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빼앗긴 사람들 - 생체 리듬을 무시하고 사는 현대인에 대한 경고
틸 뢰네베르크 지음, 유영미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이책의 성격은 입문서이다. 구체적으로는 시계생물학에 관한 입문서이다. 그러나 이 말만으로 이책이 무슨 내용을 다루는지 짐작할 사람은 많지 않다. 시계생물학이란 말 자체가 낯설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계생물학이란 말 대신 바이오리듬이라 한다면 쉽게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이야 바이오리듬이라면 쉽게 누구나 아는 말이 되었지만 그 말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그 말을 다루는 분야인 시계생물학의 역사 자체가 짧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2차대전 직후가 이 분야의 탄생시점이었다. 그러다보니 서점을 뒤져보면 수면, 바이오리듬에 대한 책은 꽤 있지만 학문적인 기초개념으로서 바이오리듬이 무엇인지를 다루는 책은 드물다. 역사도 짧고 그 분야의 학자도 적은 마이너 분야이기 때문이다. 이책은 그 드문 책 중의 하나이다.

이렇게 말하면 아마 지레 겁이 날지 모르겠다. 엄밀히 말하면 생물학, 과학책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책은 과학책이다. 그러나 겁낼 필요는 없다. 학부생을 위한 교과서나 전문가 동료들을 위해 쓴 책이 아니라 교양서적이라 생각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책이 다루는 내용은 사실 우리가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밤에 잠자리에 들 때마다 점심 후 노곤할 때마다 누구나 경험하는 것들이다. 이책을 읽고 나면 왜 누구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데 누구는 반대인가, 왜 밤을 새면 피곤이 몇배가 되는가, 규칙적으로 자고 식사하는 것이 왜 건강에 (최소한 컨디션에) 좋은가 같은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있다. 경험적으로 그렇더라가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사람이 어떻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다는 답을 할 수 있다.

이책의 구성 역시 교과서처럼 기본개념을 설명하고 학설을 소개하는 식으로 된 것이 아니라 그런 실생활에서 누구나 경험하는 현상들을 설명하는 형식으로 구성된다.

예를 들어보자. 가장 일찍 일어나는 직업군을 들자면 학생과 교사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 시간표가 바람직한가? 저자는 아니라 말한다. 왜냐하면 생물학적으로 인간에게 맞지 않는 시간표이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청소년기에는 올빼미형이 대다수이다. 그렇기 때문에 밤 늦게까지 뭔가 하고 돌아다녀야 하는 것이 그 나이 때이다. 학교의 시간표는 올빼미들에게 종달새가 되라고 강요하는 것이란 말이다. 저자는 오전수업은 시간낭비라 말한다. 머리가 돌아가지 않고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시간에 억지로 책상에 붙들어 놔봐야 졸기만 한다.

저자는 학교시간표처럼 생물학적 인간의 리듬과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강요된 리듬이 차이가 날 때 일어나는 문제를 사회적 시차증이라 말한다.

사회적 시차증의 다른 예는 섬머타임이다. 섬머타임은 강제로 생물학적 리듬을 교란하는 것으로 제트기를 타고 다른 시간대로 간 것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이책이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감이 잡힐 것이다. 언제 자고 언제 먹을 것인가 언제 쉴 것인가 최상의 컨디션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실생활에서 누구나 결정해야 하는 문제들이다. 이책은 그런 결정을 어떻게 해야하는가에 대한 기본원칙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드물면서 재미있고 유용한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권태 - 그 창조적인 역사
피터 투이 지음, 이은경 옮김 / 미다스북스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미국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은 신세계의 낯선 환경을 견디는 것 못지 않게 “칼뱅주의 그 자체를 견뎌내기 위해서도 분투해야 했다. 자기혐오에 이를 정도의 자기반성과 끝없는 노력을 요구하는 칼뱅주의의 무게는 신도 개개인이 감당하기엔 벅찬 것이었다. 엄혹한 종교는 아이들을 겁에 질리게 했다. 17세기의 판사 새뮤얼 시월의 글에는 열일곱 살 난 딸 이야기가 나온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조금 뒤에 딸이 대성통곡을 했다. 아내가 이유를 물었지만 딸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딸이 입을 열고 한 말은 자기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지옥에 갈까 봐 너무 무섭다는 것이었다.’ 그런 불안은 사람들을 병들게 했다. 칼뱅주의는 고통받는 영혼에게 오직 하나의 위안거리를 주었는데 그것은 물질적 세상 속에서” (바버라 에런라이크) 자신이 쓸모있는, 구원받을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힘들게 일하는 것이었다. 베버는 그런 위안을 자본주의 정신이란 말로 포장했지만 그런 위안을 찾아야 하는 사람에겐 결코 위안일 수 없다.

더군다나 그런 식으로조차 자신을 증명할 수 없는 가정주부 같은 경우, “남은 것은 병적인 자기성찰이었다. 사람들은 소화불량, 불면증, 요통 등 신경쇠약 증세를 불러들이기에 딱 좋은 상태에 놓였다. 유행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몰라도 여성의 병약함은 강제된 나태함과 불필요한 존재라는 느낌에서 기인한 것이었고 실제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주었다. 수십 년 동안 병약함으로 고통을 겪었던 (핸리 제임스의 누이인) 앨리스 제임스는 유방암 판정을 받자 곧 죽을 수 잇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일상의 노동이 비정형적이며 많은 부분 여성의 노동과 겹치는 성직자들 또한 마찬가지엿다. 칼뱅주의를 믿는 영혼, 혹은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은 영혼은 진짜 일, 그러니까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자기혐오로 자신을 소진시킬 수 밖에 없었다.”

칼뱅주의의 음울함에 대한 반동으로 1860년대 신사상 운동이 막을 올린다. 신사상은 헨리제임스의 표현을 빌리면 “지옥불 신학과 관계된 병”에 대한 치료제였다. “신사상의 관점에서 보는 신은 냉담하고 무관심한 존재가 아니라 편재하는 전능한 정신 또는 영혼이다.” 신사상의 핵심은 “물질적 세계란 존재하지 않으며 있는 것은 오직 생각과 마음, 정신, 미덕, 사랑일 뿐이다. 따라서 질병이나 가난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이 세상의 실체는 해체되어 정신, 에너지, 진동으로 변하며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의식적 통제에 잠재적으로 복종한다. 이것이 크리스천 사이언스의 ‘과학’이다.” (바버라 에런라이크) 일체유심조니 고통은 마음에 달렸다는 말이다.

신사상운동은 ‘시크릿’으로 대표되는 미국식 성공학으로 변질된다: 세상은 마음 먹기에 달렸으니 돈도 성공도 멋진 애인도 내 마음에 달렸다는. 나중에 어떻게 변질되었든 신사상운동은 칼뱅주의가 정신에 가하는 고문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칼뱅주의는 그들의 머리를 ‘정신적 공허함, 고립감, 냉담함이라는 강렬한 감정’으로 채웠다.

그들이 겪은,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라는 압박감을 사르트르는 ‘우연(Contingency)’이란 말로 요약한다. 나와 세상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필연적 관계가 없으니 세상은 나에게 선의를 갖지 않으며 나에게 무관심하다.

사르트르의 ‘우연’이란 개념은 하이데거의 실존적 권태란 개념에서 빌린 것이다. “하이데거는 권태를 단순한 권태와 실존적 권태로 나눈다. 그는 개인이 어떤 환경에 의해 완전한 무관심의 상태로 빠졌을 때 실존적 권태를 겪는다고 말한다. 이런 개인은 공허함을 느끼고 주변 세상으로부터 어떤 의미 있는 것도 기대하지 못하고 또 받지 못한다.”

그러나 저자는 청교도들이 겪었던 만성적 권태를 실존적 권태라 할 수 있는가 의문이다. 청교도들이 겪은 고통은 분명 자신과 세계의 관계가 부서지는 경험이었고 그 경험은 사르트르가 말한 ‘우연’이란 개념으로 요약될 수 있다. “실존적 권태의 희생자들은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청교도들이 겪은 고통을 생각하면 자살은 현실적인 대안일 수 있다. 나와 세계의 관계가 깨진 마당에 자살이 대수인가? 그러나 헨리 제임스의 누이는 죽을 수 있다고 기뻐했지 자살을 하진 않았다. “권태와 자살의 상관관계는 실생활보다 문학적인 텍스트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듯하다.” 저자는 실존적 권태란 개념은 그 개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한다. “한 예로 영국의 소설가 그레이엄 그린은 젊어서 룰렛 게임을 자주 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는 무사히 오래 살다 세상을 떠났다. 자살은 창조적인 사람들에게서 더 흔히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실존적 권태 때문이 아니라 병에 걸리거나 노쇠해졌기 때문에 죽는다. 그렇다면 엠마 보바리는 어떨까?”

