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라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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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비어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저명한 학자. 그러나 그의 빼어난 성취의 시간은 이미 이십년 전에 끝났다. 지금 그는 노벨상 수상자라는 타이틀로 먹고 사는 신세다. 대머리에 뚱뚱하고 키작은 이 남자는, 네 번의 결혼을 실패하고 지금 다섯 번째 결혼도 위기에 처해 있다. 그의 아내 퍼트리스가 건축업자와 외도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위기는 사실 비어드가 자초한 거나 마찬가지다. 그는 강박적으로 바람을 피우는 타입의 사람이었고, 이를 참다못한 퍼트리스가 복수를 시작한 거니까. 원인 제공이야 어찌됐든 비어드는 미칠듯한 질투심에 불탄다.

이 즈음 기후 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정부 연구소의 책임자 자리를 얻은 비어드는 친환경에너지 개발에 온 열정을 쏟는 연구원 톰 올더스를 만난다. 비어드는 하루종일 자기를 쫓아다니며 자신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올더스를 성가셔 한다. 그러나 어떤 중요한 사건을 계기로 비어드는 이 아이디어에 관심을 갖게 되고 비어드의 인생은 완전히 바뀐다.

이 책은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 기후 변화 위기에서 인류를 구한다는 숭고한 사명을 짊어진 과학자가 그 내면의 도덕성은 형편없다는 아이러니. 자신의 끊임없는 외도로 다섯 번의 결혼을 모두 실패하고, 노벨상 수상자이면서도 새파랗게 젊은 포닥의 아이디어를 훔쳐 청정 에너지를 개발에 나서고 투자자를 끌어 모은다. 그는 화석연료의 무절제한 사용으로 지구가 망가진다고 주장하면서 정작 자기 몸은 폭식과 폭음으로 망가져 간다. 결혼을 다섯번이나 했지만 일평생 아이만큼은 절대 갖지 않던 그에게 마지막까지 대가 없는 사랑을 준 건, 다름아닌 그가 원치 않던 늦둥이 딸이라는 것도 아이러니 중 하나다.

소설 내내 비어드는 인문학자들을 경멸하고 무시한다. 인문학자들은 과학에 의거한 사실과 데이터를 임의의 해석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가 어줍잖은 논쟁을 벌인다는 이유로. 작금의 PC주의자와 페미니스트에 대한 공격의 지점과 일치한다. 소설 속에서 비어드가 겪는 봉변은 ‘통섭’으로 유명한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실제 70년대에 당한 테러를 연상시킨다(원인은 좀 다르지만). 그러나 정작 비어드 또한 자기합리화와 위선으로 똘똘 뭉친 인물이라 인문학을 멸시할 자격은 없어 보인다. 여기서 이언 매큐언의 속내 - 대체 누가 누구를 비난하고 단죄하려 드는가? 너희는 그럴 자격이 있나? - 를 엿본 것 같아 조금 섬찟하다. 그 전 작품에들서도 언뜻언뜻 느껴지던 정체모를 불편함이 바로 이것이었나 보다.

출판사에서는 이 책을 블랙코미디라고 선전하지만, 이언 매큐언 특유의 질식할 듯한 답답함은 그대로 살아 있다. ‘코미디’가 아닌 ‘블랙’에 방점이 찍힌 작품이라는 말이다. 주인공 비어드로 체화한 수없이 많은 아이러니는 이언 매큐언이 독자에게 던지는 메시지이다. 인간의 본성은 이토록 모순으로 가득한 불가해한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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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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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내내 어디선가 유사한 얼개를 가진 이야기를 본 듯한 기시감에 시달렸다. 기억을 곱씹고 독서 목록을 뒤져 마침내 찾아낸 건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두 소설 모두 2차 대전 무렵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사랑하는 이와 헤어진 노인, 그리고 아버지를 일찍 여읜 소년 또는 소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야기의 무대도 둘 다 뉴욕이고 소년/소녀가 아버지가 남긴 단서를 찾아 수수께끼를 쫓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공교롭게도 <사랑의 역사>의 작가 니콜 크라우스와 조너선 사프란 포어, 두 사람은 부부다. 게다가 두 소설 모두 미국에서 2005년에 출간됐다.

작가적 양심을 굳이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사실 두 작품의 소설적 문법은 꽤나 다르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은 자칫 산만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실험적이며, 독자에게 수없이 많은 문장을 쏟아낸다. 반면 <사랑의 역사>는 정갈하고 솔직하게 읽는 이의 감정을 파고든다. 쓸데없이 배배꼬지 않으면서도 수수께끼의 핵심으로 교묘하게 접근한다. 자세히 보면 꽤 차이가 많은 작품들이지만, 내러티브가 지나치게 유사하다는 건 짚고 넘어가야겠다.

