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산 형사 베니 시리즈 1
디온 메이어 지음, 송섬별 옮김 / artenoir(아르테누아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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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연쇄살인, 누가 그를 범죄자로 만드는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비정한 사회 현실을 고발한 묵직한 메시지!

 

 

  다양한 범죄스릴러 소설들이 쏟아지지만 그 중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배경으로 한 <악마의 산>은 좀 더 특별해 보인다. 우리가 자주 접하지 못하는 아프리카 최남단의 제3세계, 그 낯선 나라 속에 음험하게 도사리고 있는 수많은 공포들은 이 소설의 무게감이 결코 가볍지 않다고 여기게끔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어려운 사건을 착착 해결해나가는 지적이고 멋진 형사가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고층빌딩 숲이 즐비한 도심의 세련된 공간이 나오는 것도 아니며, 현란한 액션과 추격신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비정하고 음울한 사회 현실, 거리를 헤매야 하는 아이들, 타락한 경찰들, 몸을 팔아서 삶을 연명하는 여자들 등이 만연한 이곳은 그야말로 어디서든 범죄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만 같다.

 

 

  소설은 크게 3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한때 KGB출신에 고도의 훈련을 받은 전사 토벨라, 알콜중독자가 되어버린 강력계 형사 베니 그리설, 딸 아이를 키우기 위해 콜걸이 된 크리스틴이 그들이다. 우연히 강도 두 명을 만나 그들로부터 아들을 잃게 된 토벨라는 이 땅의 사법체계가 그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는 데다 도망치기까지 한 것에 분노한다. 아이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이 땅을 지켜주고 그들 앞에 놓인 위험한 장애물을 치워주는 게 마땅히 어른들이 할 일이지만 이 사회는 단숨에 변할 것 같지 않다. 결국 그는 스스로 복수를 다짐한다. 아프리카 전통 창인 아세가이를 이용하여 보석으로 풀려났거나 법의 심판을 앞두고 있는 아동성폭행범들만 골라 처단하며 나름의 정의구현을 실현하기로 한 것이다.

 

 

지금 이 순간 파카밀레가 옆에 있었다면 토벨라는 그렇게 말해 주었을 것이다. 목적이 수간을 정당화한다고. 파카밀레를 살해한 불의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빠져나가게 둘 수는 없었다. 힘없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사법체계가 제대로 된 처벌을 해 줄 수 없다면, 지금이 바로 최후의 수간을 사용할 시점이다. 설명하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운 이 세계에서 누군가는 맞서 싸워야 했다. “여기까지다. 더는 안 돼.” 누군가는 일어나서 외쳐야 했다. / 74p

 

 

  한편, 강력계 형사 베니 그리설은 능력이 출중한 베테랑 형사였으나 알콜 중독에 빠지면서 가족은 물론 동료들로부터 외면을 당한다. 결국 6개월 안에 술을 끊지 않으면 이혼을 하겠다는 아내의 통보로 인해 끊임없이 들러붙는 술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 와중에 전기주전자 코드로 목을 졸려 살해하는 연쇄살인범이 나타나고 그를 잡는 것으로 서서히 밑바닥까지 추락했던 자신의 명성을 다시금 되찾아가려한다. 그러던 중 아세가이를 이용해 아동성폭행범들을 살인하는 연쇄살인범을 잡으라는 특명이 내려지고,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과 함께 온갖 이목이 집중된 이 살인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단순히 줄거리만 요약하면 이렇듯 형사 베니 그리설의 대활약상을 기대해야겠으나, 사실 이 소설은 형사로서 혹은 한 가정의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서 그의 인간적인 부분에 보다 비중을 두고 있다. 추측하건데 ‘형사 베니 시리즈1’이라고 표지에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소설이 베니 형사의 고뇌와 그가 그것을 이겨내고 다시금 예리한 형사로 거듭나는 과정에 더 주목하려 한 듯하다. 그래서 멋진 형사의 스릴 넘치는 액션과 추리력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라면 실망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베니 형사에 대한 기대감이 읽으면서 줄어드는 기분을 감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고뇌가 굉장히 인간적으로 다가오고 그래서 그것을 딛고 이겨내 줄 것을 믿고 응원하게 되는 부분도 있다.

