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받을 권리, 환대할 용기 - 소수자를 위한 일상생활의 정치학
이라영 지음 / 동녘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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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상의 '사소한' 장애물과 문제들을 피하지 않고 계속 생각하고 움직이는 그 자체가 큰 고통이 따르는 일이다. 우리는 '억울함'과 '분노'의 실체에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공식 안건이 되는 억울함이 있고 불평과 투정으로 흩어지는 억울함이 있다. 분노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계층과 목소리가 거세당하는 계층이 있다.  "거트루드 스타인의 말을 비틀어보자면 자라서 남자가 될 거라면 반항하는 소년인 게 무슨 소용일까? 분명히 반항이 백인 중간계급 남성 반항이기를 그만두고 계급 반항이나 인종 반항으로 바뀌면 매우 다른 위협이 등장한다.  운동에도 주류가 있기 마련이고 반항도 버릴 게 있는 기득권에게 가능하다.

 

 

생각은 계속 움직여야 한다. 이 움직임을 방해하는 일상의 언어는 '원래 그래'다. 대부분의 일상을 '원래 그래'라는 말과 싸워야 한다. 가난한 사람은 원래 그렇고 남자는 원래 그렇고 여자는 원래 그렇고 전라도 사람은 원래 그렇고 한국 사람은 우널래 그렇다는 편안한 진단이 이 사회를 휘감고 있는 하나의 진리다. 문화로 포장된 편견들이 맞지 않는 옷처럼 나를 조여 오거나 너무 헐거워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걸쳐져 있다. 관념은 끊임없이 수정되어야 한다. 여기 쓴 글들은 일상에 스며든 약자 혐오와 차별 구별짓기등  심하게 기울어진 의식에 질문을 던져보는 작업이다. 익숙해진 일상을 익숙하지 않게 들여댜 보고 싶다..

환영받지 못하는 몸, 침범당하는 몸, 빼앗긴 공간 배제되는 존재 착취당하는 시간, 조롱과 모멸의 대상, 가려진 이들, 묵살당한 목소리 악마화되거나 사적 영역에 갖힌 권력, 추방되는 계층 등을 생각하고 질문해야 한다. 내가 '되고 싶은 롤모델이나 워너비보다는 나의 타인의 관계를 고민하고 싶다. 우리는 어떤 사람은 나의 세계에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나의 세계에서 밀어낸다. 존중받지 못하는 세계에서 탈출을 꿈꾸는 모습이 우리의 자회상이다. 이익을 위한 접대가 아니라 인격적인 존중이 절실해 보인다. 소외된 약자이며 때로는 사회의 루저인 이들이 환대받을 권리에 대해 생각하고 싶다. 그들을 조롱하고 모욕하며 나를 그들이 아니고 루저가 아님을 증명하기보다는 모두 연결되어 있는 존재임을 인식하고 서로를 환대할 용기가 필요하다.

 

 

나의 피해와 억울함은 중요한 분노의 출발점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이는 자칫하면 서로의 고통을 저울질하게 할 수 있다. 내가 약자야 내가 피해자야 내가 울어야. 격어봤어? 라는 목소리 속에서 나도 타인임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내가 아닌 남을 타자화하는 방식을 벗어나기 쉽지 않지만 이 타자회의 굴레를 최소한 의심하며 살아야 한다.

약자란 무엇인가  절대적이며 필연적인 약자는 있는가 나는 내가 약자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때로는 약자가 된다. '여성이기에 늘 약자인 삶을 살지는 않으며 여성이 필연적으로 약자가 도리 이유도 없다. 다만 내 외부의 시선에 의해 '오직 여성으로만'존재할 때 나는 약자가 된다. 여자라서 그래 여자니까 안돼 하여튼 여자들은 같은 여자면서  어쩔 수 없는 여자 여자답지 않게 여자의 적은 여자  ....  여자에 대한 이 모든 규정들이 바로 여자를 약자의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게 한다. 남자와 대칭을 이루는 존재인 여자로만 정체성이 읽히는 지독한 타자화 그럿이 약자가 만들어지는 방식이다.

약자가 늘 옳고 선한 피해자는 아니다. 약자는 개인으로 규정되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중략)

약자일수록 조심해야할 규칙이 늘어난다. 약자가 약자다움에서 벗어나지 않을 때 사회는 평화롭다. 싸울 수 없는 약자들은 자기 위안 방식만 늘어간다. 지는 게 이기는 거야. 좋은 게 좋은 거야.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이 말들의 핵심은 갈등 회피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고 할 때 중요한 것은 무서움이나 더러움이 아니다. 피한다는 태도다. 그렇게 나는 피할 수 있겠지만 누군가는 또 그 무서움 더러움과 마주해야 한다. 나 역시 남이 피한 무서움과 더러움과 맞닥뜨린다. 모두가 피하기만 하며 살 수는 없다. 누군가는 치워야 한다.