보바리 부인의 탈선은 권태 때문이다. ‘보바리 부인’은 “19세기 프랑스 북부 지방의 순응적이고 관습에 얽매인 부르주아 계층의 만성적 권태에 대한 반발 속에서 주인공 엠마를 그려낸다. 이 소설에서는 관습 타파를 향한 개인적인 열망을 엿볼 수 있다. 관습 깨기의 목적은 평탄하고 무미건조한 일상에 다시금 기복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녀는 할 일이 별로 없었다. 태어난지 얼마 안 된 딸마저 유모에게 맡겼기 때문에 엄마로서도 역할이 없었다”. 엠마에게 관습 타파의 목적은 그런 무위도식으로부터의 도피였고 그녀가 깬 관습은 성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따분한 삶 때문에 불륜관계를 시작했을지는 모르나 그녀가 자살한 이유는 치욕 때문이다. 실존적 권태의 희생자들은 자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살과 관계된 어떤 행위를 한다 하더라도 그건 대부분 글을 통해서다. 삶의 무의미함을 지적으로 깨닫는데는 죽음을 양산하는 고통이 따르지 않는다. 그런 깨달음이 고통스러운 우울증의 결과가 아닌 한, 그렇다.”

저자는 엠마가 겪었고 청교도들이 겪었던 고통을 만성적 권태라 말한다. 그 권태는 논리로 짜여진 실존적 권태가 아닌 생리현상이 원인이라 저자는 본다.

“동물을 키워봤다면 따분해하는 광경을 자주 목격했을 것이다. 동물들은 따분함을 느끼면 더 많이 잔다. 또 깨고 나면 놀이를 하거나 산책을 하자고 주인을 조르고 괴롭힌다. 만약 주인이 놀아주거나 산택을 시켜주지 않으면 풀 죽은 채로 집안이나 정원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하낟. 그 모습은 시무룩하니 축 늘어져 맥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동물이 느끼는 권태는 당연히 실존적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성격의 불안감이다.” 할 일이 없는 애완동물은 감금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감금 상태에서 그들이 느끼는 1차적 감정은 지금 상태에 대한 혐오이며 지금처럼은 좋지 않다는 불안감이다.

“감금 상태가 지속되면 동물은 우선 권태를 실질적으로 인식한다. 이는 관찰이 가능하다. 이후 좌절, 동요, 화 폭력 그리고 끝내는 우울증이 찾아온다. 감금된 동물은 권태에서 광적 반응 (동요하고 화를 냄)으로 그리고 우울 반응으로 옮겨간다.” 이 과정은 인간의 경우와 일치한다.

“권태는 분노에 찬 행동이나 광적인 행동은 물론 우울증도 일으키지 않는다. 그보다 권태는 감금, 고독감, 감각 상실이 지속되면서 시작되는 일련의 정서적 과정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라 할 수있다. 권태는 다른 여러 정서들과 함께 찾아온다. 권태는 이들 정서를 일으키는 원인이 아니다. 권태는 분노와 우울함이 차례로 나타느는 과정에서 첫번째로 나타나는 정서라 할 수 있다. 권태는 앞으로 나타날 보다 해로운 상태를 조기에 알리는 경고 신호이다. 권태는 태풍 전의 고요함 같은 건지도 모른다.”

권태와 우울함의 차이는 권태는 밖을 향하지만 우울은 안으로 자기 자신을 향한다는 것이라 저자는 말한다. 상황을 바꿔야 한다는 신호가 권태이고 그럴 수 없어 포기했을 때 우울로 넘어간다는 말이다.

청교도들이 겪었던 고통은 권태가 만성화되고 그것이 우울로 진행된 것이다. 사르트르가 우연이라 불렀고 하이데거가 실존적 권태라 불렀던 것은 정확히는 우울이 맞다고 저자는 본다.

“신의 계획은 무엇일까? 신의 뜻에 어떻게 순응하고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신은 내게 무엇을 원하는 걸까?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실존적 권태를 겪는 사람들과 같은 소극적이고 절망적이며 비관적인 태도로 이 착잡한 질문들에 반응한다. 루터교인인 한 동료는 그 느낌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루터교인들은 신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지. 그 사이에서 중재역할을 하는 성직자들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 하지만 그건 동시에 우리가 신을 대신해서 선을 행해야 한다는 말도 되지. 선을 행하는 건 그리 단순하지가 않아. 가끔은 막연히 선이 무엇인지 모를 때도 있어. 그럴 때면 무척 걱정괴도 불안해지지. 그럼에도 우리는 선을 행해야 할 책임이 있어. 아주 간단해. 그러나 쉽지는 않지.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그리고 천성적으로 어쩔 수 없이 무척 불안해하고 우울해 하는 거야.’”

이런 불안감은 ‘실존적 권태’란 말로 잘 요약된다. 그러나 저자는 실존적 권태는 “좌절, 식상함, 우울, 혐오, 무관심, 무감각, 갇혀 있다는 느낌 들의 서로 연관된 장애들을 두루 포함한 말’이라 본다. 다시 말해 만성적 권태로 시작되는 일련의 감정 메커니즘의 총합이라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저자는 본다. 그 시작은 단순한 권태다.

권태는 단순한 생리적 반응이며 오래가지 않는 기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만성적으로 권태를 자주 느끼는 사람은 근심과 우울증 내지는 약물, 알코올 중독에 빠지거나 분노와 공격적인 행동을 보일 위험이 크다.” 우리에 갇힌 동물과 그리 다르지 않은 메커니즘이다.

그러면 “권태가 18세기 계몽시대에 발견되었다”는 주장은 왜 나오는 것일까? 그런 주장은 “권태가 소외감이나 사회적 무질서라는 개념과 직관적으로 연되었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따라서 권태, 소외감, 사회적 무질서는 모두 근대의 독특한 현상이다.” 물론 그런 주장이 권태가 언제 어디서나 있었다는 것을, 권태가 생리적인 메커니즘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18세기 이전까지 권태는 기껏해야 주변적인 경험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이성의 시대에 들어서야 개인의 지위가 중요해졌다. 이 시기에는 신탁 정치, 독재젗치, 전통적인 특권, 그리고 집산주의 전통의 맹목적인 고수에 도전이 가해졋다. 그러다보니 이 소용돌이치는 사회적 변화 속에서 개인과 개인의 감정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어 권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졋다.” 그리고 “후기 근대사회에 접어들어 여가 생활이 늘어나고 인간의 행복할 권리가 부각되었으며 기독교가 쇠퇴하는 대신 세속화가 뚜렷해졌다. (이를 ‘서양 문명 한가운데서 커져가는 형이상학적 허공’이라 칭하기도 한다) 또 개인의 권리와 더불어 내적 경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권태의 풍부한 토양이 마련된 것이다. 여가는 늘었지만 공동체가 무너지면서 개인의 소외감이 커졌고 그 시간을 제대로 보낼 책임은 개인이 모두 져야 했다. 그리고 증상에 대한 진단이 권태라 설명되고 나면 권태는 “’무의미함의 흔적’이 된다. 그 안에서 문제의 본질이 흐려진다. 분노에 이어 떠올라 근심으로 치닫는 권태 안에서 인간은 당연히도 모든 삶이 공허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보면 실존적 권태는 허깨비는 아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하면 어떻까? 실존적 권태라는 것이 있다면 정말로 잇는 것이다. 물론 나 같은 회의론자들은 실존적 권태를 각종 장애를 두루 나타내는 하나의 용어 내지는 그저 상대적으로 사소한 현상으로 여기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권태는 보편적인 경험이다. 대부분의 시대에서 사람들이 권태를 느껴왔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권태는 대개 이로운 정서다. 하지만 만성적인 단계로 넘어가면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장자다 - 왕멍, 장자와 즐기다
왕멍 지음, 허유영 옮김 / 들녘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이책은 장자 내편에 대한 주석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주석서와는 다른 구성을 보인다. 이 책의 구성은 장자 본문을 따라가면서 본문에 대한 코멘트를 더하는 형식이다. 그러나 그 코멘트는 김용옥을 떠올릴 정도로 상당히 장황하다. 김용옥을 닮은 것은 양만이 아니다. 내용도 그렇다. 표지를 보면 ‘왕멍, 장자와 즐기다’란 말이 있는데 광고문구로 적당히 붙인 말이 아니라 정말 그렇다. 저자는 장자라는 책을 해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장자라는 저자를 읽어내려 한다.

