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여인들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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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의 작품을 처음 읽었다. 나를 책의 세계로 천착하게 만든 것은 톨스토이의 「부활」이었다. 세로쓰기로 된 두꺼운 양장본의 그 책은 고향집에 내려간 대학1학년 겨울방학을 황홀하게 만들어주었다. ‘이런 게 책이구나, 이래서 고전 문학, 톨스토이, 톨스토이 하는구나’ 뼛속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인문·사회서적만 탐독하는 나를 발견했다. 우연히 읽게 된 고(故)리영희 선생님의 책 이후로 계속 그랬던 것 같다.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는 생각에 한동안 또 문학만 파고 들었다.

나의 독서 패턴은 늘 이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주 책장을 정리하는 데 문학, 특히 내가 읽은 소설 중 대다수가 남성 작가의 작품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소스라칠 정도는 아니지만 꽤 놀랐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신경숙, 은희경, 심지어 박경리씨의 작품도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었다.

부랴부랴 책을 구입 해 읽었다.

 

 

이 책 「모르는 여인들」은 단편소설을 엮은 소설집이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읽은 「엄마를 부탁해」는 왠지 읽기 싫어 「모르는 여인들」을 구입했는데, 단편소설집이라는 것도 확인하지 않은 채 구입했다.

 

처음 읽어 본 신경숙의 글은 따뜻했다. 이것이 7편의 단편 모두에서 받은 느낌이다. 문장의 호흡이 짧아 좋았다. 내가 워낙 김훈의 글과 문장을 흠모해서 인 탓이겠지만 호흡이 길고 너무 많은 것을 의도한 문장을 읽으면 숨이 턱턱 막힌다. 그런 면에서 신경숙의 글과 문장은 김훈의 그것과 닮아 있는 듯 보였다. 두루뭉술하게 펼치기만 하는 젊은 작가들이 많은 요즘 신경숙의 글과 문장에서는 베테랑 다운 작가 자신만의 글을 볼 수 있어 오히려 신선했다.

7편의 단편이 모두 따뜻하다. 그리고 또한 처연하다. 애달프고 애처로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서늘하고 담담하다.

 

여자들의 이야기가 이해될 듯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고, 공감이 안 될 듯 공감이 되는 부분도 있었다. 특히, [그가 지금 풀숲에서]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의 아내와 [모르는 여인들]에 가사도우미 아주머니와의 메모 교환으로 깊은 교감을 나누는 아내는 머리로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공감이 되는 캐릭터였다.

 

같은 작품이라도 어린 시절 읽었을 때 받았던 느낌과 장성한 뒤 읽었을 때의 느낌이 다르듯이 여성 작가가 창조해낸 여성 캐릭터에 완전히 몰입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인지 모르겠다. 독자의 욕심으로 머릿속에 우겨넣으려 하는 것은 말그대로 욕심일 뿐일 것이다. 다만, 7편의 단편소설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인지하고 공감한 따스함과 처연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욕심이 아니다.

 

“파를 종종 썰어넣은 무친 생굴에서 참기름 냄새가 맡아졌다. 큼직한 깍두기, 멸치볶음, 깻잎, 계란찜. 언제 만들었는지 숭늉이 담긴 큰 양푼이 밥상 아래 놓여 있다.” (p.147)

“산수유에 복숭아나무에 배나무에 살빛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그런 봄날이었어.” (p.153)

 

한눈에도 맛있게 차려진 밥상이 그려지고 온갖 꽃들로 만발한 봄의 산이 그려지는 작가의 문장은 그대로 캐릭터의 감정선과 공유되고 평행하게 흘러간다. 7편의 작품 모두에서 동일했다. 이 부분이 나는 가장 좋았다. 무심하게 관망하는 듯한 말투가 작가의 문장에서 그대로 배어난다. 그리고 평행을 유지한 채 공감을 이끌어 낼 뿐 과도하게 캐릭터에 끼어들지 않는다. 단어 하나로 독자의 머릿속에 그대로 그림 그려질 수 있게 하는 것은 작가의 능력이다.

 

 어렵지 않고 흔한 굴이니, 참기름이니, 계란찜이니 하는 단어의 선택 또한 작가의 능력이라 생각한다. 얼마 전 읽었던 젊은 작가들의 소설집의 그 자질구레하고 무슨 말인지 분간할 수 없는 감정의 고저는 읽는 내내 불편하고 짜증스럽게 했다.

처음 접한 작가 신경숙의 글과 문장은 따뜻하지만 처연했다. 호흡이 짧아 좋았고 쉽고 간편해 읽는 독자가 바로 이미지화 시켜 체화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작가가 창조한 캐릭터와도 적정한 감정선을 유지하고 관망하는 것이 좋았다.