우리는 이 차별적 구조에 대한 저항보다 개인의 인간 승리를 즐긴다. 나이를 극복하고 장애를 극복하고 인종적 편견을 극복하고 가난을 극복하고 극복해야 할 요소가 많을 수록 약자다. 극복하지 못한 이들은 게으르고 무능력한 낙오자가 된다.

 

 

 

지난 여름  얼떨결에 폭력예방강사 노릇을 하게 되었다.

'노릇'을 하게 되었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건 준비를 하고 수업을 하면서 내내 나 자신에게 자신감이 없었고 이게 맞는 방향인지 끊임없이 질문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확신이 없지만  산만하고  집중해주지 않은 아이들이라도 똘똘하게 수업을 따라와 주어 무사히 잘 마쳤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그 정의를 아이들 눈높이에 맞게 어떻게 이야기해줘야 하나 하는 고만을 하다가 앞서 나는 폭력을 어떻게 정의하는가를 고민했다.

폭력은  나의 허락없이 동의없이 내 영역으로 침범한 강하고 위험한 힘이다

나가줘. 하지마. 라고 말할 수 없고 거부의 몸짓이 무시되거나 시도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큰 힘이 내 안으로 불쑥 들어오는 상황이 폭력이다.

그 침범은 물리적일 수도 있고 정서적일 수도 있고 성적일 수도 있다.

어쩌면 가장 다정하고 친절하며 내가 의지하는 타인이 거부할 수 없는 힘을 이용해 나를 조종하는 힘이다.

학교 폭력 가정폭력 사이버 폭력 성폭력

그것의 이름이 어떻게 명명되든 모든 폭력은 동의가 없었고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았고 상대방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았으며 설령 물어보았다고 해도 자기멋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여서 강하게  또는 은근하게 조여오는 불쾌하고 불편하고 공포감을 주는 힘

두서없는 수업동안 그래도  상대방의 동의를 얻지 않은 모든 것은 다 폭력이라고 말해주고 싶었고  모두가 생김새가 다르고 성격이 다르듯이 각자가 생각하는 자기의 영역이라는 의미도 다르기 때문에 내가 장난으로 하거나 좋은 의도라고 하더라도 상대에게는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걸 인정하자. 그리고 내가 나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듯이 상대도 나와 같이 귀하고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게 잘 되었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자발적인 참여가 아니어서 그리고 아이들 제각각의 눈높이도 다 다르다 보니 어디에 맞추어야 할지 헤매고 순간순간 아이들이 미워지는 감정이 훅 올라오기도 했지만 모두를 마친 순간 내게 온 감정은 미안함이다.

어떤 폭력이든 그들이 폭력의 피해자가 되든 가해자가 되든

어쩌면 어른들이 잘못때문에 아이들이 이렇게 고생하고 힘들어지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점점 커졌다.

경쟁해야 한다고 하고 이겨야 한다고 하고

아무 질문 없이 어른들 말을 따르라고 하고 가만있으라고 하고 조용하라고 하고

그러면서 창의적이 되어라  호기심을 가져라고 하는  순간순간 자기도 모르는 모순들을 주입하는 것도 어른이다.

어른들을 믿고 따르라고 하면서도 아는 사람으로 인해 더 많이 발생되는 폭력의 상황을 설명할 때면 과연 이 아이들은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나도 헷갈렸다.

나는 옆으로 삐뚤어진 채 걷고 말하면서 너히는 똑바로 걷고 바르게 말하라고 하는 이 지독한 모순을 깨닫는 순간들이었다.

어쩌면 나도 제대로 모르면서 이런게 폭력이라고 말하는 이 시간도 폭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여름이 가고 수업은 끝이 났고 무엇이 휘발되고 무엇이 남을지 모르지만  폭력은 다 잊어도 나는 소중하고 괜찮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기억하면 좋겠다고 소심하게 바란다.

 

 

나는 내 아이가 남긴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냥 버렸다. 그래서인지 우리집은 음식물 쓰레기가 너무 많이 나온다.

누가 남긴 것을 먹는다는 건 비위상했고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모성이 부족해서 일 수도 있다.

