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은 객체와 주체를 엄격하게 분리하여 보편적인 관점에서 세계를 보려고 시도한다. 자연의 법칙은 고정되어 있고 불변이다. 물질 우주는 ‘거기’에 존재하고, 자연 법칙에 지배되고 우주를 생각하는 작고 보잘것없는 인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과학은 개인의 감정과 신념, 관점에서 분리되었다는 점에서 객관적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의 새로운 원리는 가설로 출발한다. 그러고 나서 시행 기간을 거쳐 ‘자연의 법칙’이라는 고귀한 지위에 올라간다. 하나의 원리가 한번 ‘자연의 법칙’이라는 고귀한 지위를 얻게 되면 그 의미는 변하기 시작하여 그 법칙은 일이 일어나는 방식을 기술할 뿐 아니라 일을 통제하거나 지배하게 된다. ‘자연의 법칙’이라는 말로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우리 모두는 과학 이론이 진화하고 변형되며 수정의 여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기 전까지 법칙은 절대적인 지배력을 가진 것으로 간주한다. 예를 들어 특수상대성 이론은 절대적이다. 한 번도 위배된 적이 없고 보편적으로 유효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그런데 자연의 법칙은 어디서 왔을까? 자연의 법칙은 가설, 곧 과학자의 직관과 마음에서 태어났기에 우리는 과학자들 마음을 살펴보는 것이 자연법칙의 정수를 파악하는 데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 닐스 보어는 ‘물리학은 (객관적이며) 선험적으로 주어진 자연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인간의 경험을 정리하고 조사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실험자와 관찰자, 이론가는 외적인 어떤 것을 연구하지만, 그들이 직접 다루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 경험이 반영된 것이다. 만약 보어 생각이 옳다면, 그런 개인적, 주관적 요소는 조건부 확률론인 ‘베이즈의 정리’에서 발견될 수 있다. “조건부 확률은 유형을 한정하기 위해 추가적인 정보를 얻어 일부 가능성을 제거하고 그 나머지 현실로 결과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조건부 확률은 세상에 일어나는 결과는 발생 가능성이 높은 원인 때문에 일어난다는 최우원리(最優原理)를 기반으로 한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베이즈통계학 입문>(고지마 히로유키, 지상사, 2017)


<김상욱의 양자 공부>에서 김상욱 교수는 사실 “확률은 주관적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확률을 객관적이라고 여기는 잘못은 “어떤 경우의 수를 모든 경우의 수로 나눈다”라고 배운 빈도확률 때문이다. “균형 잡힌 동전을 무한히 많은 횟수를 던지면 앞면이 나올 확률은 1/2이다. 하지만 무한한 일련의 동전 던지기는 상상이지 과학이 아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정의는 객관성을 잃는다. 실험으로 검증 불가능한 가설이기 때문이다.”

 


"빈도주의 방법론은 일반적으로 어떤 측정 속에 내재하는 불확실성은 종 모양의 정규분포를 따른다고 설정한다. 하지만 주식시장의 변이 등은 설명할 수 없다. 빈도주의 방법론은 표본집단 설정을 전제로 하는데, 여러 실용적 응용 분야에서는 완전히 임의적이다. 9.11 테러 같은 경우는 무엇을 표본집단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더 큰 문제는 연구자들을 실제 세상과 완벽하게 차단한다는 점이다. 연구자가 자신이 설정한 가설에 내재하는 가능성 또는 전체 맥락 속 의미를 고려하지 못하게끔 가로막는다."<신호와 소음>(네이트 실버, 더퀘스트, 2014)

 


게다가 빈도확률이 가정하는 시행의 독립성 혹은 배타성도 문제다. 동전 앞면이 나오면 당신이 100만원을 벌고 뒷면이 나오면 50만원을 잃는 도박이 있다면, 당신은 그 도박을 할 것이다. 그때 막 당신 친구가 말한다. ‘100번이나 계속해서 뒷면이 나왔어!’ 101번째 당신 도박은 이전과 상관없는 독립적이고 배타적이지만, 당신은 베팅할 수 있는가? 더욱이 동전을 100번 던져 앞면이 50번 무작위로 나왔다고 하더라도 동전이 공정하다고 쉽게 결론내릴 수 없다. “수학적 확률론의 견해에 다르면 동전 던지기 100번의 결과는 2^100개의 구역으로 나뉜 거대한 룰렛 바퀴를 단 한 번 돌려 임의의 수 136이 나왔으니 공정하다고 결론 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 엄청난 바퀴의 회전 한 번으로 그는 모든 다른 결과가 거의 같다고 주장한 결과를 얻을 수 없고, 룰렛 돌리기뿐 아니라 동전 던지기 또한 배타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확률은 주관적이지만, 실재(reality)는 객관적이지 않을까? 확률 범위 0과 1 사이의 수인 무한순환소수 0.999...와 실재라고 보이는 1의 관계를 보자. 흔히 0.999...는 1보다 ‘작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틀렸다. 0.999...=1이다.(이것을 이해하려면 1/3=0.333..의 양변에 3을 곱하면, 1=0.999..가 된다.) “1이라는 것도 개인적, 주관적일 뿐 실재에 대한 객관적 진실이 아니다. 더 놀라운 점은 “1에 가까운 확률과 1이라는 확률 사이에 질적인 점프가 없고, 불확실에서 확실의 경계를 넘는 도약도 없고, 극복해야 할 분리도 없다. 사과를 손에서 놓았을 때 사과가 떨어질 것이라는 확률(신뢰도)은 오후에 비가 올 것이라는 신뢰도보다 수치적으로 무척 크다. 이 두 가지 판단은 비록 정량적으로 다르지만, 정성적으로 같다. 따라서 확률은 개인적, 주관적이다.


주관적 확률을 다루는 베이즈 정리는 ‘우리가 어떤 대상에 갖고 있던 (주관적, 개인적) 초기 믿음을 새로운 정보로 업데이트할 때 보다 개선된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걸 알려준다. 베이즈 공식은 어떤 새로운 증거가 제시되어 원래 신뢰도가 수정될 때 확률 변화에 대한 수학적 처방이다. 동전을 2개 던져 앞면이 나올 확률과 같은 빈도확률은 사람의 영향과 관계없는 ‘사실’의 주장처럼 보이지만, 사실 확률은 신뢰의 정도로 간주되어야 하며, 따라서 행위자 경험에 의존한다. 여기서 경험은 인류 전체의 경험이 아니라 특정한 인간, 즉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행위자 단 한명의 경험을 말한다.