근대 이전에 성립된 주석서들은 자신의 의견을 자제하고 문구 자체의 의미를 밝히는 형식을 취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석은 자구 대 자구로 본문이 한줄이면 그 아래 두줄로 축자적으로 붙이는 형식이다.

그러나 저자는 책 자체의 글자 하나 하나에는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자신이 장자라는 책에서 무엇을 읽어낼 수 있는가에 더 관심이 있다. 대만이나 본토에서 나온 책들을 보면 본문이 있고 그 다음에 백화 번역이 달린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형식을 취하지 않는다. 그냥 본문을 달아놓고 번역을 하는 대신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엄청난 의역을 한다. 그리고 나서 엄청난 길이로 ‘설’을 늘어놓는다. 게다가 본문을 전부 싣지도 않고 자신의 ‘설’로 연결이 되면 본문을 생략하기 까지 한다. 그리고 그 내용은 장자라는 책 자체보다는 왜 장자가 이런 말을 했는가를 묻는다.

새로운 형식이다. 분명 이책의 체제는 내편 6편의 주석 형식이다. 그러나 그 형식과는 달리 이 책의 내용은 장자라는 책에 대한 전반적인 입문서에 가깝다.

그러면 저자가 읽어낸 장자는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저자가 읽어낸 장자의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이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것은 루루티아(ルルティア)의 음악이다.

20세기 음악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면 아마도 일렉트로니카의 등장이 아닐까 싶다. 일렉트로니카는 신디사이저가 보급된 1970년대에 성립했다. 지금은 공기같은 존재가 되어버렸기에 간단하게 키보드라 불리는 신디사이저는 음악에 혁명을 일으킨다. 구체적으로는 바로크 음악의 부활이었다.

클래식이라 하면 구체적으로 하이든 이후의 고전파를 말한다. 고전파 이후의 음악은 고전파에 의해 정립된 작곡논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고전파 이전의 바로크 음악과 고전파 음악은 사운드 레이어의 구성법이 달랐다.

서양음악의 사운드 레이어는 4개로 이루어진다: 리드, 백그라운드, 레퍼런스, 패턴. 밴드 구성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리드는 멜로디 레이어로 보컬이나 기타 등의 멜로디 악기를 말한다. 백그라운드는 리드 레이어의 화음을 연주하는 레이어로 역시 기타나 피아노 등의 화음악기와 백코러스를 말한다. 레퍼런스는 토닉과 기준이 되는 레퍼런스 화음의 레이어로 베이스 기타를 말한다. 패턴은 드럼이나 신디사이저로 어택감이나 공간묘사를 담당한다.

고전파 음악에선 리드 레이어를 중심으로 일치된 진행을 만든다. 그러나 바로크 음악에선 4개의 레이어가 서로 독립된 진행라인을 갖는다. 그런 진행을 대위법이라 한다. 댄스뮤직으로 출발한 일렉트로니카는 바로크적 진행을 부활시킨다.

댄스홀에선 화음진행이 아니라 리듬이 중요하며 대위법적 진행이 더 어울린다. 결국 일렉트로니카에선 레퍼런스와 패턴 레이어의 진행을 음악의 중심으로 삼아 분위기와 리듬감을 강조하게 된다. 4개의 레이어가 일치된 협화음적 진행이 아닌 대위법적 진행을 갖는 바로크적 논리는 80년대 드림 팝, 노이즈 팝 90년대 트립합, 고딕 메탈의 혁신을 일으켰다.

멜로디 진행과 독립된 대위법적 진행으로 모호해진 공간과 사운드 윤곽은 불안정한 느낌을 만들어 앰비언트와 같이 꿈꾸는 듯한 느낌을 연출하거나 스칸디나비아 메탈처럼 슬픔, 분노 등 부정적 정서의 배경을 만드는데 적합하다.

보통 루루티아의 음악를 '환상적이다' '신비감과 광기가 느껴진다'고 한다. 이런 인상은 바로크적 논리의 연출효과이다. 루루티아 음악의 의미는 곡의 분위기가 만드는 이미지이다. 루루티아의 음악에서 우선되는 것은 사운드가 만드는 '분위기'이며 분위기는 레이어의 대위법적 관계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바로크적 논리의 문제는 멜로디 라인이 거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댄스뮤직이면 모를까 아시아에선, 거의 멜로디만 듣는 아시아인들에겐 그런 음악은 호소력이 없다.

루루티아 음악의 특징은 바로 바로크와 고전파의 절충이다. 보컬이 아예 없거나 존재감이 약한 앰비언트나 스칸디나비아 메탈과 달리 보컬의 존재감이 강하고 멜로디가 아름다운 루루티아 음악의 정서는 보컬과 하위 레이어의 긴장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루루티아 음악의 매력 역시 그 긴장관계에서 나온다.

작곡가가 아닌 보컬로서의 루루티아는 특이하다. 그녀는 숨을 내쉬고 바로 삼키듯, 맑고 가는 달콤한 음색으로 언제나 소곤거린다. 웅얼거리듯 소곤거리는 것은 지금, 여기의 사건보다는 여기가 아닌 과거에 일어난 일을 회상하는데 적합하며 자기주장이 약하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것은 사라져간 것에 대한 아픔과 슬픔이며 깨질 것 같은 덧없는 아름다움이다. 그녀 음악의 신비감은 이러한 보컬의 정서에 하위 레이어의 윤곽이 불분명한 텍스쳐가 대비되어 만들어진 효과이다. 그러나 바로크적 텍스쳐가 만드는 분위기에 멜로디 라인의 통일성이 더해져 만들어지는 아름다움은 그녀가 원용한 앰비언트나 스칸디나비아 메탈에선 보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그 통일감은 환상이다.

루루티아 음악의 정서와 사운드는 스칸디나비아 메탈에 가깝다. 시끄럽다는 말이다. 메탈의 정서가 그렇듯 루루티아 음악의 배경은 탐욕과 위선, 광기, 잔인한 폭력의 세계이며 그런 세계에 대한 분노, 슬픔, 절망, 좌절을 표현한다.

보컬과 백그라운드 레이어는 세계에 대한 정서를 멜로디로 표현하고 부정적 세계는 레퍼런스와 패턴 레이어의 어두운 노이즈로 표현한다. 루루티아 음악의 의미는 레이어의 긴장관계에서 만들어진다. 문제는 세계에 대한 정서를 표현하는 멜로디 레이어, 즉 보컬이다.

루루티아는 속삭인다. 보통 팝에서 whisper라 말하는 것으로 보사 노바에 잘 어울리지만 하위 레이어가 두껍고 시끄러운 메탈에선 묻혀버리는 목소리이다. 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해법은 프로듀싱이다. 바로크적 텍스쳐에 묻히지 않게 편집한다는 말이다. 라이브로 들을 수는 없는 음악, 그것이 루루티아의 음악이며 루루티아의 음악이 환상인 이유이다.

저자는 장자의 세계가 그와 같은 환상이라 본다.

