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페르니쿠스에게는 당찬 포부가 있었지만 그는 천문학자이자 수학자로 알려져 있었기에 당시 사람들은 그가 자연철학 문제에 나설 자격이 없다고 보았다. 우주론은 자연철학자의 몫이지 천문학자 몫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에 수학과 자연철학은 엄연히 구별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철학의 목표는 물리적 원인의 관점에서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수학은 물리적 원인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으며, 단지 다양한 현상에 대한 특별한 유형의 기술적 설명을 제공할 수 있을 뿐이다. 금성의 대원과 주전원 그리고 이들 원 각각의 운동을 기술하는 기하학은 언제, 어디에서 금성이 하늘에 나타날지는 알아낼 수 있지만, 무엇이 금성을 계속 움직이게 만드는지, 어떻게 주전원 상에 머물 수 있는지, 왜 자신의 고유한 속력으로 움직이는지 또는 실제로 주전원 상에서 움직이는지 여부 등은 전혀 알려주지 못했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 견해에 따를 때 수학은 자연철학 대상이 되기에는 불완전했으며, 스콜라주의에 따르는 대학 전통에서 보더라도 자연철학은 일반적으로 수학적 고려없이 연구되었다. pp. 127-128.



자연이 자신의 법칙을 따르고 매 순간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가정하면, 자유낙하에서 일어나는 과정은 매 순간 동일하다고 확신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으로서, 갈릴레오는 중력으로 인한 가속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단지 어떤 물체가 얻는 속도 증가에 관해 이야기한다. 왜 물체가 빨라지는지 설명하는 대신에 그는 단지 어떤 방식으로 빨라지는지를 기술할 뿐이다. 만약 1초에 어느 정도만큼 빨라진다면 다음 1초에도 동일한 양만큼 빨라질 것이라는 말이다. 갈릴레오는 마치 우리에게 자유낙하에 관한 자연의 법칙을 알려주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중력으로 인한 가속에 관해 말하는 대목에서는 언제나 그 현상을 ‘자연적 가속’이라 일컫는다. 그냥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캐묻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비의적인 냄새가 풍기는 어떤 것도 거부하고 대신에 전적으로 운동 및 운동하는 물체 관점에서 현상을 설명하려는 그의 신도는 다음 세대의 자연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pp. 202-203. 갈릴레오는 하느님이 전지전능한 분으로 어떤 일이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으므로 인간은 자연 본질을 결코 파악할 수 없다고 보았다. pp. 206-207.



이후 뉴턴도 어떻게 중력이 작동하는지 설명할 수 없음을 기꺼이 인정했지만 여러 상이한 조건에서 중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상세하게 보여줄 수 있었다. 심지어 행성 운동의 정밀한 수학적 예측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뉴턴 업적은 기계론적 철학과 비의적 힘[force]의 실재에 대한 믿음을 결합시켜 이루어진 것이다. 비의적(祕儀的, 비밀스러운 종교 의식과 같은) 힘이 실재한다는 믿은 물론 그의 연금술 연구와 더불어 든든하게 자리 잡은 영국의 자연철학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이 전통은 윌리엄 길버트에게서 시작되어 프랜시스 베이컨에 의해 철학적으로 기품 있는 지위에 올랐으며, 왕립협회가 소중히 이어가고 있었다. 이 전통에 따르면 물체는 숨겨진 능력을 지니고 있는데, 비록 기계론적 관점에서 설명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이 능력은 실험에 근거한 연구를 통해 증명될 수 있었다. 따라서 뉴턴 업적은 그가 상상 초월의 천재였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도 밝혔듯이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서양과학사상사>
















“각각의 시대는 저마다 서로 다른 정신 속에서 문화를 꽃피우고 저마다 서로 다른 시대정신은 자신에 고유한 존재 이해를 기초로 한다. 그리고 저마다 서로 다른 존재 이해는 최종적으로 구체적인 사물 개념에 의해 압축된다. 물론 사물을 정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당대의 시대정신과 존재 이해를 표현하는 일이되 서로 경쟁하는 관점들 사이에 패권을 확립하는 과제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철학사를 시대정신의 역사로 보았고 하이데거는 그것을 존재 이해의 역사로 간주했다. 하지만 시대정신의 역사나 존재 이해의 역사는 사물 이해의 역사 속에서 압축되고 재구성될 때야 비로소 실제적인 현장 개입 능력을 획득할 수 있다. 하이데거 용어로 하자면 존재 이해의 역사는 존재자 개념 속에서 첨예회되어야 한다. 사실 동서를 막론하고 사물 개념은 끊임없이 인간 사유를 지배하는 이항대립의 계열 전체를 집약하는 위치에 있다.” pp. 57-58.



“자연이란 말은 아주 옛날부터 있어왔지만, 고대인이 생각하는 자연과 근대인이 생각하는 자연은 동일하지 않다. 동일한 말을 놓고 고대인과 근대인은 완전히 다른 것을 떠올리는 것이다. 이런 변화의 역사적 배경에는 무엇보다 17세기 과학혁명과 그것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한 데카르트적 기획이 자리한다. 그리고 그 변화 내용은 고대 목적론적 자연관이 근대 기계론적 자연관으로 전환되었다는 말로 압축될 수 있다.” pp. 65.