베이즈 정리는 확률 추정의 타당성을 단일 행위자로 제한하기에 근본적인 좁아짐을 나타낸다. 하지만 광대하게 넓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과거와 현재의 모든 개인 경험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위자 들 사이의 일관성은 어떻게 되는가? 범위가 넓어져 과학적 경험으로 간주되는 이유는, 내가 내 동료와 협력자들, 과거와 현재의 과학계와 의사소통으로 연결한 개인적 경험의 총합이기 때문이다. 내가 읽은 모든 책과 기사, 편지, 내가 들었던 모든 강의, 내가 참여했던 모든 대화, 내가 본 모든 이미지, 내가 목격한 모든 측정은 내 의식에 부가된 새로운 경험이고, 이 모든 것은 내 확률 배정을 갱신하는 배경 정보로 제공된다. 각 행위자 경험의 집합은 고유하지만, 각각은 공유된 거대한 공통적인 코어를 갖게 된다. 베이즈 공식에 개인이 사전 확률을 배정한다는 것은 개인들 사이 중복된 거대한 공유 경험에 근거하며, 과학에 질서를 가져다준다. 개별적인 작은 차이는 혁신과 진전을 가져다준다.


베이즈 정리는 양자역학에서 파동함수가 붕괴하는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한다. 양자역학에서 파동함수의 붕괴란 우리가 어떤 물리계와 상호 작용할 때(측정), 우리는 무언가(입자성)를 얻을 뿐 아니라 동시에 물리계 관련 정보 일부분(파동성)을 ‘삭제’한다.는 의미다. 슈뢰딩거에 따르면 양자역학은 실제 존재하는 객체에 대한 진술을 금지한다. 진술은 오직 객체-주체 관계에 대해서만 다룬다. 다른 말로 하면, 양자역한 자연(객체)을 고려하는 관찰자(주체) 경험을 기술한다.


여기서 ‘측정’이라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이 말은 실험 전부터 존재한 결과치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며 또한 그것이 드러나기를 기다린다는 뜻으로 보인다. 아기 몸무게를 재는 것은 아기가 무게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그리고 그 무게는 단지 아직 안 알려졌을 뿐이라는 것을 은연중 암시한다. 측정은 베일을 벗겨 그 값이 모두에게 보이게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양자역학에서는 ‘수행되지 않는 실험은 아무런 결과가 없다.’ 전자의 스핀은 그것을 결정하기 전까지는 방향이 없다. 우리가 숨겨진 스핀값이 있다고 가정하고 추정하지만, 알지 못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잘못된 것은 스핀값이 존재한다는 근본적 가정이다. 측정은 기존의 존재하는 값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 값은 양자 시스템과 행위자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진다.


“신학자인 베이즈는 ‘신이 진정 자비심이 넘치는 존재라면 어떻게 이 세상에 고통과 사학함이 존재할 수 있는지’ 고민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완벽한 신이 설계한 우주와 자연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지 고민했고, 인간이 자연의 진리를 점차 알게 되면 궁극적으로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이는 완벽한 자연과 불완전한 인간 사이의 괴리를 인정하고, 지식과 무지 사이의 영역을 확률로 본 것이다.”<신호와 소음>(네이트 실버, 더퀘스트, 2014)


“베이지 확률은 신의 마음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버리게 한다. 양자역학은 절대적 확실성을 가진 예측을 할 수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한다. 베이즈 정리와 양자역학은 과학이 궁극적 실재애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합리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원더풀 사이언스>에서 나탈리어 엔지어는 이렇게 말한다. “과학은 단순히 사실의 집합이 아니다. 과학은 마음의 상태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며, 본질을 드러내지 않는 실체를 마주하는 방법이다. 과학은 주관성과 객관성의 이분법을 뛰어넘어 이른바 경험적 보편주의를 추구하는 상호주관적 진실을 다루는 학문이다. 이는 우주의 객관적 진실은 우리 모두의 주관적 진실이 모여 이루어져 있다는 이야기로 매우 실용적이다.”


“새로운 정보를 얻는 개인의 경험이 과학을 진보시키는 본질적 메커니즘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베이즈 정리는 인간의 자기 인식, 자유 의지, 정신과 육체의 관계와 관련된 아주 오래되고 복잡한 문제를 풀기 위해 필요한 심리학과 물리학 사이에 다리를 제공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더 이상 꿈꿀 것이 없음은 죽음을 의미한다.” - 엠마 골드만

 

 

“진보적 이념에 지대한 관심이 없다면 그 누구도 성가시게 진지한 책과 씨름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교육을 해도 사람은 자기 마음속으로 갈망하는 것만 수용하기 때문이다. 아나키스트나 혁명가는 음악가와 마찬가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직 우리가 할 일은 그런 사상의 씨앗을 심는 것뿐이다. 씨앗이 살아 성장할지 여부는 전적으로 그 사람 토양이 얼마나 비옥하느냐에 달려있다.

 

 

무정부주의로 명명되던 시기 아나키즘은 하나의 유토피아였다. 19세기 노동운동의 질풍노도를 겪으면서 절대적 자유와 권력없는 지배라는 아나키즘 호소는 매력적인 유토피아였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아나키즘은 현실적인 사회운동이다. 어떠한 위대한 세계를 설명하는 원리도 희망이 되지 않는 포스트모던한 세상에서 아나키즘은 현실적인 사회운동을 위한 행동수칙으로 변모되었다. 혁명과 사유재산, 국가권력, 억압, 착취에 관심 갖기보다는 보통사람들의 일상 문제, 삶의 태도에 주목한다.

 

 

아나키즘은 인간 본성이 원래 선한데, 사회제도와 같은 인위적인 체계가 본성을 악하게 만들었다고 본다. 국가는 개인 자유를 제한하면서 현실적인 불평등을 고착화 시키고자 한다. 그래서 아나키는 국가 부재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완전히 권위 없는 사회, 강제가 없는 사화란 불가능하다. 아나키는 그런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아나키는 국가를 없애려는 것이 아니다. 폭력의 집중과 정치적인 전문화의 부재, 그것이 아나키다. 아나키 사회는 권력과 강제를 신념과 가치로 대신하며, 폭력에 대한 통제권이 평등한 사회다.

 

 

엠마 골드먼이 꿈꾸는 아나키 사회가 바로 연대의식으로 충만한, 꽃처럼 조화로운 세상이다. 세포의 상호 유기적 협동이 유기체를 조직하듯, 개인은 타인과 협동을 통해 최선의 능력을 발휘하는 사회다. 엠마는 ‘아나키즘 하에서 세상이 어떻게 운영되는지에 대해선 왜 말하지 않으세요?’라는 질문을 수천 번도 더 들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이렇게 답한다. ‘그런데 어떻게 다가올 상황에 대해 일사천리로 적용될 행위 체계를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과거와 현재의 쓰레기더미에서 잘못된 것들을 성공적으로 제거하고 후손들에게 가장 안전하고 위대한 유산을 남겨주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나요?’

