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 오필리 <성모 마리아>(1996)



오필리는 아프리카와 카리브해 지역의 종교 상징물에서 영감을 얻어 성모 마리아를 강렬하고 관능적인 인물로 묘사했습니다. 마리아를 흑인으로 표현했는데, 이는 서양 미술 관습에 대한 도전입니다. 작가는 사회적 규범에 도전하고자, 포르노 잡지에서 오려낸 여성 성기 모양을 아기 천사인양 성모 마리아 주위에 배치함으로써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함께 표현했습니다.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알랭 드 보통(1969~ )은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우리는 틀에 박힌 일상을 보내기에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한다. 예술이 찌르고 치근대고 좋은 의미로 도발할 때까지 내내 겨울잠을 잔다. 이질적인 예술 덕분에 내 안의 종교적 충동, 내 상상력이 허락하는 한에서 내가, 그들이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 재인식할 수 있다.”

















파르미자니노 <목이 긴 성모>(1540)



1520년경 이탈리아 여러 도시에서 르네상스 양식이 유행했습니다. 당시 많은 젊은 미술가는 미켈란젤로의 작품 화풍(manner)만 모방했는데, 후대 비평가들이 이를 비판하면서 이 시기를 매너리즘(Mannerism) 시대라고 불렀습니다. 반면 위대한 거장 작품과 달리 자연스럽지 않은 그림을 그리려는 파르미자니노 같은 예술가가 다수 있었습니다.


파르미자니노는 성모 마리아의 목을 - 현대 미술가 모딜리아니의 인물화처럼 - 길쭉하게 그렸습니다. 화가는 인체 비례를 기묘한 방식으로 길게 늘여놓았습니다. 길고 섬세한 손가락을 가진 성모의 손이나 천사의 긴 다리는 마치 볼록 거울에 비친 것처럼 보입니다.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자 했던 파르미자니노 같은 당대 화가들은 아마도 최초의 ‘현대적인’ 작가들이었을 것입니다.



















에드가 드가 <에투알>(1878)



‘에투알’은 프랑스어로 ‘스타’나 ‘주연급 발레리나’를 뜻합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오페라극장은 상류계급 남성을 위한 창관(娼館)이었고, 그곳 창녀는 발레리나였습니다. 당시 복사뼈 이상 다리를 보이는 걸 수치로 여기던 시대에 정숙한 여인은 긴 치마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다리를 다 내보이는 건, 현대 감각으로 말하면, 가슴을 드러내는 것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림을 보면, 무대로 뛰쳐나가는 에투알 뒤에 검은 정장을 입은 한 신사 모습이 보입니다. 얼굴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에투알의 스폰서로 귀족이나 돈 많은 상인일 것입니다. 당시엔 주로 신분상승 욕구가 강한 하층계급의 딸이 발레를 했는데, 돈 많은 아저씨를 애인삼아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했습니다. 

드가는 발레 그림을 1,500여점 남겼지만, 발레리나의 열악한 생존 조건에는 냉담하며, 단지 그림 제재로 발레리나를 볼뿐입니다. 드가는 발레리나의 내면을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대상을 화폭에 옮겼습니다.





















테오도로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에서 일어난 식인 장면>(1819)



그림은 낭만주의 화가 제리코가 1824년 발표한 원작 <메두사호의 뗏목>의 습작품입니다. 원작에는 뗏목 위 시체만 널브러져 있지만, 습작에는 식인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원작 내용 일부가 변경되었지만, 우리는 작가가 당초 무엇을 기획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1816년 7월 2일 프랑스 군함 메두사호는 아프리카 세네갈을 식민지로 삼기 위해 항해를 떠났으나 암초에 걸려 난파했습니다. 400여명을 태운 배가 침몰하기 전 구명보트에 타지 못한 149명은 뗏목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보급품이 없는 상황에서 폭풍까지 만난 뗏목은 생지옥이 되었습니다. 기아와 탈수, 질병, 난동, 광기, 살인, 자살, 급기야 식인 행위까지 벌어졌습니다. 13일간 표류 끝에 구조된 생존자는 15명뿐이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담배를 물고 있는 해골>(1885)