“고대 그리스에서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은 어떤 점을 중심으로 상호 대립하는가? 그 둘을 이항 대립 관계로 만들어주는 핵심 요소는 정확히 운동 성격에 있다. 자연적 사물은 스스로 움직이는 반면, 인공적 사물은 외부의 강제력에 의해 움직인다. 자연적인 것은 그것이 동물이든 식물이든 자기 내부에 있는 힘(형상, 영혼)에 의해 자발적으로 움직이거나 변화해간다. 심지어 광물마저도 생성 변화의 원리를 자기 안에 지닌다는 것이 고대인의 믿음이었다. 반면 사람이 제작한 물건은 자기 안에 자발적인 운동이나 변화 원리를 지니지 않는다. 외부의 강제력이 아니라면 인공적인 것은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타성적이라는 것이 인공물의 본성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자연과 인공 관계를 집악하는 또 하나의 개념은 모방(미메시스)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예의 원천을 자연에 대한 모방으로 정의했다. 이런 모방 관계에서 자연적 사물은 원형에 해당하는 반면 인공적 사물은 그것의 모사에 불과하다. 이것은 원형인 자연적 사물이 모사에 불과한 인공적 사물에 비해 존재론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말한다. 자연적 사물은 존재론적으로 탁월한 어떤 것이자 생동하는 어떤 것이다. 스스로 움직이는 것, 자기 안에 자발적 운동 원리를 지닌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타성적이라는 것은 죽어 있다는 것과 같다. 외부의 강제력으로만 움직이는 인공물은 죽어 있는 것이며 존재론적으로 열등한 지위에 있다.” pp. 66-67.



“고대인에게 자연의 변화는 무엇보다 질료 내부에서 형상이 발생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런 내생적 발생 원인이 작용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작용인은 형상을 스스로 창조하지도, 외부 형상을 질료에 강제하지도 않는다. 다만 질료에 내재하는 가능성에 특정 형상이 수태, 분만하도록 도울 뿐이다. 만든다는 것을 이렇게 돕는다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 아마 이것이 고대 자연관이 남긴 가장 긍정적인 유산인지 모른다. 여기서는 이러저러한 모습으로 사물을 만든다는 것이 폭력의 강요와 거리가 멀다. 그것은 다만 그 안에 숨어 있는 잠재력을 기르고 보살핀다는 것에 가깝다. 이런 작용인 개념은 선(善)의 이념을 전제한다. 돕고 기른다는 것은 완전하게 한다는 것, 더 좋은 상태로 바꾼다는 것이다. 자연이 무엇을 만든다면, 이 때 만든다는 것은 더 좋은 상태로 만든다는 것, 그래서 완전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의 만들기가 자연의 운동이라면, 그 운동은 어떤 좋은 상태, ‘선’을 목적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작용인은 필연적으로 목적인을 전제한다.” pp. 73-74.



아리스토텔레스는 4원인이 가리키는 네 가지 관점에서 자연을 설명할 때야 비로소 완결된 학문적 인식에 도달한다고 보았다. 반면 17세기 과학은 작용인이라는 하나의 원인만을 통해 자연을 설명해야 한다고 봤다. 이런 차이는 주로 물질 개념의 변화에서 온다. 그리고 이런 물질 개념의 변화는 수학이 자연학의 표준 언어로 자리하면서 초래한 결과다. pp. 76-77. 17세기는 중세를 지배하던 아리스토텔레스-스콜라 전통이 파산하고 피타고라스-플라톤 전통이 부활했다. 이 시기 과학을 주도했던 케플러, 갈릴레오, 데카르트는 이 점을 분명히 의식했던 것처럼 보인다. 수학자였던 이들은 자신들이 피타고라스-플라톤 전통의 후예임을 공공연히 선언했다.



어떤 전통에서든 자연학의 과제는 자연의 비밀을 밝히는 데 있다. 하지만 두 전통에서 자연은 서로 다르게 이해되었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스콜라 전통에서 자연이란 살아 있는 듯 움직이는 어떤 유기적인 전체를 말한다. 자연적 사물의 표본은 생물에, 자연학적 탐구의 핵심은 사물이 지닌 질적 특징을 분류하는 데 있다. 반면 피타고라스-플라톤 전통에서 자연은 살아 있는 유기체라기보다는 어떤 영원한 질서의 불완전한 담지자다. 여기서는 자연 자체보다는 자연을 재현할 수 있는 어떤 이상적 평면이 더 중요하다. 사물은 감각적 경험보다는 이성적 통찰이나 추론을 통해 다가서야 할 그 무엇이다. 자연학적 탐구는 사물이 지닌 양적인 특성이나 비례 관계를 측정하는 데 있다. 따라서 수학은 자연학에 필요불가결한 안내자이자 도구일 수밖에 없다.



17세기 과학혁명은 이런 두 전통이 교체되는 사건이다. 질적 분류의 학문이 양적 측정의 학문으로 전환되는 사건, 그것이 과학혁명의 요체를 이룬다. 갈릴레로-데카르트의 수학적 존재론에서 자연적 대상은 수학적 대상과 구별되지 않는다. 자연적인 것이 수학적인 것이 되고 수학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중세를 지배한 아리스토텔레스-스콜라 전통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전제였다. 자연을 살아 있는 유기체로 바라보는 이 전통에서 수학적 대상은 구체성을 결여한 불완전한 대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자연적 사물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 정의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을 형상과 질료의 복합체로 정의했다. 형상은 플라톤 철학에서 이데아라 불렸고 라틴어권에서는 본질로 옮겼다. 형상은 사물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형식에 해당한다. 반면 질료는 형식적 구조에 의해 보호, 조직, 육성되는 어떤 내용과 같다. 동아시아 전통에서도 사물은 이(理)와 기(氣)의 결합체로 간주되었는데, 여기서도 ‘이’는 사물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형이상학적 요소에 해당한다. 그리고 ‘기’는 사물의 질료적 바탕을 이루는 형이하학적 요소와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을 제대로 안다는 것이 형상과 질료 모두를 아는 것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스콜라 전통에서 안다는 것은 사물의 질적 특질을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나 중세 과학에서는 따뜻함과 차가움, 무거움과 가벼움 같은 질적 성질이 사물의 본성을 이루는 핵심 요소였다. 이런 사물 이해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기하학 도형 같은 수학적 대상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질료가 없는 순수 형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며 질적 성질이 없는 순수 양적 성질만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학적 대상은 자연적 대상에 비해 반쪽짜리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수학적 대상을 구체성을 결여한 추상적 대상, 빈곤한 대상으로 간주했다. 온전한 자연적 사물에 비할 때는 한없이 불완전한 대상이고, 따라서 자연학적 탐구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대나 중세의 자연학 책에 숫자나 도형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이런 데 있다.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수학과 자연학은 서로 무관한 학문으로서 서로 다른 진화 과정을 밟아왔다. 하지만 근대 과학혁명의 요체는 수학과 자연학이 분리 불가능한 관계로 통합되는 데 있다. 이런 통합 속에서 어떤 역전이 일어난다. 그것은 수학적 대상이 불완전한 대상에서 완전한 대상으로, 빈곤한 사물에서 이상적 사물로 뒤바뀌는 역전이다.