 

결코 어려운 단어와 문장을 쓰고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 붙인다 해서 좋은 글과 문장이 아님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라 생각한다.

 

그만큼 신경숙의 글은 좋았다.

 

불쑥불쑥 ‘이게 더 정확하게는 무슨 의미일까? 작가는 이런 문장을 왜 여기에 썼을까?’ 하는 등의 물음이 울컥 치받기도 했지만 큰 의미를 찾지 못해 그만 두었다.

다음번엔 단편소설집이 아닌 장편을 읽어볼 생각이다.

작가 신경숙의 진면목이 그대로 드러나는 작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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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자는 멈추지 않는다
전성철 지음 / 아이지엠세계경영연구원(IGMbooks)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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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 이상한 꿈을 꿨다. 큰 서랍을 열었는데 서랍보다 더 큰 종이상자 두 개가 튀어나와 내 품에 안겼던 것이다. 그 종이상자의 어마어마한 크기나 노란 빛이 감돌던 형태의 상서로움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아내가 장모님이 태몽 같은 꿈을 꾼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나도 번뜩 지난 번 꿈이 생각 나 이야기를 했다. 나는 속으로 “쌍둥이다 쌍둥이!!” 라고 생각했다. 얼마 뒤 테스트를 했는데 아니었다. 헛꿈을 꾼 것이다. 복권이라도 두 장 살 걸 그랬다ㅡㅡ;;

 

 

우리네 인생은 헛꿈헛물켜는 것으로 점철된 인생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왜? 누구나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왜? 그게 편하니까.

 

이 책 「꿈꾸는 자는 멈추지 않는다」는 헛꿈 꾼다는 비아냥거림을 들었지만 헛물켜지 않았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얼마나 어렵게 살았고 얼마나 큰 시련과 난관이 있었으며 그것을 얼마나 보기 좋게 극복해 냈느냐 하는 이야기는 모두가 하는 이야기니 차치하고,

 

나는 저자의 피나는 노력이 가장 눈에 들어 왔다. 자신만의 꿈을 찾아 그것을 개척하기 위해 눈물어린 노력을 한 것이다. 남들 보다 늦은 나이에 MBA과정과 로스쿨 과정, 로펌 어소시에이트 변호사 과정을 하기 위해서는 남들 보다 더 피나는 노력을 해야 했다.

20년이 넘는 그의 인생의 파고를 300페이지의 책에 다 담을 수 없다. 그래서 그냥 별 생각 없이 이 책을 보면 ‘그래서 뭐 결국 잘 됐다는 얘기잖아. 자기 자랑이네 뭐. 되는 놈은 뭘 해도 되는 구만. 그 옛날에 아버지가 의사였는데 뭐.’ 이렇게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서술어에 주목했다.

 

“이틀 밤을 꼬박 새운 것이었다.”, “최선을 다했다.”, “파김치가 되었다”, “밤새도록 씨름했다.”, “이를 악물었다.”

 

꿈은 결코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 최소한 저자만큼 해봐야 한다. 이것이 정답이다. 그래야 헛꿈현실이 되고 헛물성취가 된다.

여러 번의 입학 실패와 해고, 언어의 장벽과 이방인으로서의 외로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공짜를 꿈꾸지 않았다.

 

“꿈이 시작되어 이루어지기까지 무려 11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p.13)

 

11년이란 시간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어떻게 생각하고 수용하느냐에 따라 11년이란 시간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자세는 달라진다. 마음의 자세가 달라지면 행동 또한 달라진다.

나는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다. 오늘도 내 꿈을 위해 전진하고 있다. 내 블로그 소개글처럼 급하게 뛰거나 요행을 바래 날아가지 않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가지만 성실하고 진실하게 하늘을 향해 기어가고 있다. 이것이 나의 꿈을 향한 내 다짐이다.

 

남들은 늦었다고 얘기한다. 한 곳에 집중하라고 한다. 뜬 구름 잡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의 저자 전성철씨처럼 내 꿈을 향해 멈추지 않으려 한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기에 그것이 꿈이다. 당장 내 마음대로 공놀이 하듯 가지고 놀 수 있는 것은 꿈이 아니다.

 

남들이 얘기하는 헛꿈헛물. 또는 한 번씩 견디기 힘들만큼 고통스럽게 찾아오는 ‘헛꿈이 아닐까? 헛물켜는 건 아닐까?’ 라는 자괴감.

반드시 현실이 되고 성취가 되도록 저자의 피나는 노력이 담긴 서술어처럼 나도 그렇게 살 것이다. 내가 멈추지 않으면 내 꿈은 절대 멈추지 않을 테니까.

