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터 문예남의 책 소개


최고의 시인 중 한 명인 릴케의 글은 ​감수성이 예민하고, 말로 설명하기 힘든 복잡미묘한 감정을 정확하게 풀어내고 싶은 분에게 추천하고 싶은 글입니다. 릴케의 글은 자신의 마음과 세상을 정확하게 보려고 한 대표적인 시인이기 때문입니다.


예로 우리로 하여금 수많은 감정을 가지게 하는 죽음에 대해 이렇게 간단하게 표현해 버립니다.


"죽음이 나타나서

그것(삶)을 단번에 쥐어뜯어 버렸어.

연한 점토 같은 것을 잡아떼듯이.​"

-<묘지기> 중에서

그래서 그런지 릴케를 설명하는 글에는 진실을 발견하는 통찰력과 진실을 형상화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말을 접하게 되는데요. 여기선 진실, 통찰, 형상화 같은 어려운 말은 잠시 내려두겠습니다. (어렵게 말할 재주도 없는 데다 제가 보기에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건 두 번째로 중요한 것 같아서입니다.)

아무튼, 감수성이 예민한 분들이라면 자신의 복잡한 감정을 정확하게 풀어내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행동이 그러하듯 마음에도 원인과 결과가 있을 것이니까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결과인 마음은 있는데 원인은 정확하게 표현하기 쉽지 않을 때가 많은 것 같기도 합니다.


앞의 예문을 빌려 말하면 '죽음은 무섭다는 감정'은 있지만, 왜 무서워해야 하는지에 대해 '그냥 죽으니까' 이상의 말을 하기는 어려워하는 거죠. 어쩌면 릴케가 비유했듯이 죽음은 나의 생명을 '연한 점토' 다루듯 무심하게 취급한다는 것에 원인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음보다 내가 살아온 인생, 내가 살아갈 인생이 죽음 앞에 무가치해지는 것을 인정할 수 없어서 말하기 어려워지는 것은 아닐까요. 때로 진실은 잔혹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분이라면 그런 부분을 조금은 더 많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릴케의 글은 잔혹한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점에서 용기가 필요한 사람, 삶의 방향성이 필요한 분이 읽어도 좋을 글인 것 같기도 합니다. 릴케의 대표작 중 하나인 《말테의 수기》는 도시에서 온갖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한 청년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기도 하니까요.

릴케는 《말테의 수기》에서 불편한 진실을 이겨낼 진실된 방법으로 '사랑'을 선택했지만, 미래를 살아갈 독자 여러분은 또다른 삶의 방향을 선택할 수도 있겠죠.^^

감수성이 예민하신 분, 복잡미묘한 감정을 표현하고 싶고, 그런 감정에 사로​​잡혀 갈팡질팡하는 분이라면 세상의 진실을 보는 릴케의 시선을 그의 글로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_문예남 올림.​




■ 출판사 서평  


고독과 불안을 통해

인간의 내면세계를 파고든 릴케의 대표 단편선!

 

섬세한 심리 묘사와 예리한 관찰력으로 20세기 독일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가 된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의 단편을 모은 《릴케 단편선》이 문예출판사 세계문학선 121번으로 출간됐다. 그로테스크와 아름다움이라는 두 정서가 만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릴케의 단편들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 13편을 선별했다. 죽음, 고독, 사랑, 아름다움 등에 관한 신비적 상관성을 궁극까지 추구한 릴케 작품의 시작을 알리는 《릴케 단편선》에서는, 새로운 현실성을 추구하며 20세기 소설의 선구가 된 《말테의 수기》의 태동을 접할 수 있다. 릴케의 유년 시절과 러시아 여행의 체험이 녹아 있는 자전적 성격의 단편들을 통해 그의 삶과 작품 세계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작품 줄거리 
릴케는 현실을 초월하는 영혼의 음향을 전하고, 언어의 형식미를 탐구해 표현의 한계를 확대시킨 독일 시의 거장이기도 하지만, 여러 편의 훌륭한 소설들을 남기기도 했다. 세속과 경건함 사이에서 고뇌하는 조각가의 이야기인 <모두를 하나로>는 삶과 예술 사이에서 갈등하며, 우연한 것을 필연적이고 영원한 것으로 변형시키고자 하는 한 예술가의 고뇌와 갈등을 담은 작품이다. <집>은 뛰어난 어느 도안가가 2년간의 해외 견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며 겪는 기이한 체험을 담았다. <목소리>와 <구름의 화가>에서는 일상에서 벗어난 또 다른 세계를 들여다보는 이야기가 펼쳐지며, <노인>에서는 한 노인의 관찰을 통해 그의 내면세계를 엿보게 된다. <새하얀 행복>과 <묘지기>에서는 각각 새로운 빛과 인물을 매개체로 일상과는 다른 뜻밖의 낯선 사건‧세계와 조우하며, <대화>에서는 두 주인공이 예술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를 이야기하는데 특히, 신이 만든 세상을 뛰어넘는 예술을 주체적으로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카지미르의 예술관은 릴케의 그것과 닮아 있다. 그 외에 가난한 사랑 앞에 선 연인의 모습을 통해 사랑과 결혼, 조건의 문제를 다룬 <어느 사랑 이야기>와 러시아 여행을 통해 인식의 지평을 넓힌 릴케의 흔적이 담겨 있는 <죽음의 동화>, 미래의 삶을 지향하는 청년 릴케의 꿈을 담은 자서전적인 내용의 소설이자 《말테의 수기》가 나오게 된 배경이 된 작품인 <에발트 트라기> 등을 실었다.

 

릴케의 삶과 예술관이 투영된 릴케 단편선 
제1차 세계대전 시대의 혼란한 세상 속에서 릴케가 추구한 것은 인간 생존의 의미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섬세한 감수성으로 근대사회의 모순을 번뇌하고, 고독·불안·죽음·사랑·초월자 등의 문제에 관해 깊이 있는 작품들을 써내려갔다. 이러한 주제에 대해 평생을 탐구하고 작품 세계를 넓혀간 릴케의 작가 정신을 고려해볼 때, 그의 초년기에 완성된 단편들은 릴케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특히 《말테의 수기》에서 릴케가 보여준 언어와 사물의 무질서한 상태, 부조리하고 터무니없는 것이 일상적인 것만큼이나 현실적으로 보이는 분위기, 정신적 연관 관계에서 해체되어 나온 사물들의 허무와 죽음이 상징하는 징후들을 단편 작품들에서 포착할 수 있다. 또한, 이들 단편들에서 보이는 결핍과 고독을 통해, 릴케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진정한 예술가의 상, 즉 무소유와 순수의 경지를 통해 내면세계에 도달하려는 자세를 발견할 수 있다는 데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 차례

 

모두를 하나로 

목소리 
구름의 화가 
노인 
새하얀 행복 
묘지기 
대화 
어느 사랑 이야기 
마지막 사람들 
하느님의 손 
죽음의 동화 
에발트 트라기

 

작품 해설
릴케의 삶과 작품에 대하여


■ 본문 엿보기


■ 갑자기 소녀가 소리쳤다.
“어머나, 이건 실제의 성모상이 아니군요.”
작업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아서 애태우고 있던 베르너는 의아스러운 듯이 눈을 들었다. 생쥐는 난처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보조개처럼 오목하게 오므린 귀여운 손으로 단단히 입을 가렸다.
“어째서?” 하고 베르너가 물었다.
“왜냐하면…… 잘 말할 수가 없어요.”
소녀는 말을 끊고 심술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럼 영특한 아가씨, 대체 누구로 보이지?”