장자의 첫편은 소요유이다. 논어의 학이편 1장이 그렇듯 중국 고전에서 처음에 오는 장은 그 책 전체를 규정한다. “장자가 주는 첫인상은 ‘소요’라는 두 글자로 함축할 수 있다. 장자는 일생동안 줄곧 소요에 이르는 길, 즉 인간 내면의 초탈과 해방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소요라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정신 상태이자 개인이 사회와 집단의 관념적 구속에서 벗어난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내면 정신세계의 자유와 독립을 의미한다. 이것은 근현대에 서양에서 들어온 개인주의 관념과는 차이가 있다. 후자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개인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중국의 소요는 사회와 집단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가치판단에 대한 주관적인 해방 또는 일시적인 망각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주관적인’ 해방과 ‘일시적인’ 망각이 장자가 지금까지 읽혀온 이유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그 해방과 망각은 아Q정신과 닮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살다보면 실패할 때도 있고, 패배할 때도 있기 마련이다. 이유 없이 구박을 당하고 모욕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런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중국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인 루쉰(魯迅)의 소설 『아Q정전』에 나오는 주인공 아Q는 그런 상황에서 매우 독특하게 대처한다. 시골에서 날품을 파는 아Q는 마을 사람들에게 자주 멸시당하고 이유 없이 맞기도 한다. 현실에서 그는 늘 패배자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당한 멸시와 패배를 아주 간단한 방법을 통해 승리로 바꾸어 버리고, 마음의 평정을 회복한다. 아Q가 애용하는 방법은 세 가지다. 하나는 자신을 높이는 것이다. 이유 없이 자신을 때린 사람보다 자기가 훨씬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자신처럼 지체 놓은 사람이 하찮은 인간들을 상대해 무엇 하겠느냐고 생각한다. 무서워서 상대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고 생각하고는 자신의 패배와 굴욕을 잊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앞의 방법과 반대로 자신을 완전히 낮추는 방법이다. 자신은 형편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모욕을 당하거나 그런 패배를 당할 만 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Q가 애용하는 세 번째 방법은 자신이 당한 패배와 모욕을 자기보다 약하고 못한 존재에게 전가시키는 방법이다. 강자에게 뺨 맞고 약자에게 분풀이 하는 것이다.
소설에서 아Q가 늘 얻어맞고 모욕을 당하면서도 늘 즐겁고 낙천적인 것은 이처럼 현실의 패배와 굴욕을 그 나름의 조작법을 통해 정신적인 승리로 전환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Q는 늘 패배하지만 늘 승리자이다.” (이욱연)

장자는 어렵다. 그 어려운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배운 사람 그것도 엄청나게 배운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2천년이 넘도록 읽혀온 이유는 장자가 정신승리법을 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실에서 패배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선 한없이 작아질 수 밖에 없는 “가련한 사람들, 특히 글 읽는 지식인들은 장자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거대함과 웅대함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정신승리법의 최고봉이 아닌가. 정신적인 승리가 아니라면 어디에서 이렇게 확실하고 영원한 승리를 얻을 수 있겠는가? 춘추전국시대부터 그들은 세상에 나아가 쓰이지 못하면 한평생 허송세월하고 어저다 운이 좋아 높은 벼슬에 앉는다 해도 느닷없이 재앙이 닥쳐 하루아핌에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곤 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여러 차례 남에게 모함을 당하기도 하고 큰 뜻은 품었으나 재주가 변변찮고 운이 없는 탓에 가난과 실의에 빠져 시름겨운 한세상을 살다 가기도 했다. 현실이 이러할진대 온전히 정신적이고 완벽하게 무조건적인 승리조차 얻을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장자가 기재이고 독특한 논리로 훌륭한 글을 썼다 해도 그의 글을 읽다보면 ‘아Q 정신’이 응집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울 것은 없는 말이다. 중국혁명 직후 장자는 철저하게 부정당했다. 중체서용이니 떠들며 너희가 힘은 셀지 몰라도 우리는 정신적으로 더 고귀하는 식으로 현실의 패배, 정신의 승리를 말하며 중국을 말아먹은 아큐정신의 궁극이라는 논리였다.

물론 지금까지 그런 논리가 살아남지는 않았다. 눈 감고 아옹하는 아Q가 되기에 장자는 지나치게 똑똑한 사람이었고 현실을 비참할 정도로 철저하게 알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면 장자가 보았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는가?

“노담의 제자 백구가 제나라에 도착하자 형벌을 받아 기시된 시체를 보았다. 시체를 밀어 바로 누이고 조복을 벗어 덮어주엇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곡하며 말했다.

오 그대여! 천하에는 피살자가 많은데 그대가 먼저 당했구려! 말끝마다 도둑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하지만 영욕으로 핍박하니 이런 병통이 나타났고 재화가 한곳으로 모이니 이런 쟁투가 나타났다. 지금은 사람을 몰아 세워 병들게 하고 사람을 모아 싸우게 하고 사람의 몸을 곤궁하게 하여 한시도 쉬지 못하게 하니 이런 지경에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재물을 위해 간계를 부리고 지혜롭지 못하면 어리석다 하고 어려운 일을 시키고 감내하지 못하면 죄를 주고 무거운 임무를 맡기고 다하지 못하면 벌을 주고 먼 길을 가게 하고 이르지 못하면 죽인다. 그러므로 부득이 민(民)은 지혜와 힘을 다해 꾀로 죄를 모면하려 한다. 무릇 힘이 부치면 꾀를 쓰고 지혜가 부족하면 도둑질을 하는 것이다. 도둑이 횡행하는 것은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옳은가?” (장자 잡편 칙양)

이런 세상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제자백가 모두가 물었던 질문이다. 제자백가의 아버지라 해야 할 공자는 성인의 질서로 돌아가자(복례 復禮)를 말하면 지배층의 질서를 바로잡아 천하를 바로잡으려 했다.

그러나 논어 미자편의 5장에서 7장까지 나오는 은자들은 공자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탁한 물이 도처에 도도하게 범람하는데 누가 바꿀 수 있겠는가? 그대는 나쁜 사람을 피하는 사람을 따르는 것보다 세상을 피하는 사람을 따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하려고 하는’ 사람이란 은자들의 조롱에 대해 공자는 이렇게 자신을 변호햇다. “벼슬하지 않는 것은 도리가 없는 것이다. 어른과 어린이의 질서를 폐기할 수 없는데 군주와 신하의 관계를 어떻게 폐기할 수 있겠는가? 자기 한 몸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중요한 사회관계를 파괴한 것이다. 군자가 벼슬하는 것은 의무를 이행하기 위한 것이다. 도의가 행해질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다.” (리쩌허우의 해석)

공자와 은자들의 차이는 세상이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엿다. “새나 짐승과 함께 살 수 없지 않느냐? 사람의 무리가 아니면 누구와 함께 하겠느냐? 천하가 태평하다면 내가 바꾸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기에 인간으로서 신념을 지키기 위해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의지를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말에서 공자 자신이 항상 말한 사람에 대한 사랑 또는 사람다움이란 뜻인 인(仁)의 의미가 드러난다. 그러나 은자들은 동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공자는 사회의 근간인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군주와 신하는 오늘날 상급자와 하급자라는 직무상의 관계이고 그 원칙은 의(義), 즉 공평하고 정직하며 공적인 일을 받들고 법을 지키며 편을 들어 사사로움을 도모하지 않으며 윗사람을 속이거나 아랫사람을 억누르지 안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구별이 있다는 것은 가정 중심의 가치관이다. 사랑에 그치지 않고 은혜를 베풀어서 피차에 언제나 돕고 이끌어주며 관용하고 양해하며 어른을 높이고 어린이를 어루만져주는 것” (리쩌허우) 공자가 하려한 것은 그런 당연한 도리가 천하에 행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자와 그를 조롱한 은자들이 살던 시대는 그것이 당연할 수 없는 시대엿고 시대가 그렇다는데 공자와 은자들은 이견이 없었다.

논어에서 공자는 자신을 조롱하는 은자들을 존경했다. 그러나 은자들은 그런 공자를 조롱하며 공자가 되돌아가자는 성인의 질서(예)를 조롱했다. 그 은자들은 도가 계열의 선구였을 것이다.

그 은자들의 맥을 잇는 노자는 전쟁과 살육, 착취와 억압은 권력의 본성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권력이란 것 자체가 없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러나 “노자는 사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부정하지 않았다. 입신출세를 철저하게 부정한 것은 장자가 처음일 것이다.” 치국의 도를 말하던 제자백가와 달리 장자는 “완전히 상반된 길의 극단에 있었다. 그는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노력을 모조리 부정했다. 왕후와 귀족을 부정하고 학문을 추구하고 논쟁하는 것 자체도 부정했다. 그가 자기 자신과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모델로 삼은 것은 왕후도 제자백가도 아니요 곤이나 붕새, 이백이나 베토벤 같은 천재도 아니었다. 바로 작디작은 뱁새와 두더지였다. 천재형 지식인들이 정신적 우월감을 느끼며 세상을 업신여기고 잘난 척했다면 장자는 자신에 대한 기준을 보이지도 않을만큼 낮춰서 뱁새와 두더지 같은 마음으로 세속의 명리와 권력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소요와 자유를 추구했다. 그는 밖에서부터 먼저 출발하지 않고 내부에서 먼저 모든 명리를 부정하고 세속에서 멀리 떨어져 화를 피하고 근심을 멀리했다. 세속에서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얻기 위해 추구하는 모든 수단을 멀리했다. ‘자기 자신’의 편안함과 자유로움, 만족감, 다른 사물과 환경에 대한 무관심 외에는 그 어떤 감정도 인정하지 않았다. 장자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행동한 것은 자기 앞에 놓인 현실에 대한 무력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자의 소요는 절망이다.

