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6일 아침 8시 15분, 일본 히로시마에 소리 없는 섬광이 번쩍였다. 눈을 멀게 할 만큼 강한 빛이었으나, “원폭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당시 히로시마 인구 24만 명 중 폭탄 단 한 개로 10만 명이 사망했고, 또 다른 10만 명은 다쳤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당시 무슨 일인지 전혀 몰랐다. 강한 빛과 동시에 큰 힘에 몸은 공중으로 치솟아 무언가에 크게 부딪힌 후 파묻혔다. 정신 차린 후 잔해에서 빠져나와 완전히 파괴된 주변 폐허 건물을 보고 난 후 바로 위에서 폭탄이 터졌다고 여겼다. 이 정도 충격이면 하늘에 수 많은 폭격기가 있어야 하는데, 비행기를 단 한대도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예전 폭격과 무언가 다르다고 직감했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인류가 처음 겪은 원폭에 그 당시 그 누구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윽고 공깃돌 크기 굵기의 빗방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핵분열 때 생성된 높은 상공의 핵기둥에서 습기가 응축되어 내리는 것이다. 동시에 회오리바람이 휩쓸었다. 전 도시가 화염에 싸이며 생긴 거대한 대류현상 때문에 ˝커다란 나무가 쓰러지고, 작은 나무들은 뿌리째 뽑혀 날아갔다.˝

 

 

생존자들은 피난처나 병원에서 수많은 부상자와 사망자를 목격했다. 사람들 몸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화상이 새겨져 있었다. 생존자 중 한 명이 어떤 여성의 손을 잡자 ˝살이 장갑 크기만큼씩 떨어져 나갔다.˝ 그들이 만난 대공 군인은 폭탄이 터졌을 때 하늘을 보고 있어서 ˝얼굴은 완전히 타버렸고, 눈구멍만 움푹 패 있었다. 녹아버린 눈에서 진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또 다른 여성은 ˝폭탄이 투하되던 날 저녁에 죽은 딸아이를 끌어안고 다녔다. 그녀는 그 이튿날부터 악취를 풍기기 시작한 아이의 시체를 나흘간이나 품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구토를 했다. 방사능에 ˝세포핵이 변질되고 세포막이 파괴되어 구토와 두통, 설사, 불쾌감, 고열에 시달렸다.˝ 두드러진 상처나 화상이 없던 사람들도 ˝보도 위에 앉거나 누워서 구토하며 마침내 조용히 죽어 갔다.˝ 폭심지에서 반경 800m 이내 있던 대부분 사람은 아무런 외상이 없더라도 몇 시간 혹은 몇 일 내 죽었다. 좀 더 먼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은 원폭 후 10~15일 지나 머리카락이 빠지고 백혈구 숫자가 현저히 낮아져 면역력이 저하되었다. 면역력이 회복되지 않으면 합병증으로 사망했다.<히로시마의 증인들>(분도출판사, 1986)

 

 

 

 

 

 

 

 

 

 

 

 

 

 

 

“1961년 1월 23일 B-29 미국 폭격기가 노스캐롤라이나 주 골즈버로 상공에서 고장을 일으켰다. 문제는 이 폭격기가 탑재한 것이 ‘마크-39’라는 수소폭탄 두 개였다는 점이다. 이 수소폭탄의 위력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의 260배다. 투하장치가 작동되어 폭탄 모두 지상으로 떨어졌고, 그 중 하나는 격발장치까지 작동되었다. 네 개의 안전장치 가운데 세 개가 고장 났지만, 다행히 하나가 제대로 작동하는 바람에 끔찍한 재앙을 막을 수 있었다.”<김상욱의 과학공부>(동아시아, 2016)

 

 

 

 

 

 

 

 

 

 

 

 

 

 

“맥아더는 1950년 12월 24일 트루먼 대통령에게 핵무기를 투하할 지역을 망라한 리스트를 제출하면서 모두 26기의 원자탄을 한국에 투하할 것을 권고했다. 당시 미군이 작성한 핵무기 사용 계획서에 따르면, 미국이 고려한 핵무기 투하지역 중 하나는 철원 근방이었다.

 

 

만약 한국전쟁 때 핵무기가 사용되었다면, 한반도는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했을지 모른다. 당시 미국이 사용하려 했던 핵무기는 분명 히로시마에 떨어진 것보다 더 큰 위력, 더 큰 살상력을 발휘했을 것이며, 단지 한 발로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핵무기 사용 검토는 두 번 있었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직전이었다. 미국은 핵무기를 사용하면 북한군이 좀 더 쉽게 미국 요구를 수용하면서 정전협정에 조인할 거라고 생각했다. 북한이 정전협정에서 유엔군 측 제안을 대폭 수용함으로써 실행되진 않았다.”<한국전쟁>(책과함께, 2005)

 

 

 

 

 

 

 

 

 

 

 

 

 

 

 

한국전쟁 후 미 국무장관 “덜레스가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하자는 합동참모본부의 요청에 동의한 것은 내전 억제책을 구축함으로써 남북 양측 모두를 제어하려고 한 것이다. 핵 파괴물로 한반도를 뒤덮게 되는 전쟁이라면 불 같은 성격의 이승만과 김일성이라고도 제고할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승만은 특유의 고집을 부려 수소폭탄 사용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1954년 의회합동연설에서 수소폭탄 사용을 요구함으로써 공화당 내 지지자들에게도 충격을 주었다.”

