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녀들의 섬
리사 시 지음, 이미선 옮김 / 북레시피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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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비겁하다. 그리고 안일하다.

4·3이라는 형언할 수 없는 현대사의 비극의 한복판에서 피해자와 또다른 피해자를 대립시키는 이야기를 그리면서, 아마도 작가는 자신이 짜낸 오이디푸스적인 반전에 스스로 감탄했으리라. 주인공을 억지로 화해의 함정으로 몰아넣는게 얼마나 몰염치한 짓인지, 지금도 살아 있는 피해자들이 이 소설을 읽었을때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지를 그녀는 생각이나 했을까.

맞다. 복수가 꼭 정답은 아니다. 증오와 원한을 한정없이 품고 있을 순 없다. 하지만 왜 화해가 피해자의 몫이어야 하는가? 무자비한 폭력의 주체인 국가는 이 소설에서 왜 뒤켠에 숨어 있는가? 이방인 작가에게 우리 역사의 아픔은 등장인물들의 갈등을 피어오르게 하는 불쏘시개에 지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책은 비겁하다.

게다가 작가가 주인공 영숙과 미자 사이에 얽힌 원한과 미움의 고리를 풀어내는 방식이 무척이나 탐탁치 않다. 가족 세 명을 잃은 피해자 영숙에게 은근히 화해를 강요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영숙을 ‘분노와 원한을 차가운 껍질 속에 싸놓은’ 사람으로 묘사하는 대목에서 작가가 인간을 너무 평면적으로 이해하는 게 아닌가, 그 정도의 작가적 역량 밖에 갖추지 못한 게 아닌가 강한 의문이 들었다. 모두가 시대의 희생자이고 그러니 서로를 용서해야 한다는 지겨운, 그리고 어설픈 휴머니즘. 그래서 이 책은 안일하다.

그렇다고 허물만 있는 건 아니다. 이 소설의 작가 리사 시 - 중국계 미국인이다 - 는 방대한 자료 조사를 통해 그 시대 제주의 시대상과 풍경을 작품 속에 충실히 녹여 냈다. 일제, 미군정, 4·3, 군사독재에 걸쳐 있는 40여년의 잔인한 세월과 그에 꺾이지 않는 해녀들의 강인함을 묘사한 것 또한 책의 미덕이다. 그러나 가장 높이 살만한 것은 제주 특유의 가모장제를 통해 우리의 고정된 성 관념을 뒤흔든게 아닐까 한다.

주인공 영숙과 준부의 결혼생활은 ‘전통적인 것이 아니었다’라고 작품 속에서 표현된다. 남편인 준부는 교사로 매일 아침 일을 하러 학교로 출근하고, 영숙은 집에 남아 딸 민리를 돌봐야했다. 잠깐, 이상하다고? 이게 왜 ’전통적‘이지 않냐고? 당시 제주에선 아내는 해녀로서 물질을 하여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고, 남편은 집에서 애를 봐야 했다. 이게 바로 제주의 전통이었다. 남녀의 성 역할이란게 시대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걸, 그리고 절대 고정되어 있는게 아니라는 걸 이 책은 설득력있게 웅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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