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레이 수나 : 〈아부레이 수나〉는 경북 예천군 통명리

농요에 나오는 모심기나 김매기할 때 부르는 도움 소리다.


"김희원의 소설은 누구나 간절히 바라는 곡진한 소망에 관한 이야기다. 
운명적 방황을 거듭하는 모든 인간을 향한 응원을 한껏 담은 그런 소망 말이다."

_장두영(문학평론가)

 

"김희원 소설에는 온기가 지펴진다. 청정한 지하수 같은 따스함을 행간에 가득 채우는 작가는 드물다. 그 지극한 온기는 기능이나 작의로 할 수 없다. ‘겨울 도시’의 냉기에 몸 떨다가도 그의 소설을 들고 앉으면 따뜻하게 지펴지는 순연한 온기가 얼어붙은 마음을 데워준다."

_최문희(소설가)

독자에게 보내는 ​마케터의 편지

희망을 찾으려고 할 때마다 아픔을 느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청년실업, 경기불항에 관한 기사나 논설을 읽을 때보다
자신의 희망에 대하여 고민했을 때 세상이 더 회색빛으로 보이기 시작한다면,

잠시, 소설 《아부레이 수나》가 희망에 대해 던지는 질문을 생각하여 보세요.
《아부레이 수나》는 8개의 단편으로 희망을 찾는 것이 아픔이 된 시대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소망은 무엇인지를 찾고자 합니다.

아마도 그것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와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삶의 어느 시점부터 세상을 살아가는 일을
해변의 모래사장을 걷는 산책이 아니라
사막의 모래 위를 걷는 고통으로 느끼게 되는 걸까요.

2009년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에 선정된 소설 《겨울도시》를 저술한 소설가 김희원 님은
8개의 단편을 통해 '희망' 찾기에 지쳐가며 방황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청년과 아이 그리고 노인에게까지 찾아오는 '희망 찾기'의 아픔.

우리는 그 아픔의 끝에서 

불합리한 세상에 대한 저주나 '나'는 버틸 수 있다는 자신에 대한 기대감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어떤 소망을 다시 가질 수 있을까요?

자세한 책 소개는 아래 내용을 참고해 주세요.

^^

_문예남 올림




​■ 책소개

모래 먼지로 가득한 사막 같은 현실,
인간의 운명적 방황 속에서 따뜻한 소망을 풀어내다

 

2009년 첫 번째 소설집 《겨울 도시》로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선정을 받고, 이후 예술평론가상과 직지문학상을 수상한 김희원의 두 번째 소설집 《아부레이 수나》가 출간된다. 여덟 편의 단편 작품 〈아부레이 수나〉, 〈출구〉, 〈분꽃〉, 〈말 걸기〉, 〈자부동〉, 〈아름다운 집〉, 〈Vanish, 그 쓸쓸함〉, 〈옥화를 찾아서〉는 모두 길을 잃고 헤매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모래 먼지로 가득한 사막 같은 현실에서 허기진 몸을 이끌고 방황한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운명이라고 소설은 알려준다. 그러다가 드디어 고향 집에 도착했다. 설령 아직 도착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고향 집으로 향한 발걸음은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아름답고도 애틋한 귀환이다. 결국 김희원의 소설은 누구나 간절히 바라는 간절한 소망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운명적 방황을 거듭하는 모든 인간을 향한 응원을 한껏 담은 그런 소망 말이다.


 
단편 소개


사방은 온통 모래 먼지로 뒤덮여 있어 바로 앞의 사물의 형체도 분간이 힘든 상태, 어쩌면 영원히 길을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거대한 불안이 덮쳐온다. 이것이 김희원의 소설집 《아부레이 수나》 에 수록된 여덟 편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소설적 상황이다.

첫 번째 단편 〈아부레이 수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는 모래 먼지로 가득한 사막을 건너고 있는 어느 청년의 이야기다. 대학원 한 학기를 남겨둔 채 군에 입대한 주인공은 제대를 앞두고 자신의 진로에 관해 고민한다. 그는 청년 실업의 고통을 온몸으로 감당하는 가운데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현실에 대한 극적인 폭로를 보여준다. 하지만 폭로의 외침은 아무런 대답이나 반향도 얻을 수 없기에 더욱 절망적이고 힘겨운 무언가가 된다. 바로 이러한 소설적 외침을 통해서 청년 실업이라는 사회문제는 단순히 통계 수치로 표현되는 사회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소설 속 주인공의 존재와 직결된 삶의 문제가 되고, 소설을 읽는 이들에게 직접적으로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출구〉의 주인공도 청년 실업의 무게를 온몸으로 감당하는 인물이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때로는 버텨보려고 안간힘도 써보지만, 결국 씁쓸함을 맛보고 만다는 오늘날 세태의 한 단면이 스케치된다. 작가의 세태 비판이 비단 젊은 청춘의 불안한 미래로만 향하는 것은 아니다.

〈분꽃〉에서는 마음껏 뛰어놀지 못하고 공부만 강요당하는 어린아이들에게 안타까운 시선을 던진다. 차지게 응축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의 주체가 서로 타인과 점점 더 멀어지고, 외부와는 절연된 제 스스로의 영역에만 고립되고 마는 모래 같은 생활이 〈분꽃〉이 바라본 오늘날의 세태다.

〈말 걸기〉는 어머니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을 온몸으로 노래하는 어느 발레리나에 대한 이야기다. 채워지지 않는 공허의 시간을 견디지 못한 정신적 허기가 신체적 허기와 착종되어 아름답게 승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부동〉은 섣부른 동정을 넘어서, 한평생 외롭게 삶의 무게를 감당해온 한 여인의 처량한 행적이 담담히 표현된다. 감동이란 직접적으로 들이밀기보다는 간접적으로 흘러들도록 하는 방식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을, 버스 안에서의 우연한 회상을 통해 한 인간의 삶에 대한 경외와 공감을 표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은 잘 나타낸다.