<사랑의 역사>는 노인 레오 거스키와 소녀 엘마 싱어의 이야기가 교차되는 구조로 짜여져 있다. 나치의 폴란드 침공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레오는 고향 마을에 사랑하는 소녀가 있었지만, 그녀는 먼저 미국으로 건너와 레오를 기다리다 아이를 낳고 다른 이와 결혼한다. 레오는 열쇠공으로 살다 쓸쓸히 늙어가는데, 어느 날 그의 집 앞으로 소포가 하나 도착한다. 소포의 정체는 그가 소녀를 사랑하던 시절에 썼던 소설.

엘마 싱어의 아버지는 엘마가 여섯 살 때 췌장암으로 죽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남미를 여행하다가 우연히 서점에서 산 <사랑의 역사>라는 소설의 여주인공 이름에서 딸의 이름을 따 왔다. 엘마의 어머니는 남편이 죽은 뒤 번역으로 생계를 이어 가는데, 어느 날 그녀에게 <사랑의 역사>를 영어로 번역해 달라는 익명의 편지가 도착한다. 거액의 사례금을 약속하면서. 엘마는 번역을 부탁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게 왜 하필 자기 이름을 따온 작품인지 추적해 간다.

작중에서 <사랑의 역사>는 레오 거스키와 엘마 싱어,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이어주는 열쇠이자 서서히 드러나는 진실의 모체이다. 니콜 크라우스는 노련한 솜씨로 독자의 호기심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 레오와 엘마가 처음으로 만나는 이 책의 마지막 순간, 모든 궁금증은 해소되고 역사는 마무리된다.

이 책의 제목은 다분히 도발적이다. 사랑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감정이어서 역사의 보편성을 접합하는게 당치 않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 책은 이야기의 맥락을 잃지 않으면서 남녀 간의 사랑, 부모자식 간의 사랑, 친구 사이의 우정 등 거의 모든 종류의 사랑을 담고 있다. <사랑의 역사>라는 거창한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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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하우스 - 평범한 하루 24시간에 숨겨진 특별한 과학 이야기 공학과의 새로운 만남 27
데이비드 보더니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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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초년 시절, 지금은 없어진 종각 코아아트홀에서 <마이크로코스모스>라는 영화를 보았더랬다. 아트필름과 인디 영화의 전성기였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시네마 키즈를 자처하던 시대의 유산이었던 극장. 러닝타임 내내 곤충들의 세계를 초접사와 슬로모션으로 어루만지는 다큐는 그리 놀랍지도 신선하지도 않았지만, 화면의 질감과 색채만큼은 황홀했다.

데이비드 보더니스의 초기작인 <시크릿 하우스>는 이 영화처럼 미시 세계를 다루는 책이다. 아니, 곤충보다도 훨씬 작은 세균과 먼지의 나노 단위 세계이니 우리에겐 더더욱 낯설다. 가상의 부부가 집에서 겪는 하루의 일상을 현미경을 바짝 대고 들여다 본다. 저자는 그 와중에 등장하는 수많은 주인공들 - 진드기, 살모넬라균, 광자, 음파, 모래 등등 - 의 존재와 행동의 원리를 우아하고 재치있게 설명한다. 다양한 물건들 - 청바지, 매니큐어, 감자칩, 전자레인지, 데오도란트 - 도 마찬가지. 우리의 상식을 벗어나는 미소한 존재들의 물리적・화학적 상호작용이 이렇게 재미있다니!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사생활의 역사> 또한 개인의 집을 무대로 하는 책이라 일견 비슷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생활의 역사>는 주로 역사적 관점에서 집과 개인을 바라본다면, <시크릿 하우스>는 순수히 과학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차이가 있다. 둘 다 좋은 책이니 같이 읽어보면 좋을 듯 하다.

수많은 과학저술가들 중 과학의 희열을 느끼게 해주는 능력은 내가 아는 한 데이비드 보더니스가 최고다. 너무 쉽지도 어렵지도 않게 절묘한 밸런스를 맞춰서 독자가 과학에 흥미를 갖게 하는 그의 저작들이야말로 대중 과학서적의 표본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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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eft 1848-2000 - 미완의 기획, 유럽 좌파의 역사
제프 일리 지음, 유강은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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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어내는 건 무척이나 고된 독서경험이었다. 1천 페이지 동안 삽화 하나, 사진 한 장 없이 활자로만 가득찬 책. 학술 논문을 읽는 듯 지극히 딱딱하고 건조한 문체에 수없이 많은 각주는 독자를 질리게 한다. 두 달 넘게 독서라기보다 노동에 가까운 행위를 한 나 자신을 칭찬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나 좌파의 본원인 유럽의 장대한 이념적 역사를 총망라한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위대하다. 또한 방대한 학술서에 가까운 이 책을 간단히 몇 줄로 리뷰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여기선 아래와 같이 역사 속 좌파 이데올로기의 인상적인 편린을 묘사하는 게 최선이 아닐까 한다.