아무래 이쁜 내 새끼라도   먹고 남은 헤집어지고 청결해보이지 않은 그것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기왕이면 준 건 다 먹었으면 하는 마음에 식습관을 잡는다는 핑계로 다 먹게 강요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그냥 버리는게 서로의 관계에도 정서에도 나았다. 나중에 죽어서 벌받지 뭐 ... 하는 마음

나쁜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어릴 적부터 엄마는  식사후에 애매하게 남은 찬이 있으면 "먹고 치우자'라는 말을 자주 했다. 뭐 나물이나 김치같은 건 엄마가 먹었지만 별식으로 한 불고기나 달걀말이 같은 게 찔끔 남으면 그래도 좋은 반찬인데 싶은 마음이었을까? 자꾸 우리에게 먹고 치우자고 말했다. 그땐 싫었지만 싫다는 내색은 못하고 얼른 먹어버리곤 했었다.

이미 배는 부르고 남은 찬들은 지저분해서  여러가지 이유로  그 말이 싫었짐나 싫다고 하지 못했다. 뭐 자주 있는 일도 아니어서일 수도 있다.

 

정말 싫었던 기억 하나

명절 , 할아버지 아버지 남자 형제들의 상에서 남은 찬을 처리하는 일이다.

식사를 다 한 어른은 꼭 선심쓰듯 말한다.

"이거 갖다 먹어라"

그 상에만 올랐던 생선. 고기 . 젓갈. 김따위들

이미 생선인 다 헤집어져  부서진 살들이 흩어져 있을 뿐이고 고기엔 누구것인지 밥풀이 묻어 있고 젓갈은 다른 나물 양념이 섞여 있고 김은 이미 눅진해져 있었다.

내가 너희 먹어라고 남겨 뒀으니 이거 먹어라 하는 마음

그건 악한 마음은 분명 아닐 것이다.

당신과 다른 밥상에서 밥을 먹는 남자가 아닌 손녀들이 안쓰러워서 일부러 다 먹지 않고 남겨주었을 것이니 그건 사랑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왜 젓가락을 대기 전에 먼저 나눠주지 않았던 걸까

생선을 반을 뚝 잘라 꼬리라도 떼 줄수 있는 것이고 다른 찬들도 조금씩 덜어줘도 상관없을 것을 이미 당신이 배가 부른 뒤에 남은 음식으로 혼자만 받은 멋적음을 만회해보려는 것 그것 이상은 아닐 것이다.

예전 엄마의 '먹고 치우자'라는 말을 언니와 나는 들어도 장손인 동생은 듣지 않았던거 같다.

먹고 치워야 하는 찬이 존재하고 먹고 치워야 하는 사람도 따로 있다.

어쩌면 별 일 아닌 이 기억이 불쑥 올라왔던 건  모임에서 함께 밥을 먹을 때였다.

스터디가 끝나고 각자가 싸오거나 반찬가게에서 사온 찬으로 진수성찬 못지 않은 밥상을 차려 함께 밥을 먹고 나니 아니나 다를까 찬들이 조금씩 남았다.

내 또래 혹은 그 보다 윗 연배이거나 어른 다양한 여성들의 모임이었는데

"아유 난 이꼴을 못봐' 하면서 남은 찬들을 모아 먹는 모습을 보면서였다

"여자들은 이런 거 못 보지. 이렇게 남기기는 왜 남겨  나눠 먹고 치워야지'

알뜰함이고  쓰레기를 줄이기 위한 행동이고 그냥 다른 뜻이 없는 습관 같은 행동들이 뾰족하게 다가오는 건 내가 별나고 못되먹어서일 수도 있다.

그래서 여자들은 다 이런다는 말... 그 말이 아팠다.

다 그런 것도 아니고 그런 거 사실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뭐 암튼 순간 그런 온갖 생각이 오갔지만 그냥 가만 있었다.

나의 뾰족한 성정때문일테니까.

 

개인적인 것은 저절로 정치적인 것이 되지 않는다. 더 많은 개인들의 사회적 고발을 지지한다.

 

정확하게 보이는 문제를 보지 않고 알려하지 않는 힘 그러니까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알지 않아도 말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들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조심하지 않아도 되는 권력이다.

미셀 포코는 철학의 역할이 '숨겨진 것을 발견하는 일이 아니라 정확히 보이는 것을 보이도록 하는 일'이라고 했다. 이 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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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노래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방미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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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엄은 두 아이를 키우며 육아에 지쳐있었고 우연처럼 기적처럼 새로운 일을 제안받는다. 육아가 아닌 일로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은 마음은 미리엄을 일을 하기로 하고 보모를 구한다. 처음 누군가 타인을 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내 생활을 드러내야 하고 타인을 내 생활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때 나타난 루이즈는 완벽한 존재였다.