〈아름다운 집〉은 사라질 위기에 처한 옛집에 관한 이야기다. 물리적인 집에 대한 풍경 묘사가 아니라 과거의 아련한 추억과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에 대한 송가를 담담하게 노래한다.

〈Vanish, 그 쓸쓸함〉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물인 《직지심체요절》의 진가를 발견하여 세상에 소개한 프랑스인 쿠랑의 행적을 추적한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기이한 여정 속에 옛 조선의 아름다움과 우리 문화재에 대한 독특한 시선이 흥미진진하게 이어진다.

〈옥화를 찾아서〉는 문학에 대한 열정을 충족시키지 못한 것이 허기로 남은 작가의 자전적 소설로, 스승 김동리 선생의 소설 〈역마〉를 모티브로 했다. 스승의 넉넉한 품을 그리워하며 무언가를 채우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이 허기의 형태로 묘사된다.

 


인생의 허기 속에서 발견한 삶의 위안


각 단편 소설들은 모두 잃어버린 혹은 채워지지 않은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것은 인간의 쓸쓸한 운명이며 각박한 현대사회에서 점점 삭막함이 가속화되어가는 풍토의 한 단면이다. 작가 김희원은 학원 차에 쫓기는 어린아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취업준비생, 어머니를 잃은 발레리나, 아름다운 추억이 담긴 집을 잃게 된 중년의 남자, 노년에 접어든 할머니, 잃어버린 문화재를 지키는 이들, 문학에 목말라 하는 여인 등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들의 운명의 무게를 따뜻하게 풀어나가며, 동시에 우리의 삶을 다독여준다. 인생의 허기를 느껴본 이라면, 그리고 옛 정서에 대한 그리움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운명적 방황을 거듭하는 인간을 향한 응원을 한껏 담은 김희원의 소설집 《아부레이 수나》를 통해 삶의 따뜻한 위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차례

​아부레이 수나
출구
분꽃
말 걸기
자부동
아름다운 집
Vanish, 그 쓸쓸함
옥화를 찾아서

작품 해설 : 길을 잃고 헤매다_ 장두영
작가의 말

■ 본문 미리보기








■ 등록금을 벌기 원하는 대학생, 취업에 목마른 사회 초년생들을 유혹해 신용 불량자 만드는 잔인한 사회. 어둠의 덫처럼 다가와 백수 후배에게 다단계 업체 권하는 선배들. 비싼 등록금으로 빚더미에 앉은 채, 아르바이트 인생으로 전락한 이 시대 부박한 젊은 군상들. 아파도 아프다 소리도 못 지르고, 박탈당한 꿈은 전당포 전표에 맡기고 도서관, 고시원에서 고군분투하는 슬픈 청춘의 시간. 보이지 않는 비상구와 저당 잡힌 미래 앞에, ‘희망 너 어디 갔어?’

-〈아부레이 수나〉 중에서 (11쪽)

■  언젠가부터 갇혀 사는 막힘, 메마른 인정 그리고 단절이 돼버린 아파트 생활이 싫었다. 할 수 있다면 집 앞뒤로 텃밭이 있고, 안마당에 장대를 세우고 빨래를 널고 사는 그런 모습을 그리워했다. 손주들에게도 그런 외갓집, 할머니네 집에서 뛰어놀게 하고 싶었다. 세상이 변하고 마당도 없는 아파트가 외갓집인 내 손주들. 보내고 돌아설 때마다 미안했다. 그렇다고 시골로 이사가 새 터전을 잡기엔 자신의 나이가 너무 많았다.

-〈분꽃〉 중에서 (83쪽)

■ 플랑시가 이 저녁 들고 온 노란 한지의 서책 한 권. 서책을 손에 받아드는 순간 금속활자로 인쇄된 《직지하권(直旨下卷)》이란 네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세계 최초 금속활자, 직지?’ 세계 최고라는 독일의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200년이나 먼저. 믿기지 않았다. 동양의 작은 나라 조선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를? 하지만 현존 최고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눈조차 뜰 수 없었다. 눈앞의 꿈같은 사실에 온몸이 얼어붙는 듯 다시 오싹 전율이 일었다. 이 나라는 무엇 때문에 나에게,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을 만져볼 행운을 주었을까.

-〈Vanish, 그 쓸쓸함〉 중에서 (182쪽)

■  몇십 년이 흘러갔다. 가슴속 옥화도 〈역마〉도 잊어가며 산 여자의 오랜 세월이. 그리고 또 난마한 세월이 여자의 허하디 허한 가슴속을 다시 더 흘러갔다. 그 무심한 세월 동안 여자는 늘 허기졌다. 스치는 바람 소리, 작은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에도 허기가 졌다. 허기가 찾아올 때마다 울컥울컥 목이 메었다. 시도 때도 없이 울음 같은 이명이 울려왔다. 마치 목에 걸린 가시처럼 항시 똬리를 틀고 여자의 가슴을 놓아주지 않고 꿈틀거렸다. 살아오며 무엇이 그렇게 여자를 허기지게 했을까?