-〈모두를 하나로> 중에서, 13쪽


■  “새하얀 방을 가지고 있어요. 벽이 밝아서, 바깥은 잿빛으로 흐린 날에도 햇살이 조금은 남아 있는 것 같아요. 바깥은 흐린 날이 많아요. 하지만 제 방은 언제나 밝아요. 창문에는 새하얀 무명 커튼이 있고, 그 뒤에 새하얀 꽃만 잔뜩 놓여 있어요. 작은 꽃이에요. 제 방에서는 완전히 피어나는 법이 없어요. 향기도 강하지 않고요. 하지만 모든 것에서 그 향기가 풍겨요. 제 손수건도, 제 베개도, 제가 즐겨 읽는 책도. 매일 아침 아가테 수녀님이 와서 살짝 미소를 짓습니다. 그분은 제 방에 올 때마다 언제나 미소를 짓고 있어요. 그리고 새하얀 수녀 두건을 쓰고 제 침대 옆에 앉지요. (중략)”

-〈새하얀 행복> 중에서, 56쪽


■ “나쁘게 받아들이지 말게, 헤르만. 하지만…… 자네는…… 그녀를 못 쓰게 만들 거야…….” 사이.
헤르만 홀처는 담배를 입에서 떼어 탁자 가장자리에 조용히 내려놓는다. 가느다란 연기가 방 한가운데에서 꼿꼿이 피어오른다. 무의식중에 두 사람의 눈이 이 느릿하고 조용한 움직임을 뒤쫓는다. 이윽고 홀처는 의자 하나를 두 손으로 잡아서 들어 올리려고 한다. 그것을 갑자기 밑으로 떨어뜨린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외치듯이 말한다.
“자네 돌았나?”
“제발 조용히 얘기하자고…….”
에른스트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고 있다.
그러나 홀처는 아직 그렇게 흥분하고 있지는 않다.
“내가…… 그녀를…… 못 쓰게 한다…….”

-〈어느 사랑 이야기〉 중에서, 93쪽


■ 어느 날 아침의 일입니다. 이 오른쪽 문 앞에서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그것이 죽음임을 알아차리고 급히 문을 닫았습니다. 그러고는 하루 종일 문을 굳게 닫아두었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죽음은 왼쪽 문 앞에 나타났습니다. 여자는 떨면서 문을 닫고 든든한 빗장을 걸었습니다. 두 사람은 이 일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두 문을 여는 일이 드물어졌습니다. 그리고 집 안에 있는 것으로 살림을 해 나가려고 애썼습니다. 물론 생활도 이전보다는 훨씬 어려워졌습니다. 저장품이 날로 줄어들고 갖가지 근심사도 생겨났습니다. 두 사람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어느 긴 밤이었습니다.

-〈죽음의 동화> 중에서, 170쪽


■ “인생이란 아득하게 먼 것이지만 그 속에 있는 것은 아주 적어요. 영원한 것이 결국 하나의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난 불안해지고 지쳐버립니다. 어렸을 때 나는 이탈리아에 간 적이 있습니다. 잘 기억하진 못하나, 여하튼 이탈리아의 시골에서 길을 가던 도중에 농부에게 ‘마을까지는 얼마쯤 남았나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반 시간쯤 남았지’라는 대답이었습니다. 다음번에 만난 농부도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대답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하루 종일 걸었건만 마을은 끝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인생도 이것과 같아요. 그러나 꿈속에서는 뭐든지 가까이 있거든요. 그래서 불안을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는 본래 꿈에 맞도록 만들어졌으며, 삶을 위한 기관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아요. 그런데도 우리는 물고기인 주제에 날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그런 짓을 해서 어떻게 한다는 것이죠.”

-〈에발트 트라기〉 중에서, 233쪽

 

 

 

 

■ 지은이 소개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본명은 르네 마리아 릴케였으나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의 권유로 르네를 라이너로 고쳐 부름)는 1875년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병약한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아버지의 뜻에 따라 육군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한 뒤 시를 쓰기 시작해 열아홉 살에 첫 시집을 출판했다. 뮌헨대학을 졸업할 무렵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를 알게 되었는데, 그녀는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데 참다운 안내자 역할을 해준 정신적 후원자였다. 이후 조각가 로댕의 문하생인 베스토프와 결혼했으나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생겼고, 《로댕론》을 집필하려고 부부가 번갈아가며 파리에 머물면서 자연스럽게 별거 생활을 시작했다.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르네상스 회화에 눈을 뜨며 루 살로메에게 보내려고 쓴 《피렌체 일기》, 체코 민족 독립운동에 공감을 표한 단편집 《프라하의 두 이야기》, 루 살로메와 동행한 두 차례의 러시아 여행을 토대로 쓴 《기도시집》, 로댕의 영향으로 강한 조형성이 드러난 《신시집》, 하이데거 등이 자주 철학적 고찰의 대상으로 삼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를 비롯 《형상시집》, 《두이노의 비가》 등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그는 말년에 병고에 시달렸으나 폴 발레리, 앙드레 지드 등 많은 프랑스 문인과의 교류는 끊이지 않았다. 1926년 스위스 발몽 요양소에서 백혈병으로 죽었으며, 나흘 후 소망하던 대로 발리스 벌판이 훤히 보이는 라로뉴의 교회 묘지에 묻혔다. 


■ 옮긴이 소개

 

송영택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독문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강사로 재직했으며, 시인으로 활동하면서 한국문인협회 사무국장과 이사를 역임했다. 저서로는 시집 《너와 나의 목숨을 위하여》가 있고, 번역서로는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괴테 시집》, 릴케 《말테의 수기》, 《어느 시인의 고백》, 《릴케 시집》, 《릴케 후기 시집》, 헤세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시집》, 힐티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레마르크 《개선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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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 http://goo.gl/TDSMw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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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 2016-04-29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감사합니다!!

문예출판사 2016-05-27 16:58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리보기(<-클릭)


■ 출판사 서평 

 

탈정치화의 시대에서 
미학적 감성의 부활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인 프랑코 비포(Franco Berardi)는 미래란 알려지지 않은 시간인 동시에 공간이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적 근대화가 전 지구적으로 확산된 지금, 우리는 미래를 상실한 것일지도 모른다. 자본주의는 모든 공간을 ‘자본주의화’시키며 문화와 인격성의 영역까지 식민화를 진행시켰기 때문이다. 그 결과 타자성의 상실과 함께 우리의 존재를 변화시키는 또 다른 미래 역시 사라졌다. 
한국 사회와 문학의 접점을 꾸준하게 연구해온 나병철 교수의 새 책, 《미래 이후의 미학 : 유혹사회에서의 보이지 않는 정치와 문학》은 미래를 상실한 지금, 다른 방식의 미래를 말할 시점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모두가 똑같이 부유함과 일류의 삶을 꿈꾸는 이미 정해진 미래가 아닌, 타자와 교섭하며 정신의 식민화에서 벗어나려는 또 다른 길을 찾는 미래가 바로 그것이다. 저자는 배수아의 소설과 용산참사를 다룬 《두 개의 문》, 공지영의 《의자놀이》와 5포 세대의 아픔을 그린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통해 지배 권력에 대항하는 미학 쪽의 감성의 정치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유혹의 권력과 죽음정치에 대한 미학적 대응

저자는 우리 시대의 특징을 ‘유혹의 권력’과 ‘죽음정치’라는 개념을 통해 바라본다. 유혹의 권력이란 푸코가 말한 삶권력의 유혹장치가 극에 달한 방식을 말한다. 푸코는 규율에 길들여지는 대가로 삶을 부양해주는 방식을 삶권력이라고 말했다. 노동력은 상품화되었지만 신체 자체는 아직 상품화되지 않은 시대에는 유순한 몸을 생산하는 규율화가 필요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신체와 감정을 포함한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시대이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유혹의 환상 속에서 자발적으로 자본주의에 동화되어 성과의 경쟁에 나선다. 삶권력이 극단화된 유혹사회는 자기계발서나 힐링이 보편화된 사회다. 자기계발을 통해 성공할 수 있다는 거짓된 희망을 사람들에게 심어줌으로써 자본주의의 어두운 절망을 감출 수 있었다.  