공자가 천하를 유세한 것은, 도를 다시 세우려 한 것은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었다. 장자를 읽어보면 장자는 유가계열에서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공문에서 장자는 출중한 학생이었을 것이다. 그의 글에 엿보이는 “강한 자신감, 강한 자부심, 강한 사명감”은 천하를 논하는 유가 선비의 태도이다. 주자를 비롯한 송유들은 노자는 싫어해도 장자는 좋아했다. 자신들과 뿌리가 같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 나왔을 때 천하는 무도(無道)했고 그가 설 자리는 없었다. “알아주는 이가 없어 번번이 실패했고 결국엔 자살과 모험, 정신적 해탈의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을 것이다. 막다른 길에 몰리면 사람은 위험한 모험을 하든가 자신의 지혜를 숨기고 어수룩한 것처럼 핻동하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내편 전체를 통해 장자가 바라보는 공자에 대한 시선은 따뜻하다. 그러나 공자의 주장에 대해선 냉정하다. 공자의 논리에 대한 장자의 비판은 “결코 추상적인 부정이 아니라 그것이 당시의 시대에 부적합하다고 생각해서 나온 것이다. 용기는 가상하지만 비극적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결과를 분명히 알 수 있는 형국에서 한발 물러설 줄 모르니” (왕보) 지혜라 할 수 없다.

흔히 불난 집의 비유를 들어 공자와 장자의 차이를 설명한다. 이웃에 불이 났으면 물 한 통 가져다 뿌린다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공자는 마땅히 뿌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도리니까. 그러나 장자는 그것은 의(義)도 인(仁)도 아니라 말한다. 그것은 동정일 뿐이며 자기만족일 뿐이라는 것이다. 장자라면 아무 도움이 되지 않으니 그냥 앉아 있겠다고 말한다. 장자는 냉정하다. 이 차가움을 장자는 ‘무정(無情)’이라 말한다. 대붕이 되어 소요하는 것은 무정해야만 할 수 있다. 저 하늘 높은 곳에서 인간세의 자잘함은 보이지 않을 때 소요는 가능하다.

무정을 말할 때 친구 혜시는 정(고대 중국에서 정은 감정을 말한다)이 없는 인간을 인간이라 할 수 있는가 논박한다. 혜시가 옳다.

이웃집에 불이 났는데 물 한 통 뿌리는 수고도 하지 않는 사람은 인(仁)하지 않다. 인(仁)은 손익계산이 아니라 사람이면 마땅히 느끼는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공자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인(仁)할 수 있고 한 것은 그것을 말한다. 장자는 공자의 말을 잘 알고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仁)해서는 천하의 불을 끌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불을 끄려는 마음 자체를 없애야 한다. 사람이 아닌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무정이란 말은 소요란 말은 철저한 절망의 표현이다.

언뜻 장자의 소요, 좌망, 무정 등은 불교의 해탈, 무욕, 무아 등과 닮았다. 실제 불교가 처음 중국에 들어왔을 때 중국인들은 장자의 개념을 빌려 불교를 이해하고 불경을 번역했다. 그리고 선불교는 도가식으로 불교를 이해한 결과였다.

그러나 장자의 소요를 불교의 열반이라 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의문이다. 그렇게 이해하기에는 장자의 논리에 자기모순이 많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다투지 않고 논쟁하지 않을 것을 주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논쟁하고 다투었고 한편으로는 마른 고목 같은 몸과 식은 재 같은 마음으로 홀로 앉아 세상의 모든 외물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 완전히 잊어버리는 ‘좌망(坐忘)’을 주장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모든 걸 꿰뚫을 듯 날카로운 기세와 현란한 언변, 웅대한 기백을 과시하며 자신을 드러내 자랑했다. 이런 글이 마른 고목 같은 몸과 식은 재 같은 마음에서 나왔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자기과시욕과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고 열정으로 잔뜩 격앙된 상태라야만 이런 글을 쓸 수 있다. 장자는 세속을 거부하고 거듭 반복해서 초월하고 또 초월하는 이야기를 한다. 그 이야기들에0서 수신제가평천하라는 이상을 하찮은 것으로 조롱하고 비웃었고 입신출세하려는 이상을 부정했다. 그랬던 장자가 왜 뒤에서는 ‘응제왕’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제왕과 유토피아에 대해 논했단 말인가? 그의 논리대로라면 비(非) 제왕과 무(無) 제왕을 쓰든가 최소한 망(忘)제왕을 썼어야 하는 게 아닌가?”

결국 장자의 소요란 자발적인 은퇴가 아닌 강제된 유배였다. 유배된 장자가 쓴 글을 저자는 ‘처연한 아름다움’이라고 한다. 천하 속에서 천하를 떠나는 장자의 글은 ‘사변적 기능보다 심미적 기능이 훨씬 강하다. 이것은 철학이 괴로운 처지에 빠진 인간을 위해 찾아낸 아름잡지만 힘없고 속이 텅 비어 있는 열매와도 같다.” 장자의 글은 “훌륭하지만 읽는 이를 탄식하게 하고 감탄하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씁슬한 건 어쩔 수가 없다.”


평점 4.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울지 마, 팔레스타인
홍미정.서정환 지음 / 시대의창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시리아 리바넨시스 혹은 마운트 레바논이라 불리는 지중해 동부 해안은 천년이 넘도록 12개 이상의 종파와 인종과 신조의 온실 노릇을 해왔다. 마치 마법이 지해하는 듯한 완벽한 온상이엇다. 레반트의 도시들은 기본적으로 상업에 중심을 두고 잇었다. 거래는 명료한 계약서에 기초하여 이루어졋고 상업을 가능하게 해주는 평화를 숭상했다. 서로 다른 사회집단들 사이에도 긴밀한 소통이 유지되었다. 온갖 종파의 기독교도들, 모슬렘, 드루즈교도, 소수의 유대교도 등이 이 지방이 품고 잇는 종파들이다. 이곳에서는 서로 관용적 태도를 베푸는 것이 극히 당연하게 여겨졌다. 발칸 지방 사람들은 목욕하길 꺼리며 툭하면 싸움질이니 우리는 얼마나 개명한 사람들이냐고 나도 학창시절에 교실에서 배운 기억이 있다. 이 평평상태는 언제까지나 계속될 듯햇고 역사는 개선과 관용의 세계로 나아가는 듯이 여겨졌다.

이 지역은 세계 모든 곳을 향해 열려 있었고 극히 세련된 생활양식과 활발한 경제, 오늘날의 캘리포니아처럼 온화한 기후를 자랑했으며 지중해 저 멀리 높은 곳의 눈 쌓인 풍경도 볼만했다. 스파이, (금발) 창부, 작각, 시인, 마약상, 모험가, 도박 중독자, 테니스 선수, 아프레 스키 애호가, 상인 등등 온갖 인간들이 모여들어 이곳의 문화를 형성햇다. 이 지역은 ‘낙원’일 뿐 아니라 흔히 하는 말로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기적의 교차점이기도 햇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블랙 스완’)

유대인들이 몰려오기 전 이웃인 팔레스타인 사람들 역시 그런 문화에서 살았고 아직도 그들은 그런 문화를 지키며 산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이슬람이란 이성과 갈등하는 신화도 아니엇고 욕망과 갈등하는 도덕도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권해야 할 선도 아니고 스스로를 옭아매야 할 규범도 아니었다. 하루 다섯번 꼬박꼬박 기도하고 금식하는 이가 있었는가 하면 이런 것을 거부하고 자유롭게 사는 사람도 있다. 사마라 아버지가 전자의 경우라면 사마라는 후자다. 사마라는 무신론자다. 라마단 기간에도 집에서 요리를 해 먹는가 하면 술과 여자를 두루 좋아했다. 그러나 종교 문제로 아버지와 약간이라도 불편했던 적은 없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햇고 아들과 맞담배를 피우면서 밤 늦도록 아들의 결혼에 관해 얘기를 나누곤 했다. (레바논에서처럼) 팔레스타인에서는 이슬람교와 기독교도 공존한다. 종교가 문제시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관용의 문화는 레바논처럼 높은 교양수준을 만들었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지금도 그런 전통은 높은 교육수준으로 나타난다. “팔레스타인의 교육수준은 주변 아랍국보다 훨씬 높다. 세계문맹률 순위에서 시리아, 이집트 등은 모두 100위권 밖으로 밀려나 있지만 팔레스타인은 문맹률 8.9%로 79위를 차지한다. 팔레스타인에는 비르제이트, 알쿠즈, 알나자, 베들레헴, 헤브론 대학 등 여러 대학이 있는데 이중 비르제이트와 알쿠즈 대학은 각종 순위조사에서 중동지역 10대 대학에 들 정도로 학술적 성과가 높은 곳이다.”