-〈옥화를 찾아서〉 중에서 (204쪽)

■ 지은이 소개

김희원 
충남 홍성 출생으로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문학과 의식》으로 등단했다. 소설집 《겨울 도시》가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었으며, 예술평론가상과 직지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이사와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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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 이유

 

융 심리학의
아니마아니무스’로 알아보기


융 심리학 입문서 《융의 영혼의 지도》 도서 요약 4편은  왜 사람은 자신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걸까?에 대한 내용을 설명할 수 있는 '아니마와 아니무스'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럼 '아니마 아니무스'의 정의를 우선 살펴본 후 사랑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마음의 성장에는 어떤 역할을 하는지 천천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화에선 ‘리비도’, ‘콤플렉스’, ‘자아’에 대해서 다루었는데요. 아래 링크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 1화 자아 : http://goo.gl/m3epXv

- 2화 콤플렉스 : http://goo.gl/iZqYVq

- 3화 리비도 : http://goo.gl/zj3Kv4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정의

“페르소나와 그림자를 구분하는 것이 ‘악에 대한 선’의 측면(자아의 음과 양, 긍정과 부정의 측면)이라면, 자아와 아니마/무스의 구분은 남성성과 여성성의 양극으로 표시된다. 다시 말해 카인과 아벨의 차이가 아니라, 솔로몬과 시바 여왕의 차이인 것이다.”
p. 185

융의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이론은 남성성과 여성성과 관련하여 많이 언급이 됩니다. 융의 이론은 급진적인 페미니스트를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남녀 차이를 인정하기도 한 것처럼 보이는 데요. 스타인 박사는 융이 양쪽 견해를 조금씩 다 담고 있는 것 같다고 합니다. 젠더에 대한 부분은 아래에서 좀 더 다루겠습니다.

융은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정신의 원형이라고 보고 있다고 합니다. 정신의 원형이 인간의 문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원형에서 문화가 나온 곳이라는 것이죠. 뒤에서 다시 말하겠지만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정신 밖에서 정신을 이어주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다리 같은 것일 수 있겠네요. 마치 중력처럼 힘을 느낄 수 있지만 볼 수 없는 것처럼요.

흔히 사회적 가면을 페르소나라고 하는데요. 이 페르소나의 위치와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위치를 비교하면 정신세계에서 아나마와 아니무스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좀 더 쉽게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페르소나는 자아의식과 외부세계의 사이에 있는 존재입니다. 비유하면 몸과 외부세계 사이에 있는 피부 같은 것이죠. 아니마, 아니무스는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 사이에서 두 무의식을 이어주는 위치에 있습니다. 자아가 무의식의 심연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죠. 음.. 도식화하면 이런 느낌일까요.

외부세계
-------
(페르소나)
-------
자아의식
-------
개인무의식
-------
(아니마, 아니무스)
-------
집단무의식

어설픈(^^a) 도식에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아니마, 아니무스는 무의식에 가장 가깝게 있는 존재이고 그렇기 때문에 무의식의 문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위의 개인무의식과 집단무의식은 도서요약 1편에서 간단히 설명하긴 했는데요. 개인무의식은 개인이 성장하면서 경험이나 문화적인 요인으로 가지게 되는 무의식이고 집단무의식은 모든 인간이 가지는 공통의 무의식입니다.

아무튼, 페르소나(사회적 가면)가 타인과의 관계에 관여하는 반면,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주체(무의식적인 희미한 일깨움, 감정, 사상, 감각)에 대한 자아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갑작스럽게 눈물이 나거나, 문득 짜증 나고 불편해지거나 하는 등의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요. 타인 그리고 자신조차도 왜 그런지 파악하기 매우 어렵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해관계가 끝나면 돌아서는 것처럼 페르소나에 따른 타인에 대한 태도 변화는 확인하기 쉽지만, 자신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를 알아보기는 무척이나 어렵다고 합니다. 

그에 대해서 융은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고 하네요.

“어떤 이는 자기 내면의 과정에 의해 어지럽혀지는 것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으려 한다. 어떤 이는 그 과정에 완전히 좌우되는 것처럼 보이고 ... 그래서 (내면에 좌우되는 사람은) 약간 불쾌한 느낌에도 알 수 없는 질병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며, 단 한 번의 꿈에도 우울한 예감으로 가득 찬다. ... (내면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어떤 이는 그 과정을 생리학적으로 여기고, 어떤 이는 이웃의 행동 탓으로 여기며, 또 어떤 이는 종교적 계시로 간주해버린다.”

융, ​《전집》 6권, 801항

내용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자기 내면, 이를테면 마음이 불편한 일이 있으면 불편함을 지워버리기 위해 남 탓을 해버리거나, 과대하게 포장하는 일이 우리에겐 너무 익숙한 것이죠. 남 탓하고 과대하게 포장하는 등의 말이 많아진다는 것은 어쩌면 사회 구성원들의 마음이 아픈 사회임을 말해지는 증거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까지 아니마, 아니무스의 위치와 역할을 간략히 살펴보았는데요. 좀 더 간단히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아니마 : 남성에게 있는 내면적 여성성
아니무스 : 여성에게 있는 내면적 남성성

*​

역할 :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의 세계(무의식)로 나아가 직관적 사고와 감정 등에 적응(또는 무의식이 요구하는 걸 행동) 하도록 함.

*​

아니마의 문제 : 기분이 자주 바뀌는 사람은 아니마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아니마는 감정을 다스리지 않고 공기 중에 퍼지는 가스처럼 감정이 자아의식에 스며드는 기분을 일으키는데요. 흔히 무기력한 감정이 드는 상태를 뜻합니다.