 

유혹사회가 우리의 모든 것을 좌우하면서, 쓸모없어져 물건처럼 폐기되는 사람들은 더욱 늘어났다. 음벰베(Archille Mbembe)는 신체와 생명을 권력의 처분 아래 놓으면서 유용성이 사라진 사람들을 죽음의 위협에 유기하는 권력을 죽음정치라고 불렀다. 자본주의 체제는 폐품처럼 쓸모없어진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 세상이기 때문에 죽음정치가 더 기세를 부리고 있지만, 도리어 사람들의 눈에는 잘 포착되지 않는다. 유혹의 정치가 다양하게 발전해 죽음정치가 횡횡하는 사회를 은밀하게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리 시대가 우울증을 앓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유혹의 권력과 죽음정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선 현실을 직시하는 것에서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절망을 안다는 것은 빛의 유혹 앞에서 자신이 실직자이고 파산자이며 비정규직임을 아는 것을 말한다. 공허한 희망만을 보게 하는 유혹의 권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문학과 예술은 새로운 감성의 영역에서 정치화를 시도해야 한다. 배수아의 소설 공간에 드리워진 ‘이상한 고요함’, 《두 개의 문》의 ‘망각의 문’, 《의자놀이》의 ‘의자놀이’ 장치,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성실한 나라’ 등은 모두 유혹의 권력 시대의 감성적 권력 장치들이다. 이 작품들은 모두 지배권력에 의해 은밀하게 작동하는 유혹의 장치를 드러내어 직시하게 해준다. 우리는 이러한 작품들을 보거나 읽으며, 한국 사회의 어둠을 눈치채게 된다. 그렇기에 감성의 영역은 탈정치화된 시대에 정치가 가능한 마지막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혐오의 시대에 새로운 미학은 어떻게 맞설 것인가

지금 한국의 현실은 혐오발화가 난무하는 시대다.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에서부터 여성혐오 발언들, 이주노동자를 비롯해 소수자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폭력의 언어는 우리 사회가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상실한 사회라는 것을 보여준다. 부의 생산이나 국가, 민족 같은 상상력 동일성을 향한 환상이 커지면서, 이제 사람들이 고통받는 타자를 외면하고 비슷한 계층들을 공격하는 일까지 하게 된다. 유혹사회의 구성원들은 국가권력을 대신해 자진해서 타자들을 배제함으로써 상상적 동일화를 고착화시킨다.


이러한 혐오발화는 단순히 사회적인 분위기를 흐리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혐오발화가 성행하면 아무리 사회 모순이 심화되어도 건강한 저항적 행동이 생성하지 않는다. 이제 고통받는 타자는 보이지 않거나 회피하고 싶은 존재로 보이게 된다. 혐오발화는 이런 방식으로 경계 부근의 타자에게 관심이 멀어지게 하면서 자조감 속에서 절망을 외면하게 만든다.


혐오발화에 맞서 미학적인 감성의 장치는 목적론적 정치와 달리 양가적 방식을 사용한다. 타자에 대한 혐오를 “홍어”, “어묵”, “벌레” 같은 저열한 유동성과 동물성의 이미지를 덧씌우는 혐오발화와는 달리, 미학적 은유는 그런 비천한 존재(앱젝트)를 부산물과 유동성의 본체인 생명적 존재로 되돌리며 미결정적인 동요를 생성시킨다. 비천한 신체가 그 자체로서 생명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 모순의 힘으로 상상적 동일성의 영역에 동요가 일어나는 것이다. 저자는 손창섭의 〈포말의 의지〉에서의 금지된 종소리, 황석영의 〈몰개월의 새〉에서의 오뚝이 선물, 김이설의 《환영》에서의 상품화될 수 없는 비천한 신체, 권여선의 《레가토》에서의 상실된 순수기억을 되찾는 이야기들, 이것들이 타자성의 회복을 통해 비천한 신체에게 살아야 할 존재의 이유를 증명해주는 은유들이다.


다시, 미래 이후의 미학을 위해

오늘날은 탈정치화의 상황에서 보이지 않는 감성적 정치가 계속되는 시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잠시라도 미학적 발명을 소홀히 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지금 난무하고 있는 혐오발화는 바로 이러한 미학적 직무유기에 대한 역사가 내리는 감성적 경고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미학적 은유는 정치의 귀환을 위해 텍스트를 넘어서 현실로 흘러넘쳐야 한다. 즉 타자에 대한 공감을 회복시키고 흩어진 사람들을 물밑에서 연대시키기 위해서는 정치적 저항에서도 미학적 은유의 형식이 필요하다.


유혹의 권력과 감성의 권력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잘 대응하지 못하며 정치가 실종되었다고 한탄한다. 정치의 실종은 타자의 소멸이자 미래의 상실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타자와 은폐된 절망을 보는 것이며 그 일을 하는 활동이 미학적인 은유적 정치라고 이 책은 강조하고 있다.



■ 차례 

머리말


제1장 보이지 않는 정치의 귀환
1. 길 없는 길 — 미래 이후의 미래
2. ‘길 없는 길’의 행위자로서 특이성과 보이지 않는 타자 
3. 삶권력과 죽음정치 — 유혹의 권력의 두 얼굴 
4. 절망을 껴안고 권력과 동거하기 — 절망과 저항의 양가성 
5. 벌거벗은 생명과 벌거벗은 타자 
6. 저항을 위한 교섭의 위치로서의 벌거벗은 타자 
7. 죽음정치의 시대와 타자를 향한 ‘포말의 의지’ 
8. 죽음정치와 죽음정치적 노동  
9. 존재론적 정치와 에로스 효과로서의 민중봉기 
10. 아직 끝난 게 아니다 — 공감의 유전자와 원효의 존재의 비밀

 

제 2 장 유혹의 권력과 죽음정치에 대한 존재론적 대응
1. 유혹의 권력과 신자유주의 
2. 유혹의 권력 시대의 죽음정치 
3. 쇼크 독트린에 대응하는 트라우마의 기억 
4. 쾌락원칙을 넘어서는 양가성의 진리 
5. 죽음정치와 낯선 두려움, 그리고 식민지의 유민 
6. 식민지적 죽음정치와 기민으로서의 이주노동자 
7. 국가서사의 허구성을 파열시키는 기민/난민의 트라우마의 기억 
8. 트라우마의 기억과 에로스의 기억, 그리고 순수기억
9. 죽음정치의 역사와 디세미네이션의 미학

 

제3장 식민지 시대의 유민의 발생과 은유로서의 디세미네이션
1. 1920년대의 유민의 발생과 디세미네이션 
2. 식민지 민족의 양가성과 디세미네이션의 미학 
3. 집단적 민중의 움직임과 산포된 존재의 네트워크 
4. 식민지 근대에 대항하는 디세미네이션의 미학

 

제4장 산업화 시대의 내부의 유민과 디세미네이션의 미학
1. 개발주의 시대의 유민과 내부의 디아스포라
2. 전태일의 존재론적 저항 — ‘낯선 두려움’에서 ‘마음의 고향’으로 
3. 은밀성의 영역의 난민과 유민화된 민중 
4. 죽음정치적 노동자들의 연대와 존재론적 대응
5. 집을 잃은 사람들의 낯선 두려움과 벌거벗은 타자
6. 초국가적 맥락에서의 죽음정치와 존재론적 대응으로서의 디세미네이션의 연대

 

제5장 삶권력과 자본주의의 존재론적 운동
1. 삶권력과 죽음정치의 관계와 무의식 
2. 자본의 자기갱신운동과 삶권력 
3. ‘은유로서의 화폐’의 무의식과 ‘은유로서의 네이션’의 무의식 
4. 〈운수 좋은 날〉과 두 개의 무의식 — 타자의 위치에서의 동요 
5. 《삼대》의 대화적 무의식과 주체의 동요 
6. 《환영》에 나타난 감정과 성의 상품화 — 후기자본주의의 《자본론》

 

제6장 삶권력과 죽음정치에 대항하는 순수기억의 창조적 존재론
1. 무의식에 작용하는 삶권력과 순수기억의 대응 
2. 습관기억의 억압과 순수기억의 혁명 —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3. 화폐의 무의식과 순수기억의 무의식 
4. 식민지의 죽음정치에 대한 순수기억의 대응 — 백석의 시 
5. 순수기억의 시간과 영화 — 김기덕의 《빈집》 
6. 잉여향락의 공간과 순수기억의 시간 — 김기덕의 《시간》 
7. 순수기억의 정치화 
8. 순수기억과 상처의 기억
9. 베르그송의 순수기억과 라캉의 대상 a 
10. 잃어버린 ‘순수기억’을 찾아서 — 권여선의 《레가토》

 

제7장 유혹의 권력과 미래 이후의 미학
1. 유혹의 권력과 낯선 두려움 
2. 규율사회에서 유혹사회로 
3. 자본의 가속도와 유혹의 권력 — 송경아의 〈엘리베이터〉 
4. 유혹사회의 공간적 폐쇄성 — 배수아의 우울의 미학 
5. 성장 없는 성장소설과 죽음정치에 대한 ‘슬픈 응수’ 
6. 배수아 소설에 암시된 유혹사회 속의 죽음정치
7. 유동체에 대한 열망과 은유 — 베르그송과 마르크스, 그리고 원효
8. 유동체의 회복 — 춤과 참선 
9. 선시와 리얼리즘의 결합 — 송경동의 시 
10. 부서진 디세미네이션과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11. 구조화된 불평등성과 감성의 분할, 그리고 혐오발화
12. 혐오발화와 ‘계급적 인종’
13. 혐오의 은유와 미학의 은유 
14. 물밑에 있는 타자와 은유로서의 정치 
15. 길 없는 길과 미학적 은유 
16. 분노의 계보학 
17. 길 없는 길과 미래 이후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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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엿보기

