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리야는 소비 물건이 분류의 체계를 이루며 행동을 구조화하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한다. 광고는 한 상품을 다른 상품과 구별하는 상징을 통해 상품을 코드화하고, 그럼으로써 이를 일련의 배열에 끼워 맞춘다. (그 대상(object)은 개별 소비자에게 그 의미를 전달함으로써 소비될 때 진가를 발휘한다.) 이리하여 잠재적으로 무한히 반복될 기호작용이 제도화되어 사회를 규제하게 되며, 동시에 개인에게 자유에 대한 환영적인 감각을 심어준다. 



소비대상은 욕망을 무한히 자극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부유하는 기표들의 연계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사실, 상품을 단순히 인간적 욕구의 고정적 체계와 연관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지닌 효용물이라고 보는 방식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드리야르, 특히 그의 상품=기호의 이론화가 매우 중시된다. 그는 이제 상품이 소쉬르적인 의미에서 체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임의로 결정된다. 그렇다면 소비는 사용가치의 소비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기호의 소비로 이해되어야 한다.



보드리야르는 개인이 대상을 통해 질서체계에서 그 위치를 찾는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상품의 기능은 개인의 욕구를 채워주는 것일 뿐 아니라 개인을 사회 질서와 연계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소비는 생산에서 시작된 경제적 연쇄의 종착점일 뿐 아니라 교환체계이며 언어이기도 하다. 언어 상에서 볼 때 상품은 개인에 선행하는 기호체계에서 생각되는 물품인 셈이다. 보드리야르에게 있어서 자기 충족적인 개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사회체계, 특히 언어나 재화, 혈연과 같은 것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사회질서에 차별적으로 연결시키고, 그럼으로써 개인에 대한 감각을 구성할 따름이다.



보드리야르는 우리가 속해 있는 세계에서 정보는 점점 많아지고 의미는 점점 적어져 간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 사회처럼 정보의 과부하로 고통받는 사회에서는 의미를 거부하는 것만이 저항의 유일한 방식이라고 제안한다. 우리는 인생 매 순간마다 정보로 넘쳐나는 이미지들에 의해 그야말로 폭격을 당하고 있다. 이에 대처할 유일한 방법, 우리 인생을 점령해 버릴 정보의 힘에 저항할 유일한 방법은 이러한 이미지들을 오직 기표나 표면으로만 받아들이고 그 의미와 기의는 거부하는 것이다.



텔레비전 뉴스를 생각해 보자. 그것은 단순히 시청자들이 경험하게 되는 표면적인 이미지들, 기표들의 연속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전날 저녁 뉴스를 기억하지 못한다. 거기에는 기억할 것이 없고 오직 이미지와 기표들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뉴스는 파편화된 이미지들의 콜라주다. 개개 이미지는 더 많은 것을 낳고 더 많은 것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원본이 없는 완벽한 복제품, 즉 시뮬라크르이다. 뉴스는 이미지에 대한 이미지의 이미지인 바, 최종적인 하이퍼리얼리티인 셈이다."









니체는 미래에 희망을 거는 어떠한 믿음도 반대했다. 니체는 절대적 진보, 즉 역사나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계획이나 목적을 거부했다. 경험적 사실들에 비추어 보아도 역사가 진보한다는 신념은 오류다. 니체는 "인류의 최종 목표는 인류 최고의 바람직한 모습에 있을 뿐 시간의 마지막 순간에 있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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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3-07-25 2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비의 시대 속에서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얻으려는 것이 아닌, 광고와 홍보로 만들어낸 수많은 이미지의 변주를 남들과 달라보이지 않기 위해 쇼핑하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북다이제스터 2023-07-26 15:39   좋아요 0 | URL
넵 우리는 ‘남들과 달라보이지 않기 위해” 소비하는데, 반면 그들(?)은 ’남들과 달라 보이기 위해‘ 소비하는 듯 합니다. ^^
 
















"헤르메스주의는 헬레니즘시대(BC 305-30)에 이집트의 현자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해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에 근거한 사상이다. 1471년에 피치노가 <해르메스 문서>를 번역해 출간함으로써 활성화되었다(하지만 훗날 이 문헌은 사실상 2세기의 신플라톤주의 맥락에서 만들어진 문헌이었음이 밝혀지게 된다). 헤르메스주의는 자연을 영험한 힘으로 가득찬 곳, 힘 – 공감과 반감(인력과 척력) -의 그물망으로 이해했으며, 르네상스 시대의 철학자들은 그 심층적 힘을 읽어내 우주의 신비를 밝혀내고자 했다. 아울러 파라켈수스(1493~1541)가 역설했듯이, 인간을 소우주로 보고 이 소우주로서의 인간에게서 대우주로서의 자연의 생명력을 발견하고자 했다.



