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스크바국은 외국인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였다. 서구의 방문자들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도 모스크바국을 마법의 세계와 비슷한 무엇인가로 묘사했다. 기이하기도 하고, 호화롭기도 하고, 다채롭기도 하고, 그들이 그때까지 보았던 어떤 것과도 달랐으며, 아주 야만적이기도 했다. 외국의 사절들은 호화로운 복장, 특히 모피 옷, 눈에 띄는 회색 수염, 정교한 궁정 예식, 풍성한 연회 그리고 엄청난 음주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였다.


모스크바국을 떨어져 있는 이상한 세계로 보았던 견해는 어느 정도의 진실을 담고 있다. 예를 들면, 모스크바국 러시아는 키예프 루시와는 대조적으로 비교적 고립되어 있었다. 게다가 모스크바국 러시아는 종교와 의식주의에 기반을 둔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외부의 어떠한 영향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으며 독선적인 태도를 취했다.



2.

스키타이인들은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 말까지 남부 러시아를 지배했다. 당대에 살았던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스키타이인들이 세운 국가는 최대로 확대되었을 때, 서쪽으로는 다뉴브 강의 남쪽, 그리고 동쪽으로는 캅카스를 넘어서 소아시아에 이르렀다.


스키타이인들은 전형적인 유목민이었다. 그들은 황소가 끄는 텐트처럼 생긴 마차에서 생활했으며, 식량으로 삼기도 했던 말의 숫자로써 자신 재산을 셈했다. 그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탁월한 경기병 부대를 구성했는데, 말의 안장을 사용했으며 활과 화살과 단검을 가지고 전투에 임했다. 기동력과 치고 빠지기 작전에 기반을 둔 그들의 전술은 아주 효과적이어서, 심지어 강력한 이란 계통의 적수인 페르시아인들도 자신들의 고국 영토에서 그들을 패퇴시키지 못했을 정도였다.


스키타이인들은 남부 러시아에서 강한 군사 국가를 수립했으며, 수 세기 이상 그 지역을 상당히 안정시켰다. 이 시기에 토착 문화는 계속해서 발전하면서, 새로운 접촉과 기회를 통해서 풍요로워졌다. 특히 스키타이인들의 유목민적 성격과 목축 중심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흑해 북부의 스텝 지대에서는 농업이 계속해서 번성했다.


3.

블라디미르가 기독교를 수용한 것은 정치적인 행위였다. 그는 군주가 비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탁월한 신과 세속적인 정치적 권위와 결합된 교회를 강조하는 종교의 도움을 받아서 다양한 민족들을 단일한 사회로 통합시키고, 자신 및 자신의 왕조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에 도움을 얻으려고 계획한것이다. 기독교화는 비잔티움과의 결속력을 더욱 강화하는 데에 용이하기도 했다.


4.

조금도 과장 없이 러시아 목조 건축은 놀랄 만한 업적이다. 각각 약 6~7미터 길이의 나무기둥을 쌓아놓은 직사각형 꾸조물인 클렛 혹은 스럽은 고대 러시아 목조 건축의 기본이었다.


러시아인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후에, 비잔티움의 교회 건축 규범을 자신의 목조 건축에 적용시켰다. 교회에서 필수적인 세 부분은 다음과 같이 세워졌다. 항상 동쪽에 있는 성소는 작은 클렛으로 이루어졌다. 회중이 서 있는 교회의 중심 부분은 커다란 이중 클렛으로 건축되었는데, 하나의 클렛은 다른 클렛 꼭대기 위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서쪽 편에 있는 또다른 작은 클렛은 프리트보르(pritvor), 즉 독립된 현관 입구를 이루었다. 이곳은 원래 초심자들이 본당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잠시 기다리던 곳이었다. 커다란 클렛으로 된 두 개의 경사면을 가진 높은 지붕 위에는 작은 쿠폴라(cupola)가 얹혀 있었고, 그 꼭대기에는 십자가가 있었다. 이러한 단순한 고대 형태의 교회는 오래된 성상화에서 볼 수 있으며, 그중 북부 러시아에 있는 몇몇 교회 -그러나 17세기에 건축된 것들-는 우리 시대까지 전해진다.


