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세상에서 활동하는 일종의 로봇인 소셜 봇의 등장에 따라, 다수 지향 편향성을 지닌 우리는 더욱 더 쉽게 극단적인 관점으로 쏠릴 우려를 안게 되었고, 이는 위험한 무기가 될 수 있다. 소셜 봇은 마치 놀이동산에 설치된 매직미러처럼, 우리가 이미 생각하고 있는 것에 맞는 세상을 보여주고 나와 같은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많은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리하여 우리가 ‘실제로’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가령 내게는 트럼프만은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하는 정통 공화당 지지자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어느날 전직 대통령에 대한 입장을 트위터에 올렸다가 증오심 어린 부정적 반응의 쓰나미를 맞닥뜨리고 말았다. “이 부정적인 반응을 만드는 사람들을 다 합쳐봐야 수천 명 뿐이라는 걸 나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 하지만 마치 온 세상이 나를 잡으러 덤벼드는 것 같더라고.” 이런 일을 겪고 난 후 그는 트위터를 그만 두었다.



이렇듯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가짜 소셜 미디어 계정들의 목적은 무언가에 ‘좋아요’를 누르고, 공유하고, 기타 게시물을 올리면서 인간 활동을 흉내 낸다. 어떻게 프로그래밍 되어 있느냐에 따라, 소셜 봇은 그럴듯해 보이는 논쟁을 벌이면서 주장을 펼쳐나갈 수도 있고, 특정한 사람이나 게시물의 좋아요 수를 폭발적으로 늘려서 그런 주장이 인기 있는 것처럼 환상을 불어넣을 수도 있다(이런 식의 조작을 흔히 ‘분위기 대량생산’이라고 한다). 한 연구자가 지켜본 바에 따르면, 소셜 봇은 사람들 생각을 움직이고 싶어 하는 이에게 매우 큰 힘이 되어줄 수 있다. 페이스북에서 허구한 날 정치 논쟁을 벌이는 짜증나는 친구를 떠올려 보자. 만약 그 친구에게 소셜 봇 5천 개가 있다면 상황은 더욱 나쁜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소셜 봇은 바로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소셜 봇이 만들어내는 가짜 다수는 사람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제공한다. 그리하여 이른바 ‘침묵의 나선’(spiral of silence)을 촉발시킬 수도 있다. 침묵의 나선이란 사람들이 자기 검열을 하기 시작할 때 벌어지는 일을 묘사하는 개념으로, 노엘-노이만에 의해 처음 제시되었다. 러시아는 푸틴과 그의 정책에 대한 반대 의견을 몰아내기 위해 오랜 기간 소셜 봇을 사용해 왔다. 가령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대통령처럼, 다른 지도자들 역시 소셜 봇의 정치적 잠재력을 간파하고 있었다. 2013년 10월 31일 트위터는 6천 개 이상의 소셜 봇 계정을 예고 없이 폐쇄했는데, 이 봇들은 마두로가 올린 트윗을 리트윗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었다. 이러한 봇은 ‘어떤 계정이나 게시물이 실제보다 더 인기 있거나 활발한 것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부정 활동’에 해당하는 것으로, 트위터의 사용 계약을 위반한 것이다. 마두로의 전체 팔로워 숫자에 비하면 봇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0.5퍼센트에 지나지 않지만, 소셜 봇이 차단되자 마두로 트윗의 리트윗 수는 평균 81퍼센트 폭락하고 말았다.