헤르메스주의는 근대 물리학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중력’ 개념으로서 물리학의 중심에 있는 만유인력 개념이 이 헤르메스주의에서 연원했다. 근대 물리학 맥락에서 ‘운동’이란 사물의 본성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단지 사물의 ‘상태’일 뿐이다. 사물 자체는 그저 x로 놓으면 그만이다. 이것은 어떤 특별한 발견이라기보다도 특정 영역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의 초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생명의 차원과 물리의 차원 사이에 존재하는 존재론적 분절을 예민하게 고려하기보다는 연속적인 방식으로 파악했다는 점에 있다. 근대 역학은 이 체계에서 물리적 측면을 따로 떼어내어 그 부분을 탐구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은 틀린 것이고 새로운 존재론이 맞는 것임을 뜻하지 않는다. 어떤 특정한 맥락에서(이 경우 역학의 맥락에서) 그런 존재론을 취할 필요가 있다는 것과 그 존재론이 ‘옳다’는 것은 다른 문제인 것이다. 역학이라는 특정한 맥락을 위해 이런 식의 존재론 혁신이 필요했다고 해서, 그 존재론이 존재론 자체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존재론보다 더 ‘진리’인가 하는 것은 따져볼 문제다. 아니, 애초에 양자의 비교는 짝이 잘 맞지 않는 비교라 하겠다. 짝이 맞는 비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와 근대 역학을 철학화한 기계론적 유물론의 세계일 것이다.



‘과학적 사유’의 기본틀은 무엇인가? 첫째, 연구하고자 하는 대상을 세계에서 분절해낸다. 현대식으로 말해 어떤 ‘계’(system)를 분절해낸다. 이 점에서 과학적 사유는 철학적 사유와 다르다. 철학적 사유가 세계를, 삶을 그 전체로서 보려는 데 핵심이 있다면, 과학적 사유는 반대로 세계의 어떤 부분을 오려내서 ‘대상화’함으로써 시작한다. 둘째, 이 계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들을 변항(variable)으로서 잡아낸다. 즉, 시간에 따라 양적으로 변화하는(때로는 계속 유지되는) 핵심적인 존재단위들(entities)을 설정한다. 이것이 과학기술이라는 행위의 핵심적인 존재론적 설정이다. 예컨대 낙하 운동의 경우 시간(t), 거리(s) 등이 될 것이고, 천문학적 계의 경우 질량(m), 거리(R), 힘(F) 등이 될 것이다. 물론 이 변항들을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이 변항들 중 가장 근본적인 변항, 정확히 말하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변항은 시간(t)이다. 왜일까? 과학의 기본 목적은 운동의 법칙성을 잡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운동이란 항상 시간에서의 운동이다. 따라서 모든 변항 중 가장 일차적인 변항은 바로 시간이라는 변항인 것이다. 셋째, 이 변항들에 관한 데이터를 모아 그것들 사이의 함수관계, 특히 미분방정식을 사용한 함수관계를 잡아낸다. 이 함수관계가 확증되면 그것은 ‘법칙’으로 승격된다.



넷째, 이렇게 얻어낸 수학적 이론을 검증하기 위해 그 이론에 있어 중요한 부분 – 그곳을 실증할 경우 그 이론의 설득력이 비약적으로 높아질 수 있는 부분 -에 관련해 실험을 즉 ‘결정적 실험’을 행한다. 이렇게 실험을 통해 이론의 타당성을 확증한다. 다섯째, 모든 운동 법칙은 결국 시간의 함수이므로, 시간-변항의 각 함수값은 곧 해당 시간에서의 그 운동 법칙 전체의 함수값을 산출한다. 따라서 운동 법칙에 미래의 어떤 시간을 대입하면 미래의 해당 계의 상태를 예측할 수 있다. 예컨대 천문학에서, 훗날 라플라스가 장담하게 되듯이, 물리법칙과 해당 초기조건만 주어지면 어떤 시간에서의 우주 상태도 예측 가능하다는 것이다.