근대 과학혁명은 일종의 언어혁명이었다. 전근대 과학의 언어는 일상어였다. 반면 근대 과학의 언어는 수학이다. 과학혁명은 일상 언어에 기초한 자연학이 형식적 언어에 기초한 수리자연학으로 탈바꿈되는 사건이자 수학이 자연의 존재론적 문법으로 심화되는 사건이다. 이것이 ‘자연은 수학의 언어로 기록된 책’이라는 갈릴레오 언명이 담고 있는 의미다. 이제 수학은 자연학의 유일한 언어일 뿐만 아니라 자연 그 자체의 언어로 간주된다. 수리자연학 등장 이후 수학적 대상은 자연적 사물의 모델로, 따라서 과학적 대상 자체로 승격된다.” <근대적 세계관의 형성>









뉴턴은 <광학> 제1권의 2부에서 스팩트럼의 색깔들은 마치 한 옥타브 내의 일곱 음정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비율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뉴턴은 심지어 도표까지 제시했다. 따라서 흰빛은 함께 ‘소리 나는’ 다른 색깔들이 전부 모인 하나의 영광스러운 화음인 것이다. 1670년에서 1672년까지 케임브리지 학생들에게 행한 광학 강의에서 뉴턴은 스팩트럼은 다섯 가지 색깔만 구별할 수 있지만, ‘스팩트럼 영상을 더 아르다운 비율을 지닌 부분들로 나누기 위해’ 의도적으로 남색과 주황색을 보탰다고 털어놓았다. 베이컨이라면 절대 허용하지 않았을 일이다.

흥미롭게도 오늘날 우리는 무지개가 일곱 가지 색이라고 믿는다. 뉴턴이 피타고라스식의 자연마법 전통인 구의 음악을 맹목적으로 믿었던 영향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셈이다. 무지개가 뜰 때 우리는 아무리 살펴도 결코 일곱 가지 색깔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뉴턴도 일곱 색깔을 볼 수 없었지만 피타고라스식 집착에 들어맞게끔 일곱 가지 색깔이 필요했다. 이후에는 뉴턴 권위 때문에 줄곧 그렇게 여겨졌다. 위대한 과학자가 한 말이니 우리 눈에는 다섯 색깔, 기껏해야 여섯 색깔밖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일곱 가지 색깔이려니 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사실 우리가 무지개의 일곱 가지 색을 믿게 된 까닭은 뉴턴이 생애 후반에 피타고라스식 자연마법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이렇게 적었다. ‘뉴턴은 이성의 시대의 첫 인물이 아니다. 그는 마지막 마법사이자 마법사들로부터 진심 어린 존경을 받아 합당한 마지막 신동이었다.’ pp. 267-268.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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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과학사상사 - 플라톤에서 아인슈타인까지, 인류사를 움직인 탐구정신의 향연
존 헨리 지음, 노태복 옮김 / 책과함께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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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데카르트는 당시 사람들에게 그처럼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을까? 르네상스 시대 아리스토텔레스를 대신할 고대 플라톤 사상이 재발견 이후로 ‘유럽 사상의 위기’라는 인식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더 이상 진리의 계시자가 아님이 분명했는데, 지리학(서양 반대편에도 사람이 산다는 사실)과 천문학(천체의 변화, 달의 산 등)의 새로운 발견들이 이를 확인시켜주었다. 유럽 전역의 많은 학식 있는 사람들이 혼란과 좌절에 빠졌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독자들에게 폰티우스(성경에서는 본디오 빌라도라고 나오는 인물)가 ‘진리란 무엇인가?’라고 물었음을 상기시켰지만, 더 나아가 ‘그가 답을 내놓지는 못했다’는 점도 말했다. 17세기에도 사정은 같았다. 사람들은 무엇이 참인지를 아무도 알려줄 수 없으니 기다려보았자 답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회의주의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회의주의로 향하는 이런 경향은 르네상스 학자들이 회의주의가 고대인들에게도 유행했음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더 심해졌다. 실제로 일부 고대의 회의주자들은 어떤 지식도 얻을 수 없다는 데까지 나아갔다. 다른 회의주의자들은 덜 허무주의적인 노선을 취해 현재의 지식 수준에서는 어떤 확고한 결론을 내리기에는 정보나 증거가 모자라기에 더 많은 증거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여겼다. 그 결과 유럽 전역에 걸쳐 절망에 빠지거나 기존에 확립된 지식에 반대하는 심술 맞은 학자들은 회의주의로 돌아섰다. 옥스퍼드에서부터 파도바까지 탄식이 만연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뿐이다.’ 그리고 웁살라에서 나폴리까지 이런 절규가 울려 퍼졌다. ‘오직 한 가지는 확실하다.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선구적인 세속 사상가들이 위기를 느낀 결과 생겨난 회의주의가 새로운 위기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이런 회의주의적 비난을 모든 신조와 사상에 적용하기 시작하면 기독교가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시작된 후 곧이어 칼뱅주의 같은 경쟁적인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성립으로 이어진 새로운 종교적 다원주의는 회의주의를 촉진시켰다. 한때는 오직 가톨릭교회만이 있었지만, 이제는 다른 대안들이 많아졌다. 그렇다면 진리는 어디에 있는가?