 

“너도 열심히 찾아보면 잘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p.143)

 

저자가 레스토랑 매니저에게 일을 그만두겠다고 이야기했을 때 그 매니저가 해 준 말이다. 이 말 한마디가 그의 꿈에 불을 지폈고 결코 포기하지 않는 동력이 되어 주었다.

이 책을 안 읽은 사람이라도 이 말은 꼭 기억했으면 한다. 누구나 잘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열심히 찾아보지 않았을 뿐이니까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부단하고 피나는 노력을 동반해야 한다. 환경과 상황을 탓해봐야 시간만 갈 뿐이다. 최소한 이 책의 저자만큼은 해봐야 한다.

나에게도 스스로 하는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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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계급 사다리는 안전합니까? - 불평등이 만들어낸 우리 시대의 초상
뉴욕 타임스 지음, 김종목.김재중.손제민 옮김 / 사계절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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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진보 정당 내 종북 세력 문제로 한참 동안 떠들썩했다. 분단국가의 특성 상 이데올로기는 첨예한 갈등을 일으키는 주요 소재로 활용되기 마련이다. 정치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있다고 판단되는 지금에도 여전히 친북·종북의 탈은 토끼사냥을 가장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도구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에는 친미·종미·숭미를 표방하는 집단과 조직, 사람들이 많다. 다들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이지 그렇게 살고 있다. 여전히 아내와 아이들을 머나먼 미국에 보내고 자신은 끼니도 챙기지 못하고 살아가는 기러기 아빠들이 무수하고 영어 하나면 뭐라고 하고 산다는 우스개는 정설이 되었다.

법체계에서부터 행정·사회구조·경제체제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미국식을 표방한다. 어쨌든 미국이 세계 1등이기 때문이다. 힘도 제일 세고 돈도 제일 많으니까.

 

2005년 뉴욕타임스에서 기획 취재한 기사를 번역한 「당신의 계급사다리는 안전합니까?」는 이런 기존의 ‘아메리칸 드림’이 이미 붕괴되기 시작했고 이제는 급속도로 불평등한 구조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책이다.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상승 이동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이민자들이 몰려드는 미국은 계급과는 거리가 먼 사회로 대중들에게 각인되어 있었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인식이 환상에 불과하며, 현실은 계급 불평등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계급사회라는 것을 대중매체 기자들이 밝히고 있다는 점” (p.349)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최고라고 엄지를 치켜세우던 미국의 속살을 그것도 대형 신문사에서 들추어냈다는 것에 일단 놀랐다. 한국의 언론 현실에서는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현재 전 세계 어디에도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도의 카스트도 이미 공식적으로는 없는 제도이다. 그러나 ‘1%의 초부유층, 0.001%의 재벌’ 이런 뉴스를 접하면 욕지거리를 내뱉음과 동시에 ‘아~! 부럽다.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이라는 탄식을 하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 사다리는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릴로는 한창때의 연봉이 최하 10만 달러인 경제적으로 동질한 소집단이다. 그들은 대부분 백인이다.” (p.212)

“무엇보다 그들은 모든 권력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거미줄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여하튼 그들은 모두 서로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p.104)

 

내가 사는 대구에도 강남 같은 곳이 있다. 대구에 살지 않는 사람도 ‘수성구’는 들어 봤으리라 생각한다. 예전에 한창 ‘강남8학군’으로 시끄러웠을 때 ‘강남8학군’을 제외하고 전국에서 가장 학구열이 높은 곳이 대구의 ‘수성구’라고 했었다. 예전의 명성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여전한 맹위를 떨치고 있다. ‘수성구’의 프리미엄을 맛보기 위해 타 구에 살고 있는 부모들은 고등학생 자녀들을 위장전입 시키면서까지 ‘수성구’에 있는 고등학교로 입학시키거나 전학시킨다. 고등학교 때부터 불법과 탈법을 몸소 가르치는 것이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수성구’에는 책에서 소개하나 ‘릴로’처럼 전문직 직업을 가진 고소득 계층이 많이 살고 있다.

내가 다니는 교회에도 이런 아이들이 많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포장해서 아이들을 설득하는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솔직하게 ‘더 좋은 학교를 위해 이 정도는 괜찮아’ 라고 말하며 설득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아이들은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지옥 같은 등·하교를 1시간 반 동안 해야 한다.

 

“평등을 크게 촉진하는 것으로 이상화되었던 시스템이 오히려 태어날 때의 기득권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p.14)

 

 

 

“결국 체제의 문제다.” 슬라보예 지젝

결국은 체제의 문제이다. ‘수성구’에 있는 고등학교에 보내기 위해 위장전입을 불사하는 학부모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나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본다. ‘수성구’가 아닌 타구에 있는 학교에서 빼어나게 공부를 잘했다면 굳이 불법을 자행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교육을 공공의 영역에서 완전히 포기하다 보니 사적인 시장영역에 맡겨져 버렸다. 한 시간에 수십만 원씩 하는 과외를 받는 아이들은 바보가 아닌 이상 아무리 위장전입을 불사하는 아이들이라 해도 따라가지 못한다. 처음부터 올라갈 수 없는 저 높은 곳의 사다리 위에 있었던 것이다.