 

 

“저는 그 비명 소리가 들립니다.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희생자들이 누워 있는 현장으로 들어가면 비명 소리가 들립니다. 희생자가 죽어 가며 질렀던 비명이 누군가 들어 줄 때까지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겁니다. 비명 소리는 한 번 들리고 나면, 그 뒤로는 머릿속에 붙박인 것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 87p

 

 

  세 번째 주요 등장인물 콜 걸 크리스틴은 미혼모이다. 처음부터 몸을 주고 거래를 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가장 빨리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었고 딱 5년만 발을 들이기로 한다. 그러다 콜롬비아 마약상인 카를로스를 만나게 되면서 일이 꼬이고 만다. 다른 고객들과 달리 그는 그녀를 독점하고 싶어하고 때로는 완력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와의 관계는 불안해 보인다.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헤어 나올 수 없는 힘을 지닌 자이기에 크리스틴은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다 카를로스가 자신의 딸을 납치하는 일이 벌어지고 그것을 계기로 형사 베니 그리설과 얽히게 된다.

 

 

  이렇듯 유기적으로 얽힌 이들의 이야기는 처음에는 각자의 시선으로 전개되다 하나의 이야기로 얽혀진다. 굉장히 드라마틱하고 영화적인 느낌이다. 막 흥미로워지는 찰나에 다른 인물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바람에 궁금함이 더 커지기도 하고 때로는 맥이 풀리기도 하지만 확실히 술술 재미있게 읽힌다. 가끔 앞서 언급된 베니 그리설의 고뇌가 비슷한 내용으로 몇 번이나 반복되는 점은 속도감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참 괜찮은 범죄소설이라 생각이 든다. 음모, 뜻밖의 반전, 흥미로운 캐릭터, 어두운 사회의 일면과 범죄에 대한 작가의 의식 또한 진지하게 반영되어 있는 부분도 가볍지 않아서 좋다.

 

 

오늘날엔 모든 사람 안에 범죄가 스며들어 있었다. 무의식 속에서 겨울잠을 자고 있는 독사처럼. 그러다 탐욕, 질투, 증오, 복수, 공포의 열기 속에서 그 독사가 튀어 올라 사람을 무는 것이다. 그런 일이 아직까지 없었다면 행운이라 생각해도 좋다. 삶의 경로가 다행히 큰 사고를 피해가는 바람에, 인생의 끝에서 돌아볼 때 지금까지 저지른 가장 못된 일이 직장에서 종이 클립을 훔친 정도라면 그 인생은 운이 좋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 279p

 

 

  아니나 다를까, 저자 베니 형사의 시리즈가 영화화된다고 한다. 게다가 주연이 숀 빈. 내게 있어서 그는 영화 <반지의 제왕>으로 가장 먼저 알게 된 배우인데 생각해보니 소설 속 베니 그리설이라는 인물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물론 이 배우가 좀 더 섹시한 느낌이 많은 듯하지만. <악마의 산>을 시작으로 다른 베니 형사의 시리즈 작품들도 꼭 읽어보고 싶어졌다. 베니 형사는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는 건지, 알콜을 이겨내고 멋진 형사로 거듭날 것인지 뒷이야기가 궁금하고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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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삶은 고전이란다 - 국어 선생님과 함께하는 동서양 대표 고전 읽기
박진형 지음 / 다산지식하우스(다산북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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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민이 많은 청소년에게 전하는 고전의 메시지!

국어 선생님이 교과서에서 직접 뽑은 동서양 대표 고전 20편!

 

 

  세월이 흐를수록 값어치가 더해가는 것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것은 ‘고전’이 아닐까 싶다. 내가 어렸을 때 읽었던 작품들이 지금에도 읽히고, 그 이후의 세대에게도 읽혀진다는 것은 그 속에 아름다운 가치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에는 고전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부모들이 워낙 많아서 다량의 전집을 구매해 일찍부터 고전을 접하는 아이들이 많지만, 자랄수록 시험을 치르기 위해 읽고 작품에 대한 이해도에만 치중하는 교육으로 변질되어 그 가치가 상실되고 마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부모 역시 책을 갖춰주기만 할 뿐, 아이의 성장에 있어 필요한 고전을 시의 적절하게 권해주고 선별해줄 수 있는 이가 많지 않을 듯하다.

 

 

  그런 점에 있어서 <얘들아! 삶은 고전이란다>는 아이들의 고민과 성장하는데 있어서 필요하고 조언해줄 수 있는 고전을 주제별로 선별하여 아이들은 물론, 부모에게도 도움이 되는 좋은 책인 것 같다. 이 책은 현직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교과서에서 동서양 대표 고전 20편을 뽑아 주요 부분만 발췌하여 자신의 코멘트와 함께 구성하였다. 제목에서 그러하듯 저자 스스로를 ‘쌤’이라고 표기한데다 마치 1:1로 대화하듯이 구어체로 서술하여 가독성도 높고, 마치 옛 이야기를 듣는 듯 부담 없이 읽힌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20편의 고전은 주제에 따라 총 4부로 나뉘어져 그 구성에 따라 각각 수록되어 있는데, 익히 알고 있는 고전에서부터 생소한 작품까지 다양하게 선별되어 있다.

