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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혼종성 - 뒤섞이고 유동하는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가이드
피터 버크 지음, 강상우 옮김 / 이음 / 2012년 5월
평점 :
문화혼종성(Cultural Hybridity)라는 단어는 낯설다. 하지만 우리 삶의 많은 영역에서 이 혼종성은 상존하고 있다.
혼종성과 다문화주의를 구분하는데 꽤 애를 먹었다. 내가 가진 의식 구조 안에서는 혼종성이 다문화주의의 하위개념인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 「문화혼종성」에서는 분명히 혼종성과 다문화주의를 구별 짓는다.
다문화주의가 ‘실재하는 개별적인 문화·집단이 하나의 퍼즐판 안에서 하나의 그림을 완성해 가는 조화의 개념’이라면 혼종성은 ‘실재하는 개별적인 문화·집단이 한쪽으로 흡수·통합·모방·적응하면서 계속해서 진행되는 보편적인 문화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책을 두 번 읽으며 나름 정리를 한다고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혼종성’이라는 용어는 ‘미친 듯이 유연하다.’고 평가받아 왔다.” (p.59)
“혼종화 과정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영역에서 발견될 수 있겠지만, 이 책에서는 문화적 경향에만 한정했다.” (p.17)
다문화주의
나의 이전 리뷰나 포스트에서 여러 번 언급한 적이 있는데 가깝게 지내는 몽골가족이 있다. 부부인 민데형과 디마누나, 딸 너모 이렇게 세 가족이다.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008년 몽골여행 때 민데형네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면서 부터이다. 그때의 여행 중 가장 놀랐던 것은 민데형의 외모였다. 몽골여행을 준비하며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던 중 봤던 몽골 남성의 일반적인 외모와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일단 체격도 좀 왜소하고 눈도 크게 쌍꺼풀도 짙어서 동남아 남성의 외모와 비슷했다. 다음 번 여행에서 궁금증을 풀 수 있었는데, 민데형의 고향은 몽골의 서북쪽 카자흐스탄 국경 인근이었다. 그 곳에는 지리적인 특성 상 카자크족이 많은 데 자신이 카자크족 혈통이라는 것이었다.
반만년 단일민족의 역사만을 배워온 나로서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몽골이라는 한 나라 안에서도 수많은 종족이 상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울란바타르 시내를 가보면 외모가 많이 다른 몽골사람들은 쉽게 볼 수 있다.
여러 민족이 한 국가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다문화주의다.
단지 혈통·인종만이 아니라 유럽의 경우 한 국가 안에 극좌인 공산당부터 극우인 파시스트당까지 국회 활동을 함께 하는 것이 다문화주의의 개념이다.
혼종성
혼종성도 다문화주의만큼이나 이해할 수 있는 사례는 많다. 먼저 책에 소개된 것은
“대중음악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유럽과 아프리카 전통 요소의 조합이었다. 가장 유명한 예는 재즈이고, 브라질 음악 역시 잘 알려진 사례이다.” (p.43)
음악이다. 이 책에서는 혼종성의 여러 하위개념 중 문화적인 측면에만 집중하고 있다.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재즈의 근원은 아프리카이다.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재즈의 근원이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의 음악과 부딪히고 협상하면서 “문화적 혼성”을 일으킨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처음 태동된 그 음악과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태동된 그 음악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 만들어 진 것이다. 하지만 처음의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계속 진행되며 새롭게 혼종된 재즈라는 음악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형·발전 되는 것이다.
“마테오리치는 그가 전파하려는 종교 사상이 중국인들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가도록 하기 위해, 유교 학자의 복장을 입었고 조상을 숭배하는 전통 제사 관습을 종교 의식이 아닌 사회 풍습으로 해석함으로써 개종자들이 제사를 계속 지낼 수 있도록 용인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p.71)
유명한 마테오리치는 중국에서의 선교를 위해 중국의 문화와 혼종된 것이다. 그래서 혼종성의 개념이 갖는 주요한 특징은 ‘제국주의적 지배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식민지에의 동화’라는 것이다.
물론, 이 책에 소개된 마테오리치의 행위는 책에서 분석하는 문화적 차원뿐만 아니라 정치적·종교적 차원에서 복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하지만 직접 그들의 복장을 입고 그들의 고유문화를 배척하지 않고 포용하고 모방해 적응하는 것은 분명한 ‘혼종성’의 개념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단순한 용어로 사고해서는 안 된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콜럼버스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p.68)
사고의 구조를 넓히는 것이 필요하다.
“맥도널드는 우루과이에서[달걀을 깨어 삶아서 얹은] 맥우에보(McHuwvo)를, 멕시코에서는 맥브리토(McBurrito)를, 인도에서는[소고기를 양고기로 대체한] 마하라자 맥(Maharaja Mac)을 판매한다.” (p.83)
몽골과 네팔, 체코의 프라하, 독일의 드레스덴의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를 먹어 보았다. 전 세계 매장에 공통적으로 있는 세트메뉴를 시켜 먹었기 때문에 책에서 소개된 맥우에보나 맥브리토 같은 그 나라 고유의 혼종된 맥도널드는 먹어보지 못했다. 메뉴에 있었으나 내가 찾지 못했던 것인지 지금에 와서 확인해 볼 길은 없지만 우루과이와 멕시코, 인도의 혼종된 맥도널드 메뉴는 또 하나 ‘문화혼종성’을 이해할 수 있는 포인트를 제공한다.
