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하게도 우리는 인간이 옛날의 수준 낮은 문화를 거치고 끊임없이 발전해 오늘날 유례없는 절정기에 이르렀다고 여기는데, 부질없는 생각인 셈이다.

 

 

5000년 전 이집트 피라미드 앞에 서면 시간이 전혀 새롭게 보인다. 그리스와 우리 사이에 놓인 2000년 시간이 무색해지고, 잠시나마 카이사르와 헤로도토스가 근대를 사는 동시대인으로 느껴진다. 우리에게 그리스는 먼 옛날이지만, 그리스인에게 이집트 피라미드는 그보다 더 먼 옛날일 테니 말이다. 그리스 여행 안내서 오류로 멤논의 거상이라고 잘 못 알려진 아멘호테프 3세 거상의 기부(基部)에는 2000년 전 이 유적지를 다녀간 그리스 여행객들이 새겨놓은 비문이 있다. 그 까마득한 옛날의 유물을 보고 있노라면 그리스와 우리를 메우고 있는 2000년 세월이 무색해지면서, 그리스인과 우리가 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기묘한 기분이 또 한 번 든다. 메네스부터 클레오파트라에 이르기까지 이집트는 얼마나 장구한 역사를 누렸는가! 그리스 수명도 천 년에 이르는 로마 역사도 이집트 옆에 서면 보잘것없어진다.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람세스 2세에 비하면 철부지 애송이에 불과하다.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450년경 이집트 인부들과 농부들을 봤을 때 그 모습을 이렇게 낙관적으로 묘사했다. ‘이집트 농부들은 땅의 열매를 거두어들일 때 수고를 들이지 않는다. 이들은 쟁기로 고생스레 밭을 갈거나 호미질을 하지 않는다. 나일 강이 저절로 밀려와 밭에 물을 대 주고, 밭에 물을 대 주던 그 강이 물러가면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땅에 씨를 뿌리고는 밭에 돼지를 풀어 놓는다. 돼지가 돌아다니면서 씨 뿌린 밭의 흙을 다져주면 농부는 이제 수확할 때만 기다린다.’ 돼지를 시켜 밭의 흙을 밟게 했다면, 원숭이들을 길들여 나무 열매를 따는데 이용했다. 그리고 밭에 물을 대 주는 나일 강은 범람기가 되면 얕은 웅덩이에 물고기 수천 마리를 남겨두고 갔다. 당시 학생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나와 있는데, 살코기 33가지, 구운 고기 48가지, 각종 음료 24가지였다. 부자들은 식사에 포도주를 곁들였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맥주를 마셨다.

 

 

한편 이집트에 치안 제도가 있었던 흔적은 없다. 이집트의 상비군조차(이집트는 사방이 사막과 바다로 둘러싸인 천연 요새였기에 항상 상비군 규모가 작았다) 나라 안 기강을 유지하는 데는 거의 이용되지 않았다.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고, 법과 통치를 유지하는 것은 거의 전적으로 파라오 특권에 의존했으며, 파라오 특권은 학교와 종교가 유지시켜 주었다. 중국을 제외하고는 심리에 이토록 크게 의지해 나라 기강을 다진 곳은 없었다.

 

 

파라오는 왕실의 순수한 혈통을 지키기 위해 자기 누이와 결혼하는 일이 잦았다(간혹 자기 딸과 결혼하기도 했다). 이것이 과연 혈통을 약화시켰는지 단정하기는 쉽지 않으며, 적어도 수천 년 간 실험을 거친 이집트인들은 그렇게 생각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누이와 결혼하는 풍습은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졌고, 서기 2세기에 이르자 아르시노에의 시민 3분의 2나 이 풍습을 시행했던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집트 시(詩)에서 오빠와 누이란 말은 오늘날 우리의 연인이나 애인과 똑 같은 뜻이었다.

 

 

가정생활은 오늘날 가장 고도로 발달한 문명만큼이나 질서가 잘 잡혀 있었고, 도덕적 분위기와 영향력도 건전했다. 여자 위치는 오늘날 대부분 국가보다 높은 편이었다. ‘고대에도 현대에도 나일 계곡에 살았던 이 사람들만큼 여자에게 그토록 높은 법적 지위를 준 사람들은 없었다.’ 유적들을 보면 여자들이 공공장소에서 먹고 마시고, 거리에서 애정행각을 벌여도 관심을 받거나 해를 입지 않았으며, 산업과 교역 분야에서도 자유롭게 활동한 모습이 나타나 있다. 잔소리 심한 아내들을 좁은 집안에 가둬 두는 데 익숙했던 그리스 여행객들은 여자들의 그런 자유로운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여자들은 또 자기 이름으로 재산을 소유하고 물려줄 수 있었다. 여자가 이렇게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갖게 된 것은 이집트 사회가 약간 모권제적인 특징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여자는 집안에서 명실상부한 안주인 노릇을 했을 뿐 아니라, 땅도 모두 모계로 상속되었다. 남자들이 자신 누이와 결혼한 건 친밀함이 낭만적 사랑으로 발전해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어머니가 딸에게 물려주는 집안의 유산을 자신이 마음껏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구애를 할 때도 보통 여자가 먼저 나섰다.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지는 사랑 시와 편지들은 대개 여인들이 남자에게 바치는 것이다. 시와 편지로 밀회를 청하고, 직접적으로 구애하기도 하고, 공식적으로 청혼을 하기도 했다. 이런 내용이 담긴 편지도 있다. ‘오 아름다운 나의 친구여, 당신의 아내가 되어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의 주인이 되는 게 나의 소망입니다.’ 따라서 정절과 또다른 덕목인 정숙은 이집트인 사이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이집트인들은 요즈음 윤리 의식에는 거북할 정도로 대 놓고 성생활을 이야기했다.