 

 

 

  1부에서는 ‘너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고전 이야기’라는 주제로 ‘안동랑전’, ‘수레바퀴 아래서’, ‘꽃들에게 희망을’, ‘남궁선생전’, ‘예덕선생전’을 소개한다.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아서 고민하는 아이들, 공부를 왜 해야 하는 건지 모르는 아이들, 경쟁이 버거운 아이들, 자신만의 꿈을 이루고 싶어 하는 아이들, 돈이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어 그저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가지고 싶다는 아이들에게 고전의 지혜를 빌어 고민을 들어주고 위로해준다. 개인적으로 1부에서부터 4부까지 읽으면서 1부의 내용에 많이 공감했다. 청소년기에 많은 아이들이 하게 되는 고민의 내용이기도 하고, 언젠가 우리 아이도 하게 될 고민일 것 같아서였다. 이에 저자는 ‘안동랑전’을 통해 성적에만 매몰되어 있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다양한 길을 찾도록 응원한다. 또한 무작정 꼭대기를 향해 오르기보다 나의 가능성을 찾아 실현하는 데 의미를 두길 바라는 마음으로 ‘꽃들에게 희망’을 추천한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예덕선생전’이었는데 똥 치우는 일을 하는 엄행수를 예덕 선생이라 칭하는 선귤자의 이야기를 통해, 인정받지 못하거나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실현하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작품이었다.

 

 

쌤은 너희에게 꼭 말해 주고 싶어. 성적이라는 단 하나의 문으로 스스로를 재단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물론 성적이 떨어져서 실망할 때도 있을 거야.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 때도 있을 거고. 그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야. 그러나 오직 성적으로 너의 미래가 결정된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어. 네가 꿈꾸는 인생을 살기 위해선 성적표의 숫자가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길. 그리고 세상에 있는 다양한 문들 중 너의 문을 찾아 열어 내길. / 24p

 

 

  2부에서는 ‘너와 나,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고전 이야기’를 주제로 한다. 작품은 ‘채봉감별곡’,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마장전’, ‘결혼’, ‘규중칠우쟁론기’가 수록되었다. 부모와 가족의 뜻에 따라야 하는 것인지 고민하는 아이들, 부모님 말씀을 잔소리로만 생각하는 아이들, 진정한 친구를 사귀고 싶어 하는 아이들, 이성교제와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알고 싶어 하는 아이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아이들을 위한 고전들이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30분 더 공부하면 내 남편 직업이 바뀐다’는 급훈이 있었는데, 미래의 배우자를 공부의 동기로 삼는 것이 참 흥미로운 자극이 되었다. 아마 요즘에도 이러한 급훈이 쓰이고 있는 모양이다. 저자는 이를 언급하며 아이들이 얼마나 이성에 관심이 많은지, 그들에게 진정한 사랑에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결혼’이라는 고전을 소개한다. 나 역시 미처 알지 못했던 작품이었는데, 참 특이한 전개 형식을 갖춘 희곡이어서 인상적이었다.

 

 

  3부에서는 ‘네 앞의 시련에 당당히 맞서기 위한 고전 이야기’라는 주제로 ‘도련님’, ‘바리데기’, ‘한중록’, ‘특급품’, ‘화수분’을 소개한다. 세상 밖으로 나설 준비를 하고 있는 아이들, 차별을 받는 아이들, 가정의 불화나 사고 등으로 인해 힘들어하는 아이들, 늘 사건과 사고를 일으키는 아이들, 쉽게 포기를 하는 아이들에게 혜안을 담은 고전들이다. 그 중 현대 수필을 대표하는 작가들 중 한 명인 김소운 작가의 ‘특급품’이 꽤 마음에 와닿는다. 이 작품은 바둑판으로 많이 쓰이는 비자나무의 가치를 이야기하는데, 흉터를 가진 비자반이 그렇지 않은 비자반보다 오히려 특급품으로 인정받는 것을 통해 아이들이 잘못을 했다면 그것을 딛고 더 단단해질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응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 잘했던 것에 대한 기억보다 실수를 더 많이 기억하는 법인데, 늘 실수를 복기하고 또 복기하는 버릇이 있는 나에게도 위로가 된 작품이었다.

 

 

‘경험이란 누구나 자기 실수에 붙이는 명칭이다.’ 아일랜드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야. 그 누구도 완벽한 인생을 살진 않아. 잘못은 늘 있게 마련이지. 중요한 건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그걸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이겨 내는 태도일 거야.

