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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복수 - 자본주의의 부활과 국가사회주의의 죽음
메그나드 데사이 지음, 김종원 옮김 / 아침이슬 / 2003년 4월
평점 :
절판
“내가 아는 한 나는 맑스주의자가 아니다.” 이책은 맑스의 이 말이 무슨 의미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쓰여졌다. 저자는 맑시즘의 역사를 개괄하면서 맑스의 사상이 어떻게 왜곡되었고 그 왜곡 때문에 어떻게 맑시즘이 자멸해갔는가를 추적해 나간다.
저자는 맑스의 이론은 아직도 아니 오히려 지금이기에 더 유효하다고 말한다. 자본주의는 맑스주의자들이 갈망해마지 않고 맑스의 이름을 빌려 예언해 마지 않았던 것처럼 쓰러져 죽어가는 상황이 아니다. 오히려 어느 때보다 더 승승장구하며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지구를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저자는 “이 지점이 맑스가 그 적실성을 다시 얻는 지점”이라 말한다.
“자본주의가 의기양양하게 득세하고 전지구적으로 확장되는 가운데 이로 인해 명예를 회복할 자는 바로 마르크스이다. 애덤 스미스 이후 자본주의의 역동성을 이해하고자 진지하게 시도한 인물은 오직 마르크스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르크스 이래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슘페터가 근접하긴 했지만 말이다.” 맑스를 다시 보아야 하는 이유라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맑스는 소련 공산당의 신학자들이 신으로 만든 맑스는 아니다. “1917년 10월혁명으로 착수된 사회주의 실험의 파탄은 무신론자인 그가 지옥이든 연옥이든 천당이든 어디든 살아 있다면 그를 슬프게 하기는커녕 기쁘게 할 것임이 틀림없다.” 볼셰비키와 아시아, 아프리카의 볼셰비키 사촌등이 마르크스를 팔아 마르크스의 이름으로 만들어 놓은 저 끔찍한 유산이 일단 버려지면 마르크스는 진지한 그러나 무오류는 아닌 사회천문학의 이론가로 등장할 것이다.”
“맑스의 사상은 재검토되었다. 공백과 부적절한 지점이 발견되었다. 그의 경제이론은 이미 1900년대에 루돌프 힐퍼딩과 이어 레닌의 손에서 수정과 정정을 겪은 바 있다.” 맑스가 무오류의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이상 당연하고 필요하며 바람직한 일이다. 맑스는 어디까지나 이론을 만든 것이지 경전을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바람직한 수정과 보완이 아니라 맑스가 살아있었다면 충격을 받았을 방향으로 수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국가, 계급, 정치 변동의 주체 등에 대한 이론이 모두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되엇다. 생산양식의 이행에 대한 그의 분석은 너무 단순하고 너무 기계적이라고 이야기되었다.”
그러나 맑스가 살아있었다면 그런 비판에 대해 어이없어 했을 것이라 저자는 본다. “그는 틀리지 않았고 단순하지 않았으며 기계적이지도 않았다.”
그런 비판은 맑스가 하지 않은 것을 햇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산양식도 자신의 잠재력을 죄다 소진하지 않는 한-말하자면 자신의 역동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맑스는, 적어도 후기 맑스는 유혈혁명 같은 인위적인 수단으로 생산양식이 이행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저자는 본다. “자본주의의 한계는 자본주의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을 때 도래하겟지만 그 한계가 감지되는 것은 자본주의의 기제를 돌리는 사람들의 나날의 실천 속에서일 것이며 또한 자본주의가 극복되는 것도 그들에 의해서일 것이”라고 맑스는 생각햇다고 저자는 본다. 자본주의의 종말은 혁명 같은 외적 충격에서 오지 않고 시스템 내부에서 올 것이며 그것은 진화적 과정일 것이라는 것이다. 종말이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본주의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종말은 백년 후일수도 6백년 후일수도 잇다.
“마지막에 웃는 사람은 맑스였다. 21세기 초두에도 계속되는 자본주의의 역동성은 맑스가 맑스주의자들에게 내리는 복수이다. 맑스의 이름으로 기만하고 속이고 살해하고 거짓 희망을 내놓은 사람들 모두에게 내리는 복수인 것이다. 그러한 과실이 남긴 파편 더미로 인해 사회 변화에 관한 사상은 대거 왜곡되었다. 맑스로 다시 돌아가 자본주의의 강점과 그 역동성의 비밀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20세기의 쓰디쓴 경험을 거치고도 언제 이 한계가 도래할 것인지 묻는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맑스는 역사의 천문학자이지 점성술사가 아니다.” 그리고 맑스로 돌아가기 위해선 애덤 스미스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저자는 본다. 최초의 사회천문학자는 애덤 스미스이고 맑스는 스미스가 개척한 길을 따라간 것뿐이기 때문이라 저자는 말한다.
