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중해 지역의 삶을 포근하고 편안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매력적인 풍경에 의한 착각이다. 경작지는 부족한 반면 메마르고 척박한 산들이 사방에 널려 있다. 지중해의 물은 항상 따뜻해서 생물학적으로 자원이 풍부하지 못하다. 갑각류와 물고기 종이 다양하지 못하며, 게다가 그 크기도 작은 편이다. 플랑크톤이 적기에 바다 수면은 투명할 정도로 푸른빛을 띤다. 반면 중동에서는 큰 기후 변동이 없었기에 식물군과 동물군이 가축 사육에 적합했다. 기원전 8000년경 중동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마을이 벌써 존재하고 있었다.


쟁기 등장으로 당시 삶의 큰 변화가 있었다. 그때까지 여자들이 어떻게 땅을 경작하고 곡물을 키우느냐에 모든 것이 달려 있었다. 남자들은 사냥을 하고 가축을 돌보았다. 하지만 이제는 남자가 쟁기를 인계받았고, 농사는 남자 몫이 되었다. 단숨에 사회가 여가장제에서 가부장제로 넘어간 듯했다. 또한 전능한 여신들이 지배하던 세계에서 남신들의 세계로 넘어간 듯했다. 실제로 신석기 공동체에서 흔히 발견되던 여사제의 풍년제는 사라지고, 수메르와 바빌론에서는 남자 제사장들이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다.


언제가 경제학자 케인스는 기원전 3000년경 고대 이집트 제국을 두고 ‘농촌과 도시에서 생산한 잉여생산물을 거대하고 불필요한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데 소비함으로써 인간적으로나 경제학적으로 완벽한 모델을 보여주었다’고 농담조로 말했다. 요컨대 고왕국시대에 이집트는 자급자족 사회로 바깥세계와 거의 교류하지 않아서 경제는 ‘경기과열’의 위험이 없었다. 하지만 기원전 2000년대에 어쩔 수 없이 국제무대에 발을 내디디며 대문을 굳게 지켜야 하는 상황이 닥치면서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평화적인 프로젝트에 투자하던 것을 그때부터 군대가 소비하기 시작했다.


이집트는 순종의 사회였다. 순종은 초기 문명세계의 숙명이기도 했다. 신들이 큰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수많은 신들이 모든 것을 다스렸기에 메소포타미아인들도 일상 삶에서 신들의 존재를 잊지 않았다. 그렇지만 무엇이든 뚫어보는 눈을 가진 메소포타미아 신들은 인간에게 두려움과 고통을 안겨주면서 영생에 대한 희망은 주진 않았다는 점에서 이집트 신들과 달랐다. 영웅 길가메시조차도 죽음을 생각하며 절망에 몸부림쳤다. 예언과 신탁은 신전의 몫이었고, 그 집행은 주로 군주에게 맡겨졌다. 보통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군주도 신의 뜻을 잘못 해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며 살았다. 메소포타미아 세계관에 따르면 신들은 지상의 번영과 질서를 바랐다. 그들이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로의 건설, 무역로의 개척, 대규모 작업장, 행정조직의 개혁 등이 공동체 행복과 군주 영광을 위해 신이 내린 계시라고 둘러댄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인간이 이루어낸 최초의 대규모 사회조직이었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순종은 맹목적인 두려움의 산물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회적인 결속을 다지기 위한 끈이었으며, 달리 말하면 집단적인 삶에서 필요한 의무 인식이었다.


시리아 사막의 사람들은 여러 작은 부족으로 나뉜 셈족이었다. 기원전 3000년경 초부터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를 향해 북쪽으로 이동했다. 그곳에 정착한 첫 종족은 대체로 아카드인이라 알려져 있다. 셈족의 두 번째 이동은 가나안족과 아모리족의 이동이었다. 그들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을 차지했다. 아모리족의 일부는 메소포타미아 도시들에도 스며들어가, 나중에 우르의 제3왕조를 무너뜨리는 데 기여하면서 궁극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기도 했다. 함무라비가 바로 아모리족의 일원이었다. 기원전 1230년경 히브리인들이 팔레스타인의 한적한 산악지대에 정착했다. 가나인과 블레셋인의 저지로 히브리인들은 평원으로 내려올 수 없었다. 기원전 900년경 드디어 아랍인들이 이 지역에 들어왔다.