갈라진 틈을 스스로 극복한 비자나무 내면의 힘, 상처에 무너지지 않고 이겨 내 지혜로 만들 수 있는 그 힘이 네 안에도 있을 거야. 네 안에 있는 그 힘을 믿으렴. / 179p

 

 

  끝으로 4부에서는 ‘지금 이 순간, 너의 행복한 삶을 위한 고전 이야기’를 주제로 ‘무지개’, ‘관리의 죽음’, ‘아Q정전’, ‘고도를 기다리며’, ‘달과 6펜스’를 수록하였다. 행복을 꿈꾸는 아이들, 소심한 자신을 걱정하는 아이들, 자기 합리화만 하는 아이들, 하고 싶은 게 많은 아이들, 의욕이 없는 아이들을 위해 전하는 아름다운 고전들이다. 내가 가장 자주하는 말이자, 자주 하려고 애쓰는 말이 있다면 ‘감사합니다’인데 사소한 것에도 고마움을 느끼고 그것을 행복이라 여기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의 아이도 이런 엄마의 마음을 기꺼이 느끼고 작은 즐거움으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쩌면 이 책에 수록된 고전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다.

 

 

  이 책을 보기 전까지는 언젠가 사춘기가 찾아오고, 부모와도 나누지 못하는 고민에 휩싸여있을 아이에게 어떻게 위로를 해주나 고민을 했다. 다행히도 고전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현재의 삶에 의미 있을 때 고전은 가장 빛난다는 저자의 말처럼 우리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순간에 그에 맞는 고전을 권해야겠다. 고전이야말로 내가 직접 해줄 수 있는 말보다 더 깊은 가치를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아 앞으로 나부터 고전을 많이 읽고 추천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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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의 눈 - 제6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박주영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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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은 누구인가.

조작된 진실, 모호한 시대 속을 살아가는 나의 진짜 모습은 무엇인가.

 

     모호한 정의의 시대. 비루한 삶을 살아가느라 침묵하는 다수의 대중과 그런 다수를 어리석다 여기며 마치 은혜를 베풀 듯 자신들이 이 사회를 이끌어간다고, 그것이 정의라고 믿는 소수의 권력자들. 여전히 검열은 존재하고, 사회안전망이라는 정의 하에 감시자들이 존재하며 이 세상이 분명 올바르게 흘러가지 않고 있음을 알지만 90%의 다수가 10% 혹은 그보다 더한 1%의 소수에게도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 모호한 시대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자 또는 이 시대의 엘리트들로 대변되는 소수, 그 소수를 위해 움직이는 이들을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까. 그들도 어리석은 대중을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정의라 믿는 것일까.

 

 

   <고요한 밤의 눈>은 이른바, 스파이로 대변되는 이들의 정체성과 사회 구조적 모순 속에 숨겨진 음모와 진실을 들여다보는 소설이다. 단순한 범죄 스릴러 및 스파이 소설이 아니다. 007 제임스본드처럼 멋진 스파이가 등장해 활약하는 것도 아니고, 영화 <감시자들>처럼 범죄 대상을 감시하고 추적하는 경찰들도 등장하지 않는다. 어딘가에 존재할 것 같지만 그 존재를 뚜렷하게 알 수 없는 스파이 집단 속에서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지만 자신들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스파이들의 이야기이며, 그들이 감시하는 어느 대상자를 통해 사회 구조 속에 숨겨진 거대한 음모를 들여다봄으로써 각성하고 사유하는 관념적 이야기이다.

 

 

   소설에는 크게 5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15년간의 기억을 잃었다 깨어나니 스파이가 되어 있던 남자 X, X의 대학시절 동창으로 접근하여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또 다른 스파이 Y, 그런 그들을 진두지휘하는 중간 보스 B, 창작기금을 받아 생활을 유지할 정도로 빈곤한 소설가 Z, 정신과 의사인 언니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실종되어 그 이유를 찾을 동안 대신 언니의 역할을 하며 살아가는 쌍둥이 동생 D가 극을 이끌어간다. 스파이로서 Y에게 주어진 임무는 X의 잃어버린 기억의 간극을 메워주고, 그를 스파이의 세계로 소속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X는 운명에 순응하듯 스파이로 적응해가지만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과거의 자신과 앞으로 계속될 스파이로서의 삶에 대한 정체성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살아간다.

 

 

“정말 알고 싶은 게 뭐야?”

“난 너의 진짜 냄새와 숨결과 땀을 알고 싶어. 그건 진짜겠지.”