 

“더욱 글로벌화한 시장의 탄생, 신기술, 감세로 인해 가속화한 투자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주가는 급등했고 그만큼 가장 높은 순위에 있는 업종들이 이익을 보았다.” (p.265)

“이 책이 다룬 양극화, 중간계급 붕괴, 초부유층의 독식 같은 문제는 진행형이거나 더 악화되었다.” (p.364)

 

신자유주의가 가속화 되면서 모든 것은 시장권력으로 기울어 졌다. ‘있는 놈은 더 부자가 되고 없는 놈은 더 가난해 지는’ 형국이 공고화 된 것이다. ‘중산층 붕괴’라는 말이 나온 지는 어림잡아도 십여 년은 지난 것 같다. ‘중산층 붕괴’는 더 가속화 되고 격렬해 졌을 뿐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모든 권력이 시장에 쏠리다 보니 국가의 모든 힘(공권력을 포함한)도 시장으로 쏠렸다. 수백, 수천억을 개인의 잘못으로 기업에 피해를 줬다 해도 어차피 재벌가 소유의 기업이기에 처벌 받지 않는다. 법·언론·학계를 아우르는 모든 분야가 시장 권력을 적극적으로 서포팅 한다. 도쿄에서 벌어지는 한·일전 축구를 응원하는 붉은 악마의 서포팅, 그것보다 더 적극적이고 현란하게 말이다.

이런 과정을 반복적으로 학습한 0.1%의 재벌이거나, 1%초부유층이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은 하면서도 속으로는 ‘역시~ 돈이 최고야~ 재벌은 아무도 못 건드리는구먼~ 내 아들놈은 꼭 세 개의 별에 입사시켜야지~!’ 생각한다.

 

“[뉴욕타임스]는 2008년 4월 시급 20달러가 노동계급이 중간계급으로 진입할 수 있느냐를 가르는 기준이라고, 시급 20달러는 연봉 4만 1600달러에 해당한다. 이는 ‘미국적인 삶’ 즉 자동차와 집을 갖고 대학 교육을 시킬 수 있는 최소 연봉이다.” (p.368)

 

연봉 4만 달러면 우리 돈 4천만원대 중반이다. 결코 적지 않은 연봉이다.

며칠 전 뉴스에서 아이 한명을 낳아 기르는데 최소한 필요한 비용이 월300만원이라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역시 미국의 따라 쟁이다. 모든 것을 따라간다.

 

“2009년 미국과 한국에서 상위 10퍼센트의 임금과 하위 10퍼센트의 임금 비율은 각각 4.86퍼센트와 4.74퍼센트로,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불평등이 심한 1위와 2위 국가였다.” (p.361)

 

상위 10퍼센트의 임금과 하위 10퍼센트의 임금 비율은 물론 부의 독점 현상도 한국은 미국에 이은 OECD2위 국가이다.

미국의 계층 구조는 계급 사다리 구조로 확고해졌다. 중산층은 붕괴하고 초부유층의 독식은 심화되고 있다.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안정된 삶을 구가하고 보장보험의 혜택을 누렸으나 지금은 흔한 대학 졸업장이 없으면 꿈도 꾸지 못한다고 한다

.

무너져가는 ‘아메리칸 드림’의 끝자락을 아직도 붙잡고 있는 한국의 현실이 서글프다. 전 세계를 공황에 빠뜨렸던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에도 우리 경제 수장이라는 사람은 ‘다른 나라보다 피해가 적습니다.’ 라는 바보 같은 논평을 내놓기도 했다.

그들에게는 전부였던 미국의 경제체제가 모래위의 성처럼 부실 그 자체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한다.

 

유럽을 비롯한 많은 국가는 나름대로 경제구조를 개선하고 미국식을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는데 한국의 현실은 그대로다. 숭미를 버릴 수 없는 것이다.

파멸로 갈수도 있는 미국의 초상을 그대로 답습하는 꼴이 될 까 걱정된다.

체제가 양극화를 심화 시키고 중간계급을 붕괴시키고 초부유층의 독식을 지원했다면 체제가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

 

그러면 어떤 체제를?

책에서는 그것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심층 취재까지가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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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과의 산책
이지민 외 지음 / 레디셋고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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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판타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모두들 열광하는 무협지가 그렇게 재미없을 줄 몰랐다. [반지의 제왕]도 그저 그랬다. 판타지 소설은 더욱 그렇다. 발 붙여 사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이렇게 버라이어티 한데 그것 너머에 있는 환상의 세계를 가늠하고 그곳을 향유하기에는 내가 너무 속된 것 같다.