동북아에서 왜 먼저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못했을까’라는 물음은 곧 과학기술 발전은 인류 역사에서 긍정적인, 때로는 거의 당위적인 가치를 가진다는 판단을 은연중에 깔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과학기술, 특히 기술문명이 가져온 세계가 과연 긍정적이고 심지어 당위적인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사람들은 기이하다 싶을 정도로 과학기술의 비극들에는 무관심하고, 과학기술이 가져오는 흥미/재미와 ‘부가가치’에만 관심을 쏟는다. 드론이 가져올 편리와 부가가치에는 관심을 가져도 (최근 중동이나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서 무차별로 이루어지는) 무인폭격의 섬뜩함은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인공지능에 열광하면서도 그것이 가져올 불행에 대해서는 거의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듯하다. 이런 흐름은 대중매체/대중문화에 의해서 점차 공고한 것이 되고 있다. 따라서 위와 같음 물음은 결국 자본주의-과학기술-대중매체에 의해 형성된 가치를 밑에 깔고서 제시되는 물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가치와는 반대의 가치를 가진 경우, 오히려 물음을 반대로 던져야 할 것이다. “왜 서양에서는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비전이 몰락하고, 외물에 집착함으로써 마음을 잃어버리는[玩物喪心] 과학기술이 기형적으로 발달했는가?’라고. 하지만 오늘날 이런 식으로 물어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자본주의 가치에 이미 강하게 세뇌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과학기수은 운명공동체다. 자본주의는 신기술을 발명해야 이익을 볼 수 있고, 신기술은 자본을 통해서 일반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의 막강한 힘은 경제만 좌우하는 것이 아니다. 돈의 힘이 정치는 물론이고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 문화도 지배하는 것이다.



역사를 바라보는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감각을 가지고 볼 때, 동북아 지식인들이 왜 외물을 조작하려는 경향[機心, 기심]을 경계하면서 내면 가꾸기에 힘썼는가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물질문명의 폭주가 가져올 파괴와 혼란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 문명에서 물질문명은 지식인들보다는 장인들에게 맡겨져 있었고, 이 두 집단 사이 거리는 멀었다. 그리고 동북아 지식인들은 그 거리를 메울 수도 있었을 자본주의 경향에 대해서도, 특히 윤리 없는 상업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충분히 감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 신기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사람들, 감각적 쾌락을 주는 사람들은 상찬의 대상이 되지만, 이런 가치들의 폭주를 경계했던 선철들의 지혜는 ‘고리타분한’ 것으로 매도되기 일쑤다. 바로 그런 가치/시선이 이미 현실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근대 과학기술문명의 세계사적/인류사적 함축에 대해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왜 사람들은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나 자연과의 합치를 잃어버리고 인간이 만든 장난감에만 열광하는지. 왜 우리 선철들이 그토록 애써 가꾸었던 ‘사랑의 마음’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사물의 조작과 계산에만 몰두하고 인간 스스로를 그런 틀 속에 밀어 넣어 물화(物化)하고 있는지. 왜 사람과 사람 관계는 소홀히 하면서 외물이 가져다주는 흥미와 이익에는 그토록 집착하는지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근대성과 과학기술문명에 대해 보다 균형 잡힌 시선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무엇이 진정한 ‘진보’인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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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3-06-07 16: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연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위한 도구, 목적론적인 관점에서 보는 시각의 한계는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존재와 비존재, 목적과 수단 등에 대한 지나친 분화를 통해 과학문명이 발달할 수 있었다면, 이제는 이러한 세분화된 관점이 종합적인 판단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를 페이퍼를 통해 생각해봤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23-06-08 15:15   좋아요 1 | URL
넵, 그런 것 같습니다.
부분의 합이 전체가 아닌데, 분석으로 부분만 보고 종합적인 판단을 못하여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불교는 해탈을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로 구분하며, 심해탈은 아공(我空)을 깨달아 아집(我執)을 벗음으로써 가능하고, 혜해탈은 법공(法空)을 깨달아 법집(法執)을 벗음으로써 가능하다고 한다. 특히 자아를 둘러싸고 있는 일체 세간에 대해 그것을 사람 마음을 떠난 객관적 실재라고 간주하고 있는 한, 그것은 잘못된 허망분별의 망집이기에 혜해탈을 이룰 수 없다. 이 망집을 주관적 아(我)와 대비되는 객관적 실재에 대한 집착이란 의미에서 법집이라고 한다. 객관 실재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는 한, 그에 대면하고 있는 자아에 대한 집착 역시 심정적으로만 극복되었을 뿐 이지적 차원에서 그 뿌리는 잔존하고 있다. 일체 법의 분별이 마음의 소산이라는 것, 그 마음을 떠나 아(我)도 법(法)도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심정적으로 아집을 넘어서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에 속하는 일종의 지혜인 것이다. 그것이 곧 일체 법의 공성을 자각하는 법공의 깨달음이다. pp. 219-220.