“맑스는 정치경제학 연구를 통해 자본주의의 비밀을 탐색했지만 그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헤겔을 경유하여 애덤 스미스와 스코틀랜드 계몽철학자에게서 물려받은 역사 이론을 확장하는 것이었다.”
애덤 스미스와 그의 스코틀랜드 동료들은 뉴튼이 자연세계를 설명해냈듯이 인간세계를 설명하려 했다. 스미스의 “방법은 뉴턴식 의미에서 과학적이었다. 스미스는 오직 단일한 변수를 찾는다는 점에서 뉴턴을 좇았다. 넓은 의미에서 그 변수는 자기 이익이다.” 스미스가 말한 자기 이익은 이기심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는 인간은 자신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단순한 전제를 채택했을 뿐이다. 그런 전제에서 “수렵에서 상업으로의” 이행은 진보였다. 인간이 자기 이익을 최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상업을 옹호하는 선봉에 섰다. 그는 (나중에 자본주의라 불리게 될) 상업 시대가 봉건 시대에서 한 걸음 진전한 것임을 보여주고 싶어햇다.” 상업 시대 또는 자본주의는 불평등하다. 그러나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들은 더 평등했지만 더 궁핍하기도 햇다. 근대 세계는 더 불평등하지만 더 높은 소비 수준을 제공한다.”
상업 시대가 더 불평등하지만 더 풍요로운 이유는 노동분업 때문이다. “거기에는 분업이 가져온 우월한 생산성이 있었다.” 물론 어느 사회든 노동분업 위에 성립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그 분업을 더 극대화했다는 점에서 우월하다. 자본주의가 분업을 극대화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게 보장하기 때문이라 스미스는 말한다. “자기 노동과 자기 재산의 열매를 누릴 수 잇다는 확실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 열심히 일하도록 자극함으로써 생산성을 향상시켰다.”
스미스에게 자본주의는 “유토피아가 아니엇지만 확실히 진보였다.” 스미스는 그 이상을 보지 않았다. 그에겐 새롭게 떠오르는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것이 중요햇다. 그러나 헤겔에겐 그 이상이 필요햇다.
헤겔이 학창 시절부터 고민한 것은 “경건함의 상실이었다. 즉 자신이 볼 때 이제까지 도덕 공동체를 규정해 온 능동적인 프로테스탄 공민 도덕이 상실된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엇다.” 개인의 자기 이익이 우선되는 시장의 힘 앞에서 ‘이 도덕 공동체가 와해될 위협 아래 있었다.”
헤겔이 평생토록 씨름한 것은 “공민사회에서 어떻게 공적 행동이 윤리적일 수 있을지 발견하는 것이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단절이 존재햇다. 사적 도덕성과 공적 행위 사시의 이념적 일치가 깨져 버렷다. 현대 생활은 개인을 인간과 시민으로서의 이중적인 자격이라는 면에서 사적 인격과 공적 인격으로 나누어 놓앗다.”
프랑스 혁명 이전에는 “사람들 각자가 다른 사람을 돌보았다. 영주는 농노가 곤궁에 처하면 그를 보살폈다. 교회는 선행의 규칙을 세웠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인격적 유대에 바탕을 두엇다. 이제 갑자기 화폐가 이 모든 것을 뒤엎고 사회적 관계에 새로운 유동성을_정말이지 경박성을- 도입하고 잇었다. 사물은 그 가치가 화폐의 견지에서 평가되었다. 인간관계는 비인격적 교환에 기초를 두었다.”
헤겔의 프라젝트는 애덤 스미스가 그렇게 경멸하고 반박하려 햇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회고적이고 과거에 대한 향수에 기초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공동체의식으로 묶여 있고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인간과 시민-이 하나엿던 그 황금시대를 어떻게 되돌릴 수 있을 것인가?”