 

이 책 「여신과의 산책」의 소개 글이 섬뜩했다. “당신을 환상의 세계로 안내할 8편의 이야기”

 

‘허거걱! 어쩌지 나는 환상의 세계 따위 좋아하지 않는데’

8명의 작가가 쓴 중·단편 소설을 엮은 책이다. 소개 글이야 워낙 독자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단어를 선별해 쓰기 마련이므로 크게 걱정하지 않고 책을 열었다.

먼저, 8편의 소설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작품은 이지민씨의 [여신과의 산책]이고 가장 별로였던 작품은 한유주씨의 [나무 사이 그녀 눈동자 신비한 빛을 발하고 있네] (제목만 별나게 길다;;)이다.

 

 

이지민 [여신과의 산책]

[여신과의 산책]은 책을 읽기 전 여자 ‘신(God)’과의 산책으로 생각했다. 이 사고의 편협함이란^^;;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 ‘여신’이었다. 자기가 사귀는 남자와 함께 있을 때 남자의 부모 중 한 분이 죽는, 그래서 그 남자들 모두 부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던 징크스를 가진 여자였다.

마지막 세 번째 애인이었던 남자의 친구가 찾아와 ‘여신’의 징크스를 되묻고 확인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사람이름 ‘여신’을 ‘여자 신(God)'으로 착각하고 있던 내게 시원한 뒤통수 한 대 후려갈긴 작가의 기발함에 박수를 보내며 나도 시작했다.

[여신과의 산책]은 42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소설임에도 문장과 단어에 함축된 이미지는 420페이지를 채우고도 남는 것 같았다.

 

“먼지만이 권태롭게 떠다니는”

“에어컨은 무시무시한 신음 소리를 내며 냉기를 게워내고 있었다.”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문장의 형태이다. 결코 어렵지 않지만 사물의 양태와 다중적 의미를 전달하는데 효과적인 수식어를 쓴다. 그래서 문장을 읽는 즉시 퍼뜩 이미지를 머릿속으로 그려낼 수 있다. 나는 이런 문장을 좋아한다. 온갖 치장을 하거나 잘난 체하거나 목디스크로 목깁스를 한 것 마냥 뻣뻣하게 위세 떠는 문장을 싫어한다.

 

뭐, 어디까지나 개인적 취향이니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다.

작가는 본래 작가가 아닌 사람들은 잘 발견하지 못하는 미세한 감각과 양태의 이미지를 포착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또한 그것을 단어의 조합과 배열로 가장 적절하게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작가의 능력이다. 그래서 그 작가의 책을 읽으며 ‘아!! 맞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아~~ 왜 나는 똑같은 걸 보면서도 이 생각을 못했지~~!’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런 내 개인적인 기준에서 이지민 작가는 훌륭한 작가적 자질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전 그 불행이 필요해서 왔습니다.”

“지금 아버지가 위독하십니다. 그리고 저는 아버지의 임종을 보지 않을 생각이고요.”

 

요즘 가뭄 때문에 난리인데 가뭄으로 논이 수백, 수천 개의 비대칭 육각형으로 갈라진 걸 본 적이 있는가? 물기라고는 개미 눈물만큼도 찾을 수 없는 건조함. 나는 그런 건조한 글을 좋아한다. 군더더기가 없고 하고자 하는 말을, 또는 메시지를 150km직구를 던지는 투수처럼 독자의 가슴에 내다 꽂는 문장을 좋아 한다. 그래서 김훈의 글을 잃고 정신적 환각에 빠졌었다. 물론, 김훈만큼은 아니지만 이지민의 글도 건조하다. 말랐다. 하지만 거북하지 않고 바짝 마르지 않아 양 입술 끄트머리에 침이 엉기지 않는다. 재능이자 능력이다.

 

 

한유주 [나무 사이 그녀 눈동자 신비한 빛을 발하고 있네]

앞서 [여신과의 산책]에 대한 내 감상평의 모든 면과 정반대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8편 중 유일하게 두 번 읽었으나 알다가도 모를 긴 제목만큼이나 알다가도 모를 내용이었다.

34페이지 분량 전체가 1인칭 주인공의 시점에서 하는 독백으로 채워져 있다. 대화도 하나도 없고 문체도 바뀌지 않는다. 주인공의 심리부터 상황묘사, 다른 인물들의 모습까지 주인공 혼자의 독백이다.