 

 

인류 발전의 역사를 잘 살펴보면 서로 심하게 투쟁하는 두 가지 요소가 있음을 알게 된다. 바로 개인적 본능과 사회적 본능이다. 개인적 본능은 개인 노력과 성장, 자아실현을 촉진하는 잠재력이다. 사회적 본능은 상부상조와 사회적 복리를 이루는 잠재적 요소다. 개인적 본능 측면에서 인간 마음의 지배자는 종교이고, 인간 욕망을 지배하는 것은 소유욕이며,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정부다. 정부는 인간의 노예상태를 유지시키는 요새로 온갖 공포를 조성한다. 종교는 인간 마음을 지배하고, 인간 영혼을 수치스럽게 만들고 타락시킨다. 신들이 활동을 시작한 이래 이땅은 어둠과 눈물, 피가 지배했다. 인간 욕망의 지배자인 소유욕은 보다 근본적인 자기 필요를 충족시킬 권리도 포기하게 한다. 재산권은 신성한 권리라고 주장하는 순간 그것은 종교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규제하는 요인이 된다. 재산권은 마치 ‘희생하라. 쾌락을 포기하라. 복종하라’는 종교적 계율처럼 신성시 되고 있다.

 

 

종교가 인간 정신을 속박하듯, 소유욕 곧 물질 독점이 인간의 필요를 지배하고 질식시키듯, 국가는 인간 영혼을 노예화시켜 모든 행동을 조작한다. 에머슨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정부는 본질적으로 독재다.’ 데이빗 소로우도 이렇게 말했다. ‘법이 인간을 정의롭게 만들지 못한다. 법은 정부를 존중하게 만드는 수단일뿐이다. 제대로 모양새를 갖춘 법은 매일 부정의를 집행하는 제도다.’ 정부 스스로는 가장 큰 범법을 자행하면서 가장 사소한 범법에 대해 재판하고, 비판하고, 처벌하며, 개인 자유를 말살한다. <플란다스의 개> 저자 위다의 정당한 주장을 들어보자. ‘국가는 오직 대중들에게 자신 요구에 복종하라고 은밀히 세뇌한다. 그러면서 국가 창고를 가득 채운다. 국가의 최고기능은 인간을 시계바늘처럼 일하게 만드는 것이다. 국가는 세금 내는 기계를 원한다. 이 기계에 고장이란 없으며 국가재정은 절대 고갈되지 않는다.’

 

 

불행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국가는 자연법에 근거하고 있다는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다. 그래서 국가가 사회적 질서와 조화를 유지시키고, 범죄를 감소시키고, 게으른 자가 동료 몫을 빼앗지 못하도록 국가가 막아준다고 믿고 있다. 정부가 자연스럽고 조화로운 요소들을 통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정부가 살아남기 위해 자행하는 일련의 폭력과 무력, 강압을 행사하는 모습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강요된 복종과 공포로 유지되는 사회 질서는 안전한 질서가 못 된다. 정부는 이런 질서를 유지할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가 정말 하기 싫은 일을 하도록 강요되는 한, 법조문은 점점 더 증가될 것이다.

 

 

법이 게으른 자를 게으르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주장 역시 참으로 억지에 불과하다. 어쩌다 발생하는 게으른 개인을 못 먹여살릴 이유는 없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게으름이 특권에서 생긴 경우와 신체적 정신적 장애로 생긴 경우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현 생산체제는 비정상적인 것으로 다들 일하기 싫게 만든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노동을 사랑하라고 강요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부는 기껏해야 모든 사람에게 단 한 가지 삶의 방식을 강요하고 있다. 각 개인의 사회적 차이와 필요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대중 마음 속엔 여전히 정치가 뭔가 해줄 거라는 미신이 굳게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진정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은 정치에 미련을 갖지 않는다. 자신이 쟁취하는 만큼 자유를 향유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나키즘은 직접적인 행동, 공개적인 저항을 표방한다. 모든 경제적 사회적 도덕적 법과 규제에 저항한다.

 

 

엠마는 다수(대중, 계급)에 대해 신뢰하지 않았다. 그녀는 개인 잠재력을 신뢰한다. 엠마는 개인 잠재력이 자유로워져 공통 목적을 위해 개인간 결사가 이루어질 때 혼돈스럽고 불평등한 이 세상에서 질서와 조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다수는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없다. 다수는 옳은 판단 능력이 없다. 도덕적 용기를 완전히 상실한 다수는 항상 자신 운명을 타자 손에 맡기고 있다. 스스로 책임질 능력이 없기에 다수는 파멸로 가는 줄도 모르고 지도자를 추종한다. 세계의 부는 소수에 축적되어 있다. 하지만 이 소수 성공은 개인주의 때문이 아니다. 대중의 무기력함과 비겁함, 철저한 순종 때문에 가능한 성공이다. 개인주의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에도 정상적이고 건전한 방법으로 온전히 표출되지 못했고 자기 위상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럴 기회가 별로 없었다.

 

 

겁쟁이들의 집합인 다수는 자기 영혼과 마음이 얼마나 가난한가를 반영해주는 여론을 그대로 수용한다. 모든 시대에서 항상 위대한 이념, 해방의 기치를 든 자는 소수였다. 대중이 기치를 들지 않았다. 대중은 이 무거운 깃발을 옮기지 못한다. 강철 같은 멍에를 뒤집어쓰고 문화적으로 이념적으로 문학적으로, 가장 내밀한 감성까지도 억압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독재자를 몰아내는 일이 가능하겠는가? 다수인 대중은 기동성이 떨어지고 게을러터졌다.

 

 

우리는 사회주의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사회주의는 더 이상 아름다운 이상이 아니다. 다수 의지에 힘입어 ‘현실적으로 작동하는 체계’가 사회주의다. 사회주의자들은 쉽게 자본주의 권위와 사유재산을 없애지 못한다. 저들은 다수의 미덕을 주장한다 왜? 사회주의자들의 목적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권력과 권위, 강제력은 대중 힘에 의존한다. 하지만 절대 거기엔 자유,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 자유로운 사회 탄생은 없다. 대중은 절대 정의나 평등을 대변하지 못한다. 다수는 인간 목소리를 억압하고, 인간 정신을 짓누르고, 인간 몸을 구속한다. 다수는 항상 삶을 획일화하고 잿빛으로 만들고 사막과 같이 단조롭게 만든다. 대중은 항상 개인성을 말살하고 자유롭게 표출되는 독창성의 발휘를 막는다.