경제학자 후안 모랄레스는 이 사건을 보다 깊게 연구해 보았다. 우리가 온라인 세상에서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인기 있다고 여기는 현상에서 소셜 봇이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고자 한 것이다. 6개월 이상 올라온 20만 개 이상의 트윗을 분석한 결과, 마두로가 소셜 봇을 이용해 만들어낸 가짜 인기가 사라진 것과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증가하고 야당에 대한 지지가 높아진 것에는 상관관계가 있었다. 반대로 생각해 보자면 소셜 봇을 통해 인위적으로 부풀려진 ‘다수 의견’으로 인해 베네수엘라의 정치적 토론은 침묵의 나선으로 빨려 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 가짜 다수의 거품이 꺼지고 나자 소셜 봇이 만들어낸 환상이 무너진 자리에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고 대중 의견은 그에 맞춰 영점 조절을 다시 할 수 있었다. 이렇게 현실 인식이 재조정되자 베네수엘라 사람들은 설령 정치적 다수가 아닐지라도 자신 본심을 좀 더 거리낌 없이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소셜 네트워크에서 벌어지는 의사소통 가운데 사람 대 사람이 아니라 사람 대 로봇에서 오가는 것의 비중이 얼마나 될까? 19퍼센트다. 그리 많은 이들이 알고 있지 않은 소름 끼치는 현실이다. 소셜 미디어의 통계적 모델링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전체 계정 중 5~10퍼센트 정도의 봇을 확보하고 있기만 하면 자신들의 입맛에 맞도록 다수 의견을 형성하고 주무를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자신들 입장을 지배적인 것으로 만들어, 결국 모든 참여자 중 3분의 2 이상이 동의하게 할 수 있다.



세상에는 다수 의견이 아니지만 다수 의견을 대변하는 것처럼 주장하며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다수의 무지에 힘입어, 혹은 어느 방향이 대세가 될지 지켜보자는 생각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이들을 적절히 길들인다. 사회적인 에너지를 왜곡된 방향으로 순식간에 강화하고 고착시키는 것이다. 실제로는 소수 지지를 받고 있을 뿐이지만 마치 다수가 된 것처럼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런 의견은 집단 착각으로 이어진다. 결국 우리는 입에 재갈을 문 채 위험하기 짝이 없는 침묵의 나선에 갇히고 마는 것이다. pp. 147-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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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23-06-22 19: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소셜 봇 생각보다 충격적이네요.

북다이제스터 2023-06-22 19:13   좋아요 2 | URL
김어준이 매번 소셜 봇에 속지 말라고 할 땐 저도 잘 몰랐는데요, 이 글을 보니 저도 그 구체적 악영향을 알게 되었습니다. ^^
 

















우리는 집단에서 쫓겨나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다. 우리의 사회 정체성은 우리가 속한 집단과 너무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집단에서 추방당하는 것은 죽음의 키스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 공포는 우리를 집단 착각 중에서도 가장 최악의 착각에 빠져들게 하며, 심지어 우리를 그 공범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추방하다’(ostracize)라는 동사는 그리스어 단어 ‘도편추방’(ostracon)에 유래를 두고 있다. 도편추방은 기원전 5세기, 탄핵이라는 정치적 절차가 발명되기 한참 전, 아테네인들은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정치인, 허풍쟁이, 거짓말쟁이, 그 외 사람들이 싫어하는 이를 아테네 밖으로 쫓아내기 위해 고안된 법으로, 깨진 도자기 조각(도편 ostraca)에 추방하고자 하는 사람 이름을 적어내는 방식으로 원치 않는 자를 그들 속에서 솎아내기 위한 투표였다.



매년 아테네 시장에서는 도편추방 투표를 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투표가 끝나고 나면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개표가 진행됐다. 여기서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사람은 누가 됐건 아테네를 떠나야 했다. 도편추방 대상자에게는 짐을 싸서 떠나기 위한 열흘의 말미가 주어졌고, 10년을 꼬박 채우기 전까지는 귀환이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10년을 채우고 나면 돌아와서 아테네인으로서의 생활과 직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또한 그가 도시 내에서 보유하던 자산은 안전하게 보존되도록 정해져 있었다. 도편추방자 중에는 아리스토텔레스라든가, 영웅적 업적을 남긴 페리클레스처럼 유명한 사람들도 있었다.