 

 

철학사를 다루는 사람은 흔히 그리스 이야기로 서두를 연다. 한편 자신들이 처음 철학을 만들었다고 믿는 인도인이나, 자신들이 철학을 완성했다고 믿는 중국인은 우리 서양인의 역사 지방주의를 보고 슬며시 미소 지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 틀렸을지도 모른다. 그리스인은 이집트인의 지혜를 소중한 금언으로 여겨서, 먼 옛날 살았던 이 민족에 비하면 자신들은 철부지 어린애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오래된 철학 작품으로 알려진 것이 바로 <프타호테프의 가르침>이다. 이 작품은 기원 전 288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보이는데, 공자, 소크라테스, 부처보다 2300년이나 전이다. 프타호테프는 멤피스를 통치하는 지방관이었으며, 왕의 총리 대신을 지냈다. 관직에 물러나면서 그는 아들에게 영구불변의 지혜가 담긴 지침서를 남겨 주었다. <프타호테프의 가르침> 중 한 문구다. ‘진실을 넘겨짚지 말 것이며, 제후든 농부든 사람이 방심해서 한 말은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말지어다. 그것은 영혼이 끔찍이도 싫어하는 것이다.’

 

 

기원전 2200년 전 이집트 석판의 시는 ‘카르페 디엠’을 노래한다. ‘즐거운 오늘 하루를 축하하라. 하루를 기진맥진 살지 말라. 보라, 사람들은 죽을 땐 누구나 빈손이다. 그리고 한번 저세상에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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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활동이 예술이다. 어떤 생각이나 느낌을 아름답거나 장엄한 형태로 표현해 내는 것이 예술인 것이다. "

 

 

 <성 테레사의 환희> 잔 로렌초 베르니니, 1652년, 대리석, 로마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

 

 

<성 테레사의 환희>는 “주님의 한 천사가 황금으로 된 뜨거운 화살로 성 테레사 심장을 꿰뚫자 아픔과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로 충만함을 느낀” 것을 표현했다. “전체적인 구도에서 천사와 성녀가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표현되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물론 취향과 교육 문제이므로 시비를 가리는 논란은 불필요할 것이다.” “이 작품 이야기는 바로크 미술가들이 의도하는 열렬한 환희와 신비스러운 황홀경의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온당하게 사용되었다. 베르니니는 의도적으로 이전 미술가들이 피했던 감정의 극점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때까지 미술 영역에서 한 번도 시도된 적 없는 표정의 격렬함이 표현되었다.” <서양미술사>(곰브리치, 예경, 2003)

 

 

 

 

 

 

 

 

 

 

 

 

 

 

"그래서 예술을 접하면 태곳적 여자가 남자에게 불러일으켰던, 혹은 남자가 여자에게 불러일으켰던 모종의 기쁨이 되살아난다. 그녀에게 어울리는 장신구와 옷가지 하나하나, 우아하고 균형 잡힌 그녀 자태를 떠오르게 하는 모양새와 동작 하나하나 모두가 아름다워 보인다."

 

 

<미술의 기원: 양치기의 그림자를 더듬어가는 디부타데스> 장바티스트 르노, 1786년

 

 

그림은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는 데 필요하다. "부드러운 저녁 하늘은 연인이 함께하는 마지막 날이 저물고 있음을 암시한다. 여자는 남자가 떠났을 때 자신 마음속에 남자를 더 선명하고 더 강하게 붙잡아 두기 위해 실루엣을 벽에 기억으로 남긴다."<영혼의 미술관>(알랭 드 보통, 문학동네, 2013)

 

 

 

 

 

 

 

 

 

 

 

 

 

 

 

 

"또 동경하는 남자 모습에서 미적 즐거움을 얻을 수도 있다. 약자로 하여금 강인함을 숭배하게 만드는 남자 매력에서 바로 힘의 짜릿함을 느끼게 하는 장엄미가 나오고, 바로 이것이 무엇보다 웅장한 예술을 이룩해 낸다."