 

■ 절망을 시간의 차원에서 말하면 미래의 말소이다. 비판적 담론이 소멸된 1930년대 중반, 작가 이상은 “희망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인다”고 되뇌었다. 오늘날의 절망적인 정치의 해체는 결국 희망의 말소이자 미래의 상실이다. 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미래의 한 쪽이 붕괴된 상황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TV나 신문에서 미래는 주로 자본주의와 테크놀로지의 발전 쪽에서만 말해진다. 미래학자들이란 연성화된 경제전문가들이거나 과학자들이다. 그들은 누구도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비판과 변화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와 테크놀로지의 개발은 딕셔너리 넘어가듯 계속되지만 그 페이지들에는 또 다른 미래라는 그림이 말소되어 있다. (24쪽)


■ 우리는 이 같은 타자의 상실이 미래의 붕괴의 증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타자에 대한 혐오는 병리화된 미래의 징후이다. 자본주의와 테크놀로지의 발전만을 미래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타자와 사건을 대면할 때의 존재방식 및 사회의 변화의 필연성에 둔감해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미래로 질주하는 자본주의와 테크놀로지가 쏟아낼 신세계의 잉여향락을 타자들이 훔쳐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경제성장의 둔화와 수출의 감소는 모두 그들 탓이다. 과거에 파시즘은 유대인들이 대중들의 향락을 훔쳐가고 있다고 그들을 혐오하게 만들었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는 경제성장과 자본주의적 세계화에 걸림돌이 되는 타자들을 혐오하게 만들고 있다. (34쪽)


■ 삶권력과 죽음정치의 구성적 결합은 1920년대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이 시기의 문화정치는 어둠 속의 ‘묘지’였던 1910년대 식민지 자본주의를 빛의 영역으로 이동시킨 삶권력의 전략이었다. 이광수는 《재생》 에서 “연애와 돈이 정신을 지배하는 종교가 되었다고” 말했는데 이는 식민지 자본주의가 지식인과 소시민에게 삶권력적 유혹으로 침투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트랜스내셔널한 권력으로서 식민지 자본주의는 최대의 이윤을 짜내기 위해 농민과 노동자들을 과도한 착취로 죽음에 유기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노동지옥’을 경험하고 있었고 농민들은 소작권을 빼앗긴 채 유이민으로 떠돌아야 했다. 문화정치라는 삶권력은 자본주의적 개발을 전제로 한 것으로 지식인과 소시민에게는 유혹이었지만 노동자와 농민에게는 죽음정치였던 것이다. (43쪽)


■ 손창섭의 우울의 미학은 훼손된 타자가 절망에 방치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타자성을 상실하고 비판담론이 무력화된 당시의 반공주의적 국가주의와 연관이 있다. 우울의 미학은 회복이 불가능한 상처 입은 타자에 대한 폭력의 고발이다. 우울의 미학에도 타자성의 갈망이 있지만 그것이 삶 속에서의 소망으로 표현되지는 못한다. 반면에 슬픔의 미학은 삶 속에서의 타자에 대한 갈망과 교섭의 표현이다. (76쪽)

 

■ 세월호 사건은 화려한 스펙터클에 가려져 있던 우리 시대의 절망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러나 그런 상처와 트라우마를 외면하지 않는 한 우리의 내면에서는 그 고통에 대응하는 에너지로 인해 이미 존재론적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는 셈이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으며 여전히 비슷한 절망이 계속된다. 가시적인 차원에서 보면 어디에도 희망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호에 대한 담론이 많아졌다는 것은 존재론적 에너지가 폭증하며 127 보이지 않는 물밑에서 공감의 연대가 부활하기 시작했음을 암시한다. 그 물밑의 동요가 기적처럼 세상을 바꾸려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107쪽)

 

■ 순수기억으로서의 고향은 식민지 자본주의 현실에서 억압된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 식민지 자본주의는 도시에서 삶권력으로 사람들을 유혹하기도 했지만 농촌에서는 사람들을 유민으로 만드는 죽음정치로 작용했다. 백석이 시를 쓴 1930년대 후반은 일제의 파시즘으로 그 죽음정치적 억압이 더 강화된 상태에 있었다. 그 같은 억압된 고통과 아픔, 그것이 ‘나’의 병의 원인일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그 병인을 낯선 두려움(unhomely)으로 살핀 바 있다. 의원의 손길에 이끌린 고향의 귀환은 그런 현실의 억압에서 되돌아오는 순수기억의 약동과 반격을 시사한다. (322쪽)


 

 

■ 지은이 소개

 

나병철
연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수원대학교 국문과 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교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로 있다. 
지은 책으로 《소설이란 무엇인가》, 《문학의 이해》, 《전환기의 근대문학》, 《근대성과 근대문학》, 《한국문학의 근대성과 탈근대성》, 《소설의 이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서》, 《근대서사와 탈식민주의》, 《탈식민주의와 근대문학》, 《소설과 서사문화》, 《가족 로망스》, 《소설의 귀환과 도전적 서사》, 《은유로서의 네이션과 트랜스내셔널 연대》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문학교육론》 (제임스 그리블), 《냉전시대 한국의 문학과 영화》(테드 휴즈), 《문화의 위치》(호미 바바),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정치와 문화》(마이클 라이언), 《해체론과 변증법》(마이클 라이언), 《중국문화 중국정신》(C. A. S. 윌리엄스), 《서비스 이코노미》(이진경) 등이 있다.
주요논문으로는 <탈식민주의와 정전의 재구성>, <탈식민 소설과 트랜스내셔널의 전망>, <탈식민 소설과 트랜스내셔널의 전망>, <청소년 환상소설의 통과제의 형식과 문학교육>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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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몸과 마음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퓰리처상 수상 작가 나탈리 앤지어
생물학 이론을 바탕으로
여성의 몸과 마음을 도발적으로 해석한 책
《여자, 내밀한 몸의 정체》를 저술하여 전미도서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여자, 내밀한 몸의 정체》가 단순히 여성의 건강한 몸을 위한
설명서라든가, 여성의 인권을 말하는 페미니즘 도서였다면,
그런 상을 받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 책은 생물학을 바탕으로
여성의 몸과 마음에 대한 편견을 깨고
여성의 몸과 마음으로 어떤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저술된 도서입니다.

과학이 많이 발전했지만 여전히
여성에 대한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시선들이 존재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남자로부터 여자가 태어났고,
그렇기 때문여 여자는 뭔가 결핍되어 있다는 시선이죠.


"남자에게서 여자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 창 2장 21~24절



더불어, 남성들이 여성들을 바라보며 품는
잘못된 성(性)적 상상도 있죠. 

여기에 대해서는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여성의 신체가 남성의 성(性)적 상상을 해소하기 위한
비밀스런 마법사는 아니라는 거죠.

여성이 자신의 몸을 통해 어떤 기쁨을 느낀다면,
그건 남성 때문에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고유한 기쁨이 있다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여자가 자신의 몸과 마음의 기쁨을 말할 때,
남자와 비교할 필요가 필요가 없습니다.

여자만의 특별하고 신성하고
축복받아야 할 부분이 있으니까요.

오히려 그런 부분을 남자에게 잘 알려줘야 겠죠.
'엉뚱한 생각하지 말라'고요.

만약 공감이 되신다면 《여자, 내밀한 몸의 정체》 연재 1화.
<빛 속으로>를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자매들이여, 우리가 컵과 병이며 용기와 상자인가?
우리는 자궁이라는 거미줄 안에 웅크린 채 천체를 짜는 거미인가, 
아니면 은밀한 지하에 살고 있는 눈먼 거미인가?
우리는 그렇게 내밀하고 신비스러운가?
헤카테여, 그렇지 않다!