이렇게 보면 불교에 있어 윤회를 벗어나는 해탈이란 굳이 사후 문제가 아니라, 현생적 삶에 있어서도 발생 가능한 하나의 사건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자아 또는 객관세계라고 집착하는 것이 모두 그렇게 분별 집착하는 마음을 떠나 그 자체 자기 자성을 갖고 존재하는 객관 실체가 아니라는 것, 모두가 인연화합하여 발생하는 연기적 존재하는 것을 단지 논리적으로가 아니라 직관적으로 깨달아 아는 것은 바로 마음의 자기 자각이며, 그것이 곧 견성(見性: 본래 그대로의 자기 본성을 보는 일 )인 것이다. p. 221. <동서양의 인간 이해>

















“칸트가 자신 철학을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표현한 바에 따르면, 그는 우리 마음이 세상에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상이 우리 마음에 일치해야 인식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즉 인식은 우리 마음이 대상에 자신 범주를 부여함으로써 생겨난 현상이다. 우리의 모든 지식은 오직 경험계 구조에 대한 지식이다.“<서양 윤리학사>

















“서양에서 불교에 대한 연구는 16세기 서구의 스리랑카 점령이나 17세기 중국 선교 이후 마테오 리치나 칸트, 라이프니츠,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 등에 의해 행해졌다.”<심층 마음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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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델은 불완전성의 원리를 발표했다. '적어도 하나의 자연수 이론이 포함된 형식적 체계의 무모순성은 해당 체계 안에서는 증명될 수 없다'를 증명했다. 이 말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증명되어도, 우주 자체가 증명되는지는 알 수 없다는 의미다. 한 마디로 안에서는 결코 증명될 수 없고, 벗어난 다음에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현실너머 편>

















‘이 명제는 증명될 수 없다’는 문장은 불확실한 진술이다. 괴델 말처럼 이 문장은 증명될 수 없다. 그 문장이 참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논리 도구가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 문장이 거짓말쟁이 패러독스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에게 관한 진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자기 연관성(self-refrence)이 개입된 문장이다. 자기와 관련된 것은 종종 풀 수 없는 모순을 낳는다.



자기 연관성이 초래하는 많은 결과 중 가장 놀라운 점은 우리가 자신을 꿰뚫어볼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스스로의 행동을 예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스스로 행동을 예언하려면 스스로 생각을 추월해야 하기 때문이다.<우연의 법칙>


















업력(業力)을 간직한 무의식적 심층 마음이 곧 근본식인 아뢰야식이다. 그런데 아뢰야식은 개인  자신이 행한 과거의 업(業)에 의해서일 뿐만 아니라 다른 개인들과 더불어 함께 살게 되는 공통적 환경세계의 모습을 형성하는 식이기도 하다. 이처럼 공적 세간을 개인의 업의 결과로 간주한다는 것은 곧 불교가 독립적 객관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몸담고 사는 세계가 우리 자신과 분리된 별개의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 심층에서 우리 자신과 본질적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물질세계는 그렇게 인식하는 개인의 식에 대해 그 식의 경계로서만 존재하는 것이지, 그 식을 떠나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가 아닌 것이다. 인간이 인식한 대로의 이 세계는 그렇게 인식하는 인간에 대해서만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지, 인간 아닌 다른 존재, 예를 들어 개나 곤충, 천사에게도 바로 우리에게와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할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동일한 사물도 그것을 인식하는 자에 따라 다르게 인식될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인식하는 자의 인식을 떠나 객관적 세계 자체를 논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불교에서는 흔히 ‘일수사상(一水四相)’의 비유를 제시한다. 말하자면 같은 물이라 해도 아귀에게는 그것이 피고름으로, 물고기에는 삶의 터전이나 길로, 천인에게는 보석의 땅으로, 인간에게는 마시는 물이나 바다 등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대상의 상대성에 대한 자각을 유식은 ‘유식무경(唯識無境)’의 깨달음으로 간주한다. pp. 82-83.