*​

아니무스의 문제 : 무의식, 즉 여성이 감정적 생각에 압도 되면 공격적이 되는 문제가 생긴다고 합니다. 이런 상태의 여성과 함께 있다면 상대방은 여성의 감정적 공격에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 보호막을 설치해야 하므로 여성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아니마에 압도된 남성은 위축되고 아니무스에 압도된 여성은 공격적이 된다고 하는데요. 아니마와 아니무스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자아의식이 무의식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말이며, 자신의 정서를 억제할 수 없다는 면에서 발달되지 못한 근육과도 같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과 아니마와 아니무스

《융의 영혼의 지도》의 저자 스타인 박사는 이런 남녀 차이 때문에 남성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다스리는 데 도움을 줄 여성을 찾고, 여성은 자신의 감정, 즉 영감 어린 생각을 수용하고 함께 일할 수 있는 남성을 찾는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는 아니마, 아니무스의 관계 게임에 참여하는데요. 왜 서로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게임에서 사랑 문제는 끊임없이 발생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에 대해선 스타인 박사의 말을 참고하여 보세요.

“왜 현실적 삶은 이와 같지 않은가?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삶에서 때때로 이러한 조화롭고 균형 잡힌 경험을 한다. 일과 사랑이 제대로 풀리는 시기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이런 시기는 갈등으로 점철된 정황 가운데 짧게 존재하는 막간의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주요한 이유는 우리가 균형 있게 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 문화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참된 내면의 성장, 집단문화(페르소나라는 사회적 가면)와 반대되는 ‘개인 문화’라고 일컬은 내면의 성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 우리 대부분은 매우 원시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다. 페르소나(사회적 가면)가 벗겨져 나가고 아니마, 아니무스가 무의식의 심층을 향해 문을 열어줄 때만, 예를 들어 중년기처럼 자아가 페르소나와 아니마, 아니무스의 갈등으로 찢겨졌을 때(예: 중년기 우울증)에야 비로소 내면의 성장을 심각하게 고려한다. 이것은 마치 신경증이 발생한 듯 보이겠지만, 개인의 성장을 위한 준비 과정일 수도 있다.”

p.194 ~ 195

결국 요약하면 사회에서 자신이 보여지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익숙하고 자신이 자신을 성찰하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아, 내면이 성장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되겠네요. 자기 성찰을 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반려자를 찾았다고 하더라도 사랑에는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겠죠.

우리는 인터넷, TV 등을 통해 잘못된 사랑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듣게 됩니다. 그와 같은 현상도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통해 설명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사회적인 역할에 충실한, 즉 사회적 가면인 페르소나를 진짜 자신이라고 여기고 있는 남자가 있다면, 그는 규칙에 따라 혹은 조직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면 되니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일이 적습니다. 그래서 감정을 죽이고 사는 남자들은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여성, 즉 사회적 질서에 얽매여 있지 않은 여성에게 눈을 돌리기 쉽다고 하네요. 만약, 평상시에 자기 자신의 내면을 잘 살핀 사람이라면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행복이 하룻밤을 보내는 여성으로부터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은 잘 알 수 있을 텐데요.

반대로 여성에게도 남자와 같은 환상이 있다고 합니다. 남성이 사회에서의 자기 역할에 충실하다가 감정적인 일탈을 한다면, 여성은 사회에서의 자신의 위치와 역할이 정해지면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게 되는 꿈을 가진다고 합니다. 동화를 예로 들면 신데렐라처럼 가난한 여성이 왕족과 만나는 꿈을 가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타인 박사에 따르면 남성이 일탈적인 사랑을 하는 현상과 여성이 사랑을 통해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하고자 하는 이런 현상은 모두 같은 욕망에 기인한다고 합니다. 자신이 보살펴주지 못했던 영혼의 초상을 보여주고, 자신의 영혼이 하고 싶었던 모험과 가지고 싶었던 정신을 나타내 주기 때문이라고요.

음... 저는 지금 저 자신을 보살피는 사랑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저의 무의식이 준 저의 욕망이란 가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씌워서 사랑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되네요.

사진. 고전이 된 영화 [펄프 픽션​]의 대표적인 명장면

위에 소개한 사랑을 표현한 이야기가 무엇이 있을까란 생각을 하니 영화 [펄프 픽션]이 생각납니다.

감정 없이 조직의 일을 하는 ​건달 빈센트(존 트라볼타)가 두목의 애인이라는 자리가 있으면서도 현실을 불만족스러워하고 이탈을 꿈꾸는 미아 웰러스(우마 서먼)와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는 위 아니마, 아니무스의 관계 게임에 잘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나온 영화로는 뭐가 있을지 생각해 보니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허Her]도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타인을 위한 감동적인 편지를 써주는 것이 직업이지만 자기 감정은 메말라버린 남자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가 항상 감정적(?)으로 자기 걱정을 해주는 인공지능 사만다(스칼렛 요한슨)을 사랑하게 되는 것도 아니마, 아니무스의 관계 게임으로 해석할 수 있어 보이네요.

^^​

젠더와 아니마, 아니무스

더와 아니마,

“융의 이론에서 볼 때, 남녀 모두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각각 갖는다. 하지만 이러한 특질은 성에 따라 다르게 분할된다. 이 차이는 사회적이거나 문화적인 것이 아니라 원형적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차이는 사회 정책의 변화로 쉽게 제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융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본질적, 심리적 차이가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고 하는 현대 여성운동가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
- p. 197

글의 시작 부분에 잠깐 나왔던 내용에 대한 추가 설명입니다. 위 인용문으로 젠더와 관련된 아니마와 아니무스에 대한 이야기는 다 한 것 같습니다.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을 것이니까요. 무엇이 더 옳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융은 남성도 여성성을 가지고 있고, 여성도 남성성을 가지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란 입장이라서 일부 젠더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분들에게는 융의 이론이 반박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하네요.


여러분은 성별이 남녀의 근본적 차이를 만들 수 있다고 보시나요?
아니면 성별이 아무런 남녀의 차이를 만들지 않는다고 보시나요?