들어가는 말

빛 속으로




이 책은 여성의 몸을 찬양하는 책이다. 여성의 신체 구조와 생화학과 진화와 웃음을 말이다. 이 책은 생물학적 결정론이라는 오물 속으로 빠지지 않으면서 여성이라는 존재의 생물학을 고찰할 방법을 찾으려고 시도한 사사로운 책이다. 이 책은 우리가 기존에 여성을 생각할 때 떠올리는 이미지들, 이를테면 자궁, 난자, 유방, 월경, 그리고 그 대단한 클리토리스 같은 것들과 활동, 힘, 공격성, 분노처럼 여성과 연관시키지 않는 것들을 다룬다.


이 책은 환희를 다룬 책이다. 몸의 아름다운 부위들, 육체에 단단히 뿌리를 박은 환희를 말이다. 여성의 몸은 디오니소스적 존중을 받아야 마땅하며, 나는 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가 가장 잘 알고 가장 사랑하는, 모범이 되는 인물들과 괴짜들을 동원하려 한다. 나는 우리가 여성적이라고 부르는 부위들을 작업 지도로 그리고, 그 바탕에 깔린 원동력을 설명하기 위해 과학과 의학을 불러내려 한다. 나는 우리의 내밀한 지리학의 기원을, 말하자면 왜 우리의 몸은 이런 모습을 하고 있으며 왜 이런 움직임을 보이는지, 왜 매끄럽고 둥근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꼴사납고 서툰 행동을 하는지를 규명하기 위해 다윈과 진화론에 의지하려 한다. 나는 특정한 신체 부위나 신체적 특징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찬사를 받아왔는지 파악하기 위해 역사와 미술과 문학을 뒤지려 한다. 나는 우리의 충동과 행동에 대한 가능한 시나리오들을 쓰기 위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경이로울 정도로 확대된 유전자, 뇌, 호르몬, 발달 지식 중에서 차별적이고 충동적으로 추려내고 골라내려 한다. 나는 유방의 기원, 오르가슴의 목적, 어머니를 향한 애달픈 사랑, 여성들이 거의 똑같은 열정으로 서로를 필요로 하고 거부하는 이유 등을 다룬 관념들과 이론들을 버리려 한다. 이런 이론들 중에는 다른 이론에 비해 불분명한 것이 있다. 나는 인류가 탄생한 이유가 그저 우리 여성 조상들이 난소가 죽었을 때 함께 죽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크리스턴 호크스의 주장처럼, 연구 과정에서 나를 머뭇거리게 만든 재미있고 현혹적인 이론들을 일부 제시하려 한다. 또한 나는 여성 ‘본성’의 한계를 뛰어넘을 정도로 강한, 즉 모순을 지닌 이론들은 버릴 것이고, 나머지 이론들은 신부에게 쌀을 던지듯이 행운과 격려와 희망과 무질서를 위해 내던지려 한다.


디오니소스적 몸 상태를 얻기가 쉽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오랜 세월 동안 여성의 몸을 혐오스럽다고 여겨온 탓이다. 여성의 몸은 지나치게 과장되어왔거나 철저히 무시되어왔다. 그것은 제2의 성, 초벌 원고, 불완전한 성, 미리 규정된 성, 위안거리, 서큐버스〔꿈속에서 남자의 정액을 훔쳐낸다는 여성형 몽마(夢魔)〕, 남성을 파멸시키는 것으로 여겨져왔다. 우리는 음탕하고 정숙하고 야수 같고 천사 같다. 우리는 원하지 않는 태아를 가진 것보다 훨씬 더 부조리한 은유들을 갖고 태어난다.


하지만 여성인 우리는 이 중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쓰레기인지 알고 있다. 잔혹하다는 면에서 아주 산뜻하고 정교하며 거의 비위를 맞추는 듯하지만, 그래도 결국 쓰레기이다. 우리는 남성을 사랑할 수도 있고, 남성과 함께 살 수도 있지만, 그들 중에는 우리와 우리의 몸과 우리의 심리를 터무니없이 부정확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성의 내밀한 곳에 관한 신화를 예로 들어보자. 남성들은 우리의 몸을 쳐다보지만, 우리의 외부 생식기를 쉽게 볼 수 없다. 편리한 삼각형 털가죽이, 즉 치골(恥骨)에 놓인 무화과 나뭇잎이 외음부의 윤곽을 보일 듯 말 듯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한편으로 남성들은 부드러운 털과 바깥 주름으로 된 현관을 뚫고, 더욱 깊숙이 감추어진 내부 생식기인 질이라는 신성한 본당에 도달하기를 갈망한다. 따라서 여성이 내면과 융합된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남성들은 볼 수 없는 것을 원하며, 따라서 그들은 우리가 아마도 새치름하게 자신의 해자(垓子)를 기쁘게 생각한다고 가정한다. 여성은 그릇이자 단지이자 동굴이자 사향 냄새 풍기는 정글이다. 우리는 암흑의 신비이다! 우리는 숨겨진 습곡이자 제1의 지혜이며, 언제나, 언제나 생명을 배고 생명을 낳았다가 다시 생명을 자신의 축축한 어둡고 신비한 주름 속으로 빨아들이는 자궁이다. 존 업다이크는 이렇게 썼다.


따라서 이 제1의 근원으로 돌아간 남성의 성은 존재의 샘에서 물을 마시고 

사향 냄새 풍기는 영역으로 들어가며, 그곳에서는 신화상으로 위가 아래이며 죽음이 삶이다.


하지만 자매들이여, 우리가 컵과 병이며 용기와 상자인가? 우리는 자궁이라는 거미줄 안에 웅크린 채 천체를 짜는 거미인가, 아니면 은밀한 지하에 살고 있는 눈먼 거미인가? 우리는 그렇게 내밀하고 신비스러운가? 헤카테〔그리스 신화에서 천상과 지상, 지하계를 다스리는 여신〕여, 그렇지 않다! 남성들과 별 차이가 없다. 사실 남성들은 스스로를 외면화하여 자신들의 몸 너머의 세계로 밀어 넣고 그곳에서 빼낼 수 있는 듯이 보이는 페니스를 갖고 있지만, 페니스가 그들에게 주는 감각은 클리토리스가 우리에게 주는 감각과 마찬가지로, 근사하고 내면적이며 포괄적인 것이다. 발가락 소유자의 성별이 어떻든 간에 발가락조차도 오르가슴을 느끼지 않는가? 남성의 정소(精巢)는 노출되어 있는 반면, 여성의 난소(卵巢)는 엉덩이뼈 맨 아래쪽에서 약간 올라온 안쪽에 갇혀 있다. 하지만 두 기관은 자신들의 산물을 방출하고 내부적·내분비학적, 또한 번식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남성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보편 정신이라는 우화에 사로잡힌 채 이상 속에 살고 있다.


그런 한편으로 우리는 물론 남성들도 우리 내부의 신체가 매순간에 무엇을 하는지, 즉 간과 심장과 호르몬과 뉴런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모든 강력하고 내밀한 유기 활동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결코 남성이나 여성이나 어느 누구에게든 신비스런 분위기를 주는 것은 아니다. 나는 췌장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나는 수수께끼이다.


심지어 여성이 지하 마법사라는 개념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사건인 임신 동안에도, 그 어머니는 자신의 위대한 암흑 마법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때가 있다. 임신 말기에 머리가 몽롱해서 앉아 있을 때 내 아기가 뱃속에서 쉴새 없이 꼼지락거리던 것이 기억난다. 하지만 아기가 행복한지, 불안한지, 지루한지는커녕, 발로 차는지, 팔꿈치로 찌르는지, 탄력 있는 양막에 머리를 들이박는지도 전혀 몰랐다. 양수 검사를 하기 전에도, 나는 여성적인 것인지 모성적인 것인지 파충류적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 직관으로 태아의 성(性)을 파악했다고 확신했다. 진정한 본능적인 감정이었는데, 그것은 소년처럼 툴툴거렸다. 나는 연한 감청색을 띤 난자 꿈을 꾸다가 그 상징이 지닌 생경한 의미에 당황해서 깨어났다. 적어도 통상적인 해몽에 따르면, 그것은 엄마가 사내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양수 검사 결과는 달랐다. 그는 여자였던 것이다.