 

 

“1958년 1월 미국은 핵탄두 미사일을 남한에 배치했고, 1년 후 미공군은 핵탄두를 장착한 크루즈미사일 비행대대를 한국에 영구히 배치했다.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한국 방위전략은 새로운 전쟁이 일어나기만 하면 아주 초기에 핵무기를 사용한다는 틀에 박힌 계획으로 고정되었다. 1968년 1월 북한은 미국 첩보선 푸에블로 호를 나포하였다. 이에 대한 미국 정책결정자들의 최초 반응은 평양에 핵폭탄을 투하하는 것이었다. 한국 공군 비행장에서 비상경계 상태로 있던 모든 미국 F-4 전투기에 핵무기들만이 탑재되어 있었다.”

 

 

“1974년 <워싱턴 포스트>가 지적했듯 미군 헬리콥터들이 상시적으로 비무장지대 근처로 핵무기를 날랐다. 그중 하나가 훈련도중 길을 잃고 비무장지대를 넘어감으로써 평양에 원자탄을 안겨줄 가능성이 상존했다. 핵무기의 전진배치는 핵무기를 ‘쓰느냐 잃느냐’ 식의 사고방식을 낳았다. 핵무기를 적의 손에 넘기지 않기 위해서는 북한의 소규모 공격조차도 핵무기를 써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었다.

 

 

또한 미국의 핵무기가 한국에 있다는 점은 일본 측에 전략적 보장을 확인해주는 데 도움이 되며, 일본이 프랑스 식으로 방어를 위해 스스로 핵무장을 하려는 생각을 단념시켜준다. 한마디로 한국인들 생명은 공산주의 적과 일본 우방을 동시에 봉쇄하려는 미국의 이중봉쇄 정책의 볼모였다.

 

 

미국의 핵무기 전략에 대응하여 1970년대 후반 북한은 지상군의 80%를 비무장지대 부근에 주둔시켰다. 이 조치는 전쟁이 시작되면 가능한 많은 북한 병사들이 남한쪽으로 침투하여 핵무기가 사용되기 전에 한국 육군 병력이나 민간인들과 섞임으로써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줄이려고 취해진 것이었다. 이 끔찍한 시나리오는 군사 야전교범에 등장할 정도로 1980년대 표준적인 작전절차가 되었다.

 

 

하지만 이후 페르시아만의 걸프전은 핵무기 역할을 재평가하게 만들었다. 신뢰할 만한 명중률을 지닌 인공지능 폭탄이 등장함에 따라 모든 것을 파괴하고 통제불능 결과를 낳는 핵탄두보다 효율적인 재래식 무기들이 더 유용하다는 것이다. 미 육군은 가능한 빨리 전쟁터에서 핵무기를 없애고 싶어했다. 그래서 미국은 1991년 가을에 쓸모가 없어진 핵무기들을 한국에서 철수시켰다. 철거된 무기는 핵폭탄 70발과 다량의 원자탄지뢰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공식대변인은 군산의 미 공군 기지에 보관된 폭격기용 핵폭탄 60여 발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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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2-23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처럼 핵무기의 위력은 가공할 만하지만, 효력은 위력만 못한 반면, 그 피해와 이에 대한 비난은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니, 핵무기가 과연 전략 무기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자주(自主)는 단순히 수사학적 표현이 아니다. 북한은 탈식민지 시대 발전도상국 가운데 의도적으로 자본주의 세계체계로부터 물러나 독립적이고 자기완결적인 경제를 진지하게 시도한 가장 좋은 보기를 제공해주었고, 그 결과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자립적인 상업경제를 세웠다.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 달리 북한은 사회주의의 공동시장 체계에 해당하는 코메콘(COMECON)에 가입한 적이 없다.

 


북한 산업은 한국전쟁 이후 십 년 동안 연평균 25%로 성장했고, 1965~78년 사이에 약 14% 성장을 이루었다. 공식기록에 따르면, 3개년 계획기간(1953~56)에는 연평균 산업성장률이 41.7%였고, 연이은 5개년 계획기간에는 36.6%였다. 한국전쟁 이후 20년 동안 북한 경제성장은 남한 성장을 훨씬 능가했고, 남한이 도대체 경제성장을 시작할 수나 있을지 걱정하던 미국 관리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남한 경제는 1980년대 중반이 되면서 되살아나, 1986년까지 남한과 북한의 일인당 국민총생산은 같은 수준으로 추정된다. 그 이후 남한은 북한보다 상당히 앞서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남한경제의 후원자들이 주장하는 것만큼 앞선 것은 아니다. 서울의 중산계급은 북한의 일부 극소수 엘리트를 제외한 나머지보다 훨씬 잘산다. 하지만 남한의 일반 민중의 생활수준이 북한의 평균수준보다 낫기는 하지만 월등히 잘사는 것은 아니다.