희미한 그녀의 이미지는 절대 미리엄의 완성된 삶에 도드라지지 않았고 그의 육아는 완벽했으며 육아뿐 아니라 살림까지 반짝하게 빛을 낸다.

일은 성취감을 주고 삶에 여유를 주고 남편 폴과의 관계도 원만하게 다시 충족된다.

모두가 루이즈 덕이다.

완벽한 일과 완벽한 가정 모두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루이즈 덕이며 동시에 이 모든 것이 나의 성공이고 나의 능력이라고 착각한다.

그리고 그 완벽한 성취감앞에서 루이즈는 정말 소중한 존재이고 사랑스럽다.

 

그리스 휴가를 함께 다녀오고 난 뒤였을까

루이즈는 슬슬 완벽한 가정에서 이물감을 남긴다.

완벽한 화장과 옷차림. 티끌 하나 없는 살림살이. 부모보다 보모를 더 따르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어쩌면 미리엄과 폴은 완벽한 삶을 위해 이제 루이즈를 덜어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어서 루이즈가 없는 상황이 생생하게 상상된다. 쉽게 떼어낼 수도 없고 받아들이기도 껄끄러운 것 그게 루이즈가 되어버린다.

 

아무것도 자기것을 가진 적도 없고 누군가와 친밀한 교류도 없이 딱딱한 자기 껍질에서 쉽게 나올 수 없었던 루이즈.

그녀에게 미리엄과 폴의 가족은 다정하고 완벽한 공간이고 관계였다.

그 관계속에 그 공간속에 내 자리를 갖고 싶다는 마음

어떤 것도 욕심내지 못했던 루이즈에게 그 가족은 가지고 싶고 속박되고 싶은 대상이다.

이제 떼어버리고 싶은 미리엄과 이제 들어가고 싶은 루이즈는 서로 타인이다

그리고 비극이 생긴다.

루이즈는 미리엄과 폴을 잘 알지 못했고 폴과 미리엄도 루이즈를 몰랐다.

가족처럼 격의없는 순간도 있었지만 그건 찰라였고 여전히 타인이었다.

책을 다 읽고도 루이즈는 잡히지 않는다.

책 속에서 툭툭 던져놓듯이 순간을 빠르게 포착한 크로키처럼 묘사되는 루이즈는 조각조각 숨어있다. 그 조각들을 맞추어도 정말 중요한 단서들이 빠진 그래서 그 인물 전체를 볼 수 없는 상황, 사건을 앞에 둔 나나 경감처럼 여전히 그녀는 안개속에 있다.

 

나는 그녀를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알고 싶지 않다.

우리는 서로 관계가 없을 때 가장 편안하고 안전하다.

나는, 그에게 타인이다.

그는, 나에게 타인이다.

그냥 아는 사이일 수는 있지만 알지 못한다.

어디에 살고 누구와 친하고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고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알고싶지만 동시에 알고 싶지 않다.

그가 내 영역에 침범하지 않기를 바라듯 나도 그의 영역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

타인을 알기가 어려운 것은 우리가 사실 알고 싶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모르는 것이 안전하니까

미리엄과 폴은 루이즈가 필요하다.

그들 삶에 쉼표가 필요하고 계속 원할한 지냉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더 할 나위없이 소중하고 필요한 루이즈지만 그녀는 나의 가족이 아니다.

그냥 딱 그만큼의 거리에서 딱 필요한 만큼의 관계를 원할 뿐이다.

루이즈도 자기를 모두 보여주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스스로 연기하고 있다.

만나고 걷고 생활하는 루이즈는 누구에게 자기를 보여주지도 않고 드러내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모르는 것같기도 하다.

그냥 혼자 견디는 것이 가장 쉬웠고 그냥 눈감는 것밖에 아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책을 다 읽고 우리는 폴과 미리엄을 알게 되지만 루이즈는 끝내 알 수 없다. 그녀가 스스로 말을 해줄지 아닐지조차 미지수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그녀를 모른다. 아무도 그녀를 모른다.

그리고 그녀가 궁금하지만 동시에 그녀를 알게 되는 것이 두렵다.

 

누군가를 알게 되는 것

그에 대한 무언가를 알게 되는 것이 나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고 내 정서를 건드릴 수 있다는 것은 두렵다.

모두 외롭게 때문이다.

누군가 나를 알아주길 바라면서 동시에 알지 못하길 바란다.

같은 마음으로 그를 알고 싶지만 아는 것이 두렵다.

가끔 나도 루이즈처럼 나를 증명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다.