다양한 연구를 통해 추방당한 이들은 혈압이 높고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의 농도 또한 높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사회적 관계에 손상을 입든 물리적 부상을 입든, 우리 뇌는 동일한 경고 신호를 발산한다. 심지어 사회적으로 배척당한 고통은 허리와 척추의 통증 및 심지어 출산의 고통과도도 관련성을 보인다. 마음의 상처가 마치 다리 골절상처럼 고통스러운 일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고통에 엄청난 사건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사회적 추방에 대한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아주 약한 수준의 냉대와 무시만으로도 고통을 야기할 수 있다. 일상적으로, 때로는 매일 경험하는 일로 인해 그런 고통이 벌어질 수 있다는 건 더욱 안 좋은 일이다. 참가자 40명을 대상으로 일상 속에서 배척당한 경험을 할 때마다 일기에 기록하도록 한 연구가 있었다. 참여자들이 기록한 사건 중 7백여 건 이상은 (버스나 기차에서 낯선 이가 반가운 표정을 짓지 않았다거나, 친구가 이메일에 제때 답장을 해주지 않는 등) 비교적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배우자로부터 싸늘한 침묵만을 돌려받는 등) 보다 심각한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특히 가족이나 친지들로부터 추방당한 경험을 하고 나면 참여자들은 귀속감, 자기 통제감, 자존감 등의 하락을 보여주었다. 또한 자신 존재를 더욱 의미 없게 느꼈다.



거절에 대한 우리의 내적 감각은 너무도 예민하게 발달해 있는 나머지, 심지어 그 일이 멀리 떨어져 있거나 작위적인 상황이라는 걸 분명히 아는 경우에도 고통을 느낀다. 인터넷에서 무시당하거나 배제당하는 기분, 즉 사이버 도편추방은 사람을 만나서 거절당하는 일보다 훨씬 더 쉽게 벌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물리적, 감정적 반응은 거의 유사하다. 문제는 우리가 ‘좋아요’가 낳는 즉각적인 만족의 세상 속에서 수천여 명의 가상 ‘친구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무시당하는 기분을 느끼기가 너무도 쉬운 세상이 되었다. 가령 누군가가 쓴 게시물에 댓글을 달아놓고 상대방 반응을 기다리지만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사소한 경우를 떠올려 보자. 사이버 도편추방을 당하는 사람은 귀중한 소속감이나 자기존중감의 상실을 겪게 된다. 



거절의 크기나 강도가 얼마나 큰지는 상관없다. 일단 거절당했다는 사실이 인식되고 스위치가 켜지고 나면, 우리에게 내제된 도편추방 경고등은 가장 큰 소리로 쩌렁쩌렁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심지어 사회적 거절이 아주 미세하게 벌어질 때조차 생명이 위협당할 때와 맞먹은 스트레스를 경험한다. 여러 차례 반복된 한 실험을 살펴보자. 피험자는 방 안에서 다른 두 사람과 함께 공 넘기기 게임을 한다. 그러던 중 갑자기 두 사람은 제대로 된 이유도 가르쳐주지 않은 채 피험자를 따돌리고는 자기들끼리만 공을 주고받는다. 이 실험은 온라인에서 ‘사이버볼’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 수천여 명을 상대로 진행되기도 했다. 온라인에서든 오프라인에서든 같은 패턴이 드러났다. 사회적 추방을 단 2분에서 3분 정도 경험한 것만으로도, 특히 슬픔이나 분노 같은 ‘강력하게 부정적인 감정’이 발생한 것이다. 낯선 이들과 공을 주고받는 인위적인 상황임에도, 심지어 컴퓨터 앞에서 공을 주고받는 상황에서조차, 배제당한 참여자는 감정이 격양되고 말았다. pp. 9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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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6-21 1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편추방은 태생적으로 엉뚱한 결과가 나올 수 있는 제도였네요.ㅠㅠ 내편이 아니면 추방 가능한 제도이니까요.