 

 

 <성 게오르기우스> 도니텔로, 1416년경, 대리석상, 피렌체 바르젤로 국립 미술관

 

 

“<성 게오르기우스>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을 결심을 한 사람처럼 두 다리로 땅을 굳건히 딛고 당당히 서 있다. 얼굴은 활력과 집중력이 넘친다. 조각상에 젊음의 혈기와 용기가 매우 탁월하게 표현되어 지금까지 언급될 정도로 유명하다. 또한, 조각 예술의 전체적인 접근법에서도 완전히 새로운 착상을 보인다. 두 손이나 눈썹 세부 묘사는 전통적인 모델에 의존하지 않고 인체 실제 모습을 참신하게 보여준다." <서양미술사>(곰브리치, 예경, 2003)

 

 

"원시 사회에 미의식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면, 그건 당시엔 성적 욕구가 생기면 지체 없이 바로 충족시킬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물이 아름답게 보이는 건 상당 부분이 상상력에서 비롯되는데, 성적 대상을 상상력으로 미화시킬 틈이 전혀 없었다는 이야기다."

 

 

 <카라와 나체> 디에고 리베라, 1944년, 검은 판에 유채

 


“디에고 리베라에게 여체 탐구는 본질적인 부분이었다. 고갱이나 마티스와 마찬가지로 그에게는 여인과의 쾌락을 통한 자기확인이 필요했고, 지속적인 육체적 접촉이 필요했다. 여체의 아름다움, 모델들의 아름다움은 격렬한 생명의 상징이며, 머릿속 이념들과 지성의 무력함에 맞서는 현실적인 생명력의 상징이었다. 그의 그림은 쾌락과 생명력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표현하고 있으며, 남성에 속한 죽음과 전쟁의 본능에 대립해서 빛을 발하는 여성적 아름다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표현하고 있었다. 그는 여인 육체에서 자신의 그림을 위한 모든 형태를 끌어냈다. 마티스나 세잔처럼 그는 동그스름한 모양과 몹시 부드러운 윤곽 속에서 균형을 찾고자 했다. 똬리를 튼 것 같은 여인들의 형체는 전쟁이나 가난한 자의들의 예속, 강자의 사악함을 순화시켜 준다. 그 곡선은 과일의 모양을 닮았고, 대지의 꿈틀대는 창조력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떤 화가도 그처럼 강한 신념으로 남성과 여성, 전쟁과 사랑, 태양과 달의 힘 사이에 작용하는 상호보완성을 표현한 적이 없었다.”<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르 클레지오, 다빈치, 2011)

 

 

 

 

 

 

 

 

 

 

 

 

 

 

 

"예술엔 삶의 의미를 포착한 생각이면 모두, 삶의 긴장을 일깨우거나 풀어 주는 느낌이면 모두 담길 수 있다. 또 예술 형식에는 리듬이 있어 우리에게 만족감을 준다. 교대로 들고 나는 우리의 숨소리, 심장 박동에 맟춰 흐르는 피, 겨울과 여름, 밀물과 썰물, 밤과 낮의 웅장한 뒤바뀜과 딱 맞아떨어지는 리듬 말이다."

 

 

 <선원들> 게하르트 리히터

 


리히터의 그림 <선원들>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분해되어 흘러가는 것 같다.” “시간이 흐르면서 개인 외모도, 인생도, 친구 관계도 끊임없이 변한다. 그게 바로 살아 있다는 증거다.” “리히터 그림이 주목받는 이유는 ‘살아 있음’ ‘생명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그의 추상화엔 수직적 힘과 수평적 힘이 교차한다. 수평선과 수직선을 통해 그림 형태와 색이 분할될 뿐 아니라 시간도 분해되어 흘러간다. 상하를 가르는 수직선은 뭔가 변하지 않는 형상을 나타내는 듯하다. 좌우로 흐르는 수평선들은 흘러가는 시간의 순간성과 덧없음을 표현한다.” <예술과 경제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김형태, 문학동네, 2016)

 

 

 

 

 

 

 

 

 

 

 

 

 

 

 

"균형미는 강인한 힘을 대변하며, 균형미 하면 식물과 동물 그리고 여자와 남자의 질서 잡힌 조화가 떠오른다. 또 색을 통해서도 즐거움을 줄 수 있다. 색은 심기를 밝게 해 주고 생명력을 키워 주는 요소다."

 

 

 얀 페르메이르, <우유 따르는 하녀>(1660)

 

 

네덜란드 작가 얀 페르메이르의 <우유 따르는 하녀>(1660)에서 "압도하는 색은 앞치마와 식탁보 위에 쓰인 선명한 울트라마린 블루다. 울트라마린 불루는 준보석인 청금석에서만 구해지는 값비싼 안료로, 성화나 신분이 높은 사람을 그릴 때만 사용되는 재료였지만, 화가는 이 소박한 장면을 위해 눈부신 울트라마린 블루를 아낌없이 사용했다. 가장 평범한 일상의 한 순간은 이렇게 가장 위대한 것이 되었다." 페르메이르는 평범함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본 것이다. 이러한 시선은 당시 "17세기 네덜란드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신교와 구교의 갈등을 종식하고 모든 다양성의 공존을 인정하는 새로운 문화를 꽃피운 네덜란드에서는 시민이 사회의 주역이었다."<시대를 훔친 미술>(이진숙, 민음사, 2015)

 

 

 

 

 

 

 

 

 

 

 

 

 

 

 

"예술은 자연이나 현실을 손에 잡힐 듯 있는 그대로 그려 내 식물이나 동물의 기막히게 사랑스러운 순간이나, 순간순간 덧없이 변하는 상황의 의미를 포착해, 우리가 오래도록 즐기고 느긋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가만히 붙들고 있다."