이렇게 점점 희미해져서 사라지면 좋겠다 라는 마음과 그러면 어쩌나 하는 두려운 마음이 동시에 내 속에 있다.

 

타인을 알고 싶어하지 않은 마음이 상대에게 닿아 상처가 된다.

상대에게 닿아 그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마음 역시 상대를 불편하게 한다.

누구도 폭력을 의도하지 않았으나 폭력이 일어날 수도 있다.

불안하고 두려운 개인들

다른 누구를 알고 받아들이는 것이 버거운 개인들이 자꾸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받는다.

미리엄의 불편과 이질잠이 루이즈에게

루이즈의 지나친 친절과 완벽함은 미리엄에게 깊이 숨겨진 불안이 건드려진다.

엄마의 위치를 침범당하고 있다는 두려움 불안과 다정한 가족의 일원이 되고 싶은 소망

그 두가지 욕망이 충돌되면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서로에게 주지도 않았던 상처를 받는다.

 

타인을 안다는 건 어떤 것일까?

나의 바운더리를 안전하게 지키는 동시에 타인을 수용하는 일은 불가능할까

무심히 읽은 책인데 불안하고 두려워서 생각이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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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낮잠에서 꺠어나도 여전히 해는 마루 깊은 곳까지 닿아있었다.

집안은 조용하다. 아무도 없는 걸까? 설마 어린 딸이 잠든 동안 모두 어디론가 가버린걸까

끝방이 시끌한 걸 보면 고모들은 있는 모양이다.

고요한 마루 끝에 놓인 요강에 엉덩이를 댄다. 차가운 감촉에 순간 몸을 부르르 떨다가 괜히 마루 끝에 닿은 해가 미워졌다.

그리고 나는 어떤 아주머니에게 손목이 잡힌 채 골목을 걷는다.

아직 낮잠의 한 꼬리가 매달려 있는 멍한 상태로 골목을 걷는다 그리고 어느 집에 닿았다.

생일파티가 한창이었다. 이미 한참이 지난 상황인지 케잌은 적당히 흐트러져 있고 먹다 남은 음식들도 있고 아이들은 누가 새로 오든 개의치 않고 떠들썩하다.

**왔어.

힐끈 보고 인사를 했던가 아이들은 다시 놀이에 빠지고 나는 희미해지는 낮잠의 끝을 닦아내고 있다. 아주머니가 음식을 챙겨 주셨다. 일단 먹고 놀자.

그리고 나는 멍하니 누군가의 생일파티에 늦게 초대되어 그 자리에 그냥 정물처럼 앉아 있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니 다시 집은 가족들로 가득찼고 시끌거렸고 여전했다.

오늘 하루의 내 일상이 꿈이었는지 뭐였는지 아리송하다.

내가 그 생일에 가고 싶었던 걸까? 그건 언제 약속된 거였지? 대부분이 남자 아이들이었는데 내가 왜 초대된걸까? 친하지도 않았었는데

싫다고 말할걸 그랬나? 안갔더라면

어쩌면 오빠네 가족이 다 부재중인 휴일 한 낮 어린 조카 하나만 보내면 자기들끼리 재미난 시간을 보낼 수 있던 고모의 술책이었을까?

모르겠다.

다만 그렇게 낮선 시간 낮잠에서 깨서 누군가에게 손목을 잡혀 골목을 걷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서 어울리지 않은 멍한 표정으로 케잌을 퍼먹고 있는 내 모습이 참 도드라지게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조금 슬펐다. 이유는 모르겠다.

 

# 2.

그 때 이모집에 가면 늘 돈가스를 해주셨다.

냉동식품이 아니라 고기를 두들기고 밑간을 하고 밀가루 달걀 빵가루를 입혀서 튀겨낸 돈가스였다. 그 때 사촌언니 오빠들은 이미 고등학생이어서 함께 놀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뭔가 모르고 고요하고 엄숙한 그 집에서는 마땅히 몸을 숨길 공간이 없었다.

돈가스는 이모네 아주머니가 만들었는데 나는 그때 마다 빵가루를 만드는 일을 맡았다.

시판 빵가루가 아니라 먹다 남은 식빵을 채에 문질러 가루를 만드는 과정 나는 늘 채를 앞에 놓고 빵을 문지르며 가루를 만들었다.

그때 나의 언니와 동생은 어디에 있었을까?

늘 공부하고 있던 사촌들과 함께였는지 아니니 모르겠지만 돈가스를 만드는 부엌엔 없었다.

나만 늘 빵가루를 만들었었다.

어른들이 지나가는 말로 잘한다 잘한다는 말에 신이 났던 걸까?