 

문장의 길이는 8편 중 가장 짧지만 호흡의 구분이 되지 않아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소설의 처음부터 끝이 마치 하나의 문장인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 작가의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의도였다면 그건 성공한 것 같다. 하지만 도무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지 잘 모르겠고 유치원 아이가 새로 산 스케치북에 그 아이를 가장 잘 아는 엄마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을 첫 장부터 끝장까지 그린 것 같았다.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예전에 지금의 이승기, 김수현을 합친 것보다 더 인기가 많던 유승준이 하던 통신사 CF의 멘트다. XX패스. 우리가 쟤들꺼보다 훨씬 빠르니까 우리꺼 사라. 뭐 이런 식?

당시 유승준은 국내 댄스가수들 보다 몇 비트는 빠른 댄스곡을 라이브로 소화하고 ‘가위춤’ 이런 것들로 대히트를 치고 있었다.

 

‘이해할 테면 이해해 봐~!!’

8편 중 가장 긴 제목과 가장 특이한 문체와 가장 특이한 소설의 형태다. 이해할 테면 이해해 봐라! 라고 하는 것 같았다.

일단 호흡을 할 수 없는 문장에 숨이 막힐 것 같았고, 내용이 지루하다. 긴장감이 없고 술 취한 아저씨 주정 같이 알아들을 수 없었다.

 

 

김이설 [화석]

[여신과의 산책]다음으로 좋았던 작품이다. 기가 막힌 세태를 향한 일정 정도의 블랙코미디도 담겨 있고 누구나 가슴에 품고 있을 첫사랑에 대한 알싸한 기억을 더듬게 하는 작품이다.

“해마다 만 삼천 원짜리 생크림 케이크가 남편의 생일 선물이었다. 올해는 날짜도 틀렸다.

취한 남편이 현관문 턱에 걸려 넘어져 케이크 상자를 떨어뜨렸다. 케이크 한 귀퉁이가 찌그러졌다. 속이 느글거렸다.” (p.86)

 

십삼만 원짜리 구두도 방긋 웃으며 사주던 남편들은 만 삼천 원짜리 케이크에 불안한 심리를 씻는다. 날짜가 틀리고 취기에 넘어져 케이크가 찌그러져도 상관없다. 매일 펼쳐지는 죽음의 전장에서 온갖 상처를 겨우 응급처치 한 채 후방으로 돌아오는 것만으로 스스로 대견하다. 나름 죽어라 사는데, 마누라는 한 동네 살다 신시가지로 이사 간 친구와 자신을 비교하며 화장실 욕조만 한 바가지를 긁어댄다. 마누라는 모를 거라 생각 하겠지만 대학 때 만난 첫사랑 놈과 무슨 짓을 벌이는 지도 알고 있다.

 

한데 그깟 케이크? 뭐 속이 느글거려??

나는 마누라 얼굴을 보면 발바닥 저 밑에서부터 가득 차 있던 무저갱의 토사물이 미사일 발사체의 가공할 만한, 중력을 거스르는... 그 엄청난 힘으로 솟구쳐 올라옴을 경험 한다.

누가 누구 보고 느글거린다고??

 

그래도... 나는 오늘도 마누라에게 먼저 사과 하고 다짐을 한다.

나는 가족관계에 대한 증명을 할 수 있는 모든 공공기관의 서류 상 저 마누라의 남편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화석처럼 지워지지 않는 그 것. 현재까지는.

 

김이설 작가의 [화석]은 자꾸 영화 [바람난 가족]을 생각나게 했다. 있는 그대로를 까발리면서도 난잡하지 않아 좋았다.

나머지 다섯 편은 뜨겁지도 차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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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혼종성 - 뒤섞이고 유동하는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가이드
피터 버크 지음, 강상우 옮김 / 이음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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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혼종성(Cultural Hybridity)라는 단어는 낯설다. 하지만 우리 삶의 많은 영역에서 이 혼종성은 상존하고 있다.

 

혼종성과 다문화주의를 구분하는데 꽤 애를 먹었다. 내가 가진 의식 구조 안에서는 혼종성이 다문화주의의 하위개념인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 「문화혼종성」에서는 분명히 혼종성과 다문화주의를 구별 짓는다.