원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위안을 주는 환상 속에서 살 수 있다. 거짓된 현실에 속아주기도 하고 본래 의도를 감추려고 그 현실을 이용하기도 하면서. 이 거짓으로 쌓은 도미노가 길고 크고 복잡해질수록 어쩌면 우리는 더더욱 환상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성공적인 환상을 지키기 위해 거짓된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스파이의 삶이다. / 162p

 

 

  주인공을 꼽자면 X가 되겠으나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흥미로운 인물 중의 하나가 보스인 B이다. 그는 언제부턴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이 사회가, 소수가 다수의 의사에 반하는 일을 무리하게 그것도 아주 빠르게 진행시키는 작금의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스파이로서 과연 세상을 돕고 있는 게 맞는 것인지 그 정의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고뇌한다. 즉, 저자의 고뇌가 B의 고뇌로 대변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상부와의 회의를 통해서 이러한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하고 이미 은퇴한 전 보스에게 찾아가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해답을 구하기 위해 애쓴다.

 

 

“언제까지 사람들이 진실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겁니까. 본인이 믿는 건만이 옳다고 믿는 것이 독선이고 독재입니다. 지금은 반대하지만 나중에는 고마워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 어리석어서 혹은 세뇌되어서 이런다고 생각하는 것. 다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혹은 올바른 소수의 의견을 말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게 촛불, 혹은 죽음뿐인 게 정상입니까?” 내 질문은 공허하다. 이런 식으로도 저런 식으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로 구성된 사회. 약육강식에서 나아가 승자독식이다. / 206p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로 나눠진 시대, 이 시대의 문제를 돌파하고 해결해나갈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는 그것이 ‘책’ 즉, ‘문학’에 있다고 생각한다. 점점 인지도가 떨어져가고 생계유지조차 어려운 소설가 Z에게 스파이를 붙여 감시하게 한 것은 바로 그가 소수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존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혁명’이라는 이념 아래 소수에게 저항할 수 있는 이들을 감화시킬 수 있는 힘이 문학에 존재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최고의 이야기에는 진실이 담겨 있다고, 진실을 쓸 때까지 멈추지 말라는 문장에서 미루어 짐작하건데 ‘전달자’, 즉 ‘작가’로서의 사명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부분이 아닐까싶다.

 

 

나의 예전 보스는 말했다. 소설을 읽는 것은 무엇보다 재밌어. 그런데 그 재미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재미하고는 좀 달라. 너무 재밌어서 아무 생각이 안 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뭔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재미가 있어. 어떤 작가들은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에게 지금 여기의 문제를 고민하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하고 있어. 그런 작가들은 본능적으로 문학이 어떻게 세상에 기여할 것인가를 알아. 게다가 작가와 독자는 스파이들의 암호보다 더 복잡한 코드로 소통하지. 그들의 연대는 그들이 직접 스스로를 드러낼 때까지는 알아내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어. / 146p

 

 

  사실 카피 문구만 보고서는 스파이 소설이 혼불문학상 수상작이 되었다는 것에서 좀 의외다 싶었다. 그런데 이 소설은 스파이 소설이 아니라 그것을 가장한 사회 소설이었다. 인물과 사건으로 다져지는 소설의 이야기적 구성보다 사회 구조적 모순에 천착한 관념적 글쓰기의 성격이 강한 탓에 읽기가 까다롭고 다소 불친절한 부분도 많다. 실종된 D의 언니도 스파이가 아니었을까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고, X가 왜 기억을 잃었는지도 그저 가늠만 할 수 있을 뿐이며, X가 Y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 또한 뜬금없다. 하지만 <고요한 밤의 눈>이 혼불문학상을 수상한 데에는 나름에 근거가 있고 새로운 형식의 소설이 탄생했다는 점에서 가까이 해볼 만한 의미가 있다는 데에는 동감한다. 문학이 이 시대를 돌파할 힘이라는 점을 전달하려는 작가의 메시지가 그만큼 강렬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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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칼렛 오아라
이승민 지음 / 새움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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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하는 마음을 욕망이라 한다. 어쩌면 삶을 이끄는 건 바로 이 욕망의 에너지가 아닐까. 살고자 하는 것도, 먹고자 하는 것도, 이보다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려는 것도 모두 욕망에서 기인된 인간의 본능과 다름 없다. 이 때 우리가 욕망을 어떻게 다루고 표현하느냐에 따라 매순간 치열하게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평가받기도, 욕망에 눈이 멀어 아집으로 똘똘 뭉친 그릇된 사람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렇다면 내가 지닌 욕망의 이미지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어떻게 실현하고 있는가? 사소한 이상과 헛된 신기루 속에서 적절히 균형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가? 누구도 피하지 못한 채 욕망에 붙들려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그린 <스칼렛 오아라>는 내 안의 욕망을 직시하게 하는 그런 소설이었다. 낮과 밤이 다른 이중생활의 그녀, 라는 카피에서 주는 첫인상의 가벼움은 의외로 깊은 성찰로 나아가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승민의 장편소설 <스칼렛 오아라>에는 지방신문지의 신춘문예 당선으로 갓 등단하게 된 가난한 무명작가, 오아라가 등장한다. 그녀의 꿈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것이자, 자신이 좋아하는 명품을 마음껏 소비하며 타인의 부러움을 받는 셀러브리티가 되는 것이다. 우울하거나 답답할 때마다 청담동의 명품 편집숍을 찾아 화려한 명품들을 바라보며 한낮 신기루일지 모르는 속물적 감흥과 그에 비례하는 상대적 박탈감 사이에서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곤 한다. 그녀를 사로잡는 가장 큰 욕망은 역시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저 글을 쓰고 싶었을 뿐이지만 항상 비루한 삶이 발목을 붙들고 노력한 만큼의 대가도 얻지 못한다. 그래서 오아라는 과외하는 학생의 아버지이자 유명 성형외과 원장인 김중권을 유혹하는 한편, 스폰을 앞세워 돈을 벌기 위해 '스칼렛'이라는 이름의 오피스걸이 되기로 결심한다. 




