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끝의 버섯
애나 로웬하웁트 칭 지음, 노고운 옮김 / 현실문화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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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부제는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라고 되어 있다. 저인망 어선 마냥 지구의 자원을 깡그리 수탈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폐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책이라 오해하기에 안성맞춤이다. 하지만 이 책은 사실 어떠한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는다. 단지 송이버섯이 어떻게 생겨나고 채집되며 상품으로서 유통되고 소비되는지를 추적한다. 그 과정에서 자본주의에서 탈출할 수 있는 실마리를 슬쩍슬쩍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그렇게 보일 뿐이다).

저자 애나 로웬하웁트 칭(지금부터는 애나 칭이라고 하겠다)은 인류학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문화인류학은 세계의 여러 문화를 비교연구하는 학문이지만, 사실 인류학에는 여러 갈래가 있다. 인류학이라는 게 인류에 대한 모든 것을 연구하는 광범위한 학문이니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말이다. 애나 칭은 포스트휴머니즘에 기반한 문화인류학자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인본주의, 즉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서 출발하는 이론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문화란 인간과 비인간, 즉 동식물과 환경이 함께 구축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애나 칭은 인간이 아닌 송이버섯을 중심으로 이 책에서 논지를 전개한다.

그녀는 자본주의와 송이버섯을 이렇게 설명한다. 자본주의에 내재되어 있는 확장성은 다양성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근대 자본주의는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의 확장성에서 비롯되었다. 작물(사탕수수)과 노동(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을 소외시키고 획일화하는 모델로 대규모의 농장 확대가 가능했고 이는 곧바로 산업혁명 이후 공장에 똑같은 형태로 이식되었다. 성공을 맛본 자본가들은 지구상의 모든 것을 이러한 확장을 통해 시장가치로 교환할 수 있다고 자신하게 되었다.

반면 송이버섯을 채집하는 것은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것과는 완연히 다르다. 송이버섯이 피어나는 숲에선 작물과 노동의 소외가 일어나지 않는다. 송이버섯은 소나무와 공생하면서 숲의 다양성에 기여한다. 또한 송이버섯 채집인은 플랜테이션 노동자들처럼 틀에 맞춘 규격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 즉, 소외되지 않는다. 애나 칭은 송이버섯 숲이 자본주의의 확장성에 의해 폐허화된 잔재에서 태어났다는 아이러니를 발견한다.

인간과 송이버섯, 소나무, 그 외의 다양한 생물과 무생물이 엮어내는 ‘다종의 세계 만들기‘는 서로 간의 협력과 관계맺음에 의해 유지된다. 인간은 활엽수를 벌목하고, 그 자리에 소나무가 들어서고, 소나무의 잔뿌리는 송이버섯 균류의 집이 되며, 송이버섯 균류는 땅의 양분을 소화하여 소나무에게 제공한다. 이렇게 번성한 소나무 숲은 인간과 그외의 동식물에게 다양한 먹거리와 거처를 제공한다. 송이버섯이 다종의 얽힘에 기반한 ‘공유지‘를 만들어내는 셈이다.

하지만 이 책은 앞서 말했듯 포스트휴머니즘에 기반한다. 따라서 인류를 작금의 위기에서 구원하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아니 제시할 수 없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다. 송이버섯의 공유지는 확장성이 없는 모델이기 때문이다. 애나 칭은 자본주의의 확장성 대신 송이버섯으로 대표되는 다양성을 주장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송이버섯 모델은 전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기 어렵다.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자본주의 자체를 대체할 수 있는 모델이 아니란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나면 자그마한 허탈과 가벼운 절망이 밀려온다.