그 무렵 유럽의 지적 문화에서 무신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중세에는 무신론 기미가 전혀 없었지만(이단이 있을망정 무신론은 없었다), 르네상스 후기에 이르면 무신론이 처음으로 정통 사상가들에게 공격을 받을 정도로 표면화되었다(‘무신론’이라는 용어도 이때 처음 만들어졌다). 역사 기록에서 무신론자들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 매우 은밀하고 비밀스러웠다 – 정통 사상가들이 무신론을 공격한 것을 보면 당대에 무신론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신자들에게 회의주의는 가장 큰 공공의 적이 되었다. 아무것도 확실하거나 신뢰할 수 없다는 사상을 골자로 하는 철학의 추종자들에게 어떻게 어떤 주장이 유효하다거나 어떤 결론이 참이라고 설득시키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명백히 옳은 하나의 주장을 찾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런 주장을 내놓을 수 있다면 회의주의자들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을 테고, 그렇다면 이와 마찬가지로 부정하 수 없는 다른 주장들로 그말을 계속 설득할 수 있을지 모른다.



데카르트가 첫 출간물인 <방법서설>을 내놓으며 목표로 한 일이 그런 것이었다. 데카르트의 가장 유명한 주장이자 아마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철학적 주장인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코기토 에르소 슘)’는 그 자신, 즉 데카르트가 존재함을 증명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요점은 이것이 어떤 회의주의자도 부정할 수 없는 주장이라는 데 있다. 가장 반항적이고 허무주의적인 회의주의자라고 해도 반박할 수 없었다.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순간 데카르트가 이긴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부터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데카르트는 다음 단계로서, 우리가 마음속에 완전성에 관한 개념을 갖고 있음을 지적했다. 하지만 이 개념은 어디서 왔는가? 우리 자신에게 왔을 리는 없는데, 어느 누구도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경험으로 추상화시킨 것일 리도 없는데, 우리 경험에서 완전한 것을 실제로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는 완전한 것을 보 적도 완전한 맛을 느낀 적도 없다. 완전성에 관한 개녕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떤 완전한 존재가 그것을 우리 마음에 심어놓았음이 틀림없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데카르트는 논쟁적인 주장 하나를 내놓는다. 이 완전한 존재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현실을 직시해보자. 실제로 존재하는 빠른 차는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훨씬 더 빠르다고 짐작되는 차보다 더 낫다. 내가 여러분에게 포르셰 한 대를 선물하면서, ‘이것 말고 모든 면에서 포르셰보다 월등한 상상의 어떤 차를 가질 수도 있다’라고 말하며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킨다면, 여러분은 당연히 포르셰를 갖겠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따라서 데카르트가 주장하듯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소한 문제를 예외로 하고서 이 존재가 지극히 완전하다는 말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존재는 완전하지 않은 것이다.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 더 월등하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런 발상은 완전한 존재에 관해 타당한 생각이 아니다. 여러분도 완전한 존재에 관해 타당하게 생각해보면, 데카르트가 주장하고 싶어하듯이, 그 존재는 반드시 실제로 존재함을 알게 될 것이다. pp. 226-230.



데카르트가 보기에 동물은 영혼, 즉 그들을 움직이게 만들 수 있는 생명 원리가 없다. 동물은 단지 복잡한 기계일 뿐이다. 그는 시계를 포함한 자동장치들도 스스로 움직일 수 있지만 영혼이 없음을 지적하면서, 동물의 자율 운동이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증거라고 본 아리스토텔레스 견해를 거부했다. 그럼에도 데카르트는 여전히 인간은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 인간 영혼의 주 기능은 생각하는 것이다. 영혼은 이성의 자리다. 하지만 우리는 (단지 본능적으로 세계에 반응할 뿐인 동물과 달리) 자유의지가 있기에 우리 영혼은 몸으로 하여금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레스 코그니탄스(사유하는 영혼)와 레스 엑스텐사(연장된 물질계)의 구별은 많은 사상가가 보기에 너무 막연했다. 어떻게 비물질적인 사유적 실체가 물질적인 실체를 움직이게 할 수 있는가? 비물질적 영혼은 살로 된 죽은 몸을 밀쳐서 움직이게 만들 수 없다. 유령처럼 단지 어떤 물체에 닿으면 통과할 뿐이다. 데카르트로서는 애석하게도 그를 따르는 많은 추종자는 인간 영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는 쪽을 택했다. 우리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기계라는 것이다. 자유의지는 환상일 뿐이며 우리 모두 본능에 따라 반응할 뿐이다. 추종자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신은 세계를 창조하여 이런저런 모든 것을 움직이도록 했다. 하지만 그 후로 신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신은 자연법칙을 세계에 부여하였고, 모든 것은 더 이상 신의 도움 없이도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면 이 세계 및 그 자연법칙들은 늘 존재했으며 신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쉽게 가정할 수 있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체계는 회의주의와 무신론을 물리치기 위해 ‘코키토’ 논증 및 신의 존재 여부에 관한 존재론적 증명을 활용하여 마련되었지만, 거꾸로 무신론자들은 이를 도용하여 신과 영혼이 배제된, 전적으로 기계적인 체제로 바꾸어 버렸다. 지금은 번성하는 데카르트의 이러한 유산 덕분에, 세속화된 세계에 사는 우리 대다수는 기계론적 세계관을 믿고 있다.” pp. 24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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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과학사상사 - 플라톤에서 아인슈타인까지, 인류사를 움직인 탐구정신의 향연
존 헨리 지음, 노태복 옮김 / 책과함께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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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페르니쿠스 덕분에 ‘태양은 사라지고, 지구든 어떤 이의 지혜든 어디에서 그것을 찾아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는 단지 천문학적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가치관을 이루는 바탕이 ‘모두 조각 나고 일관성이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이런 태도는 르네상스 이후의 회의주의를 부채질했다. 이와 달리 뉴턴 업적은 낙관주의를 고취했다. 당시에는 뉴턴 방법을 과학 뿐 아니라 도덕철학, 정치 그리고 경제에도 적용하여 사회가 과학적 노선에 따라 운영될 수도 있다는 믿음이 퍼져 있었다. 사람들은 뉴턴이 <광학> 말미에 쓴 다음 구절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만약 자연철학의 모든 분야가 이 방법을 추구하여 마침내 완벽해진다면 도덕철학의 경계 또한 확장될 것이다.’ pp. 274-275.