헤겔에게 자유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엇다. 프랑스 혁명 직후의 공포정치는 자유가 절대적이라는 ‘망상’ 때문에 일어났다고 헤겔은 보았다. 모든 개인의 자유가 절대적이라면 권위는 불가능하고 통치도 불가능하다. 가능한 것은 자유와 자유의 투쟁 뿐이며 폭력만이 해결책이 된다.
자유는 공동체에서만 현실적이다. “자신들이 공동체 속에서 살아야 할 필요를 내면화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을 때만 개인은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국가를 불신하고 국가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 시장은 제대로 굴러간다고 생각했던 애덤 스미스와 달리 헤겔은 현실적인 자유가 가능하려면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스미스가 말한 자기 이익 때문이다. 자기 이익에 충실하고 그 이익을 추구할 자유가 있는 “시민사회의 개인들인 부르주아지에 대응하는 균형추는 이해관계에 초연한 공무원 계급이엇다. 이들은 보편 계급을 구성하였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이해가 전체로서 공동체의 이해와 부합햇기 때문이다. 헤겔이 보기에 절대정신(공동체의 의지)의 그 같은 인격적 구현은 필수적이엇다.”
맑스는 헤겔이 그랫듯이 자본주의가 진보라는 애덤 스미스에게 동의했다. 그러나 공동체의 선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헤겔에게도 동의햇다. 맑스의 문제의식은 헤겔과 같았다. 그러나 구체적인 방법에서 달랐다. “그는 단순히 역사의 종착점을 헤겔과 다르게 그려낸 것이 아니엇다. 그는 세계를 그 종착점 쪽으로 움직이고자 적극적으로 시도햇다. 철학자의 임무는 단지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햇다. 맑스는 그런 종류의 철학자엿다.”
맑스는 관료가 보편계급이라는 헤겔의 주장에 도전했다. 관료는 유산계급에서 오기 때문에 보편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보편성을 담지할 계급은 어떤 권리도 없는 계급에게서 찾아야 하며 그 계급은 프롤레타리아트란 결론에 이른다.
“사회의 다른 모든 영역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고 그리하여 그 모든 영역을 해방시키기 않고는 해방될 수 없는 한 영역, 한 마디로 인간성의 완전한 상실인, 따라서 인간성의 완전한 되찾음에 의해서만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는 한 영역의 형성에 있다. 하나의 특수한 계급으로서 사회의 이와 같은 해소제는 프롤레타리아트이다.”
그러므로 (저자가 보기에 자칭) 맑스주의자들이 혁명론을 외친 이유는 맑스 자신에게 있었고 맑스의 말에 충실한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는 아주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철학자의 어떤 도움 없이도. 그 변화는 워낙 급속해서 맑스는 이론화해야 할 것이 별로 남아 잇지 않다고 생각했던 젊은 시절의 판단과는 달리 전 생애에 걸쳐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본주의 드라마를 파악하고자 노력해야 햇다.”
청년 맑스와 후기 맑스를 가르는 것은 그 노력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1830년대 후반 및 1840년대 초반의 철학적 활동은 1968년 5월과 베트남전 반전 운동 당시의 열띤 시절만큼이나 열병을 앓고 있었던 듯이 보인다.” 맑스주의자들을 지배한 것은 그 열병을 앓던 시절의 맑스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정말이지 유연한 ‘후기’ 맑스엿다. 불가피한 역사의 법칙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공산당 선언’에 나타나는 맑스 문체의 힘은 그의 추종자들로 하여금 자본주의의 극복이 임박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맑스 자신조차도 ‘자본론’을 완성하느라 시간이 계속 늘어져 가자 자신이 작업을 마치기도 전에 자본주의가 사멸하는 것이 아닌가 우려햇다. 그러나 이 무모한 희망은 1871년 이후 거두어졌다. 그러나 그의 추종자들은 자본주의가 실로 그 한계에 도달했고 붕괴가 멀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맑스의 사상에는 두가지 핵심이 있다. 첫째 무엇이 자본주의를 작동하게 하는가, 다시 말해 이윤이 어떻게 노동자 착취에서 생성되는가 하는 것이다. 둘째 자본주의의 미래에 관한 것이다.”
맑스의 자본주의 동학의 핵심은 잉여가치설이다. 잉여가치설의 디테일은 복잡하고 논쟁이 치열하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요점은 분명하다.