 


의식의 성장과 아니마, 아니무스

“지나치게 소심하지 않거나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니마, 아니무스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 하며 그 일부가 되어 합류하기를 원한다. ... 하지만 본질적 자아의 행위는 아니마, 아니무스에 관여하는 것이지, 무의식이 요구하는 행동에 따르는 것은 아니다. 융은 이 대립을 ‘논쟁’이라고 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무엇을 갈라지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 아니마, 아니무스와 ‘논쟁’을 한다는 것은 무의식적 환상이 만든 허상의 세계를 분쇄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의 정신세계의 심원함을 가장 완전히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의식적 추정은 이미 많이 먹었는데 더 먹으라고 타액을 계속 분하며, 성적 충족이 이미 이뤄졌는데 성적 갈망을 계속 일으키게 한다. 즉 우리로 하여금 자극과 반응이 연속되는 쇠사슬에 묶여 감정적으로 팽창된 행태를 끊임없이 반복하도록 추동한다.”
p. 209-210

잘못된 사랑은 자기 자신에 대해 성찰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였는데요. 의식의 성장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니마, 아니무스를 통해 전달되는 무의식적 욕구의 특징은 위의 인용문에 나오는 것처럼 반복적으로 같은 것을 욕망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음식을 먹고 또 먹고,
충분히 가지고 있는데 더 가지려고 하고,
성적 갈망을 계속 갈망하는 것이죠.

어쩌면 우리는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만들어 준 ‘멋진(?) 환상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여기고 집착하며 사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로 그런 욕망들을 포기한 척하면서 말이에요.

아무튼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우리에게 보여준 환상은 투사를 통해 실현이 되고 이건 평생 지속이 된다고 합니다. 투사는 앞서 사랑 이야기에서 말한 것처럼 남성이 여성을 통해 자신의 감정적 답답함을 풀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대신 표현해주는 혹은 어떤 형태로든 무의식을 건드리는 존재들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로는 ‘영웅’이나 ‘뛰어난 스포츠 선수’에 감정 이입하는 것 정도가 있을까요? 보통 이런 투사는 일상에 활력을 주기도 하지만 앞의 인용문처럼 자극과 반응의 반복이라는 운명의 쇠사슬과도 같습니다.

스타인 박사는 이런 반복을 끊어내고 자신의 무의식에 끌려가며 살지 않으려면, 무의식과 논쟁하면서 자신의 무의식적 욕구를 명확하게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동시에 그런 활동은 의식의 성장을 일으킬 수 있다고도 하고요. 그러나 당연히 욕망을 포기한 척하는 것은 진정한 논쟁의 결과물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자신과 '논쟁'하는 건 분명 의식 성장에 좋은 일이지만,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합니다. 스타인 박사는 오랜 명상 수련 등을 한 분들만 완전히 운명의 쇠사슬을 끊을 수 있다고 하네요. 자기 마음 하나 보살피는 것도 노력 없이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글을 끝내려고 하니 그동안 얼마나 많이 스스로를 위해 논쟁을 하고 있었는지를 물어보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논쟁을 권하는 세상일까하는 질문도 동시에 떠오르고요.

아무쪼록 여러분의 사랑과 욕망과 자기실현에 대한 노력이 무의식의 환상에 이끌려 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앗! 논쟁에 대해서 좀 설명이 부족한 것 같아서요. 스타인 박사는 무의식이 만든 허상의 세계를 분쇄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덧붙이는 말로 본질을 이해하고 계약을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논쟁이라는 다툼을 통해 자신의 무의식을 완전히 이해하고 일종의 합의를 맺는 것이죠. 이런 방법 일상에서 많이 쓰시죠.^^

우리 터놓고 속 시원하게 이야기 해요!라고요.

항상 시원하게  가슴 따뜻하게 이야기할 분들과 함께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최고의 뇌과학 잡지 <브레인> 추천도서 《융의 영혼의 지도》 


브레인미디어란? 한국뇌과학연구원이 제공하는 뇌활용 미디어 전문섹션입니다. 유엔경제사회이사회(UN-ECOSOC) 유엔협의지위기관인 한국뇌과학연구원은 뇌활용분야의 세계적인 연구기관으로서, 21세기 미래 키워드로 떠오른 인간 뇌의 가치와 중요성을 알리고자 국내 최초의 뇌과학잡지 <뇌>와 국낸 유일의 뇌활용 매체인 뇌교육전문지 <브레인>의 기사를 온라인 상에서 무료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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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융의 영혼의 지도》 책소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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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에너지일까, 정신 에너지일까

 

융 심리학으로

나를 성장시키는 '리비도' 알아보기

 -  융의 영혼의 지도도서 요약 3

 

융 심리학 입문서 융의 영혼의 지도도서 요약 3편은 무엇이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인간은 생각하기 때문에 살아가는 걸까요? 아니면 먹고 자고 싶은 욕구 때문에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요?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하는 심리학 용어가 '리비도'인데요. 이번 도서 요약에선 '리비도'에 대한 융 심리학의 입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화에선 콤플렉스자아에 대해서 다루었는데요. 아래 링크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 1화 자아 : http://goo.gl/m3epXv

- 2화 콤플렉스 : http://goo.gl/iZqYVq

 

프로이트의 아버지 쇼펜하우어와 리비도

 

이 내용은 융의 영혼의 지도에서 나오지 않는 내용이지만 알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혹은 재미있을 것 같아서 간단히 소개합니다. 프로이트와 융 심리학에서 말하는 리비도라는 단어는 쇼펜하우어라는 철학자가 사용한 의지(Will, 사납고 집요한 생명력, 자발적 능동성, 오만한 욕구의 의지)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일부 철학서에선 쇼펜하우어를 프로이트의 아버지라고 말하기도 하구요.(윌 듀렌트의 철학 이야기를 참고하면 됩니다.)

