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소 이야기 - 거리 이름에 담긴 부와 권력, 정체성에 대하여
디어드라 마스크 지음, 연아람 옮김 / 민음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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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주소는 어떤 의미일까? 누군가에게는 우편물을 보내거나 받을 때 외에는 그닥 필요하지 않은 무엇일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지위를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국가의 통제 수단이라고 의심할 수도 있다. 이 책의 저자 디어드라 마스크는 주소가 갖는 이 모든 가능성에 주목한다. 현대 사회에서 주소가 상징하는 바,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추적하는 게 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이 책 초반에 저자가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의 한 시골마을 친구를 찾아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1991년까지 도로명 주소가 있는 곳이 거의 없었다는 웨스트버지니아에서 길을 찾는 건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나 다름 없는 일. 주소가 없으니 내비는 쓸모가 없고, 길가다 마주치는 지역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가는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불편한데 주소를 만들어 주면 주민들이 기뻐하지 않을까? 놀랍게도 지역 주민들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도로명을 짓기 위해 파견된 공무원들은 살해 위협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들은 국가가 개인을 감시하고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 주소를 부여하려 든다고 의심한다. 이는 최초로 도로명 주소를 고안하고 도입했던 18세기 유럽의 시민 반응과도 유사하다. 합스부르크 제국을 통치한 마리아 테레지아가 숙적이었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과의 전쟁에서 참패하자, 더 많은 병력을 징집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입한 게 바로 주소 체계였다. 집집마다 주소를 매기고 거주자 명단을 작성하면 누가 어디에 사는지 투명하게 알 수 있으니 그만큼 징집이 쉬워진다. 국가가 개인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것. 바로 근대국가의 출발이다.

이 책의 표현을 빌면 ‘번호를 매기는 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작업이다. 번지가 막 도입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집에 번호가 매겨짐으로써 자신의 존엄성을 부정당했다고 느꼈다.‘ 저자가 찾아간 웨스트버지니아의 주민들도 그런 마음이었지 않았을까. 주민등록증에 지문이 들어가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자유를 중시하는 미국이니까.

하지만 18세기 유럽인들도 주소가 가져다주는 이점을 금세 깨달았다. 언제든 우편물을 받을 수 있고, 길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뒤를 이어 즉위한 요제프 2세는 주소를 배정하러 다니는 장교들에게 백성들의 삶을 살펴보도록 지시했다. 계몽주의에 심취해 있던 요제프 2세는 백성들이 처한 현실(지주의 학대, 낮은 교육 수준, 열악한 위생 상태)을 보고받고 농노제 폐지, 무상 교육 실시 같은 국가 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또다시, 근대국가의 출발이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로 넘어가 보자. 콜레라가 런던을 휩쓸던 흉흉한 시기에 전염병의 원인을 찾아낼 수 있었던 건 바로 주소였다. <왕좌의 게임>의 주인공 존 스노우는 아무것도 몰랐지만(You know nothing, John Snow), 콜레라의 원인을 밝혀낸 위대한 의사 존 스노우는 콜레라의 진원이 한 오염된 우물이었음을 잘 정리된 주소와 지도를 통해 알아낼 수 있었다. 이는 지금도 유효한데, 2010년 대지진 이후 아이티에도 콜레라가 크게 유행했다. 지진 이전에도 제대로 된 지도 한 장 구하기 어려웠던 아이티에서 콜레라의 진원지(놀랍게도 네팔 평화유지군 진지였다)를 찾는데 6년이나 걸렸다. 그나마 구글의 지원을 받아 환자들의 주거지를 지도로 만들고 나서야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 책은 이 외에도 주소가 갖는 권력과 인종, 계급과 지위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곳에 주소를 부여하기 위한 새로운 디지털 체계에 대해 논하면서 끝을 맺는다. 어느 대목 하나 빼놓을 수 없을 만큼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는 책으로, 주소 하나 만으로 이렇게 많은 논쟁거리를 다룰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ps. 지번 주소와 도로명 주소 체계를 언급하면서 일본과 한국의 사례가 등장한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건물 블록 중심의 지번 주소를 사용하며, 서양은 도로가 중심이 되는 도로명 주소를 사용한다. 그래서 일본을 방문하는 서양 관광객들은 길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이는 공간을 인식하는 동서양의 차이를 보여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동양은 도시를 구획으로 인식하고 서양은 선(도로)로 인식한다는 것. 그래서 지도를 그릴 때 동양인은 구획부터 그리고 서양인들은 길부터 그린단다. 그럼 우리나라는 어떤가? 우리나라는 일제 시대에 지번 주소가 도입되었다가 2011년부터 도로명 주소 체계로 전환되었는데, 그렇다고 공간의 인식이 바뀐 것 같지는 않다. 여전히 우리는 무슨무슨동에 산다고 말하지, 무슨 길에 산다고 말하지는 않으니까. 도로명 주소가 정착되면 우리의 사고체계에도 변화가 생길까? 호기심이 샘솟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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