고흐는 해바라기나 붓꽃, 별이 빛나는 밤처럼 아름다운 정경도 많이 남겼지만, 시들어 가는 해바라기나 해골과 같은 어두운 소재도 표현했습니다. 그에게 삶이란 기쁨과 환희뿐 아니라 고통과 절망도 함께 어울려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서양 미술사에서 16~17세기 사이 ‘바니타스’(vanitas)라는 정물화가 유행했습니다. 해골이나 시든 꽃이 대표적으로 바니타스를 상징하는 소재였습니다. 인생무상과 삶의 덧없음을 뜻하는 라틴어 바니타스는 삶이 언젠가는 끝나기에 부와 명예, 순간적인 쾌락에 집착하는 일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자코포 틴토렌토 <수태고지>(1587)



중세 봉건시대 영주는 초야권(初夜權)이 있었습니다. 농노가 결혼하면 신부는 영주와 첫날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무서운 그림』의 저자 나카노 교코는 “벌 받을 생각일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 그림 <수태고지>는 어딘가 초야권을 닮았다”라고 말합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메시지를 전하지만, 그 소식을 들은 마리아에게 몸에 기억도 없는데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말입니다. 혼례를 앞둔 행복한 여인에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합니다.


그림 <수태고지>의 왼편 문밖에서 마리아와 결혼하기로 한 요셉은 목수 일에 여념이 없습니다. 뒷날 예수의 양아버지가 될 사람이지만, 자신과 관련된 일이 벌어지는데도 눈치를 전혀 못 채고 있습니다(그런 의미에서 그는 비극적 인물입니다). “틴토렌토의 <수태고지>는 젊은 여성의 주체적 결정권을 침해하는 운명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리 소로카 <낚시꾼>(1840?)



그림 <낚시꾼>은 평화로운 시골 풍경이지만, 분위기는 얼음처럼 고요합니다. 소로카가 사는 세상은 햇살이 비추나 빛은 일렁이지 않고, 강물은 흐르나 물결이 없습니다. 고요함을 넘어 질식할 것만 같은 적막함이 흐릅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유리처럼 투명하고 단단한 무언가에 갇혀 있는 폐쇄된 공간이 느껴집니다.


러시아인 소로카는 농노였고 그의 주인은 결코 그를 해방시켜 주지 않았습니다. 1864년 소로카는 지역 농민 해방운동에 연루되어 무거운 형벌을 받습니다. 마지막 희망조차 사라지자 그는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림 속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듯한 답답함은 소로카가 농노제라는 비인간적인 제도 속에서 느끼는 절망감의 표현입니다.





그리고리 마소예도프 <수확기>(1887)



19세기 이르자 러시아 농노제는 법적으로 금지되었지만 실질적으로 노예가 해방되진 못했습니다. 토지 가격이 너무 비싸 토지를 매입할 수 없었던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습니다. 지주들은 개혁에 반대하며, 소작농으로부터 높은 소작료와 임대료를 모두 받아 챙겼습니다.


러시아에서 노예가 해방되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는, 서유럽과 달리, 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자본주의가 늦게 발달했기 때문입니다. 노예에서 해방되었지만,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밖에 없던 가난한 민중은 일할 곳이 없었습니다.





















미켈란젤로 <아틀라스 노예>(1536)



미켈란젤로의 노예 조각 작품은 미완성이 많습니다.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겨놓는 기법을 ‘논 피니토(non finito)’라고 합니다. 작품의 완성된 부분은 거의 완벽하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미완성된 덩어리가 붙어 있어 완성된 부분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완성품을 ‘캐낸다’ ‘끄집어낸다’는 느낌입니다.


미켈란젤로는 “나의 조각 작품은 돌 속에 이미 들어 있는 형상을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살아 있는 대리석 속에서 나오고 싶어 몸부림치는 노예를 발견하고는, 정으로 돌덩이를 떼어내어 노예를 해방시켰습니다.





















케테 콜비츠 <가난>(1901)



사물에 대한 우리 감정은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나 기억을 변화시킵니다. 같은 장소나 사물을 보더라도 기쁠 때와 비교하면 슬플 때는 아주 다르게 보입니다.