여성의 몸을 신비와 성스러운 내밀한 공간과 같은 차원에 놓으면, 온갖 어리석은 생각들이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우리는 밤과 대지는 물론 오래된 할리우드 뮤지컬에 나오는 신나는 무도회처럼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순환성을 그토록 능숙하게 따르는 달과도 연관을 맺게 된다. 우리는 배란과 함께 차고, 피와 함께 기운다. 달은 우리를 끌어당기고, 우리의 자궁을 당기고, 생리 때 복통까지 안겨준다. 친애하는 귀부인들이여, 보름달이 뜨는 밤에 울부짖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지는 않는가? 아마 그럴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보름달은 너무나 아름답다. 수평선 근처에서 젖이 흐르는 젖가슴처럼 약간 흐릿하게 번져 있을 때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기쁨에 젖어 울고 싶은 이런 욕망은 탐폰을 사야 할지 여부와 거의 관계가 없다. 사실 우리 중 대부분, 말하자면 생리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생리 주기가 달 순환 주기의 어느 시기에 해당하는지도 잘 모른다. 그러나 과장 섞인 주장들은 떨쳐내기가 쉽지 않고, 우리는 여성을 식품 용기의 성분 표시처럼 지겨울 정도로 교묘하게 묘사한 말들과 계속 마주친다. 카밀 패글리아가 《성적 페르소나》에 쓴 것처럼 말이다.


자연의 주기는 여성의 주기이다. 생물학적 여성성은 같은 지점에서 시작되고 끝나는, 순환 반복의 연속이다. 여성은 자연의 순환을 초월하거나 그 역사에서 달아나는 꿈을 꾸지 못한다. 여성 자신이 그 순환이니까. 그녀의 성적 성숙은 차고 기우는 주기를 가진 달과의 혼인을 의미한다. 고대인들은 여성이 거절할 수 없는 약속 시간이 표시된 자연의 달력에 매여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유 의지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녀는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받아들이는 것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녀가 모성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자연은 그녀에게 출산 법칙이라는 경직된 야만적인 리듬을 멍에로 씌운다. 월경 주기는 자연이 원하기 전까지는 끌 수 없는 자명종이다. 달, 월, 월경. 그것은 같은 말이자 같은 세계이다.


아, 그렇다. 어원은 때로 진리의 심판자이다.
나, 그리고 아마도 당신들, 나의 자매들이 오래전에 끄집어내서 갈기갈기 찢어 불태웠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구린내 나는 진부한 표현들이 최근에 부활한 것을 보면서 여성들은 너무나 놀랐고, 사실상 미칠 지경이다. 오랫동안 생물학과 진화를 다룬 글들을 읽고 써온 나는 ‘과학’이 당나귀 꼬리처럼 우리의 그녀라는 과녁에 꽂힌〔눈을 가리고 당나귀나 말 그림에 꼬리를 다는 놀이〕 그 자리에 경직된 현실주의 담론이 풀칠되는 방식에 솔직히 신물이 난다. 나는 여성이 그 모든 낡은 헛소리들과 실제로 어떻게 같은가를 말하는 진화심리학이나 신다윈주의나 성(性)생물학 관련 책들을 읽기가 싫증이 난다. 우리가 남성들에 비해 미적지근한 성적 충동을 갖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일부일처제에 더 목말라하며, 냉엄한 성 투기장의 바깥에 있으며, 성취와 명성에 비교적 관심이 없으며, 행동하기보다는 그냥 있는 것을 더 좋아하며, 조용하고 자족적인 본성을 갖고 있으며, 더 ‘다정다감’하며, 수학적 능력이 떨어지는 등 흐리멍덩한 크로마뇽인 조상들이 갖고 있었을 기타 등등의 특징을 보여준다는 책들 말이다. 나는 진화적 설명이 어떻게 그런 것들을 여성의 본성이라고 말하는지, 어떻게 우리가 그 이야기들을 고지식하게 꿋꿋하게 웃으면서 마주 대해야 하는지 듣기가 지겹다.


나는 나의 페미니스트적 여성 옹호 신념이 ‘현실’을 보고 ‘사실’을 인식하는 데 장애가 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듣는 것도 마찬가지로 지겹다. 나는 동물성을 사랑하고, 생물학을 사랑하고, 몸, 특히 여성의 몸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지겹다. 나는 뇌가 침울해지거나 거만해질 때 몸이 뇌를 정신차리게 만드는 것을 사랑한다. 하지만 타고난 여성성이 어떻다고 현재 떠들어대는 이야기들 중에는 너무나 빈약하고 불완전하고 부정확하며, 너무나 놀랍게도 실제 증거가 전혀 없어서 나만이 아니라 다른 수많은 여성들에게도 거짓말처럼 들리는 것들이 많다. 그 여성들은 과학이 자신들에게 말하는 것 그리고 자신들에 관해 말하는 것을 대개 무시한다.


그런 한편으로 다윈주의와 여성다움의 생물학적 견해에 반대하는 표준 주장들도 몸, 아니 적어도 몸이 행동에 미친 영향을 부정하는 태도에 근거를 두고 선언되곤 하므로, 반드시 성공을 거두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몸에 의지하지도 이따금 몸으로부터 몇 가지 정보를 얻는 것조차도 하지 않은 채, 우리의 삶을 통해 심리영성적으로 재생할 수 있는 순수한 정신, 순수한 의지인 것처럼 본다. 다윈주의와 생물주의를 비판해온 사람들 중에는 슬프게도 대개 나 스스로 끼려 애쓰고 있는, 고매하고 반드시 있어야 할 시민들인 페미니스트와 진보주의자들이 많다. 알다시피 수동적인 여성이라는 신화를 공격하거나 남녀의 수학 재능에 어찌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구들을 공격할 때처럼, 그 비판가들의 비판은 때로 정당하다.


그렇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뿐일 때, 그들은 실망시킨다. 그들은 결점을 집어내고 투덜거리고 거부한다. 호르몬은 중요하지 않다, 욕구는 중요하지 않다, 냄새와 감각과 생식기도 중요하지 않다. 몸은 결코 운전사가 아니라 탈것일 뿐이다. 모든 것은 배우고, 모든 것은 사회적으로 구성되며, 모든 것은 문화적 조건 형성의 결과이다. 또 비판자들은 인간이 특수하다는, 즉 아마 더 나을 수도 있고 더 나쁠 수도 있겠지만 진화의 다른 수공예품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암묵적인 전제를 갖고 일한다. 그들은 다른 종을 연구해봤자 우리 자신에 관해 배우는 것은 거의 없으며, 특히 우리 여성들은 잃을 것이 많다고 한다. 어쨌거나 우리가 실험용 암컷 생쥐에 비교됨으로써 언제 혜택을 받은 적이 있었나? 사실 우리는 다른 종을 연구함으로써 우리 자신에 관해 꽤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물론 우리는 그렇게 한다. 당신이 다른 동물들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행동 속에서 당신 자신의 단편들을 보지 못한다면, 당신은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다. 그렇지 않을까?


나로 말하자면, 다른 동물들로부터 배우고 싶어하는 쪽이다. 나는 초원의 들쥐에게서 가능한 한 친구들과 꼭 붙어 자고 서로 사랑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불변의 논리를 배우고 싶다. 나는 빈둥거리는 일에 전문인 내 고양이들에게서 숙면을 취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 나는 우리의 보노보 자매들인 피그미침팬지에게서 생식기끼리 문지르는 법 외에 논쟁을 평화롭고도 유쾌하게 해결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 그리고 나는 수컷들이 더 크고 더 강함에도 불구하고, 보노보들이 수컷에게 방해받지도 않고 심지어 시달리는 일이 거의 없이 서로 붙어 다니는 암컷들에게서 자매애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싶다. 여성들이 갖은 수를 써서 성폭력, 아내 학대, 강간 같은 문제를 대중의 눈앞에 그리고 의회 앞까지 끌고 온 것은 끈질기고 조직적인 자매애적 활동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었던 일이며, 보노보 암컷들은 이미 오래전에 자신들의 원시적인 인식 방식을 통해 그 모든 것을 이루어냈던 것이다.