 

 

세계보건기구(WHO)나 다른 국제연합기구(UN)의 관리들은 북한의 기본 공공의료 서비스를 칭찬한다. 북한 어린이들의 질병 예방접종이 미국 어린이들보다도 훨씬 나은 상태에 있다. 1990년 초 국제연합 자료는 이 작고 가난한 나라의 평균수명이 70.7세(남한의 경우 70.4세)에 이르러 미국에 그렇게 뒤떨어지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북한인구의 74% 가량이 도시에 살고 있어 남한의 78%와 비교될 수 있는데, 이는 남북한 모두가 세계기준으로 볼 때에도 상당히 도시화되고 산업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이후 사회주의 블록의 붕괴로 북한은 주 시장을 상실하였고 1990년대 초반 몇 년 동안 국민총생산량이 감소하게 되었다. 소비에트 블록이 붕괴되는 바람에 북한의 수출시장은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과거 북한 수출품은 석유, 코크스용 석탄 및 다른 필수 수입품과 유리한 비율로 교환되었다. 1990년대 석유수입의 급격한 감소는 국가의 교통망과 농장에 엄청나게 많은 비료를 공급하던 거대한 화학산업을 망가뜨렸다. 현재까지 여러 해 동안 북한 산업은 자기 능력의 50%도 채 가동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북한이 식량과 석유, 그밖의 필수품을 수입하는 데 필요한 외화를 벌기 위해서는 세계시장에 수출할 방도를 찾아야만 한다.”<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창비, 2001)

 

 

“우리의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은 자본주의에 내재된 속성이며, 자본주의는 근대국가의 속성 때문에 더욱 심화된다. 따라서 국가체계가 소멸되지 않는 한 빈부격차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일국 혹은 일부의 국가체계만 사라진다고 해서 자본주의는 없어지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세계시스템 속에서 생겨난 것이지 일국만의 소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요한 민족들이 혁명을 '일거에' 그리고 동시에 수행해야만 가능하다."<세계사의 구조>(비, 2012)

 

 

 

 

 

 

 

 

 

 

 

 

 

 

"이 위기로 북한은 자주경제의 앞날을 심각하게 재고하게 되었고 그 결과 외국으로부터 투자, 자본주의 회사와 관계, 새로운 자유무역 지구에 대한 새로운 법을 다수 제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북한 역사에는 어리석은 성급함이나, 폭력, 그리고 농촌사회의 궁극적인 붕괴를 보여주는 자료는 없다. 북한을 방문했거나 난민을 면담했던 학자들은 북한이 분배는 물론이고 생산과 노동 조건들을 평등하게 만들려고 매우 애쓰고 있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북한은 마치 소말리아나 에티오피아처럼 고통을 겪고 있으면서도 훨씬 더 발전된 현대적 경제를 갖추고 있다. 북한은 역사적으로 강력한 산업경제를 가졌었고 비교적 도시화된 상태로 남아 있으며, 평균수명, 아동복지, 예방접종, 일반적인 공중보건 상태 등이 비슷한 처지의 다른 국가 비해 상당히 높다. 북한에서는 일단 주요결정이 내려지면 진지한 개혁이 일어날 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북한은 중앙에서 결정된 과업에 모든 사람을 동원할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북한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이는 누구에게나 추측거리다. 하지만 내 견해로 과거에 외부 관찰자들은 모든 가능한 방식으로 북한을 과소평가했기에 잘못 판단한 것 같다. 반면 이 체계가 한국 전통과 반식민주의적 민족주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어 냉전체계 이후 세계에서도 지탱할 힘이 있을 것이라는 예측이 지금까지는 옳다.”

 

 

“아마도 이 책에서 저자가 한국 역사변화를 인식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내세우는 것은 ‘자주’ 아닌가 생각한다. 자주를 향한 한국사의 움직임은 조선시대부터 확인된다. 현대에 들어서도 남북한 체제를 이끌어가는 중심에 ‘자주’를 추구하는 힘이 놓여있다. 북한에 대한 커밍스의 평가에서 가장 주된 부분은 북한이 제3세계 다른 어떤 국가보다도 자주적이며, 사회주의권 안에서도 다른 동구권의 국가와 달리 소련으로부터 자주성을 확보했다는 점이다. 남한의 경우도 민주화에 대한 후견인으로 비쳐왔던 미국이 실제로는 반민주화의 힘으로 작용했으며, 그 결과 반미주의가 한국에서 뿌리내리게 되었음을 그는 주의 깊게 분석하고 있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창비, 2001)

 

 

 

 

 

 

1980년대 많은 대학생이 대학과 유망한 장래를 뒤로하고 공장에 나가기 시작했다. 상당수 젊은이들이 크나큰 개인적 희생을 무릅쓰고 산업노동 현장에 취업하여 한창 성장하는 한국의 도시노동계급과 융합하고자 했는데, 그 결과 국가는 그들을 ‘위장취업자’라고 불렀다. 조지 오글의 추정에 따르면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해 공장에 들어간 학생 수는 3천명에 이른다. 게다가 새로운 중공업 부문이 이런 활동의 주요 무대로 부상했고 노동운동은 급진적인 학생운동과 매우 유기적으로 맞물리게 되어 도시산업선교회와 같은 자유주의적 노동자권리운동 집단들은 쇠퇴하게 되었다. 지하출판물과 심지어 공공연한 선전 문건의 배포를 통해 거대한 문화적, 지적 공간이 열렸으니 1980년대 중반과 후반에 급진주의자들은 마르크스를 공공연하게 그리고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듯 읽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 거리에 약 500명의 사람들이 몰려나와 계엄령 철폐를 요구했다. 약물을 복용했다고 여겨지는 정예 공수부대가 이 도시에 도착하여 학생과 여성, 어린이 가릴 것 없이 길을 막는 사람은 누구든지 무차별하게 학살하기 시작했다. 한 여학생은 시청광장 근처에서 공수부대의 총검에 가슴이 찔린 채 군인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몇몇 학생들은 화염방사기로 얼굴이 지워져버렸다.