교회 건축에서는 다양한 발전이 뒤따랐다. 특히 교회의 지붕은 점점 더 가파르게 되어, 그중의 많은 것들은 쐐기 모양과 비슷해졌다. 하나 혹은 다섯 개의 쿠폴라를 가진 교회를 건축하던 비잔티움의 전통과는 대조적으로, 러시아인들은 석재로든지 목재로든지 간에 더 많은 쿠폴라를 선호하는 성향을 보였다. 키예프에 있는 성 소피아 대성당에는 13개의 쿠폴라가 있었고, 키예프에 있는 또 다른 교회인 티테에는 25개의 쿠폴라가 있었다.


5.

프랑스는 계속해서 러시아의 적대국으로 남아 있었다. 프랑스는 대륙의 지배권을위한 최대 적인 합스부르크 가문을 패퇴시키고 약화시키기 위해서 투르크, 폴란드, 스웨덴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물론 러시아는 그전부터 동유럽에 있는 이들프랑스의 세 동맹국과 반복적으로 싸움을 벌여왔다.


그와 대조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하던 오스트리아는 러시아가 가장 신뢰할 동맹국이었다. 이 두 나라는 프랑스에 대한 적대감, 그리고 러시아에게는 좀더 중요한 사실로서 투르크와 스웨덴에 대한 적대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중 스웨덴은 30년 전쟁에 대대적으로 개입한 것을 출발점으로, 독일 지역에서 계속해서 합스부르크 가문 이익에 거스르는 행동을 해 왔다.


6.

푸시킨은 죽은 이후에, 심지어 그의 짧은 생애 동안보다 훨씬 더 독자적인 러시아의 ‘국민 시인’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했다. 국민 시인이라는 표현은 푸시킨이 살아 있을 때 고골이 다음과 같이 이미 사용한 구절이었다. ˝푸시킨이라는 이름은 러시아 국민 시인에 대한 생각을 상기시켜준다.……푸시킨은 러시아 정신이 명백한 모습을 드러낸 인물이다.….…그의 내면에 러시아의 자연, 러시아의 영혼, 러시아의 언어, 러시아의 성격이 반영되어 있다.˝


1880년에 모스크바의 푸시킨기념상의 제막식에서 연설(도스토옙스키에 따르면, 이 연설은 황홀감의 울부짖음˝과 마주쳤다)을 했던 도스토옙스키에게, 푸시킨은 정확히 말해서 어떤 국가의 정신이든지 표현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인간이 되었다는 점에서 가장 러시아적인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의 목소리는 러시아 자체처럼, ˝유럽의 갈등을 궁극적으로 해결하고, 우리의 보편적이며 인간적이고 통합적인 러시아의 혼 속에서 유럽적인 권태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출구를 보여줄 수 있는” 독특한 예언적인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주장은 완전히 발달된 푸시킨 신화가되었고, 1800년대 후반과 스탈린 시대의 소련에서 아주 강력하게 발전되었다.


7.

레르몬토프는 비록 푸시킨만큼 결코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푸시킨의 그늘 속에 가려져서는 안 될 작가이다. 1814년에 태어나서 1841년에 결투를 벌이다 사망한 레르몬토프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서 상당량의 다채로운 문학 작품을 남겨놓았다. 레르몬토프는 푸시킨과는 기질이나 관점이 아주 달랐으며, 러시아 문학계에서 대표적인 낭만주의적 천재에 가장 근접했던 ˝러시아의 바이런˝ 이었다.