 

 

에머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중 요구와 영향력은 조잡하고 서투르고 유해하다. 대중에게 교육이 필요하다. 나는 대중의 그 어떤 점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대중을 훈련시키고, 분열시키고, 쪼개어 각각 개인들로 만들어야 한다. 대중! 대중이 재앙이다.’”<저주받은 아나키즘>(우물이있는집, 2001)

 

 

 

 

 

 

 

 

 

 

 

 

 

 

 

“군중은 논리적으로 추론할 능력이 없기에 일체 비판 정신을 발휘할 수 없다. 즉 진실과 오류를 구분하지 못하며, 그 어떤 정확한 판단도 내릴 수 없다. 따라서 군중 상상력은 매우 강력하여 쉽게 감동한다. 그래서 군중에게 가장 큰 인상을 주는 것은 도저히 일어날 법하지 않은 일이다. 특히 군중은 오로지 이미지에 의해서만 감동한다. 그래서 이미지가 가장 선명한 포스터, 연극, 영화 공연은 언제나 군중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군중은 최면에 걸린 개인이 최면을 건 사람 손에 놀아나는 것과 매우 흡사하게 무의식적 활동의 노예가 된다. 군중 속 개인은 자신 행동을 더 이상 의식하지 못하고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어떤 능력은 사라지지만 동시에 다른 능력은 극도로 고양될 수 있다. 군중을 자극하며 감동시키는 방법은 군중 지성이나 이성에 호소하면 안 된다. 일체의 부차적 해석이 필요하지 않거나, 아니면 경이롭고 신비한 사실을 매우 선명한 이미지 형태로 제시해야 한다. 예를 들면 위대한 승리나 엄청난 기적, 흉악한 범죄, 거창한 희망 등이다. 군중에게 그런 것을 추상적으로 소개해야 하며, 발생 경위 등 세세한 것을 알려 주어서는 안 된다. 잡다한 범죄나 사소한 사건은 아무리 많이 발생해도 군중 사상을 자극하지 못한다. 군중 사상에 충격을 가하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런 사건이 어떻게 분류되고 소개되느냐 하는 것이다. 군중은 자신들이 믿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기에 권위적인 동시에 비관용적이다. 개인은 반론과 토론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군중은 결코 그렇지 않다.”<군중심리>(문예출판사, 20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시 자본을 읽자 북클럽 자본 시리즈 1
고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는다는 것은 두려움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나도 ‘물들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 적어도 나는 내가 살아갈 세상에서 편안함을 느끼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공부해나가면서 자꾸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에게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지, 공부란 어떤 것인지, 내 앎을 추동하는 의지는 무엇인지, 나는 계속해서 나에게 되묻게 된다. 그러면 나는 많이 부끄러워진다.

 

 

니체는 인식의 매력이 인식 앞에 놓인 부끄러움을 극복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것에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예전 자기 자신과 거리가 좀 생긴 것이다. 그래서 부끄러움에는 고통과 기쁨이 함께한다. 부끄러울 줄도 모르고 저질렀던 일이 창피하다. 마르크스 <자본>은 내게 그런 독서의 상징이다. 주체 변형에 대한 예감 속에서 이루어지는 독서다. 도무지 주체를 유혹하거나 변형시킬 아무런 힘도 없는 지식들의 시대에, 책에서 아무런 마력도 기대할 수 없는 권태로운 시대에 주체 변형의 위험과 매력이 공존하는 독서가, 마르크스 <자본>을 읽는 일이다.

 

 

나는 <자본>을 읽을 때면 꼭 추리소설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마르크스가 완전범죄에 가까운 절도 내지 살인 사건을 파해쳐가는 탐정 같다. 특히 잉여가치 발생을 해명하는 과정은 탐정이 밀실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하지만 <자본>은 일반 추리소설과 아주 다른 점이 있다. 추리소설은 대개 개인 범죄만을 다룬다. 아니, 범죄를 개인화한다고 말할 수 있다. 범인이 왜 그런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는지 구조적인 문제를 파고들지 않는다.

 

 

더 나아가 추리소설은 사회구조가 개인들에게 저지른 범죄를 아예 생각지도 않는다. 브레히트가 희곡 작품에서 한 유명한 말이 있다. ‘은행을 설립하는 것에 비하면 은행을 터는 게 무슨 대단한 일입니까?’ 은행의 범죄성과 은행강도의 범죄성을 비교하는 대사다. 추리소설은 은행강도의 범죄성을 다루지만 은행의 범죄성을 다루지는 않는다. 추리소설은 사회 불안요소를 오직 범죄자 개인에게서 찾는다. 탐정은 위험요소를 적발하고 제거함으로써 체제를 안정화한다. 그의 추론은 질서의 확인이다.

 

 

문학비평가 프랑코 모레티가 잘 지적했다. 추리소설에서 범인은 항상 예외적 개인이며, 그의 패배는 사회 승리이자 정화라고. 모레티에 따르면 추리소설은 단지 표면적 의미만 드러낸다. 심층적 의미는 은폐한다. 다음 지적은 아주 흥미롭다. ‘돈은 항상 추리소설에서 범죄의 동기지만, 이 장르는 생산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한다. 통속적 경제학과 마찬가지로 추리소설은 사람들이 유통 영역에서 이윤 비밀을 찾도록 부추긴다. 하지만 거기서 이윤 비밀을 찾을 수는 없으며 그 대신 도둑질, 신용사기, 사기, 사취 등을 발견한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완전히 다르다. 그가 추적하는 범죄는 제도의 범죄, 체제의 범죄다. 그는 합법적 약탈과 살인을 다룬다. 그래서 <자본>의 범죄자는 개인 얼굴을 하고 있을 때조차 체제의 담지자로 그려진다. 그는 그저 배역을 연기하는 연기자일 뿐이다. 범죄성은 개인적 캐릭터가 아니라 사회적 캐릭터다. 개인은 책임이 없다. 자본가는 단순한 절도범이나 강도가 아니다. 그의 절도와 강탈은 합법적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가 추적하는 범죄는 합법적 절도와 강탈인 셈이다. 이 점에서 <자본>은 아주 독특한 추리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을 ‘증식하는 가치’라고 규정했다. 계속해서 증식하는 가치, 다시 말해 끊임없이 ‘잉여가치’를 낳는 가치만을 그는 ‘자본’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본다면 ‘자본’ 개념은 ‘가치’의 한 종류와 같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건을 생산하는 가장 큰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지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제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 개념이 존재하는 이유는 ‘자본’을 위해서다. 개념적으로만 보면 ‘자본’ 개념이 ‘가치’ 개념에서 파생한 것 같지만, 현실적으로는 ‘자본’ 덕분에 ‘상품’이 존재하고 ‘가치’ 개념도 존재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자본의 운동은 실제로 자기운동이 아니다. 그렇게 보일 뿐이다. 자본 증식은 노동의 착취다. 자본이 스스로 운동하는 것처럼, 자본이 능력을 가진 것처럼 보일 뿐이다.