지금 입증될 수는 없지만, 많은 관찰자들에 의하면 청와대의 거대한 돈이 김대중과 김영삼이 이끄는 야당에 들어갔다고 전한다. 1995년 조사에 따르면 김대중이 1992년 대통령선거운동용으로 청와대의 뇌물 자금 가운데 250만 달러를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김영삼 역시 1987년 선거운동에서 청와대로부터 거액을 받았다는 소문이 끈질기게 나돌았다. 이를 감안하면 야당이 선거 바로 직전 걸핏하면 양분되는 현상이 설명될 수 있다.
이를 부패라고 부르는 것은 어쩌면 오도하는 것인지 모른다. 전후 한국역사의 상당 기간 동안 정치가 이런 식으로 운영되어왔기 때문이다. 외국 전문가들은 한국 정치가들이 스캔들의 내막이 밝혀질 때마다 매번 너무나 당혹해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궁금해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마돈나가 자신 정조가 유린된 것을 불평하는 것과 조금은 비슷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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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시 중공군 개입의 속사정


“1947년 초 김일성은 나중 중국 내 공산당이 승리할 경우 가져다 줄 엄청난 전략적 혜택을 감지하고서 조선인 수만 명을 만주에 급파하여 마오쩌뚱과 함께 중국 국민당과 싸우게 했다. 중국에 파견된 북한 군대가 바로 ‘의용’군으로서, 1950년 가을 이 호의에 보답한 중국 ‘의용군’의 선례가 되었다. 북한 지원은 마침 중국공산당이 만주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이루어졌다. 조선인 약 3만 명이 김책 지휘 아래 1947년 4월 만주로 이동했으며, 그 무렵 만주에 있는 중국공산당 병력의 15~20%는 한국인이었다. 한국전쟁이 1950년 이전에는 발발할 수 없었던 이유도 남한 침공의 주된 타격력이 된 북한 병사들, 즉 정예군이 중국에서 1949년까지 전투 중이었던 것이다.”

 

 

‘한강의 기적’ 속사정


“1960년 미국 경제학자 로스토우는 ‘비공산당 선언’이라는 부제가 붙은 <경제성장의 단계>라는 저서를 출간했다. 로스토우는 이 책을 계기로 케네디 대통령의 고문으로 지명되고, 임용 후 불과 몇 주 내 남한을 면밀하게 살폈다. 남한이 동강나고 고립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인적자원을 지니고 있어 수출용 경공업을 개발하는 데 더없이 좋은 곳이라고 주장했다. 1961년 3월 15일 ‘한국에서의 행동’이라는 비망록에서 ‘향후 10년간 미국이 주력할 주요 추진방향’을 다음과 같이 설정했다. (1) 단기속성 경제개발 (2) 노동집약적 경공업 창출과 대한민국 경제개발을 지도, 감독하는 일에 미국이 정력적으로 행동할 것을 정했다. 일본의 전략적 보좌역으로서 한국 유용성을 진술한 것이지만, 이제는 대한민국을 타이완과 마찬가지로 ‘비공산주의 국가건설 방식의 이익이 되는 모범적 사례’로 만들려고 했다. 1966년에서 1971년까지 5개년 사이에 적어도 연평균 6% 경제성장을 목표로 했다.

 

 

"1997년 IMF 대란 이전까지 미국은 한국의 국가주도 신중상주의 프로그램을 보고도 못 본 척하거나 심지어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두는 정책을 취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은 무엇보다 방대한 미국시장의 개방성에 의존했다. 여기에 바로 ‘아시아 개발국가의 본질’이 있었다. 이들 경제는 공산주의와의 전지구적 투쟁에서 대안적 개발 모델을 제공하는 데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었기에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경제성장을 지원했다. 냉전기간이었다면, 남한은 미국의 주요 동맹국이자 전방국가로서, 안보문제에 대한 즉각적이고도 최우선적인 강조 덕분에 구제금융을 지원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양극화된 소련과 냉전이 끝나고 보니 남한 경제가 자유시장과 신자유주의 시대에 얼마나 적합한지 문제만 전면에 등장했다.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이런 상황은 놀라움과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1997~98년 아시아 위기의 깊은 의미는 ‘일본/한국 유형의 후발 산업발전’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미국의 시도에 있다.”

 

 

“남한의 괄목할 만한 급성장을 평가할 때, 그리고 다른 산업국 및 북한에 대한 남한의 상대적인 위치를 평가할 때,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남한 GNP는 일본 빠찡고 업체들의 연간 총매출보다 크지 않았다는 점을 명심하는 것이 유익하다. 이는 한국의 ‘기적’을 들먹이는 기자들이나 반세기에 걸친 남북간 경쟁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말을 믿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된다. 남한 사람들은 손이 다 닳도록 일해서 우리가 지금 목격하는 산업국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니 결코 기적은 없었다고 하는 것이 그나마 이 굉장한, 재능있는 시민들의 노고를 제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란 폭정의 정점’이라고 말했다지만,


“어느 사회에서나 민주주의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나 정치체계가 아니라 단 한 발의 전진을 위해서도 싸워 쟁취해야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인의 투쟁이 너무나 길고 험난했기에 우리 시대 한국만큼 민주주의를 누릴 만한 나라는 없을지도 모른다.