북다이제스터 2023-06-21 13:09   좋아요 0 | URL
넵, 다수결(투표)이 항상 옳거나 좋은 것이 아닐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선거 결과를 봐도 그런 거 같습니다.^^
 
















“인간은 집단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언제나 안간힘을 써야만 한다.” - 니체





우리 뇌는 우리가 집단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에 반응한다. 그 믿음이 사실에 근거하는지 아닌지 여부는 상관이 없다. 다른 이들과 행동을 조율하고 싶은 충동을 사회학자들은 흔히 ‘순응 편향’(conformity bias)이라고 부른다. 순응 편향 성향에 따르면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마치 우리를 무차별적으로 끌고 들어가는 지구의 중력마냥 군중과 함께하고자 하는 우리 본성은 무의식에서 작동하며, 이것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고 인간은 여기서 탈출 불가능한 듯하다. 설명 ‘집단의 선호’라는 것이 완전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해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뜻을 오해할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생각이나 기대를 잘못 알고 거기에 순응해버릴 위험을 끌어안은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볼 때, 우리는 다수에 순응하는 경향성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는 집단 환상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기 십상이다. 



사회학자 윌리엄 아이작 토머스와 그의 부인인 도로시가 1928년 제시한 이른바 ‘토머스 정리’(Thomas theorem)는 다음과 같다. “만약 사람들이 어떤 상황을 현실로 정의한다면, 결과적으로 현실이 된다.” 우리가 믿는다면, 그러한 믿음에 실질적인 근거가 있건 없건 상관없이, 그러한 믿음에 따른 결과만큼은 현실화될 수 있다. pp. 24-27. 우리의 사회적 본능은 마치 감정처럼 우리에게 내장되어 있다. 감정이나 사회적 영향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위험하고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 p. 33. 집단에 속하는 개인들이 개인으로서 판단을 내려야 집단 지성이 올바르게 발현될 수 있다. 사람들이 다른 이의 선택을 볼 수 있을 때, 그래서 다른 사람 선택을 보고 흉내 낼 수 있을 때, 집단 지성은 순식간에 ‘집단 무지성’으로 전락하고 만다. p. 56.



1841년 스코틀랜드의 언론인 찰스 맥케이가 모방의 연쇄에 대한 책, <대중의 미망과 광기>를 펴냈다. “사람들은 집단 속에서 생각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가 탐구한 사례 중 하나가 그 유명한 네덜란드의 1634년 ‘튤립 광란’이었다. 네덜란드의 엘리트들이 어느 날 갑자기 튤립 구근의 도창적 컬렉션을 절대적 필수품인 양 여기기 시작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 꽃에는 어떤 내재적 가치도 없었지만, “튤립을 소유하고자 하는 광기는 곧 네덜란드 사회의 중산층을 덮쳤고, 심지어 무역상과 상점 점원들마저도 어느 정도 손을 댈 정도가 되었다’고 맥케이는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한 학자의 추산에 따르면 튤립 광기가 절정에 달했던 1635년, “튤립 구근의 평균 가격은 같은 무게의 금 가격을 뛰어넘었고, 희귀한 튤립 구근 단 하나가 오늘날 돈으로 5만 달러 이상에 거래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맥케이에 따르면, 가격이 요동치다 떨어지기 시작하자 시장의 자신감은 무너졌고, 딜러들은 전반적인 충격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거대한 튤립 열풍은 막대한 튤립 거품 붕괴로 이어지고 말았다. 이 광기가 일시적인 것을 파악한 네덜란드 당국은 선언했다. 이 광란의 정점에서 맺어진 모든 계약은 무효로 선언되어야 한다. pp. 58-59.