 

 

자본주의에 내재한 범죄인 착취가 ‘결과’, 즉 생산된 가치를 분배하는 문제였다면 우리는 재분배를 통해 이를 바로잡을 수 있다. 하지만 ‘전제’가 문제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자본주의 경제형태가 작동하기 위해 착취가 전제되어 있다면, 다시 말해 상품 생산과 가치증식이 착취에 입각해서만 가능하다면 이야기가 아주 달라진다. 이렇게 되면 잣대를 대고 비뚤어진 것을 바로 잡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교정’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잣대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불법 문제가 아니라 법 자체 문제인 상황인 거다. 마르크스 비판이 요구하는 게 이것이다. 체제 원리에 입각한 교정이 아니라 체제 자체의 역사적 이행!

 

 

자본가는 구매자의 권리를 내세우며 노동력의 자유로운 사용을 요구하고, 노동자는 판매자 권리를 내세우며 판매하지 않은 것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이 장면에서 둘 다 옳다고 말한다. ‘옳음 대 옮음’, ‘권리 대 권리’ 충돌이다. 그렇게 되면 이율배반이 생겨난다. 대립하는 주장인데 둘 다 옳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순이라기보다 역설에 가깝다. 역설에는 긍정하는 것이 부정하는 것이 되고 부정하는 것이 또한 긍정하는 것이 된다. 둘은 구분되지 않기에 대립하지도 않는다.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현존 체제를 떠 받치는 논리가 어떤 난처함에 처 한 것이다. 모순 상황에서는 한쪽 힘이 커지면 다른 쪽 힘이 작아지지만, 역설 상황에서는 한쪽이 커지면 다른 쪽도 커진다. 이런 역설에서는 논리가 더는 기능할 수 없다. 논리가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여기에는 ‘힘’이 재판관으로 들어온다고 말하고 있다. 논리적 추론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에, 즉 어느 쪽이 힘이 센가에 달렸다.

 

 

마르크스는 위험을 체제 구성 원리 자체에서 찾았다. 구성 원리에서 해체 원리를 본 것이다. 그렇지만 마르크스 부정은 긍정에 대한 제약이기는커녕 긍정과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란 자본주의와 나란히 성장하는 잠재 사회다. 체제를 부정하는 혁명가는 긍정의 정신 소유자일 수 있다. 이상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혁명가는 ‘다른 미래의 흔적’을 빨리 읽어내는 사람이다. 자본주의에 밀착해 있는 자본주의의 죽음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정치경제학이라는 학문은 위기를 맞았다. 이 학문이 위기에 처한 것은 어떤 오류가 발견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바로 앎의 의지다. 학문을 추동한 의지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학문의 이론적 비판은 정치적, 사회적 혁명과도 깊이 관련된다. 비판이 이론을 떠받치는 ‘근거’의 ‘근거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그것의 정치적 의미는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비판은 두 가지를 구분해야 한다. 하나는 남용, 위반, 자의에 대한 교정으로서의 비판이다. 다른 하나는 척도나 경계에 대해 따지고 문제 삼고 실험하는 것으로서의 비판이다. 전자가 진리와 오류, 옳음과 그름, 진실과 허위의 구도 위에서 이루어지는 비판이라면, 후자는 그것을 판단하는 잣대가 바뀌는 것, 말하자면 사회구조 자체의 변형과 연관된 비판이다. 후자는 역사 이행을 의미한다. 전자는 교정으로서의 비판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이행으로의 비판이다.

17~18세기 대표적 이론인 사회계약론은 사회가 사적 부르주아들의 이익공동체에 다름 아님을 잘 보여준다. 결합 주체로서 개인, 결합 형식으로 계약, 결합 목적으로서 이익, 이것이 사회계약론이 말하는 사회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헤겔은 현실 과정이 ‘인간 두뇌에 번역된 것’을 거꾸로 세웠다. 현실 과정에 따라 자신 두뇌 속에 관념들의 체계를 구축했으면서도, 나중에 구축된 것이 먼저 존재했고 마치 그것에 따라 현실 과정이 만들어진 것처럼 생각했다. 효과를 원인으로 본 셈이다. 현실 과정을 논리적으로 서술하고 나니 그 논리에 따라 현실 과정이 생겨난 것처럼 ‘보인’ 것이다.

각 사회가 처한 환경과 내부 요인이 매우 다양하기에 이행 경로는 달라질 수 있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역사적 이행’과 관련해 철로를 뜻하는 ‘라우프만’이라는 단어를 썼다. 그는 혁명이라는 열차가 달리는 궤도가 단선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새로운 사회형태의 출현이 ‘태곳적 사회형태’를 고차적 형태로 재탄생시키는 일이라는 놀라운 언급까지 했다. 러시아 사회를 공부해가면서 마르크스는 역사 이행이 단선적이지 않으며, 과거의 사회형태는 단순히 지나쳐야 할 정거장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형태의 출현을 위해 더 고차원적 형태로 반복될 필요가 있다는 점도 이해하게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올해 하반기 읽은 책 분류
사회 11, 역사 8, 물리 4, 철학 3, 수학 3, 경제 2, 인류 2, 뇌과학 2, 진화 1, 미술 1, 영화 1, 음악 1, 글쓰기 1, 생물 1, 언어 1 (모두 40권)

 

 

●  올해 하반기 단 하나의 문장
가난은 부(富)에 의해 만들어지며, 부가 눈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까지 우리는 가난이 가난인 줄 모른다. - 윌 듀런트

 

 

●  올해 하반기 아쉽게 순위에 들지 못한 책 9권
<자본론을 읽다> /경제,  <개미제국의 발견> / 생물,  <세상에서 가장 쉬운 베이즈통계학 입문>  /수학, <김상욱의 양자 공부> / 물리, <지능의 탄생> /뇌과학, <저주받은 아나키즘> /사회 <지중해의 기억> /역사, <거꾸로 보는 고대사> /역사, <노동가치> /사회

 

 

 

 

 

 

 

 

 

 

 

 

 

 

 

 

 

 

 

 

 

 

 

 

 

 

 

 

 

 

 

 

 

 

 

 

 

 

 

 

 

●  그럼, 올해 하반기 읽은 책 Best Top 10

 

 

10.