 

다문화주의가 ‘실재하는 개별적인 문화·집단이 하나의 퍼즐판 안에서 하나의 그림을 완성해 가는 조화의 개념’이라면 혼종성은 ‘실재하는 개별적인 문화·집단이 한쪽으로 흡수·통합·모방·적응하면서 계속해서 진행되는 보편적인 문화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책을 두 번 읽으며 나름 정리를 한다고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혼종성’이라는 용어는 ‘미친 듯이 유연하다.’고 평가받아 왔다.” (p.59)

“혼종화 과정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영역에서 발견될 수 있겠지만, 이 책에서는 문화적 경향에만 한정했다.” (p.17)

 

 

 

다문화주의

나의 이전 리뷰나 포스트에서 여러 번 언급한 적이 있는데 가깝게 지내는 몽골가족이 있다. 부부인 민데형과 디마누나, 딸 너모 이렇게 세 가족이다.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008년 몽골여행 때 민데형네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면서 부터이다. 그때의 여행 중 가장 놀랐던 것은 민데형의 외모였다. 몽골여행을 준비하며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던 중 봤던 몽골 남성의 일반적인 외모와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일단 체격도 좀 왜소하고 눈도 크게 쌍꺼풀도 짙어서 동남아 남성의 외모와 비슷했다. 다음 번 여행에서 궁금증을 풀 수 있었는데, 민데형의 고향은 몽골의 서북쪽 카자흐스탄 국경 인근이었다. 그 곳에는 지리적인 특성 상 카자크족이 많은 데 자신이 카자크족 혈통이라는 것이었다.

 

반만년 단일민족의 역사만을 배워온 나로서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몽골이라는 한 나라 안에서도 수많은 종족이 상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울란바타르 시내를 가보면 외모가 많이 다른 몽골사람들은 쉽게 볼 수 있다.

여러 민족이 한 국가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다문화주의다.

단지 혈통·인종만이 아니라 유럽의 경우 한 국가 안에 극좌인 공산당부터 극우인 파시스트당까지 국회 활동을 함께 하는 것이 다문화주의의 개념이다.

 

 

 

혼종성

혼종성도 다문화주의만큼이나 이해할 수 있는 사례는 많다. 먼저 책에 소개된 것은

 

“대중음악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유럽과 아프리카 전통 요소의 조합이었다. 가장 유명한 예는 재즈이고, 브라질 음악 역시 잘 알려진 사례이다.” (p.43)

 

음악이다. 이 책에서는 혼종성의 여러 하위개념 중 문화적인 측면에만 집중하고 있다.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재즈의 근원은 아프리카이다.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재즈의 근원이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의 음악과 부딪히고 협상하면서 “문화적 혼성”을 일으킨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처음 태동된 그 음악과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태동된 그 음악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 만들어 진 것이다. 하지만 처음의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계속 진행되며 새롭게 혼종된 재즈라는 음악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형·발전 되는 것이다.

 

“마테오리치는 그가 전파하려는 종교 사상이 중국인들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가도록 하기 위해, 유교 학자의 복장을 입었고 조상을 숭배하는 전통 제사 관습을 종교 의식이 아닌 사회 풍습으로 해석함으로써 개종자들이 제사를 계속 지낼 수 있도록 용인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p.71)

 

유명한 마테오리치는 중국에서의 선교를 위해 중국의 문화와 혼종된 것이다. 그래서 혼종성의 개념이 갖는 주요한 특징은 ‘제국주의적 지배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식민지에의 동화’라는 것이다.

물론, 이 책에 소개된 마테오리치의 행위는 책에서 분석하는 문화적 차원뿐만 아니라 정치적·종교적 차원에서 복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하지만 직접 그들의 복장을 입고 그들의 고유문화를 배척하지 않고 포용하고 모방해 적응하는 것은 분명한 ‘혼종성’의 개념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단순한 용어로 사고해서는 안 된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콜럼버스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p.68)

 

사고의 구조를 넓히는 것이 필요하다.

 

“맥도널드는 우루과이에서[달걀을 깨어 삶아서 얹은] 맥우에보(McHuwvo)를, 멕시코에서는 맥브리토(McBurrito)를, 인도에서는[소고기를 양고기로 대체한] 마하라자 맥(Maharaja Mac)을 판매한다.” (p.83)

 

몽골과 네팔, 체코의 프라하, 독일의 드레스덴의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를 먹어 보았다. 전 세계 매장에 공통적으로 있는 세트메뉴를 시켜 먹었기 때문에 책에서 소개된 맥우에보나 맥브리토 같은 그 나라 고유의 혼종된 맥도널드는 먹어보지 못했다. 메뉴에 있었으나 내가 찾지 못했던 것인지 지금에 와서 확인해 볼 길은 없지만 우루과이와 멕시코, 인도의 혼종된 맥도널드 메뉴는 또 하나 ‘문화혼종성’을 이해할 수 있는 포인트를 제공한다.

맥도널드라는 것을 잃어버리지 않음과 동시에 각국의 고유한 문화적 특성 또한 버리지 않는 것이다.

 

“나는 독립적인 문화들이 지속적으로 존재할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한다.” (p.154)

 

우리가 사는 현재는 이미 전 지구화된 사회다.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부터 들었던 것이 ‘글보벌화, 세계화’라는 단어들이다. 테크놀로지의 비약적인 발전은 문명의 고도화와 첨단화를 가져왔다.