1.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인식과는 달리 산업혁명 시기 노동계급의 단일성은 신화에 가까웠다. 상대적으로 형편이 나았던 수공업 중신의 숙련노동자들과 생산수단을 갖고 있지 않은 공장 프롤레타리아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었다. 비단 생산수단의 소유 유무만이 아니라 출신 지역, 종교, 언어 등에 따른 문화적 정체성도 단일한 노동계급의 창출을 방해하는 요소였다. 그리고 이 단일 노동계급의 신화는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을 가부장제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노동계급과 빈민이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는 부르주아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선 노동계급의 여성은 고정된 ˝정숙한˝ 젠더의 역할을 수행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2. 카우츠키로 대표되는 사회주의자들은 ‘정통 마르크스 주의‘에 매몰되어 현실 사회를 이념의 틀에 짜맞추려는 극도의 경직성을 보였다. 이를테면 20세기 초반 독일엔 500만 명이나 되는 소농이 존재했는데, 독일 사회민주당은 소농들에 대한 지원이 자본주의의 확대에 따라 소멸될 운명인 낡은 농업형태를 구제할 뿐이라며 지원안 자체를 기각했다. 그들에겐 공장 프롤레타리아만이 진정한 노동계급이었던 것이다.

3. 마셜플랜은 트루먼독트린과 결합하여 전후 유럽에서 부활의 조짐을 보였던 좌파를 효과적으로 위축시켰다. 미국에겐 유럽의 좌파에 의한 자생적인 사회개혁보다 반공주의의 세력화가 중요했던 까닭이다. 미국은 마셜플랜의 대가로 공산당을 비롯한 좌파의 추방을 요구했고 유럽 각국의 보수반동세력은 이에 기꺼이 응해 온건좌파마저 난도질해버렸다. 이는 반공과 더불어 미국식 자본주의 - 억압적 노사관계, 생산성에 대한 집착, 낮은 임금인상율 - 이 서유럽에 이식됨을 의미했다.

서유럽에 마샬플랜이 있었다면 동유럽엔 스탈린주의가 있었다. 전후 움트기 시작한 좌파 내 자유로운 사상의 물결은 동유럽 각국 공산당에 대한 모스크바의 개입과 잔혹한 숙청으로 괴멸적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혐오스러운 솎아내기 과정에서 레지스탕스나 유대인들이 입어야 했던 고난은 나치 시절과 별다를 바 없을 지경이었고, 질식할듯한 광신적 분위기 아래 좌파의 창조성은 완벽히 파괴되었다.

그러나 서유럽의 좌파 - 정확히는 사회민주주의자 - 는 마르크스주의와 계급투쟁의 전통에서 벗어나면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친 좌파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그들은 혁명 대신 개혁을 선택하여 복지국가와 보편적 참정권, 여성 인권 등의 중요한 사회적 가치를 얻어냈고, 이를 기반으로 의회정치에 탄탄한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제 그들은 예수 재림 마냥 언제 올지 모를 자본주의의 몰락 대신 비교적 평등하고 영속적인, 케인즈주의에 입각한 번영을 바라게 되었다.

4. 전후의 68혁명은 국가권력은 물론이고 좌우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특히 대공황을 몸소 경험하고 파시즘에 대항해 전쟁을 치렀던 좌파들에게 개인의 욕망과 일상의 정치를 말하는 68세대는 무척 당황스러운 ‘아이들‘이었다. 혁명의 수단으로 록음악과 마약, 장발을 내세우는 젊은이들에게 이 구좌파들이 할 수 있는 건 그들이 겪은 고된 역사를 무기 삼아 훈계와 협박을 일삼는 것 뿐이었다. 신좌파가 등장한 68혁명은 프라하의 봄과 더불어 좌파의 지배적 담론이었던 스탈린주의를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길고 긴 좌파의 역사를 관통하는 주제는 의회 정치로의 진입이냐 대중 투쟁의 지속이냐의 갈림길에서의 선택이었다. 지금 한국의 좌파의 자리매김은 어떠한가. 의회 정치로 진입하여 좌파다운 의제를 설정할 능력이 되는지도 의문이지만, 그 이전에 현장 투쟁의 동력을 제대로 만들어낼 수 있을지조차 모르겠다. 연대, 저항, 계급적 평등 같은 좌파의 핵심가치와 대중의 거친 욕망이 어긋난지 오래된 지금, 우리 사회에서 좌파가 설 자리는 어디인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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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역사
버나드 로 몽고메리 지음, 승영조 옮김 / 책세상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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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의 수많은 명장 중에 누구나 한 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버나드 로 몽고메리가 있다. 북아프리카 사막에서 그 유명한 롬멜을 격파하고, 지상군을 총지휘하여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성공시켰으며, 패튼과 지독한 앙숙이었던 당대의 명장. 2차대전의 빛나는 무훈 외에도 그가 후대에 남긴 유산이 있었으니 바로 이 <전쟁의 역사>이다. 저자가 팔순이 넘은 나이에 완성한 이 책은 기원전 7000년 전 예리코에서 벌어진 전쟁부터 현대의 냉전까지 약 9천년 간의 전쟁사를 다룬다. 주요한 전쟁을 개별적으로 서술한 역사서는 많지만 이처럼 전쟁 한 가지만을 주제로 한 통사(通史)는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이 책이 갖는 가치는 각별하다.