 


1972년 내가 한국에 있을 때 한 대학생 친구가 자기네 ‘철학 써클’에 초대했다. 이 서클은 서울의 발 디딜 틈 없이 번잡한 지역 가운데 하나인 고려대학교 인근 동네의 옥상에서 열렸다. 그때 나는 그들이 어찌하여 모두 민주주의를 위해 죽을 각오를 하게 되었는지 들었다. 이런 일이 기이하거나 우스꽝스럽게 여겨진다면 그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실제로 민주주의를 위해 죽었는지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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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토지 문제

<역사 고전 강의>에서 강유원은 역사 책을 읽는 팁 한 가지를 알려 준다. “역사 책을 읽을 때 토지 문제를 둘러싸고 대규모 변화가 일어나면, 그때는 바로 사회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시기입니다.”


“동학혁명 당시 한국의 조세체계는 백성을 격노하게 만드는 가혹한 세들을 모조리 끌어모은 형국이었다. 세의 종류에는, 정부에 내는 국납, 토지세(한 종류가 아닌 매우 다양한 종류의 토지세와 이외 부가세와 수수료에 해당하는 세금이 더해짐), 휴경지세, 군납(몸을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남성, 즉 양정에게 포 1필이 부과되었으나, 이것이 토지세보다 타격이 더 심한 경우가 많았다), 지방관에게 내는 세, 지방 지배자에게 내는 세 등등이 있었다. 소금, 어물, 선박과 다른 많은 물품에 붙는 세금 등을 포함시키지 않아도 목록은 이렇게 길었다. 죽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영아와 노인, 세금징수관을 피해 달아난 사람들의 친척과 이웃 등, 살아 있는 것 중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것에는 다 세금이 붙었다.


백성들은 환곡이라고 하는 악명높은 곡물 대부제도를 통해 관리에게서 곡식을 꾸거나, 태고적부터 모든 이의 몸에 박힌 가시 같은 지방 고리대금업자에게서 돈을 꾸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이성적 행동은 세금을 피하는 것이었다. 서원명부나 관리명부, 특권 혈족의 명부, 무엇보다 세금과 징병이 면제되는 양반명부로 뛰어오르거나, 하급관리를 매수해서 다른 사람에게서 세를 뜯게 하거나, 산으로 도망가서 자작을 하는 길밖에 없었다. 오직 토지에 묶여 있는 정착 영세농가만이 항상 수탈을 당했다.”


이와 같은 봉건적 토지 제도가 한국전쟁 때 해소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이 서울을 점령한 후 서울시인민위원회는 대부분 남한사람들 주도로 신속히 조직되었다. 인민위원회는 7월 초순에 이르러 모든 일본인 재산과 대한민국 정부, 관료, 독립자본가 재산을 몰수했다. 조선인민군은 비축된 쌀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사법행정을 지역 치안대 손에 맡겼다.


이점은 미국이 이전 한국에 요구했던 개량주의적 토지재분배에 반대했던 봉건적 지주계급에 대한 혁명적 승리로 간주되어야 마땅하다. 토지재분배는 연합군 부산 방어권 밖 모든 지방에서 이루어졌으며, 비록 전시에 급하게 수행되었지만, 계급구조와 계급권력을 일소함으로써 나중에 이승만의 토지 재분배 계획을 가능하게 했다. 한국전쟁은 20세기 중반의 한국을 크게 평등하게 만든 계기가 되였다.”


2. 과거 식민지 청산이 안 된 이유

“남한 역사가들은 1910년 이후 시기에 대해 일차자료, 기록보관소 문서, 회견 같은 역사연구의 기본사료를 이용하여 역사를 쓰려 하지 않는다. 한국의 주요 역사책을 아무리 살펴봐도, 거의 모든 책이 20세기를 결과론으로 다루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남한에서 1935년에서 1945년 사이라는 특정한 시기는 비어 있는 찬장과 같다. 왜 그런가? 일본에 협력한 수천명의 한국인들이 그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아주 지워버렸다.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한국인들이 식민독재에 부역했으며, 해방 후에도 너무나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 관행을 자신 행동모델로 삼았다. 한국을 일본에 파는 데 몰두한 일진회 회원이 몇몇 소수인 양 주장하는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시도 역시 과장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위안부 문제의 진정한 참상을 왜 그토록 오랫동안 남한 정부가 방치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이 성적 노예에 대한 조사를 개시하게 되면 많은 한국여성들이 한국남성들에 의해 동원되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여운형은 ‘현재의 혼란’의 핵심요인은 미국이 식민지경찰을 유지한 데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미국인들은 그들 역사에서 국립경찰에 저항해왔으며, 일본에서는 맥아더가 비무장화와 민주화라는 두 가지 점령 목표에 장애가 된다고 해서 일본의 국립경찰을 해산시켰다. 하지만 한국에서 미국은 서울에서 수립된 조선인민공화국과 노조, 농민단체들에 대항해 독자적인 국립경찰을 창설했다. 1945년 10월쯤에는 일본 경찰에서 근무한 한국인들의 약 85%가 국립경찰에 채용되었다.


반면 북한은 해방 후 일년 내 증오와 공포의 대상이던 식민지기구들을 철저하게 혁신하면서 일제에 복무한 한국인들을 치안세력에서 완전히 제거했다.”