굳이 비행기를 타고 대륙을 횡단하지 않아도 내 손안에서 뉴욕을 검색할 수 있고 런던의 뉴스를 볼 수 있다.

내 책장에는 한국의 작가가 쓴 책만큼 외국 작가가 쓴 책이 꽂혀 있다. 미국, 폴란드, 브라질, 아르헨티나, 스웨덴, 일본, 스페인, 터키, 이집트, 독일 등 나는 한국어를 사용하지만 그들이 쓴 책이 번역되어 출간되기 때문에 한국어로 그들의 책을 읽을 수 있다.

먹고, 입고, 사용하는 거의 모든 것에서 단일한 한국만의 것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현상은 미래에 더 심화될 것임도 분명하다.

 

반 만 년 단일민족이라는 개념도 이제는 더 이상 가르칠 수 없다. 엄청난 숫자의 결혼 이민자와 그 자녀들이 존재하고 외국인 근로자도 많은 숫자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독립적인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문화는 뒤죽박죽의 결과라고 얘기한 레비-스트로스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 각 문화가 경계의 영역에 놓여 있을 뿐 언제든지 혼종될 수 있는 가능성은 내포되어 있다. 그 경계가 급격히 무너질 것인지, 서서히 무너질 것인지의 차이일 뿐이다.

 

이 책의 말미에는 미래의 지구 문화에 대한 주요한 가능성 혹은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첫 번째는 ‘문화적 균질화’ 이다.

 

두 번째는 저항 혹은 ‘반(反)-전지구화’ 이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국가 단위의 지역역사수업, 아일랜드어나 바스크어 의무 수업 등 지역 문화와 지역정체성에 대한 강조와 교육이 실시되고 있지만 결국 실패할 것이라고 예견한다. 앞서 말한 시간의 문제라는 것이다.

 

세 번째는 ‘문화적 양층언어’ 이다. 이것은 전 지구적 문화와 지역 문화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인데, 지금도 그렇지만 미래에는 전 지구적 문화 세계에서 우리는 모두 이중 문화권 내지는 복수의 다중문화권에 속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시나리오가 비극으로 끝맺지 않도록 여전히 우리(자신)만의 지역 언어를 유지함으로써, 세계 문화에 참여하는 동시에 지역 문화를 보존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네 번째는 ‘새로운 혼합체의 등장’ 이다.

요약하자면, 지금 현재 경계의 영역에 있는 각 문화 간 혼종이 점진적으로 계속되고 이 혼종은 심화된다는 것이다. 지금의 문화 간 배치는 결국 재배치되고 그에 따라 ‘새로운 혼합체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크레올’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데, 원래 ‘크레올’은 [신대륙발견 후 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난 에스파냐인과 프랑스인의 자손들]을 일컫는 말이다. 수세기에 걸친 문화 혼종화를 대체하는 개념이 ‘크레올’이었다면 미래의 그것은 ‘새로운 혼합체’ 즉, ‘새로운 크레올의 등장’이다.

 

“새로운 질서의 탄생, 새로운 지역유형의 형성, 새로운 형태의 결정화” (p.172)

 

지금까지와는 다른 문화적 현상을 예견한다. 가시적으로 그려낼 수는 없지만 역사를 돌이켜보면 늘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고 등장했었다.

 

분명 ‘다문화주의’의 개념과는 다른, 그 개념을 탈피한 ‘혼종성’의 개념일 것이라 주장한다.

“콘비벤시아(convivencia) ‘공존’을 뜻하는 스페인어로,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통치했던 711년부터 1492년까지 기간을 가리킨다. 이 시기 동안 이슬람교도, 유대인, 기독교도는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하며 상호영향을 미쳤다. 이슬람 통치가 시작되던 시절부터 이어져온 스페인 기독교 세력의 국토회복운동이 성공을 거두어 1492년 이슬람 세력의 최후의 보루였던 그러나다까지 탈환하면서 이 시기는 막을 내리며, 이때부터 대대적인 이슬람교도·유대인 박해와 추방이 이루어졌다.” (p.123)

 

지금은 극도로 대치되어 갈등하는 이슬람교도와 유대인, 기독교도가 과거 오랜 기간 동안 일정 지역에서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평화롭게 공존했던 문화사적 배치가 존재했었다. 수백 년을 이어온 문화적 혼합체는 기독교 세력의 국토회복운동으로 새로운 문화로 재배치되었다.

 

이후 70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 미래에 펼쳐질 다변적인 문화의 양태가 저자의 주장처럼 ‘혼종성’의 개념으로 전개될 것인지, 저자가 비판하는 ‘다문화주의’의 개념으로 전개될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미래’라는 것은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주장도 하나의 학설일 뿐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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