“고용하는 데 드는 비용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노동자를 고용할 자본가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진실이다. 그래서 이 차이가 좁혀질 정도로 임금이 오르면 자본가는 손실을 감당하기보다는 오히려 공장을 옮기는 것을 택할 것이다.” 세계화의 쟁점이 되는 산업공동화는 바로 이윤의 동학, 맑스식으로는 잉여가치의 동학으로 간단하게 설명된다.
이책에선 자세하게 다루지 않지만 네오리카도주의자들은 잉여가치를 단순하게 계급투쟁에 의해 결정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잉여가치를 결정하는 구체적인 과정이 어떻든 이윤의 몫을 어떻게 나누는가는 자본주의 동학에 핵심이며 이것이 저자가 맑스가 자본주의의 역동성을 간파한 최초이자 마지막 경제학자라 말하는 이유이다.
“맑스는 전 과정을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갈등으로 보았다. 그는 호황 때는 고용이 증가하고 실업은 줄어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은 임금에 압박을 가하여 노동자들의 몫을 끌어올리고 이윤의 양과 이윤율을 낮출 수 있다. 이 단계에서는 자본가들이 노동 절약 기술을 끌어들여 이윤의 감소 뿐 아니라 고용과 임금의 증가를 뒤집으려 할 것이라고 맑스는 지적했다. 이것은 10년 또는 20년을 주리고 경기순환을 낳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맑스는 이윤을 회복하려는 시도가 경기순환을 낳을 것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이윤율이 감소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확신했다.”
자본주의의 역학은 이윤율이 핵심이라는 맑스의 명제는 경제의 일상용어로도 재확인된다. “이른바 경쟁력-회사든 부문이든 혹은 경제든-은 생산물의 단위노동비용으로 측정되곤 한다. 단위 비용이 낮으면 낮을수록 생산물이나 부문이나 경제의 경쟁력은 더욱 커진다. 간단하게 말하면 기술이 단위노동비용을 떨어뜨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노동 생산성을 증가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윤율은 떨어질 것이다. 이것이 신문의 경제란과 속이 타는 재무장관들이 항상 이야기하는 것이다. 임금이 생산성 증가보다 더 빠르게 상승해선 안된다.”
자본주의의 미래는 자본주의가 이윤율 하락의 경향을 반전시킬 능력에 달려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맑스의 분석이 모호하게 보이기 때문에 맑스주의의 좌우 분열이 일어났다고 저자는 본다.
그러나 저자는 자본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본주의가 경기순환을 주기적이고 완만한 이윤율 저하 경향을 보이며 살아 나갈 것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고 말한다. ‘자본의 반격’ 리뷰에서 보았듯이 실제 자본주의 역사를 보면 19세기 말과 1960년대의 이윤율 저하 경향을 반전시키면서 자본주의는 여러 번 부활할 수 있었다. 산업자본주의 이전의 자본주의에서도 브로델과 아리기는 여러 번의 이윤율 저하 경향의 위기를 극복해 나간 역사를 그린다. 그리고 위기의 극복은 언제나 세계화로 나타났다.
최초의 맑스주의 정당인 독일 사민당이 창립된 이래 맑스주의에는 좌우 분열, 구체적으로 “혁명적 요구와 개량주의적 요구 사이의 긴장”이 있어왔다.
“긴장은 맑스 자신의 모호한 정식화에서 연유한다. ‘공산당 선언’의 혁명적 전망은 ‘자본론’ 1권의 한 장에서 반복 언급되고 잇지만 (자본론 전체의 체계가 그리는)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복잡한 분석적 이해는 맑스를 훨씬 더 미묘한 해석을 내포한 이해로 인도하엿다. 어느쪽이 맞는 것인가?”
저자는 좌파를 통속적 맑스주의라 부른다. “전 세계 수백만 사회주의자에게 이데올로기적 기치로 복무해 온 맑스주의는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자본주의 상은 자본론에 의해 지지 받지 못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통속화는 필연적이엇다고 저자는 말한다. “자본론의 계시록적인 제 32장조차도 자본주의의 임박한 붕괴를 예언하는 것으로는 읽힐 수 없다. 그 장은 단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보다 시간이 덜 걸릴 것이라는 점만을 말한다. 그러나 그 기간은 4백년일 수도 잇고 6백년일 수도 잇다. 어떤 정당도 지지자들에게 그런 약속을 하면서 유지될 수는 없다. 그래서 독일 사민당은 시간표를 단축시켜야만 했다.”