이건 **말고는 할 사람이 없네 니가 제일 잘한다.

그리고 이모가 몰래 찔러주던 오백원짜리 지폐에 맛을 들였던 걸까

왜 나만? 이란 마음이 들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늘 내가 그 담당이었다.

그런 어느날 어디서 마음이 삐졌는지 오늘은 하지 않을거라고 고집을 피웠다.

뭐 할 수 없지.. 내가 동참하지 않아도 돈가스는 완성되었는데 왠지 죄스럽고 이 돈가스를 내가 먹어도 될까 하는 마음이었다.

내가 하지 않아도 완성되는 돈가스가 실망스러웠고

내가 마땅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게 아닐까 하는 미안한 마음

다들 아무렇지 않게 잘 먹었지만 나는 쉽게 넘기질 못했다.

그런데 더 슬픈 건 아무도 나의 그런 심정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빵가루를 만들었다 차라리 그게 마음이 편했다.

 

# 3.

언니가 집을 나갔다. 외치에서 머리통이 큰 동생들과 다투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언니가 집을 나갔다. 고만고만한 나이의 형제들은 위 아래가 있더라도 그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시기가 있다. 위면 어떻고 아래면 어떤가 하는 마음에 서로가 무시하고 막대하는 시절

사실 우리는 언니가 가출했다는 것도 몰랐다. 그냥 잠깐 나갔나보다 그랬던 거 같다.

그리고 이모에게 전화가 왔다.

니들이 어떻게 했길래 그 착한 &&이 집을 나와?

니들은 언니가 가출했는데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있을수가 있니?

평소 화를 내지 않은 이모가 쏟아내는 말을 고스란히 들으면서 왜 가출을 했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언니는 언제나 옳았다. 언제나 착했다. 더할 나위 없는 첫딸이었다.

책임감이 강하고 동생을 위해 희생할 줄 알고 뭐든 나서서 주도하고 챙기는 성격

그래서 동생들은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뭔가를 주도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시키는 것을 하거나 싫다고 하거나 두가지 중 하나만 하면 되었으니까

그렇게 착한 언니는 어른들에게도 잘 해서 인정 받았고 그 덕에 우리는 늘 철없고 생각없는 동생이었다. 나이가 얼마가 되든..

그렇게 착한 언니가 참고참다가 화가나서 가출을 했으니 어른들이 보기엔 우리들이 얼마나 한심하고 가짢고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그때 언니랑 무슨 갈등이 있었는지 왜 다퉜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언니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고 당연히 언니는 옳은 말을 했을 것이고 우리는 무시하거나 거부했거나 했을 것이다.

문득 그 때가 생각나면서 뒤늦게 억울했다.

무엇이든 항상 옳고 바른 사람이 있고 항상 틀리고 나쁜 사람이 있구나

착한 언니가 디폴트값이 되면서 우리는 늘 상대적으로 덜 착하거나 나쁜 사람이 되었다.

언니랑 의견이 다르거나 언니의 말을 거부하거나 언니를 화나게 하는 건 나쁜 사람이라는 증거가 되었다. 누구나 착하다고 책임감이 강하다는 사람 그 사람의 그 강한 자부심이 때로는 주위사람을 나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을 뒤늦게 했다.

언니를 욕할 수 없어서 그래서 더 화가 나고 약이 올랐던 어리고 젊었던 내가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 때 나도 참 힘들었겠다고 토닥거려주고 싶었다.

 

# 4.

“한 번도 감정이 드러나는 걸 본 적이 없어”

이게 칭찬일까?

나를 소개하면서 선배가 한 말이다. 좋다고 막 들뜨는 성격도 아니고 힘들다고 티나게 가라앉는 성격도 아니고 늘 그만큼 담담하게 다르지 않게..

감정을 그렇게 조절할 수 있다는 건 장점인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 그건 내가 내 감정을 제대로 몰라서였다.

누군가 내 영역에 들어오면 불편하고 불쾌하지만 그가 나쁜 의도가 아니었다는게 먼저 눈에 띄어서 나쁜 의도도 아닌데 화를 내거나 그걸 표현한다는 건 너무 심한게 아닌가 하며 스스로 마음을 검열하고 차단한다.

너무 신나는 일이 있어도 그걸 표현하는 건 자만 혹은 뽐내는 일처럼 보일까봐 아닌 척 하느라 가끔 상대를 실망하게 만들기도 한다. 뭘 해줘도 좋아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위로 뾰족하게 솟은 부분을 깍아내고 아래로 깊게 박히고 싶은 부분을 깍아낸다.