기원전 653년 스키타이가 메디아 왕국을 예속시켰다. 메디아는 스키타이 지배를 받은 몇 년 동안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페르시아의 강력한 기병부대의 전신이 되었던 메디아의 기병부대는 스키타이의 혁명적인 기마전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스키타이의 뛰어난 기마부대가 없었다면 페르시아 제국도 없었을 것이고, 중동의 통일이나 ‘팍스 페르시카’(pax persica)도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중동을 탐내지 않았을 것이다.


기원전 2500년경부터 크레타 섬은 풍요를 누리기 시작했다. 크레타는 시리아와 접촉했으며 이집트와도 직간접으로 접촉하고 있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역동적이고 외부 지향적이며 독창적인 문명을 만들어내고, 외부에서 들여온 것들을 그들에게 맞게 재구성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크레타에서 발굴된 석관에는 죽은 사람이 자신 무덤 앞에 서서 산 사람들의 마지막 제물을 받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런 그림에서 보듯이 크레타인들이 신이나 성직자 또는 죽음을 두려워했다는 증거가 없다.

 


미케네인의 선조 격인 초기 그리스인 아카이아인은 인도-유럽계 침략자였다. 인도-유럽계는 기원전 20세기 이전 헝가리에서 흑해와 카스피 해 그리고 쿠르케스탄까지 이어지는 스텝과 사막에 살고 있었다. 인도-유럽계는 대담한 용기와 군사적인 조직력으로 서유럽, 이란, 인도(기원전 15세기), 그리스, 중동 등지에서 승리를 거둔 침략자였다. 이집트의 델타 지역을 침략해서 한 세기 동안 다스린 힉소스족도 인도-유럽계로 여겨진다. 그들은 말과 전차라는 신무기로 이집트군에 파죽지세로 승리를 거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2000년경 인도-유럽계는 그리스에 도래했다. 그들은 에게 해 주변에 정착하고, 이미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종속시키며 도시들과 문화를 파괴했지만 현지인에 동화되었다. 예를 들면 그리스어는 현지 언어를 많이 차용했다. 코린토스, 아테네 같은 도시 이름, 심지어 델포이의 신탁까지도 그 어원이 그리스어가 아니다. 아킬레우스와 율리시스 같은 호메로스의 영웅들도 원래는 그리스 이름이 아니다. 농경에 관한 많은 단어도 그리스어에 어원을 두지 않고 있다. 밀, 포도주, 무화과, 올리브, 백합, 장미, 재스민 등의 이름이 대표적이다.”

 

 


 

이집트인들은 무모하게도 펠리컨, 표범, 왜가리, 두루미, 영양, 하이에나, 가젤 등과 같은 야생동물까지 가축으로 길들이려고 실험했다. 이런 실험은 실패했지만, 뜻밖의 소중한 결과를 낳은 도전적인 실험도 있었다. 예컨대 고양이, 나일강의 거위, 비둘기, 닭을 가축화시키는 데는 성공한 것이다(특히 닭은 기원전 1500년경에야 처음 이집트에 소개되었다. 투트모세 3세의 연보에 연중 아무 때나 알을 낳을 수 있는 이 이상한 새가 처음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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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개봉한 영화 <하이-라이즈>의 예고편은 이 영화를 계급 투쟁을 다룬 봉준호 감독 영화 <설국 열차>의 ‘수직 버전’이라고 홍보했다. 영화 <하이-라이즈>에서 40층 높이 ‘하이-라이즈’에 사는 등장인물 계급은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거주 층에 따라 계급이 나누어진다. 건물 하이-라이즈의 설계자인 안토니 로열(제레미 아이언스 分)을 비롯한 상류계급은 40층 펜트하우스에 산다. 주인공 쁘띠부르주아인 닥터 랭(톰 히들스턴 分)은 25층, 하층계급 리처드 와일더(루크 에반스 分)는 아래층에 산다. 현대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를 비판한 영화 속 단순한 상징이라고 보았는데, 고대 로마 공동주택인 인술라(insula)는 계급에 따라 실재 거주층이 달랐다.