나는 우리가 다른 종, 우리의 과거, 우리의 일부로부터 배울 수 있다고 믿으며, 그것이 바로 내가 이 책을 여성성의 과학적 환상곡으로 쓴 이유이다. 우리는 과학에게 쉽게 학대당할 수 있는 만큼, 과학을 우리의 목적에 맞게 사용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을 고양시키거나 즐겁게 하기 위해 과학을 사용할 수 있다. 계통학, 발생학, 유전학, 내분비학 등 이 모든 것을 그러모으는 나는 뜨내기 협잡꾼이다. 나는 여성의 염색체, X염색체라고 불리는 거대한 염색체를 샅샅이 뒤지고, 그것이 왜 그렇게 큰지, 그것이 어떤 눈에 띄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지(사실 지니고 있다) 묻는다. 나는 여성들의 생식기는 왜 그런 식으로 냄새를 풍기는지 묻는다. 나는 수유, 월경, 사춘기, 폐경기 등등 여성 생애의 특정 시기에 일어나는 화학적 변화들을 탐구하고, 각 시기가 어떻게 단조로운 신체의 항상성을 파괴하여 선명함, 즉 감각을 예민하게 할 수 있는지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닫힌 계가 아니라 지역 사회라는 용액 속에 떠 있는 것이므로, 몸이 어떻게 외부에서 오는 화학 신호들을 빨아들이며, 세계를 흡수하는 그 행동이 어떻게 우리의 행동을 뒤흔드는지, 말하자면 영감이 어떻게 계시가 되는지 묻는다. 이 책은 대체로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난자라는 치밀하고 가시적인 것에서 사랑이라고 부르는 몹시 달콤한 감각의 늪으로 나아간다. 전체적으로는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앞부분은 몸의 구조, 우리 해부 구조의 서술 대상들을 다루고, 뒷부분은 몸의 체계, 즉 호르몬과 신경처럼 우리 행동과 열망의 토대가 되는 것들을 다룬다.


나는 이 책이 담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몇 마디 하고 싶다. 이 책은 성 차이의 생물학, 이를테면 남성과 여성이 얼마나 비슷하고 다른지 같은 것을 다루고 있지 않다. 이 책은 필연적으로 남성과 수컷의 생물학을 많이 참조한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타자와 비교하는 방법을 통해 우리 자신을 정의하며, 가장 가까이에 있는 타자는 당연히 남성이다. 그렇지만 남녀가 행복한 사건이나 쇼핑 목록을 떠올릴 때 뇌가 반짝이는 부위가 서로 다르다거나, 그런 차이들이 당신이 서로의 관계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고 싶어할 때 그가 하키 경기를 보고 싶어하는 이유가 될지 모른다는 식의 연구를 깊이 탐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학술적인 적성 검사 점수로 남녀를 비교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쪽 성이 후각이나 방향 감각이 나은지, 천성적으로 남에게 방향을 묻지 못하는지도 묻지 않을 것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이 자신들이 상정한 남녀의 번식 전략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내놓은 주장들을 일부 규명하고 있는 18장에서도 나는 성 차이를 둘러싼 논쟁보다는 여성의 본성을 보는 진화심리학의 빈약한 관점에 도전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즉 이 책은 두 성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의 최전선에서 보내온 책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여성을 다룬 책이다. 그리고 비록 여성들뿐 아니라 남성들도 이 책의 독자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이지만, 나는 이 책의 평균에 해당하는 독자가 여성gal이라고 가정하고 쓸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내키는 대로 gal이라는 단어를 쓸 것이다. 이유는 그 단어를 내가 좋아하고, 모든 증거와 상관없이 그 단어가 곧 다시 유행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이 책은 실용적이지 않다. 이 책은 여성 건강의 지침서가 아니다. 나는 할 수 있는 부분에서는 과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나 정확성을 기했지만, 논쟁의 여지가 있는 부분에서는 내 견해를 고집했다. 에스트로겐이 그 예이다. 이 호르몬은 내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이다. 그것을 찬미한 장에서 보여주려 했듯이, 에스트로겐은 한 편의 교향시이다. 하지만 에스트로겐은 한쪽에 삶과 뇌 기능을 간직하고, 다른 한쪽에 죽음을 간직한 야누스의 얼굴을 한 호르몬일 수도 있다. 유방암의 근원이 무엇이든 간에, 그 병은 에스트로겐을 매개로 할 때가 종종 있다. 따라서 나는 여성에게 할당된 몫만큼 그것을 갖고 태어났다는 것에 기뻐하긴 했지만, 그것을 보충하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나는 절대 피임약을 먹지 않으며, 적절한 지면을 통해 말한 바 있지만 에스트로겐 대체 요법도 거부한다는 생각을 절대 바꾸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모든 흑인 여권 운동가들을 부화시킨 책이자, 결코 어설프게 모방해서는 안 될 놀라운 선구적인 저서인 《우리의 몸, 우리 자신》의 부산물이 아니다.


이 책은 ‘여성을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루고자 한다. 하지만 나는 집어넣지 않은 블라우스 자락처럼 펄럭거리는 내 편견과 인상과 욕망을 통해 서투르고 색다르게 여성성이라는 주제의 변죽을 울릴 수밖에 없다. 물론모든 여성은 자신이 주는 것들과 받는 것들을 바탕으로 삼아 자신을 여성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판단을 내려야 한다. 나는 몸이 어떻게 그 대답의 일부인지, 의미와 자유로 나아갈 길을 가르쳐주는 지도가 되는지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하버드 의대의 메리 카슨은 생물학적 지식을 활용해 우리의 심리적 상처를 치료하고, 두려움을 이해하며, 우리가 가진 것들의 대부분과 우리를 소유하고 우리를 사랑할 사람들의 대부분을 만들어내는 것을 ‘해방 생물학’이라고 불렀다. 탁월한 표현이다. 우리는 해방을, 영속적인 혁명을 원한다. 여태껏 우리가 살아온 궁전의 문 앞보다 봉기를 일으키기 더 좋은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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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어렵다.

누군가 나에게 친근함을 표현하면 피하고 싶고,

때로는 그게 귀찮아서 무시하고 싶다.

혼자 공부하거나, 홀로 살아갈 수 있는 기술을 배울 때 안정감을 느끼고,

배운 지식이나 기술로 남들에게 인정도 받는다.

그러나 왠지 외롭고 이유 없이 모든 것이 불안하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한다.

만약 내게 영혼이 있고, 신이 있다면,

얽매임이 가득한 세계로부터 내 영혼을 구원하여 주었으면 좋겠다.

 

이런 나는 어떻게 편해질 수 있을까?


만약,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불편하고 불안하다면, 그런 마음의 장점은 무엇이고 무엇을 참고 해야 하는지 심리학 책  불안의 심리》의 내용을 만나보세요. 



사람은 누구나 독특한 개인이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다른 사람과 바뀔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

그러나 함께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한다.

그런데 이 인간적인 관계를 벗어나고 싶고,

인간적 관계가 두렵고 불편한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아무도 필요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얽매일

일이 없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누군가 자기 삶의 영역에 들어오면, 자기가 사라질 것 같은

극심한 불안을 느끼고 방어하는 태도를 보이게 된다.



1. 다른 사람들이 비인간적이라 느낄 정도로 개인적인 관계를 피한다.

2. 때로는 이해도 공감도 할 수 없는 이유로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3. 호의, 호감, 다정함 같은 느낌을 위험하다고 느낀다.

4. 사랑이라는 관계를 맺는 것을 종속되었다고 느끼기도 한다.

5. 비인간적 태도가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 남을 겁주기도 하고

6. 관계 없이 혼자 할 수 있는 학문에 관심을 가지기도 한다.

7. 심한 경우, 자신만의 상상이 진실이라 믿는 망상에 시달리기도 한다.



요약하면, 다른 사람들과의 정서적 애착이 결핍되어

다양한 감정을 다스리거나 표현할 수 없다.

그런 사람에게 표현이란 흑백만 존재하는 듯하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인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관계 맺기가 두렵거나 불편해 고독과 고립을 찾는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외로움에서 오는 불안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에게도 장점이 있다.

독보적인 자립성과 독립성,

자율적인 삶을 살아갈 용기,

현상이나 사물을 수식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용기,

진짜가 아닌 겉치레를 용인하지 않는 자세 등

이런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보호하고 자율적인 삶을 향하는 반대 지점,

즉 타인에 대한 헌신의 측면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인간적 애착에서 멀어져

자신을 병들게 하는 고립에 내몰리지 않게 해야 한다.

 

인간이 홀로 있다는 건 좋지 않다.’

 

애착이 없는 사람은 너무도 쉽게 비인간적이 된다.


용기, 신뢰, 사랑, 희망과 같은 힘은
불안에 맞서기 위해 개발되는 힘이다.