 

프로이트는 쇼펜하우어의 의지 중 성 에너지를 강조하여 리비도라고 강조한 반면, 융은 리비도를 쇼펜하우어가 사용한 의지와 비슷하게 보려고 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쇼펜하우어가 이 의지를 중시하게 된 역사적 배경도 다소 흥미로운 내용이 있어 소개하지 않을 수 없네요. 쇼펜하우어는 1788년부터 1860년까지 살았으며, 1819년에 그의 대표작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발표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을 정말 단순하게 표현하면, 이성은 껍데기에 불과하며 욕구라는 의지가 사물을 통해 나타는 것을 표상의 세계라고 주장한 책입니다. 우리가 흔히 인용하는 10%의 의식과 90%의 무의식으로 표현하면 10%의 의식은 껍데기에 불과하며, 90%의 무의식이 세상을 만들고 있다 정도가 되겠네요. 그런데 무엇이 쇼펜하우어란 철학자로 하여금 90% 무의식, 즉 의지 영역을 주목하게 했을까?

 

윌 듀렌트에 따르면 나폴레옹 때문이라고 합니다.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선 모르는 분이 없으실 겁니다. 왕권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세운 혁명이었죠. 당시 정권을 잡은 국민공회는 공포정치를 감행했다고 합니다. 왕족이나 왕권을 인정하는 사람도 숙청하고, 공화정에 따르지 않는 사람도 숙청했다고 하네요. 물론 사정이 있긴 했지만 여기선 자세히 다루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통해 프랑스 국민을 공포정치로부터 구원하여 줍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의 본래 정신을 실현시켜 줄 영웅 같은 존재였으나,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버리고 나폴레옹은 스스로 황제가 되어버립니다. 이 때문에 혁명의 정신은 무너지고 옛 봉건 귀족들이 되돌아왔으며, 사람들은 희망을 잃었다고 합니다. 지식인이든 일반인이든 이성을 가지고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는 일에 지쳐버린 것이죠. 윌 듀렌트는 이런 시대 분위기가 쇼펜하우어로 하여금 이상보단 의지를 발견하게 했다고 합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이상보다 현실을 명료하게 설명하여 주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의사, 변호사, 상인 등 중간계급의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고 하네요. 현실의 삶과 무의식에 집중한 철학의 탄생을 이렇게 보고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현실의 삶에 집중하고 있을수록 이상적인 삶 혹은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열망은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구요.

 

서론이 길었네요. 그럼 이제, 리비도에 대한 융 심리학의 입장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쇼펜하우어에 대해 윌 듀렌트가 철학 이야기에서 말한 내용은 아래 링크에서 추가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철학입문서로 가장 재미있고 좋은 책 중 하나이니 철학에 관심이 있다면 꼭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 나폴레옹 황제 즉위와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 읽기 : http://goo.gl/QCWvoS

 

과 리비도

 

인간 발달의 어떤 단계에서 집단적이고 개인적인 성적 리비도는 현저(顯著, 뚜렷이 드러남)하고 근본적이지만, 다른 단계에서는 그러한 현저함과 근본성이 떨어지기도 한다.”

- p. 96

 

융의 영혼의 지도의 저자 스타인 박사는 리비도를 욕망, 감정, 정신에 생명을 불어넣는 피라고 합니다. 자연과학의 말을 빌려 말하면 만유인력의 법칙과 같이 사물이 운동하는 법칙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고요. 심리학에선 이것을 영혼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고 하네요. 비록 프로이트가 리비도라는 현대 심리학 용어를 만들기는 했지만, 리비도라고 할 수 있는 감정이나 욕망에 대한 연구는 프로이트가 처음은 아니라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전부터 있었던 고민이었죠.

 

앞서 쇼펜하우어란 철학자의 이야기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근원적 동기부여자를 의지(Will)라고 생각했고 프로이트는 이것을 리비도라고 했습니다. 프로이트는 리비도를 사용하며 인간 본성에 감각적이고 쾌락을 추구하는 요소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고, 영혼이란 본질적으로 성적 에너지와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고 합니다. 프로이트는 성적 에너지가 어떻게 인간의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는지를 연구했고, 신경증과 정신분열증 등 대부분의 심각한 정신병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했다고 하는데요, 돈을 세거나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처럼 성적이지 않은 행동에도 성적 에너지가 관여한다고 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융은 프로이트와 의견을 달리했죠. 융이 프로이트에게 반박하는 내용의 편지도 있다고 합니다.

 

선생의 광범위한 견해에 대해서 제가 유보하는 것은 경험 부족 때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심리적 경계 현상은 다른 기본적 추동인 고픔hunger, 이를테면 먹기, 젖 빨기(주로 배고픔), 키스하기(주로 성) 같은 갈망의 견지에서 더 적절히 고려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윌리엄 맥과이어, 프로이트와 융의 서신 교환에서

 

이렇게 반박한 후에 프로이트에게 변명하는 것 같은 편지를 보냈다고 하네요.

 

선생께서 아시다시피, 저는 항상 외부에서 내면으로, 그리고 전체에서 부분으로 나아갑니다.”