 

 

 

 

 

 

 

 

 

 

 

 

 

 

 

 

"인술라는 현대 기준으로 볼 때도 상당한 높이로 7층 건물에 가까운 높이에 해당한다. 오늘날에는 사회적 구분이 빈민가라는 구역으로 존재하는 반면에, 로마 제국 당시에는 거주지 층으로 존재했다. 불과 수십 센티미터 간격으로 또 다른 삶의 공간이 시작된다. 맨 꼭대기 층에는 빈곤함에 찌든 가난한 사람이 사는 반면, 2층에는 부유한 사람이 산다. 오늘날과는 정반대다. 이유는 간단하다. 무엇보다도 힘이 드는지 아닌지 여부가 분명한 이유다. 엘리베이터가 없으므로 높은 층에서 사는 사람일수록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힘겨움이 더하다. 거기에다 안전상 이유가 더해진다. 사실 건축은 양심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투기꾼들 손아귀에 있다. 높이 올라갈수록 건물은 점점 더 부실해지고 붕괴 위험도 높아진다. 게다가 다들 화로와 등불을 사용하다 보니 화재도 빈번하다. 저층에 사는 사람들은 쉽게 도망칠 수 있어서 목숨을 구할 수 있지만 고층에 사는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술라 고층에는 기본적으로 로마에서 힘을 써야 하는 사람들이 산다. 즉 매일 도시를 돌아가게 하는 노예, 노동자, 벽돌공, 가마꾼 혹은 상점이나 시장에서 물건을 나르는 이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선생이나 장인들도 살고 있다. 좀더 아래층에는 더 부유한 로마인들이 살고 있다. 예를 들면 로마의 행정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개인 사업가들이다.

 

 

반면 1층에는 돈이 많은 사람들이 산다. 부자, 기업가, 거상, 건설업자, 시 행정관, 혹은 제국의 권력계층과 긴밀하게 교류하며 일하는 사람과 원로원 의원 등이다. 이들은 일종의 소규모 도시 귀족이다. 물론 제국의 법률에 의해서 귀족으로 명명된 것은 아니지만 수도 로마의 거리와 건물 안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간단명료하게 정리한 로마의 공동주택 인술라의 사회계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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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10-11 13: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약 저자가 2층 이상의 건물이 거의 없는 우리나라의 전통 가옥을 본다면, 로마보다 비교적 평등한 사회라 할지, 아니면 단순히 농촌과 도시 차이라 할지 모르겠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18-10-11 23:27   좋아요 1 | URL
책엔 없지만 고대 로마 건물이 높고 우리나라는 낮은 건 온돌 혹은 온방 효과 차이 아닌가 싶습니다. ㅎㅎ

겨울호랑이 2018-10-12 04:11   좋아요 1 | URL
^^:) 정말 그렇네요. 그 차이는 온돌로 설명하는 것이 보다 명확해 보입니다. 감사합니다.^^:)
 

평균이 아닌 분포를 보자.


생물학자 스티브 제이 굴드는 1982년 거의 치료가 불가능한 암 진단으로, 앞으로 더 살 수 있는 기간이 중앙값(medain)으로 8개월밖에 남지 않았다고 판결을 받았다. 1985년 그의 기고문 <중앙값은 메시지 역할을 하지 못한다: the median isn’t the message>에서 어느 불확실한 변수의 평균값이 아닌 전체 확률분포함수를 관찰하고 고찰하는 것이 어떻게 그에게 다시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가져다주었으며, 결국에는 생명을 연장시키는 데 어떻게 도움을 주었는지 기술하고 있다.


중앙값은 전체 표본 값을 반반으로 나누게 하는 통계값이기에 굴드는 최소한 그가 8개월 이상 더 살 수 있을 확률이 50%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더욱이 그는 여러 관련 문헌들을 참고한 후, 사망에 이르는 시간의 확률분포함수가 오른쪽으로 완만한 경사진 형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의지하여, 굴드는 암 투병 중 삶에 대한 긍정적 태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여, 암투병에 승리했는데, 지금은 이러한 긍정적 태도가 암 투병에 승리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고 있다. 굴드는 그의 저서 <풀 하우스>에서 그의 경험을 담담하게 회상하고 있다.