불안한 마음에 관한 최고의 심리학
프리츠 리만, 《불안의 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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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하는 독자 리뷰 읽기

http://goo.gl/2gamC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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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콤플렉스, 무의식...
마음의 어디까지 이해하여 보셨나요?

융 심리학의 최고 전문가 머리 스타인 박사가

'융의 영혼의 지도'를 30년 가까이 연구해 저술한

융 심리학 입문서, 《융의 영혼의 지도》로

마음의 9가지 영역을 이해하여 보세요.

도서소개 먼저 읽기 : http://goo.gl/RpLDe4


 

 

도서요약 1편. ‘나’라는 자아 


아래의 내용은 《융의 영혼의 지도》를 읽고 문예남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진 것과 이해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학문적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경우, 의견을 주시면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영혼으로 들어가는 입구 – 자아와 의식

“의식이란 자각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며, 이 중심에는 ‘나’가 자리하고 있다. 자아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출발점이고,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광대한 내면 우주로 들어가는 입구 역할을 한다.”
p. 23

누구나 한 번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시간이 옵니다. 이런 고민이 들면, ‘자아’라는 단어를 생각하게 되거나 듣게 되죠. 자아를 발견해야 한다거나, 자아를 찾는다거나 혹은 자아 존중감을 가져야 한다거나 하면서 말이에요. 아무튼 흔히 ‘나’를 말하는 단어이기도 하고 심리학에선 에고ego라 말해지기도 하는 이 ‘자아’를 알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자아가 정말 ‘나’라는 사람의 개성을 나타내 줄 어떤 완성된 존재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아는 의식을 선택하는 존재

“자아라는 말은 의지, 욕망, 성찰, 행동의 중심으로서의 자신을 체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p.26

자아라는 것은 의식의 중심에서 질문을 던지고 사람을 행동하게 해주는 존재라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으로 찾으려는 ‘나’가 자아라기보다 ‘나’로 하여금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는 존재가 자아에 더 가까운 것 같네요.

^^

《융의 영혼의 지도》에선 자아를 영혼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로 의식의 거울이나 의식의 중심에서 경계를 만드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수많은 생각 중 자신이 의식할 것을 선택하거나 무의식에 넘길 것을 선택하는 존재에 가깝다는 것이죠. 이를테면 탄산음료가 마시고 싶다면 콜라와 사이다를 의식하게 하고 나머지 음료는 눈에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죠. 자아가 의식할 대상을 선택하는 일은 인간을 다른 생물과 구분하게 해주고, 개성을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다만, 그런 행위에 도덕적인 판단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네요.(어쩐지 무심한 사무직 관리 같네요.^^a)

그러나 만약 자아가 약하면 감정적 반응에 쉽게 굴복하여 선택하고 집중해야 할 의식을 쉽게 놓치기 때문에 집중력을 유지하기 어렵게 된다고 합니다. 또한 의식에 집중할 수 없으니 동기부여를 지속적으로 할 수 없어 행동의 지속성 또한 가질 수 없게 된다고 하구요.

 

선천적으로 자아가 약한 분들도 있고, 강한 분들도 있습니다. 저자 머리 스타인에 따르면 자아는 태어나면서 부여된 것이니까요. 《융의 영혼의 지도》는 어떤 자아가 우수한지, 혹은 어떤 자아가 오늘날 더 잘 수 있는지를 논하는 책이 아니므로 이 부분은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개인적인 성장 환경과 그리고 문화적인 요인에 따라 누군가는 선천적으로 힘들게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서로 이해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은 남기고 싶네요.^^

아무튼 자아는 타고난 재량에 맞게 의식을 관리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이 역할 때문에 자아를 지성과 감정이나 의지를 갖춘 완전한 인간(전인적 인간)이라고 해선 안 됩니다. 더불어 사람들은 어른이 되면서 어떤 시험을 받거나 도전을 하기도 하는데요. 이렇게 자아를 통제하는 것을 우리는 흔히 자유의지의 실현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어떤 목적을 위해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할 말 등을 참는 행위는 자유의지와 동의어는 아니라고 합니다.

 

자아의 성장

“융에 따르면, 자아가 성장하도록 하는 것은 ‘충돌’이다. 다시 말해 이 충돌은 갈등, 곤경, 고뇌, 슬픔, 고통 등을 의미한다. 이들은 자아가 발달하도록 해준다. 사라이 신체적·정신적 환경에 적응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 요구되는데, 이러한 요구 사항이란 의식의 잠재적 중심을 이용해 이 의식의 기능적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p. 45

여기서 이야기를 다시 처음으로 되돌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을 언제 하시나요? 아마 환경이 변할 때 하실 것 같습니다. 특히, 뜻대로 주변 상황을 통제할 수 없고, 자신의 마음조차 뜻대로 할 수 없을 때,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을 새삼 던지게 됩니다. 즉, 자아가 위기를 맞이했거나 성장이 필요한 때에 그런 질문을 하지요.

앞의 인용문에서처럼 자아의 성장은 ‘충돌’을 통해 가능합니다. 충돌에는 갈등, 곤경, 고뇌, 슬픔, 고통 등이 있구요. 이런 경험은 자아가 의식을 관리하는 능력을 강화시켜 줍니다. 의지를 실행에 옮기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죠. 고생은 사서한다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요. 머리 스타인의 설명으로 해석하면, 고생을 많이 할수록 의지가 강해진다는 뜻이 되겠네요. 하지만 이런 ‘충돌’이 자아가 충분히 성장하지 않은 어릴 적에 찾아오게 된다면 정신적 외상이나 해리성 장애(하단에 추가 설명)를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자책을 부르는 자아의 성장

“‘자아를 통제하고 자유의지를 성취했다는 착각 속에 사는 경향이 있다. (...) 자아가 내부에서 얼마나 많이 통제받는지에 대한 자각은 거의 없는 편이다. (...) 인생 후반기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비로서 자신이 최악의 적, 가장 냉혹한 비판자, 가장 가혹한 임무 부과자임을 점차작으로 자각하게 된다. 운명이란 외부에서 명령 받을 뿐만 아니라 내면에서도 하달된다.”
p. 51

 

머리 스타인은 사회생활이 길어지고 나이가 들수록 자기 자신을 적으로 여기거나, 자신의 무능력을 탓하기 쉽다고 합니다. 자책은 자아가 ‘충돌’을 경험했을 때, 외부의 현실이나 내부의 정신을 통제하지 못했을 때 찾아오게 되는데요. 사회생활이 오래된 사람일수록 자신의 노력으로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더 많이 경험하고, 그 결과 더 쉽게 자책하게 됩니다. 

스타인 박사는 많은 사람들이 자책의 원인을 외부에서 발견하지만, 내부에서 그 원인을 발견하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라고 합니다. 자아는 분명 우리의 의식 중에서 의식할 것을 선택한다고 했지만, 꼭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이런 경험은 수없이 많이 했을 겁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을 떠올린다거나, 무의식 중에 실수를 하는 행위가 내부의 정신을 통제할 수 없는 경우에 해당합니다. 이런 경우에도 우리는 쉽게 자책을 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자아가 ‘충돌’을 경험하면서 성장을 할수록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콤플렉스를 가질 확률이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만약 자기 자신을 좀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한다면 콤플렉스가 작동하는 원리와 콤플렉스의 거주지인 무의식을 이해할 필요성이 생기게 되는 것이죠.

“사람들은 자기들이 외부 세계를 통제할 수 없음을 깨닫기는 하지만, 외부 세계는 물론 내부 정신의 과정들도 자아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은 극소수뿐이다. (...) 이제 우리는 무의식의 영토로 들어갈 준비가 되었다.”
p. 53~54

그럼 다음 도서 요약에서는 내면의 거주자 무의식 속의 콤플렉스로 다시 인사 올리겠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융의 영혼의 지도》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해리에 대하여

《융의 영혼의 지도》에서는 해리에 대하여 아주 쉽게 설명을 해줍니다. 우리는 평소에도 수없이 해리를 경험하고 있는데요. 예로 운전을 하면서 라디오를 듣고 있거나, 걷고 있으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행위입니다. 어떤 행동을 하고 있을 때 자아가 행동을 의식하지 않고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있는 상태지요. 이런 상태는 의식과 자아가 분리된 상태이고 병리적이지 않은 해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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