 

 

“4. 19. 혁명 이후 국립경찰 가운데 일제에 복무한 약 600명의 경찰관료 대부분이 사직하거나 면직되었고, 몇몇은 다시 한번 가혹한 농민재판의 희생자가 되었다. 몇몇 시골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경찰에게 20여년 전까지 소급하는 원한을 앙갚음했고, 어떤 경우는 마을 사람들이 식민지 경찰 하나를 기름에 튀기기도 했다. 한국 군부에는 일제시대 출신의 고위장교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으나, 이들 대부분을 젊은 대령들이 한줌만 남겨놓고 체포하거나, 해고하거나, 은퇴시켰다.”




3. 우리나라에 좌우만 있는 까닭

“일본 식민지배 마지막 10년 동안 한민족이 서로 불화하는 유산이 생겼다. 이때는 일본 통치가 가장 가혹했던 시기로 한국인들이 가장 고통스럽게 기억하는 시기다. 192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조직되어 도, 군, 읍, 노동현장에 지부를 두었다. 다음해 조선반공연맹이 모든 도에 지부를, 경찰서에 지방 사무실을, 그리고 마을, 공장, 기타 작업장에 유관단체를 조직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일본에 저항하는 정도에 비례해 노동현장과 학교에서 반공 ‘정신’ 토론에 참여하는 것이 의무가 되었다. 전체주의적 심문방식을 통해 머릿속 ‘불순한’ 사상을 색출당했다. 이런 관행은 해방 이후 남한과 북한에 깊이 해독을 끼쳤다. (남북한은 모두 정치적 ‘사상교육’ 프로그램에 빠져들었는데 물론 북한이 더 심하긴 하지만 남한도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상교육을 한다. 한국전쟁 기간의 비전향 정치범들을 1990년대 초까지 남한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일본인들 덕분에 한국에는 중도 세력이 없었으며, 이런 상황은 1980년대까지 계속된다. 특히 이러한 계기는 미국의 신탁통치 기간 가속되었다. 1947년 말 하지 장군은 미국이 처한 본질을 포착했다. ‘공산주의와 싸우고자 할 때는 파시즘이 권력을 접수할 위험이 항상 있다. 히틀러가 독일에 구축한 것은 공산주의와 싸우기 위해서였지만 독일은 나찌즘으로 이행했다. 에스파냐도 마찬가지다. 다른 한편으로 공산주의자들이 힘을 구축하면 민주주의는 붕괴되며, 그 나라는 공산주의 국가가 된다. 자, 이 문제의 해답은 무엇인가? 도대체 어떻게 이 곤경에서 벗어나는 정치적인 중간선을 택하겠다는 것인가? 토론해보자고 거론한 것뿐이다. 나는 해답을 모른다. 해답을 알고있다면 좋으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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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2-17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다이제스터님 글을 읽다보니, 진정한 중도 세력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인위적인 정치 목적을 제시하기보다 현실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하는 것부터 시작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2-19 13:30   좋아요 1 | URL
네, 그렇습니다.
한국을 그냥 내버려두었다면 더 다양한 세력이 등장했을 것으로 이 책도 보더라구요...^^
 

 

 

 

 

 

 

 

 

 

 

 

 

 

 


역사학자 존 루이스 캐디는 <역사의 풍경>에서 옛날을 기록하는 역사학자의 역할을 이렇게 정의했다. “역사 무게가 현재와 미래에 짐이 된다면, 역사가 역할은 이 짐을 덜어내는 노력일 것이다. 현재 존재하는 것이 과거에 반드시 그랬던 것이 아니므로 미래에도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 역사가 몫이다.” 존 루이스 캐디 말처럼, 브루스 커밍스는 이 책 <한국 현대사>를 쓴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서문에 남겼다.

 

 