 

 

 

 

 

 

 

 

 

 

 

 

 

<감각의 제국>
문강형준 지음
북극성, 2017년 3월, 368쪽 /사회

 


우리에게 도덕적 기쁨을 주는 사람이란?

 

 

우리나라 70, 80년대 ‘진정한 인간들’은 사회 투쟁에 자신 몸을 내던진 바 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할 뿐 아니라 더 가혹해졌다. 진정성이 사라진 뒤, 90, 2000년대 ‘속물적 인간들’은 이미 세계 법칙에 적응했다. 가치가 아니라 생존이 정언명령이므로, 그냥 살아남는 것, 더 성취하는 일만이 최고 가치다. 진정성이 허무를 준다면, 속물성은 역겨움을 준다.

 

이제 우리 문화는 진정성도 속물성도 아닌 제3의 길을 내고 있다. 진정성과 속물성이 반반 섞인 이들은 기본적으로 사회가 원하는 분명한 자기성취를 이뤄낸 이들이다. 노력으로 돈과 명예, 인기, 지위를 얻어냈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올바른 가치관, 정의로운 시선도 함께 갖고 있다.

 

최근 손석희와 김제동, 최진기, 박원순이 누리는 인기는 이를 보여준다. 종편에 출연하지만 그곳에서 기득권을 비판하고, 제도권에서 성공했지만 그곳에서 송곳처럼 튀어나오는 사람. 우리에게 ‘도덕적 기쁨’을 주는 사람은 성취와 가치를 함께 이룬 이들이다. 점점 부상하는 이 새로운 인물형은 착한 사람이 다 죽어버린 이 ‘가차 없는 세계’에 대응하는 진정한 인간형이다.

 


9.

 

 

 

 

 

 

 

 

 

 

 

 

 

<이브의 일곱 딸들>
브라이언 사이키스 지음, 전성수 옮김
따님, 2002년 2월, 316쪽 /인류

 

 

세상 사람들은 생각보다 더 가깝다.

 

 

인류유전학 연구는 객관적으로 정의된 종족(race)이 지구상 절대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가장 높은 순수성을 자랑하는 민족도 이질성이 존재할 따름이다.

 

예를 들면, 영국 에든버러의 한 초등학교 교사는 아주 확실하게 폴리네시아인 미토콘드리아 DNA 유형을 가지고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어떻게 그 DNA가 전해졌는지 어렴풋하게 어떠한 단서도 없다. 하지만 분명히 전해졌다. 그녀는 매력적인 선장을 만나 사랑에 빠진 타이히 공주 후손일까, 아니면 마다가스카르 해안에서 아랍인에게 잡혀온 노예 후손일까?

 

한국인 미토콘드리아 DNA 서열이 노르웨이나 북부 스코틀랜드 어부들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이유는 또한 무엇일까?

 

 

8.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유발 하라리 지음, 전병근 옮김
김영사, 2018년 9월, 560쪽 /사회

 

 

일자리를 빼앗을 인공지능이 문제가 아니다.

 

 

보편 기본소득의 진짜 문제는, ‘인간의 기본적 필요’를 어떻게 정의하든, 일단 한 번 누구에게나 그것이 무료로 제공되면 당연하게 여길 것이라는 점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만족을 위해 설계되지 않았다. 인간 행복은 객관적 조건보다 자신 기대에 더 크게 좌우된다. 여건이 극도로 좋아진 후에도 불만족스러운 상태가 된다. 사람들이 자신 운명을 주관적으로 더 만족스럽게 여겨 사회 불만이 없도록 할 목적이라면, 보편 기본소득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행복이라는 목표를 진정으로 달성하려면 보편 기본소득은 의미 있는 삶과 함께 보완되어야 한다. 일-이후(이외) 세계에서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방법, 심지어 가난하고 직업이 없더라도 삶의 만족도를 높일 방법을 먼저 찾아야 한다. 보편 기본소득과 더불어 강력한 공동체와 의미 있는 삶의 추구를 함께 결합할 수만 있다면, AI가 우리 일자리를 빼앗더라도 우리는 실제 행복할 수 있다.

 


7.

 

 

 

 

 

 

 

 

 

 

 

 

 

<트랜스크리틱>
가라타니 고진 지음, 이신철 옮김
도서출판 비, 2013년 10월, 478쪽 /사회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 경제성장은 주효할 것인가?

 

 

소득주도 성장은 개별 기업 이기주의를 억제하여 역으로 개별 기업 이윤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기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된다는 애덤 스미스 생각의 부정이다. 또한 개인 소비를 장려하는 소득주도 성장은 근면과 저축을 강조하는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정신(베버)’에 반한다. 잉여가치 실현을 개별 기업이나 생산 과정에서만 보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잉여가치는 이윤과 달리 각 기업 내에서는 생각할 수 없다.

 

잉여가치는 노동자가 노동력을 팔고 소비자로서 생산물을 되사는 ‘유통 과정’에서만 존재한다. 물론 개별 노동자는 자신이 만든 물건만 사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사회 전체로 보면, 노동자는 자신이 만든 상품을 되사는 셈이다. 잉여가치는 개별 기업이 아닌 사회 전체 ‘총자본’에서 생각되어야 한다.

 

기업가는 이윤을 추구하려고 가능한 노동자 임금을 깎으려 하거나, 긴 시간 일하게 하려고만 한다. 하지만 모든 자본이 그렇게 하면 잉여가치를 실현할 수 없다. 생산물을 사는 소비자는 노동자 자신이기 때문이다. 개별 기업이 이윤을 확보할수록 사회 전체 경제불황은 악화된다.

 

 

6.

 

 

 

 

 

 

 

 

 

 

 

 

 

<빈곤론>
가와카미 하지메 지음, 송태욱 옮김
꾸리에, 2009년 8월, 256쪽 /경제

 

 

분배는 해답이 아닐 수 있다.

 

 

사회문제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은 가난 퇴치 방법이 빈민소득 증가에 있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우리 생활에 필요한 물건은 이미 풍부하지만, 분배가 잘 안 되어 많은 사람이 어려운 처지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기계 생산력은 향상됐지만 그 힘이 완전히 억제되어 충분히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에 많은 사람이 가난하다.

 

 

오늘날 경제 이론은 수요가 있는 곳에 상품이 공급된다는 원칙을 기반으로 한다. 그렇지만 여기서 수요란 재력이 동반되는 수요다. 현대 경제체계에서 다수 빈민에게 제공되어야 할 상품은 수요를 조금만 초과해도 바로 시세가 떨어져 사업가가 큰돈을 벌지 못하기에 생산이 억제된다.