특히 18세기 영국에서 이른바 ‘악의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그런 점이 명백히 드러났다. 세상에는 왜 고통이 존재하는가라는 문제였다. 만약 신이 선하고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어째서 신은 이토록 큰 고통을 허용했는가? 왜 신은 고통이 없는 완전한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는가? 초대 교부 시절부터 이 문제를 풀 흔한 해법은 단지 우리는 신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즉 “신은 불가사의 한 방식으로 경이로운 일들을 행하신다.”



하지만 이런 식의 설명은 18세기 사상가들처럼 신이 이성적 계획에 따라 세상을 만들었고 신의 계획을 뉴턴이 이성을 사용하여 발견해냈다고 가정하는 한 허용될 수 없다. 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은 이런 가정과 양립할 수 없을 터이다. 뉴턴의 발견 그리고 이 발견 위에 세워진 자연신학의 전반적인 요점은 뉴턴이 실제로 신의 마음을 헤아렸으며, 그것을 수학적 증명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18세기 사상가들은 악의 문제에 답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했다. 이들 추론은 다음과 같았다.



. 신은 지극히 그리고 완전히 선하다. 정의상 신은 악을 행할 수 없다.

. 신은 뉴턴이 밝힌 대로 이성, 논리, 수학 등의 법칙에 따라 우주를 창조했다.

. 이 두 가정은 서로 상반될 수 없다. 만약 상반된다면 신은 전능하기에 이를 미리 알았을 것이며, 신의 선함으로 인해 이성에 따라 세계를 창조하기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 게다가 만약 이성의 법칙으로 인해 신이 하나보다 더 많은 종류의 세계를 만들 수 있었다면, 신은 선한 존재이기에 모든 가능한 세계 가운데 가장 최상의 세계를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 따라서 이 세계는 모든 가능한 세계 중에서 최상이다.



보수적인 영국 사상가 대다수에게 정치적으로 중요한 점은 만약 이 세계가 가능한 모든 세계 가운데서 최상이라면 이 세계를 변화시킬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 세계의 모든 악과 고통은 신의 계획의 일부이기에 전체 체계에 어떻게든 이득임이 틀림없다. pp. 322-324.



신이 운동 법칙으로 물리적 세계를 창조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스스로 작동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신은 인간 세계를 (인력이나 척력이라는 자연법칙과 유사한) 사회적 상호작용 법칙으로 창조하였고 이 법칙에 따라 가장 조화로운 사회 질서가 마련되었다.



이 모든 사상의 최종적인 결과는 자유방임이라는 근본 원리에 바탕을 둔 사회정치 철학이었다. 이는 비간섭 원리로서, 세상의 체제는 자율적이기에 더 낫게 하려고 시도해보았자 더 나빠질, 어쩌면 심각하게 나빠질 뿐이므로 그대로 놔두라는 권고다.



당시 자유방임적 ‘정치경제학’의 중요한 텍스트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핵심 인물이었던 애덤 스미스가 쓴 <국부론>이었다. 이 책에 따르면, 가장 번영한 사회는 (자기애를 추구하고 이성에 의해 조절되는) 개인들의 자유로운 활동에서 비롯되며, 국가 개입은 부자연스럽기에 사회에 불화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스미스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세상을 그대로 놔두는 것이다. 인간 사회가 (신이 창조한) 뉴턴의 우주처럼 원만히 작동되도록 신은 인간 본성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주장하기를, 사회의 작동 원리에서는 개인 이익 추구 원리와 더불어 수요와 공급의 경제법칙이 만유인력과 운동의 법칙에 해당한다고 했다. 그 결과 정치철학과 경제학에서 자유방임주의 이론들이 생겨났다. 정치경제학 법칙들이 – 자연의 법칙과 똑같이 – 신에 의해 확립된 이상 그 법칙들로부터 나온 것은 모두 틀림없이 좋은 것이라고 가정했기에(알렉산더 포프는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옳다’라고 말한 것처럼), 스미스와 후대 정치경제학자들은 이 법칙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노선, 따라서 최소한의 정치적 개입을 옹호했다. 자유방임주의는 바로 그런 의미였다.



이런 정치경제학 전통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 중 한 명은 과학사의 관점에서 보건대 영국 국교회 성직자 토머스 맬서스다. 맬서는 1798년 <인구론>을 출간했다. 이 책은 당시 엘리자베스 구빈법을 개혁하려던 윌리엄 피트 총리에게 그 계획을 중단하라고 쓴 일종의 경고장이었다. 그 무렵 아일랜드에 닥친 기근으로 아일랜드인들이 일자리를 찾아 영국으로 건너왔는데 말 그대로 거리에서 죽어가는 상황이었다. 영국의 빈민 구제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권좌에 있던 시기(1558~1603)에 도입된 법률에 따라 교구 신도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적용되었기에 교구 신도로 인정받지 못한 이주민은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피트는 구빈법을 개혁하여 이런 상황을 바꾸고자 했다.