표현주의자들은 인간의 고통과 가난, 폭력, 격정을 아주 예민하게 느꼈기에 미술에서 조화나 아름다움만을 고집하는 일은 정직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콜비츠의 <가난> 같은 표현주의 화풍은 사랑이나 존경, 두려움 따위를 표현하기 위해 사물의 외관을 의도적으로 변형시킵니다. 


콜비츠는 가난하고 학대받는 이들에게 깊은 연민을 느끼고 그들 주장을 앞장서서 옹호했습니다. 작품 <가난>은 실업자가 많고 사회 봉기가 잦았던 시기에 방직공들이 당한 비참한 처지를 다룬 희곡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삽화입니다. 노동의 존엄성을 강조했던 밀레의 <이삭줍기>와는 달리, 콜비츠는 혁명만이 우리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알폰스 무하 <욥사의 담배 권련 용지 광고>(1896)



무하가 그린 욥(Job) 회사의 담배용지 광고는 담배에서 피어나오는 연기와 여성의 출렁거리는 머릿결이 서로 어우러져 더욱 매혹적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아름다운 곡선이 사람들 시선을 끕니다. 이렇게 무하 광고 포스터는 담배 연기로 가득한 선술집이나 여인숙에서 대중을 사로잡았습니다.


광고는 광고를 보는 사람이 자기 현재 생활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느낌이 들도록 합니다. 잘 만든 광고일수록 불안과 불만을 증폭시킵니다. 광고에 비교적 영향을 덜 받는 사람은 부자뿐입니다.





















장레옹 제롬 <로마의 노예시장>(1886)



그림은 제국주의 오리엔탈리즘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그림 배경은 고대 로마로 설정되어 있지만, 어쩐지 사람들은 그림에서 19세기 말 이스탄불 이미지를 떠올렸습니다. 한때 콘스탄티노플로 불린 이스탄불이야말로 로마 문화의 계승지였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림에서 노예로 팔리는 여인은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데 그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여인의 몸이 더 강조됩니다. ‘저렇게 수줍음을 타는 아름다운 여인이라니! 게다가 노예라니!’ 그림은 단순하게 남성의 욕망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수동적인 여성 이미지가 덧쓰여진 동양에 대한 서구 욕망이기도 했습니다. 강하고 진보한 남성(서양)이 여성(동양)을 길들이고 거듭나게 한다는 허황된 생각 말입니다.




















존 콜리어 <레이디 고다이바>(1898)



전설로 내려오는 그림 속 여인 고다이바(Godiva)는 11세기 영국 코번트리에서 살았던 백작 부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다이바의 남편인 레오프릭 백작은 중세 영주가 가진 권력을 남용해 과도한 세금을 걷었습니다. 


고다이바 부인은 영주의 폭정에 굶주리던 농민들을 동정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무거운 세금을 경감해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레오프릭 백작은 “당신이 정말 농민들을 걱정한다면 시장거리를 알몸으로 말을 타고 지나가시오. 그러면 당신 청을 들어주겠소”라고 제안했습니다. 이런 터무니없는 조건을 제시하면 그녀가 다시는 잔소리를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농민들을 사랑하는 마음에 고다이바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말을 타고 거리에 나섰습니다. 소식을 들은 모든 마을 사람은 고다이바가 말을 타고 지나갈 때 외출도 안하고 창문을 커튼으로 가려 내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고다이바 부인의 사랑과 희생정신에 감동했기 때문입니다. 고다이바는 결국 농민들의 세금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에르네스트 메쏘니에 <모르텔리 거리의 바리케이트, 1848년 6월>(1851)



그림에서 앞에 배를 드러내고 쓰러진 남자의 옷 색깔은 파란색과 하얀색, 빨간색의 프랑스 삼색기를 연상시킵니다. 왼쪽 위에 푸른 셔츠를 입고 쓰러진 사람과 흰 색 가슴 부분에 붉은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도 서로 연결해서 보면 파란색과 하얀색, 빨간색의 삼색입니다. 


1848년 혁명 시기에 역사상 최초로 농민과 노동자가 그 시대의 인간상으로 부각됐습니다. 특히 이 때 새롭게 투표권을 얻은 농민들이 큰 변수로 떠올랐습니다. 작은 땅을 소유했던 농민들은 국가 기간 사업을 국유화하자고 주장하는 급진파 요구에 겁을 집어먹고 매우 보수화되었습니다. 이들은 나폴레옹 황제의 추억을 되살리며 루이 나폴레옹을 대통령으로 선출했습니다.





