‘나는 통계학과 생물학 역사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기에 불확실성 변수에 대한 변화량은 추상적인 측정값이고, 어느 누구에게도 적용될 수 없으며,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개인적인 경우들과는 관계가 없는 평균값 사용에 주의를 하게 되었다.’


굴드는 암과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질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 처음 암이 발견된 후 20년을 더 살았다. 우리는 굴드의 일화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10명 중 8명에게는 전혀 효과가 없지만, 남은 2명의 생명을 36개월 동안 더 연장해 주는 가상적인 치료약을 고려해 보자. 만약 여러분이 환자라면, 이 치료약을 사용했을 때 연장된 평균 수명 7.2시간이 보장된다고 정말로 생각하는가? 이에 대한 답은 그렇지 않고, 평균값은 5명 중 1명이 3년을 더 살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하기에, 이 기간 동안 여러분은 딸들의 결혼식에 참여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외손녀들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책 <평균의 함정>은 “의사결정 문제를 신중하게 생각할 때나 그렇지 않고 직관적으로 생각할 때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게 한다.” “불확실한 현상을 평균값으로 표시하면 무엇이 잘못되게 되는가? 당신이 여객기를 납치하고 10억 달러를 받은 후 아무 문제없이 사라질 수 있을 확률이 1,000만분의 1이라하면, 기대값(평균 금액)은 100만 달러가 된다. 하지만 여객기 납치로 확실하게 100만 달러를 벌 수 있을 것이라고 단정 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여러분은 불확실한 상황을 단 하나의 숫자인 평균값으로만 생각하는 습관을 버리고 확률분포로 파악하는 습관을 갖도록 해야 한다.”


프로젝트는 왜 항상 지체되는가? “예를 들어 개발 기간이 4~8개월인 소프트웨어 개발 프로젝트 10개가 동시에 진행될 경우 당신은 상사에게 프로젝트 종료를 평균 6개월 후라고 보고하면 안 된다. 그럴 확률은 매우 낮다. 모든 작업이 평균 개발 6개월 내에 완성될 확률은 동전 10개를 동시에 던져 동전 10개 모두가 앞면이 나올 확률과 같기에 프로젝트가 6개월 내에 성공적으로 개발될 확률은 대략 1/1,024 밖에 되지 않는다.


“불확실한 상황을 평균으로 표시하면 위험을 옳게 파악할 수 없게 된다.” “함수값으로 계산된 평균값은 변수 각각 평균값을 함수에 직접 대입해서 얻은 평균값보다 항상 크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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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사고 확장의 도구


“어휘를 늘린다는 것은 자신 삶의 양과 질을 늘린다는 것과 같다. 언어는 단순히 의사표현 수단에 머무르지 않으며, 사유를 펼치는 데 필요한 기본 수단이다. 언어로 생각을 표현한다고 이해하기 쉽지만, 생각과 언어는 동시성을 지닌다는 게 언어학자 대다수 견해다. 언어는 사유와 감정을 창조하며, 생각 실마리를 언어로 잡아내어 정리할 때 비로소 실체가 드러난다. 그러므로 다양한 어휘를 익힌다는 것은 세상을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볼 줄 아는 눈을 기르는 일이 된다.


독일 언어학자인 홈볼트는 ‘우리는 언어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대로 현실을 인식한다’라고 했다. 언어가 현실을 규정한다. 언어가 우리 생각이나 현실을 바라보는 가치관에 영향을 준다. 언어가 사유를 형성하고 사유가 행동을 결정한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생기기 전부터 살기 어려운 현실은 존재했으나 헬조선이라는 말이 나오면서 그런 현실에 관한 인식이 더욱 강화되기 시작했다. ‘정말 그말이 맞아’라고 동조하는 사람이 늘면서 정치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비정규직을 줄이고 청년 실업을 막기 위한 정책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실제 내용과 다른 말을 끌어들여 허위를 진실로 포장하기도 한다. 지배 계층일수록 언어를 통한 상징 조작을 많이 한다. 우리나라에 존재했던 정당 이름을 살펴보면 가장 선호하는 말이 자유, 민주, 공화, 정의 같은 단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으면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거나 마찬가지라서 사람은 누구나 자신 행위를 설명할 수 있는 말을 찾아내려고 애쓴다. 대상과 현상을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 낱말 하나에도 자기 정치적 입장을 담고 있다.