9천년의 장구한 역사 만큼이나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철저히 전쟁을 바탕으로 역사를 서술한다. 이를테면, 코르테스의 아즈텍 정복은 세계사적으로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사건이지만, 몽고메리는 이 사건을 아예 다루지 않는다. 전쟁사적 관점에서 아즈텍 정복은 새로운 전술이나 무기가 등장하여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꾼 게 아닌, 일방적인 학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군인의 관점은 역사가의 관점과는 다르다. 전쟁에 관련된 것으로만 역사와 국가를 바라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역사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의구심을 가질 만한 대목이 종종 등장한다. 특히 우리에게 친숙한 동아시아 역사가 그렇다. 중국은 평화를 사랑한 나머지 타 민족을 침략한 적이 없는 국가인 반면, 일본인들은 비견할 바 없는 전투 민족이다. 게다가 우리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도 있는데, 일본이 391년에 한반도 남부는 물론이고 개경까지 점령했다는, 일본의 임나일본부설보다도 황당한 주장이 그것이다. 하지만 전쟁사 답게 전쟁과 무기에 대해서는 비교적 정확하게 기술되어 있다. 예를 들자면, 전국시대까지 사무라이의 주된 무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이미지와 달리 칼이 아니라 활이라는 점 등이다.

다른 역사서에서 볼 수 없는 이 책 만의 장점을 꼽자면 양차대전을 전부 겪은 명장 중의 명장이 지은 책이라는 것이다. 과거의 전쟁들을 장군의 입장에서 상세히 리뷰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이 만약 그 전쟁의 지휘관이었다면 어떻게 작전을 펼쳤을지를 독자에게 이야기한다. 저자는 지속적으로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너럴십 - 좁게는 지휘관의 통솔력이고 넓게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환경을 창조하는 것 - 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는 이러한 몽고메리의 전쟁 리뷰를 통해 지휘관의 관점에서 전쟁을 바라보게 된다. 아무리 탁월한 역사가라도 전쟁과 전략, 그리고 신무기의 전쟁사적 의미까지는 분석할 수 있겠지만, 실전을 수없이 겪은 노장의 관록은 절대 따라잡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경험은 특별하다.

영국 육군 원수까지 지낸 인물이라 그런지 역사 서술이 상당히 편향되어 있다는 점은 좀 불편하다. 영국이 치른 주요한 전쟁들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아주 자세하게 다루고 있으며(심지어 영국과 관련된 인도는 한 챕터 전체를 할애한다. 중국, 몽골, 일본을 한데 묶은 것과 동일한 분량이다.), 본인의 최대 업적인 알라메인 전투는 쓸데없이 디테일하다. 또한 근대 아시아 파트에서는 진취적인 서양에 대비되는 나약한 동양이라는 유럽의 제국주의적 정서가 은연 중에 투영되어 있어 읽기에 많이 불편했다.

전쟁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할 책이지만, 안타깝게도 번역의 질이 좋지 않다. 군사 전문가가 아닌 문학 평론가가 번역한 탓에 곳곳에서 잘못된 용어가 난무한다. 1천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이어서 그런가 뒤로 갈수록 오역과 오탈자가 급증한다. 책의 레이아웃도 문제인데, 옮긴이 주를 적기 위해 한 페이지 중 3분의 1을 비워놓아서 쓸데없이 페이지 수가 늘어났다. 덕분에 목침으로 써도 될만한 두께여서 읽는 내내 책이 뜯어지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우리나라 출판계의 양장본 사랑을 감안하더라도 580 페이지 가량의 원서를 1천페이지로 뻥튀기한 건 너무 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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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18 1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하철 독서가 2021-08-18 21:17   좋아요 0 | URL
손에 들고 볼 수 있는 사이즈는 아니예요. 독서대가 있어도 너무 두꺼워서 고정하기 어려울 지경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