자코메티 <걸어가는 사람>(1960)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이루는 삶만이 바람직하다고 학습한 우리에게 목표 없이 반복된 일상은 변변치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이 뼈만 앙상한 조각상은 우리에게 ‘나 역시 매일 목적 없이 걷고 있어!’라고 말합니다.


어디로 갈지, 어디서 멈출지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 모두 걷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것 자체만으로 소중한 활동입니다. 자코메티는 자신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침내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한 발을 내디뎌 걷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하지만 나는 걷는다. 그렇다 나는 걸어야만 한다.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계속해서 걸어 나가야 한다.”





자크루이 다비드 <적선을 받는 벨리사리우스>(1781)



그림에서 구걸하는 노인은 벨리사리우스입니다. 그는 6세기경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밑에서 로마제국의 영토를 회복했던 전설적인 장군이었습니다. 젊었을 때 그는 부귀와 영화를 누렸지만, 정치의 희생양이 되어 눈도 뽑히고 돈을 구걸하는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왼쪽 병사는 한때 그의 부하였으나, 지금은 극도로 곤궁하고 굴욕적인 상태에 있는 그의 옛 상관을 우연하게 보고 충격에 빠져있습니다.


이 작품은 일시적이고 세속적인 성공의 덧없음과 인간은 쉽게 나락에 빠질 수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일시적인 물질적 성취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막연하게 낙관하며 인생을 살지만, 이 그림처럼 예술은 우리에게 매사에 경각심을 줍니다.






그뤼네발트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1515)



그뤼네발트는 그림에서 르네상스 시대에 만연했던 비율과 원근법의 원칙에서 벗어나서 인물 크기를 의도적으로 변형시켰습니다. 이는 그뤼네발트가 기술적인 완벽함을 거부하고 중세와 원시 시대의 예술 원리로 돌아간 것으로 여겨집니다.


크기와 비율을 의도적으로 조작하는 일은 사실주의의 엄격한 규칙을 고수하기보다 인물의 크기를 중요도나 상징적 의미에 따라 결정했던 중세 예술 전통과 일치합니다. 그뤼네발트가 이러한 기술을 사용하기로 선택한 이유는 단순히 시각적 정확성을 전달하기 보다는 장면의 정서적, 영적 측면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그뤼네발트의 접근 방식은 예술적 위대함이 반드시 ‘진보’라는 개념을 고수하거나 새로운 발견을 수용하는 데 있지 않음을 상기시킵니다. 그는 예술적인 표현이 규칙이나 기술에 우선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히에로니무스 보슈 <우석의 제거>(1494)



그림은 르네상스 시대 환자 머릿속에서 ‘바보의 돌’을 제거하여 환자의 광기를 치료하는 장면입니다. 당시 광우라는 증상이 뇌 속에 박혀 있는 ‘바보의 돌’에서 비롯되었다는 신념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 이전 중세인은 광기를 객관적인 세계의 힘으로, 다시 말하면 사탄의 역사로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광기를 인간의 주관적 속성으로, 즉 ‘인간이 자신과 맺는 관계’로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광기란 이성과 덕행을 통해 피할 수 있고, 또 피해야만 하는 인간의 악덕일 뿐이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들의 인본주의 특성이 드러납니다.





















윌리엄 터너, <눈보라-항구를 떠나는 증기선>(1842)



미술비평가 존 러스킨은 터너의 그림을 “여태까지 그려진 바다 그림 가운데 바다의 움직임과 엷게 낀 안개, 빛을 가장 장엄하게 표현했다”라고 극찬했습니다. 


터너는 자연의 힘에 깊은 매력을 느꼈고 자연의 극적인 효과를 포착했습니다. 그림은 폭풍과 바다 풍경의 역동적이고 끊임없는 변화를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휘몰아치는 바람과 파도 충격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터너에게 자연은 항상 인간 감정을 반영하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힘에 부딪히면 압도당하며, 자신이 아주 작은 존재임을 느끼게 됩니다.





