그 분열의 “근원은 물론 자본주의 동학에 관한 것”이었고 구체적으로 이윤율 저하경향의 극복에 관한 것이엇다. 저하 경향을 극복할 수 있는가 없는가? 19세기 말의 극복을 맑스주의자들은 제국주의란 이름으로 불렀다.
그리고 제국주의 최후의 전쟁인 1차대전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를 보여주었다. “독일인은 자신들의 전시 계획 경제의 경험을 ‘전쟁 사회주의’라고 불렀다. 여기에 의식적으로 중앙으로부터 운영된 선진 경제의 최초 사례가 있었다. 독일의 전쟁 사회주의 경험은 러시아에서 큰 관심을 끌었는데 특히 러시아 사회주의자는 독일의 업적에 매료되었다. 독일의 경험에 대한 레닌의 감탄은 1917년 11월 러시아에서 권력에 오른 이후 그의 사고 방향을 규정하게 된다.”
그러나 경제를 ‘계획’한다는, “경제를 기계처럼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은 19세기 사고로는 낯선 것이었다. 맑스는 이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한 적이 한번도 없는데 그에게 경제란 (복잡계 이론에서 말하듯0 자기 조직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사회’가 의식적인 방식으로 경제를 운영하겠지만 그런 그것은 언제일지 모르는 미래의 일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으로 맑스주의의 권위가 독일 사민당에서 볼셰비키에게 넘어가면서 ‘계획경제’는 맑시즘의 표준이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자체도 그 결과도 맑스의 이론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 세대의 맑스주의자들은 이런 의문을 가졌다. “러시아 자본주의의 후진적 상태를 감안할 때 어떻게 러시아가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할 수 있었단 말인가? 맑스주의 이론의 예언과는 그리도 배치되는 혁명에 어떻게 맑스주의적이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혁명의 당사자인 트로츠키도 던졌던 것이다. 그의 답은 ‘배반당한 혁명’과 ‘국가자본주의’였다. 요점은 모든 것이 스탈린 때문이라는 것이다.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의 죄상을 폭로한 후 맑시즘에 대한 소련의 권위가 사라진 후 트로츠키의 대답은 표준이 된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설명은 이렇다. 혁명 직후 일어난 내전에서 혁명의 지지층인 노동자들이 전사하면서 무력화되엇고 스탈린의 당관료들을 견제할 세력이 거세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레닌의 혁명은 스탈린의 광기에 먹혀버린 것은 내전 때문이다.
“그러나 혁명이 어떻게 한 개인-그가 아무리 막강하다 하더라도-에 의해 배반당하는 일이 가능할까?’ 저자는 러시아 혁명의 실패는 레닌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레닌은 물론 스탈린도 사회주의 혁명은 러시아식이 모범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볼셰비키식의 혁명은 다른 나라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고 저자는 말하낟. “민주적 관행과 공개적인 노조 환행 속에서 훈련되지 못한 그리고 몇몇 도시 중심지에 집중되어 있는 소규모 노동자 계급을 가진 나라에서만 레닌주의 정당이 들어설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햇다. 노동자 계급이 대규모이고 그 계급이 노조와 합법적인 정치 참여를 통해 투쟁과 타협을 주고받는 경험을 한 곳에서 노동자 정당은 오직 공개적으로 활동할 때만 그리고 부분적인 성과물을 가져다줄 것으로 여겨질 때만 정치 게임을 수행할 때만 노동자 사이에서 우위를 유지할 수-노동자의 충성을 독점하지는 않더라도-있다. 독일 사민당은 그러한 정당이엇다.”
저자는 이런 정당이 택한 노선을 ‘자본주의 내 사회주의’라 부른다. 이 노선은 독일 사민당이 주도권을 쥐었던 제2 인터내셔널의 시각이엇다. “이 관점의 목표는 복지국가를 만듦으로써 자본주의를 인간화하고 그 역효과를 누그러뜨리고 노동자와 빈민층의 처지를 개선하며 좀더 나은 공공서비스를 창출하는 것이엇다. 자본주의 내 사회주의의 문제는 잘 작동하는 , 번영하는 자본주의를 전제로 한다는 점이었다. 사민당에게는 자본주의를 보존하고 자본주의가 좀더 잘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 과제가 되었다.” 저자는 이런 개량주의 노선이 맑스의 이론에서 자연적으로 도출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볼셰비키가 일으킨 사회주의의 혁신은 그런 시각을 뒤집었다. 저자는 이 노선을 ‘자본주의 밖의 사회주의’라 부른다. 이들이 실제로 만든 사회주의는 맑스가 말한 “사회주의가 아니었다. 이것은 국가자본주의였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의 실패는 국가자본주의와 함께 예정된 것이었다고 저자는 본다.