낮엔 글을 쓰거나 구상을 하고 밤에는 스칼렛이 되어 고객을 상대하는 일상이 이대로 계속되었다가는 자아 분열을 일으킬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일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오아라는 멘탈이 꺾이면 육신이 꺾이고, 일상이 꺾이고, 삶이 꺾인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매순간 정신을 다잡아가면서 A와 B를 상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몸과 마음 둘 중 하나는 꺾이기 십상이었다. 때론 육신이 지랄 맞게 반응했고 뇌 속 어딘가에 시퍼런 균열이 가는 소리가 들릴 때도 있었다. 그래도 참고 견뎠다. 스칼렛이 열심히 돈을 벌어야 오아라가 밥을 먹고 글을 쓸 수 있으니까. / 89P



  오아라가 자신의 배경을 노리고 접근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명 성형외과 원장이라는 명함을 뒤로하고 이혼을 하여 오아라와 소박한 삶을 꿈꾸는 김중권, 그녀가 원하는 돈을 주고 몸을 탐하는 A와 B, 오아라처럼 부잣집 사모님들로부터 스폰을 받아 생활하는 동갑내기의 남자 노아가 등장한다. 그녀로써는 아픈 엄마의 어마어마한 병원비를 감당하고 빠듯한 생활을 하기 위해, 그녀가 원하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이들이 필요하다. 스칼렛의 시간을 견디게 만드는 것은 바로, 무엇보다 강하게 소설을 쓰고 싶은 욕망이었다. 하지만 작가라는 고매한 이미지와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이중생활, 그 불온하고 위태위태한 관계들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금방이라도 어느 한쪽이 꺾여들어갈 것만 같다. 그 때마다 그녀는 생각한다. 가난한 소설가가 명품을 사랑하는 것이 그토록 이상한 일인가. 왜 작가는 백화점상품권 보다 디올, 샤넬, 까르띠에보다 문화상품권을 더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양심의 가책 또한 중요하지 않다. 비루한 삶은 욕망을 부추기고, 그것의 정당성을 찾기엔 이미 너무 고달프기에.  



  "인간의 욕망이란 것은 결국 똑같은 거 아니겠어요. 그것에 접근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론의 차이 혹은 인식의 차이일 뿐이지. 다시 말하지만 이미지에 현혹되지만 않으면 된다고 봐요. 적잖은 명품 브랜드들은 오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유럽 왕실이나 귀족, 최고 상류층들을 위한 소수의 제품을 만들던 것이 시초잖아요. 희소성이 많이 사라졌다는 게 서글픈 일이긴 하지만 역사와 전통은 분명한 족적으로 남아 있는 거니까. 그들이 보여준 성장과 역사의 궤적 자체가 매우 소설적이라는 생각을 해요. 명품은 누가 소비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소비하느냐가 중요하니까." / 247P