 

 

자본주의 산업은 기업 영리 활동 목적에 복속되어 있어 사회가 인간 삶 향상보다 기업 이윤을 우선시한다. 기업이라는 분배 권력이 생산을 결정한다. 영리 기업은 사회에 물질 기여가 아닌 차등 이익을 극대화하고, 이윤 소멸 방지를 위해 자신 생산 활동을 전략적으로 제한한다. 따라서 거의 모든 현대 산업은 최대 기술 능력보다 훨씬 못 미치는 수준에서 가동되고 있다.

 

 

5.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정훈 옮김
샘앤파커스, 2018년 4월, 272쪽 /물리

 

 

미래와 관련 없는 정보도 존재한다.

 

 

열역학 제2 법칙(엔트로피)은 확률이 높은 일이 자주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당연한 내용을 담고 있다.

 

베이즈 정리의 조건부 확률도 세상에 일어나는 결과는 발생 가능성이 높은 원인 때문에 일어난다는 최우원리(最優原理)를 기반으로 한다. 조건부 확률은 추가적인 정보를 얻어 일부 가능성을 제거하고 나머지 현실로 결과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양자역학의 확률 특성도 일부 정보는 더 이상 미래 예측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한다. 양자역학에서 우리가 어떤 물리계와 상호 작용할 때(측정), 우리는 무언가(입자성)를 얻을 뿐 아니라 동시에 물리계 관련 정보 일부분(파동성)을 ‘삭제’한다. 우리가 어떤 물리계의 새로운 정보를 얻을 때, 물리계 관련  총 정보는 유한하므로 무한히 커질 수 없다. 따라서 정보 일부분이 관련성을 잃는다.

 

 

4.

 

 

 

 

 

 

 

 

 

 

 

 

<칼 마르크스>
이사야 벌린 지음, 안규남 옮김
미다스북스, 2012년 3월, 432쪽 /역사

 

 

자유주의와 공리주의 문제는?

 

 

'이성과 도덕이 결국 승리한다'라는 믿음은 합리주의 오류 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흔하고, 가장 케케묵었고, 모두 바보 천치 같은 주장 내지 아무 내용도 없는 공허한 말이라고 마르크스는 보았다. 그러한 주장은 자본가를 포함한 어떠한 인간도 합리적 주장에는 기꺼이 무릎 꿇을 뿐 아니라, 상황만 적정하면 도덕적 원리를 위해서 본인 출신과 부, 능력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더 정의로운 세계를 만드는 데 동참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고 마르크스는 지루할 정도로 되풀이해서 지적한다.

 

마르크스는 불변의 보편적 자연권과 양심의 자유가 있다는 견해가 자유주의 환상이라고 지적하며 단호히 거부한다. 도덕적, 정치적, 경제적 이론은 사회 조건이 변하면 함께 변한다. 보편성과 불변성을 믿는 것은 자본주의 질서가 영원하다고 믿는 오류를 낳는다.

 

18세기 이래 이상주의적 박애주의자의 윤리적, 심리학적 주장에는 줄곧 이러한 오류가 깔려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자유주의자와 공리주의자 가설을 경멸하고 혐오했다. 자유주의자와 공리주의자는 모든 사람 이해관계가 궁극적으로 같고 또한 지금까지 언제나 같았기에 사람들이 이해와 선의, 박애라는 원칙만 지킨다면 만족스러운 합의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사악한 형태의 위선이며 자기기만이다.

 

 

3.

 

 

 

 

 

 

 

 

 

 

 

 

 

<칼 맑스의 혁명적 사상>
알렉스 캘리니코스 지음, 정진상 외 옮김
책갈피, 2007년 3월, 320쪽 /사회

 

 

우리는 생각을 그냥 바꿀 수 없다.

 

 

인간 신념이나 소망, 능력은 사회에 따라 변한다. 사람 존재 방식은 자신이 사는 사회 유형에서 분리할 수 없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회적 존재다. 사람이 사회 밖에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는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경제학자들은 개인을 사회에서 고립된 ‘자연인’ 개념에 두고 소유권과 시장 경제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지만, 사실상 그런 ‘자연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일삼는 고립된 개인으로 보는 관점은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을 정당화할 뿐이다.

 

사회의 다양한 측면은 오직 전체를 보고 이해해야만 한다. 새로운 사상은 생활의 물질적, 사회적 조건에서 제기된 문제를 고민할 때 탄생한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새로운 세계관을 채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질적, 사회적 조건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의식이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 결국 의식을 먼저 바꾸라는 요구는 현실을 그대로 둔 채 현존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만 바꾸라는 요구다. 사상이 물질적, 사회적 조건을 반영하는데도, 생각만 바꾸라는 요구는 물질적, 사회적 조건을 변화시키기 위한 투쟁이 불필요한 행위라고 말하는 것과 같기에 관념론은 밑바닥부터 보수적인 관점이다.

 

 

2.

 

 

 

 

 

 

 

 

 

 

 

 

 

<문명 이야기 1-1>
윌 듀런트 지음, 왕수민 외 옮김
민음사, 2011년 5월, 634쪽 /인류

 

 

원시인과 현대인 사이는 지극히 짧고도 좁다.

 

 

순진하게도 우리는 인간이 옛날 낮은 수준의 문화를 거쳐 끊임없이 발전해 오늘날 유례없이 절정기에 이르렀다고 여기는데, 이는 부질없는 생각이다. 자신 이외 다른 인간에게 ‘야만인’이나 ‘미개인’이라는 말을 쓰는 것부터가 객관적 사실 표현일 수 없다. 넓은 도량과 갖가지 윤리와 관련해서 우리에게 많은 걸 가르쳐 줄 수 있는 원시인을 과소평가한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원시인과 현대인 사이 거리는 지극히 짧고도 좁다. 인류 문명 역사는 그만큼 짧다. 게다가 현대인 윤리라고 반드시 원시인 윤리보다 나은 건 아니다.

 

한번은 영국인이 ‘원시인’ 사모아인에게 런던 빈민에 관해 이야기 해 주자 그 ‘야만인’은 깜짝 놀라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요? 음식이 없다고요? 친구도 없어요? 살 집이 없다고요? 그 사람이 자란 곳이 어디인데요? 그의 친구가 가진 집도 없어요?” 그들에게는 마을 어딘가에 옥수수가 자라는 한 음식이 모자라는 사람이 있을 수 없다. ‘원시인’ 호텐토트족 경우, 다른 사람보다 많이 가진 자가 있으면 모두 똑같아질 때까지 잉여분을 나누는 것이 관례다. 이들은 배고픈 자를 돌보지 않았다고 비난받느니 차라리 자기 배가 고프고 마는 편을 택한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의 커다란 가족으로 생각한다.