인간 의식은 동물적 본능 또는 사회 경제적 권력에 의해 지배받고 규정되는 수동적 산물이다. 개인적 욕망과 그 욕망이 지향하는 사회적 권력이 서로 얽힌 관계에서 인간의 무의식적 본질을 규정하고, 인간의 일상적인 표면적 의식이란 단지 그 무의식이 최종적으로 표면화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이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자가 그 대답을 자기 자신 안에서, 즉 자신 의식 안에서 찾아내려고 하면, 그것은 이미 빗나간 길을 가는 것이 된다. 내가 나 자신을 어떤 존재로 자각하고 인식하는가, 내가 나 자신의 삶을 어떤 방식의 삶이 되도록 결단하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떤 의식적 생각이든 어떤 의지적 결단이든 그 안에 작동하는 무의식적 메커니즘이 들어 있으며, 바로 그 무의식적 메커니즘을 밝혀냄으로써만, 그 생각과 결단의 본질, 한마디로 인간 본질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된다. pp. 110-111. 



대상 세계와 접하여 생겨나는 상(像)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생겨나는 느낌이 바로 수(受)다. 그 다음 그러한 상을 능동적으로 마음에 취하는 것이 바로 상(想), 즉 생각이다. 경계의 상을 취하는 과정에서 각종 명언(名言), 즉 언어를 시설하게 된다. 그 다음 행(行)이란 마음의 조작을 뜻한다. 마음이나 말이나 몸으로 짓게 되는 각종 업(業)이 바로 이 마음의 조작인 행에서 비롯된다. 마지막으로 식(識)이란 세계를 이러저러하게 분별하여 인식하는 과정이다. 우리가 자아라고 생각하며 아끼고 집착하는 것, 자기 자신을 그 안에서 발견하며 자신과 동일시하는 그런 것들이 바로 이러한 몸이나 느낌, 생각, 의지, 인식들에 다름 아니다. pp. 141-142.



불교에 따르면 우리 자아에 대한 집착은 곧 상일주재(常一主宰)적 자아에 대한 집착이다. 다시 말해 변하지 않고 항상되며 단일한 상일(常一)의 자아, 그리고 바로 나 자신이기에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주재(主宰)적 자아가 존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신체나 느낌, 생각이나 의지, 인식 등 그 모든 것은 처음부터 나의 본질로 정해져 있던 것이 아니라, 나의 유전적 조건들 그리고 나를 둘러싼 사회 문화적 쪼는 자연적 환경에 의해 그렇게 형성된 것이며, 따라서 환경 변화에 따라 항상 바뀌어갈 수 있는 그런 것들이다. 그러므로 그 어느 것도 절대적으로 나 쪼는 나의 것이라고 집착할 이유가 없다. 이와 같이 집착할 만한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의 깨달음이 바로 해탈로 나아가는 지름길이 된다. 아집을 극복케 할 무아의 깨달음이 어느 정도 심각하게 받아들여져야 하는가는 다음 비유가 잘 말해 주고 있다. p. 145.



어떤 사람이 남의 심부름으로 멀리 가서 빈방에 혼자 있는데, 밤 중에 귀신이 송장 하나를 메고 와서 그의 앞에 던진다. 이내 뒤를 이어 다른 귀신 하나가 따라와서 앞의 귀신을 꾸짖되 "이 시체는 나의 것인데 어째서 네가 메고 왔느냐?" 하니, 앞의 귀신이 답하기를 이 것은 나의 것이므로 내가 메고 왔다" 하였다. 그러나 나중의 귀신이 말하기를 "이 시체는 실로 내가 메고 왔다"고 하여 마침내 두 귀신이 서로 시체의 팔을 하나씩 잡고 다투다가 먼저 귀신이 이렇게 제의를 했다.

"여기 인간이 하나 있으니 그에게 물어보자"

이 말에 따라 나중의 귀신이 물었다.

"이 시체는 누가 메고 왔는가?