0%에 가까운 문맹률을 자랑하는 한국사람들에겐 그리 대수롭지 않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경제를 생각하면 이는 위업이다.

“헤브론 공업지대를 지나면서 그곳에서 가장 큰 공장이 어디인지 수소문한 끝에 노동자 47명을 고용하는 알샤르크 전기회사 공장을 찾아간 적이 있다. 전선과 철사, 용접봉 따위를 제조하는 이 소박한 공장의 관계자는 ‘우리 공장이 2008년에 무려 800만 셰켈(약 24억원)의 매출을 올렸다’며 자랑했다. 이 정도면 팔레스타인에서는 대기업에 속한다.

2009년 현재 국내총생산이 128억 달러, 1인당 GDP는 2,900달러 정도다. 공장도 없고 중동에서는 흔한 석유도 나지 않는 팔레스타인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먹고살까. 가장 정확한 표현은 딱히 먹고살게 없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경제가 이 모양인 것은 이스라엘 때문이다. “1993년 오슬로 협정이 체결된 이후 서안과 가자지구의 경제적 통제권은 이스라엘이 쥐게 되었다. 즉 팔레스타인에서 공장 하나를 짖는다든지 원료와 완성품을 수입, 추술하는 데 일일이 이스라엘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국의 안보를 이유로 거의 허가를 해주지 않았고 이 때문에 팔레스타인 경제가 악화되었다. 오슬로 협정이 체결된 후 3년 동안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에서 실업률이 2배 가까이 늘었고 1인당 소득도 20%나 줄었다. 지금 팔레스타인 경제는 더 나빠졌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농지를 강제로 수용하여 점령촌을 확장하는가 하면 수원지마저 독차지했다. 팔레스타인과 외국, 가자-서안, 서안-동예루살렘 간의 사람과 물자 이동도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

저자들은 말하지 않지만 이스라엘의 경제파괴는 오슬로 협정 이전으로 올라간다.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은 공식적으로 팔레스타인들을 추방하고 그들의 땅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어떤 자원도 인프라도 없는 가자의 좁은 땅으로 쫓겨간 팔레스타인 난민들에게 미래는 밝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그들을 쫓아낸 것으로도 부족한지 그들이 쫓겨간 곳까지 쫓아가 그들의 어두운 미래를 더 어둡게 만들었다.

이스라엘은 성경구절처럼 팔레스타인인들을 “장작을 패고 물을 긷는 사람”으로 만들어 값싼 노동력으로 활용했고 이스라엘 상품의 소비자로 만들었다. 이스라엘은 지역산업의 발전을 방해하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에 경제적으로 종속되게 만들었고 정치적 독립의 경제적 기반을 제거했다.

가자는 제국주의의 식민지배가 사라진 세계에서 고전적인 식민착취가 부활한 예이다. 점령지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착취의 도구이자 상징이었다. 2005년 가자 인구 140만 중에서 8천명에 불과한 유대인들은 토지의 25%, 경작지의 40%를 차지했고 수자원의 대부분을 통제했다. (이상 The Economist의 기사 요약)

“그동안 이스라엘은 ‘점령촌 보호’를 명분으로 팔레스타인 전 지역에 분리장벽을 세우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땅을 강제로 빼앗았다. ‘Settlement’를 정착촌으로 옮겨 싣는 언론도 있는데 그보다는 정령촌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하다.

“점렴촌에 사는 유대인들은 쉽게 말해 극우주의자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0.1%나 될까 말까 한 이들은 팔레스타인 전체를 자신들의 땅으로 믿습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옛날부터 서안지구의 아무 곳에서나 막무가내로 컨테이너 같은 것을 가져다 놓고 먹고 자기 시작했어요. 이스라엘 정부에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신변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하고요. 이스라엘 정부가 군대를 보내 경비를 서 줍니다. 점점 사람들이 모여들어 진짜 집과 기반시서을 건설하게 되죠. 기왕에 군대가 있으니 군사시실도 만들고요. 그러다보면 팔레스타인인들은 접근이 금지되는 겁니다. 혹시 그쪽을 취재하실거라면 점령촌 사람들을 아주 조심하셔야 합니다. 외국인들도 안중에 없는 사람들이니까요.”

가용자원이 안 그래도 적은 곳에서 생산수단을 뺏긴 팔레스타인인들은 절대적 빈곤과 상상할 수 없는 궁핍에서 살아야 했다. 80%는 하루 2달러가 안되는 돈으로 살아가야 했다. 아직도 가자의 생활조건은 문명에 대한 모욕으로 남아 있다. 이스라엘의 지배가 끝나지 않는 한 팔레스타인의 미래는 없다.

경제의 목을 죈 이스라엘의 지배 덕분에 “팔레스타인 역제는 원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잇다. 팔레스타인 난민구호시구, 유엔개발계획 같은 유엔 산하원조기구와 세계은행, 적신월사 등 각종 경제, 인도주의기관에서 팔레스타인에 지원하는 돈은 매해 10억달러를 넘는다. 예르ㅜㄹ 들어 팔레스타인의 교사와 의사들은 난민구호사업기구가 아니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설립한 학교나 의료원에 출근한다.유엔기구와 유엔산하기관 외에도 라말라 시에만 약 1700개의 정치, 사회, 교육, 여성, 문화 등 각 분야 NGO들이 설립되어 있어 일자리를 만들어내는데 크게 기여한다. 팔레스타인에서 NGO는 한국의 시민사회단체와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대기업만큼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장이다.”

그러나 원조는 팔레스타인의 자립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원조는 “기간산업 대신 식량, 의료, 교육 부분에만 직접적으로 편중되게 지원함으로써 그 자원의 배분을 놓고 팔레스타인 내부가 분열되게 조장했다. 또한 원조 이후 그 돈이 어디에 쓰이는지 책임감있게 감시하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자치정부의 부패를 눈감아줌으로써 하마스 정권이 등장하는데 일조햇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경제를 인공호흡기를 떼어내면 바로 사망하는 원조경제체제로 묶어두었고 정치 군사 외교적으로 팔레스타인을 고립시켰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이런 현실에서 ‘교육은 받아서 무엇 하나’하는 뿌리 깊은 회의와 무기력감에 젖어 있다. 팔레스타인 교육에 관한 자료를 찾다가 한 팔레스타인 교사가 쓴 글을 발견하고는 먹먹했던 일이 떠오른다. ‘학생들에게 꿈을 이룰 수 잇다는 ‘희망’을 말해야 할 때 교사로서 가장 힘들다.’”

이런 현실에서 저항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최소한의 몸부림이며 종교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생존권의 문제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최소한의 생존을 말할 뿐이다. 여전히 그들에겐 레반트의 전통인 관용은 살아있다.

“나는 팔레스타인이 이슬람 근본주의가 성장할 수 잇는 폐쇄적인 곳이 아님을 확신하게 되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신을 존경하고 사랑하듯이 그 신이 창조한 모든 다른 사람, 다른 종교도 종중하고 열린 마음으로 대했다. 자신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유대인이라고 예외로 두지 않았다. 내가 만난 대다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쫓아낸 뒤 자신들만의 국가를 세우는데는 관심이 없었다. 이슬람교도든 기독교인이든 ‘형제처럼 같이 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팔레스타인 땅을 주었노라 계속 우기고 있다. 네타냐후 총리는 공공연하게 ‘이스라엘은 유대국가’라고 선언하고 다닌다. 이처럼 오히려 자신들의 종교가 정통이고 우월하다는 쪽, 다른 종교를 인정할 수 없다는 쪽, 자신의 국민들이 타인을 핍박하는 데 마약과 같은 종교적 동기를 활용하는 쪽 국가 전체가 종교적 근본주의에 기운 쪽은 이스라엘이 아닐까.”

