내놓았으며, 이로써 얻은 현금을 유용해 투기를 시도하고 이중의 이익을 얻으려 했다. 이 투기 사업이 실패하면 자기가 발행한 몫은 물론 손님에게서 의뢰받은 몫의 교자에 대해서도 현금을 태환할 수가 없어 결국 어음을 부도낸 결과가 되고, 사람들의 환불 요구에 직면해 파산하는 자도 생겨 공황을 아기하게 되었다.
그래서 정부는 민간 자본가의 교자 발행을 정지시키고 정부의 책임으로 스스로 교자를 발행하기 시작했다(1023). 이것이 세계 최초의 지폐인데, 이 경우에 정부의 교자 운영의 방법을 보면 그 발행고는 결코 준비금의 범위를 지킨 것은 아니고 다액의 한도 이상의 발생을 감행하고 있었다. p. 301. - P301

주자학이 자주 비난을 불러온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하면, 그것은 첫째 몹시 관념론적이라는 것, 둘째로 그 관념론을 바로 실행 가능한 듯이 믿어 타인에게 강요하는 데 있었던 것 같다.
만일 관념론이란 점을 말한다면 주자학에만 한정되지 않고 송대의 학문은 모두 관념론이다. 하지만 왕안석 학파는 한편으로는 객관을 중시하므로 실제적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거시서 현실과 지나치게 타협한다는 비난도 생기기 시작한다. 그런데 주자학파는 떄로는 그것이 선종(禪宗)에 가까워 유교의 형태를 취한 불교라 할 수 있을 만큼 주관적이고 또 독단적이라는 결점이 확실히 있었다.
주자의 학문의 근본은 주돈이의 <태극도설>에 기초하는데, 이것은 원래 도가(道家)의 손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되는 태극도에 대한 설명이며, 주자는 또다시 여기에다 해석을 붙였다. 이는 우주의 생성을 논하지만 물리학도, 천문학도, 생물학도 아니다. 억지로 말하자면 선험적인 우주론인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인성론이 도출된다. 당시 학문에서는 무엇이든 그것으로써 설명이 잘 되면 그것은 진리였던 것이다.
주자의 우주론에 있어 정신적 원리인 리(理)와 물질적 원리인 기(氣)의 이원론에서는, 궁극적으로는 운동이 없는 절대 정지(靜止)라는 태극의 장에 이르면 기는 리에 내포된다는 점이 특색이었다. 마찬가지로 인성론에서도 천연의 성(性)인 양심과 기질의 성인 욕망이 대립되면서도 역시 절대 정지인 경(敬)의 장에서는 기질의 성은 천연의 성에 내포되며, 그런 까닭에 성선설이 성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자학의 태도가 현실의 정치와 외교에 적용되면 거기에 현상의 분석을 소홀히 하고 공론(空論)이 폭주할 위험이 생기는 것은 피할 수 없다. p. 364. - P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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