말은 인식을 반영하는 매개체이므로 끊임없이 자신 인식 체계를 들여다보고 바르고 정확한 뜻이 담긴 말을 쓰도록 노력해야 한다. 유전적 변이(variation)를 ‘다양성’으로 표현하면 유전 정보의 다양성이 사람마다 다른 특징이 된다는 기본적인 생각을 전하겠다는 뜻이다. 색깔이 보이는 방식이 사람마다 다양하다는 인식에 기초해 색맹이라는 용어를 ‘색각 다양성’으로 표현한다. 미혼 대신 비혼으로, 폐경 대신 완경(完經)으로 부르자는 주장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여성 몸은 여성 자신 것이라는 주체적 인식 속에서 낙태라는 말 대신 ‘임신 중단’이라는 말을 쓰자는 요구도 있다. 그것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하는 문제와 가깝게 연결된다.


어휘에 예민해야 한다. 중립이나 중재라는 말을 쓸 때 이해당사자가 서로 비슷한 힘을 가진 경우라면 별 문제가 없을 수 있으나 강자와 약자가 대립하고 있을 때 그런 말이 강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작동하기 쉽다. 하사금이나 고위층처럼 권력에 따른 상하관계가 스민 측면에 관한 고려도 충분히 감안해야 할 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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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과 데카르트, 칸트 시대부터 근대 계몽주의에 이르기까지 서구 사회는 감정보다 이성이 지배했다. 적어도 감정을 무시할 수 없지만, 바람직하고 합리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추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성과 감정이 서로 분리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그렇지만 최근 연구는 전통적인 이성주의에 반기를 들고 있다.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마음>에 따르면, 도덕심리학은 감정이, 더 정확히 표현하면 직관이 도덕 영역이며, 이성은 오히려 직관에 부수된 작용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도덕적 판단을 내리며, 그 후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혹은 타인을 설득하기 위해서 적당한 이유 찾기와 같은 ‘이성적’ 추론을 한다. 핵심은 사람이 감정적으로 먼저 판단을 내린 후 이성을 사용하지만, 반면 이성적으로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잘못된 직관이라도 일단 형성(판단)되면, 그럴듯한 정당화 사유를 만들 수 있고,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인식조차 못한다. 한 마디로 직관이 바뀌지 않는다면, 자신 스스로 내린 도덕적 판단이 틀리다고 여기지 않는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유발 하라리도 비슷한 주장을 한다. “오늘날 (뇌)과학 기술은 우리에게 진정한 자아는 없고 자아는 허구”라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 정신은 조작된 산물이다. 우리에게 자유의지는 없다. 우리 판단은 욕망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뇌의) 생화학 과정 산물이다. 우리 정신 안에 스토리텔러가 있어서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바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왜곡하여) 설명한다.˝

 

 

 

 

 

 

 

 

 

 

 

 

 


그렇지만 이 책 <지능의 탄생> 저자는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다고 말한다. “고대 그리스인들과 근대 이성주의자들은 인간 사고 능력의 본질이 이성에 놓여 있다고 생각했다. 최근에 들어서 심리학이나 인지과학에서는 직관이나 감정을 중요한 요소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성, 감성, 추론, 예측, 직관, 통찰과 같은 개념은 분명 사고 과정의 본질이라고 할 만큼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다.” 그럼 과연 생각의 본질은 무엇일까?


사람의 문제 해결 능력을 ‘지능’이라고 보았을 때, 저자가 거듭 강조하는 점은 ‘주체성’이다. 지능을 제대로 정의하기 위해서는 ‘지능이 누구를 위하여 복무하는가’라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지능이란 “그 주체(유전자) 스스로를 위한 생존과 번영의 다채로운 사고 과정”이라고 보았을 때, 예를 들면 AI 로봇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사람을 위해서 복무하므로, AI 로봇은 지능이 없다고 보고 있다. “인공지능을 진정한 지능이라고 여기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자신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제시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복제 여부가 지능에 대한 효과적 정의가 된다. “인공지능을 장착한 기계가 자기복제를 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인공생명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인공생명이 등장한다면 인공지능은 진정한 의미에서 지능의 자격을 갖추게 된다.”