그의 생애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끊임없는 반항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반항은 푸시킨의 죽음과 관련하여 러시아 상류사회를 비난하는 그의 아주 멋진 시와 같은 공개적인 의사 표시와, 자신을 죽음으로 이르게 한 사적인 문제 모두에서 표현되었다. 레르몬토프는 생애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장엄한 장편시인 「악마(Demon)」를 저술하거나 개작하면서, 차이와 소외의 정신을 상징하는 악마 현상을 통해서 자신의 고통스러운 자아를 탐구했다.


나는 희망이 피어오르는 바로 그 순간에
시선 하나로 그것을 꺾어버리는 자,
나는 아무에게서도 사랑을 받지 못하고,
모든 살아 있는 것들로부터 저주받는 자,
나는 내 지상의 노예들을 향한 천벌,
나는 인식과 자유의 황제,
나는 하늘의 원수, 나는 자연의 재앙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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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농노제 형성과 폐지로 본 국가와 세금, 신분증



1. 러시아는 왜 17세기 뒤늦게 봉건제가 아닌 중앙집권 시기에 농노제가 발생했을까?


“모스크바국은 영토를 확장하고, 커져가던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서 봉직자들, 즉 전투에 참여하기도 하고 정부를 위해서 행정이나 여타 업무를 담당하기도 하던 귀족들에게 의지했다. 봉직에 대한 대가로 부여된 영지인 포메스티예는 모스크바국 시회질서의 기반이 되었다. 모스크바국 정부는 포메스티예애 적합한 토지를 계속해서 찾기 위해서 영토를 확장했다.


중요한 것은 국민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던 농민 지위가 이로 인해 악하되었다는 점이다. 봉직귀족의 성장은 점점 더 많은 국유지와 농민들이 포메스티예 제도로 인해 봉직귀족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귀족 자신이 국가에 대한 과중한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농민들로부터 짜내야만 했다.


많은 농민들은 도망치려고 시도했다. 러시아가 카잔 한국과 아스트라한 한국을 정복함으로써 동남쪽 방향의 비옥한 토지로 향한 길이 열렸고, 정부는 처음에 이 지역에 러시아 장악력을 높이기 위해서 농민 이주를 장려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봉직귀족 이해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봉직귀족이 국가에 봉사하려면, 그들이 데리고 있던 농민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막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6세기의 마지막 4반세기에 모스크바국 당국은 봉직귀족이 노동력 확보를 보장하기 위해서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합법적인 이주는 중단되었다.


사실 러시아 노에제를 포함하여, 초기에 성립된 농민들의 세속 상태는 자연스러운 계약의 결과였다. 농민들은 주로 금전이나 곡물 혹은 농기구를 빌린 대가로, 지주에게 지대를 납부하고, 부역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비록 1년에서 10년에 이르는 기한이 정해졌다고 할지라도, 농민들이 채무를 다 갚는 경우는 드물었기에 협정은 연장되는 경향이 있었다. 사실 농민들이 지주에게 매년 내는 분담금은 종종 대부금에 대한 이자에 불과했다. 결국, 봉직귀족계급이 농업 노동력의 필요성 때문에, 농민들 이동을 제한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되었다.


이런 일이 모스크바국 성장 초기에 전개되기는 했지만, 농노화는 17세기까지 완성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포메스티예 농업의 성장은 차르가 봉직을 맡을 귀족들에게 토지와 함께 농민을 하사함에 따라 예속 상태가 급속히 확산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정부는 특히 농민 이주를 제한하거나 금지하고, 농민 탈주를 중단시키려는 노력으로 귀족 이익을 계속해서 확대시켜주었다. 비록 농노제를 직접 확립하는 법은 17세기 이전 단 한 번도 공포된 적이 없지만, 몇몇 입법 조치는 그런 목적에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봉직귀족으로부터 제기된 거듭된 청원에 대한 반응으로, 정부는 탈주 농노를 붙잡아 주인에게 돌려보낼 수 있는 기간을 계속해서 연장했다. 그 기간이 16세기 말에는 5년이었는데, 1649년에 공포된 새로운 법령 『울로제니예』로 무기한이 되 었다. 나아가 1607년과 몇몇 다른 해에는, 탈주 농노들을 숨겨주는 것에 대한 처벌을 입법화했다. 1550년부터 1580년 사이에 행한 최초의 인구조사는 그 이후에 실시된 것과 마찬가지로, 농민들의 거주지 기록을 제공하고 농노의 자식들을 부모와 동일한 범주에 올려놓음으로써 농노제 성장에 도움을 주었다.