이 책을 더욱 읽기 어렵게 하는 건 애나 칭 특유의 낯선 언술이다. 그녀는 오염, 교란, 번역, 구제 등의 용어를 원뜻과 아주 다르게 재정의하여 사용한다. 독자는 이 용어들에 익숙해지기 전까지 혼란스러운 숲길을 헤매야 한다. 인류학과 생물학의 언저리 어딘가 쯤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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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이야기 - 거리 이름에 담긴 부와 권력, 정체성에 대하여
디어드라 마스크 지음, 연아람 옮김 / 민음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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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주소는 어떤 의미일까? 누군가에게는 우편물을 보내거나 받을 때 외에는 그닥 필요하지 않은 무엇일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지위를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국가의 통제 수단이라고 의심할 수도 있다. 이 책의 저자 디어드라 마스크는 주소가 갖는 이 모든 가능성에 주목한다. 현대 사회에서 주소가 상징하는 바,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추적하는 게 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이 책 초반에 저자가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의 한 시골마을 친구를 찾아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1991년까지 도로명 주소가 있는 곳이 거의 없었다는 웨스트버지니아에서 길을 찾는 건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나 다름 없는 일. 주소가 없으니 내비는 쓸모가 없고, 길가다 마주치는 지역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가는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불편한데 주소를 만들어 주면 주민들이 기뻐하지 않을까? 놀랍게도 지역 주민들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도로명을 짓기 위해 파견된 공무원들은 살해 위협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들은 국가가 개인을 감시하고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 주소를 부여하려 든다고 의심한다. 이는 최초로 도로명 주소를 고안하고 도입했던 18세기 유럽의 시민 반응과도 유사하다. 합스부르크 제국을 통치한 마리아 테레지아가 숙적이었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과의 전쟁에서 참패하자, 더 많은 병력을 징집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입한 게 바로 주소 체계였다. 집집마다 주소를 매기고 거주자 명단을 작성하면 누가 어디에 사는지 투명하게 알 수 있으니 그만큼 징집이 쉬워진다. 국가가 개인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것. 바로 근대국가의 출발이다.

이 책의 표현을 빌면 ‘번호를 매기는 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작업이다. 번지가 막 도입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집에 번호가 매겨짐으로써 자신의 존엄성을 부정당했다고 느꼈다.‘ 저자가 찾아간 웨스트버지니아의 주민들도 그런 마음이었지 않았을까. 주민등록증에 지문이 들어가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자유를 중시하는 미국이니까.

하지만 18세기 유럽인들도 주소가 가져다주는 이점을 금세 깨달았다. 언제든 우편물을 받을 수 있고, 길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뒤를 이어 즉위한 요제프 2세는 주소를 배정하러 다니는 장교들에게 백성들의 삶을 살펴보도록 지시했다. 계몽주의에 심취해 있던 요제프 2세는 백성들이 처한 현실(지주의 학대, 낮은 교육 수준, 열악한 위생 상태)을 보고받고 농노제 폐지, 무상 교육 실시 같은 국가 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또다시, 근대국가의 출발이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로 넘어가 보자. 콜레라가 런던을 휩쓸던 흉흉한 시기에 전염병의 원인을 찾아낼 수 있었던 건 바로 주소였다. <왕좌의 게임>의 주인공 존 스노우는 아무것도 몰랐지만(You know nothing, John Snow), 콜레라의 원인을 밝혀낸 위대한 의사 존 스노우는 콜레라의 진원이 한 오염된 우물이었음을 잘 정리된 주소와 지도를 통해 알아낼 수 있었다. 이는 지금도 유효한데, 2010년 대지진 이후 아이티에도 콜레라가 크게 유행했다. 지진 이전에도 제대로 된 지도 한 장 구하기 어려웠던 아이티에서 콜레라의 진원지(놀랍게도 네팔 평화유지군 진지였다)를 찾는데 6년이나 걸렸다. 그나마 구글의 지원을 받아 환자들의 주거지를 지도로 만들고 나서야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 책은 이 외에도 주소가 갖는 권력과 인종, 계급과 지위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곳에 주소를 부여하기 위한 새로운 디지털 체계에 대해 논하면서 끝을 맺는다. 어느 대목 하나 빼놓을 수 없을 만큼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는 책으로, 주소 하나 만으로 이렇게 많은 논쟁거리를 다룰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ps. 지번 주소와 도로명 주소 체계를 언급하면서 일본과 한국의 사례가 등장한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건물 블록 중심의 지번 주소를 사용하며, 서양은 도로가 중심이 되는 도로명 주소를 사용한다. 그래서 일본을 방문하는 서양 관광객들은 길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이는 공간을 인식하는 동서양의 차이를 보여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동양은 도시를 구획으로 인식하고 서양은 선(도로)로 인식한다는 것. 그래서 지도를 그릴 때 동양인은 구획부터 그리고 서양인들은 길부터 그린단다. 그럼 우리나라는 어떤가? 우리나라는 일제 시대에 지번 주소가 도입되었다가 2011년부터 도로명 주소 체계로 전환되었는데, 그렇다고 공간의 인식이 바뀐 것 같지는 않다. 여전히 우리는 무슨무슨동에 산다고 말하지, 무슨 길에 산다고 말하지는 않으니까. 도로명 주소가 정착되면 우리의 사고체계에도 변화가 생길까? 호기심이 샘솟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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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둘러싼 바다 레이첼 카슨 전집 2
레이첼 카슨 지음, 김홍옥 옮김 / 에코리브르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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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 카슨은 바다를 사랑했다. 무분별한 살충제 남용이 불러올 무시무시한 미래를 예견한 책 <침묵의 봄>으로 세상을 바꾼 그녀이지만, 레이첼 카슨은 늘 바다를 고향으로 여겼다. 그녀의 저서 중 <침묵의 봄>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가 바다를 주제로 한 책이라는 점, 미국 정부 수산부에서 오랫동안 일했다는 점, 퇴직 후 뉴잉글랜드 바닷가의 웨스트사우스포트 섬에 자그마한 오두막을 짓고 집필에 몰두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평생 바다를 무엇보다도 사랑했다는 점에서 비록 바다와는 거리가 먼 펜실베이니아 서부 한적한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그녀의 참된 고향은 바다라 할 수 있겠다.