그 사람이 생각하기를 "이 두 귀신은 힘이 센데, 사실대로 말해도 내가 죽음을 당할 것이요. 거짓을 말해도 죽음을 당할 것이다. 어차피 죽음을 당할 것이라면 거짓말을 해서 무엇하랴" 하여 사실대로 "그 시체는 앞의 귀신이 메고 왔다"고 하였다.

그러자 나중의 귀신이 화를 내어 그 사람의 팔을 뽑아 땅에 던져 버리니, 먼저 귀신이 시체의 팔 하나를 뽑아다가 그에게 붙여주어 멀쩡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여 두 팔, 두 다리, 머리, 허리 등 온몸을 모두 시체의 것과 바꿔놓은 뒤에 두 귀신은 뽑아 버린 사람의 몸을 다 먹고 입을 닦으면서 어디론가 가 버렸다.

이 때 그 사람이 생각하였다. "나는 지금 어머니가 낳아 주신 몸을 몽땅 두 귀신에게 먹히고, 나의 이 몸은 몽땅 저 시체의 것이니, 나는 지금 몸이 있는 것인가, 몸이 없는 것인가? 몸이 있다고 하자니 모두 귀신에게 먹히었고, 몸이 없다고 하자니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걱정하기를 마치 미친 사람 같더니, 이튿날 아침에 길을 떠나 가다가 목적한 국토에 이르렀는데 불탑과 스님들이 있었다. 그는 찾아가서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몸이 있는가, 없는가?"만을 물었다. 비구들이 도리어 묻기를 그대는 누구인가?" 하니, 그는 "나도 사람인지 사람이 아닌지 모르겠소"라고 하면서 지난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비구들은 그 사람이 무아의 도리를 잘 알아서 제도하기 쉬울 것을 알고 그에게 말했다. 그대의 몸은 본래부터 항상 나가 없었다.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다만 사대가 화합하기 때문에 내 몸이라는 생각을 내었을 뿐이니, 그대 본래의 몸이 지금의 것과 다름이 없다." 비구들이 제도해 주니, 도를 닦아 번뇌를 끊고 곧 아라한을 이루었다. 이것이 때로는 남의 몸에 대하여 나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너와 나를 구분하여 나가 있다라고 말하지 못하는 도리이다. pp. 146-147.



이러한 자아관은 어찌 보면 상일주재적 자아개념을 더 이상 간직하고 있지 않은 현대적 인간 이해를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공공연히 “주체는 죽었다’를 선언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사유에 따르면 항상된 자기 동일적 자아정체성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자아는 생물학적 요인들 및 사회 문화적 관계 안에서 형성되고 만들어지는 것일 뿐이다. 자아 또는 인간이란 것 자체가 자연적으로 사회적으로 진화되고 발전되어 온 것이며, 따라서 자아란 그러한 자연적, 사회적 법칙과 관계들을 통해 규정되고 형성된 것이다. pp. 148-149.

<동서양의 인간 이해>






기독교는 신 자신과 그 신에 의해 창조된 일체의 피조물들과의 질적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 ‘신으로부터의 창조가 아닌 무로부터의 창조’를 역설한다. 일체의 피조물은 무로부터의 존재이며, 자체 안에 신과 자신을 구분짓게 하는 무성을 지닌 것이다. 피조물의 하나에 불과한 인간 역시 신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무로부터 창조되었기에 존재와 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결국 기독교적 우주 창조론에 있어 우주 창조를 설명하는 기본 축은 신과 무라는 양 원리다. 이 이원성 안에서 우리는 다시금 희랍적 형상과 질료, 정신과 물질의 이원적 사고방식을 발견하게 된다. 창조에 전제된 무가 정말 순수 무라면, 무로부터의 창조와 신으로부터의 창조가 과연 구분될 수 있겠는가? 우주와 신, 피조물과 창조자, 인간과 신 가의 절대적 구분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겠는가? pp. 102-103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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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소성은 인간 욕망이 무한하고 달성하고픈 목적은 끝이 없는데 수단이 부족할 때를 말한다. 하지만 적게 일하고 적게 먹고 많이 노는 사회”에서도 희소성 원리가 적용될까? 하고픈 일도 없고 되고픈 것도 없는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서도 희소성 공리는 보편적으로 적용될까?” 우리는 “인간 운명이 희소성과의 투쟁이라고 선언한 뒤 불철주야 경제 행위에 매진하다 일 중독증이나 과로사에 봉착하고 마는 근대형 인간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어떤 목적이 욕구의 무한함을 불러일으킬 만큼 추상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 수단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냐에 따라 항상 부족을 일으키진 않는다. 고대 아테네 폴리스처럼 ‘잘 사는 생활’이란 인생 목표가 ‘폴리스에 헌신하는 것’ 혹은 ‘폴리스에 헌신을 위한 여가’와 같은 것이라면, 이 무한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온종일 극장에서 소일하는 것’ ‘배심원이 되는 것’ ‘선거운동을 하여 공직을 맡는 것’ ‘성대한 제사에 감동을 하여 고상한 기분이 드는 것’과 같이 사용해도 부족해지지 않는 수단들이 필요할 뿐이다.” 따라서 “주어진 상황에서 ‘희소’라는 말이 수단에 알맞은 말인가 아닌가는 사실의 문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진부한 ‘희소성’ 격언을 여러 현상 이면에 작동하는 경제 법칙인 양 취급함으로써 경제에서 ‘실제적인 것’의 의미는 무시되고 결국 잊혀버리게 된다는 점이다. 이렇게 논리가 사실을 훈육한다.”<칼 폴라니, 反경제의 경제학>

