 

 

<아이의 얼굴> 페터 파울 루벤스, 캔버스에 유채, 파두츠 리히텐슈타인 왕실 소장품

 

 

“루벤스는 자신 손길이 닿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당장 생기를 띠게 된다고 확신했는데 사실상 그의 생각이 옳았다. 그것이 루벤스 예술의 가장 큰 비밀이었다.” “<아이의 얼굴>은 구도상 복잡한 기교가 없으며 화려한 의상이나 흘러내리는 빛도 없는 단순한 소녀의 정면 초상일 뿐이다. 그런데도 살아 있는 사람처럼 숨을 쉬고 맥박이 고동치는 듯하다. 그림의 생기발랄한 생명력은, 분석이 부실 없기는 하지만, 아마 입술의 물기를 암시하는 얼굴과 머리카락을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데 사용한 대담하고 섬세한 빛의 효과가 분명 관계 있을 듯싶다. 그림 입체감은 채색 소묘의 표현 때문이 아니라 ‘회화적인’ 수단으로 생겨난 것이며, 그 점이 생명력과 활력 느낌을 더욱 강조해 주는 것이다.”<서양미술사>(곰브리치, 예경,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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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8-15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가 구도, 색채, 명암, 알레고리 등을 사용해서 자신의 정신 세계를 표현하는 방식을 보면, 작은 방식의 차이가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는 맛을 전해준다 여겨집니다. 덕분에, 감상에는 더 많은 공부가 요구되네요.^^:)

북다이제스터 2018-08-15 10:13   좋아요 1 | URL
네 좀 알고보면 좀 다르게 보이는 듯 합니다. ^^
 




“교역이 생겨나 그 여파로 돈과 이윤 개념이 도입되기 전까지만 해도, 재산이란 것은 없는 거나 다름없었고 따라서 통치도 거의 필요 없었다. 개인 용도가 아닌 물건에는 재산 의미가 하도 약하게 작용하여 애초에 머리에 서 있지 않은 재산 개념을 끝없이 강화시키고 주입시켜야 했다.


거의 모든 지역에서 토지는 공동체 소유였다. 북아메리카 인디언, 페루 원주민, 인도 치타공힐 부족, 보르네오 섬 주민 및 남양제도 주민들은 공동으로 땅을 소유하고 경작했던 것으로 보이며, 수확률도 공유했다. 오마하 인디언은 ‘땅은 물이나 바람과 같아서 사고팔 수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모아 섬에는 백인이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토지를 판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식량에 대해서도 공산주의식 사고가 널리 퍼져 있었다. 음식을 가진 사람이 먹을 게 하나도 없는 사람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거나, 여행을 하는 도중 아무 집에나 들러 음식을 얻어먹거나, 가뭄으로 고생하는 마을을 이웃 사람들이 먹여 살리는 일은 ‘야만인’들에게는 예삿일이었다. 숲속에서 식사를 하려고 자리를 잡을 경우엔 누군가 와서 함께 먹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사람들을 부르는 것이 도리였다. 그런 후에야 혼자 먹어도 괜찮다고 여겨졌다.


한번은 영국인이 사모아인에게 런던의 빈민에 대해 이야기 해 주자 그 ‘야만인’은 깜짝 놀라며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요? 음식이 없다고요? 친구도 없어요? 살 집이 없다고요? 그 사람이 자란 곳은 어디인데요? 친구가 가진 집도 없어요?’ 그들에게는 마을 어딘가에 옥수수가 자라고 있는 한 음식이 모자라는 사람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호텐토트족의 경우, 다른 사람보다 많이 가진 자가 있으면 모두가 똑같이질 때까지 잉여분을 나누어 주는 것이 관례였다. 이들은 배고픈 자를 돌보지 않았다는 비난을 듣느니 차라리 자기가 배고프고 마는 편을 택했다. 이들은 스스로를 하나의 커다란 가족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소위 ‘문명’이라는 것에 도달하자 원시 공산주의가 사라져 버린 건 어째서일까? 공산주의가 왜 문명 초창기에 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는지 그 이유를 한 가지 들면, 공산주의는 결핍의 시대에 가장 잘 번창하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결핍의 시대에는 기아라는 공통의 위험을 이기고자 개인들이 집단으로 뭉치게 된다. 그러다 세상이 풍요로워지고 위험도 줄어들면, 사회적 결속이 약화되면서 개인주의가 퍼진다. 사치가 시작되는 곳에서 공산주의는 끝나기 마련이다. 성장하는 문명은 모두 불평들이 배가되는 장인 셈이다.