피터 파울 루벤스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1639)



루벤스는 그림에서 빛과 그림자의 역할을 훌륭하게 포착해 극적인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작가는 특유의 역동적인 붓놀림과 풍부한 색채를 사용해 바위와 파도의 질감을 능숙하게 표현하여 장면에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그림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조개껍질을 들고 있는 아이와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조개껍데기로 바닷물을 퍼내고 있는 어린아이를 향해 아우구스티누스가 쓸데없는 일이라고 지적하자, 어린아이는 아우구스티누스를 향해 “성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해하려는 당신보다 더 쓸데없는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르네 마그리트 <이미지의 배반>(1929)



파이프 모양이 그려져 있지만 아래에는 'Ceci n'est pas une mem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마그리트는 이미지가 실제 대상 자체가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우리 이해가 제한적이며 해석의 대상임을 시사합니다. 작품은 우리 인식이 정말 자유로운 것인지, 아니면 언어나 사회적 구조 등 외부 요인에 의해 영향받는 것이 아닌지 질문합니다.


현실에 대한 우리 인식은 주관적이며, 세상에 대한 우리 이해는 편견과 언어 한계로 제약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식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여러 요인에 영향을 받을 수 있기에 자유의지 개념은 환상일 수 있습니다.





니콜라이 게 <진리란 무엇인가?>(1890)



그림에서 본디오 빌라도는 손짓까지 해가며 예수에게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기름진 풍채의 빌라도는 밝은 빛 속에서 세속 논리를 대변합니다. 반면, 메마른 육체의 예수는 그늘진 어둠속에서 정신적 논리를 주장하는 모습입니다. 빌라도는 비웃는 듯하며, 예수는 심각하거나 어두운 표정입니다.


진리는 현실에서 결코 단선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더욱이 드러나 있는 것만이 진리가 아닐 수 있습니다. 진리에 헌신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기득권 유지와 자기 헌신 사이에 갈등은 당시 모든 지식인의 고민이었습니다. 그들은 진정 알고 싶었습니다. ‘진리란 무엇인가?’





에두아르 마네 <발코니>(1869)



사실 우리는 ‘본 것’이 아닌 ‘알고 있는 것’으로 그림을 봅니다. 실외 밝은 빛 아래에서 사물을 보면 입체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실내보다 햇빛 받은 부분이 훨씬 더 밝게 보이며, 심지어 그림자도 꼭 회색이나 검은색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전 르네상스 시기에는 세계가 어떻게 ‘보여져야’ 하는지 원근법과 인체 해부 등 이론적 지식이 중요했습니다. 따라서 마네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일으킨 채색 혁명은 혁명에 비견할만합니다. 우리가 실외에서 자연을 볼 때 각 대상은 고유 색깔을 가진 개별 대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눈에서(실제로는 우리 마음속에서) 뒤섞여 훨씬 더 밝은 색조의 혼합물로 보입니다. 


마네의 <발코니>에 등장하는 인물들 머리는 평면적입니다. 배경 속 여인은 확실한 코도 없이 그려져 있습니다. 사실 야외의 환한 빛 속에서 둥근 형태는 때때로 단순하게 색칠한 평면으로 보입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인간 눈이 놀라운 도구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눈에 적절한 암시를 주기만 하면 눈은 우리가 거기 있을 거라고 알고 있는 전체 형태들을 짜 맞추어 보여줍니다.




윌리엄 블레이크 <태곳적부터 계신 이>(1794)



작품 속 인물은 정교한 캠버스로 천지를 창조하는 ‘태곳적부터 계신 이’, 즉 신 또는 신성한 존재를 의미합니다. 블레이크는 자신 나름의 독특한 신화를 창조했는데, 작품 속 신을 유리즌(Urizen; 이성을 상징)이라 불렀습니다. 블레이크는 이성을 세계 창조자로 생각했으나, 세계를 악한 것으로 생각했기에 그러한 세계 창조자인 이성도 사악한 혼을 지녔다고 생각했습니다.


블레이크는 이성과 합리성이 개인 상상력과 영적 성장을 방해하는 제한적인 힘이라고 보았습니다. 블레이크는 산업 혁명과 같은 당시의 지배적인 시스템을 억압적이고 비인간적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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