결국 뿌리를 내릴 수도 없고 위로 솟아 뻗어나갈 수 없는 나의 감정선들은 물속에서 흔들리는 부초처럼 그냥 그저 떠돌아 다닐 뿐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단단하게 어딘가 묶여져 있다. 어디에 옮겨 심기든 상관없는 상태에서 흔들려 흘러가버려도 안되게 단단학 붙잡고 있는 것 마치 흔들리는 버스에서 손잡이도 잡지 못한 채 반동으로 흔들려 누군가에게 닿아도 안되는 상황에 몰린 것처럼

아마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컸던 모양이다.

한동안 감정이 단단하고 잘 조절 할 수 있어서 이성적이라는 게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감정은 늘 이성에 비해 하위 개념이라고 믿었고 감정을 주체못하는 걸 비웃었고 무시하면서 스스로 단단하게 조절할 수 있다는 걸 자부심으로 느꼈다.

그렇게 안으로 허물어지고 텅텅 비어간다는 걸 몰랐다.

 

# 5

상처에도 경중이 있다고 믿었다.

내가 너무 힘들어서 어디선가 기대고 싶을 때 누군가 더 큰 상처를 드러내 보이면 쉽게 내 상처를 안으로 숨겼다.

겨우 이런 일로 징징대면 안되는 거야

우는 건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아

죽고 싶다는 생각이 사소한 상황에서도 불쑥 생겨났지만 그건 잘못된 거라고 스스로 판단하고 봉인했다. 그리고 죽지 않고 아직 살아있으니 역시나 과장된 생각이라고 믿었다.

늘 나의 상처를 나의 힘듬을 그 자체로 보지 않았다.

저 사람보다 얼마나 큰가 작은가? 늘 비교하는 대상일뿐이었다.

정말 문제는 내 상처는 누구의 것보다 너무나 작았다.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비틀대는 이유는 내가 약하기 때문이고 내가 징징대기 때문이라고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나에게 너무나 엄격하게 판단했다.

부모가 없는 것도 아닌데

집이 없는 것도 아닌데

나이를 그만큼 먹어서 이정도도 못 견디면 안되는데

부모가 되어서 먼저 힘들다고 지치면 안되지

가족이라면 함께 견뎌줘야 하는 거 아닐까?

내 욕구와 나의 마음은 늘 쉽게 잊혔다. 그렇다고 타인을 깊이 공감하며 들여다 볼줄도 몰랐다. 사실 나를 볼 줄 모르는 사람은 타인도 볼 수 없다는 걸... 나는 늘 모르고 살았다.

내가 받지 못한 공감을 내가 나에게 해주지 못한 배려를 타인에게 할 수 없었다.

늘 고대로 따옴표로 가져와 누구에게 어떤 상황에 써도 이상할 것 없는 입에 발린 위로와 공감만 남발하고 있었다.

공부가 힘든 아이에게

친구관게게 힘든 이들에게

가족에게 상처받은 누군가에게

늘 어디든 쓸 수 있는 공감과 위로의 말들 하나도 깊이가 없어서 그저 상투적이기만 한 그 말들 이외 나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은 듣기만 해도 보기만 해도 아파서 너무 힘들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가득한데 그걸 표현할 줄 몰랐고 오히려 너무 아파서 타인을 외면하고 싶었다.

고통의 치료는 샐프로...

나도 말하지 않는데 너도 말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딱 그마음 그렇게 점점 체온이 내려갔다.

웃기는 건 그러면서 난 참 나에게 공감을 잘한다고 생각했다.

싫은 말 하지 않고 잘 들어주고 (거의 반이상은 딴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내주는 것

단 그게 전부였다.

딱 이마에 붙여서 가지고 있다가 등을 토닥이며 돌아서는 순간 그대로 냉정하게 떼어 버리면 그만인 만큼만 상대에게 곁을 내주고 있었다.

왜냐면... 내가 상처받고 힘들고 싶지 않아서

왜나면 나는 누구에게도 그렇게 할 수 없어서. 할 줄 몰라서..

 

# 6.

 

윤성희의 소설들은 참 이상했다.

이 소설은 절대 영화가 되거나 드라마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도데체 사건이 나오질 않는다. 극적인 상황이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다보면 내가 먼저 지쳐버리는 너무 손에 땀이 나서 쉬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만든다.

인물의 어떤 감정이나 느낌은 전혀 표현하지 않는다. 전혀는 아니더라도 거의 표현하지 않고 인물들의 상황만 나열하는데 그 상황이라는게 두서가 없고 개연성이 없다.