1649년의 울로제니예와 함께, 이제 농노제의 명확한 본질은 법으로 명문하되었고, 효과적으로 강제될 수 있었다. 농민은 주인 허락 없이는 이동할 수없게 되었다. 새로운 법전은 탈주자들에 대한 모든 제한 규정을 폐지했으며 도망자들을 숨겨주면 처벌을 무겁게 부과했다. 그리고 정부는 농촌에서 탈주자들을 수색하기 위한 특별 부서를 설치했다. 울로제니예는 본질적으로 ‘한번 농노는 영원한 농노이다’라는 카스트적인 원칙을 채택했고, 귀족에게 완전한 만족감을 안겨주 었다. 무제한적인 의무를 지고 있던 농노들은 전적으로 지주 수중에 있게 되었고, 지주들은 자신 영지에서 사법권과 치안권을 점차 더 많이 행사할 수 있었다.


17세기 말에는 농노의 매매와 증여 관행이 발달되었다. 즉, 농노는 사실상 노예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러시아 농노제는 봉건제가 아니라 중앙집권화된 군주정치 시기에 등장했다는 점이 지적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예로부터 존재해오기는 했으나 지주에 대한 농민의 경제적 의존도가 점점 더 증가했다는 점, 그리고 모스크바국 정부가 귀족에게 유리한 정책을 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17세기의 모스크바국에서 인구의 85퍼센트나 되는 사람들이 농노였다고 추산된다.


2. 표토르 대제의 농노제 폐지는 선의였을까?

18세기 표트르 대제는 계속해서 돈이 엄청나게 부족한 상태였는데, 상황이 완전히 절망적인 경우도 때때로 있었다. 유일하게 의지할 곳은 이미 과중한 부담을 지고 있는 상태에서 거의 한계점에 다다를 정도로 압박받던 러시아 대중을 더욱 쥐어짜는 수밖에 없었다.


추정에 따르면, 1702년에 정부가 거두어들인 세입은 1680년 세입과 비교해서 2배였고, 1724년에는 5배 반이었다. 그 과정에서 정부는 벌통, 방앗간, 어업, 턱수염 그리고 대중목욕탕 등 거의 모든것에 세금을 부과했다. 그리고 정부는 국가 독점권이 적용되는 품목을 새롭게 확대했다. 예를 들면, 법적 처리 과정에 필요한 인지는 국가에 추가적인 세입원이 되었고, 오크 나무로 만든 관(棺)도 그랬다.


사실, 정부 재정을 증가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거나 꾸며내는 일은 그의 통치기 동안에 특별한 하나의 업무로 발전했다. 직접세의 주요 형태에서 또다른 혹은 아마도 좀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즉, 표트르 대제는 1718년에 가구별 세금과 경작지에 대한 세금 대신에 인두세(人頭稅)를 도입했던 것이다!


인두세가 가진 하나의 목적은 가구를 통합하거나 자신 땅을 경작하지 않는 탈세자들을 포착하는 것이었다. 인두세는 하층계급 전체에게 부과되었고, 세금 평가액도 아주 많았으며 현금으로 납부해야 했다. 1718년부터 1722년 사이에는 인구조사, 즉 인두세를 내야 하는 소위 인구 수정 작업이 이루어졌다. 애초에 인구조사에는 사유지를 경작하던 농부만 포함되었다. 그런데 경작을 담당하지 않는 가구 내 노예와 모든 부자유민, 심지어 부랑자들도 추가하라는 명령이 내려겼다. 인구조사 동안에 등록된 각 사람은 동일한 액수로 정해진 인두세를 내야 했다.