하지만 맬서스는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2, 4, 8, 16, 32…) 식량은 고작해야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2, 4, 6, 8, 10…)고 주장했다. 맬서스는 식량 확보의 어려움 때문에 인구를 적당한 선에서 유지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결론 내렸다. 새로운 구빈법은 더 많은 사람이 생존하고 번식하게 함으로써 자연의 균형을 어지럽힐 터였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 수가 더 증가하게 되어 새로운 구빈법으로 조달될 자원으로도 대처할 수 없게 되면 현재보다 더 많은 고통과 죽음이 뒤따를 것이다. 맬서스는 이렇게 썼다. ‘자연의 보편적 법칙으로서 인간은 어떤 이성적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식량 부족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보기에서 애덤 스미스와 토머스 맬서스의 이런 모든 견해들은 특정 사회 계급에 이바지하는 착취적인 자본가와 자유방임적 정치경제학을 정당화하는 냉소적인 입장인 듯하다. 확실히 런던에 살던 카를 마르크스도 그렇게 보았다. 그가 보기에 이런 사고방식은 노동 계급에 반하는 부르주아의 음모였기에 그는 하층 계급의 사람들에게 부르주아에 맞서 봉기하라고 촉구했다.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썼듯이, 프롤레타리아는 속박 외에는 잃을 것이 없다.



하지만 물론 스미스나 맬서스는 자신을 프롤레타리아에 맞서는 음모 세력으로 보지 않았다. 자유방임적 정치경제학이 뉴턴의 물리학 체계에 대응하는 사회정치적 체계라고 진심으로 믿었을 뿐이다. 뉴턴이 물리계의 객관적 진리를 발견한 바로 그 방식으로, 그들은 사회를 원만하게 작동시키는 자연법칙을 발견했다고 여겼다. 자신이 주관적 도덕 및 정치 체계를 부과한 것이 아니라 신에 의해 확립되고 객관적 도덕과 정치적 법률로 유지되는 정치 체계를 밝혀냈다고 믿은 것이다.



찰스 다윈은 맬서스에 영향을 받았다. 그가 남긴 글을 보자. ‘1838년 10월, 체계적인 조사를 시작한 지 15개월 만에 나는 재미 삼아 우연히 맬서스의 <인구론>을 읽은 데다 장기간에 걸친 동식물 관찰을 통해 어디에서나 벌어지는 ‘생존 경쟁’을 이해할 바탕이 마련되어 있던 터라, 이런 상황에 유리한 종은 살아남고 불리한 종은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런 과정의 결과 새로운 종이 생길 터이다. 드디어 내 연구의 바탕이 될 이론을 얻었다.’



따라서 다윈의 자연선택과 적자생존 원리에 직접적인 영감을 준 것은, 삼라만상은 모든 가능한 세계 중에서 최상의 상태로 존재하며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자연’이 신의 뜻 일부라고 보는 자연신학 전통이었다. 이 사상이 뉴턴에게서 직접 나왔다고 할 수는 없지만, 분명이 사상을 발전시킨 사람들은 자신을 뉴턴주의자라고, 즉 뉴턴주의 사상을 정치경제학 분야에 발전시켰다고 여겼다. 또 한 가지 언급할 점으로, 자연적인 경제에 관한 이런 사고방식은 무신론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독실한 사람들, 심지어는 성직자들이 발전시켰다. pp. 326-330



기독교는 체계적인 신학의 필요성을 인식했다는 점에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여기는 다른 유일신 종교들과 뚜렷이 구별되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는 신의 속성에 관해 조사하고 탐구하는 일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부적절한 행위로 간주되었다.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여기는 이 두 종교의 신앙에서 제기되는 질문은 대부분 율법 문제였다. 예를 들어 이런 질문이다. 신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또는 주어진 환경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기를 기대하는가?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초월적인 신의 개념을 한편에 두고, 신이면서 인간으로 온 예수 그리스도 개념을 다른 편에 두고서 이 둘을 조화시킬 필요 때문에, 완전히 상이한 질문들이 제기되었다. 이 질문들은 신의 속성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신성모독 여부와 무관하게 기독교인이라면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하나이면서 셋(성부와 성자, 성신)인 신에 대한 기독교 신앙은 많은 이들에게 비합리적으로(또는 유일신 사상과 양립할 수 없다고) 비쳤는데, 이것은 어떻게 신이 초월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인간일 수 있는지에 관한 철학적 논의에서 등장한 문제의식이다. 그렇다 보니 당연히 체계적 신학이 기독교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게다가 신과 인간 관계의 속성 그리고 우리 관점으로는 더 중요하게도 신과 세계 관계를 논하지 않고서 신의 속성을 논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점이 곧 분명해졌다. 이런 까닭에 자연철학은 중세 기독교 신학의 긴밀한 동반자이자 시녀가 되었으며, 대학에서도 정규 과목으로 자리 잡았고 아울러 고급 학문을 갈망하는 사람이라면 필수적으로 먼저 공부해야 하는 과목이 되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는 물질계의 속성에 대한 질문은 그 문화에 별반 중요하지 않다고 보아 언제나 배제할 수 있었지만 기독교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단지 신의 명령만이 아니라 신의 속성에 관한 것이었으며, 신의 속성은 피조물, 즉 물질계와 신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논의될 수 없었다.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이면서 인간으로 온 예수를 숭배하는 독특한 상황이기에 체계적인 신학을 발전시켜야 했으며, 그 결과 물질계 속성이 신의 속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된다고 여기게 되었다.