이 책 <우리를 둘러싼 바다>는 한국전쟁이 한창이었던 1951년에 출간되었다. 전작 <바닷바람을 맞으며>가 하필 2차대전 때 출간되는 바람에 참담한 실패를 겪었던 터라, <우리를 둘러싼 바다>의 판권을 사려는 출판사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천신만고 끝에 출판된 이 책은 매스컴의 찬사와 함께 큰 성공을 거두면서 카슨이 전업작가로 전향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우리를 둘러싼 바다>는 우리가 흔히 보아온 해양 다큐멘터리와는 조금 다르다. 이 책은 대양의 아래,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달과 해의 만유인력이 바다의 조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대양에 면면히 흐르는 거대한 해류로 인해 어떻게 지구의 온도가 조절되는지, 해저의 거대한 산맥과 계곡은 어떻게 생겨났는지, 해양 지각은 어떻게 움직이는지(지금은 당연한 상식이 되었지만, 이 책이 출간된 시점엔 베게너의 대륙이동설이 아직 학계에서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저 멀리 망망대해에서 파도는 어떻게 밀려오는지, 천문학적인 숫자의 플랑크톤과 규조류, 그밖의 미세 바다 생물들이 억겁의 세월을 거쳐 어떻게 바다를 변화시켰는지. 카슨은 이 모든 걸 과학의 언어로 마치 시인처럼 바다와 생명에 대한 사랑을 담아 노래한다.

그래서일까. 70년 전에 출간된 책이지만 지금 읽어도 세월의 더께가 앉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클래스는 영원하다고 누군가 말했지만, 고전의 참된 가치는 시간이 지나도 희미해지지 않는다. 레이첼 카슨이 좀 더 오래 살아서 더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다면, 지금 같은 기후재앙의 위기는 오지 않거나 한참 늦춰지지 않았을까? 그녀가 이 책에서 보여준 바다와 자연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침묵의 봄>이 환경 정책에 미친 심대한 영향을 생각한다면 터무니없는 상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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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들의 섬
리사 시 지음, 이미선 옮김 / 북레시피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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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비겁하다. 그리고 안일하다.

4·3이라는 형언할 수 없는 현대사의 비극의 한복판에서 피해자와 또다른 피해자를 대립시키는 이야기를 그리면서, 아마도 작가는 자신이 짜낸 오이디푸스적인 반전에 스스로 감탄했으리라. 주인공을 억지로 화해의 함정으로 몰아넣는게 얼마나 몰염치한 짓인지, 지금도 살아 있는 피해자들이 이 소설을 읽었을때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지를 그녀는 생각이나 했을까.

맞다. 복수가 꼭 정답은 아니다. 증오와 원한을 한정없이 품고 있을 순 없다. 하지만 왜 화해가 피해자의 몫이어야 하는가? 무자비한 폭력의 주체인 국가는 이 소설에서 왜 뒤켠에 숨어 있는가? 이방인 작가에게 우리 역사의 아픔은 등장인물들의 갈등을 피어오르게 하는 불쏘시개에 지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책은 비겁하다.

게다가 작가가 주인공 영숙과 미자 사이에 얽힌 원한과 미움의 고리를 풀어내는 방식이 무척이나 탐탁치 않다. 가족 세 명을 잃은 피해자 영숙에게 은근히 화해를 강요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영숙을 ‘분노와 원한을 차가운 껍질 속에 싸놓은’ 사람으로 묘사하는 대목에서 작가가 인간을 너무 평면적으로 이해하는 게 아닌가, 그 정도의 작가적 역량 밖에 갖추지 못한 게 아닌가 강한 의문이 들었다. 모두가 시대의 희생자이고 그러니 서로를 용서해야 한다는 지겨운, 그리고 어설픈 휴머니즘. 그래서 이 책은 안일하다.