맥도널드라는 것을 잃어버리지 않음과 동시에 각국의 고유한 문화적 특성 또한 버리지 않는 것이다.
“나는 독립적인 문화들이 지속적으로 존재할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한다.” (p.154)
우리가 사는 현재는 이미 전 지구화된 사회다.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부터 들었던 것이 ‘글보벌화, 세계화’라는 단어들이다. 테크놀로지의 비약적인 발전은 문명의 고도화와 첨단화를 가져왔다.
굳이 비행기를 타고 대륙을 횡단하지 않아도 내 손안에서 뉴욕을 검색할 수 있고 런던의 뉴스를 볼 수 있다.
내 책장에는 한국의 작가가 쓴 책만큼 외국 작가가 쓴 책이 꽂혀 있다. 미국, 폴란드, 브라질, 아르헨티나, 스웨덴, 일본, 스페인, 터키, 이집트, 독일 등 나는 한국어를 사용하지만 그들이 쓴 책이 번역되어 출간되기 때문에 한국어로 그들의 책을 읽을 수 있다.
먹고, 입고, 사용하는 거의 모든 것에서 단일한 한국만의 것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현상은 미래에 더 심화될 것임도 분명하다.
반 만 년 단일민족이라는 개념도 이제는 더 이상 가르칠 수 없다. 엄청난 숫자의 결혼 이민자와 그 자녀들이 존재하고 외국인 근로자도 많은 숫자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독립적인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문화는 뒤죽박죽의 결과라고 얘기한 레비-스트로스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 각 문화가 경계의 영역에 놓여 있을 뿐 언제든지 혼종될 수 있는 가능성은 내포되어 있다. 그 경계가 급격히 무너질 것인지, 서서히 무너질 것인지의 차이일 뿐이다.
이 책의 말미에는 미래의 지구 문화에 대한 주요한 가능성 혹은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첫 번째는 ‘문화적 균질화’ 이다.
두 번째는 저항 혹은 ‘반(反)-전지구화’ 이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국가 단위의 지역역사수업, 아일랜드어나 바스크어 의무 수업 등 지역 문화와 지역정체성에 대한 강조와 교육이 실시되고 있지만 결국 실패할 것이라고 예견한다. 앞서 말한 시간의 문제라는 것이다.
세 번째는 ‘문화적 양층언어’ 이다. 이것은 전 지구적 문화와 지역 문화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인데, 지금도 그렇지만 미래에는 전 지구적 문화 세계에서 우리는 모두 이중 문화권 내지는 복수의 다중문화권에 속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시나리오가 비극으로 끝맺지 않도록 여전히 우리(자신)만의 지역 언어를 유지함으로써, 세계 문화에 참여하는 동시에 지역 문화를 보존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네 번째는 ‘새로운 혼합체의 등장’ 이다.
요약하자면, 지금 현재 경계의 영역에 있는 각 문화 간 혼종이 점진적으로 계속되고 이 혼종은 심화된다는 것이다. 지금의 문화 간 배치는 결국 재배치되고 그에 따라 ‘새로운 혼합체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크레올’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데, 원래 ‘크레올’은 [신대륙발견 후 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난 에스파냐인과 프랑스인의 자손들]을 일컫는 말이다. 수세기에 걸친 문화 혼종화를 대체하는 개념이 ‘크레올’이었다면 미래의 그것은 ‘새로운 혼합체’ 즉, ‘새로운 크레올의 등장’이다.
“새로운 질서의 탄생, 새로운 지역유형의 형성, 새로운 형태의 결정화” (p.172)
지금까지와는 다른 문화적 현상을 예견한다. 가시적으로 그려낼 수는 없지만 역사를 돌이켜보면 늘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고 등장했었다.
분명 ‘다문화주의’의 개념과는 다른, 그 개념을 탈피한 ‘혼종성’의 개념일 것이라 주장한다.
“콘비벤시아(convivencia) ‘공존’을 뜻하는 스페인어로,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통치했던 711년부터 1492년까지 기간을 가리킨다. 이 시기 동안 이슬람교도, 유대인, 기독교도는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하며 상호영향을 미쳤다. 이슬람 통치가 시작되던 시절부터 이어져온 스페인 기독교 세력의 국토회복운동이 성공을 거두어 1492년 이슬람 세력의 최후의 보루였던 그러나다까지 탈환하면서 이 시기는 막을 내리며, 이때부터 대대적인 이슬람교도·유대인 박해와 추방이 이루어졌다.” (p.123)
지금은 극도로 대치되어 갈등하는 이슬람교도와 유대인, 기독교도가 과거 오랜 기간 동안 일정 지역에서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평화롭게 공존했던 문화사적 배치가 존재했었다. 수백 년을 이어온 문화적 혼합체는 기독교 세력의 국토회복운동으로 새로운 문화로 재배치되었다.
이후 70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 미래에 펼쳐질 다변적인 문화의 양태가 저자의 주장처럼 ‘혼종성’의 개념으로 전개될 것인지, 저자가 비판하는 ‘다문화주의’의 개념으로 전개될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미래’라는 것은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주장도 하나의 학설일 뿐일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