이런 식의 사기극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익숙하게 들린다. 그렇다면 과연 생수가 정말로 더 깨끗하고 안전한 물이 맞긴 한 걸까?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현무암 지반으로 걸러졌다는 둥, 구름까지 뚫고 올라가는 일본의 명산에서 체취했다는 둥, 숫제 천사의 눈물을 받아왔다는 둥, 온갖 이유를 붙인 고급 생수들은 고작 세 컵 분량에 5달러가 넘게 팔리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 99퍼센트의 수돗물은 음용 가능할 뿐 아니라, 사실 많은 사람이 생수라고 생각하며 마시는 물은 수돗물이다. 병입되어 판매되는 물 중 절반 이상이 약간의 처리 과정을 거친 수돗물이며, 양대 생수 브랜드인 아쿠아피나와 다사니는 (참고로 이들은 펩시와 코카콜라의 상품인데), 그저 디트로이트시가 제공하는 물을 한번 걸러서 플라스틱 병에 담아 넓은 시장에 판매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병에 들어 있는 물을 생수라고 마실 때마다 우리는 이런 엄청난 사기극에 속는 동시에 거들고 있는 셈이다. 생수를 구입하면 4.5리터짜리 한 병에 평균적으로 1.5달러를 내게 되는데, 이는 우리가 같은 영의 수돗물을 사용할 때 내는 돈의 2천배에 육박한다. 



오늘날의 생수를 둘러싼 현상은 튤립 광란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사실상 거짓말이나 다를 바 없는 무언가에 수천억 달러를 쓰고 있는데, 그런 소비를 별개로 보더라도 그 막대한 플라스틱 병 사용으로 인한 환경 영향이 실로 엄청나다. 생수 한 잔에는 같은 양의 수돗물에 비해 2천 매나 더 많은 에너지가 소비된다. 한편 미국만 놓고 보더라도 플라스틱 생수병의 70퍼센트는 곧장 매립되며 그리하여 토양을 오염시키고 물길을 막는다. 이러한 연쇄 작용 결과 캘리포니아와 하와이 사시 어딘가에는 텍사스주의 두 배 정도 크기를 이룰 정도로 넓은 플라스틱 부유물 군집이 만들어지고 말았다. pp. 61-63.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비슷한 믿음을 지니는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끌리는 경향이 있다. 18세기 도덕철학자 애덤 스미스에 따으면 우리는 ‘어떤 특정한 정신적 조화’를 찾고자 한다. 의견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면 집단적 정체성이 강화되고, 신뢰, 협조, 평등, 생산성이 강해진다. 소속 집단과 현실을 공유함으로써 우리는 공통의 관점을 형성할 뿐 아니라 비슷한 감정과 세계관까지 갖게 된다. 이는 우리의 핵심적인 가치관을 함양하며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을 키우는데 도움을 준다. 또한 우리의 삶에 의미가 부여되며 자기 존중감을 얻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 행동과 상호작용이 우리가 속한 집단의 공통적 경험을 확인시켜주기에, 우리 뇌는 갈망하는 행복 호르몬의 분비로 보상을 얻게 된다. 자기 인식이란 우리가 지닌 고유한 특성과 함께 우리가 속한 귀속집단에의 감각이 결합되어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개인적 정체성은 우리의 사회적 정체성과 너무도 깊숙이 결부되어 있으며 그래서 우리 뇌는 그 둘을 따로 떼어놓지 못한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본인의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입장을 정하기 전부터 특정한 관점에 정서적 선호를 드러내거나 호감을 느낀다. 이런 상황에서 순응 편향이 곧잘 작용한다. 귀속집단에서 이미 확립되어 있는 결론을 강화하는 것에 불과한 증거를 찾아내기 때문이다. 또한 이렇게 공유하는 감정이 클수록, 우리는 자신이 생각하는 귀속집단의 관점에 순응하기를 원하게 마련이다. 이미 특정 귀속집단에 시간과 에너지, 믿음을 투입한 다음이라면, 그래서 그 소속감이 우리 정체성 중 일부를 구성하게 되었다면, 그 집단의 관점을 우리는 기꺼이 보호하고자 한다. 고통을 무릎쓰고서라도 집단적 관점을 강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귀속집단 바깥에 있는 이를 향해 더 적대적으로 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물론이다. pp. 9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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