구약에서 말하는 신이 약속한 땅이란 주장 자체도 문헌비평학적으로 보면 의심스런 주장이다 (신의 역사 1 리뷰를 참조) 그러나 그 주장을 인정하더라도 시온주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 유대인이 그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온주의는 그야말로 신화에 불과하다. 현재 유대인 대다수는 바빌론 시대나 로마제국 기대에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했다고 전해지는 유대인과는 혈통적으로 관련이 없다. 현대 유대인들은 중세시대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 즉 기원후 6세기에 아라비아 반도 남부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힘야르 제국의 힘야르족과 8세기 중반 흑해와 카스피해 연안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카자르제국의 카자르족의 후손이 대부분이다. 특히 카자르 후손인 유대인들은 현재 세계 유대인들의 약 80% 이상을 구성하는 아슈케나짐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더군다나 “현대 이스라엘의 히브리어는 이디시어의 파생어이며 성서 히브리어의 어휘 일부만 사용한다. 이디시어는 독일어가 혼합되기는 했지만 문장과 음운체계에서 슬라브어족에 속한다. 더 나아가 기원후 1세기에 로마가 점령하던 팔레스타인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대규모 이민자가 없었다.”

시온주의 자체가 근거없는 신화에 불과할 뿐이다. 그것이 신화가 아니더라도 1000년 이상 그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쫓아낼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시온주의는 독선일 뿐이다. 그것도 억지의 독선일 뿐이다. 그리고 그 독선의 실체는 미국의 전략이라 저자들은 말한다.

“’이스라엘 없는 중동’을 가정해보자. 2차대전 이후 세계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양분되었다.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곳에 자리한 나라들은 어떻게든 이 질서에 편입되었고 이집트, 이라크, 시리아, 요르단 등 근대적 국가로 거듭나던 중동 각국에서도 변화는 있었다. 영국의 지배를 받던 중동에서는 민족주의나 이슬람주의가 점점 더 힘을 얻었는데 이런 중동이 서장세계가 주도하는 자본주의 질서에 호의적으로 재편되리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중도 교두보가 된 것이 이스라엘이다.”

바로 이스라엘의 이런 성격이 팔레스타인의 운명을 결정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저자들은 말한다. “평화란 본질적으로 힘의 균형이다. 이스라엘은 건국 이후 폭력적인 방법으로 팔레스타인을 지배했다. 그 이유는 미국이 받쳐주는 한 미국에서 수입한 성능이 뛰어난 무기로 무장하는 한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잇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패권이 약해지고 있다. 중동을 “더는 힘으로 제압할 수없다면 미국과 이스라엘은 군사적인 것보다는 정치적 해법을 찾지 않을 수 없다. 2011년 이후 중동의 변화는 미국과 이스라엘을 정치, 외교적으로 불리하게 만들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띠게 될지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상상력을 가능한 넓힌다면 ‘더 먼 미래에 과연 이스라엘은 생존할 수 있을까’라는 짋문에 이전처럼 쉽게 예라고 대답할 수는 없다. 반면 ‘팔레스타인인들은 마침내 평화롭게 살 수있을까’라는 물음에는 이전보다 더 쉽게 예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상식의 역사 - 왜 상식은 포퓰리즘을 낳았는가?
소피아 로젠펠드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고대 중국에서 인(人)이란 글자는 원래 천자를 말했다. 그러나 춘추시대에 인(人)이란 말은 제후들도 가리키게 되었다. 그리고 공자의 업적은 인(人)을 사(士)계급까지 넓힌 것이다. 인(人)이란 말의 역사는 중국에서 정치적 권리가 어떻게 확산되었는가의 역사이다.

인(人) 즉 사람이란 말은 오직 정치적 권리를 가졌을 때만 쓸 수 있는 말이었다. 정치적 권리가 없는 사람은 인이 아닌 민(民)이라 불렸다. 민(民)의 자형은 꼬챙이로 눈을 찌르는 모양이다. 민에게 요구되는 것은 의무 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정치적 권리를 가진 사람만이 온전한 사람이라 불릴 수 있었다.

언제 어디서나 사람은 평등하지 않았고 언제나 다른 사람보다 더 ‘평등’한 사람이 있게 마련이었다. 남보다 더 평등한 사람만이 온전한 사람으로 대접받을 수 있었다.

누가 온전하게 사람이라 불릴 수 있는가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장소에 따라 달랐다. 왕과 제후만 사람이라 불릴 수 있었던 고대중국에서 德이라 불리었던 그 기준이 실제론 혈통이었다면 공자 이후로는 능력이었다. 그에 비해 고대 로마에선 재산이 기준이었다.

“Only money made a high political career possible. Patrician blood had long become a liability. Money. It ruled the world. Without it, a man was nothing. Money. How to get it? How to get enough of it to enter the Senate? Dreams, Lucius Cornelius Sulla! Dreams!

Money again. Money, money, money. Though power entered into it too. One should never forget or underestimate power. Which drove which? Which was the means, which the end?” (Colleen Mccullough, ‘First Man In Rome’)

로마 이후에도 유럽의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재산이 기준인 것은 의회민주주의가 자리잡았던 근대영국과 식민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투표에 관한 논쟁이 벌어질 경우 그에 대한 대답은 언제나 ‘개인의 부에 따른다’는 것이었다. 식민지의 휘그당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또 유권자로서든 아니면 공무원으로서든 그 자격의 기준은 똑같이 부였다. 투표권에 관한 영국인의 사고에서는 오직 소득을 낳을 토지를 가진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독립적인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독립적인 사람들만이 공동체의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에서 판단을 건전하게 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재산이 없거나 생계를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사람들, 말하자면 여성만 아니라 어린이와 노예, 소작인, 하인, 장인, 도제들은 스스로 정치적 결정을 이성적으로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시민의 권리와 의무가 걸린 문제에서 특히 더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우리에겐 낯설다. 우리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누구에게나 정치적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면 당연히 권리가 있다고, ‘인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권’이란 개념은 최근의 발명이다. 인간이 있어온 시간의 대부분 동안 인권이란 알려지지 않았고 사람이 다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러나 지금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사람이면 다 같은 사람이다. 역사적 시간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평균을 벗어난 비정상이라 할만한 시대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우리의 시대는 비정상이 되었는가? 이책이 묻는 질문이다. 저자는 그 답을 한 가지 개념의 역사에서 찾는다.

‘영국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신화는 ‘자유롭게 태어난 잉글랜드인’의 신화다. 이는 이미 17세기부터 주창되었지만 19세기에 수차례의 정치개혁을 거치면서 비로소 확신되기에 이르렀다. 전제정 밑에서 신음하는 우상 숭배적인 대륙사람들과 달리 자유를 만끽하는 독특한 ‘섬나라 인종’이라는 이미지는 잉글랜드가 개신교 국가로 선회한 튜더 시대까지 소급되지만 ‘자유롭게 태어난 잉글랜드인’이라는 명제를 만들어내는 데 가장 결정적으로 작용한 사건은 명예혁명(1688)이었다. 프랑스 공화국에서 프랑스 혁명이 차지하는 위상에 맞먹는 영국의 명예혁명은 의회와 왕정 같은 영국의 오랜 제도에 대한 보편적 믿음을 가져왔다.” (박지향)

그러나 그 믿음은 엄청난 대가를 치루고 얻은 것이다. “1700년경 런던은 적대심으로 상처 입은 도시였다. 한 세기에 걸친 종교전쟁과 정치혁명은 불신을 유산으로 남겼다. 사법적 또는 신학적 전문성을 자랑하던 유서 깊은 중심지들에 대한 불신과 진리 탐구와 의사결정의 낡은 방법에 대한 불신의 골이 깊었다. 권위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가 아주 힘들었다.”

길고 긴 내전을 낳았던 권위에 대한 불신은 사상적 차이를 인정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용인하는 관용을 낳았다. “대화는 관용과 질문하고 토론하는 능력에 좌우된다.” 그리고 대화의 상대를 인정하는 관용은 “서로 옳다는 주장들 사이의 차이를 조정하거나 적어도 희석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 영국인들이 어느날 갑자기 관용을 배운 것은 “어렵게 얻은 사회적, 정치적 안정을 오래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표현의 자유가 영국의 기본적인 요소로 정착”되었다.

문제는 불신과 자유 덕분에 태어난 “산만한 도시 세계의 왁자지껄한 소리와 다양성” 위에서 어떻게 질서를 세울 것인가였다. “영국의 상류층과 중산층의 입장에서 볼 때 혁명 후 가장 큰 도전 중 하나는 극단적 다원론을 누그러뜨릴 초법적 방법들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해와 오해를 구분하고 기본적인 사상들에 대한 의견일치를 어느 정도 촉진하되 그 모든 것들을 종교적 관용과 표현과 언론의 자유 안에서 이루는 것이 급선무였다.”