  유명 셀러브리티들이 자주 본다는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오아라가 한 말이다. 진실은 명품으로 대변된 화려한 삶을 자신도 가지고 싶다는 열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은 척, 작가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는 척 행동하는 그녀는 이미 너무나 이중적이다. 가만보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에게서 이중적인 면모를 찾을 수 있다. 자신은 부유한 삶을 원치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김중권은 여전히 아내의 배경 속에서 살아가고, 대기업 간부이나 오피스걸을 찾아다니며 성적 욕망을 해소하는 A와 B는 물론, 유명 문학지의 편집장이자 대학 교수로써 존경받는 지식인의 상징인 듯했던 윤석향 역시 오아라가 오피스걸인 것을 알게 된 후 늑대의 발톱을 드러내는 등 대부분의 인물이 하나같이 모순을 떠안고 있다. 그 어느 누구도 오아라를 손가락질 할 수 없다. 알고보면 모두가 욕망에 떠밀려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이렇듯 작가 이승민은 꽤 입체감있고 설득력있는 캐릭터를 구축하여 소설의 완성도를 높였다. 캐릭터가 잘 짜여져있고 그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구성되어 있다보니 가독성이 높고 얼개가 잘 짜여진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칫 막장이 될 수도, 통속 소설의 이미지가 더 강하게 느껴질 수 있는 소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성찰에의 의미를 지닌 문장들이 시의적절하게 쓰여져 재미와 작품성을 모두 갖춘 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문학만 하며 살기에는 척박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소설이어서 개인적으로 꽤 이입을 했고, 그래서 더욱 재미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작가가 되기를 꿈꿨다. 글만 써도 살아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현실을 깨닫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결국 나 역시 돈을 벌기 위해 출판사에 취직을 하면서 다른 방향으로 노선을 바꿔야했기에, 오아라가 꿈꿨던 욕망이 다소 극단적으로 실현되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럼에도 글을 쓰기 위해 선택한 것들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오아라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물질적 욕망과 작가로써의 욕망을 모두 채웠을까? 그 결말이 궁금하다. 가볍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 우리 문단에 앞으로도 이렇게 재미있게 잘 읽히는 소설을 쓸 수 있는 작가가 계속 배출되었으면 하고 또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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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6-11-16 0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리뷰보니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

투콤마 2017-01-19 00:4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즐거운 독서 시간 되시길 바래요~
 
아쿠아리움
데이비드 밴 지음, 조연주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화해하지 못한 상처들을 용서하고,

용서받고 싶은 이들에게 권하는

냉정하고도 따뜻한 메시지!

 

   ‘우리는 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가.’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비극은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때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얻은 상처가 가장 깊은 상흔을 남긴다. 화해를 함에 있어 모든 걸 다 용서하고 잊겠다 하는 것은 거짓이다. 잊었다고 하는 것 또한 망각일 뿐, 마음 한편에 묻어둔 상처는 저도 모르게 불쑥불쑥 되살아나 자신을 할퀴거나 때로는 덧나고 엉뚱하게 불거져서 또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데이비드 밴의 장편소설 <아쿠아리움>은 바로 이런 상처와 용서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어떻게 상처를 주며, 그것이 얼마나 잔인한 아픔을 남기는지, 또한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상처들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 것인지, 아쿠아리움이라는 독특한 발상의 장치를 통해 그려나간다.

   열두 살 소녀 케이틀린은 방과 후면 언제나 아쿠아리움으로 향한다. 어류학자가 되기를 꿈꾸는 소녀는 엄마가 일을 마치고 데리러 오기 전까지 아쿠아리움 속의 물고기를 보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즐겁다. 수조 밖의 세상을 알지 못하는 물고기처럼 소녀 또한 수조 속 물고기들의 세상을 모두 알지 못하지만 그래서 그들과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소녀에게 있어 좁은 수조 속에서 느리게 유영하는 물고기는 자신과 다름없으며 자신이 가보지 못했던 세계, 언젠가 따뜻하고 드넓은 바다로 나아가기를 희망한다.


 

이 세상은 곧 하나의 바다였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좋았다. 매일 밤 잠이 들 때면 나는 수천 피트 아래 저 밑바닥을 상상하곤 했다. 저 수압을 모두 견디며, 그러나 마치 쥐가오리처럼 미끄러지듯, 소리도 없이 한없이 가볍게 저 끝도 없이 펼쳐진 평원 위로 솟아올랐다가, 저 깊고 어두운 협곡 아래로 떨어졌다가, 다시 소용돌이를 그리며 새로운 고원 위로 솟아오르는 것이다. 나는 이 세상 어디라도 갈 수 있었다. 멕시코나 괌, 북극이나 아프리가 어디라도, 물이라는 한 가지 원소로 이루어진 모든 곳이 집이었다. / 34p

  