“나는 한국 현대사의 모든 경험, 모든 사건, 모든 사실, 모든 낱말이 극단적으로 두 개의 다른 렌즈를 통해 굴절된 채 세계 어떤 국가보다 더 가혹하고 더 오래 지속된 이데올로기 분열의 타격을 입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따라서 나는 1945년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양극화된 냉전의 서사로 침윤되고 유폐된 한국 역사를 재건해줄, 대부분 예전에 개방되지 않았던 문서보관소의 1차자료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서보관소에서 브루스 커밍스는 어떤 옛날 자료를 찾아냈을까? 그가 찾아낸 옛날이 지금과 단절되어 옛날에만 그냥 머물러 있지는 않겠지만, 황현상 교수가 <밤이 선생이다>에서 말한 것처럼, “내 나라의 옛날이라 하더라도 옛날은 외국이나 다름없다.” 옛날은 우리에게도 무척 낯설다. 특히 브루스 커밍스는 이 책을 미국인을 위해 썼기에, 외국인이 바라본 우리 옛날은 그들에게 어떤 느낌을 줄지 궁금하다. “국외자의 눈으로 다른 사회의 창을 들여다보면, 거기에서 우리는 곧 우리 방식과 그들 방식 간 거리를 알아차릴 수 있다.” 저자는 독자(미국인)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한국 현대사를 바로 시작하지 않는다. 책 첫 장에 고조선부터 조선까지 우리 옛날을 소개하는데, 내게도 ‘외국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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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한반도를 쇠로 눌러 납작하게 펼칠 수 있다면 중국만한 크기가 될 것이라고 누군가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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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신화는 일본 역사가들이 주장해온 것처럼 고려시대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서해 건너 산동의 한 가족 사당에서 출토된 서기 147년 판석에 이 전설이 새겨진 것을 볼 수 있다. 아무튼 웅녀 신화를 어떻게 해석하든, 오늘날까지 계속 뚜렷한 종족성과 언어를 보유하면서 이렇게 시간적으로 ‘5천 년 전’이라는 동떨어진 기원을 주장하는 민족은 별로 없다(일본인과 이스라엘 정도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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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천황가 계보는 한국에서 비롯되었으리라는 점을 일본 왕릉 벽화가 암시한다고 서구 많은 역사가들은 생각한다. 아마 이점이 일본 고고학자들이 좀처럼 더 많은 왕릉을 개봉하려 들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거대 분묘 대부분이 아직도 고고학적 연구의 접근을 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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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 산중과 계곡에 정착해 살던 발해인들은 이 시기 온돌바닥에서 잠을 잤다. 이 방식은 지금도 한국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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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처럼 고대 유기적 개념과 근대 개인주의적 개념 사이에 여전히 붙들려 있는 사회의 깊이를 미국인은 헤아릴 방법이 거의 없다. 예를 들면, 개인적 서열 등급과 같은 공공연한 불평등이 과거 한국 사회에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사회의 부분을 이루는 모든 사람들의 위엄을 훼손시키지 않았다. 미국인이 혐오하는 ‘분수를 알라’는 생각은 한국 사회에 명예롭고 당당한 생각이었으며, 인간이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터전이었다. 수치심을 동반하지 않는 서열제도, 제 자신을 의식하되 의식적인 학대를 가하지 않는 서열제도, 인간다움이 의미하는 바를 꼭 침해하지 않아도 되는 서열제도, 이런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는가? 우리 미국인이 이러한 점을 상상할 수 없기에 막연한 평등 가운데서 사람들을 구별하고 분리하는 가장 명백한 방법인 인종주의에 쉽게 의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전세계에 퍼져 있는 매체의 도움을 받아 미국식 사회조직이 모든 대안적 사회형태를 함락시키고 있다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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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서양인은 동양인이 전제정치의 강철 같은 폭압 아래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동양인은 대체로 매우 만족해하며 대개의 경우 혼자서도 행복하게 살아왔다.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정부는 시끄러운 민주주의의인 반면 동양인의 이상은 현명하고 훌륭한 통치자다. 만약 역사를 세심하게 읽고 비교하는 수고를 들인다면 결론은 의심할 바 없이, 대체로 동양의 이상이 더 나은 선택이라는 점이다. 때로 동양에는 폭군이 있었지만, 이들은 개개의 폭군일 따름인데 우리에게는 폭군이 떼거리로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민주주의는 폭정의 정점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자신이 무슨 애기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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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어머니들은 자기 아이를 이런 식으로 보는 듯하다. 즉 자식이 생물학적 소산일 뿐 아니라, 마치 예술작품처럼, 인간작품으로 만들고 키워야 하는 존재로 본다. 하지만 이 모성적 조각가가 전제하는 것은 그녀가 ‘무엇이 아이에게 가장 좋은지 알고 있다’는 점, 즉 이론의 여지가 없는 그녀 권위임에 틀림없다. 

 


두 아이를 둔 한국 가족과 살 때 나는 부모들이 자식에게 보여주는 유난스런 사랑에는 놀라지 않았지만, 자식들의 응석을 받아주는 것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두 아이는 마음대로 집안을 돌아다니고 뛰놀고, 목소리 높인 꾸중을 듣지도 않고, 거의 있으나마나 한 벌을 받는 행복하고 자유로운 두 마리 새였다. 마침내 그들은 부모 팔에 안겨 밤새 부모와 함께 잤다. 칼뱅교 집안 출신의 미국인이 본다면, 이렇게 놓아 기르는 것은 초자아가 없는 어른, 즉 시민사회를 곧 엉망으로 만들 총기류를 풀어놓는 처방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러한 관습은 개인적 정체성을 확신하는 독립성이 강한 개인을 키워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한국인들은 ‘자신을 일차적으로 자기 부모의 연장으로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으로 자란 사람들은 아무리 심한 궁핍이 닥쳐도 개인적 통어력과 바위 같은 심리적 안정성을 결코 잃지 않는다. 한국 방식이 아이를 키우기에 더 좋은 방법일 수도 아닐 수도 있겠지만, 견실한 애정을 지닌 강인한 인간을 창조하는 존경스럽고 위엄 있는 방법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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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아이들은 십대까지 아이들이며 젊은이(청년)는 삼십 대, 심지어 사십 대까지 어른시절을 준비하다가, 부친이 가족에 대한 책임을 아들인 자신과 자기 아내에게 물려주고 존경 받는 연장자들의 성스러운 영역(환갑)에 들어 상대적 자유로움을 누릴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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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지위는 모든 문명을 들여다보는 하나의 비판적인 창이요, 도무지 변하지 않는 듯 보이는 핵심 요소다. 여성은 가정과 너무 가깝고, 우리 모두가 여성에게 태어나 사회에 들어왔으며, 그 사실을 이해하느라 인생 많은 부분을 보내는 까닭에, 여성이 우리 자신의 역사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의식을 갖고 반성해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17세기 네덜란드인 하멜에 따르면, 옛 한국여인이 결단을 내려 자기 남편을 처치했을 때, 그녀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에 산 채로 어깨까지 매장되고, 그녀 옆에는 도끼가 놓인다. 그러면 과객 중 귀한 신분이 아닌 사람들은 모두 한번씩 도끼로 머리를 내리쳐 그녀를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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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은 다른 어느 민족 못지않게, 아니 그들보다 더 신령의 존재를 믿으니, 세종이 돌아가고도 수세기가 지나도록 세종을 목격한 사례가 많았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온다. 우리 합리주의자들은 그런 주장을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치부하지만 한국을 잘 알게 되면 그런 얘기에 대해 겸손해지게 된다. 제임스 게일은 훌륭한 기독교도였으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다시 오실 수 있다는 그의 확신은 한국에 와서 흔들렸다. 그는 ‘한국사람들 마음속에는 죽은 자들이 나타나는 것이 가능하다’고 적고 이에 대한 가능한 확증으로 런던심령조사학회를 인용했다.