따라서 현대 사회는 모두 보다 단순하고 평등한 삶에 대한 일종의 집단 기억으로서 공산주의에 대한 꿈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다 불평등과 불안정이 도를 넘어서면 사람들은 공산주의의 빈곤은 까맣게 잊은 채 평등함을 떠올리며 이 이상향을 향해 기꺼이 되돌아가려고 한다. 합법이든 불법이든 역사 속에서 로마의 그라쿠스 형제나 프랑스의 자코뱅당원, 소련의 공산당원 손에 토지 재분배가 주기적으로 되풀이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부 역시 가혹한 재산 몰수, 혹은 몰수나 다름없는 소득세나 유산 상속세 징수를 통해 주기적으로 재분배된다. 그러다 부, 상품, 권력 경쟁이 다시 시작되면서 다시 한 번 경쟁과 능력의 피라미드가 형성된다. 그 결과 불평등은 곧 이전만큼 심각한 상태가 된다. 이렇게 보면 ‘경제사’는 모두 서서히 진행되는 사회적 유기체의 심장 박동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부가 집중되는 대규모 심장 수축기와, 자연스럽게 혁명으로 폭발하는 대규모 심장 이완기가 번갈아 찾아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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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8-15 0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본주의 경제 체계에서 교환 수단인 화폐 도입으로 가치 체계가 왜곡되면서, 금융 경제와 실물 경제가 분리되고 있음을 느끼는 요즘입니다. 금융 산업은 ‘그들만의 리그‘가 된 듯한 요즘 이제는 처음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북다이제스터 2018-08-15 10:15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금융산업이 자본주의의 아주 끝판왕인 것 같습니다. ㅠㅠ
 




“자신 이외 다른 인간에게 ‘야만인’이나 ‘미개인’이라는 말을 쓰는 것부터가 객관적 사실의 표현일 수 없다. 넓은 도량과 갖가지 윤리와 관련해 우리에게 많은 걸 가르쳐 줄 수 있는 원시인을 우리가 과소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원시인의 창의적 재주는 보통 현대인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듯하다(우리보다 뛰어날지도 모른다). 우리가 원시인과 구별된다면 사회적으로 축적된 지식과 물질, 도구 때문이지 본래부터 지능이 뛰어나기 때문은 아니다. 원시인과 현대인 사이의 거리는 지극히 짧고도 좁다. 인류 문명의 역사는 그만큼 짧다. 게다가 현대인의 윤리라고 반드시 원시인 윤리보다 나은 건 아니다.


원시시대 성관계는 지극히 난교였다. 그래서 전형적인 원시시대 엄마는 귀찮게 아이 아빠를 밝히려 애쓰지 않았다. 아이는 남편이 아니라 자기 자식이었다. 원시 사회에서는 아버지와 아이 사이가 너무나 소원했다. 여자 자신 역시 남편 사람이 아닌 씨족의 사람이었다. 보통 남편과 아내보다 남매 사이의 유대 관계가 더 강했다. 남편은 자기 가족 및 어머니 씨족과 머무는 경우가 많았기에, 아내는 그저 비밀 방문객에 불과했다. ‘이 세상에서 남편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아내라는 생각은 비교적 현대적인 것이자, 인류의 극히 일부분에만 적용된다.’


원시시대 혼전 성교에 제약이 없었다. 이런 여건이니 원시 사회에 매춘이 성행할 수 없는 건 당연하다. ‘역사가 가장 유구한’ 매춘부란 직종도 알고 보면 상대적으로 역사가 짧다. 혼전 성관계를 자유로이 맺을 수 없게 될 때에야 비로소 매춘은 생긴다. 순결이 뒤늦게 발달한 개념인 것도 같은 매락이다. 원시시대 처녀는 애를 못 낳는다는 말이 돌까 두려워했지, 처녀성 잃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혼전 임신은 애를 못 가질 거란 의구심을 단번에 잠재우고 아이를 잘 낳을 거란 보장을 해 주기에, 남편감을 찾는데 해가 되기보다는 득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처녀인 여자는 인기가 없어 멸시당했다. 캄차달족은 신랑이 신부가 처녀인 것을 알면 심하게 화가 나서 ‘딸을 막 키웠다며 장모에게 호되게 욕을 했다.’ 처녀성이 결혼에 걸림돌이 되는 곳은 상당수에 달했다. 그래서 결혼에 방해가 되는 이 금기를 깨기 위해 아가씨들이 낯선 이방인에게 스스로 몸을 맡기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티베트에서는 엄마들이 자기 딸을 처녀에서 벗어나게 해 줄 남자들을 찾았으며, 인도 말라바르에서는 아가씨들이 지나가는 행인에게 그 일을 해 달라고 간청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처녀성이 결점에서 미덕으로 탈바꿈하고, 윤리 규범에서 중요 내용이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건 사유재산 제도 때문이었을 게 분명하다. 혼전 순결은 가부장제 남자들이 자기 아내에게 적용하던 소유 관념을 딸에게까지 확대 적용하면서 생겨났다. 처녀는 과거 이력을 통해 결혼 후에도 정조를 지키겠다는 확신을 주는 셈이고, 자기 재산을 남의 자식에게 물려주게 될까봐 노심초사했던 남자들에게는 그런 확신이 무엇보다 소중했다.