  어느 날, 소녀는 아쿠아리움에서 한 노인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매일같이 만나 함께 물고기를 구경하며 친해진다. 대부분 물고기의 외관을 묘사하며 서로 감탄하기도 하고, 물고기에 대해 꽤 깊은 상식을 가지고 있는 소녀가 노인에게 설명해주기도 한다. 단순히 물고기에 대해 서로 질문과 답을 하는 대화에 불과한 듯하나 물속 생명체의 경이로움을 넘어서 삶에 대한 관조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정답이 없는 것 같은데. 마침내 노인이 입을 열었다. 정답이 없는 게 가장 좋은 질문이지. 해마가 어떻게 생겨났을지 상상이 잘 안 되는구나. 녀석들은 왜 육지의 말 같은 머리를 하고 있을까. 둘이 그렇게 닮았다는 건 아무도 모를 텐데 말이다. 말은 해마를 보지 못할 테고, 해마도 말을 보지 못할 테고, 양쪽 모두를 알아볼 만한 것들도 없을 텐데. 지금이야 우리가 이렇게 알게 되었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걸까? 이거야말로 제대로 된 질문이겠구나. / 26p

  



  사실 노인은 19년 전 병든 아내와 딸을 버리고 떠났던 케이틀린의 외할아버지였다. 그는 물고기를 사랑하는 손녀를 바라보며 자신의 가족들에게 저질렀던 잘못을 용서받고자 용기를 내는 중이었다. 한편, 이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케이틀린의 엄마는 빠듯한 형편을 꾸역꾸역 살아내느라 딸과 아버지가 만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엄마에게 있어 아버지란 존재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었기에, 자신의 불운했던 과거와 현재를 상기시키는 존재였기에 그의 등장으로 충격에 휩싸인다. 늘 가족이 더 있기를 꿈꾸었던 케이틀린으로서는 용서를 구하며 다가오는 할아버지에게 잔인한 분노를 토해내며 격하게 밀어내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 마치 가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두 개의 세계가 만난 것처럼 도저히 맞닿을 수 없을 것만 같다.


 

거기서 할아버지를 만났다. 어두운 수조 속에 검은 모래와 흙뿐, 몸을 숨길 만한 바위는 없었다. 할아버지는 유리에 바짝 붙어 서서 벌감펭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벌감펭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물고기 중의 하나였다. 연한 올리브색 날개에, 머리는 하연 솜털로 뒤덮인 나방처럼 생긴 녀석이었다. 가늘고 하얀 더듬이들은 꼭 곤충의 다리 같았다. 게다가 녀석의 몸통은 마치, 서로 다른 두 마리가 붙어 있는 것 같았는데, 정확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어둠 속에서 녀석들은 변신을 했는데, 결코 가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두 개의 세계가 만나는 것 같았다. / 144p

  



  케이틀린과 할아버지는 엄마의 눈을 피해 몰래 아쿠아리움에서 다시 만난다. 하지만 금방 엄마에게 들켜버리게 되고, 엄마는 아물지 않은 상처가 터져버린 듯 딸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꽤 극단적인 행동을 보이기까지 한다. 수면 아래에 드리우고 있던 상처가 일순간 팍, 하고 튀어 오르는 그 낯설고 두려운 광경은 딸에게도 역시 지우지 못할 상처를 만들고 만다. 모두에게 상흔을 남겨버린 이 가족에게 과연 평화가 찾아올까? 훗날 이 때의 일을 두고 케이틀린은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용서하고 또 잊어야 할 것이다’
   케이틀린은 엄마를 간단히 용서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잊어야 했다. 한 사람의 삶을 당사자가 아닌 이상에야 모두 알 수 없는 법이다. 우리 모두는 가슴 속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상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을 어느 누구도 헤아릴 수 없다. 그렇기에 어느 한쪽도 용서를 강요할 수 없고, 상처를 쉽게 위로할 수도 없다. 그저 잊으려고 애쓸 뿐, 상처는 또 다른 상처를 남기기에 최대한 끌어안는 수밖에.


어쩌면 이런 것이 우리가 용서라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과거를 모두 청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현재에 받아들이고 또 인식하면서 끌어안는 것, 천천히 내려놓는 것 말이다. / 337p



  언젠가 아쿠아리움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수조 속을 간접적으로 체험해볼 수 있게 하기 위해 얼굴만 넣어서 볼 수 있는 이중 구조 형태의 수족관이었다. 그때 나는 묘한 압박감을 느꼈다. 신기하기보다 얼른 그곳에서 나오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마치 심연의 어두운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 또한 마찬가지였다. 소설의 까만 표지 속에서 부유하는 물고기들을 보고 있으려니 헤아릴 수 없이 내 마음속을 떠도는 어떤 부유물처럼 느껴졌다. 때때로 그 부유물들이 내 사람들에게도 상처가 되지는 않았는지, 나도 모르게 그들의 마음속에 상흔을 남기지 않았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작품이었다. 누군가를 용서하고 싶을 때, 용서를 구하고 싶을 때 이 책을 읽어보시길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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