저자는 뇌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뇌는 유전자가 자기복제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다세포 생명체의 부속기관이면서, 동시에 유전자의 구체적인 지시가 없더라도 독립적으로 행동을 선택하는 유전자의 ‘대리인’이다. 뇌는 유전자가 미리 예상하지 못했던 환경 속에서 유전자를 무사히 복제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학습 방법을 개발하게 된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개체 주인은 뇌가 아니라 유전자다. 뇌는 단지 유전자의 안전과 복제기능을 좀 더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한 임무를 부여 받은 일종의 대리인에 불과하다.” 변화하는 환경에서 뇌와 유전자 지향성이 일치하지 않을 때 개체가 ‘나’라고 인식하는 주체는 이기적 유전자 본질과 다르게 작동한다. 그래서 때론 “유전자와 뇌 사이에 미묘한 갈등”이 있을 수 있겠다.


“유전자와 뇌 이해관계는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공교롭게도 유전자가 동물의 행동을 제어하기 위해서 뇌에게 미리 정해서 부여한 생존과 번식의 단순한 원칙 때문이다. 예를 들어 대부분 인간들이 각자 이익을 추구하며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것도 유전자가 그와 같은 선택을 하도록 뇌를 설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기적인’ 뇌는 자신 안전과 쾌락을 위해서 유전자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선택할 수 있다.”


“뇌는 학습 능력을 갖고 있다. 환경이 변화할 때 그에 따라 달라지는 적합한 행동을 유전자가 실시간으로 직접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전자는 호기심이 많은 뇌를 발명해냈을 것이다. 당장 생리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환경 변화를 성공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내용의 지식이라면 언제가는 유전자의 자기 복제에 큰 공헌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기적 유전자의 뜻에 반하여 “인간 행동이 변화할 수 있는 이유는 경험을 통해서 뇌의 시냅스 가중치(두 신경세포 간의 연결 강도)가 변하기 때문이다. 즉 이전에는 연결 강도가 약했던 두 신경세포가 특정한 경험을 한 이후에는 시냅스 가중치가 증가하여, 그 이후에는 시냅스 신경세포에 동일한 활동전압이 발생했더라도 더욱 큰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냅스 가중치가 변하느 것을 시냅스의 ‘가소성(platicity)’이라고 한다.”


“자기복제만을 위해 존재하는 이기적인 유전자들이 이타적인 결정을 할 수 있는 뇌를 만들어내개 된 이유는 죄수의 딜레마 ‘오류’로 설명할 수 있다. 죄수의 딜레마는 인간 사회에서 모두가 협동하는 것이 모두가 협동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지고 옴에도 불구하고 협동이 깨지는 논리적 ‘오류’를 범한다. 게임 이론의 예측이 실재 인간 행동에서 벗어났다는 점은 게임 이론 가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수의 딜레마 잘못된 가정은 반복적이지 않은 인간 관계를 전제했다는 점이다.


뇌는 생각보다 무척 사회적이다. “실제로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도 주로 자신 지난 일들, 즉 다른 사람들과 관련된 사회적인 것들을 돌아보며 반성하는 일을 하곤 한다. 인간 뇌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은 사회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지나치게 사회적인 뇌를 갖게 된 나머지 부작용이 생겼다. 바로 ‘의인화(anthropromorphization)’다. 의인화는 조금이라도 사람과 유사한 특성을 갖는 사물을 마치 사람처럼 취급하는 뇌의 과민 반응이다.” 반려동물인 개나 고양이가 웃는다고 여긴다든가, “많은 자연현상 배후에 인간적인 의도가 숨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지진이나 대홍수를 신의 천벌이라고 여겨 인간을 상벌로 다스리려는 인격체가 존재한다는 미신적인 믿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인간이 진화를 통해 지극히 사회적인 뇌를 갖게 된 결과, 모든 것을 의인화하려는 경향이 생겼기 때문이다.”