- 윌리엄 맥과이어, 프로이트와 융의 서신 교환에서

 

위 융의 편지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모든 걸 성적인 것으로 볼 수 없다고 딱 잘라서 말해버리고 있네요. 때로는 배고픔도 있고 다른 것도 있을 수 있다고 말이에요. 그리고 프로이트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는지, 제가 연구하는 방법이 이러해서 그런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는 느낌의 편지를 보내구요. ^^

 

선생님 말은 틀렸어요! 근데 제가 틀렸다고 말하는 이유는 제 생각이 선생님과 좀 달라서 그러니 이해해 주세요.(선생님 몰래 : 근데 선생님 말은 틀린 것 같아요.)’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저만 느끼는 감정일까요.^^

 

융의 영혼의 지도의 저자 스타인 박사는 프로이트의 성적 리비도 이론은 순환논법이라면서 좀 더 쉽게 프로이트 이론의 허점을 밝혀줍니다. 순환논법은 A를 증명하려고 내세운 B라는 조건이 A가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 경우를 뜻합니다. 스타인 박사의 인용을 빌려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현실에 대한 집착은 성적 관심에 의해 생긴다. (증명하려는 A)

정신 장애는 성적 흥미를 잃어서 그렇다. (A를 증명하려는 조건 B)

그러므로 성적 관심은 현실에 대한 집착을 의미한다.(증명하려는 A와 같은 말)

 

.. 가벼운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을까요?

 

젖소는 우유를 만든다.(증명하려는 A)

우유는 젖소가 만든다.(A를 증명하려는 조건 B)

그러므로 젖소는 우유를 만든다.(증명하려는 A와 같은 말)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얼마나 이상한지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논리는 우리가 흔히 상식이라고 말하는 조언을 마주할 때 품는 의문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노력은 성공을 만든다’, ‘성공은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성공은 노력이다.’라는 상식을 들었을 때 어떤 분은 불쾌함을 느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개인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노력이 성공이란 조언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니까요.

 

아무튼 이런 점 때문에 융은 프로이트의 리비도 이론을 그대로 발전시키지 않고, 쇼펜하우어가 사용한 넒은 의미의 리비도, 즉 의지(Will)라는 정신 에너지를 리비도로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프로이트의 이론이 더 옳다고 생각하시나요? ^^

 

 

정신 에너지의 변화

 

어떻게 단순한 본능의 한 표현인 강한 충동에 다른 방출(즉 배가 고파서 먹거나 성적 자극을 받아 교접하는 것)에서 문화적 표현과 노력(즉 고급 요리나 음악을 만드는 것)으로 변화되는가? 언제 이러한 활동들은 본능적이란 말이 주는 의미를 떠나 꽤 다른 의미와 의도를 갖게 되는가? 융은 무의식의 심리학에서, 이러한 에너지의 변형은 유비analogy(유추하고 비슷한 것을 비교)를 만들어내는 인간 마음의 타고난 능력 때문일 수 있다고 말한다.”

- p. 97~98

 

모든 일이 그렇지만 남의 말에 딴지를 걸거나,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습니다. 정상적인 성인이라면 말에 책임을 져야겠죠. 프로이트의 의견에 반대한 이상 융에게도 자신의 의견을 증명할 책임이 부여되었습니다. 그리고 융은 리비도의 변화를 증명하고자 합니다.

 

융은 인간의 모든 활동이 단순한 배고픔이나 성적 욕구에 의해 비롯한다고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만약 인간이 단순한 욕구로만 움직인다면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해 고급 요리를 연구할 필요도 없을 것이니까요. 융은 정신 에너지에 뭔가 다른 것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바로 변화를 시키는 힘이죠. 프로이트의 말대로 성적 에너지로 시작된 것이라도 은유적인 상상을 하고, 같은 행위를 비슷한 것으로 바꾸기도 하고, 상징을 만드는 인간의 행동은 때로 처음과는 전혀 다른 것을 만들기도 한다고 말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융은 정신 에너지를 변화혹은 성장의 의미를 가지는 의지로 본 것이 아닌가 합니다. 아마도 여기서 프로이트와 융이 갈라서게 된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프로이트와 융의 리비도에 대한 입장의 차이는 아래와 같은 느낌이 아닐까합니다.

 

프로이트의 리비도 : 현재 행동(혹은 정신이상)의 원인이 되는 성적 에너지

융의 리비도 : 모든 변화와 성장(혹은 정신이상)의 원인이 되는 의지

 

읽는 분에 따라 느끼는 차이가 다를 것 같습니다, 문예남에게는 아주 큰 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면 프로이트의 이론이라면 지금 현재의 문제를 설명할 수는 있어도, 어떻게 앞으로 발전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긴 어려울 것 같아서입니다.

 

이런 입장의 차이 때문인지 융의 영혼의 지도저자 스타인 박사는 융이 자신의 저작물의 제목에서 리비도라는 단어를 삭제해 버린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볼 것을 독자에게 당부하기도 합니다.

 

융이 변화의 상징1952년 개정판에서는 이 어구를 삭제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리비도의 변화와 상징무의식의 심리학으로 영역되었는데, 리비도의 변화와 상징변화의 상징으로 개정되었다.)”

- p. 101

 

당시 심리학계를 대표하는 프로이트가 창안한 리비도라는 단어를 후발 학자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굉장히 큰 모험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듭니다. 칸트의 뜻을 이어가는 학자, 막스의 뜻을 이어가는 학자 등 학문은 앞선 학문을 이어가며 발전하기도 하니까요. 좀 거칠게 말하면 융은 자신의 족보를 잃어버릴 수도 있는 입장은 아니었을까 하네요.

 

아무튼 융은 리비도가 성적 욕망이나, 성적 집착이나, 성적 억압의 결과물이라고 보아서는 안 되며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에 가까운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삶의 전반부의 의지는 성장을 위한 것이고, 후반부의 의지는 죽음을 위한 것이라고 의지를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이 중 죽음을 위한 의지가 있다는 융의 의견은 프로이트보다 10년 정도 더 빨리 제시한 것이라고 하네요.