과학과 종교는 오늘날 범주상 뚜렷이 구별되는 영역으로 여겨지며, 각각은 서로 조화될 수 없는 자신만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둘 사이 양립할 수 없는 차이를 강조하는 책들은 완전히 세속적인 이 세계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그런 책의 저자들은 과학과 종교가 서로에게 해가 된다는 세속 사회의 지배적인 관점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로 보자면, 만약 선구적인 중세 사상가들(이들은 모두 신학자였다)이 과학을 기독교 신학에 부수적으로 꼭 필요한 것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면 서양 과학의 줄기찬 발전은 십중팔구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pp 9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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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사상가들의 가정에 따르면 완전한 지식은 과거에 속한다. 최초 인간인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담의 지혜는 이브와 함께 금단의 열매를 먹고 낙원에서 쫓겨난 후 차츰 잊혔다. 따라서 중세 사상가들은 진보에 대한 의식이 없었으며, 지식이란 과거 사람들이 알았던 것을 찾아내어 복구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앞선 시기 사상가일수록 아담과 더 가깝기에 아담 지혜를 더 많이 기억할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므로 중세 사상가들은 스스로 새로운 지식을 발견할 수 있다고 여기지 않고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과거 사상가들을 연구했다.”<서양과학사상사>
















"1750년대에는 종교와 무관하게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싹텄다. 예를 들어 사회적 변화를 생존 양식에 따라 수렵, 목축, 농경, 상업으로 구분하는 이른바 ‘네 단계 이론’도 이때 생겨났다. 이 이론은 허점이 많았으나 그리스도교와 별개로 역사적 단계를 구분한다는 관념은 탐험의 시대에 발견된 극히 다양한 세계를 설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어 큰 인기를 끌었다. 이리하여 진보 관념이 각광을 받았다.



프란시스 베이컨도 진보 관념을 믿었다. ‘세계는 점점 나이를 먹어가므로 지난 시대는 언제나 고대다. 지금 우리 시대도 지나고 나면 곧 고대가 된다.’ 그는 어른이 아이보다 더 현명하듯 후대 사람들은 과거보다 더 많은 지식을 축적한다고 보았다. 데카르트 역시 과학 발견에 힘입어 인간 건강이 ‘향상’된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17세기 후반 영국에서는 고대 사상과 현대 사상 중 어느 것이 더 나은가를 놓고 유명한 논쟁이 벌어졌다. 조너선 스위프트는 <책들의 싸움>에서 고대인의 우월함을 지지했다.



18세기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드 퐁트넬은 <고대인과 근대인에 관한 논쟁>에서 다섯 가지 놀랄 만한 근대적인 결론을 내린다. (1) 생물학적 견지에서 볼 때 고대인과 근대인은 차이가 없다. (2) 고학과 산업은 서로 의존적이므로 ‘진보는 누적적이다.’ 즉 근대인은 고대인을 능가한다. (3) 그렇다고 근대인이 고대인보다 더 똑똑한 것은 아니다. 단지 과거의 것, 축적된 지식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리할 뿐이다. (4) 시, 수사학, 예술에서 두 시대 차이는 없다. (5) 고대인에 대한 ‘비합리적 존경’은 진보에 걸림돌이 된다.



개성이 크게 발달하고, 예술이 활발하고, 소설이 성장하고, 인간이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 많아졌는데도 인간의 자기 이해가 역사적으로 가장 큰 지적 실패이며 가장 성공하지 못한 탐구 분야라는 것은 놀라운 결론이다. 하지만 수세기 동안 진행된 ‘내면 지향’이 보여주듯 그 실패는 명백한 사실이다. 이 ‘내면 지향’에 관한 지식은 과학처럼 누적되지 못한다. 그저 옛 것이 무너지고 새 것이 등장해 서로 대체될 따름이다. 플라톤은 우리를 오도했고 화이트헤드는 틀렸다. 생각의 역사에서 큰 성공을 거둔 것은 플라톤이 아니라 주로 아리스토텔레스 유산이다. 이 점은 무엇보다도 르네상스보다 초기 근대를 더 중요한 역사적 이행기로 보는 최근 역사 편찬의 양태로 확인된다. 서던이 말하듯 아리스토텔레스가 재발견된 1050~1250년 시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환기였고 근대로 이어지는 고리였다. 그것은 2세기 뒤에 일어난 (플라톤의) 르네상스보다 훨씬 중요한 시기였다.



근년 들어 의식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졌어도, 또 자연과학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길을 제시했어도 자아는 여전히 정체가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과학은 ‘저기 바깥’ 세계에 관해서는 엄청난 성과를 올렸으나 우리의 가장 큰 관심거리인 우리 자신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준 게 없다. 자아가 모종의 두뇌 활동 – 전자나 원소의 활동일 수도 있다 –에서 비롯된다는 견해가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의식이나 자아에 관해 설명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는 결론은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과학자들이 의지할 마지막 관념을 보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먼 과거와 가까운 과거에서 모두 성공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제 플라톤적 관념인 ‘내적 자아’가 오류일 가능성 – 혹은 개연성 –을 직시해야 할 때가 아닐까? 내적 자아란 없다. 아무리 ‘안’을 들여다봐도 볼 것은 없다. 안정된 것도, 지속적인 것도, 우리 모두가 동의할 만한 것도, 결론적인 것도 없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므로 우리의 ‘내적’ 본성과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바깥, 즉 동물로서의 역할과 위치를 보는 편이 더 낫다. 존 그레이가 말했듯 ‘인간 세계를 바라보기 위한 좋은 창문은 수도원보다 동물원이다.’ 이 말은 역설이 아니다. 관점을 재조정하지 않는다면 현대의 모순은 영원히 지속될지도 모른다."<생각의 역사 1>