“자기 인식 또한 사회적 의사결정의 산물이다. 여러 사람이 집단을 이루고 사회적 의사결정을 하게 되면 서로 행동을 예측하기 위해서 상대방 사고과정에 관한 지식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고, 이와 같은 마음이론(theory of mind)’은 필연적으로 재귀적인 속성을 띠게 된다. 즉 나의 사고과정에 관한 상대방의 사고과정을 예측하고자 하면 어쩔 수 없이 나의 사고과정에 대한 이해가 생기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것은 사회적 활동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뇌가 부수적으로 진화한 결과다.”


“이해하고자 하는 대상이 다름 아니라 이해의 주체인 ‘내가’ 될 때는 필연적으로 골치아픈 ‘자기지시(self-reference)’ 문제를 만들어낸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거짓말쟁이의 역설’이나 러셀의 ‘이발사의 역설’이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거짓이다’ 혹은 ‘이 이발사는 스스로 머리를 깍지 않는 마을 모든 사람만의 머리를 깍아준다’라는 참과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역설이 존재하게 된다. 참도 거짓도 될 수 없는 이유는 그와 같은 문제가 자기 스스로를 가리키는 자기지시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역설을 언급하는 이유는 ‘진실’이나 ‘지식’과 같이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언어들을 우리가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채 사용하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짓말쟁이 역설은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것이 생각보다 까다로울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발사의 역설은 사물을 속성에 따라 서로 다른 집단으로 분류하는 것이 얼마나 복잡한 일인지 보여준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할 수 있다.”


“자기인식이 만들어내는 문제 중에는 자유의지도 포함된다. 자유의지란 나의 행동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자기’라는 개념이 인간 의사결정 과정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별도의 실체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굳이 자유의지의 존재에 대한 답을 기대할 필요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권에 당첨되어 많은 돈을 받으면 평생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행복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반대로 하반신 불구가 되는 것처럼 불운한 일이 생기게 되면 평생 불행할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실제로는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행복감을 회복한다.
이 같은 현상은 인간의 행복에는 설정점(set point)이 존재해,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생기더라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행복감은 기저수준으로 회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점은 결국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지속적인 행복을 누린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마치 쳇바퀴 돌리는 다람쥐처럼 아주 잠깐 바닥을 벗어날 수 있을 뿐이라 하여, 이 현상을 흔히 ‘쾌락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라고 부른다. 행복이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로 동서양의 어떤 이들은 금욕주의 사상을 택하기도 했다. 실제로 행복의 설정점이 존재한다면 뜻밖의 쾌락을 주는 대상을 가급적 피하는 금욕주의 삶이 더욱 쉽게 행복해지는 방법일 수도 있다. 금욕을 하는 동안 인간 뇌는 행복에 대한 기대수준을 낮추게 되므로, 그 결과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좋은 일이 생기면 그때마다 적지 않은 행복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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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10-03 18: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기적인 유전자와 사회적인 뇌(매트 리들리가 말한 ‘이타적 유전자‘와 같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의 균형과 갈등 속에서 우리 삶이 이루어지는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18-10-03 19:02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이기적 유전자와 이타적일 수 있는 뇌에 관한 책이었습니다.
이기적과 이타적 고민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인 것 같습니다. ^^

AgalmA 2018-10-04 2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근 읽고 있는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 보면 우리는 자신이 납득할 만한 ‘사실‘만 받아 들이고 ˝사실이 우리 두뇌 안의 프레임과 맞지 않으면, 우리는 두뇌 안의 프레임을 그대로 남겨둔 채 사실을 무시하거나 반박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고 하죠. 이건 철학/사회학/심리학 분야에서도 이미 논의되어온 문제죠. 현재는 뇌과학적으로 검증하는 단계고요. 자기 주체성이 오류와 문제의 온상인 듯^^; 그러나 어쩌나요. 그게 인간의 한계인 것을. 인공지능에서는 또 인간처럼 주체성이 없어서 문제가 있다고 하....ㄱㅜ

북다이제스터 2018-10-04 20:24   좋아요 1 | URL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도 엄청 좋은 책이죠. ㅎ 아무튼 요즘 읽고 계신 책들이 예전과 많이 달라지셨다고 생각됩니다.
뭐랄까, 예전엔 인문학적이었다면 요즘은 좀 사회과학적이라고 할까요? ㅎㅎ
아무튼 저와 비슷한 분야로 리뷰 혹은 페이퍼 반갑게 잘 읽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