유력한 해법으로 ‘상식’이 제시된다. 공동체의 누구나 공유하는 상식은 “공통의 정체성이 세워질 최소한의 권위가 되어줄 것으로 보였다. 그럴 경우 폭넓게 받아들여진 핵심적인 가정들을 바탕으로 형성된 공동체는 과도한 개인주의와 정치적 증오, 당파성에 대한 해독제가 될 것이다. 정치역역에서 상식의 적이 ‘당파성’과 ‘이해관계’라면 종교에서 경멸해 마땅한 상식의 적은 ‘광신’이었다. 상식의 옹호자들은 상식을 그 모든 적들에 맞설 성채로, 또 불필요하게 학식을 자랑하거나 사변적이거나 난해하거나 광적인 것에 맞설 성채로 높이 평가했다.” 극단주의자들에게 한 세기를 끌려다닌 사람들이 내린 결론이었다. 상식은 “토론의 한계를 그어” 의견충돌이 낳을 “적개심을 누그러뜨릴 것으로 여겨졌다.”

상식이 한계를 긋는 구체적인 방식은 이런 식이었다. 극단으로 흐르는 이상주의자들과 달리 보통사람들은 “현실의 상식적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나 지적으로 그들보다 우수한 사람들보다 더 뛰어난 경우가 종종 있었다. 여기서 상식의 옹호자들은 세상 실정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을 정확히 말하는 본능을 타고 났다는 이유로 보통사람들을 옹호”하면서 ‘상식의 적’들을 공격했다. “과연, 상식의 가치에 대한 암묵적 동의는 18세기 첫 몇 십 년동안 휘그당의 과두체제와엘리트 사회의 결속에 필요한 토대가 되었다.”

더 이상 정부나 교회가 검열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상식이 검열관의 자리를 차지한다. “상식의 옛날 개념이 개인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심판관과 검열관’이었다면 이제 그 개념은 문화적 규제의 수단으로 일반화되고 집단화된다. 상식은 표현에 대한 형식적 규제를 철폐했다고 자랑하는 모든 사회들의 특징이라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구조적 검열이 되었다.”

문제는 그 상식의 누구의 것이냐, 이다. 물론 상식은 인민(people)의 것이다. 그러나 여성은 상식을 배울 수는 있지만 부족하다고 여겨졌고 가난한 자들도 상식이 적은 것으로 여겨졌다. “18세기 초에는 상식도 심미안처럼 노력 여하에 따라 키울 수 있는 미덕으로 여겨졌다.” 문제는 미덕으로 불린 상식의 소유자는 “합리적이고 착실하고 멋을 알고 덕을 갖춘 중류층과 상류층 사람들로 이뤄진 예의 바른 대중”과 같은 뜻이었다. 상식의 옹호자들은 상식의 적(실제로는 그들의 정적)을 상식의 소유자인 인민의 편에서 공격했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운 인민은 상상의 산물일뿐 시골과 도시의 골목에서 만나는 현실의 인민이 아니었다. 상식의 이런 비현실성 때문에 결국 상식의 주창자들의 의도와 달리 상식은 상식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분쟁의 중심이 되었고 조화를 위해 고안된 개념이 정쟁의 무기가 되었다.

이런 추상성 때문에 상식(common sense)은 프랑스어권에서 양식(bon sens)로 변형된다. 사전적으로 영어의 상식과 불어의 양식은 거의 호환가능하다. “양식은 기본적인 추리능력과 일상적인 식별능력으로 정의되었으며 몽테스키외가 표현했듯이 모든 사람들에게 두루 받아들여질 기본적인 진리들을 얻게하는 ‘사물들을 서로 정확히 비교할 줄 아는 능력’으로 여겨졌다.”

양식을 가진 사람, 교양인(homme de bon sens)이 누구인가가 문제이다. 교양인은 “사물들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이성과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이용하는 사람”을 말한다. 정의상 (상식의 소유자인) 영어의 people과 다를 이유는 없다.

그러나 “18세기 영국에서 상식이 검열법이라는 정교한 도구가 없는 가운데 공동체의 규범을 유지하면서 단속의 기능을 수행할 것을 약속했다면 유럽 대륙에서는 상식과 비슷한 양식이” 사회적으로 공유된 상식을 공격하고 해체하는 무기로 사용되었다. “영국의 맥락에서 보면 상식은 사람들이 사물들을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격려하게 되어 있었다. 반면 유럽 대륙에서는 상식의 프랑스어 상대인 양식은 사람들을 현혹하는 외양 밑에 있는 것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뒤엎기 위한 노력으로 넌센스를 드러내는 인간의 잠재력을 의미했다.”

영국의 상식과 대륙의 양식이 달라진 이유는 정치적 맥락이 달랐기 때문이다. 질서를 세우려던 영국과 달리 구체제의 “프랑스는 여전히 관습이 보통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조화를 이루며 사는 준칙의 원천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그런 국가였다. 암묵적 일치에 의존했던 ‘만민일치’는 근대초기 유럽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신성불가침한 규칙의 원천이었다.관습은 임금과 고용조건에서부터 부채의 엋산까지 근대초기 경제적 삶의 중요한 측면을 모두 결정했다. 또한 계급구조를 떠받쳤다. 당연히 종교적 관행도 지배했다.” 그런 맥락에서 건전한 상식 즉 양식은 관습의 넌센스를 드러내고 공격하는 무기로 쓰인다.

“오늘날 우리가 포퓰리즘이라 부르는 선동적 정치 스타일은 그 시대의 정치이론은 (상식과 양식이 대표하는) 계몽운동 문화의 다양한 갈래들이 결합하면서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 결합의 폭발력이 처음으로 증명된 것은 미국혁명에서 였다.

페인이 ‘상식’이란 책자로 주장했듯이 미국혁명의 이념은 상식과 양식이 결합이었다. 페인은 미국인들에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것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설득했다. (양식) 국가 정체성에 변화를 줘야할 뿐 아니라 집단 상식이 자신들을 통치하도록 해야 한다는 사상으로(상식) 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식과 양식의 결합은 “인민주권이란 공화주의 개념을 정당화하고 그것을 현실에 구현하는 것을 실험하도록 햇다.” 저자는 이 “예상치 못한 결혼”이 “민주주의 상식”을 낳았다고 말한다. 페인이 교묘하게 만들어낸 ‘상식의 이중성’ 덕분에 “1776년이 다 가기 전에 이미 상식은 새로운 형태의 인민통치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버팀목이 되었다. 이 형태의 통치에는 인민들이 각자 타고난 실용적이고 건전한 판단을 내릴 능력을 통해 주권자가 되지만 그들의 판단력은 상식에 의해 정의되고 제한을 받는다.”

그러나 영국의 상식도 프랑스의 양식도 그랬듯이 “상식을 대효한다고 지나치게 주장하고 나서는 곳에는 언제나 위험이 도사린다. 상식을 대신하여 말을 한다거나 상식에 호소한다는 주장은 초기에 ‘양식’을 옹호했던 사람들이 잘 알았듯이 바탕에 기만을 깔고 있다.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서 진정으로 대중적인 것은 거의 없다. 어느 것이든 절대로 보편적이지도 않으며 폭넓게 교감이 이뤄지지도 않았다. 상식도 그것이 대체하고자 하는 것들만큼이나 추상적이다. 상식을 상기시키는 사태가 벌어지면 언제나 사회의 한 부류가 다른 부류의 희생을 바탕으로 득을 본다. 무엇보다 상식을 상기시키는 것은 논쟁을 부른다. 그것은 곧 상식이 정치적이라는 뜻이다.”

그 이유는 칸트가 말하듯이 “상식은 진리의 법정과는 거리가 한참 멀”기 때문이다. 칸트에 따르면“상식은 지식주장에 요구되는 비판적 조사를 사전에 차단하는 수사적 방편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또 대중의 판단도 협잡꾼들만 영광을 누리게 만들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식은 정치질서에 대한 비전을 낳은 것이 아니라 (포퓰리즘이란) 정치 스타일을 낳았을 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상식은 여전히 민주주의의 기둥 중 하나로 남아 있는 포퓰리즘의 인식적 토대이며 또 포퓰리즘을 정당화하는 바탕이 되어주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민주주의의 영원한 위협의 하나이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