한편 남자들은 똑같은 원칙을 자신들에게 적용하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다. 남자의 혼전 순결을 주장한 적이 있는 사회는 역사상 하나도 없으며, 순결을 지킨 남자를 지칭하는 말은 그 어떤 언어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처녀성은 오로지 딸들만 지켜야 하는 것이었고, 그것을 강요하는 방식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원시의 관습이 남들이 보지 못하게 부녀자를 가리는 이슬람교도 및 힌두교도 관습과 결국엔 매한가지인 걸 보면, ‘문명’과 ‘야만성’의 거리거 정말 얼마 안 된다는 사실이 또 한 번 드러난다.


정숙에 대한 관념도 처녀성과 가부장제에서 생겼다. 사실 몸을 드러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부족은 오늘날에도 많다. 오히려 옷 입는 걸 부끄럽게 여기는 부족도 있다. 정숙 관념은 돈을 받고 시집온 아내가 남편에게 경제적 의무감을 느끼면서 생긴 것이기도 하다. 돈을 주고 자신을 산 남편에게 아무 보답도 되지 않는 간통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읻다. 옷이 등장한 게 바로 이때다. 대다수 부족에서 여자는 결혼한 후에야 옷을 입곤 했는데, 자신은 오로지 남편 소유라는 표시이자 정사를 억제하는 수단이었다.


사실 사람들이 무엇을 부끄럽게 여기느냐는 전적으로 그 지방의 금기, 집단의 관습에 달려있다. 중국 여자들은 최근까지만 해도 자기 발이 보이는 걸 부끄럽게 여겼고, 아랍 여자들은 얼굴 보이는 걸, 투아레그족은 입술 보이는 걸 부끄럽게 생각했다. 하지만 고대 이집트 여자나, 19세기 인도 여자, 20세기 발리 여자는 가슴을 다 드러내고도 전혀 부끄러운 줄 몰랐다. 아무튼 사유재산이 등장하면서 여자는 완벽한 정절을 지켜야 했고, 거기다 남자는 여자가 자기 것이란 태도까지 가지게 되었다. 손님에게 아내를 빌려 주는 것도 여자 몸과 영혼이 모두 자기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자의 지위상승 및 하강을 좌우한 것은 남자 교양이나 윤리가 아니라 여자의 전략적 지위였다. 남자는 고되고 위험천만한 사냥에 직접 나선다는 점을 내세워 일 년 중 상당 부분을 푹 쉬며 지냈다. 반면 여자는 아이를 낳아 기르고, 집을 고치고, 숲속이나 들판에서 먹을거리를 모으고, 요리하고, 청소하고, 옷과 장화를 만들었다. 남자는 언제든 공격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기에 부족이 이동할 때 무기 이외 다른 것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 나머지는 모두 여자가 들어야 했다. 부시먼족 여자는 종인 동시에 짐 나르는 동물로 이용되곤 했다.


지금은 남녀 힘의 차이가 성별을 가르지만, 그 시절만 해도 그런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힘의 차이는 선천적이기보다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는 이야기다. 신체적으로 불리한 걸 제외하면 여자는 키, 지구력, 창의력, 용기 면에서 남자와 거의 똑같았다. 그때에는 여자가 하나의 장식품이나, 아름다운 물건, 혹은 성적 장난감이 아니었다. 장시간 고된 일을 할 능력 있는 기운 센 한 마리의 동물이었다. 치폐와 인디언 추장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여자는 노동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다. 여자 하나가 남자 두 명 분의 짐을 끌고 나른다. 또 여자는 천막도 치고, 옷을 짓고 수선하며, 밤에는 우리를 따뜻하게 해 준다. 여자 없이는 무사히 여행하기가 절대 불가능하다. 여자는 모든 일을 하면서도 축내는 것은 적다.’


초창기 사회의 경제 발전은 대부분 남자가 아닌 여자가 이루었다. 남자가 수세기 동안 태곳적 수렵 및 목축 방식을 고수하는 동안, 여자는 천막 근처 땅에서 농사를 발달시키고 가정의 복잡한 기술을 발전시켰다. 여자가 가정이란 걸 만든 후 남자를 서서히 자기 가축으로 길들여 집에 들이고 문명의 든든한 심리적 기반인 사회성과 예의를 훈련시켰다. 남자들은 한 곳에 머물 줄 몰랐고 덩치 큰 장사들에겐 농사가 필경 따분한 일로 비쳤을 것이다. 하지만 농사를 남자들이 받아들이면서 경작을 통해 한때나마 여성이 쥐고있던 경제 주도권이 남자 손에 넘어갔다. 더불어 농기구가 괭이에서 쟁기로 발전하면서 체력이 중요하게 부각되었고 남자는 자신 우월함을 내세우게 되었다.