영지에서 지주들은 돈을 국고로 즉각 이관하는 책임을 맡았다. 인두세로 인해서 마침내 농부와 농노의 차이가 완전히 사라졌으며, 모든 농민이 국가에 하나의 예속민(bonded mass)으로 통합되었다. 인구조사 이후에 농노들은 주인의 서면 허가증을 가지면 영지를 떠날 수 있었는데, 이것은 통행증 제도의 출발을 의미하는 조치였다. 그리고 인두세는 황제의 지속적인 혁신정책 중의 하나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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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데이터 리더십 - 제4차 산업혁명 시대 디지털 혁신을 위한 리더의 조건
김진호.최용주 지음 / 북카라반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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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빅 브라더는 기업일지도...



“미국 기업 엑시엄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개인 정보를 보유하고 있어 이를 마케팅에 활용하려는 기업에 판매한다. 액시엄은 한 사람의 개인 정보를 약 1,500개 항목별로 평생 동안 추적하면서 관리한다. 당신이 어디에 살고 직업이 무엇인지는 물론이고 몸무게, 소비 패턴, 정치 성향, 가족 건강, 휴가 계획까지 속속들이 안다.


액시엄은 약 3억 명에 이르는 거의 모든 미국인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약 5억 명의 개인 정보를 보유하고, 연간 50조 건의 거래 내역을 분석한다. 미국인의 일상생활에 대해 미국 연방수사국이나 미국 국세청보다 훨씬 깊이 있게 조사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9·11 테러 당시 19명의 가담자 가운데 11명에 대한 정보를 보유하고 있어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액시엄은 일단 특정한 개인의 정보를 취득하면 그 사람에게 13자릿수로 만들어진 번호를 부여한다. 이후에는 모든 정보가 이 번호로 분류·관리된다. 수집되는 정보는 나이, 주거지, 성별, 피부색, 취향, 정치 성향부터 선호하는 휴가지, 기르는 동물, 물품 구매 행태, 교육 수준, 수입, 병력病歷, 재정 상태, 가족 관계, 잡지 구독 여부 등 엄청나게 많다. 액시엄의 장점은 그들이 가진 정보가 소비자들의 오프라인 데이터라는 데 있다. 즉,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낼 수 없는 정보다.


액시엄은 사람들이 생활에서 남기는 흔적(데이터)을 꼼꼼하게 추적한다. 예를 들면 공문서 신청, 신문·잡지 정기 구독, 각종 설문 참여, SNS 활동, 신용카드는 물론이고 보통 5~6개씩 갖고 있는 고객 서비스카드 사용 내역, 부동산 담보 대출 신청, 보험 가입 등을 수집한다. 액시엄은 자신만의 차별화된 데이터 수집 노하우로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개인 정보를 엄청나게 축적해 독보적인 경쟁력을 갖추었다.


엑시엄은 현재 4,000개 이상의 데이터 뱅크를 관리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신용카드 회사 10곳 중 7곳, 미국의 대형 백화점 10곳 중 6곳, 세계 10대 자동차 회사 중 8개 회사도 액시엄의 고객이다. 액시엄의 매출은 2010년부터 약 9억 달러를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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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영웅 1인의 성공 신화


둘. 여건과 조건이 다른데 벤치마킹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착각


셋. 고객 불행을 기반으로 한 성공


넷. 종업원 고용을 우습게 보는 태도


다섯. 결국 돈만 많이 벌면 된다는 배금주의

 

 

 