“인간이 진보를 이룩해 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인간은 마술과 의례에서 이성과 논리로, 경이로운 초자연에서 도구적 확신으로, 부분화된 무지에서 일반화된 지식으로, 신념에서 과학으로, 생존에서 안락으로, 질병에서 건강으로, 신비주의에서 유물론으로, 기계론적 결정에서 낙관주의적 확실성으로 전진해 갔다. 인간은 자신이 이룩할 수 있는 최선의 세계인 인간 등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살고 있다. 오늘날 우리 각자는 과거 로마의 어떤 황제보다도 더 큰 힘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에게 그 힘을 선사한 이들이 바로 과학자들이고, 오늘날 그들 수는 인류 역사 전체를 통해 배출된 과학자 수보다 훨씬 많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인류는 재난이나 일시적인 방해물을 만나기야 하겠지만, 과학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궁극적 진리로 더 가까이 접근해 갈 것이고, 그에 따라 우리 앞에 놓인 길은 더 큰 발전과 진보를 향한 길이 될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지난 수세기 이룩한 이러한 지식 축적의 원동력, 즉 과학은 일견 인간 활동 가운데 매우 독특한 것처럼 보인다. 과학은 객관적이다. 그것은 공정하고 객관적인 탐구방법과 증거에 기초한다. 과학자들은 이론을 세우고, 실험을 통해 검증한다. 같은 결과가 반복적으로 나오고 방법상 어떠한 오류도 없으면 그 이론은 살아남는다. 이 규칙은 엄격하게 적용된다. 과학이 자신 작업을 평가하는 기준에는 보편성이 있다. 결과가 반복적이고 어떤 방법에 의해서도 오류가 없다면 이론은 살아남았다. 진리를 찾는 데는 특별한 변명거리가 필요치 않다.

 

 

과학적 탐구의 논리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건 필연성에 기초한 합리적인 것이다. 과학의 이러한 특징은 다른 분야에서라면 한 시기를 다른 시기와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들거나, 어떤 문화적 표현을 다른 맥락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과는 완전히 차원을 달리한다. 과학은 맥락상 한계를 갖고 있지 않다. 과학은 단지 진리를 찾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어떤 진리를 말하는 것인가? 같은 진리일지라도 시대에 따라 달라 보였다. 물체를 인식하는 것은 눈이 아니라 뇌다. 신호 패턴은 뉴런 활성화시키는데, 각 뉴런은 제각기 특정한 신호를 인식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실재는 경험되기 이전에 이미 뇌 안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신호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 것이다.

 

 

뇌는 무질서한 신호를 분류하고 재배열하고, 거부함으로써 시각적 질서를 부여한다. 실재는 뇌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 다른 감각의 경우에도 기초적인 메커니즘은 동일하다. 경험에 이러한 전제를 부과하는 것이 착시를 일으키는 원인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매우 복잡한 수준의 모든 지각 형태가 수정된다. 한 번 더 비트겐슈타인을 인용하자면 ‘당신은 보고자 하는 것만 보는 것’이다.”<우주가 바뀌던 날 그들은 무엇을 했나>
















"과거 나는 ‘진보’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라다크는 내게 미래를 향하는 길이 꼭 하나가 아니라는 확신과 함께 커다란 힘과 희망을 주었다. 이전 나는 내가 보았던 여러 부정적 현상이 우리 영향력 밖에 있는 자연적 혹은 진화적 요인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속한 산업문화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 했다. 그런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나는 그저 인류는 본질적으로 이기적 심성을 갖고 있어 생존을 위한 경쟁은 당연하며, 서로 돕는 사회는 유토피아적 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가치관, 역사에 대한 이해, 사고유형 모두 산업사회형 인간의 세계관을 반영할 뿐이다. 애덤 스미스에서 프로이트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구출신 주류 사상가는 자신이 속한 서구와 산업사회 경험을 보편화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들은 명시적으로나 암시적으로 자신이 설명하는 특성이 산업문화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 본성을 표상한다고 전제한다. 서구 문화 영향력이 유럽과 북미 대륙에서 세계 전역으로 본격적으로 확산되면서 서구문화 경험을 일반화하려는 경향은 거의 필연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대부분 서양인은 무지와 질병, 끝없는 노역이 미개발 사회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개발도상국 사회에 나타나는 빈곤과 질병, 굶주림은 그러한 가정이 입증된 사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오늘날 제3세계 국가가 겪는 많은 사회문제는 주로 식민주의와 잘못된 개발의 결과물이다. 최근 국제부흥개발은행의 한 연구에 따르면 자유무역 시행을 통해 고도로 전문화된 경제구조를 가진 나라는 그렇지 않은 나라에 비해 내전 강도가 대략 스무 배나 높다고 한다.

 

 

정반대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가로막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 사회 사고방식은 ‘인간 본성은 근본적으로 공격적이며 진화론적 투쟁 논리에 갇혀 있다’는 가정에서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 하고 있다. 사회의 구성 방법과 관련하여 이러한 시각이 내포하는 의미는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선과 악의 내재성을 믿건 안 믿건 인간 본성에 관한 우리 전제는 모든 정치적 이념의 기초가 되며, 결국 우리 삶을 지배하는 제도를 형성한다.

 

 

라다크에서 ‘진보’라 것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대지와 분리되고 이웃과도 분리되고 결국 자신에게서도 분리되는 모습을 나는 지켜보았다. 그렇게 행복하게 살던 사람들이 서구 규범을 따르기 시작하면서 오랫동안 유지해온 평온함을 잃게 된 것이다. 그런 모습에 나는 문화라는 것은 개인 특성을 형성하는 데 있어 예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오래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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