누군가를 만나면 바로 그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그가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게 딱히 대단한 것도 아니다. 누구나 아픔이 있고 순간의 결정이 돌이킬 수 없었던 경험이 있고 이젠 잃어버린 무언가를 가지고 있지만 그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결함들일뿐이다.

하지만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경험들을 따라가면서 자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고 그가 잘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게된다.

 

어릴 적 드라마에 출연해 진구라는 역할을 했었던 형민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지만 점차 형민과 토크를 하던 아나운서의 이야기로 넘어가고 형민의 아내, 형민의 딸 형민의 딸의 친구 형민 아내의 부모와 형제들 그리고 형민의 직장 동료들, 출퇴근 시간에 만나는 토스트 포장마차 사람들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가 무슨 자유로운 의식의 흐름처럼 줄줄이 나열된다.

이건 드라마가 될 수 없다.

뜬금없이 전편에서 스쳐가던 사람이 여기서 불쑥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 이야기가 특별하지도 않고 제대로 된 결말도 가지지 못한다. 그리고 다시 다음편에서 누군가가 불쑥 마무리를 할 수 없는 자기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므로

드라마속 어린 진구는 참 상냥하고 괜찮은 사람이었다. 묵묵하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가족을 돌보고 의젓한 아이였다. 그리고 그런 진구의 성향은 아마 형민에게서 왔을 수도 있고 형민에게 영향을 줬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고 상냥하고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 그건 대단한 유혹이다.

아무것도 없다면 내가 드러내 보일만한 것이 없을 경우 괜찮다는 평판만큼은 내가 조금만 노력하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형민과 연결된 모든 사람들도 그랬다.

괜찮은 사람이었고 그러고 싶었을 것이다.

다만 누군가에게 괜찮은 사람이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피해를 입히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하는 것

사람이란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나눌 수 없다 그렇게 나누겠다면 한 사람이 절반으로 나뉘거나 세토막 네토막 심지어 잘게 쪼개져버릴 수 밖에 없는 것

그게 사람일 것이다.

형민도 그렇게 하영이도 그렇게 모두가 그렇다.

나 역시 그럴 것이다.

다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견뎌야 하는 고통과 무게는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다.

사람은 좋은 사람은 알아보지만 그 사람이 견디는 무게는 알지 못한다.

스스로도 알지 못할진데 타인이 어떻게 알까?

 

# 7.

그가 어떤 경험들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별 거 아닌 기억일 수도 있고 차마 꺼내기 힘들어 지워버린 고통일 수도 있고 쉽게 잊힐 것 같지만 깊은 흔적을 남기기도 할 것이다. 무심하게 흘리는 별 거 아닌 이야기가 타인인 내개 깊게 박히기도 하고 힘들게 힘들게 꺼낸 이야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날아가버리기도 한다.

상냥하고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상냥하고 좋은 사람이었는데

그것이 몹시 아프다.

그냥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은 사람이고 싶었다.

좀 쉽게 살고 쉽게 무뎌져서 흔한 그래도 편한 사람이었으면 했는데

자꾸 부끄럽고 미안하고 어쩔 줄 모르는 이 마음이 너무 무겁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마치 그 말을 하고 싶어서 일부러 어깨를 부딪치는 사람처럼”

형민이 미안하다는 마음을 미안하다는 말로 표현할 줄 알아서 그래서 미워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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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09-12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른희망님, 추석연휴 잘 보내고 계신가요.
가족과 함께 즐겁고 좋은 추석 보내세요.^^

푸른희망 2019-09-13 20:40   좋아요 1 | URL
늘 상냥하시고 부지런한 서니데이님~ 명절 잘 보내시고 계신가요? 늘 건강하시고 좋은 글 계속 기다립니다~^^
 
나는 지갑이다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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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여사의 공감은 이때도 여전했구나. 형사 목격자 탐정 피해자 그리고 살인자의 지갑들이 각자 주인의입장에서 이야기를 들려준다. 각자의 입장이 있고 맥락이 있다는 것도 중요하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목격자 형사 탐정이 되고 누군가는 살인자가 된다. 맥락은 공감하지만 행동은 책임이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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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무더위 - 살인곰 서점의 사건파일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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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길티플레져가 일본 장르소설 읽기인데.. 이 취미도 나이를 타는 모양이다. 피식피식 웃으며 가볍게 읽기 좋은 작가의 작품인데 자꾸 짜증이 나는건... 호르몬의 문제임이 분명하다.
이렇게 더워서는 인간의 머리도 대개는 이상해진다. 이 말이 딱 어울리는 독서경험. 책은 죄가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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