“카지노 기업인 해리스는 빅데이터 리더십 덕분에 위기에서 세계 최대 카지노 그룹으로 우뚝 섰다. 빅데이터와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화려한 카지노 기업도 데이터 분석으로 승부를 갈랐다. 이 이야기는 어려움에 처한 기업이 데이터 분석적인 리더를 영입해 최고 성과를 거둔 사례로 유명하다. 1998년 해리스는 미국 하버드 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서비스 경영을 가르치던 게리 러브먼 교수를 영입했다. 그의 분석 지향 리더십으로 해리스는 승승장구하게 됐고, 업계 라이벌인 시저스를 인수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카지노 해리스는 지역별로 산재된 자사의 카지노 시스템을 통합해 전국적으로 고객들애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데이터베이스를 고객 충성도를 높이기 위한 마케팅 정책에 적극 활용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고객을 인구 통계변수와 지출 이력을 바탕으로 무려 80개의 이질적 집단으로 구분한 뒤 각 집단의 특성에 적합하도록 차별적으로 마케팅을 했다.

 

 

가령 개개인이 잃고 따는 금액을 실시간 추적하다가 어떤 개인이 그의 인내 한계점(영어로는 ‘pain’ threshold라고 한다), 즉 총 잃은 금액이 도박을 중지하도록 만드는 액수에 가까워지게 되면 직원이 접근해 공짜 식사나 쇼 티켓을 무료로 제공해 기분을 누그러뜨리고 계속 호텔에 머물도록 유도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직원들에 대한 인센티브나 성과급도 그들이 창출한 매출이 아니라 그들이 봉사했던 고객의 만족을 기반으로 산정했다. 이는 서비스에 만족했던 고객이 다음 해에 더 많은 돈을 지출한다는 데이터 분석 결과 때문이었다.

 

 

심지어 게리 러브먼 교수는 “우리 회사에서 해고되는 사유는 3가지다. 절도, 성희롱, 근거가 되는 데이터 없이 말하는 것’이라고 역설한 것으로 유명하다.

 

 

게리 러브먼을 영입한 후 고객들이 카지노 해리스에서 도박에 지출한 돈은 약 40퍼센트가 증가했으며, 영업이익도 평균 27퍼센트나 늘었다. 특히 2003년에서 2006년 사이 해리스 주식 가격이 14달러에서 85달러로 약 6배나 폭등했다. 또한 2005년에는 전세계 7개국에서 51개 카지노를 운영중인 세계 최대 카지노 그룹 시저스를 인수한 후 기업명을 시저스엔터테이먼트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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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문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이곳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감옥이다. 네바강이 발트해와 만나는 지점에 조성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밀물 때는 수위가 높아지는데, 일부러 물에 잠기도록 만든 감방에 한 여인이 갇혀 있는 것이다. 이 여인의 이름은 타라카노바(Tarakanova)로 결국 감옥 안에서 익사했다고 전해진다.

엘리자베타 여제의 사생아인 타라카노바가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고 나서자 예카테리나 2세가 그녀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밀물 때면 물이 흘러드는 감옥이었는데, 그해에는 바닷물의 수위가 특히 높아져 타라카노바는 감옥 안에서 익사했다고 전해진다. 혹은 익사하기 전에 폐렴으로 죽었다고도 전해진다.


2.
이 그림이 그려진 19세기의 러시아는 무능한 황제와 부패한 귀족들로 인해 민중의 삶은 극도로 궁핍했다. 현재 예수가 있는 황야는 당시 민중들의 삶의 터전과 닮아 있고, 남루하고 초췌한 예수의 모습은 민중들의 모습과 닮아 있다.

어쩌면 이 그림은 러시아 사회에 던진 마지막 경고였는지도 모른다. 현재 민중은 ‘황야의 그리스도’처럼 극단적인 가난과 굶주림에 놓여 있다는 경고, 만약 그들의 삶을 지금 돌보지 않는다면 그들을 유혹하는 세력이 생겨날지도 모른다는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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