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창비시선 387
문태준 지음 / 창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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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터운 스웨터

 

 

엄마는 엄마가 입던 스웨터를 풀어 누나와 내가 입을 옷을 짜네 나는 실패에 실을 감는 것을 보았네

나는 실패에서 실을 풀어내는 것을 보았네

엄마의 스웨터는 얼마나 크고 두터운지 풀어도 풀어도 그 끝이 없네

엄마는 엄마가 입던 스웨터를 풀어 누나와 나의 옷을 여러날에 걸쳐 짜네

봄까지 엄마는 엄마의 가슴을 헐어 누나와 나의 따뜻한 가슴을 짜네

 

-24페이지 

 

조춘(早春)

 

 

그대여, 하얀 눈뭉치를 창가 접시 위에 올려놓고 눈뭉치가

물이 되어 드러눕는 것을 보았습니다

 

 

  눈뭉치는 하얗게 몸을 부수었습니다 스스로 부수면서 반쯤 허물어진 얼굴을 들어 마지막으로 나를 보았습니다

내게 웅얼웅얼 무어라 말을 했으나 풀어져버렸습니다

나를 가엾게 바라보던 눈초리도 이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나는 한접시 물로 돌아간 그대를 껴안고 울었습니다

이제 내겐 의지할 곳이 아무 데도 없습니다

눈뭉치이며 물의 유골인 나와도 이제 헤어지려 합니다

-25페이지

 

 

시월

 

 

 

수풀은 매일매일 말라가요

풀벌레 소리도 야위어가요

나뭇잎은 물들어요

마지막 매미는 나무 아래에 떨어져요

나는 그것을 주워들어요

이별은 부서져요

속울음을 울어요

빛의 반지를 벗어놓고서 내가 잡고 있었던 그러나 가늘고

차가워진 당신의 손가락과 비켜간 어제

 

-27페이지

 

 

외길

 

 

 

빛살은 잦바듬하게 기울어요

풀벌레 소리는 낙엽에 덮여요

해는 땅에 떨어져 옷고름을 풀어요

마지막 남은 열매인 고독은 가지 끝에 매달려 있어요

창백한 내 볼에선 당신 냄새가 나요

나는 오늘도 당신을 넘어가요

외길에는 가젤 같은 코스모스 앓는 갈가마귀 당신은 나를 단호하고 냉담한

액자 속에 넣지만 내 생각은 달라요

당신은 아직도 내게 홀로넘쳐요

달빛은 푸른 숄을 외길의 어깨에 둘어져요

이 외길 아니었다면 밤이 이처럼 거대하다는 걸 알지 못했을 거예요

 

-28페이지

 

화초들을 위탁함

 

 

 

아파트 주민들이 베란다에 있던 화초들을 들고 바깥으로 나오네

화초들의 양육을 볕과 비와 바람에게 맡기네

화초들은 꽃도 없이 이미 잎마저 시들시들하네

벽과 지붕이 필요 없는 자연은 그녀의 탄력 있는 눈으로 처진 화초들을 바라보네

이제 화초들은 산꽃처럼 길러질 것이네

그녀는 의사처럼 화초들의 체온을 떨어뜨리고 박동을 고르게 하겠지

그녀는 바람의 심령술로 혼절한 영혼들을 흔들어 깨우겠지

딸의 곁에서 간호하는 어머니처럼 그녀는 아픈 자연들을 돌보겠지

오늘은 가랑비가 고루고루 내리네

내일은 볕이 잔모래처럼 쌓이겠지

 

-33페이지

 

뻐꾸기 소리는 산신각처럼 앉아서

 

 

 

뻐꾸기의 발음대로 읽고 적는 초여름

이처럼 초여름 가까이에 뻐꾸기는 떠서

밭둑에도 풀이 계속 자라는 무덤길에도 깊은 계곡에도

뻐꾸기의 솥 같은 발음

뻐꾸기의 돌확 샅은 발음

한낮의 소리 없는 눈웃음 위에도

오동나무 넓고 푸른 잎사귀에도 산동백에도

높은 산마루에도 바위에도

뻐꾸기 소리는 산신각처럼 앉아서

 

-40페이지

 

소낙비

 

 

 

 

나무그늘과 나무그늘

비탈과 비탈

옥수수밭과 옥수수밭

사이를

뛰는 비

너럭바위와 흐르는 시내

두 갈래의 갈림길

그 사이

하얀 얼굴 위에

뿌리는 비

열꽃처럼 돋아오는 비

이쪽

저편에

아픈 혼의 흙냄새

아픈 혼의 풀냄새

 

 

소낙비 젖어 후줄근한 고양이 어슬렁대며 산에 가네

이불 들고 다니는 행려처럼 여름낮은 가네

 

-41페이지

 

외딴집

 

 

 

 

이 수풀은 새소리 하나 일지 않습니다

누군가 이 수술에서 새의 둥지를 다 훔쳐가버렸습니다

빈 그릇으로 자루에서 쌀을 퍼 덜어냅니다

물을 떠 온 후 내에 가서 아직 눈이 소복이 덮인 흰 돌과 물의 흐르는 발목을 보고 돌아옵니다

나의 폐는 폐옥이지만 미미하게 새날의 냄새가 있습니다

제게 빛은 넘칩니다

넘치는 빛에 갓 생겨난 근심이 비치다 사라집니다

 

-44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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