신체적 쾌락을 좇는 욕망은 왜 저급하고, 정신적 만족을 좇는 욕망은 왜 고급한가? 신체적 욕망과 정신적 욕망 차이는 무엇인가? 신체적 쾌락을 좇는 욕망이 저급한 욕망으로 해석되는 까닭은 그 욕망이 개체적 욕망이고 인간 상호간에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식욕을 채워줄 수 있는 음식물은 내가 먹거나 네가 먹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러므로 그러한 욕망에 무제한적으로 충실하다 보면, 인간 상호간의 배려인 도덕성 여지가 들어설 수 없게 된다.



이에 반해 이성적 만족을 좇는 욕망이 고급한 욕망이 되는 것은 그것이 보편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나의 지식욕을 충족시키는 것은 그대로 너의 지식욕도 채워준다. 그것은 서로 나눌 수 있는 것이며, 개체성을 떠난 것이다. 즉 사적이지 않고 보편적, 공적인 것이기에 보다 높은 가치가 부여되는 것이다. 보편적이고 공적인 원리에 더 높은 가치가 부여되는 것은 그것만이 만인이 더불어 살 수 있는 이성적 사회를 건립할 수 있는 원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개체 아닌 보편, 사 아닌 공을 생각할 수 있는 이성적 인간만이 이성적 사회를 형성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동물도 숫놈 아닌 암놈이 새끼를 돌보니 자식을 돌보는 것은 당연히 에미 몫이다.’라든가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이니 자연적 방식의 삶이 가장 바람직하다’라든가 또는 ‘자연에서도 강자만이 살아남고 약자는 도태될 수밖에 없으니 강자의 생존전략을 좇을 수밖에 없다’라는 식으로 인간 사회 질서의 원형을 동물사회에서 구하는 것은 인간과 동물 차이를 간과한 동물적 주장일 뿐이다. pp. 126-127



플라톤은 인간을 신체라는 감옥에 갇힌 영혼으로 이해한다. 인간이 이 생애에 있어 부자유한 것은 신체를 가졌기 때문이다. 신체를 먹여야 하고 입혀야 하기에, 신체의 욕구를 충족시켜야만 살 수 있기에, 인간은 부자유하며 무수한 비도덕적인 것들도 행하게 된다. 인간 자유는 신체적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뜻한다.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는 것 등의 신체적 욕망에서 야기되는 자연필연성의 강제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로움이 곧 인간 영혼의 자유다. 이는 곧 신체적 욕망을 벗어나 이성 그 자체로 존재하게 됨을 뜻한다. 하지만 영혼이 신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신체를 벗어남으로써만 가능하다. 영혼이 육체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 그것은 곧 죽음이다. 철학이란 아직 죽지 않은 상태에서 죽어서나 가능한 자유를 최대한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즉 이성적, 보편적으로 사유하며 이성적 원리대로 살아가는 것을 훈련하는 것이다. 인간의 개체적 욕망을 넘어서며 욕망의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이란 한마디로 죽음의 연습이 된다. pp. 128-129. <동서양의 인간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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