 

 

1.

 

 

 

 

 

 

 

 

 

 

 

 

 

<역사의 풍경>
존 루이스 개디스 지음, 강규형 옮김
에코리브르, 2004년 3월, 275쪽 /역사

 

 

역사는 우리가 현재와 미래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한다.

 

 

과거가 풍경이고 역사는 그것을 묘사하는 방법이다. 과거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학자 스스로 과거에 의미를 부여한다. 역사학자에게 역사 서술의 시발점이 되는 것은, 예컨대 ‘친구들이여, 이게 무슨 나라란 말인가?’와 같은 감정과 직관이다. 역사학자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와 같은 상황에 직면한다. 관찰이라는 행위가 관찰 대상을 바꿔놓는다. 역사 서술에 완벽한 객관성은 거의 기대할 수 없으며, 따라서 진리도 존재할 수 없다.

 

역사는 사실의 ‘묘사’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묘사는 사실이 되어버린다. 이런 묘사는 사건에 대한 동시대인의 일차적 기억과 경쟁하고, 어느새 그 속에 스며들며, 결국 그들 기억을 완전히 대체한다.

 

이때 역사학자는 과거를 해방하는 역할을 한다. 역사학자는 일어난 일에 단 한 가지 설명만이 유효하다는 가능성에서 과거를 해방한다. 역사의 무게가 현재와 미래에 짐이 된다면, 역사학자 역할은 분명히 이 짐을 덜어내는 노력일 것이다. 현재 존재하는 것이 과거에 반드시 그랬던 것은 아니므로 미래에도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점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학자는 사회비평가야 한다. 역사로 현재와 미래를 해방해야 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yo 2018-12-04 01: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북다님.... 올해도 엄청난 한 해셨네요.

북다이제스터 2018-12-04 10:57   좋아요 0 | URL
syo 님께서 올해 읽으신 책들에 비해서는 별로요....ㅠㅠ
그래도, 죽을둥살둥 읽으려고 노력한 점을 알아주시는 syo 님 칭찬이니 감사합니다.^^

올 한해 좋은 책 많이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년에도 부탁드립니다.^^
 
스노든의 위험한 폭로 -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은 국가와 언론을 고발한다
루크 하딩 지음, 이은경 옮김 / 프롬북스 / 201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구글, 스카이프, 아이폰, GPS, 유튜브, 전자상거래, 인터넷 뱅킹은 모두 감시 기계로 변모했다. 미국 NSA는 휴대전화를 마이크 달린 추적 장치로 바꿔놓을 수 있다. 인터넷은 역사상 최대 염탐 기계가 되었다. 이 말은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미국과 영국은 지구상 일어나는 의사소통 내용 중 상당 부분을 도청할 수 있다. 한 술 더 떠서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심지어 애플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많은 실리콘 밸리 기업들이 NSA와 엮어 있다. NSA는 이런 거대 기술기업의 서버에 직접 접근한다. NSA는 직원 4만 명을 고용하고 있으며, 미국에서 가장 많은 수학자를 채용하는 기관이기도 하다. NSA 임무는 세계 도처에서 신호정보를 수집하는 일이다. NSA는 미국 군사기지, 대사관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 도청기지를 갖고 있다. NSA는 ‘접속 연쇄화’라는 방법을 이용한다. 사람들의 전화를 듣거나 이메일 내용을 읽지 않고도 사람 관계도를 수립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를 폭로한 스노든은 언제 내부고발자가 되겠다는 운명적인 결정을 하게 되었을까? ‘마음에 걸리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모든 사실을 알고 나면 그중 일부는 권력 악용이라는 걸 깨닫게 되죠. 부정행위를 인식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집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침에 일어나서 폭로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닙니다.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죠.’ ‘오바마 당선 이후 저는 환멸을 느꼈습니다. 그는 전임자가 수행하던 정책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심지어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몇몇 정책을 더욱 심화하고 확대했으며, 아무 혐의도 없는 사람들이 갇혀 있는 관타나모에서 벌어지는 인권침해를 끝내기 위한 정치자본 투자를 거부했습니다.’


스노든은 내부 경로를 통해 문제를 제기해봐야 헛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부를 향한 항의는 처벌로 이어질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물론 NSA 내부에도 스노든처럼 반대 의견이 많았다. 명백히 눈에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공포와 잘못된 애국심’으로 조직 방침을 따랐고, 그 결과는 ‘권위에 대한 복종’이었다. 게다가 범법행위를 저지른 당사자에게 그 범법행위를 보고해야 하는 꼴이었다. 스노든은 진실을 모르는 피통치자 동의는 동의가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어느날 기자가 스노든에게 물었다. ‘당신이 하려는 국가기밀 폭로 행위는 범죄입니다. 남은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정말 그럴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스노든은 답했다. ‘우리는 정부에서 저지르고 있는 범죄행위를 충분히 보아왔습니다. 내게 혐의를 씌운다면 그 주장이 위선이죠. NSA는 거의 모든 것을 도청할 수 있는 기반시설을 구축해왔습니다. 이런 능력을 바탕으로 사람들이 주고받는 의사소통 대부분을 자동적으로 집어삼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터넷을 인류 전체를 감시하는 기계로 변화시켰습니다.’


기본적인 자유와 프라이버시는 소중히 지켜져야 한다. 이를 몰래 침범하는 정부 행동은 영토를 점령하는 공격과 맞먹을 정도로 끔찍하고 위법적인 침입이라고 여겨야 한다. 예컨대 독일인들은 빅 브라더 스타일의 감시를 본능적으로 싫어한다. 감시 카메라가 널려 있는 미국, 영국과 달리 독일 거리에는 CCTV가 거의 없다. 구글은 2010년 스트리트뷰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광범위한 저항에 부딪혔다. 구글 지도에서 직접 독일을 찾아보면 여전히 모자이크 처리된 부분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은 통일 후 첫 번째 인구조사 통계를 2013년 여름에야 처음 시행했다. 독일인들은 기본적으로 자신 개인 데이터를 정부에 제공하는 것을 꺼린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프리쿠키 2018-12-01 15: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조지오웰의 1984가 다시한번 대단한 작품인걸 실감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18-12-01 18:19   좋아요 1 | URL
네 그렇습니다.
1984로 무척 늦은 감 있는 현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