“러시아적 맥락에서조차 레닌주의 정당은 자신의 조직적 특성 덕분에 권력을 얻은 것이 아니다. 우연에 의해 권력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의식적인 계획으로 권력을 계속 거머쥐었다.” 러시아 혁명은 좌파 파시즘으로 진화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레닌주의 정치의 하부구조는 국가자본주의였다.
“”레닌은 국가자본주의-독일의 전쟁 사회주의 체제-의 장점을 격찬하고 나선다.” 레닌이 생각하기에 국가자본주의는 러시아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엇다. 레닌의 “목표는 러시아에서 축적을 가속화하는 것이었고 그러려면 제대로 된 회계와 위계제적 경영, 그리고 노동자의 귱율이 필요했다. 노조는 축적의 필요에 종속되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레닌은 사회주의의 가능성이 현실화되려면 자본주의가 발전해야만 한다는 고전 맑스주의적 시각으로 되돌아온다.”
이때 자본주의에 대한 레닌의 태도는 부정적이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봉건제보다 낫다. 대규모로 조직된 자본주의는 소상품 생산보다 낫다.” 레닌은 “외국 기술자를 환영하고 기꺼이 사업허가를 내주었다. 볼셰비키는 경제가 걸린 문제라면 유연한 자세를 취햇다.”
그러나 유럽 혁명에 대한 전망이 사그라들고 국제적으로 고립되면서 레닌은 “러시아 경제를 발전시킬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건설한다는 희한한 전망에 집착하엿다. 볼셰비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들의 사회주의를 진정한 사회주의라 규정했다. 그들이 말하는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성숙 후에 오는 것이라기보다 자본주의와 나란히 고지를 향해 경주하는 것이었다. 독일인은 전쟁 중에 계획화를 도입했지만 러시아인은 경제 전반에 걸쳐 계획화를 실행햇다. 그리고 원시적 축적을 위해 농촌을 이용했다.” 러시아에서 뽑아낼 잉여가 있는 곳은 오직 농촌 뿐이엇다.
스탈린의 좌파 파시즘은 레닌의 비전을 실천한 것뿐이다. ‘낙후한 경제의 (강제적) 공업화를 위해 계획 경제를 수립하면서 스탈린은 전인미답의 길을 걸었다. (잉여를 축적하지 않고 써버리는) 소비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강하게 통제되었다. 모든 잉여는 (공업화를 위한) 자본재 부문을 확대하는데 투입되었다.”
그러나 농업 집산화는 스탈린의 독창적인 정책이었다. 러시아에서 유일한 잉여물인 “농산물이 공업화를 위해 징발되는 속도가 떨어지는 것을 참고 볼수가 없었던, 그리고 러시아 농민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잉여 농산물 가격을 지불할 의사가 없었던 스탈린은 1931년 집산화 캠페인에 착수했다. 그렇게 무자비하게 자기 국민을 대상으로 전쟁을 수행한 정부는 이제껏 없었다. ‘계급전쟁’이라는 표현은 맑스와 엥겔스가 비유로 사용했던 것이지 그렇게 글자 그대로 수행하라는 의도를 담았던 것은 아니었다.”
볼셰비키가 사회주의의 권위였던 전간기 동안 볼셰비키는 맑시즘을 신학으로 만들었고 자신들이 왜곡한 정통에서 벗어난 어떤 혁신이든 이단으로 몰아 사냥햇다. 이 기간 동안 맑스주의 특히 ‘맑스주의 경제학에는 혁신이 거의 없었다.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의 맑스 경제학은 1936년 이후 서구의 연구자들이 노력한 소산이다. 몇몇 지점에서 맑스에 관한 논쟁이 1936년에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말 독일 사민당 시절과 달리 “그 배후에는 어떤 주요 정당도 없었다. 맑스 경제학은 정치적 무기가 아니라 학문적 분야로 돌아왔다.”
이책의 이후 부분은 2차대전 이후 주류경제학이 맑스 경제학과 어떻게 상호작용을 했는가 그리고 주류 경제학의 혁신을 맑스 경제학의 입장에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등을 21세기초까지 정치경제를 배경으로 개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