사실 남녀간 결혼은 변화무쌍한 제도다. 결혼 역사를 들여다보면, 배우자가 결합하지 않고 자식을 돌보는 원시시대 결혼부터 배우자들이 합치되 자식은 돌보지 않는 현대의 결혼에 이르기까지, 인간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거의 모든 형태와 실험을 거친 걸 알 수 있다. 분명하건 과거 온갖 형태의 결혼 속에서 낭만적 사랑의 흔적은 거의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남자는 값싸게 여자라는 노동력을 얻고, 양육의 덕을 보고, 때맞춰 밥 먹기 위해 결혼한 것이었다 야리바에서 원주민들은 결혼 축하에는 웬만하면 관심이 없다. 남자에게 아내를 얻는 건 별일이 아니어서, 옥수수 알을 떼 내는 것만큼이나 하찮게 생각한다. 애정은 결혼과 전혀 별개다. 원시 사회에서는 혼전 관계를 맺는 게 다반사기 때문에, 성생활을 절제하느라 열망이 쌓일 일이 없고 따라서 아내를 선택할 때도 열망은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욕망이 생기면 지체 없이 욕망을 충족시키기 때문에 보통 젊은시절 낭만적 사랑의 원천이 되는 안타깝고 그래서 사랑을 이상화시키게 되는 열망을 속에 안고 있을 시간 같은게 없다. 욕구를 제지하는 윤리적 장벽이 생겨나고, 부가 늘어야 일부 남자와 여자들이 낭만의 사치와 멋을 부릴 수 있게 된다. 원시부족이 지은 노래에서 사랑에 관한 내용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유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애정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야만인’은 결혼을 절대 신성한 의식으로 여기지 않으며, 거창한 행사가 필요한 경우도 거의 없다. 솔직히 말해, 결혼은 상업적 거래일뿐이다. 배우자를 고를 때 감정을 누르고 실용적인 면을 우선 고려하는 건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실용성보다 감정을 우선 생각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찰나의 성적 욕구에 잠시 사로잡혔다는 이유로 남자와 여자를 거의 한평생 서로 옭아매는 우리 관습을 ‘야만인’이 본다면 설명을 요구할 지도 모른다(그들이 우리처럼 무례하다면 말이다). 원시시대 아내는 재산을 거덜내는 존재가 아니라 경제적 자산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실질적이었던 ‘야만인’은 결혼 자체를 아예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해 힘을 합쳐 일하면, 각자 혼자 일할 때보다 더 부유하게 살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역사에는 여자가 결혼 속에서 더 이상 경제적 자산이 되지 못한 순간이 있는데, 그때 결혼 제도도 어김없이 부패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문명도 그와 함께 부패의 길을 걸었다.


(저자가 이러한 역사를 말한다고 하여) 윤리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므로 가치가 없다고, 따라서 우리가 속한 집단의 윤리적 관습을 당장에 내던져 역사를 좀 안다고 과시하는 편이 현명하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된다. 짧은 인류학 지식은 위험하다. 윤리가 가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사회 질서가 유지되는 방식은 정말 다양하다는 사실을 보여 줄 뿐이다. 윤리의 상대성을 발견하고 자신 관습과 윤리를 거부하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정신 상태를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복잡한 사회 구조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제도와 규약, 법률 등은 무수한 정신들이 수백 세기에 걸쳐 만들어 낸 작품이다. 그런 것을 누군가 일평생 만에 이해하겠다고 기대한다면 안 될 일이다. 그런 만큼 윤리는 상대적이되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 결론 내리면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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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8-08-16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라이언 리틀 <성격이란 무엇인가> 보면 조지 켈리의 ‘개인 구성개념(부분적인 사례를 관찰한 뒤 그것을 개인적으로 재구성해 만든 개념으로, 겉모습이나 행동을 보고 그 사람에 대해 주관적으로 해석해 구성한 정보)‘이 나옵니다. ‘또라이’, ‘밥맛없다’라고 꼬리표를 붙일 때 그것은 상대에게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에서 나온 구성 개념이란 소리죠. ‘미개인‘ 잣대에 대한 부연 설명이 될까 해서 옮겼어요^^
 