그렇다고 허물만 있는 건 아니다. 이 소설의 작가 리사 시 - 중국계 미국인이다 - 는 방대한 자료 조사를 통해 그 시대 제주의 시대상과 풍경을 작품 속에 충실히 녹여 냈다. 일제, 미군정, 4·3, 군사독재에 걸쳐 있는 40여년의 잔인한 세월과 그에 꺾이지 않는 해녀들의 강인함을 묘사한 것 또한 책의 미덕이다. 그러나 가장 높이 살만한 것은 제주 특유의 가모장제를 통해 우리의 고정된 성 관념을 뒤흔든게 아닐까 한다.

주인공 영숙과 준부의 결혼생활은 ‘전통적인 것이 아니었다’라고 작품 속에서 표현된다. 남편인 준부는 교사로 매일 아침 일을 하러 학교로 출근하고, 영숙은 집에 남아 딸 민리를 돌봐야했다. 잠깐, 이상하다고? 이게 왜 ’전통적‘이지 않냐고? 당시 제주에선 아내는 해녀로서 물질을 하여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고, 남편은 집에서 애를 봐야 했다. 이게 바로 제주의 전통이었다. 남녀의 성 역할이란게 시대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걸, 그리고 절대 고정되어 있는게 아니라는 걸 이 책은 설득력있게 웅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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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의 역사 - 생명의 음료, 우유로 읽는 1만 년 인류문명사
마크 쿨란스키 지음, 김정희 옮김 / 와이즈맵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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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쿨란스키의 책을 지난 번 <연어의 시간>에 이어 두 번째로 읽는다.

이 책을 간단히 평하자면,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의 우유 버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가 과학을 다루고 있다면, 이 책은 우유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알려준다.

인간이 어떻게 다른 동물의 젖을 먹게 되었는지, 어떻게 우유로 치즈나 버터 등의 유제품을 만들어 먹게 되었는지, 그리고 동서양 각국에서 우유의 쓰임새와 위상은 어떠했는지, 우유 유통은 어떻게 개선되고 발전되었는지, 우유를 둘러싼 논쟁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등등...

그럼 이 책이 <거의 모든 것의 역사> 만큼 훌륭한 책인지 묻는다면? 자신있게 ‘그렇다‘라고 답하기는 어렵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는 과학을 매개로 45억년 지구의 역사를 정교하고 아름답게 그려낸, 한 폭의 거대한 만다라 같은 책이다. 여기엔 끊임없이 독자의 주의를 환기하고 과학의 경이로움으로 인도하는 빌 브라이슨의 글솜씨가 큰 역할을 한다. 반면, <우유의 역사>는 조금 산만하다. 많은 정보를 담고 있으나 어떤 방향성을 갖고 있는지 아리송하다. 그래서인지, 우유의 역사라기보다는 우유에 대한 잡학사전에 가깝다.

게다가 환경문제에 천착한 <연어의 시간>과 달리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이 없다. 말미에 유기농, GMO, 동물 복지에 대한 내용이 다루어지지만 분량이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인지 책이 좀 밋밋한 느낌이 있다.

단점을 많이 나열했지만 그래도 꽤 준수한 책이라는 건 분명하다. 우유에 대해 평소에 갖고 있었을 법한 궁금증들을 해결해 주고, 그간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 을 깨우쳐 주니까 말이다. 예를 들어 이런 것들. 나는 항상 가염버터가 왜 있는지 궁금했었다. 버터에 왜 짠맛이 돌아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됐으니까. 사실 버터에 소금을 넣는 건 버터가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란다. 무염버터는 냉장고가 발명된 이후에야 비로소 먹을 수 있게 된 사치품이다. 또 하나. 선디(Sundae) 아이스크림은 미국의 한 아이스크림 상인이 일요일에만 아이스크림에 토핑을 올려 팔았던 데서 유래했단다. 그럼 왜 Sunday가 아니라 Sundae일까?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이 아이스크림 같은 경박한 음식에 주일(Sunday)이라는 이름을 붙인 걸 불쾌해 해서라는 설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책은 곳곳에서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준다. 이를테면, 미국에서 유기농 우유 인증을 받으려면 항생제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말인즉슨, 젖소가 병에 걸려도 항생제를 주면 안 된다는 뜻이다. 낙농가가 유기농 인증을 유지하려면 병에 걸린 소에게 항생제를 처방하고 곧바로 팔아버려야 한다. 동물복지와 극적으로 충돌하는 지점이다. 우리가 윤리적 소비로 한데 묶어서 생각하는 유기농과 동물복지가 미국의 우유 산업에서는 공존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저자가 인용한 맥락에서는 조금 빗겨 가지만,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말한 ‘자연적 오류‘ - 무엇이든 자연스러운 게 최선이라는 그릇된 믿음 - 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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