 

여기까지

 

리비도에 관한 역사적인 이야기와 프로이트와 융이 바라본 리비도의 차이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 밖에 리비도의 퇴행과 전진에 대한 이야기 리비도와 희생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이 더 있지만 여기선 간단하게 다루고 넘어가겠습니다. 리비도 즉, 의지가 퇴행하면 내적 분열이 생기거나 자신을 성찰하게 되고, 의지가 전진하는 경우 긍정적인 효과가 생긴다고 합니다. 여기에 내향적인 성격과 외향적인 성격이 만나 다양한 종류의 행동들이 나올 수 있다고도 하네요. 퇴행 + 내향, 퇴행 + 외향, 전진 + 내향, 전진 + 외향 등처럼 말이에요.

 

또한 융은 리비도에 관한 이론 중 희생이란 개념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부모의 자녀를 위한 희생, 앞세대의 다음 세대를 위한 희생이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유지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에요. 융의 관점에 따르면 희생또한 프로이트가 말한 성적 에너지처럼 가장 근본적인 인간의 욕망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리비도는 융이 바라본 것처럼 미래를 꿈꾸고 있을까요?

^^

 

이상으로 융의 영혼의 지도를 참고한 리비도요약을 마무리 합니다. 다음 요약은 남녀의 차이, 창조력의 차이를 만드는 아나마와 아니무스에 관한 내용입니다. 관심이 있는 분은 다음 요약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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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 내 인생의 책](5)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 유일호 국토교통부 장관

막스 베버의 명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경제학도의 교양필독서로 여겨져 왔다. 필자도 학창시절에 읽어봤으나, 경제사에 대한 흥미가 적어서인지 ‘의무적으로’ 한 번 읽고만 책이 되었다. 그러나 최근 이 책을 다시 보게 되면서 이 책이야말로 읽을수록 그 깊이를 더해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

이 책은 경제사를 논의한다는 점에서 경제학 저서라 할 수 있으나, 오히려 신학적인 깊은 성찰과 사회 변화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어 신학, 사회학, 철학에 두루 통용되는 책이라 하겠다. 잘 알려진 바처럼 직업은 금욕적 삶의 연장선에서 신의 소명에 따른 것이며, 프로테스탄티즘의 여러 교파가 강조하는 독특한 윤리관, 즉 예정설이 근대 자본주의 탄생과 발전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

베버의 신학적 깊이에 평가를 내릴 수는 없지만 경제사에서의 중요한 발견, 사회 현상을 바라보는 대가의 합리적 태도 등을 배우기 위해서라면 일독 이상의 가치가 있는 책이다.

*
전문 읽기
http://goo.gl/oYXV7R



*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와 관련된 다른 기사 읽기

 [서울신문 | 서울대 지망생의 책장-읽어라, 청춘] <40>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 금욕적 절제 아닌 탐욕적 富 축적은 죄악… 현대 사회 진정한 자본주의 ‘길’을 묻다
http://goo.gl/UQu9ox




 [매일경제 | 최효찬의 ‘서울대 권장도서 100선 읽기’] (61)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 서구 ‘자본의 지도’ 바꾼 종교개혁
http://goo.gl/DJkmC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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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피아 2015-10-02 0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공이 구원의 증거~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역사를 공부하는 배경으로도 유익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예출판사 2015-10-05 11:46   좋아요 0 | URL
^^ 감사합니다. 베버의 도서들은 모두 유익하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직업으서의 정치>도 정말 좋은 것 같아요.^^
 

즐거운 한가위가 되길 바라며,
가족과 삶의 풍요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한국 수필의 아름다운 한 구절들을 전합니다.

즐거운 한가위 보내세요.
^^

_문예남 올림.

소개한 내용은
《아름다운 우리 수필》 에서 발췌했습니다.
도서 소개 : http://goo.gl/AEtNkA

*
한 번 내린 눈은, 그러나 그다지 오랫동안은 남아 있어주지는 않는다.
이 지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은 슬픈 일이나 얼마나 단명하며 또 얼마나 없어지기 쉬운가! 그것은 말하자면 기적같이 와서는 행복같이 달아나버리는 것이다.
- 김진섭, <백설부>, 《아름다운 우리 수필》에서

*
멋은 자연스러운 것, 자연스러운 것은 생명 그 자체며 정신이나 행동거지에서도 자연스러울 때 멋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멋은 균형이며, 균형은 존재하게 하는 것이며, 예술가가 작품 제작에 임해 균형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생명을 추구하는 것이다.
- 박경리, <생명과 영혼의 율동으로서의 멋>, 《아름다운 우리 수필》에서

*
만나면 만날수록 큰 하나가 되는 것이 물이다. 두 물줄기가 만나 큰 흐름이 되는 모습을 내려다보노라면, `물이 사는 방법이 저것이로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만나고 만나서 줄기가 커지고 흐름이 느려지는 것. 이렇게 불어난 폭으로 바다에 이르는 흐름이 되는 것.
- 유경환, <두물머리>, 《아름다운 우리 수필》에서

*
가을 달을 지키며 가슴 저려 하고, 애달픈 그리움으로 가슴 적시는 영혼은 지순하고 순결한 영혼이다.
그건 부끄러움이 아니며, 가식이 아니며, 철없음이 아니며 위선은 더구나 아니다. 왜냐하면 그 행위가 누구에게 보이고자 함이 아니고 오로지 자기 혼자 느끼고 표현되는 것이어서다.
- 김초혜, <이 청정의 가을에>, 《아름다운 우리 수필》에서

*
나에게 있어 진짜 책은 딱 한 권이다. 이 한 권의 책, 원형의 책, 영원히 다 읽지 못하는 책, 그것이 나의 어머니다.
- 이어령, <나의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개의 은유>, 《아름다운 우리 수필》에서

#아름다운 #책속의한줄과 #함께 #즐거운 #한가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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