“사람에게 식인은 천성이 아니지만, 문화적으로 이에 쉽게 길들여질 수 있다”고 <식인과 제왕>의 저자 마빈 해리스는 주장한다. “식인풍습은 단지 종교의식 일환으로 사람을 겉치레로 먹는 시늉이 아니었다.” 식인풍습은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전 세계 광범위하게 생각보다 많이 행해진 문화였다고 해리스는 밝히고 있다. 자신 주변 생태환경이 파괴, 고갈되었지만 새로운 생산양식이 창조되지 않는다면, 인류는 식인도 서슴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특히 아즈텍 사람들은 수십만 명을 식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즈텍 문화는 전쟁-인신공양-식인풍습의 복합적 문화풍습을 만들었다. 식인 대상은 주로 전쟁 포로였다. “아즈텍 군대는 신에게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식인의식에서 사용할 포로를 되도록 많이 잡기 위해서 어떻게나 열성적이었는지, 적이 항복하기 전 너무 많이 죽지 않도록 총공세를 종종 삼갈 정도였다.” 아즈텍의 피라미드에는 가파른 경사로가 있는데, 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희생자 몸뚱이가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아래로 쉽게 굴러 떨어질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성직자가 그 희생자를 거두어다 사람들에게 인육으로 배분했다.

 

 

<문명 이야기 1-1>의 저자 월 듀런트도 비슷한 옛 상황을 좀 더 다양하고 자세하게 묘사한다. “식인 풍습은 한때 거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원시부족 중 식인풍속이 없는 곳은 거의 없으며, 아일랜드인, 이베리아인, 픽트인, 11세기 데인족 같은 후대 종족들도 식인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 고기를 주요 교역 상품으로 취급하고, 장례식 같은 건 모르던 부족도 상당수 달했다. 콩고의 우알라바 강에서는 남자와 여자, 어린 아이를 말 그대로 식품 일종으로 산 채 사고팔았다. 뉴브리튼 섬에는 현재 우리가 정육점에서 고기를 팔 듯 인육을 파는 가게가 있기도 했다. 솔로몬 제도 일부 지역에서는 잔치에 쓰기 위해 인간 제물을(여자를 더 선호했다) 돼지처럼 살찌우기도 했다. 한편 푸에고인들은 ‘개고기에는 수달 맛이 난다’며 여자 인육을 개고기보다 높이 평가했다. 타이티 섬의 한 늙은 폴리네시아인 추장은 자신이 먹는 음식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백인 고기는 제대로 구우면 잘 익은 바나나 맛이 난다.’ 하지만 피지인들은 백인 인육은 너무 짜고 질기며, 유럽 선원 인육은 먹을 수 없는 지경이라며 불평하곤 했다. 폴리네시아인 인육 맛이 더 났다는 것이다.”

 

 

 

 

 

 

 

 

 

 

 

 

 

 

 

 

듀런트도 해리스 주장처럼 사람들은 문화적으로 쉽게 식인을 용인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다른 식량이 부족해 식인풍습이 생겼다는 주장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일단 생겨난 인육에 대한 입맛은 식량 부족 사태가 해결된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고, 인육은 사람들이 열렬히 찾는 대상이 되었다. 원시 부족은 인육을 즐겨 먹는 것을 절대 수치로 느끼지 않았다. 아마 인육을 먹은 것이나 동물 고기를 먹는 것이나 도덕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멜라네시아에서는 친구들에게 구운 인육을 대접하면 추장의 사회적 명성이 크게 높아지곤 했다. 브라질의 한 현인 추장은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나는 인육보다 맛있는 사냥감은 알지 못 한다. 당신네 백인들은 정말 음식을 너무도 가린다.’

 

 

식인풍습이 사회적으로 모종의 이점이 있었을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스위프트는 식인풍습을 선례 삼아 남아도는 아동의 활용법을 내놓은 바 있다. 노인에게는 식인풍습이 죽어서 쓸모있을 기회가 되었다. 장례식을 불필요한 사치로 보는 관점도 있다. 한편 몽테뉴 눈에는 죽은 사람을 구워먹는 것보다 신의 이름으로 인간을 고문하는 것이(그가 살던 시대에는 그런 일이 다반사였다) 더 야만적인 일로 비쳤다. 우리 인간은 서로가 가진 착각을 존중해야 할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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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8-10 2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다이제스터님께서 말씀하셨던 마빈 해리스의 리뷰가 드디어 나오는군요^^:)

북다이제스터 2018-08-10 21:28   좋아요 1 | URL
제가 마빈 해리스 책을 3년 전 읽었는데, 겨울호랑이 님께 언제, 무슨 말씀을 드렸는지 당최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ㅠㅠ 제가 치매기가 좀 있어서요... ㅠㅠ

겨울호랑이 2018-08-10 20:50   좋아요 2 | URL
에고.. 아니에요. 예전에 <총, 균, 쇠>를 읽었을 때 작가 재레드 다이아몬드보다 마빈 해리스가 더 통찰력 있다고 알려주셨던 기억이 나서요. 북다이제스터님께서 좋은 작가를 알려주셔서 반가운 마음이 드는 글이었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18-08-10 20:53   좋아요 1 | URL
아하, 그랬군요. ㅎㅎ 아무튼 기억해 주셔서 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