 


나는 일곱 자녀를 키워내고 막중한 책임을 진 남편을 내조하며 서울에서 택시회사를 운영한 강인한 여성인 내 장모를 만난 적이 없다. 그녀는 내가 결혼하기 전에 작고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가 죽는 광경이 먼동이 터올 무렵 내 꿈에 나타나더니, 나에게 당신 딸을 늘 잘 보살피라고 말했다. 그리고 두 시간 후 전화가 왔다. 미국에서 16,000km 떨어진 한국에서 그녀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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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3년의 호적은 서울 인구의 75%나 되는 숫자가 노비였으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아마 전 인구의 약 30%가 노비로 이루어져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습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노비가 도망치거나 해방되는 비율 또한 이상할 만큼 높았다. 한국의 노예제가 미국 남부에서 흑인들이 당면했던 노예제보다는 덜 부담스러운 유형이었음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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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말 몇몇 호적부 모음을 조사한 결과 자신을 양반으로 생각한 사람들은 대략 인구의 9~16%정도라는 것이 밝혀졌다. 19세기 한국에 온 진보적인 서양인들 눈에 비친 한국 양반은 근대적인 미덕이란 미덕은 모조리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들은 무위도식하며 게으르고 방탕한데다 (서양인들 생각에) 서양의 현재를 있게 해준 기업가정신과 노동윤리를 전적으로 결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인들에게 양반은 덕성스러운 자이며, 이성과 사유를 갖춘 자, 윤리적 행동과 훌륭한 다스림의 본보기요, 존경해야 할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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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에서 문과에 급제한 사람은 5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약 1만4천명이었다. 과거제도는 모든 응시자에게 가문의 족보와 부계 3대조의 이름과 관직, 모계 관향(貫鄕)부터 기재할 것을 요구했다. 어떤 학자들은 조선 초기에 평민도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고 하지만, 어느 시점에서 그랬을지는 몰라도, 그들은 귀족 우위라는 통례를 증명하는 예외 존재다. 1700년까지 한국에는 600군데 이상, 중국 서원 전체를 합한 것보다 많은 수의 서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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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행상인들이 돈을 정말로 번다고 해도(사실 그들이 돈을 버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장애에 부딪혔으니, 동전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동전을 끈에 꿰어 끌고 다니려면 나귀나 하인 서너 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관리들은 만약 동전이 가벼우면 탐욕스런 사람들이 돈을 쌓아둘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선이라는 국가를 운영한 완고한 학자-관리들은 어디서든 상업의 싹을 잘라버리고 싶어했다. 상업이 광범위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통제가 적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졸부가 흥성하고, 농민들에게는 다른 생계 방안이, 노비들에게는 자유가 생긴다는 것을 뜻했기 때문이다. 이념론자들은 자신들의 카스트적 사회질서가 시장 때문에 구멍이 나지 않도록 단속하고 싶어했다. 20세기 후반에 한국 상업이 매우 강력하게 발전한 중요 이유 중 하나는 양반귀족의 몰락이다. 그에 따라 이익이 미덕을 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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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 눈에 비친 조선 후기 사람들은 이상한 옷을 입고, 너무나 자부심이 강하고, 이방인들에 대해 너무나 철저하게 무관심하고, 너무나 배타적이고, 자기 방식대로 행동하는 데 너무나 만족하는 듯 보였다. 조선의 쇄국 정책은 부분적으로 외국 약탈에 대한 반응이었지만, 또한 민족적 자부심, 사실상의 경제적 자급자족의 성취, 중국의 세계질서 내에서 존중받는 자신의 지위 등의 표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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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적 사고는 지금도 북한 주체사상에서 볼 수 있듯이 이념의 힘에 대한 한국인의 두드러진 관심을 예증한다. 이런 사고는 올바른 행위를 하려면 생각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가정하며 심지어 사상이 인간 현실을 규정한다고 주장하여 마르크스주의에 이단을 저지르는 지경까지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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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상정한 질문은 서양 위주인 한시적 질문이다. 말하자면, 한국은 왜 우리가 한 일을 하지 않았느냐 이다. 이는 서양은 ‘해냈다’는 답을 미리 깔고서 동양에 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이 지났을 때 역사가들의 핵심 질문은 동아시아가 ‘그것을 해냈고’ 서양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질문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1950년 6월에 전쟁이 시작된 것은 어느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내전은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역사 속에서 자라나기 때문이다. 역사가가 그 복잡한 역사를 알고 있는 한, 수많은 요인으로 빚어지는 전쟁에 대해 어느 한쪽을 비난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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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2-14 1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브루스 커밍스는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과 문화를 잘 이해한 역사학자라 생각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2-14 13:02   좋아요 1 | URL
네, 와이프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한국 연구를 많이 한 학자인 듯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